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파는 16세기 사화시대의 행정가요 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도 당시 유교사회의 일원으로 유학적 교양을 받고 수학한 독실한 학자였지만, 학문적 업적과 특성은 극히 미미하다. 그의 문집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적인 학설이나 토론은 볼 수 없다. 그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관직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때는 道學시대로서 성리의 이론적 천착보다는 小學的 실천이 강조되는 시대적 환경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을사사화 때의 처신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파의 경우 현실참여의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金安老의 미움을 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고, 尹元衡, 李樑, 李芑 등 당시 權奸, 戚臣들과 부단히 항거한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추파는 그 스스로 불의의 시대에 있어 벼슬살이가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양하고 또 사양하였으며, 아슬아슬한 칼날 앞에서도 명분과 의리에 어긋나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더욱이 을사사화 때 衛社功勳을 받은 사실은 그에게 큰 부담이 되고 멍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본의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요, 임금과 당시 추파의 錄勳을 시비했던 權奸들의 말처럼 실제로 추파는 아무런 공이 없었지만, 당시 도승지로서 전례에 따라 공훈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추파에게 이 공훈은 상이 아니라 벌이요 짐이요 부담이었다. 그러기에 이를 벗기 위한 그의 노력은 상소와 啓를 통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또한 추파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종형 宋麟壽의 伸寃을 간절히 주청하였고,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희생된 靜庵 趙光祖의 신원을 주청하는가 하면,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림들에 대한 신원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난세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李滉, 李浚慶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석방된 白仁傑, 金鸞祥, 盧守愼, 柳希春 등의 등용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파의 노력은 당시 형극의 가시밭길에서도 바른 길을 가야하고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학의 이상은 경제와 윤리, 實利와 義理의 겸비에 있지만, 만약 양자 택일을 해야 할 경우라면 부득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義를 취하는 ‘舍生取義’, ‘殺身成仁’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이익, 경세를 통한 현실참여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학의 관점에서 16세기의 대표적인 관료 유학자 秋坡 宋麒壽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더욱이 불의의 권력이 횡행하는 난세에서 명분과 실리를 조화하며 그 균형추를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그를 새롭게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CONFUCIANISM RESEATCH INSTITUT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설립연도
1993
분야
인문학>유교학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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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21세기를 준비하는 인적자원을 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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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연구 [STUDIES IN CONFUCIANISM (The Journal of Confucianism Research Instit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