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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STUDIES IN CONFUCIANISM (The Journal of Confucianism Research Institute)]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CONFUCIANISM RESEATCH INSTITUT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pISSN
    1229-5035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3 ~ 2020
  • 주제분류
    인문학 > 유교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제18집 (12건)
No
1

이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노서 윤선거의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 연원, 학문 경향, 학문과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is aimed to comprehensively analyze the origin, tendency, features, influence to the next generation and etc of Noh-Seo Yoon Seon Geo’s learning and idea through his life, who was a scholar late in Joseon era. He was a grandson of U-Gye Seong Hon in his maternal root, so that he succeeded the learning tradition of Seong Hon’s family and Yul-Gok Lee Yee and then collected such learning tradition into himself from them. He tended to value practice more than theory. He showed the attitude that there had not been a theoretical investigation in Sung Confucianism and only action had remained since Jeong Ju (程朱: a scholar in Song Dynasty, China). On the other hand, he succeeded the governing style learning character focused on ‘ByeonTong (變通: working with adaptability)’ from Yul Gok’s school. It is one of the features of his learning that he searched out the principle of change being infatuated with “the Book of Change”. He put the words ‘SilSim (實心: sincerity)’ in his mind as the base of his idea to criticize the learning tendency and scholars’ styles of his times and show his sharp criticism to the Confucian scholars who were full of falsehood and affectation. His idea of ‘SilSim’ linked to the scholars rooted to Yangming Confucianism and the scholars who advocated independent translation of Confucian classics as well both personally and academically. He should be given his own position as it was in the history of idea late in Joseon era.

2

魯西 尹宣擧의 務實思想 노서 윤선거의 무실사상

황의동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35-62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魯西 尹宣擧(1610~1669)는 ‘湖西 5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17세기의 대표적인 性理學者요 禮學者다. 그는 牛溪 成渾의 외손자이며 明齋 尹拯의 부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연원은 家學으로 멀리 趙光祖, 成守琛의 道學과 연계되고 외조부 成渾, 부친 尹煌으로부터 배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金長生, 金集의 문인이며 宋時烈, 宋浚吉, 李惟泰 등 율곡학파와 친밀한 교유를 하였고, 남인계열의 權諰, 尹鑴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尹宣擧는 성리학과 예학, 역학에 밝았는데, 성리의 이론적 탐구보다는 도학적 실천을 중시하였다. 그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편인데, 본고는 그의 務實사상을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務實이란 ‘實의 추구’를 의미하는데, 麗末鮮初 先儒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栗谷과 牛溪에 의해 深化되었다. 尹宣擧의 務實학풍은 외조부 成渾의 家學的 영향과 함께 栗谷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고 할 수 있다. 尹宣擧는 17세기 조선조의 無實현상을 비판하고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모두 實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먼저 實心의 확립을 주장한다. 이는 인간 주체의 성실성 확보를 말하는데 實心은 만사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또 尹宣擧는 實德의 함양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진실한 인격의 함양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그는 謙讓, 謹嚴, 操存, 省察, 收斂, 謹飭 등 敬의 생활화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自守, 守約의 小學的 律身을 강조하였고, 실천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禮學이 중시되었다. 尹宣擧의 務實사상은 實心, 實德을 통해 實功의 추구로 나타났다. 實功이란 진실한 노력이라는 실천적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진실한 功效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實心이 實德으로, 그리고 實功을 통해 實效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務實학풍은 尹宣擧의 특징적 학풍인 동시에 成渾, 趙憲, 尹煌, 安邦俊, 尹拯, 梁得中 등 牛溪學派의 학풍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務實학풍은 性理學, 禮學, 實學, 陽明學과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보다 정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Yunseongeo (1610~1669) is a representative Confucius scholar of Joseon Dynasty in 17th century. He is a grandson of Ugye, Seonghon and father of Myungje, Yunjeung as a central figure of Ugye school. His intellectual origin is traced back to Dohak school of Joseon Dynasty in 15th century and he learns from Kim Jangsaeng and Kim Jip who are members of Yulgok school. He is a speciality in Sung Confucianism and Yehak philosophy. Specifically, idea of Musil is his representativ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 Musil means “striving for the truth,” which focuses on veracity, practice and practicality. Later, his Musil idea influences school of Wang Yangming and practical philosophy.

3

魯西 尹宣擧의 禮學思想, 노서 윤선거의 예학사상

도민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63-86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논문은 노서 윤선거(魯西 尹宣擧: 1610~1669)의 예학사상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윤선거의 학문정신은 ‘무실(務實)’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학문을 중시하여, ‘하학(下學)’을 통한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예학사상은 주로 ‘가례(家禮)’의 행례(行禮)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윤선거는 ‘가례’의 시행과정에서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하되, 고금(古今)의 예설의 차이를 참작하여 절충하고자 하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윤선거는 예론의 전개과정에서 예문에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의례 절차 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인정(人情)을 따라서 행해도 좋을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인정에 치우치거나 당시의 풍속(風俗)에만 따르는 것을 경계하고 정해진 예법의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하여, 고례(古禮)나 󰡔가례(家禮)󰡕를 기준으로 예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윤선거는 당시 시속(時俗)의 풍습을 한편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예법의 기본적인 원칙은 준수해야 하며, 더 나아가 잘못된 시속의 예를 고례(古禮)를 기준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윤선거는 기본적으로 󰡔가례󰡕를 중시하면서, 󰡔가례󰡕에 규정되지 않은 변례(變禮)에 대해서는 고례(古禮)를 참작하고, 시속(時俗)이나 정리(情理)에 따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예학사상은 고례(古禮)와 󰡔가례(家禮)󰡕, 그리고 후대의 예설(禮說)을 고루 참작하고 절충하여 시행함으로써, 의례(儀禮)의 실천과정에서 합리성을 추구하였다고 하겠다.

本論文是对于魯西尹宣擧(1610~1669)的禮學思想所进行的考察. 尹宣擧的學問精神是重视實踐的‘務實’學問, 并从通过‘下學’来强调的實踐躬行处所出發. 他的禮學思想主要是以‘家禮’的行禮为中心来进行展開, 尹宣擧在‘家禮’的施行過程中将󰡔朱子家禮󰡕作为基準, 具有了将古今禮說的差異进行參酌并折衷的觀點. 尹宣擧在禮論的展開過程中,对于禮文中没有明確規定的儀禮節次等内容, 基本的采取了依照人情去行也无妨的立場.但对于过度的顺从人情或仅仅依凭當時的風俗而违背警戒定律的禮法原則现象则给予了反对,他采取了必须要遵守以古禮或󰡔家禮󰡕为基準的禮法的这一立场.卽尹宣擧对當時時俗的風習一反面予以認定的同时,一方面还主张对禮法的基本原則进行遵守,进一步说他采取的是要将不正确的時俗之禮转变成为以古禮为基準的立场. 尹宣擧从基本上来说是重视󰡔家禮󰡕,对于󰡔家禮󰡕中所未規定變禮的对古禮的參酌, 以及根据時俗或情理行事这方面也给予了某种程度的認定. 象他这样的禮學思想,即对于古禮和󰡔家禮󰡕,还有将後代禮說作为參酌和折衷的施行方案, 可以说是在儀禮的實踐過程中一种对合理性的追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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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西 尹宣擧의 『後天圖說』에 대한 分析 노서 윤선거의 『후천도설』에 대한 분석

최영진, 최정준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87-10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노서는 象數易學의 핵심적 주제인 伏犧 先天易과 文王 後天易의 관계, 「序卦傳」과 「雜卦傳」의 배열 원리, 卦變 등에 대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가지고 해명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三索圖> <八宮圖>, 그리고 주자 <卦變圖>에 대한 해석으로 나타난다. 노서는 <삼색도>를 對待의 원리로, <八宮圖>는 流行의 원리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주자의 <괘변도>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 원리를 통합한 도설로 보았다. ‘대대’와 ‘유행’은 역학의 중요한 이론이며 주역의 철학사상을 규명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노서는 이것을 圖說에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序卦傳」의 괘 배열원리는 對待이고 「雜卦傳」의 괘 배열원리는 流行이며,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함하고 있다고 본 것은 독특한 견해라고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序卦傳」은 유행의 측면에서 괘를 배열하고 있으며, 「雜卦傳」은 대대의 측면에서 괘를 배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가 「잡괘전」에 대한 주석 마지막 구절에서 “大過로부터 이하는 괘가 반대되지 않으니 혹 착간인 듯 의심스럽다. 하지만 운자로 맞추어 보면 오류가 아닌 듯하니 무슨 뜻인지 상세하지 않다(自大過以下, 卦不反對, 或疑其錯簡. 今以韻協之, 又似非誤, 未詳何義)”라고 말하였듯이 괘서에 대해서는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市南의 지적대로 「序卦傳」의 차례가 ‘三索’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三索’의 의미를 확충해서 <三索圖>를 짓고 그것을 바탕으로 괘 배열의 원리를 穿鑿한 시도는 한국역학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魯西通過他自己的獨創性見解來闡明了象數易學的核心主題,即伏犧先天易與文王後天易的關系、≪序卦傳≫與≪雜卦傳≫的排列原理、卦變等。我們在他對≪三索圖≫、≪八宮圖≫及朱熹的≪卦變圖≫的解釋,可以看到其具體的內容。魯西把≪三索圖≫規定爲“對待”的原理,把≪八宮圖≫規定爲“流行”的原理,並且對朱熹的≪卦變圖≫認爲這兩種原理的合並的圖說。 “對待”與“流行”既是易學的重要理論,也可以說闡明≪周易≫哲學思想的關鍵詞。所以,我們可以說魯西把它適用於圖說。尤其是≪序卦傳≫的卦的排列原理是“對待”,≪雜卦傳≫的卦的排列原理是“流行”,筆者認爲這兩個東西的互補的看法是非常獨特的見解。一般而言,由於≪序卦傳≫站在流行方面而排列卦,≪雜卦傳≫站在對待的方面而排列卦的。朱熹在他注爲≪雜卦傳≫的最後句子說,“自大過以下,卦不反對,或疑其錯簡。今以韻協之,又似非誤,未詳何義。”他對卦序還沒完全闡明。我們應該重新探討市南所懷疑過的據“三索”而安排≪序卦傳≫的次序。但在韓國易學史上來講,他擴大“三索”的意義,而做≪三索圖≫,並基於它試圖說明卦的排列原理,這是非常有意義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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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 유교적 의미 기호 - 유교 의례의 해석학 시론

이용주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105-13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은 종교의례를 종교의 궁극적 의미 내지 세계관을 드러내는 기호, 나아가 종교적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하는 몸짓이라는 규정하고, 그런 관점에서 여러 종교 의례들과의 비교를 통해 유교적 의례(예)의 의미를 해석하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기호로서 의례는 인간의 몸짓이라는 기본 요소와 그 몸짓의 이념적 근거, 그리고 공동체라는 의미 형성의 장을 필요로 한다는 것, 또,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 있는 몸의 한계로 말미암아 몸짓 기호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수용함과 동시에, 그 시간과 공간을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구원론적 기능을 가진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보았다. 유교의 예禮는 일반적인 종교 의례와 다르지 않다. 그것을 일반적 종교와 분리시키거나, 아니면 자폐적인 유교 경학經學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태도로는 유교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유교의 예가 전형적인 종교 의례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당연히 종교 연구, 의례 연구의 영역 안에서 탐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편과 특수의 긴장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는 같으면서 다르다.) 우리의 유교 연구, 동양 연구는 동양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파로키얼리즘적(지역주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유교의 예를 일반적인 종교의례와 분리시켜 생각하는 선입견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결과, 예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부수물이라는 선입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딜렘마에 빠지고 만다. 이런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는 한, 유교의 총체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는 영원히 불가능하며, 그 총체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전통의 계승, 유교의 현대화 운운하는 주장들은 그야말로 공염불로 그치고 말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유교의 예禮를 일반적인 종교의례의 구조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종교가 열망하는 세계의변혁은 구체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의 성화聖化를 통해 실현된다. 구체적인 몸이 살아지는 시간과 공간을 도외시한 변혁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모든 종교는 몸짓의 개혁을 통해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소망을 지니고 있으며, 그 소망은 몸짓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유교의 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예는 질서화의 요청이자 동시에 변혁의 요청인 것이다. 의례는 한편으로는 기존에 규정된 형식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몸짓이지만, 시간과 공간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현실을 변혁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의례에 동반되는 의례적 도구, 소품들은 주체의 의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유교 의례를 포함하는 모든 종교 의례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인간의 필연적 존재론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 탈주적 열망을 표현하는 변혁의 기호이다. 문화적으로 구조화되고 의미 부여된 기호인 종교의례는 끊임없이 자기 개혁의 시도를 거치면서, 사회를 개혁하고 해당 종교의 궁극적 이념이 실행되는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변혁적 열망을 드러낸다. 종교 연구자는 방관적 기록자가 아니라, 종교의 사회 변혁적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종교 연구자는 해석자의 입장에서, 종교적 몸짓과 그 몸짓의 문화적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종교적 본성과 종교가 인간 사회의 역사발전에서 작용하는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In this preliminary essay on the semiotic interpretation of Confucian ritual(li), I am trying to evaluate Confucian ritual as a way of 'acting out'(bodily action) expressing Confucian world-view. I see ritual as culturally structured human action. Religious ritual is also a form of ritual, with the special feature of admitting the presence of 'the sacred' in human society. Religious human action which is structured and conditioned culturally in a society, is an action to express human salvatory aspiration. Confucian ritual was generally understood as just an institutional system for social order or a set of etiquettes. But, in this article, I am trying to present a new approach to see Confucian ritual not just as a social order or etiquettes but as an expression of Confucian ideal of life and world. Confucian world-view is very religious not because it considers the nether world or the world of super-naturals, but because it has strong aspiration for fulfillment beyond this-worldly everyday life. Another point of my research is that ritual is a kind of sign whose implicit meaning is to be interpreted. Confucian ritual is not an exception. As a sign, Confucian ritual action(li) has manifold meanings, and in a specific historical milieu it can has a conservative regulative power as well as a radical transforming power. Ritual as a sign is a double faced culturally structured action. By understanding this double sided face of ritual, we can understand the human aspiration to overcome this worldly limitations. In that meaning, all human cultural action is religious in its implicit connotation. A historian of religions should be a decipher of implicit emancipatory meaning in religions especially their ritual expr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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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程論性之析論 이정론성지석론

鈡治國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13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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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술계에서는 모종삼의 견해처럼 程明道는 운동과 변화의 관점에서 理를 규정하였고 程伊川은 “존재하지만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理를 규정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二程이 性, 理 등의 개념을 논하는 대목에서 서로 다른 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관점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한다. 가령 黃勇은 二程이 주장한 性이나 理는 어떤 실체화된 실유가 아니고 물화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생성하는 모습은 ‘활동의 존유물’이 아니고 ‘존재물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논자는 黃勇의 관점이 문헌자료와 논리추론적인 면에서 타당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종삼이 二程 학술을 차별적으로 구분하면서 송명이학 전체를 평가하는 방식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논자는 性과 관련된 기본 개념들의 의미와 논리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二程학술의 위치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学界对于二程之学尤其是二程性理论的讨论大都接受牟宗三的看法,认为明道是从运动和变化的角度来理解理,而伊川的理则是“只存有而不活动者”。也有学者认为二程在论述性、理以及与之相关的其他概念的时候虽有不同之处,但基本观点是一致的,即:性或者理不是某种实体化的实有,而是一个非物化的概念,是天地万物生生不已的活动,不是活动的存在物,而是存在物之活动。笔者认为按照后一种理解来解释二程哲学具有文本材料和逻辑理据的双重支持,而能否采用牟氏对二程的划分归类来统一解释二程以至整个宋明理学的内在理路和逻辑框架是值得商榷的。因此,本文拟从对“性”及与之相关的几个核心概念的内涵和逻辑关系的辨析入手,来重新思考二程哲学的学术定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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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철학체계에서 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주희의 철학체계에서 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김범수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15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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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情을 중심으로 주희철학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정은 특히 심성론과 공부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 정은 활동하는 마음 상태이며, 본성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인간의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본체이다. 형이상학적 본체의 실마리인 정은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경험될 수 없는 가치의 근거이자 본체인 리와 성은 정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정의 활동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성은 잠재적 본체요 정은 그의 현실태이다. 본체론과 현상론, 우주론과 인성론의 유기적 결합에 있어서도 정은 하나의 연결점과 같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서 과연 주희의 철학체계에서 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하겠다. 1. 가치실현의 출발점 1) 인성의 내원 2) 가치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정의 역할과 지위 2. 준거와 일탈 1) 정의 감응활동 2) 소통과 단절에 대한 성찰 3. 체증의 주체 1) 진리의 체화 2) 정감적 체험과 체험적 진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philosophy of ChuHeui on the aspect of emotion. Especially emotion is a kernel of the theory of mind and moral culture. Emotion is a state of moving mind, and then it is the real substance which is the same as nature. As a beginning metaphysical substance, the emotion can be recognized by experience. Logos and Nature which cannot be found by experience can be recognized through the emotion and realized by the emotion. Because emotion is a realized state, while nature is dormant substance. Emotion is a hub of a substantialism and phenomenalism, and of cosmology and the theory of human nature. I want to study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the notion, emotion in the philosophy of ChuHeui. The table of content is as follows. 1. The starting point of the value realizing. 1) Where does the Human nature come from? 2)The role and position of the Emotion in the recognition and practice of the value. 2. Conformity and deviation. 1) Sympathize. 2) Introspection on communication and discontinuity. 3. The main body of experience. 1) Tendency of the truth. 2) Emotional experience and experienced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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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陽明學 연구현황과 발전과정 중국에서의 양명학 연구현황과 발전과정

方浩范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18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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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ㆍ개방이후 중국에서의 양명학 연구는 새로운 열기를 맞게 되었다. 왕양명 또한 지주계급의 대변인으로 비판받던 데로부터 中國哲學史上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양명학 연구가 가장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영향력 있는 학술적 관점들이 배태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문화대혁명 이후의 양명학 연구를 바탕으로 이에 관한 총체적인 개관을 통해 그 주요관점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자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첫째, 사상의 기원과 체계적 측면에서 볼 때, 양명학은 儒ㆍ釋ㆍ道 세 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있음과 동시에 법가사상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중국에서의 진정한 大儒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둘째, 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 ‘심학’은 양명철학사상의 핵심으로 꼽을 수 있으며, 양명철학에 일관되어 있는 ‘致良知’, 양명철학의 중요 명제인 ‘知行合一’, 왕양명의 후기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四句敎’ 등 사상들이 그 핵심적 축을 구성하고 있다. 셋째, 양명학과 서양철학 등 기타 철학사상간의 비교를 통해 그 유사성과 상이성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를 바탕으로 양명학 자체가 갖는 함의와 근대적 의미에 대해 재평가 하였다.

改革开放以来, 中国的阳明学研究开始有了新的景象, 而且把王阳明从文革时候的地主阶级的代言人变为在中国哲学史, 乃至于中国社会具有一定影响力的哲学家来重新评价。从此, 在中国真正拉开了研究阳明学的高潮, 很多学者开始对阳明学进行了系统地研究。其中最为鲜明的特点是, 在国内外陆续举办了各种形式的阳明学学术会议, 提出一些比较有影响的学术观点和思想。本文综合考察了文革以后, 特别是近十多年的中国学者对阳明学的研究现状, 对此进行了简单地分析和归类, 认为阳明学在中国的研究主要分为以下几个方面来概括:一是、探讨阳明学来源与体系。大部分学者认为阳明学是吸收了包括儒、释、道, 以及法家思想的集大成者, 是中国真正的大儒。而且, 阳明思想体系就是通过不断地吸收、变化和完善而最终形成了具有鲜明特色的思想体系;二是、阳明哲学思想的核心内容。主要包括阳明哲学思想的核心——“心学”、贯通阳明哲学始终的“致良知”、阳明哲学的重要命题——“知行合一”、阳明哲学的道德思想与美学思想、以及决定阳明思想的后期思想与“四句教”等;三是、阳明学与其他哲学思想比较研究。主要比较了王阳明与朱熹思想、王阳明与西哲学思想、阳明学与韩日哲学思想;四是、研究阳明学的意义。主要包括阳明哲学本身所具有的意义、阳明哲学思想的近代意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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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巖 閔齊仁의 敎育思想 입암 민제인의 교육사상

이달우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21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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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선습의 원저자로 거론되는 입암(立巖) 민제인(閔齊仁)은 가계와 학맥 어느 것으로 보든 사림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문약한 사림만이 아니라 문무겸전한 사림의 풍모가 있었으며, 사림부양(士林扶養)을 위해 깊이 유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제인이 동몽선습을 저술한 시기는 계속되는 사화(士禍)로 신진사류의 기세가 꺾이고, 심지어 소학을 기휘(忌諱)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신진사류들은 금기시되는 소학이 아니면서 소학과 같은 이념의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교재를 생각하게 되었다. 민제인 등이 동몽선습을 저술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조선초기의 신진사류는 소학 교과를 중시하였다. 소학은 효를 중심으로 하는 오륜의 실천과 그 사회적 확산, 보급을 강조하는 신진사류의 필독서였다. 민제인 또한 신진사류에 속하기도 하거니와, 동몽선습 자체가 소학을 대신하는 교재로 저술된 것인만큼 당시 신진사류의 교육이념을 집약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민제인의 생애를 보면 그가 자상온아(仔詳溫雅)한 교육자의 풍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교육자적 풍모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림들을 부양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삼세칠효(三世七孝)로 칭송되는 여흥민문(驪興閔門)의 영예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라고 본다. 민제인은 젊어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 종유하였다. 한훤당은 실천을 강조한 소학동자론(小學童子論)으로 유명하다. 아마 이런 연유로 해서 그의 실천적인 학문관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민제인이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의 직임을 수행하는 과정이나 동몽선습의 사부(史部) 등을 보면 그의 실천지향적이고 실학적인 학문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는 교육의 본질을 망각한 채 지식편향 교육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교육을 실천이 아닌 지식의 관점으로만 보게 되고, 그 결과 인성교육에는 실패하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민제인의 자상온아한 교육자로서의 삶과 그 영향을 받은 후손들의 삼세칠효의 광영(光榮)은 우리에게 교육의 본령이 무엇이며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귀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지남(指南)이 된다고 본다. 특히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것이다.

童蒙先習の原著者として論じられる立巌閔齊仁は家系と学脈、いずれで見ても士林派に属する人物である。ところが文弱した 士林だけではなく、文武兼全した士林の風貌があったし、士林扶養のために深く念頭に留めおいたことと見える。閔齊仁が童蒙先習を著わした時期は続く士禍で新進士類の勢いがくじけて、甚だしくは小学を忌み嫌う傾向まで現われるようになった。そして当時の新進士類たちはタブーする小学ではないのに小学のような理念の世界を指向する新しい教材を思うようになった。閔齊仁などが童蒙先習を著わしたことはこのような時代的要求に応じたのである。朝鮮初期の新進士類は小学教科を重視した。小学は孝を中心にする五倫の実践とその社会的拡散、普及を強調する新進士類の必読書であった。閔齊仁もまた新進士類に属したりするが、童蒙先習自体が小学の代わりをする教材として著述されたから当時新進士類の教育理念を集約していると見える。閔齊仁の生涯を見れば、彼が穏やかな教育者の風貌を持ったことが分かる。このような彼の教育者的風貌が血なまぐさい士禍の渦の中で、多くの士林たちを扶養することができたし、ひいては三世七孝だと称される驪興閔門の栄誉ができるようにしたことであろう。閔齊仁は若いごろ、寒喧堂金宏弼門下に従遊したそうである。寒喧堂は実践を強調した小学童子論で有名である。多分こんなわけで、彼の実践的な学問観が形成されたはずである。もちろん以外にも閔齊仁が咸鏡南道兵馬節度使の職任を遂行する過程や童蒙先習の史部などを見れば、彼の実践 指向的で実学的な学問的傾向を汲み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ろう。われわれの教育の一番大きくて深刻な問題は教育の本質を忘却したまま知識にかたよった教育に沒頭しているという点である。そうしてみると教育を実践ではない知識の観点だけで見るようになり、その結果として人性教育には失敗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この点で閔齊仁の穏やかな教育者としての人生と、その影響を受けた子孫たちの三世七孝の光栄は私たちに教育の本領がいったい何であり、いかに教育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かという点において、珍しい教えを提供する指南になると思われる。特に家庭教育の大切さを今一度悟らせてくれ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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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 민제인의 유물과 유적에 관한 연구

민황기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241-29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논문은 입암 민제인의 유물과 유적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입암은 현달한 가통의 명문거족으로서 용의가 빼어났으며, 천성이 온화하고 인후한 성품과 위엄 있는 외양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 그는 조선조 16세기 정치적 격변기에서 의정부 좌찬성 등 내외 주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몸소 수기 안인(修己 安人)을 실천한 도학의 유학자요 관료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진성학(先秦聖學)의 대도(大道)에 근거하여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아가 애민(愛民), 위민(爲民), 보민(保民)의 입장에서 국가 보위와 민심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도통(道統)으로는 정암 조광조의 순절(殉節)과 율곡 이이의 행도(行道)의 중간에서 이었으며, 경서와 역사에 밝았고 문장에도 능통하였다. 입암의 주요 유물과 유적으로는 입암집, 동몽선습, 동국사략, 백마강부 편액, 민 입암집 판각, 묘역의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입암 민제인의 시문집인 입암집은 천․지․인으로 분류된 6권 3책으로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 책은 1610년(광해군 2)에 발행되었으며, 판 사항은 목판본이고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일반사항으로 권1-2(1책)은 훈련도감 목활자이고, 1610년에 서(序)는 유근이, 지(識)는 손자인 민여임이 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81년 6월 서지학자 안춘근에 의해 발견된 동몽선습은 입암 민제인이 후학을 깨우쳐 인도하고 세상의 참된 교육을 유지하며, 독행(篤行)과 진학(進學)의 문로(門路)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저술하였으며 최초로 목판 인쇄로 간행된 교과서이다. 윤인서가 쓴 발문에는 저자, 저술 동기, 책이름, 저술 년도, 발문을 쓴 사람까지 자세하게 밝히고 있어 입암의 동몽선습이 최고(最古)의 정본(正本)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1543년(중종 38)에 간행되었으며, 판 사항은 목판본이고, 형태사항은 1책으로 되어 있다. 입암 민제인의 저술로 동국사략 3권이 있었으며, 고란사 영종각 안 벽면에는 입암이 지은 백마강부(白馬江賦) 편액이 걸려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민 입암집 판각(閔 立巖集 板刻)’은 입암 민제인의 입암집 판각을 보장하고 있는 소실이다. 이 건물은 1995년 10월 7일 충남문화재(문화재 자료) 제341호로 지정되었다. 입암의 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명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형태는 분묘이다. 묘소 앞의 상석과 제전 중앙에는 세월을 말해주는 모습으로 석등이 있고, 그리고 좌우측에 문인석과 망부석 등 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묘소 바로 좌측에 그리 크지 않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입암의 신도비는 1668년(현종 9)에 세워졌으며, 매우 웅장하게 보인다. 이 신도비의 글은 입암의 이손인 노봉 민정중이 의뢰하여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으며 김수항은 전(篆)을 붙였다.

本文主要硏究了立巖閔齊仁的遺物和遺蹟. 立巖是16世紀朝鮮朝士禍時代的一位儒家學者和官僚知識人.出身於名門巨族的他性情溫和仁厚,而且外貌端莊, 擧止威嚴. 16世紀的朝鮮是一個政治上激烈動湯和變動時期, 身處這一時代的他曾歷任議政府左贊成等官職,可以說,立巖是一位親身實踐儒家修己安人之理想的知性人的表象.他的學行和道德人品當在殉節而死的靜庵趙光祖和栗谷李珥之間. 立巖從學問上來講, 對經書和歷史比較精通, 而且擅長寫文章. 立巖的主要遺物和遺蹟有 立巖集, 童蒙先習, 東國史略, 白馬江賦偏額, 墓域里的 遺蹟, 閔立巖集板刻等. 立巖的詩文集 立巖集按天․地․人來分類, 共有6卷3冊, 現收藏於奎章閣韓國學中央硏究院. 該書是木版刻本, 於1610年(光海君2年)發行, 現保存狀態良好. 卷1至卷2爲第1冊, 它是訓練都監木版活字, 1610年(光海君2年)由柳根寫序, 由其孫子閔汝任作識. 立巖集 是由立巖的孫子閔汝慶蒐集和編輯, 由立巖的兒子閔思安刊行的.後來,其孫子閔汝任在任慶尙道興海郡的首領時根據原來的文集重新編輯後刊行.1669年(顯宗10年)第5代孫認齋閔蓍重在任慶尙道觀察使的時候將尤庵宋時烈撰寫的神道碑銘刊附在卷末.到了1736年(英祖12年)第7代孫慶尙道觀察使梧軒閔應洙追加刊行了補遺,竝且讓人保存在大邱境內的龍淵寺極樂殿前的普光樓內.1926年第12代孫閔泳徽委託族叔閔達鎬追刻了追補. 童蒙先習由近人書誌學者安春根第一次發現,它是一本根據韓國人的實情最早刊行的傳授儒家思想的敎科書.尹仁恕在他寫的跋文里詳細地介紹了本書的作者, 著述動機, 書名, 著述年代, 寫跋文的人的姓名等, 立巖寫的這本 童蒙先習被後人評價爲歷史上最早的正本. 据考證這本書是木版本印刷, 於1543年(中宗38年)刊行. 立巖先生編纂童蒙先習的動機可由以下幾點來進行說明. 首先, 是爲了敎育後學修習儒家的人倫日用道德, 其此, 是爲了普及正確的敎育理念和敎育方式, 再次, 是爲了給百姓指明篤行和進學的門路. 童蒙先習由以下三部分構成, 作爲第一部分的總序里主要闡述了儒學的思想理論和道德, 第二部分是‘經’, 第三部分是‘史’, 主要是介簡約紹了中國歷史和韓國的歷史, 竝加了一些史論. 據李德懋所著的 靑莊館全書及金烋所著的海東文獻總錄的記載, 立巖生前著有 東國史略3卷, 但現在全部逸失而不傳於世. 忠淸南道扶餘郡的皐蘭寺靈鐘閣里面的墻壁上有一块立巖寫的白馬江賦偏額, 現在保存的這块偏額是由立巖的第12世孫岩亭閔泳臣後來重新製作的.白馬江賦主要表現了立巖站在白馬江邊有感於百濟亡國的歷史而抒發的愛民憂國之情. 立巖的墓所位於京畿道南楊洲市一牌洞, 墓所的形態是一座墳墓. 墓前有一座石床, 祭奠中央則有一盞象徵歲月的石燈, 左右兩側立着文人石和望夫石等石器. 墓所右側前方有一不大的墓碑. 立巖的神道碑高大雄壯, 被立於1668年(顯宗9年). 神道碑上的碑文由尤庵宋時烈受立巖之耳孫老峯閔鼎重的委託而撰寫, 竝由同春堂宋浚吉把它抄寫以後, 再由金壽恒用篆體刻於碑上. 忠淸南道扶餘郡的‘閔立巖集板刻’里收藏和保管 '立巖集'的板刻. 這座建筑物於1995年10月7日被指定爲忠南文化財(文化財資料)第341號. 藏版閣懸板上的字的作者是閔丙奭. 藏版閣里還陳列着板刻, 板刻的總數一共有135個, 而且前後面都刻有字. 另外, 墻壁上還挂着幾块懸板, 上面記錄着立巖集的板刻保存下來的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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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父文庫」를 통해서 본 凡父 金鼎卨의 東洋學 지식의 범주

최재목, 이태우, 정다운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299-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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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종래 凡父 金鼎卨(1897-1966. 凡父는 호)(이하 범부)의 ‘東洋學 지식의 범주’를, 현재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凡父文庫」(1974년 설치)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다. 우선 범부의 동양학적 지식 형성을 추측해 보기 위해 그의 「연보」를 살펴보고, 「범부문고」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을 내용별, 출판년도별, 발행지별로 분류ㆍ정리하면서 범부가 탐독한 지식의 윤곽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범부문고」 목록은 부록으로 첨부하여 소개하였다. 「범부문고」 중 사부총간의 수적 우위로 인한 도서 다양성의 한계와 불명확한 서지사항 등으로 ‘「범부문고」= 범부 동양학 지식’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범부문고」의 도서들은 그의 동양학 지식을 형성하는 주요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문고는 범부의 지식의 범위와 관심이 어는 한 곳에만 머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학문의 전 영역에 걸쳐있었음을 말해주는 직ㆍ간접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연구는 범부연구를 위한 기초연구로서 범부문고의 소개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범부가 한국 현대사상사에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해서 그에 대한 연구는 부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범부문고」와 같이 그의 지식 형성에 관여한 기초적인 연구와 더불어 그의 학술 전반과 관련한 당시의 지식ㆍ지식인 네트워크도 연구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is is a study on the relation between Bombu Kim Jeongseol(凡父 金鼎卨, 1897-1966)'s Oriental studies and 「Bombumungo(凡父文庫)」. The 「Bombumungo」 is Kim's collection of books during his lifetime, which had found in Yeungnam University Library by donation of Kim Jeongseol's son since 1974. Kim Jeongseol, who was the first dean of the Gelimhaksuk(鷄林學塾) of Geongju, is always in everyone´s mouth as a potential genius. He, under Japan’s colonial rule of Korea, he went to Japan and studied at Touyo University and Tokyogaikokugogakkou of tokyo. And he also studied as an irregular student at Tokyo and Kyoto University. He, moreover, after this, teaches as a part-time lecturer or an honorary professor at Tenri University and Hiezansenshugakuin of Japan as well as Bulgyojeunganhaklim of Korea. As like this, internal and external in those days, he has a name for his great learning. He is widely informed such as oriental and occidental philosophy, and history, politics, linguistics of korean and so on. In other words, he covers a wide area as well as his reading also reach everywhere. The 「Bombumung」 reveals a cross section of Kim's category of knowledge above-mentioned, specially in oriental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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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33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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