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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연구 [STUDIES IN KOREAN MUSIC]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국악학회 [Korean Musicological Society]
  • pISSN
    1975-4604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75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예술체육 > 음악학
  • 십진분류
    KDC 679 DDC 780
제40집 (12건)
No
1

신라의 불교음악 수용에 관한 고찰

김성혜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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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0원

신라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불교음악이 연행됐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음악에 대한 논의는 있었으나, 통일 이전의 불교음악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불교음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통일 이전의 신라 불교의식에 관하여 살펴보면서, 불교의식을 통해 불교음악의 연행 가능성을 고찰하고자 하였다.어떤 종교가 다른 곳으로 전파될 때 종교의식이 함께 포함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종교의식에 거행되는 악가무는 종교의 유입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 승려 혜량에 의해 개최된 백좌강회와 팔관회는 불교의식과 함께 불교음악이 연행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신라 초기불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교음악의 개념을 의식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범패승이 부르는 것 외에 일상 예불에 행해지는 염불과 독송 그리고 게(偈) 등을 모두 포괄한 넓은 의미로 인식했을 때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라의 불교음악은 527년 불교의 공인 이전 시기인 소지왕대까지로 소급된다. 또한 승려들의 왕래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볼 때도 불교의식과 동반되었을 불교음악은 통일이전 시기에 유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6~7세기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의례와 동반된 불교음악도 함께 수용한 것으로 본다.

When Buddhism was introduced(imported) to Silla, it could be easily assumed that its music must have accompanied it. However, while there have been discussions on Buddhist music in the Unified Silla era, no specific approach has been made to the Buddhist music of Silla before the Unification. This dissertation aims at examining the Buddhist ceremonies before the Unification, which couldn't be adequately performed without music, (or which is closely related to Buddhist music before the Unification) and the possibility that Buddhist music was introduced through the ceremonies and accepted by Silla. When a new religion is introduced to a country, it generally comes along with its ceremony. So it could be justified in believing that the music and dancing of the religious ceremony might be introduced almost at the same time as the introduction of the religion. Baekzwaganghwae and Palguanhwae, performed in 551 by Hyeryang, the Buddhist monk from Goguryo, could be viewed as the examples, from which it could also be inferred that the early Buddhism in Silla was influenced by Goguryo. The Buddhist music of Silla identified in the historical records is traced back to the year of 527, the period of the King Soji, when Buddhism was not nationally authorized. The records concerned with the interchanges of monks also confirmed that the Buddhist music accompanying Buddhist ceremony should be introduced before the Unification. Therefore, it could be concluded that Silla Dynasty must have accepted the music of Chinese Dynasties of Su and Dang and that Buddhist music indispensable in Buddhist ceremony must have been introduced and accepted.

2

6,400원

3

"구별"의 음악 : 현대 가야금 연주에 있어서의 정체성의 협상

김희선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4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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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0원

이 글은 새로운 음악현상이 사회에서 정당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음악의 사회화 과정에 있어서 음악과 정체성의 문제에 주목한다. 가야금 신곡은 1960년대에 소개된 이래 지난 40년간 다양한 장르와 형식으로 분화하면서 가야금 연주연행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야금 신곡의 등장과 사회화 과정에서 연주자들은 적극적인 사회적 행위자로 주체자의 역할을 하였다. 가야금 신곡은 ‘전통’과 ‘현대’의 의미로 생산되고 미디어와 연주 연행 등을 통하여 그 의미가 규정되고 정의되어 왔고 새로운 음악문화를 형성하는데 정체성 협상의 과정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가야금 신곡은 주체들인 연주자들의 정체성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전통’과 ‘현대’의 의미가 규정되고 주장되고 계속해서 협상되며 계속해서 변화되며 담지자간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얻으며 생산되고 있다. 즉 새로운 음악의 연주를 통해 연주자들은 새로 만들어진 ‘현대 엘리트적’인 정체성의 신곡을 통해 기존의 국악연주자 혹은 가야금이라는 악기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편견과 부정적인 이미지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해내는 한편, 산조와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자본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강화한다. 현대적 교육제도를 통하여 배출된 젊은 연주자들은 현대 한국의 문화 시스템에서 생산된 경쟁적인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을 기획하고 협상하는 방편으로 신곡을 선택하는데 이를 통해 다른 연주자로부터의 구별을 실현한다. 따라서 가야금 신곡은 정체성의 협상과정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얻으며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으며, 따라서 가야금 신곡의 의미형성과 그 연주연행은 다분히 정치적이며 사회적 구별의 표지로서 생산되는 예술이다 (브르디외, 1984). 새로운 가야금 곡은 그 경계와 의미가 주체자들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현대적 삶과 역사적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계속해서 새롭게 정의 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양식으로서 새로운 가야금 음악의 연주와 생산은 그것을 연주하는 개인과 사회문화 자본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정체성의 문제와 사회적 생성과정의 연구를 통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Gayageum shin'gok (new compositions for the gayageum, a 12-stringed long board zither) was initiated during the 1960s and this newly emerging yet traditional performance genre was encouraged, supported and legitimatized by cultural institutions, promoters, performers and critics in South Korea. Currently gayageum shin'gok is actively performed by university-based performing groups or ensemble groups as well as solo performers. New identities and concepts including “traditional” and “modern” are created around gayageum shin'gok performance. These are constantly contested, negotiated, reaffirmed and reinforced through social networks involving a variety of social actors, most importantly performers. Simultaneously these identities also help musicians to create their own social reality as means of distinction from negative images of traditional musicians of the past and means of superiority which distinct from other musicians in a competitive milieu within current cultural system in South Korea. Thus gayageum shin'gok can be seen as the production of art as maker of social distinction (Bourdieu 1984). Based on fieldwork conducted in Korea 1997~2003 and interviews with leading and young musicians of this genre, I explore the ways in which musicians create new images and identities through staged musical performances and public discourses. The present study concludes that constructed identities in performance are also vital to confirm performer's own socio-cultural reality in relation to given socio-historical conditions. It also reflects social actor's apprehensions and negotiations of their past, present and future.

4

정읍과 수제천의 음악적인 관계에 대한 고찰

문숙희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8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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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정읍은 고려로부터 조선에 전해진 곡으로서 세 절로 된 유절형식의 성악곡이고, 정읍의 雅名이라고 하는 수제천은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곡으로서 네 장 형식으로 된 기악곡이다. 본 연구에서는 정읍과 수제천 두 악곡을 악구단위로 구분하여, 두 악곡의 형식적인 관계와 선율적인 관계를 고찰하였다. 악구로 구분한 정읍과 수제천의 형식은 서로 대응한다. 정읍 세 절의 형식을 악구로 구분하면 제1절과 제3절은 각각 머리부분, 환입부분, 종결부분으로 나뉘고, 제2절은 머리부분, 환입부분으로 나뉜다. 수제천 네 장을 악구로 구분하면 제1, 2, 3장은 각각 머리부분, 환입부분으로 나뉘고 제4장은 종결부분이 된다. 수제천 제1, 2, 3장은 각각 정읍 제1, 2, 3절의 머리부분과 환입부분에 대응하고, 수제천 제4장은 정읍 제1절과 제3절의 종결부분에 대응한다. 정읍과 수제천의 형식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 두 가지 차이점은 기악곡과 성악곡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첫째, 정읍은 유절형식의 성악곡이기 때문에 종결부분이 제1절과 제3절에 각각 나오지만, 수제천은 전체를 하나로 엮은 기악곡이기 때문에 종결부분이 맨 끝에 한 번만 나온다. 둘째, 수제천 제3장의 음역은 정읍 제3절의 음역에 비해 4도 높은데, 이것은 기악곡인 수제천의 주선율을 연주하는 피리의 음역에 맞추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반복되던 선율에 변화를 주어 기악곡의 절정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수제천의 선율은 정읍의 선율을 악구단위로 가져와서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먼저 정읍 제1절에서 선율을 발췌하여 수제천 제1장을 만들고, 수제천 제2장과 제3장은 정읍 제1, 2, 3절의 형식관계에 맞추어 수제천 제1장을 고쳐서 만들었다. 수제천 제4장은 정읍의 종결부분에서 선율 일부분을 가져와서 만들었다. 그리고 수제천에서는 피리의 음역 때문에 정읍의 음역을 전체적으로 한 옥타브 낮춘 뒤, 피리가 낮아서 불지 못하는 것은 다시 옥타브 위로 올렸다. 이와 같이 수제천은 세 절의 유절형식 성악곡인 정읍을 네 장의 기악곡으로 재구성한 것으로서, 그 형식과 선율은 악구로 구분된 정읍의 형식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5

고구려음악 관규(管窺)

신대철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1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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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7

7,300원

한국의 민속음악이 문화말살이라는 일제의 강압통치하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전승되어 왔는지 근대역사를 살핌으로써 음악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20세기 한국음악사 기술에 있어 하나의 단초를 제공하고자 시도되었다. 20세기 전기 한국음악사 중 민속음악 관련연구를 시도한 선행연구자들이 지적한 국악학, 국문학, 민속학 분야의 역사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20세기 전기 한국음악사에서 민속음악과 관련하여 기술할 수 있는 음악사의 사건들을 도출하고자 연구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판소리, 창극, 민요 등 민속음악은 판소리의 창극화, 전통연희의 무대화 과정을 통한 남도소리, 민요 및 잡가의 새로운 전개, 방송국 개국 및 음반제작 발매에 따른 민속음악의 대중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명맥이 유지되었다고 파악하였다.판소리분야의 전승 양상을 보면, 무단정치시기 일본문화의 이입이 본격화되고, 한국인에 의한 신파극 공연 및 영화상연이 활성화되면서 극장문화도 바뀌어 판소리꾼들은 서울음악계에 활동할만한 안정된 기반이 사라진 이후, 1920년대 ‘구악(舊樂) 부흥운동’,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한 방송과 녹음, 축음기 회사가 주최하는 명창대회, 파쇼정치시기로 구분되는 1930년대에는 판소리 명창들의 조직적인 활동과 현대적 재창조를 통한 신창극 양식 완성, 이후 판소리 창자 중심에서 벗어나 연극인들과의 교류가 보다 빈번해지는 식으로 변화가 있었다.창극분야는 원각사에서부터 활동이 대두되기 시작한 이래 창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현대국악사에 뿌리를 내리며 활발한 공연 활동을 펼쳐나갔는데 이들 창극인들이 소속했던 단체로는 최초 협률사로부터 장안사, 연흥사, 창극좌, 화랑창극단,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조선음악단, 조선이동창극단 등이 있으며 해방이후로 넘어가면서도 이 같은 창극단들의 활동은 계속 명멸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의 민요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속악의 성악곡들은 협률사와 원각사 시절부터 새로운 극장의 등장으로 인하여 무대예술의 연주 종목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며, 한편 축음기에 의해서 그 당시의 활동을 현재까지 일부나마 보존하고 있다. 잡가, 민요, 입창의 전통은 구한말의 명인 명창들로부터 일제시대 권번 출신의 새 세대 기생들에게 전승됨으로써 후세에 전승될 수 있었다. 민속음악의 전통이 정규학교 교육에 뿌리를 못 내리고 사회의 그늘 속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이 결국 해방 후에도 우리의 국악이 오랫 동안 사회에서 홀대받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일제강점기 판소리, 민요, 농악, 민속음악일반 등 관련 학술성과를 조사한 결과 민요관련 연구가 많았고 판소리, 농악 순으로 많았는데, 민요연구물을 시기별로 집계하여 본 결과 총 72편 중 60편이 1920~30년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는 1930년대에 발족한 한국민속학회의 활동과 송석하, 손진태 등과 같은 민속학자들의 연구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try to present a clue which recover the legitimacy of Korean Folk Music, and which establish the history of Korean Music, by inspecting how Korean Folk Music is handed down against the policy of liquidation of Korean culture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tic rule. To deduce the event of music history which can be described in relation to folk music, this study lay focus on the field of historic fact that antecedent folk-music-researchers mentioned in Korean traditional music, Korean Literature and folklore, through the fore part of 20 century. It is researched that Folk music, such as Pansori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tic rule, Changeuk, Folk song, is maintained by popularization of folk music resulted from Pansori's coming to Changeuk, from the evolution of South-province song, folk song and miscellaneous songs through the process of being stage of traditional play, and from the opening of the broadcasting. The researching the scientific outcome of Pansori, Folk song, Farmer's band music, general folkways song shows that there are a lot of studies related to Folk song. Compiling the folk song studies by the period shows that 72 to 60 ones are concentrated on from nineteen twenties to nineteen thirties. This means that this aspect was influenced by the activities of Mr. Song Suk Ha, Mr. Son Jin Tae and Korean Folk Song Institution inaugurated in 1930's.

8

박, 박자, 장단의 층위(層位)와 변이(變移)유형

이보형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19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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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0원

9

조선후기 지방 군영 취타악대 연구

이숙희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23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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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0원

이 논문은 지방 군영 악대 중 취고수 계통 취타악대에 한정하여 여지도서사찬읍지한국근대읍지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 분포와 규모, 취타악대의 성격, 음악활동을 살펴 지방 군영 악대의 음악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여지도서사찬읍지한국근대읍지에 기록된 내용만으로 지방 군영 취타악대의 성격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대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취타악대의 분포 지역은 충청도가 가장 적고 전라도가 가장 많으며, 그 숫자는 가장 적은 경우 한 명이고 가장 많은 경우 314명이었다. 모든 군영악대가 취타악기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사용한 악기의 종류와 숫자는 지역마다 다르며, 같은 계통의 악기에 대한 명칭도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또 악대의 명칭도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조선후기 지방 군영 취타악대는 전국적으로 약 32% 정도 분포되어 있었으나, 규모나 악대와 악기의 명칭 등 그 체제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취타악대가 속해 있던 속오군이 임기응변의 비상조처로 생긴 점, 조선전기부터 전승되는 군영 음악 연주 제도와 조선후기에 도입된 새로운 취타악대 제도가 혼합된 점, 군영 취타악대 제도와 관아 취타악대 제도가 구분되지 않은 점에 기인한다고 본다. 지방군영 취타악대의 명칭은 지역별로 특정 명칭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취고수 계열과 취수 계열의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 취수 계열은 관아 소속 악대의 명칭으로, 취고수 계열은 군영 소속 악대의 명칭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고, 전반적으로는 취수 계열은 관악기 연주자만을 한정해서 지칭하는 하위 개념으로, 취고수 계열은 취수를 포함한 취타악대 전체를 지칭하는 상위개념으로 해석되었다. 지방 군영의 취타악대는 군영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아에도 속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지방 취타악대가 궁중의 내취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취타악대의 연주자는 신분이 높지 않았으며, 연주와 심부름을 겸하거나 연주와 군역을 겸하는 경우, 잡역을 담당하는 경우가 있었고, 보수를 받는 경우와 받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진 지방 군영의 취타악대는 조선후기 지방 관공서 음악의 한 축을 담당하여 새로운 지방 음악 문화를 창출한 점에서 음악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지방 군영 취타악대로 인해 각 지방에 새로운 음악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특히 규모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취타악대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동일한 음악문화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논문은 지방 군영 취타악대의 전반적 성격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With a limit to Chwigosu type Chwita music band,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distribution, size, characteristics and musical activities of Chwita music band, and to articulate the significance of local military camp music band in music history. As a whole, records regarding local military camp music band were general and lacking in detail which prevented revealing exact information on Chwita music band but the following information could be gathered: Chungcheong Province had the least distribution of Chwita Band and Jeolla Province had the most distribution. In terms of the number of members, it ranged from 1 member to 314 members. The number of musical instruments used and the names of the musical instrument were different by regions. In addition, various names were used for the band. Although Chwita Band was distributed to about 32% of regions, one of its characteristics is that their size, names of bands, and systems were inconsistent. Local military camp Chwita Band was part of both the military camp as well as the government offices. The main reason for this seems to be that some Chwita Band played the role of naechwi for the Royal Court. There are two types of local military camp Chwita Band which are Chwigosu type and Chwisu type. Chwisu is a subconcept with a limitation to wind instrument players and Chwigosu type is the higher concept which refers all Chwita Band including the Chwisu type. Chwita Band players were of lower class and were responsible for both playing the music and running errands. Some were paid and others were not paid. Chwita Band contains the significance in musical history for its role in creating new music culture as it was responsible for music of regional government and public offices during the Joseon Dynasty. This paper is significant in that it has first revealed the characteristics of local military camp music bands.

10

조선시대 장악원 전악의 역할

이정희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28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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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11

고구려 호선무(胡旋舞)의 정체 연구

이종숙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30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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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12

고려시대 정재의 음악과 공연미학

임미선, 사진실

한국국악학회 한국음악연구 제40집 2006.12 pp.327-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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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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