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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27호 (13건)
No
1

5,800원

본고에서는 오사카 문인들이 중심이 된 기무라 겐카도 그룹에 참가했던 우에다 아키나리를 중심으로 그가 가진 조선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겐카도 그룹은 일종의 문화 살롱과 같은 장소로서 오사카 문사들의 문화향유의 중심지였으며, 한문학과 유학을 바탕으로 한 관서 지방 문인문화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었다. 겐카도 그룹과 조선통신사와의 만남을 통해 국제 문화 교류는 일본 국내에 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의 문사들에게도 알려지게 됨으로써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에다 아키나리의 경우, 생애에 두 번 조선통신사의 만남을 통해 조선체험이 이루어졌다. 『단다이쇼신로쿠』의 서술기록을 토대로 아키나리가 조선인들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아키나리의 조선 인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의 작품 속에 조선 작품의 영향이 있었음을 더욱 입체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In this treatise, I inspected on what was Ueda-Akinari'recognition about Joseon, who participated Kimura-Kenkado group, which was the center of Osaka literary men. Kenkado group was a kind of saloons, where Osakian intellects enjoyed their times cultural blessings and a local intellects network was established based on Chinese literature and Confucian studies. Through the encounter of Kenkado group and 'Joseon Tongsinsa', the international cultural exchange was known not only to Japanese domestically but also to Joseon and Chinese broadly. Thereby, intellectuals' exchange was made between east Asian literary men. For the case of Ueda Akinari, he has two times of Joseon experience through meetings with Joseon deplomatic envoys. In narratives of 『Tandaishosinloku』, Akinari was found to have an objective recognition on Joseon or Joseon people. With a contemplation on Akinari's recognition on Joseon, the influence of Joseon literature in his works could be investigated more solidly.

本稿では、大坂の文人たちが中心になった木村蒹葭堂の蒹葭堂会に参加していた上田秋成を中心に彼の朝鮮に対する認識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蒹葭堂会は、一種の文化サロンのような場所として、大坂文人たちの文化享有の中心地であり、漢文学と儒学を基にした関西地方の文人文化のネットワークが形成された場であった。蒹葭堂会と朝鮮通信使との出会いを通して国際文化交流は日本の国内だけにではなく、朝鮮と中国の文士たちにも知られるようになり、東アジアの知識人交流が行われたといえるであろう。上田秋成の場合、生涯に二回の朝鮮通信使との出会いがあった。『胆大小心録』の記録を通して秋成が朝鮮人に対する客観的な認識を持っていることが伺えた。そのような秋成の朝鮮認識に対する考察を通して彼の作品の中に朝鮮の作品の影響があることを立体的に究明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われる。

2

6,700원

메이지 초기 진화론수용에 산파역할을 했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자신의 진화론 학습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연구메모 「疑堂備忘」을 남겼다. 이 메모에는 당시 가토가 무엇을 읽고 어떻게 사고했는지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토의 사상적 궤적을 분석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자료에 입각하여 많은 학자들이 가토의 진화론수용문제를 검토한 바 있으나, 다만 기존 연구들은 가토의 소위 ‘전향’이후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정치적 보수화를 설명하는 원인으로 진화론수용문제를 검토하거나, 혹은 그의 진화론이해의 ‘올바름’ 및 ‘오역’ 여부를 검증하는 데에 그치는 경향이 있었다. 본 연구는 약간 시점을 달리하여, 가토 진화론수용의 내재적 측면, 즉 그의 진화론수용 이전사상과의 연속적 측면에 주목하고, 그것이 막말에서부터 메이지로 이어지는 시대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변화하는가를 분석하였다. 특히 가토가 당시 직면했던 사상적 과제들, 즉 일본의 ‘개화’나 ‘국체’ 등에 관한 문제의식을 매개로 서구사상을 학습하면서 ‘인종’을 거쳐 ‘진화’에 이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학습의 과정 안에서 ‘천손’적 군주가 국가를 사유한다고 하는 국체관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식이 막말-메이지초기 이래로 연속되면서 진화론으로 이어지는 지적 관심들을 규정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동시에 이전 스스로 의지하던 인격적 ‘천’관념의 형이상학마저 함께 포기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가토의 진화론수용은 ‘천손’의 ‘천’뿐만 아니라 ‘천부인권’의 ‘천’마저 함께 부정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가토의 진화론수용은 어떤 정치적 고려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당시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가진 문제의식을 끝까지 궁구한 결과 도달한 귀결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Kato Hiroyuki(加藤弘之), who was a pioneer of evolution acceptance in the early Meiji period, left a research note called "gidou-bibou(疑堂備忘)" that describes in detail his learning process about evolution theory. In this note, a book that Kato had been reading and a problem that he had been thinking is concretely recorded. Therefore, this note can be regarded as a valuable article to analyze kato's ideological trajectory. So many researchers examined the evolution acceptance problem of Kato based on this note. However , existing studies mainly focused on the Kato's so-called ' turning '. Therefore they considered evolution acceptance problem as kato's reason of political conservatism or as 'incorrect or misunderstanding' of that. From a different point of view, this study focused on successive sides of Kato's thoughts before and after acceptance of the evolution, and analyzed whether having any involvement with the era situation at the time. In particular, we checked that how kato's ideological challenges - japanese 'cultural enlightenment' and 'national polity theory' at the time - arrive to the 'evolution theory' through the 'race idea' by learning Western thoughts. However, this process had to give up with the metaphysics of 'the idea of personal heaven' that was previously self-commitment at the same time. As the result, acceptance of evolution theory of kato denied 'descendant of Heaven' as well as 'natural rights ideas' at once. In that sense, evolution theory acceptance of Kato will have to say that political considerations rather than the result of his problem awareness.

明治初期進化論受容に産婆役をした加藤弘之は、自分の進化論学習過程を詳しく記した研究メモの「疑堂備忘」を残した。このメモには当時の加藤が読んでいた本、考えたいた思考などが具体的に記録されている。そのため、このメモは加藤の思想的軌跡を分析するに貴重な資料であると言える。そこで多くの研究者がこの資料に踏まえて加藤の進化論受容問題を検討した。しかし、既存の研究は主に加藤のいわゆる'転向'以後の行跡にフォーカスをあてた。そのため彼の政治的保守化の理由として進化論受容問題を検討したり、あるいは彼の進化論理解の'正しさ'や'誤解'などを検証するのに留まるきらいがあった。本研究ではちょっと視点を変え、加藤の進化論受容の内在的側面、即ち彼の進化論受容以前の思想との連続的側面に注目する。特に加藤が直面した思想的課題、すなわち当時の日本の'文明開化''国体論'などに関する問題意識を媒介に西欧思想を学習しながら'人種'を経て'進化'に辿り着く道程を明らかにする。そしてその学習過程の中に'天孫'的君主が国家を私有するという国体観を否定しようとする意識が幕末ー明治以来に連続しながら進化論に繋る知的志向を規定していることを確認した。同時に、このような意識は、以前みずから頼っていた人格的'天'の形而上学まで一緒に諦めさせた。加藤の進化論受容は'天孫'の'天'だけでなく'天賦人権'の'天'まで一緒に否定する結果につながったのである。その意味で加藤の進化論受容は、ある政治的考慮によってなされたというよりは、彼が持っていた当時の問題意識を最後まで窮めた結果であったと言うべき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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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고전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만화화 한 작품 『아사키유메미시(あさきゆめみし)』는 대중의 스토리텔링 리터러시(Storytelling literacy)를 의식하여 다양한 전략이 사용된 작품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본 논문은 어떠한 전략이 독자의 리터러시를 의식하여 『아사키유메미시』안에서 사용되었는지를 향유의 전략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먼저 『아사키유메미시』가 발표된 시기는 소녀만화의 전성기를 거쳐 독자의 텍스트 이해능력이 성숙해진 시기라는 점, 또한 원전인 『겐지모노가타리』를 충실하게 만화화 한 만큼 원전의 특징을 소녀만화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소녀만화의 성숙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필요로 했다는 점을 논하였다. 다음으로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이로고노미(色好み)라는 특성은 현대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관념으로, 따라서 이러한 인물상을 소녀만화에서 요구되는 인물상으로 변형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원전에는 후지쓰보라는 여성의 겐지에 대한 애정에 대한 묘사가 충분하지 않은데, 이것은 독자가 원전을 감상할 때 느끼는 불만족스러움, 혹은 독자의 텍스트 이해의 빈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아사키유메미시』는 정확하게 서술하여 독자의 텍스트 이해의 리터러시를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이 향유자 이해의 빈틈을 메우는 방법이 필요한 이유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원전의 특성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따라서 독자가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아사키유메미시』, 나아가 원전을 이해해할 수 있도록 원전의 해석을 전면에 내세워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녀만화라는 장르의 스토리텔링 방법은 모노가타리(物語)라는 작품의 특징을 잘 살려낼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을 의식하여 『아사키유메미시』가 효과적으로 원전을 만화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Asakiyumemishi(あさきゆめみし)』, the works of the classic cartoon(manga) stylization of Classic 『Genji monogatari(The Tale of Genji, 源氏物語)』 is the works where a variety of strategy is used by being aware of public Storytelling literacy. Having an eye on this point, this thesis considered what kind of strategy was used in 『Asakiyumemishi』 sensing readers' literacy in the aspect of strategy of enjoyment. First, I argued that the times when 『Asakiyumemishi』 was published was the period that readers' text understanding ability became mature after the heyday of girl cartoons(shojo manga), and as it adapted the original 『Genji monogatari』 for cartoons stylization faithfully, and it required a time setting of the maturity of girl cartoons to express the characteristic of the original. Next, we pointed out that the characteristic of the hero Hikaru Genji(光源氏)'s ‘irogonomi(色好み)’ is the idea difficult for a moderner to understand, and therefore it transformed such a personal character into a figure required in girl cartoons. In the original, the description on woman Fujitsubo's love toward Genji is not sufficient, but this can be called as dissatisfaction which a reader feels in appreciating the original, or the crack for understanding. 『Asakiyumemishi』 describes this point exactly and extends the literacy of readers' text understanding. Likewise, the reason why it requires the method to fill up the crack of enjoying reader's understanding is connected to the property of the origin to be understood only through considerable much time and efforts, therefore, we can understand it uses the method to repeat the interpretation of the original in the front so that a reader may understand 『Asakiyumemishi』, further, the original without special efforts. Finally, I clarified the point that the storytelling method of girl cartoons genre can revive the characteristic of the works of monogatari(物語) properly, and it is aware of this point and reconstructs 『Asakiyumemishi』 original into the cartons effectively.

『源氏物語』を漫画化した作品『あさきゆめみし』は大衆のストーリーテリング·リテラシー(Storytelling literacy)を意識して多様な戦略を用いている。このような点に着目して、本稿では『あさきゆめみし』が読者のリタラシーを意識して如何なる戦略を駆使しているかを、「享受の戦略化」という側面から考察してみた。まず、『あさきゆめみし』が発表された時は、少女漫画の全盛期を経て読者のテキストへの解読力が成熟した時期であること、また、『源氏物語』を充実に再現しようとしただけに、原典の特徴を少女漫画として表現するためには少女漫画の成熟という時代背景が要求されていたことを論じた。次に光源氏の色好みという特性は現代には通用しない観念で、ゆえに、『あさきゆめみし』においては源氏の人物像を少女漫画に相応しいものに転換せざるを得なかったことを指摘した。また、原典においては藤壺という女性の源氏への愛情が十分に描かれていない。これは読者が原典を鑑賞する際に感じる隙間、または、物足りなさであるといえよう。この藤壺の心理を『あさきゆめみし』は明確に述べ、読者のテキストと対話するリタラシーの幅を拡大してゆく。かくのごとく、享受者の理解における隙間を埋める方法が必要な理由は、相当の時間と努力を注いでこそ、理解し得る原典の特徴とも連なっている。それゆえに、読者の苦労を要せずとも『あさきゆめみし』、ひいては原典が理解できるように、この漫画は明確な解釈を全面に打ち出しているのである。最後に、少女漫画というジャンルのストーリテリングの方法は物語という作品の特徴をよく捉え、表現し得ることに着目し、このことを意識して『あさきゆめみし』は原典を効果的に再構成してい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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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일본문화사관(日本文化私観)」(1942)은 일본문화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논저 중 하나이다. 「일본문화사관」이라는 제목은 유대계 독일인 건축가인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가 사카구치 안고보다 앞서 발표한 『일본문화사관(日本文化私観)』(1936)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약 5년여의 시차를 두고 발표되었다.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1933년에 망명한 세계적인 건축가 타우트는 이후 3년여의 시간 동안 여러 저작을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이른바 ‘타우트 신화’라는 현상이 생겨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타우트의 주장에 대한 찬반에 상관없이 일본의 전통미를 말하는 데에 반드시 타우트가 등장하고 인용되는 풍조가 당시 건축계뿐만 아니라 1930년대 일본의 담론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카구치 안고의 「일본문화사관」이 브루노 타우트의 『일본문화사관』에만 대응하여 쓰인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는 브루노 타우트 한 개인의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도 아니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타우트가 그랬듯이 안고 역시도 ‘건축’을 출발점으로 한 ‘문화’론을 전개했을 뿐이고 이를 동시대적인 시류 앞에 던졌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사카구치 안고의 「일본문화사관」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시대적 담론 속에 어떠한 가상의 상대를 상정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취한 전략은 무엇이었나를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그 동시대적・현재적 의의를 다시금 고찰하고 조명해 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사카구치 안고 「일본문화사관」이 1930년대 일본에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가 공모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동시에 이들 이중의 가상 적에 대한 무엇보다 철저한 비판이자 저항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러한 사카구치 안고의 전략은 성공했을까. 그 답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Ango Sakaguchi’s Nihon Bunka Shikan (1942) is a article widely discussed when it comes to the topic of Japan culture. The title was borrowed from Nihon Bunka Shikan (1936) by German Jewish architect Bruno Taut. Taut moved to Japan in 1933 to escape the Nazis and published many books, thereby emerging as a legendary figure. His views were cited in all discussions of Japan’s traditional aesthetics. This trend of using Taut’s work as reference rules not only in the field of architecture, but also in general discourse in 1930s Japan. However, Ango Sakaguchi’s Nihon Bunka Shikan was not written solely as a response to Taut’s book of the same title. It should not be perceived as a direct refutation to the views of Taut. Sakaguchi used architecture as a starting point in developing cultural discourse and brought up a subject in the same period. This paper examines th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Ango Sakaguchi’s Nihon Bunka Shikan. This will reveal the collusion between universalism and particularism in 1930s Japan, and show that the article served to criticize and resist the targeted enemies. Were Ango Sakaguchi’s strategies successful? The answer lies in those living in the present.

坂口安吾「日本文化私観」(1942)は日本文化を論じる際に欠かせない論考である。題目の「日本文化私観」は、ユダヤ系ドイツ人建築家であるブルーノ・タウトによる『日本文化私観』(1936)から採ったものである。彼がナチスの迫害を恐れて日本に亡命し、一九三六年十月までを過ごしたこと、その間『日本文化私観』をはじめ多数の本を著し、いわゆる「タウト神話」といわれる現象が生じたことは周知の通りであろう。日本の伝統美を語る際にタウトを登場させるという風潮が、当時の建築界に限らず、一九三〇年代日本の言説空間を支配していたのである。だがそれにしても、坂口安吾の「日本文化私観」なるものが『日本文化私観』あるいはブルーノ・タウト一個人への反駁としてのみ書かれたものではないことに注意する必要がある。おそらくタウト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坂口安吾も「建築」を出発点にした「文化」論を展開したのであり、これを同時代の時流に投げ込んだのであろう。坂口安吾「日本文化私観」とはいかなる磁場におかれ、いかなる相手を想定していたのか、これらの仮想敵に立ち向かうために取った戦略とは何だったのか。坂口安吾「日本文化私観」は一九三〇年代日本における普遍主義と特殊主義の共謀を暴露し、さらにはこれら二重の仮想敵に対する徹底した批判と抵抗として機能していたことが本稿の考察から明らか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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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를 통해서 본 한일관계의 상호인식

박진우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7호 2014.12 pp.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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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0원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해방 70년,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 5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한일관계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실로 국교 정상화 이래 최악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교정상화 50년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볼 때, 한일관계가 항상 갈등과 대립을 반복해 온 것은 아니다. 양국은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하면서도 상호이해와 우호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이 국교정상화 이래 한일관계가 화해와 협력, 갈등과 대립을 반복해 온 시대적 배경과 요인을 밝히고, 그것이 양국의 상호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주로 여론조사의 데이터를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한일 양국이 상호협력과 화해의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요소는 항상 존재하고 있다. 야스쿠니 문제, 위안부 문제, 영토 문제 등은 여전히 갈등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양국의 정치정세나 정치지도자의 개성에 따라 악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중국과 북한의 동향과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 미국의 역할 등이 복잡하게 얽혀 양국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화해와 협력을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최근의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대화의 장을 확대하고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호이해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맹목적인 내셔널리즘으로 일관한다면 희망적인 한일관계는 결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At the moment when the defeat of Japan, 70th anniversary of Korean independence, and 50th anniversary of normalization of Korea-Japan relations encounter, Korea- Japan relations seem to face more conflicts and disputes than ever. This study is to shed light on historical backdrop and factors of conflicts and reconciliation between two nations, and to examine what impact has been made on mutual perception of both countries based on data from public survey. Despite the fact both countries acknowledge the necessity of mutual cooperation and reconciliation, there have been issues to cause conflicts, such as Yasukuni shrine controversy, comfort women controversy, and territory issues. Both nations, nevertheless, have continuously made efforts for cooperation and resolution. Although it seems fair to say Korea-Japan relations are at their worst, this paper argues that both sides open up more room for dialogue and do the best to make conflicts to an end. It will remain difficult to expect progressive relations between both countries if both keep to maintain blind nationalism without mutual understanding.

日本の敗戦と韓国の解放70年、そして日韓国交正常化50年を迎えようとする時点で、韓日関係は歴史認識の問題をめぐって葛藤と対立が深化している。まさに国交正常化以来最悪の状態であるといっても言い過ぎではないだろう。しかし、国交正常化50年という時間的な幅をもって考えるとき、韓日関係がいつも反目を繰り返してきたわけではない。両国は葛藤と対立を繰り返しながらも、相互理解と友好のための努力と成果を蓄積してきたのである。本稿では、このように国交正常化以来これまでの韓日関係が和解と協力、葛藤と対立を繰り返してきた時代的な背景と要因を探り、こうした現象が両国の相互認識にどのような影響を及ぼし、またどのような特徴や認識差を見せているかを、これまでの韓日関係に対する世論調査のデータを中心に検討したものである。韓日の両国が相互協力と和解の必要性と重要性をともに共有しているにも関わらず、葛藤と対立を引き起こす要素は常に存在している。靖国問題、慰安婦問題、領土問題、強制動員の補償問題などは相変わらず葛藤の要因として機能している。さらにそれが両国の政治情勢や政治指導者の個性によってもっと悪化する可能性も常に存在している。これに加えて、中国や北朝鮮の動向と日本の憲法改正問題、アメリカの役割まで複雑に絡んで両国関係に影響を及ぼしているのが現実である。しかし、日本と韓国は葛藤と対立を繰り返しながらも和解と協力のための努力を続けてきた。最近の両国関係は国交正常化以来最悪ともいえるが、だからこそ対話や交流の場を拡大し、これを克服する為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相互理解のための努力はせず、盲目的で閉鎖的なナショナリズムで一貫するならば、韓日関係の希望的な未来を期待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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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目漱石の『趣味の遺伝』における愛に対する一考察

夫伯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7호 2014.12 pp.13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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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취미의 유전’은 1906년(메이지 39년) 1월 10일에 잡지 ‘제국문학’에 발표된 나츠메 소세키(1867~1916)의 초기 단편 작품이다. 본 작품의 연구사는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염전(厭戦)문학으로서 보는 견해와 신비적인 연애담으로서 보는 견해이다. 논자는 전자에 동의하는 입장이며, 이제껏 이 시점으로 연구를 해왔다. 또한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물들의 부분적인 연애담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후자의 입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취미의 유전’은 염전문학으로서의 구성이 명확하며,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서술이 실로 방대하다. 그러므로 ‘취미의 유전’의 작중 세계 속에서 일관된 사랑 이야기를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논자는 그간의 연구를 통해 ‘취미의 유전’안에 작중 세계를 관통하는 사랑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음을 깨달은 바도 있다. 그것은 타자가 아닌, 주인공의 사랑이야기이다. 본 작품은 전쟁에 대한 비판적인 서술이 첫머리에서부터 중반부까지 전반에 걸쳐 채워져 있다. 그리고 종결부에 이르러서는 염전의 내용으로 매듭지어진다. 또한 마지막 부분의 서술내용을 세밀히 분석해 보아도, 카와카미 코이치와 ‘예쁘고 젊은 여자’ 의 연애담이 본 작품을 표상하는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쓰고 있는 나>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쓰고 있는 나>가 ‘예쁘고 젊은 여자’에게 품고 있는 ‘사랑의 은닉과 그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본다면, 작중세계의 질서에 부합되는 일관성 있는 사랑 이야기가 도출이 되며, 또 그러한 고찰이 성립된다. 본고는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서서, 작중의 작자인 <쓰고 있는 나>의 서술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취미의 유전’ 에 내재된 사랑의 모티브에 대해 탐구를 시도한 논문이다.

Soseki Natsume(1867-1916)’s short story, ‘Shuminoiden’, was published on January 10th, 1906. This study supported that ‘Shuminoiden’ was included in antiwar literature rather than romantic fantasy literature. It is because the standpoint of romantic fantasy literature only focused on the accompanying love story of surrounding peoples. As an antiwar literature, ‘Shuminoiden’ has a great many criticism of the war with the well-organized story structure. Although it was difficult to find a coherent story about love in ‘Shuminoiden’, there was a thread running through the whole story. It was a story about love, parting and inner conflict of the main character in ‘Shuminoiden’. The story began with the statement of the criticism of the war and then, concluded with an antiwar stance in the closing section. Also, based on the detailed analysis on the last part of the story, it would be hard to take ‘Shuminoiden’ as a love story in Kawakami Koich and ‘beautiful young woman’. However, when we focused on the concealed love and inner conflict of the main character (‘I who were writing’), we could assure that ‘Shuminoiden’ consistently showed the theme of love in accordance with order in the world of the story. Therefore, with a new angle on the story, this study attempted to explore the implicit motif of love in ‘Shuminoiden’ based on the main character (‘I who were writing’)’s narration.

『趣味の遺伝』は、1906(明治39)年1月10日に雑誌『帝国文学』に発表された、夏目漱石(1867~1916)の初期短編作品である。この作品の研究史には、2系列がある。厭戦文学としてみる見方と、神秘的な恋愛の物語としてみる見方である。論者は、前者の立場に同意しており、これまで、そうした視座からの研究も行ってきている。そして、主人公の周辺人物による、部分的な恋愛の物語のみに重点を置く後者の立場は、説得力が欠けるものと理解している。『趣味の遺伝』厭戦文学の構が明確であり、戦争に対する批判的な叙述が実に多量である。したがって、『趣味の遺伝』に、作中内世界を一貫するような、愛の物語を求めることは決して容易ではない。しかしながら、論者は、これまでの研究を通じて、『趣味の遺伝』に、作中を貫く愛の話が内在しているということに気付いてもいる。それは、他者によるものではなく、主人公によるものである。この作品は、その冒頭から中盤部の前半にかけて戦争への批判的な叙述で固められている。そして、終結部が厭戦の内容で括られている。また、終焉部における叙述の様相を綿密に分析すると、河上浩一と「美しい若い女」による恋愛譚がこの作品の表象する話として理解することはできない。しかし、<書いている余>がこの作品の主人公であることを着目し、<書いている余>による「美しい若い女」への愛の隠匿とその葛藤という観点から解読されるならば、作品内世界の秩序と整合した、一貫性のある愛の話の導出․考察が成立する。 本稿は、こうした新しい観点から、作中の作者である<書いている余>の叙述への分析と考察をもとに、『趣味の遺伝』の愛のモチーフの探求を試みた論文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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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무라 가즈코는 1990년대 여성이라는 카테고리에 근거하는 페미니즘이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서 사상적 작업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존 페미니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페미니즘 사상가였다. 그녀는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가 ‘섹시즘’(성차별)과 ‘헤테로섹시즘’(이성애주의)을 두 축으로 하여 ‘올바른 섹슈얼리티’를 구축해 왔으며, 그 외의 모든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성적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를 본질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아이덴티티 정치’는 기존의 ‘헤테로섹시즘’에 포섭되고 그를 강화할 위험이 있기에 ‘아이덴티티 중단’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아이덴티티 탈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헤테로섹시즘’이 얼마나 강고하고 유연한 것이라 할지라도 ‘아이덴티티 정치’에 쉽게 함몰되지 않고 그 내적 차이를 항상 의식하면서 지배적 성 시스템에 저항에 갈 것을 그녀의 사상은 강하게 주장한다.

Kazuko Takemura begins her feminism theory in 1990’s when the feminism until then based upon ‘sexual identity’ was no longer effective in the real movement. She proposed that modern capitalism society had constructed ‘the right sex system’ on the two wheels, which was the sexism and the heterosexism, and propelled every other sexuality out of that society. Therefore, Identity politics, if it would not resist on this sex system, would eventually be consumed by the heterosexism, and fortify the system as well. She proposes to stop constucting identity in the feminism movements, and to deconstruct the identity concept itself. These proposition of Takemura may not be easily accomplished, but she is asking the feminism movements constant vigilent to the risk of identity politics.

竹村和子は、1990年代、「女性」というカテゴリーに基づくフェミニズムが失効したとき、その思想的活動を開始する。彼女は近代的資本主義社会が「セクシズム」と「ヘテロセキシズム」を両軸にしながら「正しいセクシュアリティー」を構築し、そこに含まれないすべてのことを抑圧する性的システムを構築してきたと主張する。したがって、これを本質的に批判しない「アイデンティティ政治」は既存のヘテロセキシズムに絡みとられ、それを逆に補強する恐れさえある。竹村はその対応として「アイデンティティ中断」を要求し、「アイデンティティ脱構築」に向か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する。「ヘテロセキシズム」がいかに強固で柔軟なものであるにせよ、「アイデンティティ政治」にたやすく陥ることなくその内的差異を意識しながら支配的な性的システムに抵抗していくことを彼女の思想は強く訴える。このような竹村の主張はその達成は難しいものの本質的なこととしてこれから先フェミニズムの実践の場で吟味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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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오늘날 한일 양국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직시하고,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한일 간의 공존공생의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인문학적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작은 시도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일 양국의 기층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며, 일본의 근대 교육사상에 대한 연구는 근대 이후 일본의 기층문화를 지탱해온 보통 일본인의 사유체계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실증적 단초를 제공해 주리라 믿는다. 구체적으로는 보통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다양한 연구성과를 원용하며 메이지 전기 도덕교육에 대해 조망해 봄으로써 근대기 보통 일본인들의 사유체계 형성에 도덕교육이 담당했던 역할과 의의를 교육사상사적 관점에서 논해 보고자 한다. 도덕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선악(善悪)·정사(正邪)를 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른 행실을 하기 위해 인간의 내면적 원리로써 작용하는, 다양한 규범의 총체이다. 도덕은 학교와 가정생활을 포함해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해 학습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초등교육 과정에서의 도덕교육이 도덕관·가치관을 포함하는 개인의 사유체계 형성에 있어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 초기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전기 도덕교육의 형성과정과 전개양상, 그리고 그 의의를 교육사상사적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본고를 통해 근대를 살았던 보통 일본인의 사유체계 형성과정을 이해하고, 나아가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의 국가관, 세계관을 이해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say the exaggerated, today to face the problems that abound in Korea and Japan, to explore solution of the litterae humaniores for building the future of symbiotic coexistence between Korea and Japan on the basis of mutual understanding I have to. It has to be priority understanding of what Korea and Japan of the base layer culture than for the sake of this.This is because, I Studies on Modern Education of Japan, is because I believe that provide us with the empirical clues for the entity investigation of thinking system, which has been forming a base layer culture of Japan and later modern. Specifically, common core of education and also say to center the education of elementary school, while incorporated the research results that have been accumulated until now, by considering the moral education of the Meiji previous fiscal year, of the modern period ordinary Japanese moral Education in the formation of the thought system is intended to clarify the responsible role and educational history of thought significance. Morality Among human continue to the social life, and to determine the right and wrong-right and wrong properly, serve as personal inner principles to properly act, the totality of the various norms that defines a human relationship. Morality, also called are those that must be learned through life, including school and home life, but absolute in moral education in primary education is to form a thought Birdman, including the morality and values of human best to bottom line and time is given to it is needless to say that affect. In such sense, this paper attempts to discuss the Japan of moral education in the Meiji previous year, to understand the thinking system of living ordinary Japanese modern, in a small clue to understand the thinking system of Japanese living modern Pull believe that could be.

本稿の目的は、大げさに言って、今日韓日両国に山積している問題を直視し、相互理解を基に韓日間の共生共存の未来を構築するための人文学的解決方法を模索することにある。これのためには何よりも韓日両国の基層文化に対する理解が優先せねばならない。日本の近代教育に関する研究は、近代以降日本の基層文化を形成してきた思惟体系の実体究明のための実証的な手がかりを提供してくれると信じているからである。具体的には、普通教育の核心とも言える小学校の教育を中心に、今まで蓄積されてきた研究成果を援用しつつ、明治前期の道徳教育を鳥瞰することによって、近代期の普通の日本人の思惟体系の形成に道徳教育が担わされた割や教育思想史的意義を明らかにするものである。道徳は、人間が社会生活をしていくにおいて、善悪·正邪を正しく判断し、正しく行為するために個人の内面的原理として働く、人間相互の関係を規定する様々な規範の総体である。道徳は、学校や家庭生活を含め、生涯を通して学習せねばならないものであるとも言うが、初等教育における道徳教育が人間の道徳観·価値観を含めた思惟大系を形成するにおいて絶対的な影響を及ぼす一番肝心な時期なのは、二言をまたない。そんな意味において明治前期における日本の道徳教育について考察を試みる本稿は、近代を生きた普通の日本人の思惟体系を理解し、引いては現代を生きる日本人の思惟体系を理解する小さな手がかりになりうると確信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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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일본에서 유교를 학습하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 매체가 성립했다. 데나라이주쿠(手習塾)나 가쿠몬주쿠(学問塾) 등 이들 학습소는 유교에 의한 도덕, 윤리 이른바 오륜질서의 구축과 확립에 기여했는데 학문이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륜’과 ‘일상’이라는 ‘장’에서 구성되는 ‘학문’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을 통해 유교의 사회적 실천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을 유교 프락시스(Confucian Praxis)의 문제라 간주한다. 학문과 일상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사상가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가 있다. 이토 진사이는 공동체의 구축과 유지를 위한 사랑의 학(仁学)을 제시했다. 진사이는 사회 공동체 안에서 유교 실천의 문제를 주된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이토 진사이는 같은 복고학을 주장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진사이와 소라이는 고학파로 분류되는 점에서 서로 통저하는 부분이 있지만 소라이의 진사이 비판에는 유학 실천에 대한 소라이와 진사이의 서로 다른 해법이 내재되어 있다. 소라이는 진사이와 사상적인 충돌을 하면서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는 유교 실천의 방법을 모색해 갔다.

In the premodern Japan, many forms of educational media learning Confucianism were established. So-called ‘learning people’ appeared in Kakumonjuku(学問塾), including Denaraijuku(手習塾) that was for children to learn letters. These schools contributed to constructing and establishing the morals and ethics by Confucianism, so-called Oryun order, which shows that study is closely related with ‘the ordinary life’. Through the investigation into the problem of what meaning the ‘study’ composed in ‘the place’ of ‘humanity’ and ‘the ordinary life’ has, we can think of the social practice by Confucianism. This is considered as a problem of Confucian praxis. There is Ito Jinsai (伊藤仁斎, 1627∼1705) who shaped an idea by closely relating the study with the ordinary life. He suggested the study of love(仁学) to build and maintain community. Humanity and the ordinary life is in the center of his study. He thought the Confucian practice in the social community as his main task. However, he became a target of criticism by Ogyu Sorai(荻生徂徠, 1666∼1728) who argued the same restoration study. There is a part that Jinsai and Sorai come to understanding in the point that they are classified as the ancient study group, but there is the different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practice between them in the Sorai’s criticism of Jinsai. This criticism may be seen that the methodological difference occurred between them in applying Confucianism to society and putting it into practice. Their argument is the conflict between the Soria that emphasizes practical application from a political perspective and the Jinsai that emphasizes the Confucian order and application in the vivid life.

前近代日本で儒教を学習する多様な教育媒体が成立した。手習塾や学問塾など、これらの学習所は儒教による道徳、倫理など五倫秩序の構築と確立に寄与したのだが、これは学問が「日常」と強く関連されていることを意味する。「人倫」と「日常」という「場」において構成される「学問」はどんな意味を持つのかの問題を解明することを通じて儒教の社会的実践の問題を考える。これを儒教プラクシス(ConfucianPraxis)の問題と見なす。学問と日常が密接に関連させ思想を形成した伊藤仁斎(1627∼1705)がいる。伊藤仁斎は共同体の構築と維持のための「愛の学(仁学)」を提示した。ところが伊藤仁斎は同じ復古学を主張した荻生徂徠(1666∼1728)によって批判の対象になる。仁斎と徂徠は古学派である点においては互いに通低する部分があるにしても、徂徠の仁斎批判には、儒学実践についての異なる解法が潜んでいる。つまり徂徠と仁斎の間には儒教を社会に適用し実践するための方法の差異が生じたとみることができる。徂徠は仁斎と思想的衝突を真正面から受けながら政治的意味を強く内包する儒教実践の方法を模索していたと言え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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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세무사들의 원한과 화해

이세연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7호 2014.12 pp.24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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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가마쿠라시대의 무가사회에 초점을 맞춰 원령진혼의 논리를 탐색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의 학지 네트워크를 통해 일찍이 일본사회에 유입된 이덕보원 운운의 격언은 중세에 이르러 원한의 고리를 끊는 논리에 그치지 않고, 원령을 수호신화하는 논리로 확대되었다. 일찍이 일본사회가 경험한 바 없는 지방의 무사정권이 개최한 진혼행사에서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원은 변전하여 친이 된다”고 선언되었다. 이러한 변용은 고래의 원령신앙과 이덕보원 운운의 격언이 습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무사가 짊어진 살생의 죄업에 대한 성찰은 원령부정의 담론을 낳았다. 인과응보의 순환논리에 따라, 일부 무사들은 제명에 죽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령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했다. 살생의 죄업은 무사 원령을 걸러내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선조의 죄업과 관련해서는 적불선・적악 운운의 격언이, 개인의 죄업과 관련해서는 자업자득과의 레토릭이 곧잘 원용되었다. 현실세계의 윤리의식은 또 다른 진혼의 논리도 이끌었다. 가마쿠라시대의 무사들은 공전에서 발생한 원령을 잠재우는 일은 공의 책무라고 인식했으며, 자신들은 사의 영역에서 발생한 원령의 진혼에 힘을 기울였다. 조정과 막부를 기준으로 할 때, 전투와 진혼의 상관관계는 <공전-조정, 사전-막부>라는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비명횡사한 자들을 둘러싼 심적 갈등, 공권력의 분열이라는 변수가 작용하는 가운데, 위의 도식은 누차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This article examined the logic of appeasing vengeful ghosts focusing on the Kamakura warriors. There were several logics of appeasing vengeful ghosts in Kamakura age, which came from the context of buddhism and ethics. The maxim of expiating resentment by virtue, which had came into Japan through the intelligence network of East Asia, was transformed as the logic of cutting off the grudge of chain in Kamakura age. This transformation is the result of the syncretism between the traditional faith to vengeful ghosts and the maxim of expiating resentment by virtue. On the other hand, reflection about the sin of killing led a discourse denying of presence of vengeful ghosts. By the logic of retributive justice, part of the samurai who made a violent death, lost a qualification that can be shaped as a vengeful ghost. Sin of killing functioned as a kind of filtration equipment. Furthermore, there were a logic of Requiem based on the ethics. Kamakura samurai recognized that requiem for the vengeful ghosts generated from public warfare should be took place by the public, and requiem for the vengeful ghosts generated from private warfare must be performed by the private. This recognition can be summarized with the scheme of the <Public warfare─Court vs Private warfare─Bakufu>. However, this scheme was forced to deform often because of the psychological conflict over vengeful ghosts, and the division of public power.

本論文では、鎌倉時代の武家社会に焦点をあわせ、怨霊鎮魂の論理を探索してみた。その結果、次のことが明らかとなった。前近代の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学知ネットワークを通じ、つとに日本社会へ流入してきた以徳報怨云々の格言は、中世にいたって怨恨の鎖を断切る論理に止まらず、怨霊を守護神化する論理へと拡大をみせた。かつて日本社会が経験したことのない地方の武士政権が催した鎮魂行事において、「徳をもって怨に報いれば、怨は変じて親になる」と宣言された。この変容は、古来の怨霊信仰と以徳報怨云々の格言とが習合した結果といえる。一方、武士が担う殺生の罪業についての省察は、怨霊否定の言説へつながった。因果応報の循環論理によって、一部の武士は非業の死を遂げたにもかかわらず、怨霊として形象化されうる資格を失した。殺生の罪業は、武士の怨霊の発生をめぐり、一種のろ過装置として機能した。祖先の罪業とかかわっては、積不善・積悪云々の格言が、一方、個人の罪業とかかわっては、自業自得果のレトリックがよく援用された。なお、現実世界の倫理意識からは、いまひとつの鎮魂の論理が導き出された。鎌倉時代の武士たちは、公戦から生じた怨霊を鎮めることは公の責務であると認識し、自らは私の領域で生じた怨霊の鎮魂に奔走した。朝廷と幕府を基準にするなら、戦いと鎮魂の相関関係は、<公戦─朝廷、私戦─幕府>の図式をもってまとめられる。しかし、非業の死を遂げた者たちをめぐる心理的葛藤、公権力の分裂という変数が働くなか、上記の図式は度々曲りくねざるをえ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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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에서는 메이지(明治)유신과 청일정쟁을 통해 ‘사상적’ 재국의식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메이지유신을 일본이 일구어낸 서구숭배와 동아시아 내부의 헤게모니 재편에 대해 새로운 지평으로서 메이지유신과 청일전쟁을 중첩시켜, 근대 일본의 천황제 국가를 창출해 내는 논리를 재조명한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유신>과 <복고>라는 서로 모순되는 슬로건으로 내걸고 출발했기 때문에, 내적으로는 서구숭배와 일본주의의 절충을 둘러싼 진통을 겪었다. 그것은 서구의 보편적 이데올로기인 ‘문명개화와 식산흥업’을 수용하면서 서구화를 달성하는 ‘성공적’ 이지미의 이면에 지식인들의 사상적 논쟁이 부국강병을 발효시키고 있었다. 서구를 수용하면서 일본주의를 만들어내는 국수주의,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자는 국가주의는 서구해체 뿐만 아니라 서구 융합과 동아시아의 주체 및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논리들이 충돌하면서 사상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논쟁을 거쳤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프랑스에게 패하는 것을 보면서, 후쿠자와 유치가 주장하는 탈아론이나 도쿠토미 소호가 주장하는 문명의 지도자라는 서구숭배로 일원화되고 영국과 독일식 군(軍)제도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면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이어갔고, 동아시아에서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완성해 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기의 보수주의 논리와 청일전쟁의 승리라는 제국주의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그것은 현재적으로도 유용하게 작용하는 일본의 제국의식으로 자리 잡았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Meiji Restoration opened the curtain of overall westernized of modern Japanese society. The emperor became the fusion of tradition and westernization in the course of Japanese westernization, and incarnated as the founder and symbol of the Empire of Japan. Fukuzawa Yukichi and other intellectuals’ enlightenment and nationalism consciousness turned into booster of Japanese society’s westernization the British monarchy and military system in German also became Japan's westernized model samples, modern Japanese accomplished the main path selection of construction of the Empire of Japan by the way of war. Moreover, Japan not only completed comprehensive westernization, but also produced and cured a disparaging cognitive system for Asia especially China and South Korea.

日本西欧化及び近代化は、19世紀後半においては世界的な発展趨勢の中で成し遂げられた。そのなかで、文明開化、殖産興業は日本社会の近代化のなかで、比較的に成功した西欧化政策であった。ところが、富国強兵はあ、中国と韓国を侵略する「暴力」の上で、成し遂げらてた時代錯誤的な「国策」であった。これは、明治期の近代知識人の思想構図の中でも現れ、日本の「時代錯誤的」なイデオロギーを構築する上で、大きな「思想富国強兵」を発明したのである。日本は、日本が自称するように西欧化の成功は、日清戦争によって、検証されたのである。ところが、明治維新の出発は、復古と維新という矛盾する概念を内包して出発したように、その思想的分裂の陣痛を経た。その過程で、西欧崇拝と日本独自化の対立主張以外にも、西欧と東アジアの融合を打ち出す「国粋主義」が擡頭し、多様な思想戦が繰り広げられるが、戦後橋川文三が分析した「時代的特性としての保守主義」として統一され、「天皇」を共通分母とする思想を産み出した。それは福沢諭吉と徳富蘇峰のような「近代文明優先主義者」が主張する脫亞理論であり、日本保守主義の精神の核である天皇主義を確立していく道程であった。それは、日本知識系における民族優越論と民族文化を国民意識として融合論理として、中国と朝鮮蔑視と戦争による特殊的な背景の本で醱酵されたことを浮かび上がらせ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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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争詩の系譜とラジオの台頭 - 野口米次郎の戦争詩をめぐって -

堀まどか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7호 2014.12 pp.30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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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시인 노구치 요네지로(野口米次郎)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미디어의 발흥(勃興)과 전쟁시(戰爭詩)의 계보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서구의 시사(詩史)에서는 전쟁을 테마로 한 시는 수많이 존재했지만 일본 시가의 전통에 있어서는 전쟁을 테마로 한 것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의 전쟁시란 서구로 부터의 영향을 받는 근대시인들 사이에서 의식되어 몰두하게 된 극히 근대적인 장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가장 먼저, 노구치 요네지로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젊은 전쟁시인의 출현과 종래의 국민시(國民詩) 전통에 주목하여 1918년에 발표한 논고를 검토하였다. 그는 영국의 루퍼트 브룩(Rupert Brooke)이나 제임스 엘로이 플레커(James Elroy Flecker)에 의한 리얼리즘의 전쟁시 출현이 영시(英詩)의 혁신이나 쇄신의 조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일본의 시인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말했다. 이러한 문학사관과 시인의 역할의식은 일본의 민중시파나 쇼와시대(1926년∼1989년)의 모더니즘 시인 등에 의해 계승되어 갔다. 두 번째로 주목한 것은 이 제1차 세계대전에 태어난 전쟁시에 대한 인식이 그 후의 사회와 어떻게 이어졌는가라는 점이다. 일본에 있어서 1930년대부터 전쟁시나 내셔널리즘시가 양산된 시대는 라디오 보급의 시대와 딱 겹친다. 문예춘추(文藝春秋)의 「라디오 익명비판」기사의 검증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라디오는 개통된 당초부터 국가의 통제 하에 있는 국제적 선전을 위한 미디어이며 ‘보도’, ‘교육’, ‘위안’이 그 역할이었다. 애초에 올바른 정보의 빠른 전달이 주안점이었던 미디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즉 라디오방송국이 요구하는 전쟁시의 내용과 그 역할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그러한 제약이 있는 가운데 시인들이 어떠한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자신들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었는가, 국가를 짊어진 사명감의 배후에 있는 망설임이나 저항의 심경을 어떻게 표현하려 하였는가를 검증했다. 노구치 요네지로를 포함해서 안도 이치로(安藤一郎) 등의 모더니스트 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영국의 전쟁시인을 들며 전쟁시의 위치를 모색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영국의 전쟁시인의 출현에 대한 반응과, 라디오의 대두라는 사회문제는 일본의 전쟁시를 생각함과 동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본고에서 논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dern history of Japanese war-poetry and radio-broadcasts involving YONE Noguchi. There is a long history of war-poetry in the West, but war poetry was not common in traditional Japanese poetry in the pre-modern period. In other word, Japanese war-poetry is a modern genre, which was approached through the reception of Western literary thoughts and methods. This article firstly verifies that Noguchi’s article, written in 1918, which served as an introduction on the emergence of English war-poetry during WWI and argued its innovative point upon the English poetic history. Noguchi’s explanation about the poetical modernization and the role of poets was handed down to the Japanese of the next generation: such as ‘the Grass-roots poets' (民衆詩派) and the modernists of the 1930-1940’s. Secondly, this study focuses on the fact that the mass production of war-poetry went out over the pervasiveness of radio-broadcasts. From the beginning, it was operated as a national public affair, or the propaganda agent for public strategy. As one anonymous author of the magazine ‘Bungei-shunjyu' (文芸春秋) has critically argued, the purpose and role of radio was not only ‘news reporting’, but ‘education’, ‘consolation’. This study, thirdly, approaches that of the self-understanding and psychological repression of poets in the wartime years, and analyzes the possibility of expression while under national control, through concerns of the obverse & reverse sides of radio-broadcasting.

本稿は、詩人・野口米次郎を中心に、新しいメディアの勃興と戦争詩の系譜について、考えたものである。西欧の詩史のなかでは戦争をテーマにした詩は数多く存在したが、日本の詩歌の伝統においては、戦争をテーマにしたものはきわめて稀であった。日本の戦争詩とは、西欧からの影響を受ける近代詩人たちのあいだで意識されて取り組まれるようになったきわめて近代的なジャンルであったといってよい。本稿では第1に、野口米次郎が1918年に発表していた、第一次世界大戦時の若き戦争詩人の出現と従来の国民詩の伝統に注目した論考を検討した。彼は、英国のルパート・ブルックやフレッカーらによるリアリズム式の戦争詩の出現が、英詩の革新や刷新の潮流をひきおこしていることを解説しながら、日本の詩人としての役割と使命がどうあるべきなのかを説いた。このような文学史観と詩人の役割意識は、日本の民衆詩派や昭和期のモダニズム詩人らに引き継がれていく。第2に注目したのは、この第一次世界大戦時に生まれた戦争詩認識がその後の社会とどう繋がったのか、という点である。日本において1930年代から戦争詩やナショナリズム詩が量産された時代は、ラジオの普及した時期とまさに重なった。『文芸春秋』の「ラジオ匿名批判」記事の検証からも明らかにされたが、ラジオは、開通当初 から国家の統制下にある国際広報戦のためのメディアであり、「報道」「教育」「慰安」が役割であった。そもそも正しい情報の速報性が主眼におかれたメディアではなかった。それゆえに、ラジオ放送局から求める戦争詩の内容とその役割に、おのずから制約が起こるのであった。第3には、そのような制約のあるなかで、詩人らがいかなる心理的抑圧をうけ、自らの役割を意識していたのか、国家を背負う使命感の背後にある戸惑いや抵抗の心境をいかに表現しようとしていたかを検証した。野口米次郎を含め、安藤一郎らのモダニスト詩人らは、第一次世界大戦の英国の戦争詩人らを挙げながら、戦争詩の在り方と位置を模索したのである。第一次世界大戦の英国の戦争詩人の出現に対する反応と、ラジオの台頭という社会問題は、日本の戦争詩を考えるうえで重要な意味をもっていたことを、本稿では論じ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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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칙 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27호 2014.12 pp.327-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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