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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41호 (13건)
No
1

6,100원

본고에서는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의 피폭 조선인 기록과 구리하라 사다코(栗原貞子)의 「히로시마라고 말할 때(<ヒロシマ>というとき」, 「돌 속에서 (石のなかから)」라는 시에 나타난 피폭 조선인 표상에 대해서 고찰했다. 회화 쪽은 마루키 이리·도시(丸木位里·俊) 부부의 <원폭도> 시리즈 중 14부 「까마귀」라는 작품을 분석했다. 이시무레의 기록에 처음 나타난 피폭 조선인의 ‘정형화된 까마귀 관련 표상’은 마루키의 「까마귀」 그림으로, 구리하라의 「돌 속에서(石のなかから)」라는 시로 이어졌다. “정형화된 까마귀에 쪼아 먹히는 참혹한 피폭 조선인” 표상은 일본인의 피폭 체험의 기억 속에 불쌍한 식민지인이라는 존재를 부각시켰다. 전쟁의 ‘가해’의 문제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결락, 망각되기 쉬워진다. 모든 희생의 기억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놓고 추상적 고통으로 획일화하는 것도 위험하다. 피해자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고통의 서열화와 획일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This paper examines Michiko Ishimure’s depiction of Korean atomic bomb victims, as well as Sadako Kurihara’s “When we call it Hiroshima” and “From the Stones.” The “shaped representation of a crow” by the Korean victims, first appearing in the Ishimure’s records, was a picture of a log “crow”, and it inspired Kurihara’s poem “From the Stone.” The representation of “a miserable Korean being eaten by a shaped crow” highlighted the presence of tragic Koreans in Japanese memories of the bombings. The notion of “harm” in war can easily be overlooked in this process. Separating sacrificial memories from their historical context and homogenizing them with abstract pain is risky. As a necessary consequence, we must be wary of standardizing pain while empathizing with the victims’ anguish.

本稿では、石牟礼道子の被爆朝鮮人の記録と、栗原貞子の「<ヒロシマ>という時」、「石のなかから」に表れた被爆朝鮮人の表象について考察した。 石牟礼の記録に初めて現れた被爆朝鮮人の「整形化されたカラス関連の表象」は丸木の「カラス」の絵で、栗原の「石のなかから」という詩につながった。 「整形化されたカラスに食われる惨めな被爆朝鮮人」表象は、日本人の被爆体験の記憶の中に悲惨な朝鮮人という存在を浮き彫りにした。戦争の「加害」の問題は、このような過程の中で欠落、忘却されやすくなる。すべての犠牲の記憶を歴史的文脈から切り離し、抽象的な痛みで均一化することは危険だ。被害者の苦痛に十分共感しながらも苦痛の配列化と画一化を警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だ。

2

8,200원

『홍도관기술의(弘道館記述義)』는 일본의 유학자 후지타 도코(1806-1855)가 미토 번(水戸藩)의 번교(藩校)인 고도칸(弘道館)이 세워졌을 당시, 번주(藩主)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의 명을 받고 그 교육 취지를 올린 글이다. 후지타 도코는 일본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후기 미토학(水戸学)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며, 그의 사상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 메이지 유신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어, 현대 일본의 정치사상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홍도관기술의』는 후지타 도코의 대표 저작으로,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홍도관기술의』의 저술 배경에는 신도와 유교의 합일, 문과 무의 병행이라는, 미토 번의 사상적 배경이 있다. 이것은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한 미토 번의 번교 교육 방침이기도 했다. 도코는 유교를 따르긴 하나, 중국에서 탈피한 일본 중심적인 구도를 강조한다. 도코는 일본 태양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천황 가(家)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존왕양이의 구도를 주장하며, 황실을 높이는 것을 문의 영역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을 무의 영역이라 하며 존왕양이가 바로 문무합일이 됨을 말했다. 도코는 아버지 후지타 유코쿠의 「정명론」에서 나타난 관점을 계승, 발전시켜 군신론을 주장했다. 아무리 권력이 강해도 일본의 왕은 천황가이며, 그것은 불변의 것으로, 천황은 천지신에 대한 제사로 위엄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러한 천황가는 일본의 국체로, 천황을 높이는 것이 바로 일본 고유의 것을 강조하는 신도와 임금에게 충성하는 충(忠)의 합일이 된다. 도코는 불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도코는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온 유교와 다른 태도인데, 아마도 세속적인 성격이 비교적 약하며, 부모와 군신을 비롯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는, 천황을 높이고 천황과 신하의 관계를 확실히 하며 일본 고유의 것을 강조하는 도코의 사상과 대치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후지타 도코의 사상은 유가의 정명론·주자학적 대의명분론이 일본에서 미토학을 거치며 절대적 군신관계가 강조되며, 국수주의·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해져 존왕양이 사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Kodokangijutsugi(弘道館記述義)> is an article written by Japanese Confucian scholar Fujita touko(藤田東湖), who received the order of Tokugawa nariaki(徳川斉昭), the monarch of Mito Domain(水戸藩), and posted the educational purpose of Kodokan(弘道館) when Mito Domain’s Clan school(藩校), Kodokan, was established. The writing background of <Kodokangijutsugi> is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Mito Domain: the unity of Shinto(神道) and Confucianism, and the parallelism of literature(文) and the policy of militarism(武). Fujita touko emphasizes the Japanese-centered structure that broke away from China. Fujita touko advocated the ideology of Sonnojoi(尊王攘夷) to elevate the family of the emperor, who inherited the legitimacy of Japan’s Solar deity(太陽神), and defeat external enemies, and said that raising the emperor is literature’s domain, and defeating barbarians is the policy of militarism’s domain. He said that the ideology of Sonnojoi becomes the parallelism of literature and the policy of militarism. Fujita touko inherited and developed the viewpoint that appeared in <Seimeiron(正名論)> of his father Fujita yukoku(藤田幽谷). No matter how strong the power, the king of Japan is the emperor, and that is unchanging. And the emperor shows his majesty by offering sacrifices to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Such an emperor’s family is Japan’s National polity(國體), and it is a union of Shinto, which emphasizes that raising the emperor is unique to Japan, and Loyalty(忠), a Confucian who is loyal to the king. Fujita touko showed an attitude that rejected Buddhism, because it was not unique to Japan. This is a different attitude from Confucianism from China. Perhaps it is because Buddhism, which has a weak secular nature, is opposed to the idea of Fujita touko, which emphasizes the uniqueness of Japan and establish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ing and the subject.

「弘道館記述義」は、日本の儒学者藤田東湖が水戸藩の藩校である弘道館が立てられた時に、藩主徳川斉昭の命を受けて、その教育の趣旨をあげた文である。藤田東湖は、日本で思想的に非常に重要な人物で後期水戸学を代表する人物の一人であり、彼の思想は西郷隆盛·吉田松陰など、明治維新に関する重要人物たちに影響を与え、現代日本の政治思想にまで続いている。「弘道館記述義」は、藤田東湖の代表著作で、彼の思想を研究するために最も重要な材料の一つである。 「弘道館記述義」の著述背景には、神道と儒教の合一、文武の並行という、水戸藩の思想的背景がある。これは徳川斉昭を中心とした水戸藩の藩校教育方針でもあった。藤田東湖は儒学者だったが、中国から脱皮した日本中心的な構図を強調する。藤田東湖は、日本太陽神の正統性を受け継いだ天皇家を高め、夷狄を退ける尊王攘夷の構図を主張し、皇室を高めることを文の領域で、夷狄を退けることを武の領域と言って尊王攘夷がまさに文武合一になることを述べた。 藤田東湖は父藤田幽谷の「正名論」の観点を継承、発展させた君臣論を主張した。彼はいくら権力が弱くても、日本の王は天皇家であり、それは不変のもので、天皇は天地の神に祭祀を行うことで威厳を現すという。彼によると、このような天皇は日本の国体で、天皇を高めるのことが日本固有のものを強調する神道と王に忠誠を尽くす儒教の忠の合一になる。 藤田東湖は仏教を排斥する態度を見せた。藤田東湖はその理由を日本固有のものではないからだと言う。これは、中国から来た儒教と異なる態度である。これはおそらく、世俗的な性格が比較的弱く、親と君臣をはじめとする人間関係から抜け出し、最終的に解脱を追求する仏教は、天皇を高め王と臣下の関係を確実にし、日本独自のものを強調する彼の思想と対峙するためと思われる。 藤田東湖の思想は儒家の正名論と朱子学的大義名分論が、日本の水戸学を経て絶対君臣関係が強調され、ナショナリズム·民族主義的な性格が強くなって尊王攘夷思想で展開されたことを示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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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문학 속의 주일 미군기지 표상과 한국전쟁

남상욱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41호 2021.12 pp.6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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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이 글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본토의 이른바 ‘주류’ 문단에 속하는 작가의 작품 속 미군기지 표상 변화를, 마쓰모토 세이초의 「검은 피부의 문신」(1958) 과 다쿠보 히데오의「깊은 강」(1969) 속의 미군기지 표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점령기 검열로 인해 베일에 가려졌던 미군기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이후 일본 문학 작품 속에서 본격적으로 표상되지만, 그것은 주로 ‘풍요로움’이라는 형용사로 대표되는 물질적 풍요로움이었다. 반면 「검은 피부의 문신」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군기지의 군사적 성격 강화를 드러내는 데 성공하지만, 흑인 병사 전사자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인종적 차이를 이념적 차이로 바꾸려는 냉전체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미군기지가 잠재적 핵의 보유 장소로서 인식되었던 1960년대 후반에 발표된 「깊은 강」은 한국전쟁이 결코 일본열도와 무관한 전쟁이 아니었음을 환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내에 미군기지가 존재하는 한 일본 외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부터 빠져나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로 귀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인식시킨다는 점에서 냉전 체제의 문제성을 잘 드러내는 텍스트이다. 일본인 작가들의 미군기지 표상은 재일조선인 작가들이나 오키나와 작가들의 그것과 비교해볼 때 여전히 냉전에 관여되고 있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 일본 내 미군기지의 성격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반기지투쟁과 미군기지 철수가 어떠한 정서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narrative aspects of the US military base in Japanese novel From the 1950s to the 1960s, focusing on the representation of US bases in “Kurojinoe” (1958) by Seicho Matsumoto and “hukaikawa” by Hideo Takubo. (1969). The U.S. military base, which was not represented due to censorship during the occupation period, was represented in earnest in Japanese literature after the San Francisco Treaty of Reinforcement. But it was mainly material abundance represented by the adjective ‘richness’. On the other hand, “Kurojinoe” succeeds in revealing the strengthening of the military character of the US military base due to the Korean War. However, the meaning of the Cold War system to change racial differences into ideological differences is not understood properly because it focuses too much on black soldiers. “hukaikawa”, published in the late 1960s when the U.S. military base was recognized as a potential nuclear possession site, reminds us that the Korean War was never a war unrelated to the Japan. And this is a text that clearly reveals the problems of the Cold War system, as long as there is a U.S. military base in Japan, how difficult it is to escape from war outside Japan and return to the traditional village community. Compared to that of Korean writers and Okinawa writers in Japan, it is true that these Japanese writers lack critical awareness of Japan, which is still involved in the Cold War. However, they show how the Korean War changed the nature of U.S. military bases in Japan, helping to understand how the anti-base struggle and withdrawal of U.S. military bases took place.

本稿は1950年代から1960年代にかけて、本土の日本文学に属する作家の作品における米軍基地の叙事の様相を、松本清張の「黒字の絵」(1958)と田久保英夫の「深い川」(1969)における米軍基地の表象を中心に考察する。 占領期検閲によって表象されなかった米軍基地は、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以後、日本文学テクストにおいて本格的に表象されることになるけれど、それは主に「豊かさ」という形容詞に代表される物質的豊かさであった。それに対し「黒字の絵」は、朝鮮戦争による米軍基地の軍事的性格の強化を露わにすることに成功するが、黒人兵士の戦死者に焦点を当てすぎたあまり、人種的な違いを理念的な違いに変えようとする冷戦体制の意味を十分に語れない。 米軍基地が潜在的な核の保有場所として認識されていた1960年代後半に発表された「深い川」は、朝鮮戦争が決して日本列島と無関係な戦争ではなかったことを喚起させるのに止まらず、日本国内に米軍基地が存在する限り、日本国外で行われている戦争から離れ、伝統的な村共同体に帰還することもいかに難しいかを読者に認識させるという点で冷戦体制の問題性をよく表しているテキストである。 これら日本人作家の米軍基地の表象は、在日朝鮮人作家や沖縄作家のそれと比較してみると、依然として冷戦に関与している日本に対する批判的認識が不足しているのは事実だが、朝鮮戦争によって日本国内の米軍基地の性格がどのように変えたのかを示すことで、反基地闘争と米軍基地撤収がどのような情緒の中で行われるようになったのかを理解するのに役立つ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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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0원

니지마 야에(新島八重)는 아이즈번 출신으로 보신전쟁에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던 여성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독특한 이력을 지닌 야에가 여성사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여성사 연구에서 근세=억압, 근대=해방이라는 이분법적 이해를 전제로 한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주목은 많았지만, 패자의 공간에 있던 여성에게 근대는 오히려 차별과 억압의 시작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중의 그물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본고는 막말유신이라는 전환기를 살았던 야에의 정체성 형성과 자기인식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야에는 여성이면서 동시에 보신전쟁에 직접 총을 들고 참여한 아이즈인이었다. 그러므로 야에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 아이즈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또 그의 개인적 정체성이 아이즈인이라는 집단적 차원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중요하다. 야에에게 아이즈인이라는 정체성은 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보신전쟁은 정치적 주체로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Niijima Yae was a woman from the Aizu Domain who stood on the battlefield with a gun during the Boshin War and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fighting.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lthough Yae has such a unique history, it has not received much attention in women’s history. This is because, although much attention has been paid to the so-called “new women,” based on the dichotomous understanding of “early modern=oppression” and “modern=liberation,” a double net has been cast in that modernity was also the beginning of discrimination and oppression for women who were in the space of losers. This paper examines the aspects of Yae’s identity formation and self-awareness as she lived through the transition period of Meiji Restoration. Yae was a woman, but at the same time she was an “Aizu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Boshin War with a gun. Therefore, it is important to pay attention to the meaning of Aizu in Yae’s identity formation and how her personal identity relates to the collective dimension of Aizu people. For Yae, the Aizu identity intervened actively in her life, and the Boshin War provided an opportunity for her to awaken as a political subject.

新島八重は会津藩出身で、戊辰戦争で銃を持って戦場に立ち、積極的に戦闘に参加した女性である。興味深いのは、このような独特の履歴を持つ八重家であるが、女性史ではあまり注目されなかったことである。これは、今まで「近世=抑圧」、「近代=解放」という二分法的理解を前提とした、いわゆる「新女性」に対する注目は多かったが、敗者の空間にいた女性にとって、近代は差別と抑圧の始まりでもあったという点で二重の網がかかっていたからである。 本稿は、幕末維新という転換期を生きた八重のアイデンティティ形成と自己認識の様相を考察した。八重は女性でありながら、同時に戊辰戦争に銃を持って参加した「会津人」であった。したがって、八重のアイデンティティ形成において会津はどのような意味を持つのか、また彼女の個人的アイデンティティが会津人という集団的な次元とどのような関係を持つのかに注意を払うことは重要である。八重にとって、会津人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は、彼女の人生において積極的に介入し、戊辰戦争は政治的主体として覚醒する契機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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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태교론의 전통과 근대

박이진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41호 2021.12 pp.117-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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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본고에서는 일본에서 확산된 태교론을 역사적 관점에서 그 흐름과 경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일본 태교론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시모다 지로의 『태교(胎敎)』(1913년)의 내용을 분석하고, 이러한 태교론이 당시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을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최신 과학지식으로 유행하였던 위생학과 우생학이 결합하여 탄생한 근대일본의 태교론의 특징을 규명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전통적인 태교가 여성 중심의 금기록(수양서) 같은 성격을 가졌다면, 『태교』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 모체를 아이를 낳기 위한 ‘빌린 배’로 인식했던 전통적 신체관을 부정하고 모자의 건강이 중요하다는 근대적 위생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반면 당시 일본 사회에 확산된 유전학과 인종개량론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태교』 이후 20세기 전반에 출간된 태교 서적에는 ‘태교가 우생학’임을 명시하기에 이른다. 국민우생법(1940년)을 제정해 민족위생보호라는 명목으로 일본인을 계급화하고 선민사상을 고취했던 당시 위생학과 우생학이 결합하여 탄생한 태교론은 국민우생법에 명분을 제공하였다. ‘불결함’과 ‘장애’는 좋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 저변에 영향을 주는 ‘과학적 근거’로 기능한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flow and trend of the theory of prenatal care that has spread in Japan from a historical point of view. This is an analysis of the contents of Shimoda Jiro’s book Taikyō (1913), which is regarded as a epochal turning point in the theory of prenatal care in Japan. At the same time, the background to which this theory of prenatal care could appear at that time was examined. In the process, it was clarified that the theory of prenatal care in modern Japan was born by combining hygiene and eugenics, which were popular as the latest scientific knowledge at that time. If traditional prenatal care in Japan consisted of characteristics stemming from a female-centered “book for self-discipline”, Taikyō denied the traditional view of the body in terms of pregnancy and childbirth, which recognized the mother as a ‘borrowed belly’ for bearing children. And Taikyō explained with the modern concept of hygiene that the health of mothers and children is important. Books on prenatal care published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fter Taikyō stated that prenatal care is a form of eugenics. In Japan, the National Eugenic Act (1940) enacted under the pretext of protecting national hygiene inspired the classification of the Japanese as ​​a chosen people. At that time, the theory of prenatal care, which was created from the combination of public hygiene and eugenics, provided a justification for the National Eugenic Act, and this still serves as the basis for the Eugenics Protection Law and Motherhood Protection Act. It serves as a supposed “scientific basis” for the perception that “insanitariness” and “disability” are not good.

本稿では、日本で拡散した胎教論を歴史的観点からその流れと傾向を調べた。そして日本の胎教論で画期的な転換点となったと評価される下田次郎の著書 『胎敎』(1913年)の内容を分析し、このような胎教論が当時登場した背景を考察した。その過程で当時最新の科学知識として流行していた衛生学と優生学が結合して誕生した近代日本の胎教論の特徴を究明することができた。 日本で伝統的な胎教が女性中心の禁忌録(修養書)のような性格を持っていたとしたら、 『胎敎』は妊娠と出産において母体を子供を産むための「借り腹」と認識した伝統的な身体観館を否定して母子の健康が重要であるという近代的な衛生概念として説明した。一方、当時日本社会に拡散した遺伝学と人種改良論の影響を反映していることもある。 そして 『胎敎』以後20世紀前半に出版された胎敎書籍には「胎敎が優生学」であることを明示するに至る。国民優生法(1940年)を制定し、民族衛生保護という名目で日本人を階級化し、善民思想を鼓舞した当時、衛生学と優生学が結合して誕生した胎敎論は、国民優生法に名分を提供した。「不潔さ」と「障害」は良くないといった認識の底辺に影響を与えた「科学的根拠」として機能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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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론적 화해’를 넘어서 — ‘한일화해3.0’을 위한 철학적 토대 —

박홍규, 조계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41호 2021.12 pp.14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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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이 글의 목적은 한일 역사화해가 지체 혹은 역행하고 있는 원인 중 하나를 ‘책임론적 화해’ 관점이 지니는 한계에서 찾고, ‘포용론적 화해’ 관점에서 ‘한일화해 3.0’을 위한 철학적 토대를 모색하는 것이다. ‘사죄와 용서의 정치’를 통한 ‘책임론적 화해’는 화해를 정치적 공간에서 지속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정치적 책임에 기초한 관점이다. 그러나 한일 관계에서 ‘사죄와 용서의 정치’에 기초한 화해는 정치적 책임이 아니라 법적 책임이 중심이 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공간을 축소하고, 화해 과정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글은 ‘포용의 정치’를 통해 중단된 화해 과정을 복원시키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치유를 통해 보다 깊어진 관계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주장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ne of the causes of the delay or reversal of the historical reconcili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limit of the viewpoint of ‘responsible reconciliation’ and to provide a philosophical foundation for ‘Korea-Japan historical reconciliation 3.0’ in terms of ‘inclusive reconciliation’. Responsible reconciliation through ‘politics of apology and forgiveness’ is based on political responsibility that sees reconciliation as a process that continues in political space. However, reconciliation based on ‘politics of apology and forgiveness’ in Korea-Japan relations has resulted in reducing the political space and blocking the reconciliation process by focusing on legal responsibility, not political responsibility. This article argues that it is time to restore the reconciliation process through ‘politics of embrace’ and move on to a deeper relationship through the healing of both victims and perpetrators.

この論文の目的は、日韓における歴史和解の遅滞や逆行の原因の一つを「責任論的和解」という観点が持つ限界に求め、「包容論的和解」の観点から「日韓和解3.0」に対する哲学的基礎を模索することである。「謝罪と許しの政治」を通じた「責任論的和解」とは、和解を政治的空間における持続的過程とする政治的責任に基づく観点であった。しかし、日韓関係における「謝罪と許しの政治」に基づいた和解は、政治的責任ではなく法的責任が中心となったことで、むしろ政治的空間を縮小し、和解過程に妨げになった結果をもたらした。 この論文は「包容の政治」に基づいて、中断された和解過程を取り戻し、被害者と加害者の両方の治癒を通じてより深い関係を築くべき起点であることを主張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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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가톨릭 신자 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을 중심으로 나가사키에서 소외된 서벌턴 우라카미 피폭자의 사회적 차별과 그 대항 담론을 논한 것이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75년 생존불능설이 만연한 가운데, ‘우라카미 번쩍 쾅’이라는 우라카미 지역에 대한 이중적 차별을 낳고 있었다. 우라카미는 탄압과 박해를 받은 전통적 기리시탄과 피차별 부락민의 지역으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사회적 차별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에 원폭 체험이 더해지면서 ‘천벌’이라는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고, 피폭자들은 침묵하게 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은 신의 섭리, 신의 은총, 일명 우라카미 번제설을 피력하며 피폭사한 기리시탄의 후예의 ‘천벌’에 대한 대항 담론을 형성시킨다. 이러한 신의 섭리는 피폭사한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담론이지만 의도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전쟁책임, 원폭 투하책임, 그리고 원폭 투하의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도 기리시탄에서 배교한 피차별 부락민은 소외되고 있었다. 나가사키의 피폭자에 대한 이중의 사회적 차별은 침묵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서벌턴적 상황에 대한 증언자들은 살아남은 자의 책무, 사명을 깨닫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 원폭, 차별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This paper discusses the social discrimination against A-bomb victims in subaltern Urakami alienated from Nagasaki and its counter discourse, around 『The Bells of Nagasaki』written by Takashi Nagai, a Catholic believer. In Aug., 09, 1945, the atomic bombing of Nagasaki resulted in dual discrimination as 'bang with a flash in Urakami' in the Uramaki area, where the theory of inviability for 75 years was prevalent in 1975. In Urakami, the area consisting of the traditional Kirishitan and Burakumin subjecting to discrimination, where suffered from oppression and persecution, there had been already social discrimination caused by the presence of such groups. The addition of the atomic bombing experience shaped the social discourse of 'divine punishment', while A-bomb victims held their tongues. 『The Bells of Nagasaki』 of Dakasi, a devotional Catholic believer, forms a counter discourse against the 'divine punishment' for descendents of Kirishitan who were killed by the atomic bomb, expressing divine providence and bless, and so-called Urakami holocaust theory. Although such divine providence is a religious discourse for consoling families who were killed by the atomic bomb, it is difficult to deny that it justified the American responsibility for war, the responsibility for atomic bombing and the atomic bombing, regardless of its original intention. Such dual social discrimination against A-bomb victims in Nagasaki forced them to held their tongues. Meanwhile, people who testified the subaltern situation made their voices about war, atomic bombing and discrimination, which should never occur, after realizing survivors' responsibility and mission.

本論文は、カトリック信者永井隆の『長崎の鐘』を中心に長崎から疎外されたサバルタン浦上被爆者の社会的差別とその対抗言説を論じたものである。1945年8月9日、長崎原爆投下は75年生存不能説が蔓延し、「浦上のピカドン」という浦上地域に対する差別を生み出していた。浦上は、弾圧と迫害を受けた伝統的キリシタンと被差別部落民の地域で、こうしたところから社会的差別がすでに存在していた。これに原爆体験が加わり、「天罰」という社会的言説が形成され、二重の社会的差別によって被爆者たちは沈黙することになる。 敬虔なカトリック信者である永井隆は、神の摂理、神の恵み、いわば浦上藩除説を言い、被爆したキリシタンの末裔に与えられた「天罰」に対抗しょうとした。この神の摂理は被爆した家族を慰めるための宗教的言説であるが、米国の戦争責任、原爆投下責任、そして原爆投下の正当性を提供したということは否定しにくい。ここにもキリシタンから棄教した被差別部落民は疎外されいる。 長崎の被爆者に対する二重の社会的差別は沈黙を強要した。そうしたなか、サバルタン的状況を述べる証言者たちは生き残った者の責務、使命を悟り、再び起きてはならない戦争、原爆、差別に声を出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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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재조일본인 사회의 대표적인 종합잡지인 『조선공론』의 시각자료 및 기사를 대상으로 재조일본인 사회가 견지한 재조일본인 예기에 대한 상반된 표상을 분석함으로써 그 저변에 깔린 이념의 충돌과 그 의미를 분석하였다. 『조선공론』은 잡지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예기의 사진과 그 정보를 소개하는 란을 따로 두거나 대대적인 예기인기투표를 진행하고 그 순위표를 게재하는 등 화류계 동향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인 잡지였다. 특히 1915년에 개최된 예기인기투표(藝妓人氣投票)의 경우 중복투표 시스템을 도입하여 막대한 판매수익을 올렸으며, 이때 ‘미인’으로서의 예기 표상을 발신하는 주체는 주로 개인이 아닌 출판사의 기획에 의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남성 중심적이고 지배계급 위주의 미디어에서 가시화된 ‘미인’표상이란 매체의 주요 소비자인 남성들이 추구하는 여성상을 유지함으로써 독자의 흥미과 관심을 유발하기 위한 전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오락과 취미의 측면에서 소비되어 오던 예기의 ‘미’는 사회의 풍기문란, 가정에의 위협이라는 공적인 영역의 매춘과 연계됨으로써 ‘미인’으로서의 예기는 소거되고 오로지 건전한 재조일본인 사회 형성을 위협하는 ‘보균자’의 이미지를 입게 된다. 이처럼 동시기에 동일한 지면을 통해 발신된 ‘미인’에 대한 찬사와 ‘보균자’를 항한 겸열의 시선은 매체를 주도하는 재조일본인 남성 지식인의 사적/공적 영역에서의 상반된 욕망이 발현된 결과라 볼 수 있다. ‘무취미(無趣味)’한 조선에서의 유일한 오락으로서 예기의 ‘미’를 소비하며 안정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한 사적 생활에서의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공적 영역에서는 건강한 재조일본인 사회를 형성하고자 한 1910년대 재조일본인 사회가 견지한 성에 대한 이중규범으로 말미암아 재조일본인 예기라는 존재는 ‘미인’과 ‘보균자’를 왕래하는 경계인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This thesis analyzed the conflicting representation of Japanese geisha in colonial Korea that was held by the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targeting the visual materials and articles of 『The Chosen Koron』 which was a representative general magazine in the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The Chosen Koron』 showed a great interest in the trend of prostitution by establishing a special space for introducing the photo and information of geishas, taking a large-scale popularity vote for geishas, and then publishing the ranking list in the latter part of the magazine. Especially, the geisha popularity vote held in 1915 introduced the multiple-voting system, which made a huge profit on sale. And at that time, the subject who sent the representation of geisha as ‘beauty’ was not an individual, but the publisher’s planning. Like this, the visualized representation of ‘beauty’ in the male-centered and rulling class-oriented media might be the product of strategy to arouse the readers’ interest by maintaining the image of woman pursued by men who were the major consumers of the medium. However, the ‘beauty’ of geisha that was consumed in the aspect of personal entertainment and hobby was connected to the prostitution in the public realm such as social demoralization and threat to family. Thus, after the geishas as ‘beauty’ were eliminated, they only had the image of ‘carrier’ that could be a threat to forming the sound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In other words, the praise for ‘beauty’ and censorship of ‘carrier’ shown in the same medium during the same period, reveal the aspect of double standards related to sex held by the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of the 1920s that aimed to consume the ‘beauty’ of geisha as the only entertainment in Joseon without hobbies, and also to form the sound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本稿は、在朝日本人社会の総合雑誌である『朝鮮公論』のイメージ資料及び記事を対象に、在朝日本人社会に於ける在朝日本人芸妓に対する異なる二つの表象を分析し、その基に敷かれている理念の戦いとその意味を検討する。 『朝鮮公論』は雑誌の後半に於て芸妓の写真と共に彼らの情報を紹介する欄を構成して、大々な芸妓人気投票を行い、その順位表を掲載するなど、花柳界への大きな関心を示した雑誌である。特に、1915年に開催された芸妓人気投票の場合、重複投票のシステムを導入して莫大な売り上げを挙げた。この際「美人」としての芸妓表象を発信する主体は、個人ではなく主に出版社の企画による。男性中心的で支配階級中心に運営された当時の在朝日本人メディアで可視化された「美人」表象とは、メディアの主要消費者である男性たちが追求する女性像を維持することで、読者の興味や関心を誘発するための戦略の産物といえる。 しかし、個人の娯楽と趣味の側面から消費されてきた芸妓の「美」は、売春という社会の風紀紊乱や家庭への脅威という公的な領域と結びつくことで「美人」としての芸妓は消去され、もっぱら健全な在朝日本人社会形成を脅かす「保菌者」としてのイメージを表すようになる。 詰り、同時代に同紙面を通じて発信された「美人」への賛辞と「保菌者」に向かう謙悦の視線は、メディアを主導する在朝日本の男性知識人の私的/公的領域における相反する欲望の発現であろう。「無趣味」の朝鮮に於ける唯一の娯楽として芸妓の「美」を消費しながら、植民地を経営するために私的生活における心身の安定を図る一方、公的領域に於ては健康な在朝日本人社会を形成しようとした1910年代の在朝日本人社会に於ける性に対する二重規範により、在朝日本人の芸妓という存在は「美人」と「保菌者」との間を揺れる境界人として表象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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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괴수 영화 <신 고질라>(2016) — ‘특촬’의 관점 —

이경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41호 2021.12 pp.23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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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괴수 영화 <신 고질라>(2016)를 특촬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것이다. 근년 들어 일본 영화계에서는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특촬시리즈의 신작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특촬은 그러한 동향의 서막을 열었던 <신 고질라>를 특촬괴수 영화의 현재라는 맥락에서 재조명할 시좌를 제공한다. 도호는 일본 특촬 지킴이의 선봉에 섰던 안노 히데아키와 히구치 신지를 고질라 시리즈의 신작 감독으로 기용했다. 두 감독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특촬에 관한 전람회 <관장 안노 히데아키 특촬박물관 : 미니어처로 본 쇼와·헤이세이의 기술>(이하 <특촬박물관>)을 개최했다. 동시에 문화청의 “미디어 예술 정보거점·컨소시엄 구축사업”의 일환으로 「일본 특촬에 관한 조사」(이하 「특촬 조사」)를 실시했다. 한때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했고 이제는 소멸 위기에 있는 특촬을 지켜내자는 취지다. 매년 작성된 「특촬 조사」보고서는 온라인상에 공개됐다. <신 고질라>는 <특촬박물관>과 「특촬 조사」 종료 이듬해에 개봉됐다. 그 흥행은 오랜 기간 저조했던 고질라 시리즈의 인기를 단번에 만회했다. <신 고질라>를 둘러싼 담론공간의 활성화도 이례적인 사회현상을 낳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이슈화를 빗겨난 것이 있었다. 대대적인 특촬 수호 프로젝트를 수행해 온 안노와 히구치가 <신 고질라>에서 처음으로 특촬 고질라가 아닌 풀CG 고질라를 출현시켰다는 점이다. <신 고잘리>에 일어난 특촬의 지각변동이 조용히 진행된 것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 아날로그다움과 고질라다움의 연출 덕분이었다. 그것은 「특촬 조사」의 또 다른 성과, 해외 괴수 영화에서 일본 특촬의 영향을 추적하고 기술하면서 얻은 성과였다. 즉, CG로도 특촬다움, 괴수다움을 표현할 수 있으며, 특촬에 대한 경의로 인증된다는 것이다. <신 고질라>와 함께 풀CG 고질라가 조용히 연착륙할 수 있었던 이유다.

This study re-examined the Japanese Kaiju(怪獣) film Shin Godzilla (2016) from the standpoint of Tokusatsu. In recent years, the announcement of new releases of Tokusatsu franchises that represented the 1960s and 1970s has stood out in the Japan. Shin Godzilla opened the prelude to this trend. In 2015, TOHO has announced Hideaki Anno and Shinji Higuchi, who have been working hard to protect Tokusatu, as the new directors of the Godzilla series. From 2012 to 2015, the two directors hosted the special effects exhibit titled, “Tokusatsu Special Effects Museum: Craftsmanship of Showa & Heisei Eras Seen through Miniatures”. At the same time, they conducted “Investigation regarding Japanese Tokusatsu” (Tokusatsu Investigation) as part of the Agency for Cultural Affairs project. This three-year investigative report was released to the public every year. These were projects to save Japanese Tokusatsu, which were on the edge of extinction due to digitalization. Shin Godzilla was released a year after these projects were completed. By the way, Anno and Higuchi launched “full computer graphics Godzilla” in Shin Godzilla rather than “Tokusatsu Godzilla” for the first time. This irony, however, did not receive much attention. The reason is the homage effect that elaborately arranged throughout the film. There were two aspects that had the “likeness” of Tokusatsu-kaiju films. One was “Godzilla-likeness,” that was reminiscent of the 1954 film Godzilla, and the other was “analog-likeness,” resembling a special effects film. The important point is that such certification of “likeness” is one of the main achievements of the Tokusatsu Investigation. The Tokusatsu Investigation report examines Tokusatsu-influenced productions outside Japan, identifying such “likeness,” and certifying it as the “respect” for Tokusatsu.

本稿は、日本の怪獣映画『シン·ゴジラ』を特撮の観点から考察したものである。最近、日本では1960,70年代を代表する特撮シリーズの新作映画の製作発表が相次いでいる。その序幕を開いたのが『シン·ゴジラ』である。「シン·ゴジラ』の総監督と特技監督をつとめた庵野秀明と樋口真嗣は、2012年から2015年まで「館長庵野秀明 特撮博物館 ミニチュアで見る昭和平成の技」(以下 「特撮博物館」)の開催と「日本特撮に関する調査」(以下「特撮調査」)を行った。「特撮調査」の報告書はオンライン上で一般にも公開された。CGの導入とともにデジタル化が進む中、消滅の危機に瀕した特撮を守るためのプロジェクトであった。 『シン·ゴジラ』は「特撮博物館」と「特撮調査」が終了した翌年に公開された。映画は大ヒットし、メディア上では『シン·ゴジラ』論があふれるなど、異例の社会現象を巻き起こした。一方、『シン·ゴジラ』は日本のゴジラシリーズの中では初めてフルCGゴジラを登場させた。だが、それがただちに「特撮の終焉」と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それは、映画の随所に見受けられるオマージュ効果によるもので、二つの点で「特撮」を演出した。「ゴジラらしさ」と「アナログらしさ」であり、それは初代『ゴジラ」へのリスぺクトにつながる。 「特撮調査」の報告書は、海外の怪獣映画における日本の特撮の影響を見い出し、日本の特撮へのリスペクトとして承認・記録した。怪獣ゴジラの初めてのフルCG化が特撮ファンアニメ監督によって行われたことがさほど注目を引かずに済んだのは、特撮怪獣らしさの演出によるものであり、それは庵野や樋口らが日本の特撮を保存且つ継承するために行った「特撮調査」から得た成果にほかなら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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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는 전시기 일본의 사상적 정체성 확립에 공교육이 어떻게 관여하고 이를 이용했냐는 문제의식 위에서,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국민의 사상과 총력을 한 데로 집약시키기 위한 기재로써의 침략 사상 이데올로기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근대 일본의 국민교육의 실태를 살펴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충군애국 사상을 비롯한 다양한 국체 이데올로기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도덕교육의 실태를 교육칙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교육칙어의 사상을 보급하는 장으로서의 학교의식과 그곳에서 불러야 했던 의식창가의 교육사상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기 일본의 충군애국 사상의 형성과 이를 무의식적으로 신봉하며 자행한 근대기 일본의 전쟁에 관여한 공교육의 문제, 나아가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국민 전체의 적극적인 협력 자세를 끌어내기 위한 통합된 이데올로기 형성의 장으로서의 학교의식의 메커니즘을 규명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국민교육과 침략주의 사상’ 형성이라는 커다란 문제의식을 풀어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This paper discusses the role of public education in establishing Japan's ideological identity during the period of imperialism and militarism, and discusses the Sino-Japanese War in 1894,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and the Asia-Pacific War in 1941. Specifically, we will examin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school rituals and songs sung in various national sports ideologies, focusing on the educational edicts, which plays a leading role in the formation of loyalty and patriotism ideology. By understanding the formation of Japan's loyal and patriotic ideology in wartime, the public education problem involved in Japan's war in modern times, and the integrated ideology of the whole nation in the fight against the war, we can solve the big problem.

本稿は、帝国主義、軍国主義の道に突き進む戦時期における日本の思想的アイデンティティ確立に公教育がどのように関与し、これを利用したかという問題意識の上で、1894年の日清戦争、1904年の日露戦争、1931年の満州事変、1937年の日中戦争、1941年のアジア·太平洋戦争に続く一連の戦争を遂行するにあたって、国民の思想と総力を一つに集約させるための機材としての侵略思想イデオロギー形成に主導的な役割を担った近代日本の国民教育の実体を考察することに目的がある。 具体的には、忠君愛国思想をはじめとする多様な国体イデオロギーの形成に主導的な役割を担った道徳教育の実態を教育勅語を中心に考察し、教育勅語の思想を普及する場としての学校儀式とそこで歌われた儀式唱歌の教育思想史的意味を考察するものである。 戦時における日本の忠君愛国思想の形成と、これを無意識的に信奉して行った近代期における日本の戦争に関与した公教育の問題、ひいては戦争を遂行する上で国民全体の積極的な協力姿勢を引き出すための統合されたイデオロギー形成の場として機能した学校儀式のメカニズムを解明することにより、「近代日本の国民教育と侵略主義思想」の形成という大きな問題意識を解く小さな糸口が見出せることを期待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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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학(古義學)을 제창한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는 『논어』 주석서인 『논어고의』를 저술했다. 진사이는 『논어고의』에서 ‘성인의 도’를 보편적 법칙이라 했다. 이 보편적 법칙은 ‘인의’로 대표되는 ‘인간이 지켜야 되는 도리’, 즉 도덕적 실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진사이는 공자에 의해 학문과 도덕의 미명 상태가 극복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윤리 의식은 대타적 도덕관을 형성한다. 진사이가 『논어고의』에서 제시한 ‘도덕’은 타자, 사회 공동체라는 시선에서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방법이 된다. 진사이는 인간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예법에 의한 수신을 강조했다. 예법적 수신에서 중요한 것은 ‘도’의 ‘공공성’에 의한 ‘도덕’의 ‘공공성’이다. 세계는 어느 유능한 한 사람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된다. 진사이의 도덕론은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면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일상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Ito Jinsai(1627-1705) wrote nonugoei. The ‘a holy man’s dou’ is called the universal law. This universal law is a doctrine that humans must observe. Therefore, it has the meaning of practicing morality. This ethical consciousness forms a counter-morality that understands the other from the other’s point of view. The ‘morality’ presented by Jin Sai is a way to define the life of an individual in the perspective of others and social communities. Jin Sai emphasized the cultivation of manners, saying that the human mind is unbelievable. The important thing here is the ‘publicity’ of ‘morality’ by ‘publicity’ of ‘dou’. The world is not built by one competent person, but is built and maintained by countless people. It can be said that Jinsai’s moral theory suggests a methodology for the daily life of living together while supporting each other.

古義学を提唱した伊藤仁齋(1627-1705)は、『論語古義』を著述した。仁斎は『論語古義』において、日常的暮らしを規定してくれる原理を提示した。この原理は道徳を中核に置く。仁斎の「道徳」は、他者、社会共同体という視線から個人の生き方を規定する方法になる。仁斎は人間の心は信じられないと言い、礼法による修身を強調した。そして世界はある有能な人間一人によって成立するものではなく、無数の人々によって成立し、維持されると主張する。相互性が強く意識されたのである。仁斎の道徳論は、お互いに支えながら、共に暮すべき生き方を日常化するための方法論を提示したものといえ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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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에서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신(新)마르크스주의’의 논리와 일본에서 번역된 ‘스탈린 민족’ 개념의 서사구조의 특징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역사적 발전단계를 활용하는 카우츠키, 레너, 바우어의 ‘민족’ 이론은 정통과 이단의 경계에서 세계적 민족론을 구성하고 있었다. 특히 종족에서 민족으로 발전하는 프로세스 속에서 ‘중간체’를 거치게 되는데, 여기에는 ‘민족되기’에서 탈락되는 ‘민족’이 생기는 논리를 구조화하게 되는 역설이 존재한다. 기존 자본주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중심이 된 부르주아 민족론의 한계를 지적한 카우츠키의 논리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새로운 ‘민’ 개념의 형성과, 이 과정에서 언어=민족공동체 개념이 활용되었다. 이를 추종하면서도 비판적 입장에 있는 레너와 바우어는 언어=민족공동체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 개념을 재구성했다. 그러나 그들은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종족에서 민족으로 발전한다는 발전단계를 설정하고 그 역사적 프로세스를 설명하지만 유대인을 민족으로 간주하지 않게 된다. 특히 민족 개념에 언어와 지역 개념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탈린은 언어가 지배와 피지배, 영토와 지역의 문제를 메파타로 설정하고, 부르주아 민족이 중심이 된 민족 개념에서 벗어나 프롤레타리아도 민족으로 등극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 프롤레타리아 민족들이 인터내셔널하게 연대하는 동시에 세계어의 공통화를 만들어낼 것을 주창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우츠키가 제시한 소수민족의 민족 개념이나 지역적 주변에 있는 민족들이 통합되는 민족주의까지도 내셔널리즘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양가성’을 망각하면서 구축한 논리였다. 특히 본 글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중에서 선진 민족이 후진 프롤레타리아 민족을 계몽시키거나 수준 높은 문화로 원조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논리를 발전단계론 이데올로기의 자장 속에서 스탈린의 내셔널리즘 조정(措定)에 있었음이 규명되었다.

This article tries to examine the logic of ‘new Marxism’ that occurs between Marx and Marx’s ‘ism’ through the concept of Stalin’s nationalism translated from Japan. Kautsky, Renner, and Bauer’s theory of ‘nation’ utilizing historical development stages constituted a global ethnology at the boundary between orthodoxy and heresy. In particular, in the process of developing from a tribe to a nation, it goes through an ‘intermediate’, and there was a paradox that structured the logic that a ‘nation’ that was eliminated from ‘becoming a nation’ was created. Karutsky, who points out the limitations of the bourgeois national theory, which has been central to the development of the existing capitalist society, formed a new concept of the people led by the proletariat, and in this process, the logic of using the concept of language=national community arises. Following this, from a critical standpoint, Renner and Bauer reconstruct the concept of nation as a cultural community to overcome the limitation of language=national community. However, it, like Kautsky, explains the historical processes formed at the stage of development from tribe to nation, while neglecting the Jewish question. In particular, they take a stand against internationalism through the argument of the theory of nationalism. In this situation, Stalin established that language as a metaphor for domination and subjugation, territorial and regional issues, and that the proletariat should rise as a nation beyond the national concept centered on the bourgeois nation, and that proletariat It advocates for the peoples of the world to unite internationally and at the same time create a common language of the world. However, this was a logic built while forgetting the ambivalence that Kautsky’s concept of ethnic minority and nationalism in which ethnic groups were integrated around a region could be linked to nationalism. In particular, it was found that Stalin’s argument for the logic that an advanced nation among the proletariat should enlighten the backward proletarian nation or provide aid to a high-level culture showed that it was in the adjustment of Stalin’s nationalism in the ideology of the development stage theory.

この論文は、‘マルクス’と‘マルクス主義’の間で発生する「新マルクス主義」の論理と日本で翻訳されるスターリンの<民族概念>の敍事構造を明らかいにしたい。歴史的発展段階論を基礎に、民族概念を考えだしたカウツキー、レーナー、バウアーの「民族」の理論は、正統と異端の境界で、世界民族論を打ち立てていた。特に種族から民族へ変容するプロセスを重視し、民族誕生論理を理論化したにもかかわらず、もう一方では、「民族化」に至らなかった「民族」が生じることを構造化してしまった。言語と地域(領土)を結び付けて想定されるる「文化共同体」概念へ拡大されていった。逆説的にこのような文化概念によってしか民族は定義されえなかったのである。それは、もう一方で、資本主義社会の発展の過程でブルジョアが民族の代表になったことの限界を指摘し、カウツキは、プロレタリアが主導する新しい民族概念の形成を主張した。これに追従しながらも批判的な立場をとるレーナーとバウアーは、それぞれ、民族共同体の立場と国際主義のせめぎあいから民族概念を再構築した。しかし、これらは、歴史なき民族としてユダヤ人問題を作り出し、民族になれなかった民族は、歴史を持って、言語と領土を備えている民族に同化することを主張するようになった。このような状況の中で、スターリンは、言語が、支配と被支配または領土と地域の関係を総括するメタパーとして設定し、ブルジョア民族が中心となって形成した民族概念を脱し、プロレタリアによる民族をつくり直すことを期待した。民族になることは国家の新しい主役になることでありながら、その抑圧されている民族がインターナショナルに連携しながら、世界語の共通化を作り出していくことを提唱した。これはカウツキーが提示した少数民族の民族概念や被植民地の民族つまり、<権利の持たない民族>たちが、統合される民族主義を肯定したが、それには、少数民族のナショナリズムをどう解釈刷るべきなのかを提示したカウツキの理論を忘却しながら構築した論理であった。特にスターリンがプロレタリアの先進国が後進プロレタリア民族を啓発したり、後者を高い文化に引き上げるための援助を惜しんではいけないという<ブルジョア的>立場煮立つことで可能であったのである。これは、結局、マルクスの発展段階論的イデオロギーの磁場中でスターリンナショナリズムの調整にいたことを示したもの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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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카 준(戸坂潤)의 상식 개념과 저널리즘의 역할

홍보석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41호 2021.12 pp.349-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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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우경화 바람은 1930년대에 세계가 파시즘으로 치닫던 것을 연상케 한다. 이 논문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으로서 도사카 준(戸坂潤)의 상식에 대한 논의를 분석하고 그 현대적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도사카는 상식을 단지 지식의 평균적인 양이나 수준이 아니라, 지적 건전함이자 고정되어있지 않으면서 고양되어야 할 목표 이상선으로 규정한다. 상식이 중요한 것은 일상성의 원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상성의 원리란 매일매일의 실천적 생활과 결부된 현실의 원리를 말한다. 당시 일본을 파시즘으로 이끌던 일본주의는 일상성에서 벗어난 형이상학적 해석철학에 기반을 두었다. 따라서 도사카는 일상성 강조를 통해 일본주의를 비판했다. 일상성에 기반을 둔 건전한 상식을 되찾기 위해 도사카는 저널리즘의 역할을 강조한다. 저널리즘은 일상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에 치우친 아카데미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식의 일상성을 되찾게 할 수 있다. 도사카의 논의는 건전한 상식을 지키기 위한 바람직한 저널리즘의 역할을 제안하는 것으로서 미디어의 파급력이 큰 현대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지닐 것이다.

Global tendency of conservative swing reminds of the world in 1930s heading to Fascism.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se Jun Tosaka’s discussion of common sense as resistance against fascism and confirm its contemporary value. Tosaka defines common sense not as average quantity or level of knowledge, but as intellectual soundness and ideal line to be aimed which is unfixed and to be heightened. Importance of common sense lies on the principle of everydayness. Principle of everydayness is principle of reality related with practical everyday life. Japanism which led Japan at the time to Fascism was based on metaphysical and hermeneutic philosophy which was far from everydayness. Thus Tosaka criticizes Japanism with emphasis on everydayness. To recover sound common sense, Tosaka emphasizes role of journalism. Because journalism is based on everydayness, it can overcome weakness of academy which is buried under the metaphysical and impractical discussion so that everydayness of common sense can recover. Tosaka’s discussion will be important in modern world of strong media influences as suggestion for proper role of journalism to protect sound common sense.

全世界的な右傾化旋風は1930年代に世界がファシズムに向かって走った事を連想させる。この論文はファシズムに対する抵抗として戸坂潤の常識に対する論議を分析し、その現代的な価値を確認しようとする。 戸坂は常識を只の知識の平均的な量や水準ではなく、知的な健全さで、固定されてないが高揚されるべき目標以上の線と規定する。常識が重要なのは日常性の原理と結びついているからだ。日常性の原理は毎日の実践的な生活と結びついている現実の原理を意味する。当時、日本をファシズムへ導いた日本主義は日常性から離れた形而上学的な解析哲学に基づいた。故に、戸坂は日常性の強調で日本主義を批判した。日常性に基づいた健全な常識を取り戻すために戸坂はジャーナリズムの役割を強調する。ジャーナリズムは日常性に基づいたから、形而上学的な空理空論に嵌れたアカデミーの限界を克服し、常識の日常性を取り戻すことが出来た。戸坂の論議は健全な常識を守るための望ましいジャーナリズムの役割を提言することとして、メディアの波及が大きい現代社会に新しい価値を持つはず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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