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9)
2024 (21)
2023 (23)
2022 (24)
2021 (27)
2020 (23)
2019 (22)
2018 (14)
2017 (15)
2016 (12)
2015 (17)
2014 (16)
2013 (18)
2012 (15)
2011 (8)
2010 (8)
2009 (12)
2008 (8)
2007 (8)
2006 (8)
2005 (8)
2004 (9)
2003 (7)
2002 (7)
2000 (8)
1999 (16)
1998 (9)
1997 (7)
1996 (6)
1995 (14)
1993 (43)
1992 (5)
1991 (7)
1990 (4)
1989 (8)
1988 (7)
1987 (7)
1986 (6)
1984 (8)
이 글은 ≪곽우록≫을 대상으로 성호의 정치사상을 어떻게 읽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모색한 글이다. 필자는 ‘유교질서의 재생산’이란 개념과 홍이섭의 ‘유교주의 독법’을 결합시켜 성호의 정치사상을 유교주의라는 틀에서 읽어내는 시도를 하였다. 먼저 생재(生財)와 이(利)를 중심으로 한 홍이섭의 ≪곽우록≫ 독해를 소개하고, 이어서 실학에 대한 홍이섭의 관점에 대해 ‘유교주의 독법’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주의 독법’을 근대주의적인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실학 해석의 틀을 넘어서서 유학 그 자체 내에서 실학이 자기 전개하는 모습을 포착하는 ‘내재적’ 독법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나아가 유교 정치사상의 다양성을 살려내기 위해 협소한 맹자주의적 관점을 넘어설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관자와 순자를 포괄하는 큰 틀의 ‘확장된 유교주의 독법’을 시론적으로 제안하여 유학 본연의 정치에 대한 감각을 복원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확장된 유교주의적 독법’에 의거하면 기존에 간과되거나 놓쳤던 현실의 다양한 측면들이 보다 섬세하게 포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This paper is to contemplate how to read Sungho(星湖)'s political thought in his An Intellectual's Statecraft(藿憂錄). I adopt to link the concept of 'reproduction of Confucian system' from Lee Bongkyoo and 'Confucianism perspective' from Hong Isup. Lee reads Silhak of late-Chosun dynasty as reproduction of Confucian system. Hong also researched Silhak through his own Confucianism perspective. Hong stressed material production and interest as basis of Confucian society in Silhak thought and interpreted Silhak's reform proposals as yet Confucian, not modern. I agree on his perspective and perform to fill his agenda with some additonal contents in this paper. And I propose 'Confucianism perspective enlarged' which is beyond Mencius orthodox of Song period and is to introduce Xunzi and Guanzi into Confucian school.
조선후기 실학은 실정(實政)을 통해 중세국가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려했던 개혁사상이었다. 실학자들 중에서도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18세기 전반기 환국(換局)과 무신란(戊申亂, 1728)을 거치면서 공멸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조성된 탕평(蕩平)정국에서 민산(民産)을 안정시킬 방안을 적극 모색하였다. 민산 안정은 부귀와 빈천을 고르게 함으로써 가능하였으며, 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주요정책으로 토지개혁론을 제시하였다. 한전론(限田論)은 지주전호제 확산에 따른 토지소유의 불균등을 제도적 차원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방안이자, 부세제도 개편만으론 실현할 수 없었던 도기일치(道器一致)를 구현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한전론이라는 기를 통해 민산 안정이란 도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이익은 한전론을 통해 민산을 확보하고, 법을 확립하여 탕평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때 법을 세운다는 것은 변법의 차원에서 당쟁을 야기했던 통치 체제를 대신하여 탕평을 실현할 수 있는 집권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제시된 정치운영방식은 시세 변화를 고려한 형정(刑政) 강화였다. 그는 ‘법리승제(法利乘除)’의 원칙, 즉 불법에 따른 이득이 큰 만큼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형정을 집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불법ㆍ탈법으로 초래된 모순을 바로잡고자 했다. 한편 이익은 국가를 좀 먹는 6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로 신분제를 들었다. 천인분리(天人分離)의 관점에서 인간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그에게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신분의 세습은 모순으로 인식되었다. “법을 지키는 사람[人]과 사람을 다스리는 법(法)이 상호 보조를 맞추면 위가 안정되고 아래가 제대로 순응하여 다스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법상유(人法相維)의 원리는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능력 있는 자를 선발하여,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직분의 확정이야말로 이익을 포함한 실학자들의 사회사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개혁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이처럼 이익은 중세국가체제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토지와 신분제, 이를 토대로 입안된 각종 법제와 그 운영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ㆍ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기존 주자학의 사회운영방식에서 벗어난 실학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Silhak was the innovation thoughts that would solve wrong point state the middle ages through practical politics. Among other things, Seong Ho(星湖) Yi Ik(李瀷) presented a plan to be able to stabilize a life of the people to Tangpyeong(蕩平) made at sense of impending crisis that it was able to all go breakdown while staying to the 18th century first half year Hwanguk(換局) and Musinran(戊申亂). He insisted to Hanjeonron(限田論), and solved an inequality own land, and would Dogiilchiron(道器一致論). He established law, and would realize Tangpyeong. At this time it was to convert it to the state which can realize Tangpyeong that set up law as substituted for a rule system caused by a trouble. Political operation method that he presented in order to achieve a goal was enhancement of a punishment to be exposed to actuality. He applied strictly a punishment according to principles of Beopriseungje(法利乘除), and would correct basic contradiction. On the other hand, he considered a status system outstanding to an element to injure a state. He indicated to the status proposal contradiction that didn't take personal ability into consideration at dimensions of Cheoninbunri(天人分離) while emphasizing to human active anger. And he would make the society which determined status according to abilities of fundamental each one of Inbeopsangyu(人法相維). Basically, He was worried so as to be profound about human and societies, and seemed to open an element of realism, he had toward the results, and to have got out of at social operation methods of the existing Chu Hsi.
유득공(柳得恭)은 역사에서 망각된 발해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여러 사서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발해고≫(1784)를 저술하였다. ≪발해고≫의 의의는 발해사에 대한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과 함께 그 서문에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남북국(南北國) 시대를 제기한 문제의식에 있다. 그렇지만 ≪발해고≫의 내용을 살펴보면 누락된 사료도 적지 않고 고증의 오류도 발견된다. 최근 학계에 보고된 ≪발해고≫ 이본들을 검토한 결과, 유득공은 초고본을 대폭 수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초고본과 수정본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군고는 자구 수정과 사료 추가라는 부분적 수정을 거쳤으며, 신고는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 기사를 추가하여 분량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지리고는 구성과 체계를 대폭 수정하였는데, 특히 지리 고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반면 예문고는 초고본의 국서고에 사료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처음 저술하고 뒤이어 수정본을 낼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당시 실학파 사이에 유행한 총서 간행과의 관련성을 들 수 있다. 즉 박지원(朴趾源)이 1784년 무렵 진행하고 있던 ≪삼한총서(三韓叢書)≫는 초고본과 관계가 있고, 서형수(徐瀅修)와 이덕무(李德懋) 등이 1791년 무렵 추진하던 ≪소화총서(小華叢書)≫는 수정본과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득공의 발해 지리에 대한 인식이 1790년 1차 연행까지 견지되다가 1795년에 바뀐 점을 감안하면, 수정본의 집필 시기는 이 사이로 추정된다. 한편 현재까지 전하는 ≪발해고≫ 수정본 5종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유득공은 수정본을 두 차례 이상 수정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1800년 이후 말년까지 유득공은 기회가 닿는 대로 ≪발해고≫를 수정ㆍ보완하였던 것이다.
Yudeukgong(柳得恭) wrote the Balhaego(1784) to reconstruct forgotten history of Balhae through collecting piecemeal historical materials which have been recorded in various histories. The Balhaego has the significance not only as it was the first work about the history of Balhae but also it contained a critical mind that raised the Southern and Northern kingdoms period which Silla and Balhae stood together in the preface. However, there have been some omitted historical materials and some faults were found in the historical investigation when we examined the contents of the Balhaego. Recently, as the result of examining different versions of Balhaego which were reported in the academic world, it was checked that Yudeukgong must have revised the first draft. The comparison between the first draft and revised version gives as follow; the former was partially modified with the revision of words and addition of historical materials; the volume of the latter increased considerably as the story of Balhae's refugee who fled to Goryeo was added there. Meanwhile, the Jirigo was revised a lot. We can see that the investigation of geography shows fairly high standard. On the other hand, the revision of the Yemoongo was just an addition of historical materials to Gookseogo of first draft. Yudeukgong could write the Balhaego for the first time and published its revised version right after the first edition in the relation of intellectual fashion for Silhak(Realist School of Confucianism) scholars to publish collections of books at athat times. That is, the Samhanchongseo, which was being worked by Park Jiwon around 1784 had reference to the first draft of the Balhaego. Sowhachongseo, being pushed ahead in the year of 1791 was connected with the revised version. Also, it was assumed that Yudeukgong might have written the revised version for the years from 1790 to 1795 considering he had kept his recognition about the geography of Balhae in his first official visit to Beijing in 1790 but changed his idea in 1795. After reviewing the five extant versions of the Balhaego, it is confirmed that Yudeukgong remodified the revised version more than twice. Therefore, we can reach that Yudeukgong revised and supplemented the Balhaego as much as he could after 1800 to his last days.
17세기 후반 붕당정치의 말폐가 나타난 뒤 시강원(侍講院)의 역할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왕위계승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끝에 즉위했던 영조와 정조는 탕평을 추진하며 국정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붕당정치 체제를 뒷받침하던 관각제도(館閣制度)의 개편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 홍문관을 비롯한 여타 관각들의 기능이 축소되었던 반면 시강원의 위상과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이는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당파 간의 갈등이 격화되던 상황 속에서, 세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하는 시강원의 동요를 방지하고 시강원에 대한 국왕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영ㆍ정조는 관각을 비롯한 주요 관서의 연혁 및 기능을 재정리한 관서지(官署志)의 편찬을 주도하였는데, 1784년(정조 8) 유의양(柳義養)이 완성하여 정조에게 진헌하였던 ≪시강원지(侍講院志)≫ 역시 그같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편찬된 것이었다. ≪시강원지≫는 조선왕조의 세자 교육을 관장하던 세자시강원의 사적을 기록하고 그 역할을 설명한 책이다. 그러므로 서연(書筵)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세자의 강학활동을 핵심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책봉ㆍ입학ㆍ관례ㆍ가례 등 세자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를 비롯하여 세자의 모든 공식ㆍ비공식 활동에 대한 규정 및 세부 의절을 포괄하고 있다. 게다가 세자로 책봉되기 이전의 원자 교육을 담당하는 보양청(輔養廳)과 강학청(講學廳) 및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 등, 시강원과 별도로 운영되던 관서의 업무 역시 함께 서술하고 있다. 요컨대 ≪시강원지≫는 왕도정치를 실현할 미래의 성군을 만들어 가기 위한 조선왕조의 제도적 노력이 18세기 후반 탕평정치의 시행과 더불어 현실화되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17世纪后半期,伴随朋党政治弊端的逐渐显露,侍讲院得以彰显其重要意义。经历了王位继承的艰难历程后,登上王位的英祖和正祖积极推行荡平朋党的措施,并致力于安邦定国之大略。在这一过程中,大力改编了过去的朋党政治体系的下层结构——馆阁制度,特别值得注意的是,这一时期弘文馆等馆阁的功能在缩小,而侍讲院的地位和功能却得以强化。在当时围绕王位继承问题所展开的党派斗争激化状态中,这是一个确保负责世子教育和保护职责的侍讲院的稳定,以及加强国王对侍讲院统制的举措。而且英祖和正祖主导了官署志的编纂工作,这一官署志重新整理了馆阁等主要官署的沿革和功能。1784年(正祖 8)柳义养完成后进献给正祖的侍讲院志,也应该是在这一历史氛围中完成的。 侍讲院志记录了世子侍讲院的史蹟,并说明了世子侍讲院的功能。世子侍讲院是主管朝鲜王世子的教育部门,因此侍讲院志所记录的主要内容也是以书筵为中心所展开的世子的讲学活动,所以内容包括了世子所必须执行的册封、入学、冠礼和嘉礼等通过仪礼,以及对世子的所有正式的和非正式活动的规定和细部仪节。同时,世子在得到册封之前作为元子时,担任元子教育工作的辅养厅和讲学厅,以及担任世孙教育职责的世孙讲书院,还有那些和侍讲院无甚关系的官署的业务也一一收录在内。因此,可以说侍讲院志集中体现出了朝鲜王朝为培养将来实现王道政治的圣君而做出的制度上的努力,以及随着18世纪后半期荡平政治的实施并得以实现的全貌。
본 연구는 선진(先秦)철학에 나타난 정치공동체와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개인이 경험하는 정치공동체를 고찰해 봄으로써 ‘중국 고대’의 정치공동체와 개인, 동아시아 고대의 맥락에서 전체와 개체의 문제에 접근하였다. 기존의 연구가 ‘동아시아 고대’의 정치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본 연구는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그 위에 개인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본 연구에서 ‘개인(individual)’ 혹은 ‘개인주의(individualism)’란 소위 서구 근대성의 전유물로서의 ‘개인’, ‘개인주의’는 아니다. 본 연구는 ‘개인’, ‘개인성’, ‘개인주의’가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하였다. ‘개인’을 서구 근대성의 전유물로 한정하여 동아시아 사회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동아시아 사회의 맥락에서는 ‘동아시아적 자아’ 혹은 관계 속의 인간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사람(person)’이 ‘개인’을 대신한다는 관점은 동아시아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측면이 있다. 본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정치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였다. ≪시경≫에 나타난 ‘개인이 경험하고 느끼는 정치공동체’를 분석하여, 본 연구의 초점이 개인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동아시아 고대’의 주요 정치사상 텍스트로서 널리 연구되는 ≪맹자≫ㆍ≪순자≫ㆍ≪묵자≫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기존의 연구가 ‘동아시아 고대’의 정치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본 연구는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그 위에 개인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Early Chinese texts have become the classics, providing significant references for researchers on East Asian thought, culture and history. Political thought in North East Asia is not an exception. Research on political thought in early Chinese texts mainly focuses on leadership and policy. Analyses of political leadership and the following policies in early Chinese thought are important in terms of the extent to which early Chinese thought has influence on political thought in the present day. This article focuses on individuals in political groups such as states: what individuals in political groups are, what the relationship between individuals and their political groups is like, and how individuals experience political leadership. Mencius, Xunzi, Mozi and the Book of Odes (Shijing) are the texts that are analyzed in this article.
주희는 ≪대학≫·≪논어≫·≪맹자≫·≪중용≫에 일관되는 논리를 복성과 확충으로 파악하고 이를 유학의 근본적 사유로 확립하였다. 이는 주희의 중화신설의 종지인 미발함양공부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성은 순수지선한 사실로 이해되며 복초설과 복성설의 근간을 이루지만, 그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공부론이 필요하다. 공부에는 존양과 확충이 병행되어야 하지만 주희는 유가의 주요 논리가 사태마다 올바르게 행위한다는 확충에 초점을 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주희의 사서집주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주자학의 학문적 중심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朱熹把≪大學≫·≪論語≫·≪孟子≫·≪中庸≫看成有一貫論理的儒學根本思惟系統而確立四書學體系. 這是立脚于朱熹中和新說的未發涵養工夫論. 在這里, 人性理解爲純粹至善的, 因而復初說和復性說是有邏集根據, 可是, 現實社會的人類也得實踐養性的工夫. 工夫論上存養與擴充是相須竝行的. 但朱熹認爲儒家主要理路就在事事合義的擴充, 此點是反映在朱熹四書學體系而是朱子學構造的中心思路.
중국 당(唐)의 고신(告身) 연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돈황과 토로번에서 발견된 실물 고신을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당 고신의 연구는 주로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많은 연구결과를 축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문서학은 물론 제도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최근에는 일본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에서도 당의 제도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흥미를 끌고 있다. 그런데 송(宋)의 고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주목할 만한 연구 업적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송의 고신으로 현재까지 전존하는 실물문서가 많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계속 실물문서가 발굴되는 당의 고신 연구보다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다른 이유로는 당의 고신 연구를 일본학자들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들 연구는 기본적으로는 당의 문서에 대한 연구이지만, 그 저변에는 당의 율령(律令)을 계수한 일본 고대사의 해명이라는 문제를 저변에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일본의 율령체제에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한 송의 고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은 일본과는 다르다. 한국은 당의 율령체제를 신라시대부터 도입하였지만 일본의 경우처럼 전면적으로 계수한 것이 아닌 부분적인 도입이었다. 한국이 당의 율령체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시기는 고려 성종대이다. 이때는 이미 중국에서 당(唐)이 몰락하고 오대(五代)를 거쳐 북송(北宋)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 고려는 당의 율령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송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의 고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의 고신은 물론 송의 고신도 연구해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북송의 고신 중 칙수고신(勅授告身)을 시론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현재 필자가 파악한 북송 고신은 문헌에 전사되어 있는 5점과 실물 고신 1점이다. 이를 북송의 원풍(元豐) 관제개혁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분석의 결과 북송의 원풍 관제개혁 이전의 칙수고신은 실직(實職)이 아닌 권직(權職, 差遣)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당육전≫에 나타나는 3성제의 시행을 목표로 시행된 원풍 관제 개혁 후에는 기본적으로는 당의 칙수고신과 유사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글은 북송의 칙수고신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가한 것은 아니다. 다만 현전하는 자료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작성된 고신의 형태로 복원하였고 교감을 하여 후일의 연구에 대한 자료로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후의 과제는 북송의 고신과 남송의 고신 전반을 아우르는 연구와 함께 고려시대 고신 연구에 점진적인 해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This paper targets Chishougaoshen(勅授告身) which is one of Gaoshen(warrant) styles of Northern Song Dynasty. According to a survey, there were total 6 Chishougaoshen in Northern Song Dynasty, and one of them was a real document. In this research, these 6 documents were considered by comparing them before and after the bureaucracy reformation of Yuanfeng(元豊). Chishougaoshen of Northern Song Dynasty has the identical styles to those made in Tang Dynasty, since it succeeded to Gaoshen styles of Tang Dynasty. However, bureaucracy in the real document was different from Tang Dynasty's. In particular, it was found that Lingwaiguan(government service without statutes) that was went by the name of a dispatch(Chiqin), substituted for official duties of officials in documents made before the bureaucracy reformation of Yuanfeng. On the contrary, documents made after the bureaucracy reformation of Yuanfeng had unique styles of Northern Song Dynasty, because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like Privy Council wasn't abolished, although they were modeled on Tangliudian of Tang Dynasty. This paper aims to analyze document styles of Goryeo Dynasty through Northern Song Dynasty's in China. Therefore, not only documents of Northern Song Dynasty, but also documents drawn up in Southern Song Dynasty need to be considered to understand document structures of the whole East Asia and find out how they had influence on document styles of Goryeo Dynasty.
조선의 본초학은 세종대를 기점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였다. 세종대에는 약재 종류의 급증은 물론 군현별로 품질까지 파악하였으며, 적극적인 증산정책도 추진되었다. 세종대 향약의 개발 과정을 규명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경상도지리지≫,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세종실록ㆍ지리지≫등을 분석하였다. 특히 약재 생산의 변동과 그 의미를 양(量)과 질(質)의 두 방향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우선 양의 측면에서는 지리지 편찬으로 전국의 실태를 파악하면서 약재 생산 지역을 확장하는 동시에 외래 약재의 토산화를 진행하였다. 질의 측면에서는 토산 약재의 약성에 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채취ㆍ포제법ㆍ사용법 연구 성과를 ≪향약채취월령≫과 ≪향약집성방≫ 향약본초 등에 담았다. 전자는 약재 종류 및 생산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고 후자는 약재 활용의 깊이를 더하려는 시도였다. 향약 개발을 위한 양과 질의 두 방향에 걸친 노력은 ≪세종실록ㆍ지리지≫에서 종합되었다. ≪세종실록ㆍ지리지≫에서는 약재 384종을 수록하면서 종양약재(種養藥材) 항목까지 설정하였다. 향약의 파악과 증산이 성과를 거두면서 조선 전기 의료의 확대를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development of the Hyangyak(鄕藥, Korean traditional herbs) during the era of King Sejong(世宗) in the Chosŏn(朝鮮) Dynasty. The herbal medicine of the Chosŏn entered the new stage at the era of King Sejong. In the reign of Sejong, there had been a noticeable increase in kinds of herbs. Besides understanding the quality of herbs by provinces, the Chosŏn government also had pushed ahead with increase policy of herbs. This article analyzes the ≪Gyeongsandojiliji(慶尙道地理志)≫, ≪Hyangyakchaechuiworlryung(鄕藥採取月令)≫, ≪Hyangyakjipseongbang(鄕藥集成方)≫, geography of ≪Sejongsilrok(世宗實錄)≫ to determine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the Hyangyak. Especially, this study argues the change of herbs production and its meaning in terms of both quality and quantity. By quantity measures, understanding the nationwide actual condition of herbs was carried out by the medium of compiling geographies such as ≪Gyeongsandojiliji(慶尙道地理志)≫. It leaded to expanding the growing area of herbs and indigenizing the foreign herbs. By quality measures, improving their knowledge about the traditional herbs was included in the medical books such as ≪Hyang- yakchaechuiworlryung(鄕藥採取月令)≫ and ≪Hyangyakjipseongbang(鄕藥集成方)≫. The former was effort to extending the kinds of herbs and its production, while the latter was exertion to deepen the use of herbs. The unremitting endeavor to the development of the Hyangyak was synthesized by compiling the geography of ≪Sejongsilrok(世宗實錄)≫. It contains 384 entries of traditional herbs, and create the ‘plantation herbs' for each province. The profound understanding of the traditional herbs and the successful increase of its production supported the enlargement of medical care during the early days of the Chosŏn.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선택하신 파일을 압축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