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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국악치유 방법에 관한 모델 연구 - 『活人心方』의 ‘去病延壽六字訣’과 ‘臟腑운동법’을 중심으로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1-3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퇴계의 『활인심방』(活人心方)을 바탕으로 국악과의 접목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한 구체적 치유방법에 대한 모델을 제시해 본 것이다. 이를 위해 고대 중국의 의학서인 『황제내경』에서 오행론과 오장, 오행감정과의 긴밀한 상관관계와, 고대 유가의 악론인 『예기』 「악기」에서 오행감정과 성음(聲音)과의 연관성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토대로 퇴계의 『 활인심방』의 오장을 치료하기 위한 ‘거병연수육자결’과 ‘장부운동법’에서 오장의 치료는 곧 인간 의 오행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하는 맥락과 통하며, 인간의 감정은 성음(聲音)과도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검토하였다. 더불어 ‘거병연수육자결’과 ‘장부운동법’의 호흡법과 몸동작을 국악기의 성음(聲音)과 장단(長短), 국악의 특징을 연관시켜 봄으로써 국악을 이용한 치유방법의 구체적 모 델을 나름 제시해보았다.
조선조 양명학 전래 초기 양명학 수용학자들은 주자학에 대한 교조주의에서 벗어나 당시 이단으로 지탄받는 양명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들은 양명학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한 것이 아니 라 자신이 처한 시대적 위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새롭게 창조해 나갔다. 본 논문에서 는 遲川 崔鳴吉을 중심으로 전래 초기 양명학 수용학자에게서 보여지는 주체성과 창조정신이라는 특성에 대해 고찰하였는 바, 최명길의 사상과 삶에서 보여지는 주체성과 창조정신의 특성은 다음 과 같다. 첫째, 명분론자들에 대한 비판과 주체적 마음을 중시하는 태도이다. 최명길은 당시 관인 유자들이 주자학의 名分論과 義理論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현 실을 질곡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믿고 중시하는 것은 명분이나 자취가 아닌 실 질과 마음으로써, 실질에 힘쓰고 자신의 마음을 믿을 때 眞實된 의견을 낼 수 있고 내면적으로 忠 厚한 참됨이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주체적 본심 양지의 함양이다. 최명길의 학문적 목표는 인간 주체의 本心을 보존하고 확충하 는 데 있다. 본심은 虛明한 속성을 지니고 感通하는 작용을 하는 良知를 의미한다. 끊임없이 변화 하는 환경 속에서 본심양지는 마주한 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감응하면서 사태를 능동적으로 처리 하는 창조적인 마음이다. 최명길은 活潑潑한 양지 실현을 위한 事上磨鍊 공부를 매우 중시한다. 셋째, 權道에 따른 주체적인 主和의 주장이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싸울 경우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和親을 주장 하였는데, 그 근저에는 時中之道로서의 權道가 자리 잡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을 마주하여 고정된 격식에 메이지 않으면서 변화에 맞게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하는 것이 바로 權道이다. 隨時變 易에 근거한 權道, 時中之道, 良知는 인간이 단순히 주어진 체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가거나 고정된 격식과 원칙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현상 안에서 감응을 통해 스스로 끊임없이 판단 준거를 새롭게 창출함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변화된 상황에 가장 타당한 판단을 내 리는 ‘창조성’과 ‘창출성’의 근거가 된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이라는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이러한 隨時變易하는 良知의 주체성과 창조정신을 온전하게 구현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졸수재 조성기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많지 않다. 그는 한양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질병과 부상으로 인한 심신의 제약 조건에서 지냈고, 사회적 교유의 폭도 넓지 못하였으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학문적 기획이 성취되지 못한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도하의 처사로 지내며 17세기 조선 유학자로서는 소옹의 격양집과 황극경세서를 좋아하며 또한 역사읽기를 즐겨하고 여조겸을 존숭하였다. 그는 소옹을 친구로 삼고 증점을 스승으로 삼아 안락의 철학과 천리의 유행을 즐김을 지향하였다. 사색과 관물의 방법으로 역사와 자연을 탐구하고, 천리를 찾아 이를 즐기는 삶을 살고자 했다. 즉 세상에 대한 염려와 낙천의 마음이 병행불패하는 것이 그의 종국적 관심이었다. 그는 태도에 있어서나 취향에 있어서 그리고 학문적 지향과 체득에 있어서 후세의 소옹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하곡 심성론에서의 ‘차이-통합’의 사유를 통한 여성주의주체 개념 모색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11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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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하곡의 심성론에 나타나는 체용론적 설명 방식이 차이-통합의 사유를 산출한다고 보고, 이를 통해 근대적 주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 개념의 모델로 삼는다. 본 논문에서 새로운 주체의 형성은 이제까지의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제적이며 인간중심적인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 선다는 의미에서 여성주의 주체 개념을 통해 모색될 것이다. 본 논문은 하곡의 통합적 사유의 특징을 동일성에 기반한 통합성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차이를 전 제로 한 통합, 즉 ‘차이-통합’으로 규정한다. 논문에서 하곡의 차이-통합의 사유발견은 양지체용설 에 주목함으로써 논의될 것이다. 하곡이 양지를 체용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단과 칠정의 관계, 리를 물리-생리-진리의 중층적 구조로 이해하는 내용을 고찰함으로써, 그 안에서 차이에 기반한 통합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곡의 차이-통합성이 단지 통일성, 단일성을 꾀하는 차원이 아니라 다 양성,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 개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여 성주의주체의 개념을 산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회의 이념이나 제도가 여성억압적이라는 말은 그 이념을 낳은 이론 자체가 여성억압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것인가? 모든 이론에는 변화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인 면이 있어서 이미 토대가 변해버린 사회에서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만 이념화되거나 제도화되는 것인 가? 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하곡 철학의 심성론에 대한 이해의 장을 넓힐 수 있으며, 한국여성주체 형성의 문제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또한 조선 유학과 페미니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제공할 수도 있다.
19세기 조선 유학사 정리 작업에 대한 연구 - 宋秉璿의 성찰적 조선유학사 정리 작업을 중심으로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13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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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기, 대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한 조선말 도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학문적 경향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유학사’에 대한 정리였다. 조선말기 도학계의 분열 양상을 반성하고 당파성을 극복하며,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위기에 빠진 사직과 도학을 부식 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조선도학의 연원을 밝히고 도학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 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도학자가 바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고, 그 대표적 저작이 『패동연 원록(浿東淵源錄)』과 『근사속록(近思續錄)』이다. 송병선은 송시열의 9대손으로 호학의 학맥을 잇는 인물이지만, 그의 학풍은 자파의 학설만을 고수 하는 호락 양파에 비판적인 가학(家學)의 전통과 일치한다. 『패동연원록』은 최초의 통사적 성격 의 ‘조선유학사’로서 정몽주부터 오희상까지 69명의 도학자의 행적을 정리한 책이다. 여기서는 조 선 도학의 본령은 극심한 분열에 빠진 말기의 학문에 있지 않고, 정몽주와 조광조 등이 몸소 실천 한 도학적 의리와 이황과 이이 등이 창명한 정주학에 있다는 것을 여러 편찬방식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근사속록』은 『근사록』의 체계를 빌려서 조선 도학을 대표하는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 다섯 사람의 사상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 송병선은 이를 통하여 학자들이 조선 도학의 요체를 알아 도학과 사직을 회복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러한 염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조선은 무너지고, 송병선 자신은 순국했지만, 조선 도학계에 성찰과 각성을 촉구한 그의 책임의식과 순국은 지식인의 시대적 역할을 돌아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과 베트남의 민족 사상 경향과 사회적 책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16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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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과 베트남의 지식층과 인민 층이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어떻게 전개하고자 했는지, 그 근본 사상과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한국과 베트남의 지식층은 대부분 유학자였다. 한국에서는 위정척사사상과 개화사상으로 나뉘어 당대의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위정척사파는 화서 이항로를 중심으로 의암 유인석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벽이단(闢異端) 사상을 근간으로 삼고 의병운동으로 실천되었다. 의병운동이 후기에 접어들면서 위정척사파의 계급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동학 농민군과 강제 해산된 군인은 물론 다양한 민족 구성원들과 결합되는 양상을 보였다. 개화파 또한 자강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시대적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의 유학자들은 초기에 경신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점차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티엔 단(Thiện Đàn) 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사상과 티엔 단 운동은 이 시기에 한국과 베트남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사상적ㆍ실천적 양상이다. 양국의 인민 층은 민족적 특성이 저변에 담긴 종교적 색채가 강한 운동을 공통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동학사상과 브우 선 끼 흐엉(Bửu Sơn Kỳ Hương) 운동은 당대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인민 층이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기 양국이 처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오늘날에도 간헐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되므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시대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이 시기에 대한 반성은 매우 필요하다.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19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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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최남선이 편찬한『조선상식문답속편(朝鮮常識問答續編)』을 통해 그의 국악론(國樂論 )에 대해 살펴 본 것이다. 최남선이 편찬한 『속편』은 과학ㆍ문학ㆍ시가ㆍ도서ㆍ금석ㆍ음악ㆍ연극ㆍ서학ㆍ회화와 같은 문 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조선의 문화적 위상을 새롭게 정리하기 위한 작업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속편』은 1947년 6월 최초로 간행된 후, 1972년 11월 20일, 1974년 4월 5일에 재간행 되 어 발행되었다. 『속편』에서는 과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분야에 이르기까지의 8항목을 상고시대부터 근대까지 각 각의 역사와 서양문화 유입까지 기록하였다. 그 중 국악과 관련한 내용은 문학, 음악, 연극에 서술 되어 있으며, 이들은 각기 흩어져 구성되어 있다. 이는 최남선이 바라본 전통음악의 관점에 의해서 분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현재 국문학이나 연극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국악의 범주에도 포함된다. 가사가 있는 음악들은 문학에서 소개하고 있으며, 음악에서는 국악의 역사와 기본적인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또 연극에서는 극(劇)적인 요소와 성격을 지닌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속편』에 나타난 그의 국악론은 첫 번째, 각 문화의 자체적인 성격보다는 그 근원에 초점을 두고 서술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음악을 비롯하여 문화 전반을 세계적이며 상호교류적인 관점으 로 보고 있다. 세 번째는 음악에 있어 한쪽으로만 치우친 음악관이 아닌 동등하고 교류하는 시각으 로 보았다. 최남선은 국악연구가 본격화되기 전인 1947년에 이미 『속편』에서 국악에 대해 정리하고, 당시의 국악 현황과 향후 연구되어야 할 과제 등에 대해서도 제시하고 있어 국악에 대한 많은 관심과 그 지식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한국학’ 연구는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나, 古典이나 典籍(漢籍)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경학과 동양철학 분야에서는 수공업 단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풍부한 古 典이나 典籍, 그리고 漢籍에 대한 종합적 목록도 부재하며, 이들 전통 사료들의 異本에 대한 校勘 과 定本化 작업은 그야말로 정당한 잣대의 기준이 없이 연구되어 왔다. 또한 고전과 전적을 바탕으 로 이루어지는 경학과 동양철학 연구는 계량위주의 산출 업적에 급급한 나머지, 1차 원전 자료에 대한 충분한 논거와 논증을 거치지 않고 가설 수준에 머물 결론을 무책임하게 도출하기도 한다. 학 계에서 아무런 공신력을 확보하지도 못한 선행논문의 결론을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논문이 산출됨 으로써, 앞선 논문의 결론이 허물어지면 나머지 연구결과도 연쇄적으로 붕괴될 수 있는 졸속적인 연구 자세를 견지해 왔다는 것이 現‘한국학’ 연구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여건下에서 ‘韓國學’ 수요의 증대를 충족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더 이상의 연구 진전을 기 대하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증대되는 한국학 연구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한국 학 연구의 세밀화와 체계화 및 효율화가 필요하고, 또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위해서 한국학 연구 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은 매우 시급하다. 동양사상과 경학의 학문 분야는 여러 방면에 걸쳐 계량적 측면에서의 눈부신 연구 성과를 창출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연구 자료로서의 原典을 토대로 하여 세심하고 꼼꼼한 기초연구가 이 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定本’ 또는 ‘選本’에 대한 배려 없이, 열악한 자료를 마구 인용하여 후속 연구가 수행되어 온 것 또한 否認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간되었던 유교경전들에 대 하여 모든 목록을 정리하고, 校勘 ‧ 定本化하는 작업이 어떠한 의미와 중요도를 갖는지를 찾아보는 데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울러 한국에서의 유교경전 정본화 작업 과정에서 중국과 비견 하여 우리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標點[符號]’와 ‘懸吐’의 삽입 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필자의 견해를 서술하였다. 문집이나 전집에 대한 정본화는 어떻게 보면 고전연구의 白眉이기도 하며, 동 양학과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가장 端初가 되는 작업이라는 점에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 을 것이다.
본 논문은 체육철학의 관점에서 맹자와 장자의 신체관을 비교하였다. 체육철학에서 주요한 대상으 로 삼고 있는 것은 인간의 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마음과 분리되어 논할 수는 없다. 뇌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마음 또한 몸의 일부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체육철학의 외연은 몸과 마음이 하 나로 어우러진 인간의 영역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한동안 체육철학에 대한 논의는 서양철학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져왔으나, 인간과 인간의 신체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동양철학의 전통 속에서 형성되어 온 만큼 동양철학을 토대로 한 담론의 필요 성이 체육철학계에 요청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취지에서 선진시대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완성 한 맹자와 장자의 신체관을 다루고 있다. 맹자와 장자의 철학에 있어서 신체의 문제는 주요한 담론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맹자』와 『장자』의 텍스트 내에서 우회적으로 언급된 신체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맹자의 신체관과 장자의 신체관을 도출하고, 이 둘 사이의 동이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신체관이 가지 는 체육철학적 의의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순자와 주자 도덕의식 구조의 유사성 - 心論과 工夫論을 중심으로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269-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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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주요 목적은 주자 도덕론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맹자학 계통이 아닌 순자학 계통에 가깝다는 점을 규명하는 것에 있다. 주자는 자신 학술의 도통을 맹자학으로 삼았지만, 성론과 천론을 제외한 기타 제설에서 주자의 영혼을 지배한 것은 맹자보다는 순자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순자와 주자 도덕론 사유체계를 맹자학 계통의 심학과 비교해 보면, 주지적이고 경험적인 사유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심과 리의 관계를 주객대립으로 설정하고 있고, 위학의 방법과 과정, 그리고 예의와 성리에 대한 인식 조건으로서의 허일정과 거경함양에 대한 강조 등, 선험적인 도덕이성의 계발중심이 아닌 후천적인 학습 중심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주자의 도덕론에는 맹자와 순자의 영혼이 모두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주자의 도덕론에 맹자와 순자라는 두 영혼이 모두 내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양자 사이에 우열과 본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열과 본말을 결정할 수 있는 표준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표준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주자 자신의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천론을 포함한 성론이며, 마지막으로 심론을 들 수 있다. 주자 자신의 신념과 천론을 포함한 성론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주자의 도덕론은 맹자학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심론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주자의 도덕론은 분명 순자학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필자는 심론을 표준으로 삼아 주자의 도덕론을 순자학 계통으로 규정하는가? 필자 역시 심론과 공부론이라는 소재로써 순자와 주자 도덕론의 유사성을 파악하는데 일정 부분 제한이 있음을 긍정한다. 이는 분명 전면적인 비교 분석은 아니다. 그러나 심론과 공부론은 순자와 주자 두 사상가의 도덕의식 구조가 동일계통에 속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소재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순수 도덕의 범주만을 논할 때는 리기론과 천인관계보다는 의지와 표준 그리고 도덕가치를 실현하는 방법과 과정이 주요 논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王守仁以儒家思想为主体,吸收了道家、佛教的本体论、人性论、认识论、修养论等思想因素,兼融儒道佛三家思想,构建起“心学”思辨哲学体系。佛教对其影响多于道家,尤以禅宗思想的影响较为显著。通过三家思想的融合,王守仁有力地克服了传统儒家思想重道德论而忽视形上思辨的缺陷,使传统儒家思想更加哲学化,获得了更高层次的哲学说明。本文旨在探析明代心学之集大成者王守仁如何吸收道佛思想,进而建立以儒家思想为主,兼容道佛的心学。从本体论、“良知”说、主体意识、思维方式、理想境界五个方面探析王守仁哲学与道佛之关系。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32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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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고에서는 「신유학의 대학 텍스트와 劉宗周의 대학관」이라는 주제 하에 중국 宋明代에 신유학으 로 등장하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핵심 문제를 四書와 『大學』 해석의 차이에서 인식하고, 명대 말 기 대표적 유학자인 劉宗周(1578-1645)의 대학관(大學觀)의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 다. 즉 송명대의 주요한 사상적 담론에 대해 『大學』 해석을 둘러싼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석의 중심에 놓인 것이 무엇이며 중국 明代 말기 주자학과 양명학의 양 진영을 사상적으로 넘나든 劉宗 周의 『大學』觀과 이념이 어떠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劉宗周의 경우 『大學』이라는 텍 스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의식은 「讀大學」이라는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는 주 희와 왕수인의 견해를 모두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誠意’를 전면에 내세우고 ‘愼獨’이라는 키워드 로 『大學』이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 「讀大 學」은 劉宗周 만년의 ‘誠意’와 ‘愼獨’에 대한 최종적 定說이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맥을 같 이하여 그는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大學』 개정에도 힘을 쏟아 『大學古文参疑』라는 텍스트를 저술했는데, 전체의 구성은 豊坊의 『위석경대학』을 표준으로 삼았고 ‘經―팔조목의 傳―삼강령의 傳’이라는 형식을 취하였다. 또 52세 때의 저작인 『大學古記約義』에서도 ‘愼獨’의 개념은 변함없 이 『大學』의 중심 요지가 되고 있다.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347-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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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寧은 馬一浮의 心論이 陸王心學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화엄종의 ‘一心二門’의 ‘ 一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陸王心學을 예찬하는 馬一浮의 말을 근거로 馬一浮를 陸王心學의 계승자라고 하면서 馬一浮의 心을 유가의 道德心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또 馬一浮의 ‘ 心統性情’설을 논할 때에는 馬一浮의 心을 주자학적 心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許寧은 馬一浮의 ‘心’ 을 불교적이면서 양명학적이고 또 주자학적 心 등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과연 許寧의 이 러한 주장이 馬一浮의 心學에 부합하는가?馬一浮가 心卽理설을 비판한 이유는 ‘情’을 빼놓고 心과 性(理)만 논했기 때문이다. ‘情’을 빼놓고 논하다보니 공리공담에 머무르고, 이로 인해 居敬窮理라 는 실질적인 공부를 소홀히 한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도덕법칙인 性도 중요하지만 七情 또한 없어 서는 안 된다. 그러면 情을 어디서 논해야 하는가? 馬一浮는 성현의 말을 통해 그 해법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心統性情’설이다. 마치 주자가 심통성정설을 통해 心․性․情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했던 것과 같다. 그러나 馬一浮는 주자와 달리 心을 理로 보았다. 그런데 ‘심통성정’설 해석에 있어서는 주자의 견해를 따랐다. 문제는 ‘心’에 대한 馬一浮의 주장이 心卽理일 때와 心統性情일 때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心統性情을 해석할 때에는 心을 주자처럼 氣 로 파악하고 있다. 주자처럼 心을 氣에 속하는 것으로 보면 ‘心統性’ 해석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心卽理 관점에서 ‘심통성정’설을 보면 心이 氣에 속하든지, 혹은 人心道心처럼 理와 氣를 겸해야 한 다. 어떤 경우든지 馬一浮 자신 주장한 心卽理설과 배치된다. 그러나 心卽理설과 상반된다고 해서 許寧처럼 佛家의 一心二門설을 끌어들여 馬一浮를 佛家쪽으로 몰고 가서는 더욱 안 된다. 馬一浮 철학 사상이 유가에 속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六藝 연구라는 그의 학문적 열정만을 놓고 봐도 알 수 있다. 유가철학에서 性理學만큼 心學 또한 매우 중요하다. 性이 理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情이 氣에 속한다는 것 또한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직 心에 대 해서는 理냐 혹은 氣이냐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따라서 心에 대해 보다 세밀한 고찰이 필 요하다. 馬一浮는 바로 이 점을 소홀히 했다. 즉 心卽理설이 거경공부의 핵심인 情을 소홀히 했다 는 점에 불만을 갖고, 情을 心과 연결시켜 해결하려다 보니, 心을 理로 규정하기도 하고 氣로 규정 하기도 하는 실수를 범했다.
근대 동아시아 민족성 담론과 유학 -『무사도』와 『중국인의 정신』을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37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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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민족성 담론은 근대 이후 서세동점의 거센 물결 속에서 형성되었다. 근대 동아시아 지 식인들은 당시 서양에 유통되고 있던 동아시아 인식을 자신들의 민족성 담론에 비판적으로 수용하 면서도 그 중에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 일본의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와 중국의 구훙밍(辜鴻銘, 1857〜1928)은 각기 영어로 『무사도(Bushido: the soul of Japan, an exposition of Japanese thought, 1900)』와 『중국인의 정신(Spirit of the Chinese people, 1915)』을 집필하여 서구사회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과 일본 관련 서적들이 서양에 많이 소개되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급속하게 부상하면서 일본 관련 서적들의 수요와 출판이 한층 증가하였다. 니토베 의 『무사도』는 일본인이 쓴 일본관련 저서로서 크게 부각되며 서양의 일본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구훙밍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와 동양의 도덕문명에 대 한 재인식이란 주제의식으로 서구 독자층을 확보하였다. 니토베와 구훙밍은 직접 영문으로 책을 집필하였기 때문에 자국에서보다는 외국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서구사회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서양인들의 동아시아 인식 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동・서양 문화를 비교하는 글쓰기 방식으로 각기 일본의 무사도와 중국의 유교를 민족정신의 핵심으로 정의 하고 서구와 대비되는 자국의 민족성을 역설하였다. 니토베와 구훙밍 모두 자국의 학문보다는 서양학문에 조예가 있었다. 니토베는 당대 최고의 서양 식 교육과 경험을 소유한 인물이었으며, 구훙밍은 말레이시아 화교출신으로 유년기부터 서양교육 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구훙밍의 경우 심지어 중국 古典에 대한 이해가 일반 중국 지식인들보다 다소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각기 민족성을 설명했다. 그렇 다면, 그들의 민족성 담론에서 유학에 주목했던 이유와 그 핵심주제는 무엇인가? 그들은 왜 이러한 요소들을 강조하였으며, 그들의 주장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본 연구는 이 두 가지 점에 주목하 여 근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민족성 담론과 유학 이해를 검토할 것이다.
도의와 책임의 경영철학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논어주의’에 대하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28집 2013.06 pp.39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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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시부사와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더불어 근대 일본을 만든 거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상가로서,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 지도자로서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면,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을 도입한 경영인으로서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정치사상을 연구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토 히로부미가 ‘실학’의 이념을 내걸고 유교 내지 유학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과 달리,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유교 특히 공자(孔子)의 사상에서 근대 일본의 나아갈 길을 찾으려고 했다. 시부사와의 입장은 전통의 극복이 곧 근대화이며 그 근대화는 유교를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았던 당시의 통념을 뒤집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업적은 무엇보다 근대적 기업 경영을 도입하여 일본의 산업적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유교=공자사상’에 입각하여 경영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黎貴惇,號桂堂,1726年在越南山南出生,卒於1784年。終其一生,黎貴惇始終懷抱著入世的精神,通徹《知》與《行》的密切關係,為國家、為老百姓奮鬥不已。黎貴惇把提升民族精神與振興儒家並駕齊驅,這是為了統一越南,帶來國家和平,讓百姓安樂生活的遠大目標;而黎貴惇在提升越南民族精神與振興儒家兩方面都有巨大的貢獻。黎貴惇也不可避免的必須找出辦法來解決國家的問題和儒家學說的危機。黎貴惇想在民族思想的基礎上建立自己的理論,而民族精神就是要建立一個越南儒家體系。如果為了提升民族意識而使得黎貴惇注重歷史,那麼振興儒家的要求則讓他重視經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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