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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STUDIES IN CONFUCIANISM (The Journal of Confucianism Research Institute)]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CONFUCIANISM RESEATCH INSTITUT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 pISSN
    1229-5035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3 ~ 2020
  • 주제분류
    인문학 > 유교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제15집 (8건)
No
1

明齋 尹拯의 學問淵源과 그 學脈

최근묵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5-21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조선중기 이후 사림파가 등장하여 정권의 실세를 장악해나가면서 사림은 학통의 정립이 필요하였다. 이런 연유로 道通과 嫡傳으로 표현되는 師承관계는 학문의 내용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더 강하게 작용되기에 이르렀고 또한 도식적인 계보가 작성되기에 이르렀다. 魯宗의 坡平尹氏는 호서의 3大名族으로 학문연원이 가장 깊고 또 다양하게 학문적 교류를 이룬 가문이다. 牛溪 成渾의 적전으로 기호학파에서 발전한 호서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가문이다. 그러나 당시 학문적 정치적으로 가장 큰 문제였던 禮訟에서의 견해 차이는 결과적으로 魯宗이 호서학파에서 분파되는 현상에 이르렀다. 본고에서는 魯宗의 학문연원과 17세기 양란이후 사회적 변화 속에서 호서학파의 분기에 핵심적인 인물인 明齋 尹拯(1629~1714)의 학문연원을 살펴보고 그가 왜 변화했는가의 시대적 상황과 이에 현실적으로 대응하는 그의 학문적 입장과 함께 그를 잇는 학맥을 살펴보았다. 명재는 가학을 전수받고 호서학파의 이름난 학자들과 종유, 교유하면서 학문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시대적 상황에서 변화하고 있지만 그의 학문연원은 ‘靜庵牛溪之學’을 표방하는 학통관을 성립시킨 것으로 결론할 수 있다.

2

明齋 尹拯家와 市南 兪棨의 交遊

이해준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27-47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생존시와 사후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처럼 윤증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 면을 보이는 것은 격렬한 당쟁에 휩싸였던 그의 일생을 반증하고 있고, 따라서 올바른 역사적 평가와 재해석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본고에서 주목하는 명재 윤증의 가문과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관계는 ‘교유’보다는 ‘갈등과 시비’로 비쳐진다. 그러나 필자는 본고에서 갈등의 측면보다 깊은 인연과 교유를 주목하고자 한다. 유계는 윤증의 부친 윤선거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손꼽힐 정도의 존경하는 어른이자 스승이었고, 유계는 호서산림간의 갈등으로 분열하려는 조짐 속에서 중간의 위치에 있으면서 편당하지 않고 생을 마쳤던 인물로 알려진다. 특히 윤증의 부친 윤선거와 유계는 동문수학한 사이를 넘어 평생 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였다. 유계가 일생 중 가장 즐겁던 시절로 회고하는 금산의 산천재(山泉齋) 시절의 교유 인물들이 모두 파평윤씨 명재가의 인물들이었고, 산천재가 후일 윤선거 부자의 학문터전으로 활용된 점도 두 가문의 친밀한 인연을 반증한다. 유계가 1664년(현종 5) 58세로 서거하자 윤증의 부친인 미촌 윤선거는 유계의 행장을 짓고, 유계 또한 윤선거의 부친인 윤황의 묘표를 지었다. 그런가하면 제자인 윤증은 스승의 묘지명을 짓고, 유계의 문집(󰡔市南集󰡕) 편찬에 가장 깊이 간여할 정도였다. 유계는 누가 보어라고 하여도 다른 호서사림과의 교유 중에서 명재 윤증의 가문과 가장 긴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대에 당론에 연관되면서 가례원류의 일로 명재 윤증은 스승을 배반했다는 혹평을 받는다. 그러나 유계는 윤증에게 가례원류 수정을 직접 지시할 정도로 믿고 아끼는 수제자였고, 유계와 파평윤씨 가문이 형제와 같은 친밀한 관계였던 점을 고려할 때 가례원류 편찬시비는 후대의 여러 주변 정황에 의한 불균형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assessment of Myeongjae Yunjeung' political life is entirely different before and after his death. This reflects his life mired in heated political disputes. Therefore, it is not easy to make a history-based assessment or reinterpretation of him. The relationship between Yunjeung's family and Sinam Yugye noted in this thesis is characterized by conflict and confrontation rather than cooperation. However, the author intends to focus on a deep connection and companionship between the two parties rather than conflicts. Yugye was a much- respected man who was included in Chungcheongohyeon with Yunjeung' father Yunseongeo. Yugye is known to have remained neutral at the signs of the division attributed to the confliction among Hoseosanrim without joining any political party until his death. He and Yunseongeo studied together and kept intimate friendship all their lives. Whiling living at Sancheonjae in Geumsan where, he said, he spent the most happiest period of his life, the friends he associate with were all from Papyong-yun family. In addition, the fact that Sancheonjae was utilized as a learning place by Yunseongeo and his son implies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families. When Yugye passed away at the age of 58 in 1664(in the 5th year of Hyeonjong), Yunjeung' father Michon Yunseongeo wrote a eulogy for him. Yugye also had written a gravestone for Yunseongeo' father Yunhwang. In addition, Yunjeung was deeply involved in his teacher Yugye's publishing work and wrote on a gravestone when he died. Yugye kept very close relationship with Myeongjae Yunjeung's family by anybody's standard. But being involved in political disputes over Garye wolly later, Yunjeung was blamed for betraying his teacher. But, indeed Yugye liked and trusted his student Yunjeung and personally asked him to revise Garye wolly. Given that Yugye and the Papyong-yun family had a brotherlike relationship, disputes over the publication of Garye wollyu seems to have been wrongly understood by later generations.

3

明齋 尹拯과 炭翁 權諰

정호훈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49-7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 소론(少論)의 대표적 학자인 윤증과 그의 장인인 권시와의 학문적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가를 살폈다. 두 사람이 사제 관계를 맺은 것은 윤증의 나이 20세 때 권시의 사위가 되면서 였다. 윤증은 이미 그 이전에 아버지와 유계(兪棨)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으므로 권시로부터 받은 영향이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권시는 사위 윤증에게 고담준론의 성리설(性理說)에 천착하지 말며 일상에서의 도덕 실천에 힘쓸 것을 가르쳤다. 윤증 학문의 특성을 흔히 무실(務實)을 강조한다는 데서 구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권시의 가르침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편, 권시와 윤증 두 사람은 당대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두 사람의 신상에 공히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일은 윤휴(尹鑴)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그를 둘러싼 기호 지역 사림들의 논란, 그리고 복제(服制)에 대한 논쟁이었다. 두 사람이 이 사안들에 대한 접근 태도는 전혀 달랐다. 권시는 윤휴의 학문적 태도를 옹호하고 3년상을 주장했지만, 윤증은 윤휴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또 3년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정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의견 교환을 하면서도 끝내 자기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요컨대, 윤증과 권시는 학문상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지만, 정치적인 의견에서는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권시가 남인(南人)이었고 윤증이 소론(少論)이었던 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This writing examined how academic exchanges were being attained between YunJeung, who is a typical scholar in Soron(the Westerners and Southerners, etc.) in the latter term of Joseon, and GwonSi, who is his father-in-law. GwonSi(権諰) taught his son-in-law YunJeung(尹拯) not to indulge in metaphysical Neo-confucian theory(性理説) and to positively practice daily morality. As the characteristic in YunJeung's learning is obtained frequently in emphasizing an effort for substance, his this academic characteristic is considered to be probably associated with GwonSi's teaching. Meanwhile, both persons, GwonSi and YunJeung, were acutely opposed to each other on the contemporarily political questions. What had specifically and directly influence upon circumstances of both persons included YunJeung's critical attitude toward Jujahak(Zhu Xi philosophy), adverse criticism in people of Giho province surrounding him, and Controversy over courtesy(禮訟). The approaching attitudes in two people toward these matters were completely different. GwonSi advocated YunHyu(尹鑴)'s academic attitude and asserted 3-year condolence, but YunJeung was critical about YunHyu, and was negative even about 3-year condolence. Both persons, who had the exactly opposite thought, didn't abandon own opinion in the end regardless of xchanging opinions several times. In a nutshell, YunJeung and GwonSi had some interchanges in light of learning, but can be said to have shown the sharp confrontation in a political opinion. This will be connected to a point that GwonSi was Namin(南人) and YunJeung was Soron(少論).

4

明齋 尹拯과 明村 羅良佐 -나양좌를 중심으로-

崔英成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77-10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의 1급 제자인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 : 1638~1710)의 생애 및 명재 윤증과의 학문적 교류에 대해서 살핀 것이다. 나양좌의 일생은 한 마디로 “스승을 높이고 진리를 수호함”(隆師衛道)으로써 요약된다. 나양좌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현실에 비추어 그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며 인간적․학문적 교유 관계를 주로 고찰하였다. 나양좌의 학문과 사상은 그의 스승인 윤선거, 그리고 동문이면서 사실상 스승 노릇을 겸한 윤증과의 관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나양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현재 3권이 전해진다고 하는 󰡔명촌유고󰡕}약간 권 이 속히 학계에 보급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기초를 제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This paper is about Myeong-chon, Na-Yang-jua's life and his academic exchange with Myeong-jae, Yun-jeung. He was the first class pupil of Yun- seon-geo. In a word, he respected a master and protected a truth. This paper examines his personal and academic exchange with people. Na, yang-jua's studies and philosophy were related to his master Yun,-seon-geo and his friend, Yun-jeung. This paper will be the foundation to later researcher and further research of Na-yang-jua will be needed. Lastly, three volumes of Myeong-chon-yu-go need to be distributed in the academic world.

5

한국 실학파의 「心經附註」이해 - 이익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이상호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101-127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논문은 이익과 정약용의 󰡔심경부주心經附註󰡕이해를 중심으로, 한국 실학에 나타난 주자학과의 관련성 및 그 전개양상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심경부주󰡕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많은 논쟁은 한국 철학 사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으로, 이것은 󰡔심경부주󰡕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철학적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특징은 󰡔심경부주󰡕가 기본적으로 주자학적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논쟁의 반열에 양명학자와 실학자들까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익과 정약욕의 󰡔심경부주󰡕}관련 해석서에 나타난 철학적 입장을 중심으로 한 국 실학파의 󰡔심경부주󰡕}이해에서 드러난 주자학과의 관련성과 그 전개 양상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 2장에서는 이익의 󰡔심경부주󰡕}이해를 그의 저작인 󰡔심경부주질서󰡕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본 논문에서는 이익의 철학적 입장이 퇴계 학통 위에 서 있으면서, 󰡔심경부주󰡕의해석사에서 강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한강 정구의 입장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익利益에 대한 기본 입장은 주자학자들의 일반론과 달리,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봄으로써 옳게 이익을 취해 가는 것에 대해서는 리를 따르는 것으로 보려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실학이 성리학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본 논문 3장에서는 정약용의 󰡔심경밀험󰡕을 중심으로 그의 󰡔심경부주󰡕를 확인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본 논문에서는 정약용의 성과 정에 대한 입장 및 인심과 도심에 대한 입장이 주자학의 일반론으로부터 완전 하게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기론에 바탕한 성이 아니라, 인간의 선한 경향성으로 성을 해석하고 있는 정약용의 입장은 맹자가 말하고 있는 ‘성선’의 성과 의미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인심과 도심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정약용은 고증학적 입장에 서서, 16자 심 법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자학과 그 입장을 달리한다. 하지만 적어도 16자 심법 가운데 앞의 두 구절에 대해서는 내용상 합리성을 인정하면서,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익의 실학은 기존의 주자학, 그것도 퇴계학의 세계관 위에서 건립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면, 정약용의 실학은 비록 주자학적 세계관으로부터는 이탈하고 있지만 ‘수기’와 ‘치인’을 기본으로 하 는 유학의 정신세계 위에서 건립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identify relevance and the developmental aspect of Zhu Xi's theory and Chosun Silhak, focusing on Lee Ik and Chong Yagyong's understanding of Sim-Gyung-Bu-Zu. A lot disputation of Sim-Gyung-Bu-Zu are peculiar appearance in which is only presented Korea Philosophy History. Cause of the appearance is several important philosophical reasons that Sim-Gyung-Bu-Zu has. However, More important feature is a case that, although Sim-Gyung-Bu-Zu is basically Zhu Xi's theory work, Yangming learner and Silhak learner take part to the disputation. In this essay, thus, I want to identify relevance and the developmental aspect of Zhu Xi's theory and Chosun Silhak, focusing on Chosun Silhak School's understanding of Sim-Gyung-Bu-Zu. This essay chapter 2 shows Lee Ik's understanding of Sim-Gyung-Bu-Zu through his work, Sim-Gyung-Bu-Zu-Zil-Seo. This essay can show point that Lee Ik's philosophical view is to be on Toegye scholastic mantle and succeeds Hankang Jeong-gu's view which adhere to powerfully critical view in interpretation-history of Sim-Gyung-Bu-Zu. Unlike general theory of Zhu Xi learner, Lee Ik's A basic view of a profit suggests a viewpoint that hold a taking profit as following Li, by considering goodness and badness as undetermined. This point is a clue of presenting that his Silhak is based on a founadtion of Sung Confucianism. This essay chapter 3 shows Chong Yagyong's Sim-Gyung-Bu-Zu, focusing on his Sin-Gyung-Mil-Heom. In this essay, we can identify point that view of Chong Yagyong's seong(性) and jeong(情), and view of his In-Sim(人心) and Do-Jim (道心) apart from general theory of Zhu Xi theory. Chong Yagyong interprets seong(性) as good tendency of human, not seong(性) base on Li-Gi(理氣) theory. For discussion of In-Sim and Do-Sim, unlike viewpoint of Zhu Xi theory, Chong Yagyong take bibliographical viewpoint, then he doesn't admit 16 letter Sim-Beop(心法) that way. However, He admit two phrase of 16 letter Sim-Beop (心法) at least, and show an aspect of a Confucian scholar Therefore, Lee Ik's Silhak is established on present Zhu Xi theory, on world view of Toegye's thought. Though Chong Yagyong's Silhak break away from world view of Zhu Xi theory, it is clear that his theory is established on mind-world of Confucianism which is based on ‘Sugi(修己)' and 'chi-in(治人)'.

6

王龙溪的虚寂良知论

선병삼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129-141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중국유학은 왕양명에 의해 송대 주자학과 대비되는 유학 전통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송대 주자의 “性卽理”설과 구별되는 명대 왕양명의 “心卽理”설이다. 후학들이 이 두 철인의 同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면이 있지만 理學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宋明理學으로 통칭한다. 주자는 주자적 이학의 세계를 구축했고 양명은 양명적 이학의 세계를 건립했다. 양명학설의 종지는 良知 本體論과 致良知 工夫論이다. 이 종지는 그의 만년 수제자들인 전서산과 왕용계 간의 四句敎 해석의 차이를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소위 “天泉問答”이다. 양명은 양자의 논점을 모두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면 서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상호 보완할 것을 당부한다. 두 사람은 스승의 말을 명심하면서 도 각자의 기질에 따라 강설하고 교법을 제창하며 양명학을 심화한다. 이 두 사람은 양명교설에 대해 최초로 해석의 차이를 주장한 자들로 양명학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전서산은 자료가 부족한 이유로 왕용계는 황종희이래의 평가가 굳어진 이유로 이래저래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논문은 논자의 박사논문에 기초하여 작성한 것으로 용계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현재까지 학술계에서 용계철학 연구자들은 옹호적이든 비판적이든 현성양지를 논하고 그의 사상면모를 총론하는 방식을 관례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이런 식의 연구론은 황종희의 󰡔명유학안󰡕}이래로 굳어진 방법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논자의 입장은 이와는 다르다. 용계학에서 虛寂良知는 良知의 體이고 見成良知는 良知의 用인데 양명학에서는 卽體卽用의 體用一源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당연히 허적양지를 우선적으로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용계가 말하는 허적양지는 虛無寂滅한 心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無是無非한 良知를 지칭한다. 곧 無是無非한 良知本體가 있어야 비로소 知是知非한 良知作用이 있다는 주장이다. 본래 양지는 선악시비를 판단하는 不學不慮하고 知是知非하며 知善知惡한 선천적인 도덕능력이지만 시비선악을 판단하는 실제과정은 경험의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순한 경험의식이 순수도덕의식이 발휘되는 것을 쉽게 막아버린다. 따라서 선악판단의 주체에서 보면 意識思念과 自然明覺을 엄격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용계가 허적양지를 주장하는 첫 번째 이유다. 한편 용계가 허적양지를 제출한 시대배경을 살펴보면,양명사후에 心體良知의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 雙江의“虛寂本體論과 歸寂工夫論”에 대한 용계의 비판적 태도가 허적양지론이 성립하는 근거가 되었다. 용계는 雙江이 先體後用적인 體用一源론에 근거하여 虛寂良知本體를 주장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虛寂良知本體를 주장하여 雙江의 虛寂良知本體를 비판함으로써 即體即用의 良知論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용계가 虛寂良知論을 주장하는 두 번째 이유다.

In Chinese Confucianism, Wang Yang-Ming gave a different color to understand Confucianism, compared to Zhu-Xi Study in Song dynasty. It is so-called XinJiLi(心卽理). Even if researchers didn’t necessary reach any agreement in appreciating philosophical similarity between Zhu-Xi and Wang Yang-Ming, they agreed that their philosophy is a LiXue(理學). So it is generally called SongMing-LiXue(宋明理學). Yang-Ming study’s key word is LiangZhi-BenTiLun and Zhi LiangZhi –GongFuLun(良知本體論和致良知 工夫論). This main teaching is known to the world by the confliction of understanding about SiJuJiao(四句敎) between his apostle of Quan Xu-Shan and Wang Long-Xi, Which is so called TianQuanWenDa(天泉問答). Yang-Mimg reconciled their argument and recommended to compensate each other. Accepting master’s recommendation, they were going their own way in harmony with their disposition, with proclaiming their own teaching and deepening Yang-Ming study. These philosophers, who found a different understanding of Yang-Ming’ SiJuJiao(四句敎) at first, are important person in studying Yang-Ming Study, but researching for them is not sufficient for now. This article based on my doctoral thesis tries to give another view point of studying Long-Xi Study. Generally speaking, studying Long-Xi study takes this path: discussing XianCheng-LiangZhi(見成良知) at first, and then treating his whole thought. This method has had a long history since Huang Zong-Xi(黃宗羲)’s MingRuXueAn(明儒學案), but I don’t agree to this method. Originally, Long-Xi `s XuJi-LiangZhi(虛寂良知) is LiangZhiTi(良知體), and XianCheng-LiangZhi(見成良知) is LiangZhiYong(良知用), furthermore, Yang-Ming Study stresses on TiYongYiYuan(體用一源) of JiTiJiYong(卽體卽用), so I think we should discussing XuJi-LiangZhi(虛寂良知) at first, and then treating his XianCheng-LiangZhi(見成良知).

부록1

7

한국에서의 상산학과 양명학 관련 연구 목록

김세정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144-249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목록에는 2006년 12월까지 한국에서 간행된 저서, 번역서, 학위논문 및 각종 논문집과 학술잡지에 게재된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생애와 사상 전반, 중국양명학파와 한국양명학 및 일본양명학의 형성․전개․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하였다. 외국에서 발표된 한국인의 논문과 한국에서 발표된 외국인의 논문도 함께 포함시켰다.

부록 2

8

유학연구소휘보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5집 2007.08 pp.252-289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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