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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19호 (11건)
No
1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의 정치적 요소

박전열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9호 2010.12 p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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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오늘날의 일본다도는 사색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중요시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취미활동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도의 양식을 확립되어 가던 16세기 후반에 정권을 장악한 무장(武將)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이하 히데요시)는 다도를 사적인 취미활동의 영역이 아니라, 부하를 장악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써 활용하였다. 우리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긴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다인(茶人)을 측근으로 두고 다도(茶道)를 즐기는 한편, 일종의 새로운 방식의 다도 이벤트를 개최하는 한편, 무력에 의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부하 무장들에게 명품 다도구(茶道具)를 하사하여 환심을 사기도 하고, 천황을 모시고 다회를 개최함으로써 다도를 새로운 양식의 의례(儀禮)로 삼아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평상시는 물론 전투 중에도 진지에서 다회를 열었는데, 특히 임진왜란 중에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에 진영을 설치하여 전투를 지휘하는 기간에, 여러 차례 다회를 즐기며 전쟁을 독려했던 사실은 다도가 평화와 전쟁에 두루 동원된다는 다도의 양면적 성격을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본고는 히데요시가 개최한 각종 다도 행사 즉, 대중을 동원한 대규모 다회, 천황과 공경을 모신 궁중의 다회, 전투중의 진지에서 연 다회 등을 정리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히데요시의 다도는 당대의 절대 권력가가 주도한 다도라는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후 일본다도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 히데요시는 당대의 최고 다인인 센리큐(千利休 1522-1591)를 측근에 두고 각종 이벤트를 기획하도록 하였다. 창작능력과 기획능력이 탁월한 센리큐는 각종 다도 이벤트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본고에서는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16世紀末戦国時代の終り頃、茶道はすでに京都を中心にする武家社会に広く根付いていて、個人の趣味活動であると同時に武士の教養として評価された。武士は茶道具を収集し、茶道行事に参加することで、武功だけではなく文化面にも識見をもつことを誇示しようとした。生死が行き違う戦地で緊張した時間を過ごさなければならない武士にとって茶道は心を浄化させる時間と空間を提供してくれる特別な文化世界と認識された。秀吉は40歳頃から茶道を趣味にした。1585年、京都の大徳寺で大規模な茶会を開き天皇を主賓に招待することで権威を誇った。1585年、1586年には宮廷で天皇一家のための茶会を開催し、1587年には北野神社の境内で大規模の茶会を開催して、自分は茶道の愛好家であることを広く知らせた。秀吉は病気で死ぬ直前まで度々盛大な茶会を開き、茶道に対する強い愛着を現わした。秀吉は私的には茶道に凝って茶道具を収集し、側近を招いて茶会を楽しんだ。このような趣味は公的な場にも拡がって政治の手段にして茶道具の献上させるとか、集めた茶道具の下賜、すなわち茶道具の贈答を通じて部下の忠誠を誓約させて信頼を確保する手段にした。また、茶道を政治イベントとして企画・進行して、新しい政治行事としての展示效果をもはかった。秀吉は強い経済力を駆使して黄金で組み立て式の茶室を作って宮廷をはじめ各地に持ち込んで茶会を開いた。宮廷で天皇のために茶会を開催するという名分は事実上、自分の位相を誇示するためのことであり、これを行うための経済力と茶人を掌握していたことを誇示しようとした。以上の論をまとめると、秀吉は個人的な趣味として茶道を楽しむ一方、公的には政治の手段にするために茶道具の収集と下賜、自分の力量を誇示するためのイベントをもっての茶会を開催して茶道の文化的特質を最大限活用したと言える。

2

소라이학에서 고증학으로 -가타아먀 겐잔의 고증학적 방법-

이기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9호 2010.12 pp.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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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겐잔의 사상사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주자학, 진사이학 혹은 소라이학과 같은 일정한 체계를 가진 사상을 절충학에서 찾기는 어렵다해도 소라이학 이후의 유학의 전개 과정에서 절충학은 어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호소이 헤이슈처럼 학문이 현실 정치와 사회의 상황을 자신의 문제라 여기면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절충학자가 있는가 하면 이노우에 긴카⋅가타야마 겐잔⋅오타 긴죠처럼 경서 주석 그 자체에 전념하는 학자들도 출현했다. 겐잔의 문헌고증에 전념하는 방법은 오다 긴죠와 같은 후의 고증학의 길을 여는 전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겐잔의 중요성은 바로 고증학적 경향의 토대를 만들고 이후의 학자들은 겐잔에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고증학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겐잔의 경서 주석은 소라이의 고문사학에서 고증학으로 변화 발전해가는 견인차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겐잔의 경서 주석은 소라이학을 극복하여 가능한 한 정확한 경서를 주석하기 위해 경서의 다시 읽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겐잔은 관정이학의 금에 의한 주자학 부활을 향해 가는 사상사의 변동과정에서 경서 이해의 방법론을 제공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겐잔의 문헌고증학적 방법은 소라이 고문사학적 방법의 진화발전의 과정에서 출현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日本思想史において18世紀後半期は徂徠学の周辺に集まってきた知識人の多くが「反徂徠学」に転向していく時期でもある。この「反徂徠学」は折衷学を生み出し、やがて寛政異学の禁による朱子学の復活という形に姿を変えながら学問界の潮流を形作っていく。その思想史の変動過程において徂徠学を守ろうとする徂徠門人の学問的努力と、徂徠学から転向して折衷学や正学派朱子学に移っていく所謂「動揺する知識人像」が見える。こうした中で本稿は徂徠学を学び、後に徂徠学から思想的に転向していく過程で「反徂徠学」を主張した片山兼山の経書注釈方法が持つ意味を分析した。兼山は文献考証に専念したが、それは徂徠が主張した「古文辞学」の粗末さを乗り越えるための方法であった。兼山によれば徂徠は「古文辞」が何かを知らない、経書を徹底的に読まないと判断して、聖人の道の本来の姿を求め経書注釈に尽くし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兼山の経書注釈の方法は、太田錦城のような後の考証学の道を開く前提になったと思われる。兼山の重要性は、考証学的傾向の土台を作り、後の儒者は兼山に影響され、本格的な考証学の時代を開いた点にあるだろう。兼山の経書注釈は、徂徠学の古文辞学から考証学への変化発展していく牽引車の役割りを果たしたと見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3

미키 키요시(三木清)와 전향

노병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9호 2010.12 pp.5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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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미키의 사상편력의 과정을 재검토 하는 작업은 동아협동체론의 역사적 컨텍스트에 집중되어 온 현재까지의 연구상황에 대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하며, 앞서 언급한 정치성의 여러 동인중 ‘사상내재적’인 측면에 대한 재인식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더불어 파스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경사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중일전쟁 이후의 역사적 상황이라는 콘텍스트에 내던져짐으로써, 미키가 ‘사색’과 ‘행동’에 대한 해석이 전향(転向)으로 단순화되는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물론 전향 자체가 갖는 다측면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三木清はパスカルやマルクス主義研究、昭和研究会での活躍など、様々な思想遍歴で有名な戦前日本の思想家である。彼の思想および思想遍歴を見直すことは、東亜協同体論の歴史的・政治的なコンテクストを主にしてきた現在までの研究状況の行き詰まりを克服することにつながると思われる。すなわち、彼の思想遍歴過程について「思想内在的」に接近することによって、パスカルからマルクス主義への傾斜および、マルクス主義から日中戦争以後の歴史的なコンテクストへの没入を重んじる、三木の思索と行動の単純化(転向論)への危険を避けることができる。もちろん、転向そのものがもつ複雑性を裏付けることもできる。魚津郁夫による「自由主義左派の知識人」という先験的な定義を避ける方法でもある。

4

전쟁시기 일본 사법관료의 전향인식과 천황제 신앙

정혜선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9호 2010.12 pp.8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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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0원

본 논문의 목적은 전쟁 시기 사법 관료의 전향인식을 통하여, 사법 관료가 천황제신앙을 수용하는 경로를 고찰함으로써, 전전(戰前) 전쟁이라는 위기의 시기에 나타나는 지배측의 정신구조의 한 측면을 이해하여 일본국가주의의 내면적 특성을 탐색하는 데에 있다. 근대 일본국가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측면인 지배측의 사상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전쟁 시기 일본국가주의가 막강한 힘으로 일본인에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던 요인에 대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나아가 본 주제는 현재 일본사회에서 여전히 등장하고 있는 역사왜곡 등과 같은 우익적 국가주의에 대한 역사적 계보의 고찰이 될 것이고, 이를 통하여 일본 국가주의 극복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本論文の目的は、戦争の時期、司法官僚の転向の認識を通じ、司法官僚が天皇制の信仰を収容する道を考察することで、戦争という危機の時期に表示される支配側の精神構造の一側面を理解するして、日本の国家主義の内面的特性を探索しようとしている。戦争の危機の時期に司法官僚は、天皇を‘万世一系の天子、世界で比類のない国体、絶対的な神’にまでみなし、天皇と国民は、宗教的に融合した存在として認識している。世界に類を見つけるのが難しい天皇の歴史的実在(天皇の長期的な存続、天皇と日本社会と深く広い接続)は司法官僚が天皇制の信仰へと飛躍する出発点であり、通路になっている。このような論理の延長線上で思想犯も、永久的な日本人であるため、必ず日本人に帰って来ると確信した、さらに、転向は、宗教の絶対的境地までは、天皇の臣民であることを悟って実践していると認識して、宗教的な絶対的境地に到達した天皇制の信仰を転向の基準に法制化した。膨大な上申書をもとに究明して出した転向についての信頼できる実証的アプローチにも、これらの天皇制の信仰の枠の中で補完され、適用された。司法官僚の天皇制信仰と、それに基づいて転向基準の完成は、従来の見解のような狂気であるか、または誇張された捜査的な言説にすぎないのではなく、一貫した論理や観念のシステムを持っていたと言えるだろう。以上で、司法の官僚は、戦争の危機の中で戦争に勝利しようと、国民を統制する目的で天皇絶対の信仰を作成して、国民に強要しており、これを実現するために、徹底した監視と弾圧をしたにもかかわらず、自分が自分で作ったイデオロギーに吸収され、信じながら戦争でよく行ったを考察することができる。

5

7,200원

근대기 일본의 교육정책을 비롯한 각종의 문화정책에 관한 연구는 권력으로부터 강제되는 왜곡된 국민사상의 구축과, 그 결과 나타나는 일그러진 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본고는 근대일본의 ‘소리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창가를 대상으로, 창가의 생성과정 및 창가교육의 실태, 그리고 문부성 산하 음악조사계(音樂取調掛)의 존재에 주목하면서 창가 장르의 형성 과정과 전개에 이르는 사상사적⋅문예사적 자리매김과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국민사상’의 형성에 중점을 둔 메이지 초기 창가교육의 실태 분석을 통해 근대 일본인의 심상(心象) 구축에 있어 창가의 교육과 보급이 어떻게 관여하고 기능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음악과 음악교육은 본래 어떠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구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것이 특히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음악과 음악교육의 시작은 메이지 신정부의 국체(國體) 형성이라는 이념적 도구로서 창가를 이용했다. 다시 말해 메이지정부의 서양음악 도입의 근저에 있던 것은 ‘국민형성(國民形成)’을 위한 도구로서 창가를 이용한 것이었지 예술이라는 개념은 안중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학성지(敎學聖旨)’⋅‘교육칙어(敎育勅語)’에서 말하는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인의충효(仁義忠孝)’이라는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국민사상의 창조였으며, ‘덕육(德育)’ 교육을 통한 ‘덕성(德性)의 함양(涵養)’이라는 교육의 가치는 창가교육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현되어져 갔다.

本稿は、近代期に入って新しく西洋から導入した唱歌を対象として、「声の文化」の生成と展開について、「声の文化」という文化史的コードをもってアクセスし、日本文化の通時的な流れの中でその特質を明らかにするものである。唱歌は、明治新政府によって1871年(明治4)創設された文部省の学制の中で、初等·中等の学校において教育的な目的で用いる、主に洋楽系の短い歌曲である。学制の公布は、それまでの寺子屋を中心に行われていた小規模かつ個人的な教育が、国家によって管理·統制する集団的·公的教育への転換を意味した。しかしながら、当時の多種多様な音楽を新制度の集団教育の中でいかに整理し教育していくべきか、そこに一つの効率的体制を作っていくということは至難の課題であった。アメリカから帰ってきた伊沢修二らによって文部省内に唱歌集編纂や音楽教員養成などを担当する音楽取調掛が置かれた。アメリカからは音楽教育の専門家メーソンを招聘し、本格的な唱歌集編纂に着手する。やがて、1882年(明治15)日本初の西洋式楽譜付の『小学唱歌集』初編が完成する。引き続き、第二編、三編、『幼稚園唱歌集』などが音楽取調掛によって編纂された。伊沢は、当初、西洋の唱歌を日本に導入することによって、子供たちの知覚と心経を活発にし、精神的快楽と心的感動を呼び起こす、ひいては日本語の撥音を正しくし呼吸を調える効用を期待した。しかし、明治新政府は、徳性を涵養し忠君愛国の精神を歌うことを強制した。これは明治新政府の目指す教育の目的でもあった。子供の身体と精神に対する直接的な効用を追求するという音楽教育本然の目的は、文化権力によって「徳育」と「忠君愛国」の教育政策への転換をよぎなくさせられたのである。

6

한ㆍ일 가치관을 통해 본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갈등양상

이노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9호 2010.12 pp.139-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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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본 논의는 비교문화관점의 한ㆍ일 대인접촉에 초점을 맞추어 국내 거주 일본인들이 기록한 텍스트의 내용분석을 통해 문화가치체계에 따른 한ㆍ일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갈등양상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는 정량적 연구에서 논의되지 않은 한ㆍ일 양국의 독특한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갈등양상이 무엇인지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의 오해와 왜곡으로 인한 문화갈등의 부정적 효과를 초래하는 반면 긍정적인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은 국가 간 상호이해와 적극적 문화교류가 시행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ㆍ일 양국의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갈등양상을 규명하는 작업은 일본문화의 이해를 촉진할 뿐 아니라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에 나타난 상이한 가치관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일이라 하겠다. 본 논의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연구를 위한 다양한 문화가치유형을 파악한 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 텍스트에 나타난 한ㆍ일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갈등양상을 순차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한ㆍ일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의 특성을 결론 부분의 마지막 장에서 매듭지을 것이다. 이러한 한ㆍ일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갈등양상에 대한 고찰은 최근 한류를 바탕으로 촉발된 한ㆍ일간의 적극적인 문화교류와 관광객, 유학생 등 대인접촉의 빠른 증가에 따른 메시지의 오해와 갈등의 부정적 인식을 잠식하여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Nowadays, development of network and global traffic network is rapidly increasing intercultural communication. The fact that communication transmitters and receivers between Korean and Japanese culture with distinctive cultural background use different languages implies not just they do not share communication codes but also cultural conflict might arise due to the difference of their values internalized in the messages exchanged. Thereupon,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aspects of conflict between Korean and Japanese culture resulted from the types of cultural values through content analysis on literature text recorded by Japanese living in Korea. According to the result of this research, Koreans tend to avoid uncertainty, have collectivism, authoritarianism, and positivity, express aggressive emotion, and pursue straightforward, subjective, and unilateral communication whereas Japanese are inclined to indirect, objective, and modest communication as they show codependency and emotional control since there coexist collectivism-individualism and values of vertical-horizontal human relations in Japan. On account of this, Koreans consider Japanese likely to use obscure expressions with passive attitudes to suppress their feelings and limit private questions to be lukewarm and twofold and also uncomfortable to be with for their true heart can never be known however, there is also a hindrance factor that Japanese feel unpleasant when asked of their private information by Koreans. It was also found that Japanese misunderstand Koreans are selfish, rude, and imprudent hardly controlling their feelings and always holding fast to their own opinion unilaterally, so communicative conflict between Korean and Japanese culture occurs inevitably. In order to resolve cultural conflict lying in communication between Korean and Japanese culture and make the communication smoother, it is demanded to establish communicative strategies to understand the systems of their cultural values and cultivate communicative competence between the cultures.

7

6,300원

‘오키나가타라시히메’ 전승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키나가氏’ 一族의 행보를 살피지 않고서는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오키나가氏’에 대해서는 여러 說만 존재할 뿐, 딱히 이렇다 할 定說은 나와 있지 않은 형편이다. 『古事記』와『日本書紀』양 문헌에 의하면 ‘오키나가氏’는 호쿠리쿠(北陸)와 야마토(大和)를 연결하는 요지에 위치한 오우미(近江)國 사카타(坂田)郡를 근거로 하던 호족으로 게이코朝 이후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돌연 게이타이朝부터 나타나 천황가와 혼인관계를 맺고 천황의 외척으로서 세력을 떨친다. 그리고「天武 13年10月條」에 야쿠사노카바네(八色姓)로 마히토노카바네(眞人姓)를 하사받은 기록이 있는 名門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메이천황과 ‘오키나가노마히토오유’ 外는 이렇다하게 정치무대에서 활약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古事記』와『日本書紀』에서의 ‘오키나가타라시히메’ 전승을 ‘오키나가氏’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각 계보의 요소요소에 보이는 모순들이 지금까지의 사료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게이타이朝 이전의 ‘오키나가氏’ 관련 전승은 가상된 이야기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게이타이천황 이후의 계보만으로 ‘오키나가氏’를 ‘오키나가타라시히메’의 父系譜로 삼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오카나가氏’의 본거지였던 琵琶湖 주변지역이 철의 산지이며 철 제조기술을 가진 ‘아메노히보코’를 시조로 하는 도래계의 본거지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정황들로 인해 ‘오키나가타라시히메’전승 속의 ‘오키나가氏’ 행보가 오진천황의 母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와 도래계와의 연관을 숨기기 위한 수고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 ‘오키나가타라시히메’의 모계인 ‘아메노히보코’ 계보 연구를 통해 정립해 나가고자 한다. 사실 여기서 텍스트로 삼은『古事記』와『日本書紀』만을 가지고 황가의 계보를 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부모계 특히 도래계를 모계로 둔 계보와 민간신앙 등의 절충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 계보를 부계만으로 논할 수는 없다. 적확한 고증이 따르지 않은 부정적 추정은 천황대의 실제적 첫 천황이라고 말해지는 오진천황의 계보마저 뒤틀어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オキナガタラシヒメノミコト伝承は『古事記』「仲哀記」と『日本書紀』「仲哀紀」⋅「神功紀」に記載されている。この伝承は大きく分けると次の五つの部分からなる。㈠ 皇居⋅皇妃と皇子女の記術、㈡ 仲哀天皇の死と応神天皇の治天下を啓示した第一⋅二の託宣、㈢ 三韓の屯倉設置、㈣ 香坂王と忍熊王の反逆、㈤ 応神の成人儀礼と酒楽歌。オキナガタラシヒメ伝承はよく‘オキナガタラシヒメ’を主人公で新羅⋅百済⋅高句麗の三国との関係を中心に伝われた。だが、これはオキナガタラシヒメ伝承の最も重要なモチーフで見られる応神の天皇擁立、特に仲哀天皇と応神天皇を血縁で結びつけて、応神天皇の次の天下統治に正統性を付与しようと思った‘オキナガタラシヒメ’の役割が理解されなっかたためであろう。こんな点に着目して『古事記』と『日本書紀』での‘オキナガタラシヒメ’の系譜を考察することにした。‘オキナガタラシヒメ’の系譜は次のように細分される。㈠ 父系の‘オキナガ(息長)氏’系、㈡ 母系の‘アメノヒボコ(天之日矛)’系、㈢ ‘タラシ(帯)系’、㈣ ‘オホタラシヒメ(大帯日売)’等の民間信仰との習合。本稿では‘オキナガタラシヒメ’の関連系譜の中、「神功紀」の記事で明らかにしている父系の‘オキナガ氏’の意義に対して考察しようと思った。その結果、『古事記』と『日本書紀』によると、‘オキナガ氏’は北陸と大和を連結する要地の近江国坂田郡を本拠とした豪族で景行朝以後の記録には登場しないが突然、継体朝から現れて天皇家と婚姻関係を結んで天皇の外戚として勢を張った。 そして「天武13年10月條」には八色姓で真人姓を賜わった名門であるという。しかし舒明天皇と‘オキナガノマヒトオユ’の以外は政治舞台で著しく活躍した記録が見られていない。『古事記』と『日本書紀』での‘オキナガタラシヒメ’伝承を‘オキナガ氏’の関与によったものとは断言されない。今までの史料をもって各系譜に見える矛盾らを解決するのは難しい。ただし、‘オキナガ氏’の本拠であった琵琶湖の周辺地域が鉄の産地で、鉄の製造技術を持ていた‘アメノヒボコ’を始祖とする渡来系の本拠でもあったという点に注目する。  オキナガタラシヒメ伝承での‘オキナガ氏’の意味は、応神天皇と母系の渡来系との関連を否定するために設した装置にすぎないと思う。実に今までテキストとした『古事記』と『日本書紀』だけを持って天皇系を論じるには力不足だ。以後の課題はこの点を熟知しながら、オキナガタラシヒメ伝承に、父系の‘オカナガ氏’と母系の‘アメノヒボコ’、そして民間信仰としての‘オホタラシヒメ’伝説などがどんな式に影響を及ぼさせているのか考察していこうと思う。

8

5,500원

본 연구는『후토코로 오토코』의 주인공 마메에몬의 모티브에 대한 연구의 미진함에 의문을 느껴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 주제의식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다는 점에 의구심을 느껴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출판 후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은『후토코로 오토코』의 주인공 마메에몬은 소인 모티브와 빙의 모티브로써 조형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모티브는 돌연의 창조적인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잇슨보시 소인 모티브,『화상기연』의 소인 모티브,『겐지모노가타리』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은『게이세에 이로쟈미센』의 빙의 모티브의 영향 하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이처럼『후토코로 오토코』의 주인공 마메에몬의 모티브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독자의 의식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설화 및 고전과 외국 작품, 가깝게는 기세키 스스로의 데뷔작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기작품을 출판해야만 했던 당시의 기세키에게『후토코로 오토코』의 성공은 보장되어야만 했고, 이에 인기를 보장받을 수 없는 독창적인 모티브보다는 독자에게 널리 수용되는 안정적인 모티브 이용이라는 집필 방법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연구는 소인 모티브와 빙의 모티브의 독창성을 강조하며 이후의 작품에 대한 영향력 위주로 연구가 된 반면, 내용 면에서 성교 묘사의 외설스러움, 노골성 등 때문에 본 작품을 춘본에 가까운 작품으로 인식한 탓인지, 그 주제의식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였다. 그러나 본 연구의 결과,『후토코로 오토코』는 마메에몬을 통해 여성이 정욕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간사, 남녀의 정욕 묘사를 통한 골계미 및 반전의 재미, 남녀의 정욕을 매개로 한 인간의 재물욕 등을 묘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후토코로 오토코』는 단순한 성교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욕을 매개로 한 다양한 인간사 또한 주제의식으로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이상을 통해 데뷔 이후 한참 동안 샤미센물로 인기를 구가하던 기세키가 다시 한 번『후토코로 오토코』라는 호색물로서 성공작을 이루어내게 된 배경을 확인하였고, 이에『후토코로 오토코』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本研究は江島其磧の『魂胆色遊懐男』の主人公豆右衛門のモチーフに関する研究が不十分であると考え、その欠落を補うものである。また、作品の主題意識に関する考察が全く行われていない点にも疑問があり、この点を明らかにするものである。出版以来持続的に人気を得ていた『魂胆色遊懐男』の主人公豆右衛門は小人モチーフと憑依モチーフにより造型されているが、この二つのモチーフは突然の創造であるというよりは一寸法師の小人モチーフ、『和尚奇縁』の小人モチーフ、『源氏物語』でも確認されたものと同様の『けいせい色三味線』の憑依モチーフの影響下にあると結論付けることができた。このように『魂胆色遊懐男』の主人公豆右衛門のモチーフが成功したのは、他でもない読者の意識の中で前提となっている説話および古典、外国の作品、作家其磧の名を世に知らしめたデビュー作『けいせい色三味線』によるところ大きい。人気作品を出版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当時の其磧にとって『魂胆色遊懐男』の成功は保証されねばならず、ここに読者に広く受容される安定したモチーフ利用という執筆方法に至ったのである。一方、今までの『魂胆色遊懐男』の研究はその小人モチーフと憑依モチーフを強調しつつ、以降の作品への影響力中心に行われてきた。その反面、内容の上で性交の露骨性のためか『魂胆色遊懐男』を春本に近い作品として認識されたらしく、その主題意識に関しての考察は行われてきていない。しかし、本研究の結果、『魂胆色遊懐男』には豆右衛門を通して女性が情欲を露にするしかない不幸な世間体、男女の情欲描写の中の滑稽さと逆転のおもしろさ、男女の情欲を媒介にした財物欲なども描写され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したがって、『魂胆色遊懐男』は単に性交の描写に重きを置いた作品というよりは人間の情欲を媒介にした多様な人間観察の結果を主題としており、この評価こそが『魂胆色遊懐男』に対する正しい評価であると考えられる。以上の考察により、デビュー以降一貫して三味線物で人気を得た其磧が再び『魂胆色遊懐男』という好色物で成功を勝ち得た背景が確認でき、ここに『魂胆色遊懐男』に関する評価は再考の余地があると結論づけることができる。

9

5,800원

히로시게는 에도 후기의 대중 화가로 특히 신사와 불각을 다양한 견지에서 명소 풍경 속에 접합시킨 우키요에 메이쇼에 분야의 화가이다. 그의 수 많은 작품집 중 특히 명치유신 10년 전에 출판 된『명소백경(118점)』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서「명소」는 사람들이 보편적 공감대로 공유하고 있는 장소로서 ‘명소로 일컬어 질만한 장소’를 의미 하는데 종교 관련 장소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 점은 당시 종교적인 것이 서민들에게 얼마나 일상적인 것이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본고는 종교적인 관점에서『명소백경』속에 묘사 된 종교적 표상을 통하여 막말「신불」표현의 특징을 고찰하여 보았다. 고찰결과『명소백경』에는 신흥 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적 표상이 묘사 되어 있었으나 출판 된 시대가 신불습합의 시대이니 만큼, 당초 예상대로 특히 핵심이 되는「신불」적인 요소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상세 분류 결과 신사 대비 불각의 숫자가 월등히 적은 것은 예상 밖의 결과였고 반면 신흥종교인 산악 신앙적 요소가 압도적으로 많이 묘사되어 있었으며 상징적으로나마 기독교적인 묘사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결과로부터『명소백경』이 다량 유포 된 당시의 대중 매체였음을 염두에 두면,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 환경 하에서 막부가 특정 종교에 대해 규제를 가했던 시대 상황도 감지 할 수 있고 막말 폭발적인 유행을 보였던 신흥 종교의 열기 하에서 불교의 불행한 역사적 기운이 시사되어 있음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즉『명소백경』은 곧 불어 닥칠 신불분리에서 폐불 회석으로 이어질 시대적 조류가 이미 체감 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작품집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그림의 작례를 제시하여「신불」표현의 특징을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도판 1, 2, 3은 비록 시점장이 모두 불(仏)을 이미지 하는 장소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중경과 원경에 걸쳐 신사, 후지강 및 신흥종교의 상징들을 의도적으로 연출시켜 변화하는 당시의 복잡한 종교 환경 속에서 쇠약해져가는 불교의 입지를 상징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本稿は広重『名所江戸百景』に描写されている宗教的表象を通じて、幕末「神仏」表現の特徴と意味を考察した。考察の結果、『名所江戸百景』の核心要素である「神仏」表現には激変する時代の潮流が反映されていると同時にそういう思想の変化が現れていた。

10

5,800원

재조일본인 작가들이 ‘조선문단’이라는 용어로 발화해온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어문단의 부재․결핍의식에도 불구하고 앞의 회고처럼 그 기원을 탐구하고 존재를 주장하려는 욕망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욕망은 늘 똑같은 형태로 출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 따라 굴절되거나 변형된다. 본고는 그 굴절의 한 측면을 일본어잡지 『조선공론』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은 1920년대 초반 해당 미디어의 문예란 재편이라는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는데, 이 시기 문예란의 확대와 세분화를 통하여 ‘조선문단’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한 『조선공론』의 변화들을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문단에 대한 결핍 의식과 욕망은 그 이전과 동일하지만 그 안에서 전통 장르 창작집단에 머무르던 수준을 뛰어넘어 스스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둘째는 1920년대 초반의 이러한 변화들이 식민지 조선의 출판시장 활성화와 동인지 시대를 거친 조선인 문학자들의 문단 형성기라는 동시대 문학제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통적 장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모임(‘會’와 ‘社’)에서 그것들을 통합하고 재구성한 ‘조선문단’으로 나아가려 했던 『조선공론』의 미디어 기획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특히 조선공론사의 제2대 사장으로서 1920년대 『조선공론』을 이끌어갔던 이시모리 히사야(石森久彌)의 텍스트가, 재조일본인 문단이 당면했던 ‘식민 주체의 자기증명’이라는 과제와 접합되는 지점에 대한 고찰을 시도해 본다.

同時代の朝鮮人文学者たちを排除しながら自ら「朝鮮文壇」と称して来た植民地朝鮮の日本語文壇は,「内地文学からの排除」と「諸国文学への帰属」という二重の問題に逢着された植民主体の自己証明の一つの方式として,「植民文学」のオリジナリティ―を主張した. 1920年代初, 『朝鮮公論』の文芸欄は, 創刊期の1913年から運用されて来た<公論文壇>欄とは辨別される<半島文芸>欄を設置して,そういう慾望を実現しようとしていた.<半島文芸>欄は伝統的な詩歌ジャンル中心に構成されていた既存の<公論文壇>欄では担当できなかった散文ジャンルを収用しながら,<創作>項目を通じて短篇小説が本格的に掲載されるように橋梁の役割をしていた. しかも, それは必然的に消滅される空間であったともいえることである.これは向後長い期間のうちに植民地朝鮮の日本語媒体を通じて日本語小説が読書市場の優越な位置を占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事態を予告していたことともいえる. 一方, こういう『朝鮮公論』文芸欄の再編と関聯された中心人物の石森久弥は, 植民․移住者の安穏そうな日常が「不気味なこと(the uncanny)」と変わる瞬間を捕捉して, 植民․移住者としての生の不安を露出させ, 自ら覚醒した他者性をどう克服するべきことかという課題を附与した. この時期『朝鮮公論』が「文壇」の「欠乏」を認定しながらも,それを実在として認識したという事実と,石森の小説が植民地朝鮮での実存という問題に結びつけられた素材たちを発掘して行ったという事実とは, 互いに聯関されている. 「外地」としての他者性と「国民」․「国語」の同一性が同時に附与された彼らにとって,「文学」はもう複雑で高次元的な層位から自らのオリジナリティ―を新しく構成するという可能性を提示してくれたものであった. でも, 『朝鮮公論』は朝鮮人たちの「国文=日本文」の懸賞公募を通じて彼らを朝鮮内の日本語․メディアの消費/生産の主体として認識したことにも拘らず,植民者の「朝鮮文壇」という次元では依然として彼らを排除していた.

11

5,200원

아쿠타가와는 원전『우지』에서 용의 승천일에 관해 ‘몇 월 몇 일에 이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게 될 것이다’라고 된 부분을 작품『龍』에서 ‘3월 3일 이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리라’ 라고 구체적으로 ‘3월 3일’로 그 날을 명기하고 있다. 종래 이에 관해서『마을의 화재(村の火事)』의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설, 고대의 신불현현(神仏顕現)의 관점에서 재생부활再生復活의 날인 3월3일을 설정했다는 설,『龍』창작시점의 아쿠타가와의 실제 작가생활에 입각해서 추측한 설 등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점을 들어 ‘3월 3일’로 명기된 이유를 기술하였다. 첫째로 3월 3일은 상사(上巳)에 해당하는데 사(巳)는 12간지에서 뱀을 뜻하는 바, 이 뱀은 예로부터 용과 공통점이 많아 뱀에서 용을, 반대로 용에서 뱀을 연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곡(謡曲)『가스가 용신(春日龍神)』에서 사루사와 연못으로 들어가는 용신이「대사(大蛇)」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루사와 연못에 몸을 던진 우네메 전승과의 관련성이다. 우네메 전승은 고대부터 갖가지 전승의 변형, 발전과정을 거쳐 왔는데, 요곡(謡曲)『우네메』에서 우네메가 ‘곡수(曲水)의 연회’에서 춤을 추며 시를 읊는 장면이 등장한다. ‘상사(上巳)의 날’에 행하는 ‘곡수(曲水)의 연회’가 우네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따라서 『龍』의 ‘우네메 버들’은 단순한 소설의 구체적 정경묘사가 아니라 ‘3월 3일’과의 관련 속에서 설정된 장치였음을 알 수 있다.

芥川は原典たる『宇治』にはない龍の上天の日を具体的に「三月三日」と明記している。従来この点に関しては、『村の火事』における日付からヒントを得たとの説、古来の神仏顕現の観点から再生復活の日たる「三月三日」を設定したという説、『龍』の創作の際における作者の生活の状況に即して推測した説などがあった。本稿では二つの点を挙げて「三月三日」と明記された理由を記述した。第一に、三月三日は上巳の日に当り、「巳」は十二干支の「蛇」であり、蛇は古来から龍と似通う点が多くて、蛇から龍を、或は龍から蛇を連想するのは一般的であった。謡曲『春日龍神』で猿沢の池に入水する龍神が「大蛇」に変身したのは好例であろう。第二に、猿沢の池に身を投げた采女伝承との関連性である。采女伝承は古代からあらゆる伝承の変化と発展の過程を経てきたが、謡曲 『采女』において、采女が「曲水の宴」で舞を舞い和歌を讀む場面が登場する。「上巳の日」に行われる「曲水の宴」が采女が関連するわけで、よって、『龍』の「采女柳」は単純な小説の情景の描写ではなく、「三月三日」との関連から設定された装置であることが分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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