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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21호 (10건)
No
1

일본 ‘전후역사학’의 전개와 변용

박진우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1호 2011.12 p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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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0원

本稿の目的は、1945年から1970年代にかけて、「抵抗の歴史学」、「現象批判の歴史学」として戦後日本の民主主義にもっとも主導的な役割を果たした「戦後歴史学」の展開と変容を検討し、その問題点は何であり、それが我々に残した「知」の遺産は何であるかを明らかにするところにある。一般的に「戦後歴史学」は大きく講座派のマルクス主義歴史学と丸山真男と大塚久雄に代表される近代主義歴史学として両分することができる。本稿では、主に前者を中心として検討する。それは、キャロル・グラックが指摘しているように、「マルクス主義とマルクス主義的な立場がこれほど徹底的に学問上の確立に浸透した例は、他の非共産主義国ではほとんど見られず、まして後期資本主義的な民主主義国では全無である」といっているように、戦後日本の知識界にマルクス主義歴史学が及ぼした影響力は至大なものであるからである。社会主義革命が失敗におわり、ポストモダニズムを洪水のなかで、「戦後歴史学」はもはや「廃棄処分」されたかに見えるかも知れない。しかし、暗い軍国主義時代の弾圧のもとで戦争の破滅と屈従の歴史を体で体験して敗戦をむかえた時代状況のもとで、熾烈な使命感を持って「変革」を模索した「戦後歴史学」の遺産は、今日においても貴重な歴史的証言としての生命力を持っていると言える。この研究では、こうした基本認識のもとで、「戦後歴史学」の形成と変容でもっとも主導的な役割を果たした講座派のマルクス主義歴史学が具体的にどのように展開・変容していったかを、敗戦直後から1970年代までを中心として検討し、それが持つ意味とその限界は何であるかを明らかにし、戦後日本の知識形成に「戦後歴史学」が及ぼした役割と意義について考えることにしたい。この時、「戦後歴史学」が過去の絶対的な天皇制の精神的な内面世界の問題と、日本帝国主義の対外侵略と不可分の関係にあるアジアの問題をいかに認識していたかを合わせて検討していきたい。それは、こうした問題が近代日本の対外侵略や戦争責任と関連して戦後日本の歴史認識が孕んでいる根元的な問題と密接な関係にあると思うからである。

2

신체화된 주체의 한계 : 니시다와 박종홍

허우성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1호 2011.12 pp.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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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This article deals with two nationalisms, represented respectively by Nishida and Park Chong Hong. It has tried to argue that one of the most convincing reasons for their being nationalists was that they lived and did philosophy as embodied subjects who should lead their lives confined in a specific time and space. They thought and wrote in collusion with dominant political slogans such as Co-Prosperity and ‘the World under One Roof’ for Nishida and National Subjectivity for Park. One of the most salient features of being embodied subjects is the limit of perception constantly influenced by what they see, hear and by persons who they meet. One has to admit that the objects of perceiving, hearing and persons they meet are not their creations but mostly given to them. This fact explains why nationalistic sentiment unwittingly arise and is being easily strengthened. This sentiment is usually aleatory, one-sided, often violent, whose impacts fell on both Koreans and Chinese in 1930s and 1940s Nishida did not seem to be aware of. This article also argues that consciousness, embodied subjects, and nationalism pose the problem of others, which has not been dealt with in both Nishida’s philosophy of history and Park’s philosophy of national subjectivity. Thus they could not advance any sort of ethics of others. The first lesson which we may garner from the failure of Co-Prosperity is that we need to be awakened to the corporeality of nationalism. The second lesson is that, in order to advance any meaningful notion of a new Co-Prosperity in Asia for the 21st century, we should overcome the notion of the history-of-a-nation, and the political ontology which is closely connected to the absoluteness of whatever it is God, nation, or a historical period. Only then the psychological space to listen to colonial people becomes wide open. In case of contemporary Korean history, the best way to understand political clashes within during Park Chung Hee’s government, is to resort to differences in perceptions among Korean citizens. Lastly, one may ask as to the possibility of transcending the limit of embodied subjects. As a way of reply, the author only points to saintly figures such as the Buddha, Christ, perhaps Gandhi, as the possible models who were very much free from bodily desires and constraints of embodied subjects, which were allotted as an unavoidable destiny to all humans by many Western philosophers including Merleau-Ponty.

3

7,500원

21世紀の初頭、日本思想史学界では日本思想史の誕生をめぐる活発な議論が行われ、津田左右吉、村岡典嗣、和辻哲郎ら三人による「日本思想史の誕生説」が通説となった。ところがその通説は丸山真男の未完成論文で提示した仮説に依拠したものである。即ち上記した三人が研究者として登場した大正デモクラシ期が同時に研究の到達点でもあったという丸山の説明を拠り所にしてそれぞれ三人の日本思想史に対する研究が進められ、やがては21世紀に刊行された『概説日本思想史』や『日本思想史ハンドブック』などに注釈なしで語られるようになった。この通説をもとに日本研究者たちは文献学を媒介とした三人の共通性をを論じたり日本天皇制の特徴を論じたりして日本思想史の全体像を一般読者に提示した。同時に個別的な研究をも行い、日本思想史の研究者としての三人の特徴を明らかにしたり或は個別的な研究業績を表象したりもした。このような研究活動から日本思想史学界の研究動向を把握してその特徴をまとめてみたものが本稿である。最もの特徴として村岡典嗣の日本精神史のような日本中心主義思想が昂揚した代わりにマルクス主義のような進歩思想の排除が目立ったことが上げられる。

4

6,100원

本稿では、日本大衆文化の開放により韓国内に流入したクール․ジャパンの現況と展望について文化産業的側面から考察する。研究範囲はクール․ジャパンのうち、開放対象に当たった「映画․出版(漫画)․アニメ․音楽․ゲーム․放送」とする。日本大衆文化の開放をめぐって韓国内では、クール․ジャパンが国内に入ると我々の精神世界を支配されるという文化的側面、我々の文化商品が枯死するという文化産業面から懸念する声が高まった。しかし、開放後10年余りたった現在、憂慮したほどクール․ジャパンが勢力を振るうことはない。むしろ、開放政策は禁止されていたクール․ジャパンの陰性的かつ違法的な国内流入を阻んだのみならず、韓流の対外競争力の強化にも役立ったという肯定的評価を受けている。それだけでなく、日本の競争力が遥かに高いアニメーションとゲーム分野においても市場蚕食の効果より市場拡大を通じ我が文化産業の発展可能性を高めるという見通しもある。その理由として、まず、‘韓日の不幸な歴史と関係の遠い分野、文化的価値が高い分野、競争力のある分野から軟着陸させるという政府の段階的開放の戦略がうまく働いた点があげられる。さらに、急成長した我が文化産業界の競争力、個別化したクール․ジャパンについての非好感、領土と歴史をめぐった両国の葛藤も原因の一つである。他方、本文では取り扱わなかった韓流ブームから生じた文化的自信感、圧縮高度成長を成し遂げた経済発展、自力で勝ち取った民主化に基づいて韓国社会がもはや模日から脫日へ向けている時代状況もあげられる。しかしながら、現在まで開放の失より得が際立っているものの、依然としてクールジャパンの潜在力は言い切れない。これからの行方は見つめるべきである。

5

일본 무교회운동과 그 신학

양현혜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1호 2011.12 pp.127-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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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원

The Japanese Non-church movement was found in 1901 by Uchimura Kanzo, and since then has spread count for at one 20% of the Japanese Protestants, and is now also seen in Korea and Taiwan. This paper looks into the development of the Non-church movement, and its theology. Uchimura argued that people must stay pure to the two J’s of their lives, Japan and Jesus, and therefore wanted to create a Japan-style Christianity. Uchimura refused to accept the separation of professional and formal characteristics of Western Christianity and saw this institutional character as something useless to the Japanese people. He argued that the original core of Christianity must be applied to oneself. At the time, Uchimura understood the core of Christianity to be proving the existence of Jesus Christ in our everyday lives by becoming one with Christ. For such faith, one would have to practice the words of God every day by reading the bible and interacting with God face to face. Uchimura thought Church as such free and responsible actions of faith to be of a volunteered formation of a society. Therefore, the church was a secondary issue to Uchimura. He argued against the structuralized churches, sacrament-ism and holy orders-hierachy. He didn't want Non-church to be a church of no baptism, no Holy communions, or no clergies, or no theologies. Such arguments of Uchimura for Non-church was based on the belief that people could stand as free individuals within their correspondence with God. The Non-church movement was able to block the formation of institutionalism and maintain a non-institutional characteristic based on their frequent evocation and inspiration of the individual members’ sprituality. In today Japanese society, the idea of Non-church destructs rather than maintain Churches and fulfills Christianity through biblical studies about objectivity and self determination, and daily life that practices such ideas. This provides a possibility of Christianity standing as a ideological movement that does not need institutionalized organization or structure.

6

7,500원

메이지 신정부가 설정한 교육이념은 흔히 학제 ‘서문(序文)’이라 불리는 ‘학사장려에 관한 피앙출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극히 실용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근대 실학교육사상과 공리주의(功利主義)에 입각한 ‘국민개학’과 교육의 기회균등 등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일본사회는 학제를 수행할 만큼 근대화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세부규칙에서 정하고 있는 교육제도조차 완성되어 있지 않았었다. 교과서 또한 대부분 서양서적을 번역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교육내용이 너무 서양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전통적 교육이념, 즉 국체형성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유가(儒家)사상’을 철저히 무시했던 점이 문제였고, 결국에는 좌절한다. 이에 학제의 강제적 취학과 정부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고, 많은 부분 개인과 교육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취지의 이른바 ‘자유교육령’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이상적 교육제도였기에 이른바 ‘개정교육령(改正敎育令)’이라 불리는 두 번째 교육령이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일본사회 전반에 걸친 ‘구화사상(歐化思想)’에 대한 반성과 전통유학과 ‘존황사상(尊皇思想)’을 합체시켜 강력한 신민을 형성한다는 ‘황도주의(皇道主義) 이데올로기의 형성’이라는 정치적 노림수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교육은 메이지 초기에 지향하던 근대 서양의 합리주의정신에 기초한 실학적 지식주의 교육은 철저하게 유교적 정신에 입각한 인간형성의 원리 및 ‘덕교(德敎)사상’ 교육으로 전환되어 간다. 일본교육사의 흐름에서 볼 때 메이지기 초기 일본의 교육제도가 ‘지육’에서 덕육‘으로 전면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 절대적 시기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礼)가 초대 문부대신으로 취임한 이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모리는 1886년 개정교육령을 대신하는 소학교령·중학교령·제국대학령·사범학교령 등의 개별 정령 공포를 통해 교육의 목표를 ‘애국심(愛國心) 배양’에 두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재(器材)로써 천황제에 착목했다. 각급(各級) 학교에 ‘어진영(御眞影)’을 하사했으며, 기원절(紀元節), 천장절(天長節)에는 어진영 배례를 중심으로 한 축하의식을 추진했다. 또한 천황 축하를 위해 ‘천황페하 만세’ 의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도 모리였다. 모리의 이러한 교육이념은 1891년 4월의 ‘소학교설비준칙’을 발령을 통해 어진영·교육칙어의 ‘봉치(奉置)’에 관한 구체적 규정으로 나타났으며, 6월에는 ‘소학교축일대제일의식규정(小學校祝日大祭日儀式規定)’을 제정하는 등 어진영과 교육칙어를 통한 천황주의 이데올로기교육의 강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교육이념의 변화는 창가교육에 있어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가 있다. 일본에 창가교육이 도입된 초창기에 이자와 슈지(伊沢修二)가 아이치사범학교(愛知師範学校)에서 실시한 ‘유아들을 위한 창가유희(唱歌遊戱, 1874)’나 1877년 도쿄여자사범학교(東京女子師範學校) 부속 유치원에서 시작된 창가교육, 그리고 문부과학성 내에 창가교육과 음악교원 양성을 위한 설치된 ‘음악조사계(音楽取調掛)’가 목표로 삼았던 창가교육의 목적은 “학업으로 지친 심신을 회복시키고, 패와 장기를 튼튼하게 하며, 발음을 정확하게 하는 동시에 청력을 좋게 만들고, 사고를 치밀하게 만들며, 마음을 즐겁게 함과 동시에 선한 심성을 분기케 한다”는, 그야말로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개입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음악교육 그 자체였다. 그러던 것이 실제로 본격적인 창가교육을 위해 제작된 관제 교과서 『소학창가집(小學唱歌集)』 3편과 (1883~1885)과 『유치원창가집(幼稚園唱歌集)』(1887)은 천황이나 일본에 대한 칭송, 아니면 효행과 주군에 대한 충성 등의 유교적 사상을 소재로 한 노래를 다수 수록하고 있어, 개정교육령 반포 이래 강하게 등장하는 ‘인의충효(仁義忠孝)’를 강조하는 ‘덕목주의(德目主義)’ 교육과 궤를 같이 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 형성과, 그에 충실한 ‘인민(人民) 만들기’를 위한 정서적·심리적 교육의 도구로써 창가가 적극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本稿の目的は、明治時代前期における日本の近代教育の成立について概観し、その意義と特性を日本の国民国家形成との関係において考察を試みるものである。従来、日本の学制や教育令に関する研究は、主に両国の制度を比較したり、第2次世界大戦終了後の教育を取り上げたりする、概括的研究が主流をなしてきた。具体的な事例としては、教育令の頒布以降の修身科目に注目した研究などもある。本稿は、このような従来の研究の流れを踏まえつつ、明治時代前期における日本の教育理念の変遷という大きな流れを、学制やそれを改正した教育令などを中心に考察することによって、‘日本の近代国民国家の規範形成と教育'という、極めて大きなテーマへの解答の小さな手がかりを探る試みである。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明治新政府が教育に期待し強制した理念やその変化を明確に示し、天皇制イデオロギー形成の思想的·精神的·心理的な深淵としての国民教育という役割をより明らかに提示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う。さらに、このような観点から、明治後期に台頭する帝国主義思想の形成に教育、特に唱歌教育がその一翼を担ったということが、いっそう明らかになるだろう。

7

5,100원

吉岡弘毅は韓国ではもちろん日本でも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人物で、明治初期の政府官僚(外交官)として対朝鮮外交を担当した事があり、外務省に入る以前には弾正台という機関で働きながらキリスト教を監視及び禁止する業務に従事し、キリスト教に入信してからは日本基督教会の牧師にまで至った人物である。周知のように、明治初期の征韓論争は、「朝鮮の無礼」に対する非難から朝鮮を討伐することを主張しながら登場したものの、これは表面的理由であり、実は征韓派と非征韓派の問題に先立ち、幕末から続いていた幕府派と尊王派の各グループに属していた人々の間の政治的主導権争いだったと見ることが適切だろう。すなわち、本質的にはどのグループも侵略主義思想を内包していたためである。尊王派として活動し官職に登用、外交官としての朝鮮体験とキリスト教での立身を経て、義と愛の神を信じる人として常に「仁義」の人として生きようと思い、朝鮮を「各箇各別」の観点で独立した国と認定した上、掠奪主義を批判する立場で征韓論に反対したところに吉岡弘毅の卓越した部分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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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의 인도 인식

김용철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1호 2011.12 pp.2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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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0원

インドに対する岡倉天心の認識は日本の仏教美術との関連を語った1890年の日本美術史から始まるが、以後大きな変化を見せた。その変化の一番大事なきっかけは1901年のインド訪問である。インドを訪問して以来変わったインド認識はそれぞれ古代インドと同時代のインドに対するものに分けて考察することができ、古代インドに対する天心の認識はベダの個人主義が生まれた地としてアジアの文明を支える二つの柱の中の一つと見なした。「東洋の理想」の最初の部分に出てくる、アジアは一つなり、という文章はまさに1901年のインド訪問がなかったら、書かれなかったといえる。一方、同時代のインドはイギリスの植民地として帝国主義の統治に苦しめられている現実からインドの若者たちを西洋帝国主義に対しての抵抗を煽り立てた。ヨーロッパの栄光はアジアの屈辱という見方を前提に植民地化以前のすべてを合理化し、正当なものと捉えた。特に、「東洋の目覚め」に書かれている戦闘的アジア主義は天心の死後日本の大東亜共栄圏イデオロギーにも繋がる素地を持っていた。したがって天心のインド認識は当時のアジアの状況をもとにしながらも非常に危険な要素を抱えていたといえる。

9

5,700원

福澤諭吉(1835~1901)は、近代日本の最高の啓蒙思想家であり、19世紀中葉以降、韓日關係史にも大きい影響を及ぼした言論人であり思想家であった。福澤の主義、主張と思想は、日本の近代化に實に大きい影響を及ぼした。しかし、彼の‘西洋文明論’は、反儒敎主義と’脫亞論’を根本にすえ中国を蔑視し、侵略視して、日淸戰爭を始め日本を第2次世界大戦まで侵略戰爭の道へと先導した。敗戰後にも福澤の思想は、今だに日本の政界、學界、財界に大きい影響を及ぼしている。特に、日本の保守指導層の引き続く、中国、及びアジアに対する暴言は、福澤の思想によるところが多い。中国を蔑視し、侵略視した福澤の文明思想は、彼が高く評價される近代化の功勞以上に、これからも中国とアジアの平和、及び東アジア共同体の形成の爲にも、よりいっそう検討され、批判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のである。

10

5,700원

本稿は、享保十年七月に起きた殿中での刃傷事件を素材に幕府の大名家の領地没収に関して検討してみた。享保十年七月二十一日、松本藩の六代藩主水野忠恒は戸田伊勢守氏長の息女と婚姻し同二十八日、婚礼の御礼で将軍吉宗を拝謁し退出の際、参勤の挨拶で登城していた、長府藩の嫡男毛利主水師就を切りつける事件を起こした。この事件の際、主水が刀を抜かなかったことにより、殿中での打ち合わせではなく、忠恒の一方的な刃傷事件として扱われた。この事件に対する幕府の処分から幕府の大名家存続の意図を伺う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この事件に関連して目付であった酒井頼母忠術が事件の翌日に「改易」の処分を受けたことに対して、事件の当事者である忠恒は領地を収公され、水野家は忠恒の叔父である卯之助に家名相続を命じられた。この点から、「改易」という処分が大名ではなく旗本・御家人に対する処分であることが推測できる。また、江戸時代における幕府の大名家存続に対する認識であるが、幕府は「収公」後も大名家を大名家としてまたは旗本家として存続させる措置をおこなうことにより、伝統ある大名家を潰すことには躊躇っていたことがわかる。このようなことを総合してみると幕府が大名を廃絶することにより、大名を統制したとする既存の研究成果は、幕府確立期に限定することであり、その後は、幕府と大名の共生関係としてとらえるべき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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