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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무라이문화 국민서사 만들기 - 『가나데혼 주신구라(仮名手本忠臣蔵)』를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1호 2016.12 p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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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겐로쿠 사건을 서사화한 『가나데혼 주신구라』를 대상으로 47인 사무라이들의 사적인 복수가 공적인 가치로 회수되는 서사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겐로쿠 사건이 국민서사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내러티브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주신구라』는 실제의 겐로쿠 사건에 허구의 인물들과 주정적이고 감상적인 내용이 전체적으로 들어가 통속성을 만들어내고, 이는 ‘죽음’이라는 의식을 통해 다시 사무라이의 문화로 승화되어 일본인의 정신적 가치로 만들어지는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주신구라』의 내러티브가 통속과 기호, 그리고 죽음의 미학으로 만들어낸 사무라이 문화가 바로 겐로쿠 사건을 국민서사를 만들고, 국민서사로 자리 잡은 문예물은 미디어를 통해 기호화되고 구성되어 일상에서 문화 권력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신구라』는 일본의 문화담론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장치(cultural mechanism)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considers Chushingura written during the Edo period in Japan, and analyzes the narrative. Chushingura is the narrative text based on GenRoku Incident, which was the group revenge occurred by 47 Samurais to revenge their master's falsely charged death. The narration of Chushingura combined fictional characters and stories with the real incident. This fictional stories are mainly composed of emotional and sentimental commonness. And aesthetic of death of Samurai culture sublimate such commonness into the noble value. Narrative of Chushingura shows the mechanism through sign, symbols, and a aesthetic point of view. Through this process, Genroku incident was created into national narrative of loyalty. In this regard, the text Chushingura is the text showing the cultural discourse of Japanese Culture, and functions as the cultural mechanism.
本論文は、元禄事件を物語化した『仮名手本忠臣蔵』を対象に、47人のさむらいたちの私的な復讐が公的な価値として回収される機制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 元禄事件が国民物語として位置付けられているのは、人為的につくられたナレーションという点が多いに働いている。『忠臣蔵』は、実際の元禄事件に虚構の人物たちと、主情的で感傷的な内容が全体的に入って構成された通俗性をもって成り立っている。そして、こうした通俗性は、「死」という装置を通して、崇高なさむらい文化に昇華し、日本人の精神的な価値になったのである。『忠臣蔵』のナレーションが通俗と記号、そして、死の美学をもってつくりあげたさむらい文化が元禄事件を国民物語に築き上げたのである。こうした物語はメディアを通して、さらに記号化され、また、日常で文化権力として流通する。こうした意味から、『忠臣蔵』は、日本文化の文化装置(cultural mechanism)として機能しているといえる。
경쟁하는 사회 VS 투쟁하는 사회 - 가토 히로유키와 굼플로비치 간의 논쟁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1호 2016.12 pp.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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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히로유키는 『강자의 권리의 경쟁』(1893)을 독일어판본과 일본어판본의 두 가지로 동시에 출간했다. 이 독일어판본은 실제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이후 몇몇 신문들에 서평이 실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가토는 자기 이론의 독창성을 주장하며 반박하는 글을 몇 편 남겼다. 특히 그 중에서도 굼플로비치와의 논쟁은 주목할 만하다. 굼플로비치는 두 가지 점을 지적했는데, 하나는 그의 이론에 나오는 ‘인허’에 대한 논의, 다른 하나는 ‘우내통일국’에 대한 논의였고, 가토는 이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남겼다. 본 논문에서는 두 사람의 입장차이가 무엇보다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즉 사회 진화의 원동력을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경쟁’으로 보는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투쟁’으로 보는가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임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Kato Hiroyuki(加藤弘之) published "The Competition of the Rights of the Strong" (1893) to both German books and Japanese books. This German book was actually published in Germany, and has since been reviewed in several local newspapers. Approximately the evaluation was not very high, but Kato left several pieces of refutation claiming originality of his theory. Particularly noteworthy is the dispute with Gumplowicz. He pointed out two points: one was a discussion of 'tolerance' in his theories, and the other was a discussion of 'the country of the right wing', and Gato refuted this. In this paper, the difference between the positions of them is due to the difference in the viewpoint of the society, t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seeing the driving force of social evolution as 'competition with room for compromise' or 'struggle without compromise' and tried to explain its meaning.
加藤弘之は『強者の権利の競争』(1893)をドイツ語本と日本語本の両方に出版した。このドイツ語本は実際ドイツで出版され、以降幾つかの現地新聞に書評が載せられた。概ね評価はあまり高くなかったが、加藤は自らの理論の独自性を主張して反駁する文章を残していた。徳に其の中にもグンプロビッチとの論争は注目に値する。グンプロビッチは二点を指摘したが、一つは加藤の理論に出てくる'認許'の問題、もう一つは'宇内統一国'の問題であり、加藤はやはりこれに対しても反駁の文章を残している。本論文ではこの二人を中心に彼らの違いが何よりも社会に対する視線、即ち社会進化の原動力を'妥協の余地のある競争'とするか,それとも'妥協の余地のない闘争'とするかのちがいから起因したことを確認し、またその意味を窺おう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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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기생과 게이샤의 삶을 통해 한국사회가 기생을 보는 시각과 일본사회가 게이샤를 보는 시각을 고찰하고, 비교하여 그녀들의 아이덴티티를 밝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생은 신분사회에 엄격한 관리의 대상이었던 천민이면서 궁중의 행사와 연희를 담당했던 관기였다. 정조와 절개를 중시했던 유교사회이지만 양반 남성들을 위해 암묵적으로 성적유희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남성들은 기생을 멸시하면서도 곁에 두고 싶어했으며, 여성들은 멸시하면서도 질투의 대상으로서 경계했다. 공식적으로 결혼과 출산이 불가능했던 기생은 애첩이 되거나, 평생 결혼하지 않고 퇴기로 인생을 마감해야 할 운명이었다. 나이가 들어 인기가 없는 퇴기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다. 관기 이지만 봉급을 거의 받지 못했던 기생들은 애첩이 되는 것을 바라였다. 일본식민지시대 기생들은 일본의 법령과 제도에 의해 조선시대의 기생과는 다른 성격의 민간인의 신분으로 권번에 소속되었다.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모던기생으로서 활발한 예능활동을 하게 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사회적인 시선은 변함없이 멸시했고, 차가웠다. 일본의 게이샤는 에도시대 유행하던 유녀가부키를 유곽에 도입하면서 샤미센 연주자가 필요하여 등장하게 된다. 게이샤는 유곽 연희의 보조역할을 담당했던 전문예인이었다. 기생과 달리 게이샤는 일반인의 신분으로 자유의지로 게이샤가 되었기 때문에 강제성은 전혀 없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하나마치(花街)의 형성으로 오키야, 오차야, 요리점, 권번 등과 같은 삼업조합이 형성되고, 뇨코바에서 교육받고, 가부렌조에서 공연하며 게이샤로서의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메이지 시대에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오키야의 주인에게 양녀를 들이는 형태로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금전관계가 형성됐다. 빚을 갚기 전에는 오키야를 나올 수 없는 시스템이므로 게이샤는 패트런은 있지만 결혼은 할 수 없었다. 일본사회는 게이샤가 메이지 시대에 잠시 양녀로 들이는 형태의 고용계약으로 맺어진 금전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있지만, 일본사회가 게이샤를 보는 인식과 시각은 전문예인이었으며, 전문직업여성이었다. 게이샤는 손님의 아내들에게 존경을 표했다. 아내들은 게이샤와 남편과의 관계를 사업과 사회적 성공에 기여하는 직업여성으로 간주했다. 일본 여성들은 아내와 게이샤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각자의 역할이 다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질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사회는 게이샤를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모던 게이샤가 활발하게 예능활동을 했을 때도 게이샤들은 전통을 지킬 수 있었으며 전통문화를 지키는 게이샤로 오늘날까지 이어 온 것이다. 게이샤에 비해 기생은 『소수록』과 『장한』과 같은 자료들과 같이 스스로의 목소리와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identities of Gisaengs and geisha. It compares viewpoints of Gisaengs in Korean society with geisha in Japanese society and contemplates of their life; they were not free from social attention. Gisaengs in Joseon Dynasty were the official disciplines in charge of the national feasts and performances. While they were the lowest class under the management of the rigid status system. Gisaengs had no choice but to offer sexual amusements for men despite Korean Confucian society attached great importance to one’s chastity and integrity. Men considered gisaengs as the snoots but wanted to leave gisaengs beside them. On the other hand, the women bewared against the gisaengs and were jealous them. Officially, gisaengs who were impossible to get married and have a child had a destiny to be a mistress or the retireds without marriage forever. When the gisaengs got older, they lost their popularity and retired. The retireds’lives were tough economically. They hope to be a mistress since they could not take salaries even though they were official disciplines Gisaengs became in the citizen classes belonging to the Gweon-beon (a gisaeng call-office) by statutes and institution of Japan. It was a different social class from Gisaengs in Joseon Dynasty. People look down upon Gisaengs constantly. The society also was cruel. In the case of geisha, monetary relations were formed with them. It was an employment contracts; young girl was sold by their parents in childhood as a stepdaughter of Okiya. Geisha was able to get married but have a patron because of inescapable system from Okiya if they were under all the loans unpaid back. They were able to work after marriage and showed respect to wives of their patron. The patron’s wives deemed the geisha as a career woman to contribute social and business success. Japanese women were not jealous about the relations between the wives and geishas and considered that they have a different role for each Japan believed they should hold the image of geisha formed by traditional society. Therefore, it was possible to keep and take their traditions over although modern geisha led the entertainmentthrough the influence of western culture. According to the documents such as 『So-hu-rok』 a book written the life of gisaeng 『Jang-han』 magazine published by gisaengs, Gisaengs expressing a voice and passion themselves positively have a different character against the geishas.
本研究の目的は、社会的視線から自由ではなかった妓生と芸者の暮らしを通して韓国社会が妓生を見る視角と、日本社会が芸者を見る視角考察し、比較して彼女たち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ある。 朝鮮時代の妓生はな身分制社会において厳格な管理の対象であった賎民であり、宮中の様々な行事や宴会を担当していた官妓であった。儒教社会ではあるが、両班男性たちのため、暗黙的に性的遊戯を提供させられて肉体的な搾取を受けた。男たちは妓生を蔑視しながらも、身近に置こうとし、女性たちは見下しながらも嫉妬の対象として警戒した。正式の結婚と出産ができなかった妓生は愛妾になるか、一生一度の結婚なく退妓になるかだった。歳をとって人気がなくなった退妓たちは経済的に厳しい生活を送った。官妓であっても俸給が殆どなかった妓生たちは愛妾になることが願いであった。 日本植民地化の妓生たちは日本の法令と制度によって朝鮮時代とは異なる性格の身分で、券番に所属し、西洋文化の影響でモダン妓生として活発な芸能活動をした。しかし、時代が変わっても社会的な視線は変わらず、冷たくて厳しかった。 日本の芸者は、江戸時代に流行した遊女歌舞伎を遊郭に導入し、舞台に上げる際、三味線の演奏者が必要となって登場した。遊郭の宴会の補助の役割を担当する専門芸人であった。妓生と異なって芸者は町人の身分で自由意志で芸者になったため、強制性がなかった。明治時代になって花街が出来てから置屋、料理屋、見番などの三業組合が形成され、女工場で教育を受け、歌舞練場で公演をしながら芸者としての位置付けしていく。 明治時代に年季奉公の雇用契約をして幼い女の子の身売りで置屋に入った芸者は金銭関係で結ばれていた。借金の返済が済まないと自由の身にならなかった芸者はパトロンは持っても結婚はできなかった。結婚をすると芸者の仕事はそれ以上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った。 日本社会は芸者が明治時代に養女にする形態をとって雇用契約に結ばれた事実はあるが、日本社会が芸者を見る認識は視線は専門芸人であり、専門職業女性である。芸者たちは客の妻たちに尊敬を表す。妻たちは芸者たちを夫との関係をビジネスと社会的成功に寄与する職業女性として見なす。日本女性たちが妻と芸者との関係についてお互いを女性の仕事を分担して相互補完的存在と考えてので、嫉妬しないのである。 そして、日本社会は芸者を伝統社会で形成されたものというイメージを徹底的に守っ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存在と考えており、西洋文化の影響でモダン芸者も活発に芸能活動していたが、彼女たちは 先駆者や革新者ではなく、伝統の守護者になった。伝統文化の芸者は今日に至るのである。
현대적 해석으로 본 『다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 -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의『가구야히메노 모노가타리(かぐや姫の物語)』의 파격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1호 2016.12 pp.7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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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다케토리모노가타리』에 대한 의문을 출발점으로 하여 『가구야히메노 모노가타리』라는 작품이 고전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다케토리모노가타리』에는 사실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숨겨진 이야기란 무엇인가? 『가구야히메노 모노가타리』와 원전(原典)과의 사이에서 확인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가구야히메의 어린시절의 유무로, 다카하타는 자유롭게 자연 속에서 뛰노는 가구야히메의 어린시절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의 도시생활로 바뀌면 그녀는 이러한 궁정문화에 의해 형성된 관습들이 전부 ‘가짜’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을 궁정문화라는 것으로 속박하는 허위적인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가구야히메의 자연과의 접촉은 『가구야히메노 모노가타리』의 프레임에 갇혀 있지 않은 그림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은 열려있는 자연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이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다카하타 감독이 의문시했던 가구야히메의 ‘죄’와 ‘벌’에 대한 해석도 『가구야히메노 모노가타리』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지상에 대한 동경과 그로 인해 더러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다카하타가 상상한 『다케토리모노가타리』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란 바로 인간세계에 대한 동경과 지상에서의 불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가구야히메의 지상에 대한 애정인 것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계급으로 인간을 차별하는 것이 대한 비판, 가구야히메의 현대적인 캐릭터, 그리고 3.11 원전사태로 인한 자연과 문명의 파괴에 대한 비판과 그래도 자연과 공생해야 한다는 의지가 바로 『가구야히메노 모노가타리』의 현대성이라고 하겠다.
In this paper we took the question about Director Takahata Isao’s The Tale of the Bamboo Cutter as a starting point and reviewed it focused on how the work of Kaguya hime no monogatari(The Tale of the Princess Kaguya) reinterpret the classic, what is the modern meaning it has. Director Takahata Isao imagines that The Tale of the Princess Kaguya, in reality, hides other story. If so, what is the hidden story? The biggest difference identified between Kaguya hime no monogatari and the original is the existence of the childhood of Kaguya hime, Takahata focuses on describing the childhood of Kaguya hime who romps liberally in the nature. However, when it is changed into city life in the latter half, the customs by this court culture are recognized all to be ‘false’. This will mean the criticism on the false human civilization restricting the human with the court culture. Such Kaguya hime ‘s contact with nature reveals itself also in the picture expression not confined to the frame of Kaguya hime no monogatari. This can be the method to express the theme of the work that human must get along with the open nature. And the interpretation as to Kaguya hime’s Crime and Punishment which Director Takahata questioned is revealed in the latter half of Kaguya hime no monogatari, and it longed for the ground and came to the dirty world owing to it. The story hidden in the backside of The Tale of the Bamboo Cutter Takahata imagined means just the longing for human world and unhappiness in the ground, nevertheless, Kaguya hime’s affection to the ground ‘to live there’. In the structure of above story, the criticism on the discrimination on human with rank, modern female image and the criticism on the destruction of nature and civilization owing to 3.11 Nuclear Crisis and the will that we must coexist, and these will be just the modern nature of The Tale of the Princess Kaguya.
本稿では高畑勲監督の『竹取物語』に関する疑問を出発点として『かぐや姫の物語』という作品が古典『竹取物語』をどのように解釈しているか、またその作品が持っている現代的な意味は何かに焦点を当てて考察してみた。高畑監督は『竹取物語』には、実はもう一つの物語が隠れていると想像している。それでは、その隠れた物語とは何か。 『かぐや姫の物語』と原典との間で確認される最も大きな相違は、かぐや姫の幼少期の有無で、高畑は自然の中で自由に遊び回る子供時代のかぐや姫を描くことに重点を置いている。しかし、後半部の都での生活になると、彼女には宮廷文化によって作られた慣習がすべて'偽物'であると認識されるようになる。これは人間を宮廷文化という名のもとで束縛する文明への批判であろう。 このようなかぐや姫の自然との接触は『かぐや姫の物語』のフレームに閉ざされていない絵の表現からも明らかにされる。これは人間はどこまでも開かれている自然と共に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の作品のテーマを表現するための方法であると言えよう。 また、高畑監督が疑問視したかぐや姫の罪と罰に関する解釈も『かぐや姫の物語』の後半において浮き彫りにされる。それは地上への憧れとそれによって汚い地上に降ろされたことである。高畑が想像した『竹取物語』に隠されたもう一つ物語とは、まさに人間世界への憧れと地上において体験した不幸、にもかかわらず、そこで生きていきたいというかぐや姫の地上に対する愛情である。 以上のような物語の構造から、人間を差別することへの批判、かぐや姫の現代的なキャラクター、そして、3.11による自然と文明の破壊に対する批判、それでも自然と共存していくべきであるとする意志が 『かぐや姫の物語』における現代性であると言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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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톨스토이의 비폭력 아나키즘이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사상과 운동의 측면에서 검토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문학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된 반면 그의 아나키즘은 부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20세기초엽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 원인으로는 유교 전통에 입각한 국가주의 등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난 1세기 이상 심각한 갈등관계에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비추어보면 톨스토이 아나키즘의 평화적 이용이 절실하다고 생각되어 톨스토이 아나키즘에 대한 재검토와 수용 당시에 빚어진 문제점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This paper's object is to study East Asian acceptance of Tolstoy's non-violence anarchism on the direction of thought and practice. Tolstoy was accepted positively as literature, but his anarchism was accepted negatively. Such tendency has been continued from the beginning of 20th century to late now. The cause is thought state nationalism on Confucianism. The peaceful use of anarchism is necessary to solve the modern East Asian international conflicts.
この論文はトルストイの非暴力アナキズムの東アジア受容を思想と運動の側面で檢討ずる. 東アジアでトルストイは文學の次元で肯定的に受容された反面, 被のアナキズムは否定的に收容された.そのような傾向は20世紀の初葉からいままでそのままである.その原因は儒敎の傳統にもどづいた國家主義などにあるようにおもわれるが, 1世紀の以上における深刻な葛藤の關係にある東アジアの國際情勢においてトルストイの非暴力アナキズムの平和的な利用が切實するのでトルストイの非暴力アナキズムの再檢討と受容の當時に生じた問題點を再照明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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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중심국가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지녀왔던 중국인들에게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자괴감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은 무력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어야만 했다. 심각한 민족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강유위(康有爲)를 대표로 하는 변법파들은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변법유신운동을 일으켜 국가를 부흥시키고 중국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당시 강유위는 근대국가 수립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가운데 부국강병과 근대계몽에 대한 구체적 방안들을 다양하게 제기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성해방론이다. 그는 중국이 약체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전족을 한 여인들이 육체적으로 약한 자손을 낳은 탓이며 또 하나는 여성에게 강요된 문맹과 세상사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이에 강유위는 여성문제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여 여성해방과 구국(救國)을 하나로 결합시켜 변법주장의 구성 요소로 삼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먼저 강유위의 변법론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 수립 등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변법사상과 페미니즘에 대한 연원을 알아볼 것이다. 다음으로 부국강종(富國强種)을 목표로 전개된 강유위의 페미니즘을 부전족운동과 여성교육 등으로 나누어 검토하고자 한다.
For the Chinese, who had a great pride in being the central nation of the world, the defeat of the Sino-Japanese War in 1894 came to the Chinese intellectuals with tremendous self-confidence and shock. After the Sino-Japanese War, China had to be forcefully divided by the imperialist powers. In the face of a serious national crisis, the constitutional representatives of K’ang Yu-Wei tried to revitalize the nation and seek the fate of China by raising a revolutionary movement such as the Meiji Restoration of Japan. At that time, K’ang Yu-Wei made various plans for the enlightenment of the rich countries and the modern enlightenment in the course of discussing the establishment of the modern nation in earnest. What is noteworthy here is the liberation of women. One of the reasons for China's weakening was that foot-binding women gave birth to physically weak offspring, and one was attributed to ignorance of illiteracy and world affairs imposed on women. K'ang Yu-Wei focused on the importance of women's issues and made women's emancipation and salvation united into a component of the Reform claim. Therefore, in this paper, I will try to research on the liberation of women based on the previous studies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a modern nation centered on K'ang Yu-Wei's Reform Idea. First, we will look at the reform ideas of K'ang Yu-Wei and the history of women's emancipation. Next, I will examine K'ang Yu-Wei's feminism, which was developed with the aim of becoming a rich nation and strong race, with the anti-foot-binding movement and women's education.
世界の中心国家という大きな誇りを持ち、きた中国人に1894年日清戦争の敗北は、中国の知識人たちに多大な自己恥辱感と衝撃に近づいてきた。日清戦争後、中国は武力に帝国主義列強によって分割されるべきだった。深刻な民族的危機に直面した状況で康有爲を代表とする変法派は日本の明治維新のような變法維新運動を起こし国を復興させ、中国の運命求めようとした。当時ガンユウィは近代国家樹立に関する議論を本格的に進行する中で富国強兵と近代啓蒙のための具体的な方策を多様に提起した。ここで注目すべきは、女性ヘバンロンである。彼は中国が弱体化した原因の一つは、纏足をした女性たちが物理的に弱い子孫を生んだせいで、もう一つは、女性に強要された文盲と世の中の無知のためだと考えられた。これガンユウィは、女性の問題の重要性に関心を傾けて女性解放と救國を一つに結合させて変法の主張の構成要素とした。したがって本稿では、まず康有爲の変法論を中心とした近代国家樹立などの先行研究をもとにして、彼の変法思想とフェミニズムの淵源を認識だろう。次に、富國强種を目標に展開された康有爲のフェミニズムを不纏足運動と女性の教育などに分けて考察する。
청일전쟁기 일본인의 戰爭觀과 조선인식 - 라프카디오 헌의 에세이와 대중매체를 통하여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1호 2016.12 pp.15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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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을 다룬 한국근대사의 연구 논조는 일관되게 일제의 침략성과 그 만행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 측의 연구논조는 이와는 다르다. 즉, 이 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왕비까지 살해당하는 등,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이러한 점을 주목하기 보다는 국제적인 역학관계를 통해서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인식은 현재에도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다. 왜 일본의 연구에서는 청일전쟁기에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미미한 것일까? 그것은 청일전쟁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근본적 인식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연구는 이러한 의문을 갖고 청일전쟁기 일본 대중의 전쟁관과 조선인식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글에서는 1890년대에 일본에 거주하며 청일전쟁기 일본사회를 관찰한 작가 라프카디오 헌의 두 편의 에세이와 당시 일본의 대중매체의 전쟁보도 양상을 주목하고자 한다. 라프카디오 헌의 「A Wish Fulfilled」와 「After the War」에서는 자신의 제자인 소년이 메이지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을 통해 결국 천황을 위해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군국소년으로 성장한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군국주의교육의 성과가 어떠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청일전쟁기 신문은 이 전쟁이 일본이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고 1894년 천황의 조서에는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라고 젊은 병사들을 선동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일전쟁 동안 일본에서는 전쟁 상황을 전달하는 대중매체가 봇물처럼 쏟아졌다. 전쟁보도화를 그린 니시키에(錦絵)가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연극, 디오라마, 자동인형극, 어린이 장난감, 각종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이 승전을 거둔 조선의 장소는 ‘명소’가 되어 승전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일본인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전쟁은 일본인들에게 ‘축제’처럼 이루어졌고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병사에 대한 애도, 유족의 슬픔에 대한 공감과 위로, 전쟁에 대한 분노나 격전지에서 학살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동정 등은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청일전쟁은 일본의 천황과 국민이 일체화되어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가적 도약을 이루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전쟁을 침략이라는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천황과 메이지일본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왕비까지 살해한 만행에 대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일본인의 전반적인 ‘불감증’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The study tone of the Korean modern history that took up Sino-Japanese War emphasizes aggression characteristics and the barbaric act of the emperor on a day throughout. But the study tone in Japan is different from this. In other words, much human life is killed and wounded in this war and the Queen of Korea was killed by a Japanese. Nevertheless Japan ignores the fact that they invaded Korea and they lift international dynamics relations and insist on legitimacy of the war. Besides it is a fact that such recognition is consistent so far from modern times and is insisted. Why is this? I want to consider this problem through outlook on Korea recognition of the Japanese public for the Sino-Japanese War period. Therefore, I want to attention to is two essays of Lafcadio Hearn(1850-1904). Hearn wrote essays as "A Wish Fulfilled" and "after the war" in 1895. He wrote about his pupil matured into a soldier by the militaristic education of Japanese Emperor system. The boy says that it is the heart's desire to die for the Emperor at the time of Sino-Japanese War and he was killed in war. This suggests what a result of the militaristic education of Japan in those days. The Japanese newspaper continued reporting that this war was the chance when did not have two when Japan could mature into the large country in the Sino-Japanese War period. Meiji Tenno ordered that sacrifice one's life for light and the authority of the empire for declaration of war. Under such situation, the public media which conveyed the war situation overflowed in Japan. The color woodblock print which painters exaggerated a state of the war and drew was popular with people. Other than drama, a diorama, an automatic puppet play, the child toy which featured the theme of Sino-Japanese War, various publications in admiration of war were popular. To Japanese public, this war was like the festival. The people did not have a heart to sympathize with for dead Korea and the Chinese people in war. Japanese newspapers did not have the antiwar tone either. Japan thought only that the Emperor Meiji and the nation won in war all in one body in Sino-Japanese War. It was the same as denying the whole Meiji Japan that people insisted on the war. In such an atmosphere, I think that Japanese frigidity to never feel crime awareness was born for the barbaric act to kill to a Korean queen.
日清戦争を取り上げた韓国近代史の研究論調は一貫して日帝の侵略性と蛮行を強調しているが日本における研究論調はこれとは違う。すなわち、この戦争で数多い人命が殺傷され、朝鮮の王妃まで殺害されるなど、朝鮮を侵略した事実が明らかであるにも関わらず、これに目をそらし、国際的な力学関係を持ち上げて戦争の正当性を主張している。延いてはこのような認識は近代から今まで一貫して主張されているのも事実である。これはどうしてであろうか。これについて、この研究では日清戦争期、日本大衆の戦争観と朝鮮認識を通して検討してみたい。 ラフカディオ․ハーンの 「念願成就」と 「戦後」というエッセーには自分の弟子の少年が1880年代の日本の天皇制的な軍国主義教育から鍛えられて、日清戦争の時に天皇のために死ぬことが願いであると断言する様子を描いた。これは当時、日本軍国主義教育の結果がどんなものであったかを私たちに示唆している。日清戦争期、日本の新聞はこの戦争が日本が大国へと成長できる二もないチャンスであると報道しつづけ,宣戦布告で明治天皇は忠実勇武の精神で帝国の光栄を完全にせよと命令した。 このような状況下で、日本では戦争状況を伝える大衆媒体が氾濫した。戦争報道画である錦絵が全盛期を迎え、日清戦争をテーマにした演劇、ジオラマ、自動人形劇、子ども玩具、戦争を称賛する各種出版物などが流行した。この戦争はフェスティバルのように行われ、死傷した兵士に対する哀悼や戦争によってなくなった朝鮮や中国の民衆に対する同情、反戦論調については言論は沈黙した。 日清戦争は明治天皇が国民と一体化になって戦争で勝利し、国家的な跳躍を成し遂げることにだけ焦点が合わせられていた。この戦争を侵略の観点で捉えること自体が天皇と明治日本の存在そのものを否定することを意味した。 このような雰囲気のなかで、朝鮮の王妃まで殺害する蛮行に対しても、全然罪意識を感じない日本人の不感症が生まれた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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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초기, 일본 근대국가 형성기에 활약한 여러 인물 중에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존재는 특이하며 또한 걸출하다. 모리에게는 문명개화와 서구주의의 기수, 절대주의의 화신, 근대 합리주의자, 국가주의자, 뛰어난 선각자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혹자는 일본이 낳은 서양인이라 했고, 혹자는 국체(國體)의 존엄을 모독한 적자(賊子)라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넘나들며 정치·종교·학술·산업·관습 등의 다방면에 걸쳐 개명적이고도 혁신적 사상을 피로하며 외교관료·계몽가·교육가·사상가로서 활약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의 자리에 올라 근대교육 제도 및 사상적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 근대교육 형성기에 있어 그가 남긴 족적은 실로 크다. 1880년 개정교육령(改正敎育令) 시행 이후 일본의 교육은 진리 탐구나 개성의 신장이라는 근대교육의 보편적 가치 실천보다는 ‘인의충효(仁義忠孝)’ 사상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주의적 교육정책을 강화해 나간다. 그리고 1890년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공포는 이를 공고히 하고 절대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의 개별 학교령(學校令)과 국가주의 교육사상, 그리고 그 실천이 갖는 교육제도사 및 교육사상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할 수 있다. 본고는 모리 아리노리가 교육을 통해 지향하고자 했던 근대 국민국가의 내실과, 국가주의 교육이란 말로 대표되는 모리의 교육사상 형성의 연원과 특징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리 아리노리의 사상 형성의 궤적과, 그의 사상이 교육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고, 병식체조(兵式體操)로 대표되는 사상의 신체화(身體化) 과정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모리의 국가주의 교육사상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인의 국가와 세계를 인식하는 특정적 사유체계 형성과 교육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e 1880 Education Order of Japan had reinforced Confucianism focused on ‘loyalty and filial piety’ rather than the universal educational values like seeking the truth or empowering individuality. Additionally, The Imperial message on Eduction in 1890 provided a crucial factor to the educational tendency of that era in Japan. Mori’s nationalism and the actions he had taken during those days are therefore one of indispensable parts which have to be investigated on the history of educational systems and thoughts. This essay is aimed to consider the basis and the feature of what Mori Arinori had sought through his thought and action represented by nationalism. How his nationalism had been established shall be examined at first, and the spectific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his educational scheme will be secondly examined. His thought was presented as a gymnastic form called ‘military gymnastics at that time. So I will check how this practical curriculum had derived from his educational thought in order to investigate what he had sought. Through the consideration of this dissertation, a tiny clue which can help to reveal the origin of recent Japanese’ scheme in terms of Nation-Stat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cheme and the educational history will be provided.
改正敎育令(1880)の施行以降、日本の教育は真理の探求や個性の伸長といった、近代教育の普遍的な価値の実践よりは、「仁義忠孝」思想を至極の徳目とする、儒教主義の教育政策を強化していく。そして「敎育勅語」の公布(1890)は、このような流れを固着させる決定的なきっかけとなった。そんな中、1885年、伊藤博文内閣の発足に伴い、初代文部大臣として、日本近代教育の礎を作ったと評価される森有礼の種別学校令と国家主義教育思想、それからその実践のもつ日本教育制度史及び教育思想史における意義は、さぞかし格別であると言えよう。 本稿は、森有礼が教育を通して追求した近代国民国家の内実と、国家主義教育という言葉で象徴される、彼の教育思想形成の淵源、それからその特徴についての考察を試みるものである。具体的には、森有礼の思想形成の軌跡と、彼の思想が様々な教育政策にいかなる形で反映され、具体化したか、または兵式體操で代表される思想の身体化によって具現しようとした国家主義教育思想の窮極的な目的は何だったのかについて考察を試みる。これによって、近代を生きた日本人の国家や世界を認識する、特定的思惟体系の形成と教育との関係を究明する、小さな手がかりを掴めることを期待する。
일본 중세 설화에 나타난 질투 관념 - 『발심집(發心集)』,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을 중심으로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1호 2016.12 pp.21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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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 고전문학 속 질투 모티프가 문학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통시적으로 살펴보는 연구의 일환으로 질투 모티프가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 뱀 모티프와의 결합을 통해 문학적 역할을 확장해 가는 양상을 중세 설화를 대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2세기 불교 설화집인 『금석이야기집(今昔物語集)』에는 남녀 애증으로 인한 여성의 질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이후 편찬된 중세 설화집 『발심집(発心集)』과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에는 여성의 질투 모티브가 상징적 이미지를 갖는 뱀과 결합되어 전체 이야기의 주제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문학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고금저문집』에서는 질투의 감정을 품은 본처가 뱀으로 변하여 남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고 있다. 당시 여성들은 남편의 외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 작품은 그러한 현실적 한계성을 전제로 여성이 뱀으로 변신한다는 비현실적인 장치를 추가함으로써 원망의 정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질투 모티프가 뱀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하여 강력한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이야기 전개는 등장인물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다. 당대 시대가 바라보는 질투에 대한 시각은 질투 모티프를 뱀 모티프와 결합시켰고, 이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관념 주제를 가장 돋보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reveal Japanese medieval narratives with focusing on the way in which the jealousy-motifs extend the literary role through the combination with the symbolic meaning of the snake-motif as a part of the study to see how the jealousy-motifs in Japanese classical literature are literally changed. In Japanese buddhist narratives "Konjaku Monogatarishu“(circa 12th Century), it contains a negative view of the jealousy of women. In later medieval narratives such as "Hotsinshu" and "Kokonchomonju", women's jealousy-motifs combined with the symbolic image of the snake played an important literary role in drawing the subject of the whole story. Especially, in "Kokonchomonju", the woman that has jealous feelings turns into a snake and puts a direct harm on her husband. At that time, women would not have been able to express their anger directly at the husband's affair. Literary works have made it possible to express the degree of grudge by adding an unrealistic device that transforms a woman into a snake. By combining the image of jealousy-motifs with the image of a snake and expressing strong anger, story leads to the death of characters in the end. The view of jealousy in that time let jealous motif to combine with snake motif, which would be to highlight the idea topic that the speaker would like to say.
本稿は、日本古典文学における嫉妬モチーフの文学的変容を通時的に考察する研究の一環として、嫉妬モチーフと象徴性が付与された蛇モチーフとの結合で、文学的機能が拡大されていく様相を、中世説話を対象に考察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12世紀前半に成立したとされる仏教説話集『今昔物語集』には、男女関係において愛憎がもたらす女性の嫉妬について否定的な見方が示されている。以降の作品として『発心集』と『古今著聞集』には、女性の嫉妬モチーフが蛇と結合され、全体ストーリの主題を導くための重要な文学的な要素として機能している。 特に『古今著聞集』では、嫉妬する妻が蛇と成り、夫に直接危害を与えている。当時は、女性は夫の浮気に対して直接的に怒りを表現することが認められなかったため、その現実的な限界を踏まえた上、女性が蛇に変身するという非現実的な装置を用い、文学作品の中で女性の「恨み」や「妬み」の程度を表出したと考えられる。嫉妬モチーフと蛇の「悪」の象徴性と結合し、「嫉妬は許せないもの」であるという主題を明確にさせたとも言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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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가부키가 메이지시대에 ‘개량’의 대상이라는 취급을 받았다가 어떻게 해외에 소개할 만한 국가를 대표하는 연극으로 그 위상이 바뀌어 가는지와 첫 해외 공연에서 가부키관계자와 정부는 무엇을 선보이고자 했는지를 외국인을 의식한 고전예능 관련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메이지 시대가 되자 가부키의 관객에는 천황을 비롯하여 국내 고위층사람들과 외국귀빈들이 포함되게 되었다. 에도시대에도 수차례 단속의 대상이 되었던 가부키는 메이지시대가 되어도 ‘국가에 무익한 유예’ 라는 취급이었다가 대외적인 이유로 인해 개량을 요구받게 된다. 근대 서양식 극장의 건설 외에 가부키 작품의 황당무계한 전개와 외설적인 내용은 최우선 시정 사항이었다. 가부키의 첫 공식 해외 공연에 대한 외무성의 대처와 반응에서 가부키 공연이 일본 국가의 위상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국가적 행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가부키 희곡 내용과 배우, 극장의 개량은 가부키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연극으로 만들고자 하는 대외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is paper, I investigate how Kabuki, through targeted “improvement” during the Meiji Era, was transformed into a theatrical performance which could be introduced abroad and favorably represent the nation. I also examine, from the aspect of policies related to classical entertainment considering foreigners, what the performance organizers and the Japanese government attempted to present at the first overseas Kabuki performance. In the Meiji era, audiences at Kabuki performances included the Emperor, domestic high-ranking officials, and distinguished foreign guests. Even during the Meiji Era, Kabuki, which had been subject to several crackdowns during the Edo period, was treated as a “useless respite to the nation” and met with demands for improvement due to external reasons. In addition to the construction of modern western-style theaters, reforming Kabuki performances’ nonsensical plots and obscene content was a top priority. In the response and reaction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o the first official overseas performance of Kabuki, it was found that Kabuki performances served as important national events capable of influencing the international status of the Japanese nation.
本稿では、明治時代に歌舞伎が「改良」の対象から、いかに日本を代表する演劇として外国に紹介するに値する演劇へとその社会的位置が変化されていくのか、そして、始めての海外公演において、歌舞伎関係者と政府は何を見せようとしていたのかについて、古典芸能に関連する政策という側面から考察した。 明治時代に入り、歌舞伎の観客に天皇をはじめとした上流階級の人々や外国の貴賓が含まれるようになる。江戸時代から取締の対象であった歌舞伎は明治時代にも「国家に益なき遊芸」とされたが、対外的な背景によって外国に通用する演劇へと改良されていく。 はじめての歌舞伎の海外公演においては、歌舞伎関係者だけではなく、外務省も現地での反応を注意深く見守っていた。この時期の文化紹介は海外における日本の地位を示す手段でもあったのである。歌舞伎の戯曲、役者、劇場の改良は歌舞伎を国際的に通用する演劇にしようとする対外的な必要性によって生まれた文化政策の一環であった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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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서 일본은 서적의 간행과 유통이 활발해지고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증가하여 출판업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증가함에 따라 교화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 다수 간행되었으며, 희작자(戯作者)들 사이에서도 심학물(心学物)이 인기를 끄는 등 교훈적인 내용이 포함된 작품이 유행하게 되었다.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은 그 시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작가 중 한 명으로 방대한 독서량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그는 특히 유교의 인의팔행(仁義八行)과 권선징악, 불교의 인과응보와 윤회사상을 기본 바탕으로 한 요미혼 작품의 집필에 열정적이었으며,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교훈적인 내용을 작품에 도입하였다. 또한 무사 집안 출신이었던 바킨은 독자보다 자신이 지식적으로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婦幼라 칭하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교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In 19th Century, the publication and distribution has become active and the people who enjoy reading have increased, ant then publishing business was a great success in Japan. Also, in accordance with the increase people who know how to read and write, works claimed edifying story have been published a lot. That contains the content of didactic work became popular among the writers, for example, Shingakumono. Kyokutei Bakin is one of the most popular writers in that period who was working on his countless works based on vast amount of reading and a wealth of knowledge. Especially, he was passionate about writing Yomihon based on the eight virtues and the rewarding of virtue and the punishment of evil of the conucianism, punitive justice and concept of reincarnation of Buddhism. He has adopted didactic contents based on Confucian ideals and Buddhist thought into his work. And also Bakin from Samurai family had actively attitude for edification readers called Fuyo with thought standing superior to them.
19世紀に入り、日本では書物の刊行と流通が盛んになり、読書を楽しむ人が増え、出版業界の隆盛期を迎えた。また、文字の読み書きが可能な人の増加に伴い、教化的な内容を含む作品が多数刊行され、戯作者の間でも心学物の執筆が人気を得るなど、教訓的な内容の作品が流行した。曲亭馬琴はその時期に最も人気のあった作者のうちの一人で、膨大な読書量と豊富な知識を基に数多い作品を執筆している。彼は特に、儒教の仁義八行や勧善懲悪、仏教の因果応報や輪廻思想を下敷きにした読本作品の執筆に情熱的に取り組んだ。かくして儒教思想と仏教思想を基とする教訓的な内容が作品に取り入れられるようになった。また、武家出身の馬琴は、自らが読者より知識的に優位に立つと考え、彼らを婦幼と称しながら積極的に教化しようとする態度を見せ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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