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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STUDIES IN CONFUCIANISM (The Journal of Confucianism Research Institute)]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CONFUCIANISM RESEATCH INSTITUT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pISSN
    1229-5035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3 ~ 2020
  • 주제분류
    인문학 > 유교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제14집 (11건)
No
1

조선조 육왕학파의 학문과 학맥

김길락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5-4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고에서는 한국육왕학파의 학문과 학맥을 연구 검토하여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종래에 학계에서 언급조차 없었던 한국육왕학파의 학맥관계를 연구 정리해 보았다. 둘째,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사이의 시비 논쟁은 송명대 정주학파와 육왕학파사이에 전개되었던 시비논쟁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학술논변이다. 셋째, 17세기 예송논쟁은 심학의 발전현상이라 할 수 있어, 한국유학도 중국유학의 발전과정과 같이 성리학→ 심학 → 실학의 순서로 변천하였다. 한국육왕학파의 학문과 학맥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다. 元祖(권근) 씨앗(발아기) → 기호유학의 형성기(고봉, 율곡) 뿌리내리다(착근기) → 만회, 탄옹, 명재 줄기(基幹) → 하곡, 강화학파 꽃피다(개화기) → 박은식 열매맺다(결실기)

在本考中, 通過對韓國陸王學派的學問與學脈進行的硏究和檢討, 發現了以下几點新的事實. 第一, 對于學朮界中從未曾言及過的韓國陸王學派的學脈關係所進行的硏究和整理. 第二, 嶺南學派和畿湖學派之間的是非論爭, 是以宋明年代程朱學派和陸王學派之間曾經展開過的是非論爭爲連續線的基礎上所實現的學術論辨. 第三, 17世紀的禮訟論爭, 可稱爲是“心學的發展現象”, 卽韓國儒學也和中國儒學的發展過程一樣, 是以“性理學→心學→實學”這樣的順序進行了變遷.韓國陸王學派的學問與學脈間的關係, 可以按如下進行要約和整理.元祖(權近) 發芽期 → 畿湖儒學的形成期(高峯, 栗谷) 着根期 → 晩悔, 炭翁, 明齋 基幹 → 霞谷, 江華學派 開花期 → 朴殷植 結實期

2

하곡 정제두의 주체성과 창조정신

김교빈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45-6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모든 학문의 출발은 주체성이며 창조정신이다. 주체성에 입각한 창조정신이 발휘될 때 비로소 ‘하곡의 철학’이라는 표현이 가능해 진다. 양명학은 본래 자신의 마음을 중시하는 주체성이 강한 학문이었다. 특히 한국 양명학은 霞谷 鄭齊斗(1649-1736)에 이르러 주체성과 창조정신이 더 빛을 발하게 된다. 정제두의 주체적인 학문 태도는 양명학을 택한 과정과 주변 인물들과의 치열한 논쟁 과정에 잘 드러나 있다. 정제두는 친구와 인척으로부터 버림받으면서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킨 주체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는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와 경색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양명학에 침잠함으로써 한국 양 명학의 기틀을 다졌다. 주희의 격물치지 이론에 의문을 품고 양명학을 수용하였으며 양명학에도 욕심을 쫒을 폐단이 있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물리, 생리, 진리의 3단계 구조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가장 높은 단계인 眞理가 내 속에 들어 있는 양지의 본체라고 확신함으로써 인간 주체 확립의 근거를 긍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현실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러한 정제두의 사상은 신분의 자유와 개성의 존중을 기반으로 한 평등한 시민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참다운 마음에 기반을 둔강한 실천으로 나아갔다. 특히 이론과 실천의 괴리 속에서 헛되이 주자학의 명분론만을 앞세우는 대다수 지식인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앎과 행함이 일치된 학문을 강조 함으로써 학문의 진실성을 새롭게 주목하였다. 이 같은 정제두의 철학은 강화학의 주체의식으로 이어져서 민족 주체에 입각하여 앎과 행함을 일치시키는 실천으로 드러났다.

All learning start from Identity and Creative Spirit. When A creative Spirit which based on Identity exhibit, we can call one's philosophy. Originally the Yang-ming's doctrine valued own mind. Especially Korean Yang-ming's doctrine more advanced Identity and Creative Spirit by Ha-gok Chong Chedu(1649-1736). The Chong Chedu's identical attitude for learning well be expressed in process to choice Yang-ming's doctrine and debate with near person. Chong Chedu was a man who had a sense of Identity. He preserved his own thought, despite of his near friend and relative's against. He made a base of Korean Yang-ming's doctrine in circumstance that was absolutely for neo-confucianism and tightness politics. He had a doubt about Chu Hsi's theory of kyok-mul chi-chi(格物致知 investigation of things and extention of knowledge) and accepted Yang-ming's doctrine. And then he read demerit of Yang-ming's doctrine which has a trend to follow mans desire. So he made a three degree structure which organizeed mul-li(物理), saeng-li(生理), chin-li(眞理). He believed that chin-li(眞理) is a essence of yang-chih(良知) in my mind and tried to reform those actuality. In the point of view Chong Chedu' thought was able to advance impartial citizenship which based on freedom of social status and regard for personality. And he went forward powerful practice which based on his truthful mind. Especially he criticized many scholars who gave priority to a just and great cause of neoconfucianism in separation of theory and practice Chong Chedu' philosophy was continued Identity and Creative Spirit of gangwha academy and expressed correspondence between theory and practice which was based on national Identity.

3

강화 하곡학파의 ‘實學’ 사상

박연수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69-10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핵심사상을 전승(傳承)한 강화(江華) 하곡학파(霞谷學派)가 추구한 실학(實學)이 무엇인지 고찰하였다. 강화 하곡학파들은 부귀공명(富貴功名)과 같은 외적인 것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그것을 향해 치닫는 것, 의리(義理)를 사물에서 구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명예를 구하는 것, 진실을 덮고 거짓으로 속이며, 공리(功利)의 사욕을 인의(仁義)의 명분으로 꾸미는 것, 성현의 말을 빌려 군자의 허물을 꾸미는 것 등을 배척하였다. 따라서 강화 하곡학파들은 물질, 권세, 명예 등을 존귀한 가치로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이나 의무를 외적 사물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향했던 학문과 삶의 목표 및 방법이란 오로지 내면에 힘쓰고 자기에게 진실함, 외적 유혹을 물리치고 실리(實理)를 보존함, 외적 화려함을 물리치고 내실(內實)을 추구함,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여 만 가지 이치를 정밀하게 분별하고, 마음을 진실하게 하여 만사에 대응함, 충신(忠信)을 주로 하고 속이지 않음, 참된 지(知)로써 신실한 행위를 함, 진실한 마음으로 실효의 정치를 행함 등이다. 강화 하곡학파들은 학문과 삶의 목표를 외부로부터 내부로 돌렸다. 외면으로부터 내심으로, 다른 사물로부터 자신에로 방향을 전환하여, 내심을 오로지 하고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고, 마음을 진실하게 하며, 참마음의 이치를 알고 이를 신실하게 실천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강화 하곡학파의 학문과 삶은 부귀공명과 같은 외적 가치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며, 부단히 자아를 반성하고, 스스로 시비선악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책임을 지는 자아주체를 확립하고, 나아가 각각 주체의 다양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강화 하곡학파들에게 있어서 학문과 삶이란 사적(私的)으로는 허학(虛學)과 가행(假行)으로 인해 상실한 진실한 자아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공적(公的)으로는 쇠퇴한 국력을 회복하고 잊혀 진 민족주체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체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강화 하곡학파들의 노력은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역사, 언어, 사회, 정치 등에 대한 지대한 관심, 즉 국학(國學) 연구로 나타났으며, 또한 실사(實事), 실효(實效)의 실용적인 학문 연구로 실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권이 상실된 후에는 교육구국운동으로 또는 독립운동으로 표출되었다.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elucidate the Silhak(實學) of Kanghwa(江華) Hagok(霞谷)'s School. Kanghwa Hagok's School did not evaluate wealth, rank and fame highly, and did not derive the moral principles of behaviors from external things or public opinions. They firstly disliked deceiving the truth and adorning the fact. Their goal of learning and living was to recover original selves and to be sincere selfhood. They turned their eyes to their inner minds from external objects. They wholly reflected on themselves and endeavored to be real men, to know real principles, to practice the truth faithfully. They tried to escape from the slavery of external values which are wealth, rank and fame. They tried to recover and realize truthful egos who were covered by void learning and deceitful deeds. They devoted themselves to establishment of self-identity and realization of different talents. Futhermore their learning and living aimed at recovering the declining national powers and inspiring the lost national consciousness. They intented to realize the Korean national identity by the research on Korean studies and on practical learning. After the lost of national rights, they continued to cherish their obligation of loyalty to the nation and tried to protect or recover national identity by the educational revolution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4

박은식의 ‘자가정신(自家情神)’을 통해 본 근대 한국양명학의 특징

박정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109-141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은 박은식의 自家精神과 주체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 양명학의 사상적 특징을 모색하였다. 흔히 근대 이후 서구문명이 보편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는 서구와 동일하게 될 수 없는 미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시기 한국적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서구문명의 근대성과 야만성을 수용비판하면서 한국근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박은식의 사상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서구문명만을 근대잣대로 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박은식은 자가정신을 준거로 하여 주자학의 경직성과 중화주의를 비판하고, 다시 양명학을 수용하여 한국근대주체로서 양지를 구현한 ‘眞我’를 제시함으로써 한국근대가 안고 있던 重層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진아가 근대국가의 주체가 될 때 근대국가는 침략과 야만의 경계가 아니라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바로 세계평화와 인도를 실현하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This paper studies the Korean Modern Idea with self identifications and self mind(自家精神) of Park Eun Sik(朴殷植). Park Eun Sik criticised Sinocentrism(中華主義) and the ligidity of the Jujahak(朱子學). And then he tried to solve multiplicative problems of the Modern Korea by presentation of the true self(眞我) to realize of the Korean Modern self to accept the scholar of the Wang Yangming school. He thought that when true self(眞我) is to be with the Modern Nation itself, Modern Nation itself is not the border of the savagery buy the center to world peaceful contents.

5

일제강점기 정인보 실심론의 주체성과 창조적 정신

이상호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143-17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에 대한 대응논리로 제기되었던 정인보의 양명학을 분석해 봄으로써, 그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주체성과 창조적 정신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논자는 주체성과 창조적 정신이라는 측면을 역사적 현실에 대한 대응논리에서 찾으려고 한다. 특히 정인보 철학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측면이 더더욱 짙다. 정인보의 양명학은 ‘일제강점’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이론적 모색의 과정에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이론적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정인보의 양지 해석은 양명좌파 철학의 양지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이다.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한국 양명학이 양명우파 철학의 특징을 지녔음에도 생각하면, 이러한 점은 매우 특징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양명좌파의 양지 해석에서는 양지가 이미 개인의 실질적 정감으로 드러나 활동하므로,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만 하면된다. 양명좌파 철학이 양명우파 철학에 비해 간이하면서도 행동력을 갖는 이유이다. 정인보가 양명좌파 철학적 입장으로 양지를 해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정인보의 이와 같은 양지는 개인과 민족의 주체성인 ‘얼’ 개념을 형성하고, 이것은 역사에 적용되어 ‘얼 사관’을 형성한다. 이 점은 기존의 양명학에서 드러나지 않는 독특한 부분으로, 양명학이 어떻게 역사철학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스스로 소멸시키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정신’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양지를 개인 주체성으로서의 ‘얼’개념으로 치환시킨다. 그리고 이것을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으로 확대해석하면서, ‘얼 사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인보는 비록 형식적인 나라는 빼앗겼다고 하더라도 민족의 얼만 가지고 있으면 나라는 언제라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양명학의 양지가 역사철학적 개념으로 적용된 것이다. 셋째, 정인보의 ‘감통’론은 개인적 성인됨의 철학이었던 양명학을 민족의 복리를 도모하게 하는 실질적 행동철학으로 만들어 냈다. 이것은 양명학에서 중시했던 ‘친민’을 좀더 강하게 해석한 것으로, 정인보는 양명학의 궁극적 지향점이 ‘친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개인의 도덕정감인 양지의 ‘감통’을 말한다. ‘민족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감통은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는 것이 곧 나의 아픔을 해결하는 것’이 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궁극적으로 학문의 목표를 ‘민중의 복리를 도모하는 것’에 두게 했으며, 이것은 당시 민족이 겪는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따라서 정인보의 철학은 당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활동가를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특징은 오랜 수양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행동을 유발시켜 내고, 그것을 개인과 민족 전체로 확대시켜 가려는 정인보의 기획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 강점에 대한 대응 논리로 정인보가 양명학을 선택했던 이유를 바로 여기에 있으며, 정인보의 양명학에 대한 해석 역시 이러한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정인보 철학이 갖는 주체성과 창조적 특징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original idea and creative thought in Jeong In-bo. In order to do this, we shall analyze his view concerning Yangming Studies raised as a counter argument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Rule over Korea. For a counter argument of a historical actuality, I seek for aspect of subjecthood and creative spirit. Specially, for Understanding of Jeong In-bo Yangming, such aspect is very intense. In a background of the times, 'the age of Japanese Rule on Korea,' Since Jeong In-bo's Yangming is selected groping to overcome it for process of theoretical. This mark show theorical feature that, First, Jeong In-bo's explanation of Yangzi(良知) is to equal explanation of Yangzi of the Yangming left-wing. In spite of Korea Yangming that jeong Je-Du is to lead has feature of Yangming right-wing, this point can be very special face. for Explanation of Yangzi of Yangming left-wing, since Yangzi become known as substantial emotion and then acts, we realize this truth and should behave according this. This is reason that philosophy of Yangming left-wing has simplicity and power of execution as compared with philosophy of Yangming right-wing. I think that it is this reason that Jeong In-bo interprets "Yangzi" as philosophical position of Yangming left-wing. Second, Such Jeong In-bo's Yangzi takes shape "the spirit" that subjecthood of an individual and a race is, and then This is applied to history and takes shape "A historical view of spirit". This point is the most important point show how Yangming is applied to philosophy of history, as this point is a peculiar part in which dose not reveal in the existing Yangming. In state national rights fall into Japen's hands in process creat 'spirit' that does not perish in so far as one does not perish oneself, he substitute Yangzi as "spirit" of individual subjecthood. and also he stretches this as subjecthood of a race and as state, and then take a shape 'A historical view of spirit'. In this process, Jeong In-bo presents position that state is always taken back if only spirit of a race is assorted, even though ostensible state is plundered. This is that that Yangzi of Yangming is applied to notion of philosophy of history. The third, Jeong In-bo's 'Gahmtong(感通)' theory make, Yangming that philosophy of individual saint is to be as substantial acting philosophy scheme out welfare of a race. This is, as an interpreted further powerfully 'Loving the people' that has esteemed in Yangming, Jeong In-bo thought of a final goal is existing to 'Loving the people'. So as to be able to do it, he mentions 'Gahmtong' of Yangzi, moral emotion of an individual. 'Pain of a race is to be my pain', Ghamtong is 'to solve pain of a race is to solve my pain'. Ultimately, These his philosophy is to put academic purposes to 'scheming welfare of the people'. This calls for action that can solve pain of the people at that time. accordingly, Jeong In-bo's study is to make an activist to tide over a difficult situation. These theoretical feature give occasion to action in condition that don't undergo moral culture for long time, in Jeong In-bo's a plan that extend to an individual and the whole-a race, is to issue. The reason that Jeong In-bo selected Yangming as a counter argument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Rule over Korea. and in explanation of Jeong In-bo's Yangming, these view point is accomplished. Feature of the original idea and creative thought in Jeong In-bo must be found at this score directly.

6

秋坡 宋麒壽의 生涯와 人品

황의동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177-20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추파는 16세기 사화시대의 행정가요 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도 당시 유교사회의 일원으로 유학적 교양을 받고 수학한 독실한 학자였지만, 학문적 업적과 특성은 극히 미미하다. 그의 문집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적인 학설이나 토론은 볼 수 없다. 그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관직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때는 道學시대로서 성리의 이론적 천착보다는 小學的 실천이 강조되는 시대적 환경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을사사화 때의 처신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파의 경우 현실참여의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金安老의 미움을 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고, 尹元衡, 李樑, 李芑 등 당시 權奸, 戚臣들과 부단히 항거한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추파는 그 스스로 불의의 시대에 있어 벼슬살이가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양하고 또 사양하였으며, 아슬아슬한 칼날 앞에서도 명분과 의리에 어긋나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더욱이 을사사화 때 衛社功勳을 받은 사실은 그에게 큰 부담이 되고 멍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본의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요, 임금과 당시 추파의 錄勳을 시비했던 權奸들의 말처럼 실제로 추파는 아무런 공이 없었지만, 당시 도승지로서 전례에 따라 공훈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추파에게 이 공훈은 상이 아니라 벌이요 짐이요 부담이었다. 그러기에 이를 벗기 위한 그의 노력은 상소와 啓를 통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또한 추파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종형 宋麟壽의 伸寃을 간절히 주청하였고,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희생된 靜庵 趙光祖의 신원을 주청하는가 하면,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림들에 대한 신원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난세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李滉, 李浚慶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석방된 白仁傑, 金鸞祥, 盧守愼, 柳希春 등의 등용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파의 노력은 당시 형극의 가시밭길에서도 바른 길을 가야하고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학의 이상은 경제와 윤리, 實利와 義理의 겸비에 있지만, 만약 양자 택일을 해야 할 경우라면 부득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義를 취하는 ‘舍生取義’, ‘殺身成仁’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이익, 경세를 통한 현실참여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학의 관점에서 16세기의 대표적인 관료 유학자 秋坡 宋麒壽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더욱이 불의의 권력이 횡행하는 난세에서 명분과 실리를 조화하며 그 균형추를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그를 새롭게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秋坡宋麒壽(1507-1581)是朝鮮16世紀著名的儒家學者和政治家, 不過.因爲在乙巳士禍中的所作所爲有些失當, 常爲時人所詬病. 但是, 他後來積極向朝廷提出建議要爲從兄宋麟壽及趙光祖伸寃. 同時也奏請朝廷要爲那些在乙巳士禍中犧牲的儒伸寃.緃觀他的一生, 他在理想和社會現實及道德義理和實際利益的矛盾沖突 中不偏向於某一方面, 而是忠實地遵循了儒家中庸的原則.

7

秋坡 宋麒壽의 經世思想

김경수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201-23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고에서 살핀 추파 송기수(1507 - 1581)는 중종에서 선조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왕을 모시면서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현실정국의 문제점을 예리한 안목으로 비판하는 등 뚜렷한 경세관을 보였다. 명종 즉위 후에 발생한 대윤과 소윤의 갈등으로 야기된 을사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는 당대 사림파의 모진 비판과 함께 후대의 신랄한 비평을 받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훈구척신세력과 함께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주체세력이기보다는 비주류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척신계의 비리와 부정을 비판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추파는 사림 중심의 정국 운영을 지향하는 경세관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비 사림계 훈구척신 세력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거나, 차선책으로 어느 정도의 타협과 조정을 통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상과 경세관은 분명히 훈구세력에 경도되었다기는 보다는 사림파의 사상과 정치관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들과 외손자(신흠)에게 계승되어 선조 이후의 정국 운영과 현실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Chupa Songkisoo(1507 - 1581) had consecutively filled various government posts from the period of Jungjong to Sunjo, when he served 4 kings. While he was on the posts he showed his clear administrational thoughts through which he criticized political problems of the time. As a result of Eulsa Sahwa which was caused by conflicts between Daeyun and Soyun right after Myungjong's inauguration and Yangjae station's poster plot, he was criticized by the Sarim party and after generations. But he firmly maintained on the side of opposition party rather than ruling Hungu party. In the process of their conflicts, he consistently criticized the corruption and impurity of dominating group. In this regard, Chupa maintained his administrational thoughts of establishing the government of which the Sarim party stood high. Moreover, it seems that Chupa tried to progressively disband the Hungu party. He also seems to have tried to achieve the administration of the Sarim party through some compromises and mediations. This kind of administrational thoughts is rather similar to the thoughts of the Sarim party than those of the Hungu party. These thoughts came into his son and grandson(Sinheum) and seem to have affected very much the government after Sunjo.

8

秋坡 宋麒壽의 사후 평가와 추숭활동

이해준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235-257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추파 송기수(1507-1581)은 호서지역의 사족세력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보다 약 100여 년 앞서 살았던 선배격의 인물이다. 추파 송기수는 호서사림의 중심인물로 은진송씨 집안 및 충청지역 인물의 중앙정계 진출에 발판을 마련하였고, 평생 동안 사림으로서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경세치용의 학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종형인 규암 송인수의 사화 문제, 그리고 아들 송응개의 율곡 이이 탄핵문제로 당대의 탁월한 행적과 위상에 비한다면 사후 평가나 추숭활동이 매우 소홀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집 또한 사후 170여 년 뒤에 아주 소략하게 편찬되어 현실론이나 경세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부각되지 못했다. 추파 송기수의 사후 평가와 관련되는 추숭활동은 행장의 편찬, 신도비의 건립, 문집의 간행 등으로 이어졌지만, 매우 미미하였고, 오히려 향후 자료의 수집, 정리노력이 필요함을 지적하게 된다. 실제로 추파와 동시기의 인물, 같은 성향의 교류했던 인물 문집이나 자료 속에서 잃어버린 추파의 행적과 사상을 유추하여야 할 것이고, 후손들이 중심되어 마련된 족계나 문중활동 자료들이 매우 다양하고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으로 이들 자료에 대한 관심과 수집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Chupa Song Gisu (1507-1581) was one hundred years ahead of the time when regional family-power had influence over Hoseo area. As a leading figure in local politics of Hoseo, he gained a foothold in the central political arena for Enjin Song’s family and people from Chungchung. He gave his whole life to establishment of royal government and putting the theory of Gyeongsechiyong into practice. Compared to his influence of his extraordinary achievements of his lifetime, his older cousin Gyuam Song Insu’s massacre of scholars and his son Song Eung-gae’s impeachment of Yulgok Lee Yi, less attention has been given to after-death estimation and admiration for Chupa. As his collection of works was compiled simply after his death 170 years later, his aspects of life as a realist and statesman did not come to light. Scholarly activities related to his posthumous estimation for cherishing the memory of Chupa are linked to compiling the records of his doings during his life, setting up a monument to the memory, and publishing a collection of his works. However, these activities seem insignificant, so it is pointed out that every effort to collect and arrange materials should be made. Indeed, forgotten records of his life and his theory should be formalized thorough analogical inference from collections of works and data of his contemporaries or his friends with similar tastes. Also, the contribution mainly from his descendents to arranging data for his activities of kinfolks can be found. For further research on Chupa Song Gisu, there should be more concerns about related materials and collection of data demanding considerable eff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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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坡 宋麒壽의 士林과의 交遊

이근호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259-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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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송기수의 사환이나 정치 활동, 혹은 학문 활동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인적 배경에 대해서 추적한 것이다. 조선 건국 초 정치적 혼란에 당하여 隱遁으로 그 상황에 대처하던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송기수의 고조인 송계사(宋繼祀)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 본격적인 사환활동을 하였다. 이후 송순년(宋順年), 송세충(宋世忠)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으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던 은진송씨는 송기수가 좌참찬을 역임하며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송기수를 비롯한 은진송씨의 정치 활동은 각자의 뛰어난 역량에 의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를 둘러싼 인척인, 연안이씨(延安李氏) 이석형(李石亨), 전주이씨(全州李氏)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정(金淨), 나주정씨(羅州 丁氏) 정옥형(丁玉亨) 등의 존재도 이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배경이 되었다. 송기수가 교류하던 인물은 연상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비롯해 부친의 친구인 한효원(韓孝元)과 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연하인 김성일(金誠一), 오건(吳健)과 외손 신흠(申欽) 등에게까지 이어졌다. 그가 교류했던 인물은 조정의 고관은 물론이요, ‘처사형사림(處士形士林)’이라고 하는 성효원(成孝元)․성제원(成悌元)을 비롯해 조욱(趙昱) 등 까지 그 대상은 다양하였다. 이들은 서울, 경기 이외에도 경상․전라․충청․강원도까지 지역을 초월하였으며, 학문적으로도 특정 문파에 고착화되지 않고 여러 계통의 학인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포용성도 보여주었다. 이런 교류 인맥을 통해 송기수는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학문적인 교류나 정치론, 혹은 정치상황 등에 대해 토론하며 때로는 협력자로, 때로 는 지원자로 활동하였다.

부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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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坡 宋麒壽 선생의 유물․유적

유용환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28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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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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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소 휘보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4집 2006.08 pp.2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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