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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思想 [일본사상]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Korean Association For Japanese Thought]
  • pISSN
    1229-9235
  • 간기
    연3회
  • 수록기간
    1999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3 DDC 181
제13호 (7건)
No
1

『日本永代藏』과 神佛 - 권1, 권2, 권3을 중심으로 -

정형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3호 2007.12 p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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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0원

당대인들의 신앙의 기본 틀인 신불과 관련을 맺는 29개의 치부담 안에서 관음이나 보살 혹은 재물을 둘러싼 여러 신들의 존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중세 이래의 설화적 전통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세 신불의 세속화라는 시대의 큰 흐름 안에서 신불이 치부라는 현세적 기원을 성취하기 위한 조력자로서 또는 상인들의 모범적 치부의 방식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신불 그 자체를 희화화하거나 존재방식의 의미를 회의 또는 부정하는 묘사나 작가의 언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신불의 의인화는 치부의 동기나 전개방식에 흥미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작가의 창작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치부라는 세속적 행위가 신불의 세속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작가의 인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질서를 찾아내어 그 질서에 의거해서 살아가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인생관 즉 치부와 금전에 절대적인 삶의 기준을 두고자 하는 상인들의 세속적 신불관은 신불을 치부로 상대화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어지는 추가고에서 권4, 권5, 권6에서의 신불의 묘사분석을 통해 이러한 양상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日本永代藏』卷1、巻2,卷3を中心に28ヶ所での神仏関連の描写を対象にその意味と構造について考察してみた。この致富談では観音や菩薩あるいは金銀に関連する多くの神たちが多様な方式で登場しており、これらは中世以降の説話的伝統を受容する形で噺の展開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ことがわかる。神仏の世俗化という近世時代の流れの中で、神仏が致富という現世的祈願を成就するための助力者として、あるいは町人の模範的致富の方式として、提示されているが、神仏そのものを戯画化する言説あるいは存在の意味を懐疑や否定しようとする描写と作家の言説は見られない。神仏の擬人化は致富の動機と展開方式に面白さを引き出そうとする創作方法に用いられているが、致富という世俗的行為がそのまま神仏の世俗化に繋がっているという作家の認識はほとんど見出せない。この世の中で絶対的秩序を見つけてそれに依拠して生きることが大切だと認識する人生観すなわち致富と金銭に絶対的な生の基準を設けようとする町人の世俗的神仏観は神仏を致富によって相対化する段階まで達しているとは言えないのである。以上のことは続きの追加稿で巻4,巻5,巻6に顕れる神仏の描写分析を通じてより明らかになるであろう。

2

내셔널리즘의 감소를 위한 조건 탐구:동아시아의 경우

허우성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3호 2007.12 pp.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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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셔널리즘을 “특정 내이션(nation)과 그 이익에 대한 집착의 정서와 이데올로기”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런 내셔널리즘을 초월하거나 감소시킬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세 사람의 내셔널리스트와 한 사람의 세계시민주의자의 주장을 검토하고 비교해 보았다. 강력한 서양의 도래를 목격했던 옌푸와 니시 아마네는 노골적으로 사회적 다윈주의를, 동아시아 내의 위협 세력 앞에서 박종홍은 소속 집단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 주체성을 각각 신봉했다. 이들은 강자가 아주 쉽게 약자를 수단으로 전락시킬 수 있음을 역사에서 보고, 소속 집단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富와 强을 축적하기 위한 이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부강에 대한 욕구는 내셔널리즘만큼이나 본능적인 것, 곧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150년간의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이 욕구는 내셔널리즘․제국주의․자본․혁명․역사를 그리고 철학․문학․사학 등의 학문을 추동하는 힘이었다. 오늘날 여전히 국가 지도자와 국민들의 대부분은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이고 내셔널리스트들로 보인다. 가라타니는 자본-국가-국민의 삼위일체를 비판하고 해체할 것을 요구하고 대항운동의 사례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개인이나 집단이 직접 생존을 위협받고 있을 때, 단독자의 입장에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이나 될까? 세계무역기구의 시장 체재에 저항하면서 세계시민으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피터 싱어가 설명하는 다윈좌파처럼, 인간의 이기성을 인정하면서도 좌파적 가치의 도입을 윤리적 명령으로 인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우리의 이기성에서 타자의 이기성을 보는 것, 그래서 생존경쟁을 인정한 위에 좌파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 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내셔널리즘은 생존 욕구와 번식 욕구라는 인간의 본능에 크게 근거해 있고, 따라서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연적인 것이 옳다고 추론할 이유는 없다는 다윈 좌파의 믿음은 공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믿음의 공유와 확산은 내셔널리즘의 소멸까지는 아니어도 그것을 감소시킬 수 있는 첫 조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라타니가 세계시민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하나의 역사적 조건, 곧 평화체제의 유지라는 역사적 조건도 내셔널리즘을 감소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네 사상가들의 주장을 고찰함으로써 내셔널리즘의 감소를 위한 두 가지의 조건은 확인한 셈이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이 자연적임을 인정하면서 그 위에 약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는 것이고, 가능한 한 평화체제-미국 중심이 아니라 보다 이성적인 국제연합 중심의 평화체제-를 유지하고, 약자를 위협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This article aims to find a few conditions to reduce nationalistic sentiment in the East Asia. In order to fulfill this aim, this author deals with each thinker from China, Japan, and Korea whose thought were mostly nationalistic and makes a contrast them with Karatani Kojin, who is a cosmopolitan. This papers also asks how realistic Karatani’s view on human nature in contrast to Peter Singer’s notion of Darwinian Left, who is, as far as this author is concerned, far more realistic in that he accepts unchangeable notion of human nature and such traditional values as cherished by the left. Between a nationalist and cosmopolitan, is there a third way, namely bing a Darwinian left. This paper concludes that there are at least two conditions to reduce nationalistic sentiment: a concession to nationalism as being natural together with the adoption of the leftist interests. Keeping peace among nations especially led by UN may also be pointed out as the second condition.

3

鄭三峯と林羅山における仏教批判の位相

市来津由彦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3호 2007.12 pp.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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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南宋代の朱熹の仏教批判論は、仏教一般を批判することに主眼があるのではなく、仏教一般を批判しつつも、当時、禅仏教に士大夫が引き寄せられることに対する批判の論であった。これに対し、鄭三峯の『仏氏雑弁』は、その朱熹の言葉を正確に理解しつつ、朝鮮朝開国時点での仏教寺院勢力の社会的、経済的影響力を抑制するための理念的裏付けを説くことに意図があるものであった。一世代後の禅僧己和の仏教擁護論が、仏教が社会統治に有効であることを立証しようとする論であることと比較すると、この鄭三峯の仏教批判論が発せられた社会的な場とその意義がより明確になる。日本江戸時代初期にその生涯を通じて「朱子学」を日本社会に振興させる活動をし続けた林羅山はその若い頃、同じく京都に住み貞門俳諧の祖として知られ仏教の法華信徒であった江戸初期を代表する和学の文人、高級知識人で松永貞徳の仏教信仰を多岐に渡って批判し、これに対し松永貞徳が総合的に反論した問答の記録が残る。その論点をみると、両者の問答の限りにおいては、社会統治に対する仏教の有効性といった論点はほとんどみられず、朝鮮朝初期の鄭三峯、己和における仏教論、また中国南宋代の仏教批判論とは、課題を異にすることがうかがえる。以上のように、朱熹、鄭三峯、林羅山の三者の仏教批判を、それぞれが置かれた中国宋代、高麗末李朝初、日本江戸初期という場において捉えることにより、その批判の論とその論が機能する場との関係の特質を比較対照的に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る。

4

일본침략사상의 원형인 ‘神功皇后說話’

이기용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3호 2007.12 pp.7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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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침략사상의 기점이 된 메이지 ‘정한론’은 당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 역사적 계보는 에도시대로 올라가고 그 원형은 고대사서인 『일본서기』의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기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기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의 내용 즉 설화임에도 불구하고 몽고내침, 대마도정벌, 임진왜란, 메이지 초기 ‘정한론’ 등 조선과의 무력적 충돌과 긴장상태가 발생할 때마다 각 시기에 새로운 모습을 수반하며 괴물과 같이 재생해서 일본역사에서 부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이 설화는 일본을 신국시하는 신국사상과 조선에 대한 멸시론을 유발하였다. 그래서 왜곡된 시각과 침략성을 가진 학자나 역대 집권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인용․활용되어 침략사상의 정착과 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근대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침략주의에 입각한 대조선정책을 수행하였다. 그것과 연계하여 일본국민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위한 사상무장의 일환으로『진구황후설화』를 사실(史實)로 둔갑시키고 국민학교에서 이 역사교육을 철저히 하였다. 특히 역사교과서에는 ‘진구황후의 삼한정벌’ 상상도까지 실어서 침략적 역사인식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일본에서 침략주의적 조선관이 대다수 일본국민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전근대시기부터 발생한 멸시적, 침략주의적 조선관의 막연한 계승이 아니다. 그것은 메이지 초기에 분출한 ‘정한론’ 이후 근대일본의 지속적인 조선침략외교 감행과 이에 따른 일본인의 조선 진출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재형성되고 강화된 것이다. 또 그것이 국민교육의 보급 속에서 일반국민 차원에까지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아직도 왜곡된 역사교육시정에 소극적이며 오히려 그것과 역행하는 청소년에 대한 애국교육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 평화헌법개정을 통한 강대국화의 움직임도 보인다. 아직도 일본국민의 왜곡된 한국관 속에 ‘진구황후설화’의 그림자가 남아 있으며 이 설화의 현대판 재생을 막기 위해서도 이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 고찰이 요망된다.

近代日本の侵略思想の起点になる明治 ‘征韓論’は当時いきなり現れたのではなかった。その歷史的系譜は江戸時代にさかのぼり、さらにその原型は古代史書である『日本書紀』の‘神功皇后の三韓征代’ 記事までさかのぼるのである。 この‘神功皇后の三韓征代’記事が史実ではない虛空の内容、即ち説話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蒙古來侵、對馬島征代、豊臣秀吉の朝鮮侵略、明治初期の‘征韓論’等 朝鮮との武力衝突と緊張状態が発生する度に、新しい姿を伴い怪物のように再生して日本の歷史上、 否定的な役割を果たしてきた。 特に、この説話は日本を神国視する神国思想と朝鮮に対する蔑視論を誘発した。從って歪曲された視角と侵略性をもった学者、又は歴代の執権者達によって引き続き引用、活用され、侵略思想の定着と継承に大きな役割をになったのである。そこに深刻な問題点がある。 近代日本は朝鮮と江華島条約を締結した後、韓日合邦に至るまで變わらず侵略主義的な對朝鮮政策を遂行した。その過程で、日本国民の皇国臣民化の爲の思想武装の一環として‘神功皇后の三韓征代’說話を史實化し、国民学校でこの歴史教育を徹底的に行った。特に、歴史教科書には‘神功皇后の三韓征代’の想像図まで掲載し、侵略的な歴史認識を注入した。 近代以後の日本で、侵略主義的朝鮮觀が大多數の日本國民の中に定着したのは、前近代期に發生した蔑視的、侵略主義的朝鮮觀の漠然とした継承ではなかった。 それは明治‘征韓論’を起点とした近代日本の朝鮮侵略外交敢行と、これに伴う日本人の朝鮮進出過程で、意図的に再形成され強化されたものである。さらにそれが、国民教育の普及の中で一般国民の次元まで定着したとみることが出来る。 今日、日本はまだ歪曲された歴史敎育の是正に消極的であり、逆に青少年に対する愛国教育強化を推進している。さらに平和憲法改正を通した强大国化の動きもみえる。今だに、日本國民の歪曲された韓國觀の中に‘神功皇后説話’の影が殘っている。この說話の現代版の再生を防ぐ為にも、これに対するより深い研究と考察が要求される。

5

살타왕자 설화의 한일비교 연구

김태광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3호 2007.12 pp.9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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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역경전의 흐름에서 파악할 때, 살타왕자담은 보살의 신분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었고, 『십지수행기』의 저경으로는 새롭게 『금광명최승왕경』과 『보살투신사아호기탑인연경』(『경율이상』)을 들 수 있었다. 한일양국의 수용양태에 있어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실정에 맞게 수용․변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십지수행기』와 『삼보에』에 수록된 본 설화를 종합해 보건대, 『십지수행기에서는 ‘금광국’ ‘선화산’처럼 국명과 산명을 알기 쉽게 표기하려고 노력하고, 저경에서 볼 수 없는 제석천의 부주역 역할 수행과 해피엔딩의 구성으로 이야기를 보다 알기 쉽고 재미있게 꾸미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고, 이에 반해 『삼보에』에서는 대나무관련 표현에서 보듯, 태자의 자비심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고, 『대당서역기』의 기사 추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설화의 진실성과 실재성을 높이는데 보다 많은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설화는 한국보다는 일본에서 더 많이 유포된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에서 살타왕자담은 설산동자담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본생담 중의 하나라 할 수 있고, 이 설화를 언급한 문헌은 고대에서 중세까지로 한정해도 상당수에 이른다. 설화를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는 『삼보에』등이 있지만, 태반의 소전(所伝)은 설화의 엣센스를 단편적으로 요약 혹은 인용한 예이다. 이것은 본 설화가 그만큼 일본문화에 깊이 침투, 정착해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본 설화가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이 유포된 배경에 관해서는, 호류지(法隆寺) 소장의 타마무시즈시(玉虫厨子) 등의 회화나 조각예술의 유포측면, 일본불교의 변천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석존관의 성립21) 측면, 일본인의 정신사상 측면 등과 연계하여 앞으로 논의가 더 진행될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본생담은 일본인의 인간석존관(人間釋尊觀) 형성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 여기에 그런 예를 들어 둔다. 『료진히쇼(梁塵秘抄)』(잡법문가(雑法文歌)의 유명한 「仏も昔は人なりき。 我等も終には仏なり。 三身仏性具せる身と知らざりけるこそあはれなり(부처도 옛날에는 사람이었다. 우리들도 마침내는 부처가 된다. 모든 사람이 仏性을 가지고 있는 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정말 애처롭다)」, 『一言芳談』(下巻) 「釈迦仏の因位にも、学生智者にてはましまさず、半偈の為に身を投げ、 虎の為に命を捨つる道心者にてこそ、ましまししか(석가여래도 과거세에는 뛰어난 학자나 지식이 높은 승(僧)이 아니셨다. 반게(半偈)를 위해 몸을 던지고, 호랑이를 위해 목숨을 버린 도심(道心) 있는 사람이셨을 따름이다)」.

本研究は, 韓日兩國における有名な本生譚の一つである薩埵王子說話の韓日比較硏究を試みたものである。 主たる硏究對象は漢譯佛典と韓日兩国の本生説話集の代表作といえる『釈迦如来十地修行記と『三宝絵』である。本硏究の目的は本說話の韓日兩國における特徵と今までの硏究で明らかにされていない幾つかの問題點の解明にある。 検討してみた結果, 本說話は漢譯經典の流れの中から把握する際、菩薩(修行者)の身分によって三つの類型に分けられた。また釈迦如来十地修行記の出典はこれまでの硏究成果とは違って『金光明最勝王經と『菩薩投身飼餓虎起塔因緣經(『經律異相』)が推定された。それから、『韓日兩国の釈迦如来十地修行記』と『三宝絵』に収められている薩埵王子說話の特徵解明に努力し,『釈迦如来十地修行記』にはできるだけ話を理解しやすく、おもしろくしようとする意図がみられ、『三宝絵』には王子の慈悲心と説話の眞實もしくは實在性に焦點が置かれていること等が確認された。

6

8,700원

본고는 1637년 10월에 발발한 ‘시마바라(島原)․아마쿠사(天草)의 亂’을 중심으로 亂의 대장이었던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의 신격화와 그 기적, ‘亂’ 속에 보이는 시로의 역할과 사후처리에 보이는 영향에 대해서 고찰한 것인데, 다음의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亂’ 발발 이전에 그리스도교적 교양을 쌓고 있던 시로는 ‘亂’이 발 발하자 난의 주모자 그룹(낭인집단)에 의해 ‘하늘의 사자’, ‘天人’ 등으로 신 격화되면서 亂軍의 세력을 규합하는데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난의 주모자 그룹은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지역에서 예언에 의한 시로의 탄생을 유포시 킴과 동시에 인간 세계가 아닌 천상의 세계에서 내려온 인물로 형상화시켰 다. 동시에 시로의 기적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이는 亂軍의 군세를 키우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15․16세의 소년을 大 將으로 삼아 3만 7천여 명의 亂軍을 규합해 막부에 대한 종교적 저항을 시 도한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연구에서 시로는 ‘亂’의 大將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으 나, 사실 시로는 군사적 차원의 大將보다는 수세에 몰린 그리스도교 신자 들이 중심이 된 亂軍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이 주된 것이었다. 막부의 군사 적 우위와 야부미(矢文)를 통한 투항권고 및 내통공작 등으로 약화될 수밖 에 없었던 상황에 시로를 통해 亂軍의 종교적 힘에 의한 결속력 강화를 모 색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로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면, ‘亂’ 이전 단계에서는 신통력과 기적을 가진 신격화된 인물로서 난군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역할이었 고, ‘亂’ 초기 단계에서는 亂軍을 지휘하기도 했지만, 하라성에서의 농성 단계에 들어가서는 실제적 軍勢를 지휘하는 역할보다는 약화된 결속력을 종교적 힘에 의지해 강화시키기 위한 ‘하늘의 사자’(天之 使)로서의 역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 3만 7천명이라는 전원 몰살과 함께 ‘亂’은 종결되었고, 시로 또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 ‘亂’은 당시 일본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邪敎 觀을 강화시켰고,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서양사상의 단절을 가져와 古學․ 國學․水戶學 등으로 대표되는 근세 에스노센트리즘적인 사상, 다시 말하 면 근세적 내셔널리즘 창출의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 과 국가라는 용어 자체의 재음미와 개념의 창출이 근대에 기준을 두고 있 고, 일반적으로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 자체도 근대 이후의 시대에 한정되 는 의미로서 쓰이고는 있지만, 前近代인 근세에도 민족과 국가 의식은 어 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으며, 민족과 국가 간의 갈등 또한 항상 존재해 왔다. 물론, 민족과 국가 의식간의 경계가 불확실한 면은 없지 않아 존 재하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근대 이전인 전근대 시대에도 내셔널리 즘은 존재했고, 근세 일본의 경우, 이른바 鎖國 내지는 海禁體制의 근간으 로서 시행된 그리스도교 금제는 근세적 내셔널리즘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고 생각한다.

This article is on the deification of Amakusa Shiro(天草四郞) who was the leader in ‘Rebellion of Shimabara․Amakusa’ flared out in October 1637 and the miracle he did, and the role of Shiro(四郞) in rebellion and its effect on later settlement. It can be briefed to three perspectives. First, Shiro who studied Christianity before the rebellion became deified as ‘the messenger from the heaven’(天之使) and ‘celestial’(天人) by ringleaders(a group of a masterless samurai) of the rebellion and used for rallying the rebels. The ringleaders of rebellion circulated the words on Shiro’s birth by prophecy in Shimabara․Amakusa and encapsulated him as a divine person from the heaven, not from the humans’ world, who does miracles at the same time. It was the strategy for strengthening the power of rebels for religious resistance against the shogunate government by calling 37,000 rebels with a leader at age 15․16 only. Second, according to researches up until now, the role of Shiro as the leader of rebellion was emphasized, but his main role was the spiritual leader of rebels who were mostly Christians and in trouble instead of the military leader. In order to divert their weakening position from the superior military power of the shogunate government who shot arrows with statements and secret communication to surrender, the rebels tried to find a way out by uniting with religious power. Therefore, the Shiro’s role was presumably a messenger from the heaven to strengthen the unity with religious power during the demonstration at Hara Castle(原城). Third, the rebellion was terminated with killing of everyone of 37,000 rebels, and Shiro was also killed miserably. The rebellion strengthened the heresy of Christianity in Japan then and abscission with the western ideas relate to Christianity which provided the ground for creation of the nationalism in recent years such as ethnocentrism. Of course, I agree to the ambiguity between the people and nationalism in recent years, but the nationalism was certainly existed. For recent years in Japan, the prohibition against Christianity became the background of nationalism resulted from the national isolation(鎖國) and the ban on international trade by sea(海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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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間における内村鑑三研究の差異 - 宗教文化的背景を中心として -

鈴木貴久子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3호 2007.12 pp.165-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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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는 국가신도정책이 추진되었던 시대 에 일본과 예수라는 대립항목, 즉 ‘두 개의 J(Japan과 Jesus)’를 추구했다. ‘교육칙어’가 발표된 다음 해 그가 근무한 고등학교에서의 봉대식 때, 기독 교인으로서 교육칙어에 대해 정식으로 경례를 하지 않았던 우치무라는 학 교와 사회와 교회와 국민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 고난 속에 서 많은 저작물을 내었는데, 그 저서들을 읽은 많은 문학자들이 기독교와 접하게 되었다. 또한 그가 주관하는 ‘성서연구회’에 참석하는 문학자들도 있었다. 가령 우치무라의 후계자라고까지 불렸던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 郎)를 비롯해 많은 문학자들이 기독교를 신봉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일본이 라는 국가와 예수를 동시에 사랑했던 애국자 우치무라의 행동이 일으킨 ‘불경사건’은 그의 조선인 제자였던 김교신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로마 서 강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적으로 수강했던 김교신은 무교회주의를 조선에 소개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에 대한 한국과 일 본에서의 연구와 관련하여 그 주제상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이 때 본고는 특히 한일간 연구 경향의 차이에 대해 종교적 배경을 중심으로 설 명하고자 한다. 예컨대 김교신이나 함석헌이 보는 우치무라와 일본인들이 보는 우치무라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런 차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종교문화적, 사상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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