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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중세사연구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서양중세사학회 [The Korean Society For Western Medieval History]
  • ISSN
    1229-4454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 십진분류
    KDC 911 DDC 951
제42호 (6건)
No
1

북아프리카 신학의 다양성과 발전 : 도나투스파교회와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심으로

김경수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제42호 2018.09 p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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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니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북아프리카에서 고백자와 배교자가 발 생했고, 이로 인해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북아프리 카교회에서 도나투스파와 가톨릭교회 모두를 통해 교회론에 대한 해석의 다양 성을 불러왔고, 이를 기초로 다양한 신학들이 발전했다. 특히 파르메니아누스가 북아프리카 내의 분파들을 수용하는 포용적인 신학을 추구하면서 그와 함께 나 타나게 되는 도나투스파 내의 다양한 신학적 발전과 변화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티코니우스의 교회론과 도나투스파의 강압 을 사용하는 문제, 그리고 도나투스파 내의 분파들로부터 북아프리카교회로 돌 아오는 사람들에게 관한 재세례의 문제 등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주었 을 뿐만 아니라 도나투스파를 논박하는 논점들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 회론과 성례론, 그리고 세속권력의 강압의 사용 등은 북아프리카 내에서 이미 통용되었던 문화 혹은 문화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개념들은 북아프리카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도나투스파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 논문은 그의 교회론, 세례에 관한 그의 이해, 그 리고 세속권력의 강제적 힘의 사용 등은 북아프리카교회에서 다양하게 현존했 었던 개념들에서 발전하고 정제된 것이었다는 것을 검토한다.
Under the persecution of Diocletian, confessors and traditores appeared in North Africa, and because of this matter the North African church was divided. This church schism made it possible to develop diverse understandings of the church through the Donatists and the Catholics as well. Especially while Parmenianus pursued to include the schismastics in the Donatist Church, since then, the Donatist doctrine of the Church has been changed to include sinners in the Church. In this point, diverse understandings of the Church began to appear such as Parmenianus and Tyconius’s, which particularly influenced Augustine greatly. Moreover, within the Donatist Church, there were the concepts of the use of coercion of secular authority, of rebaptism of those about whom return from schism, and of Tyconius’s understanding of the Church, which became Augustine’s logical device to debate the Donatists as well as influenced him. Those concepts of the Church, the use of coercion, and the matter of rebaptism were already present in North Africa culture before Augustine utilized them. In this sense, this article examines Augustine’s theological concepts of the Church, rebaptism, and the use of coercion were influenced by North Africa’s cultural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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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유럽 여성의 일상생활 : 이탈리아 상인의 아내 마르게리타의 사례를 중심으로

남종국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제42호 2018.09 pp.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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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중세 말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다티니의 아내였던 마르게리타 의 사례를 통해 중세 유럽 도시 여성의 일상생활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혼 생 활, 경제 활동 그리고 편지 쓰기라는 세 가지 측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것이 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마르게리타가 중세 말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동시대의 여성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르게리타는 1376년 아비뇽에서 16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동향 출 신의 41살의 상인 프란체스코 다티니와 결혼했다. 당시에는 나이 차이가 많은 결혼은 드물지 않았지만 한 가지 예외적인 것은 프란체스코가 선술집 주인의 아들로 평민이었던 반면 마르게리타는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다. 이러한 사실은 신분을 구분하는 벽이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혼 생활에서 부부의 불화를 초래한 핵심 문제는 마르게리타의 불임이었다. 불 임에 대한 다티니 부부와 주변 사람들의 인식은 상당히 근대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의 핵심 업무는 집안일이었다. 르네상스 시 기에도 교회와 성직자들은 여전히 결혼한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집안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가정주부와는 달리 마르게리타의 역할은 결코 살림살이에 국한되지 않았다. 남편의 부재 시 마르게리타는 임금 지불, 이자 대부와 수취 등 다양한 종류의 금전 업무를 맡아서 처리했다. 이자 에 대한 마르게리타의 인식은 한 푼이라도 받는 이자 대부는 모두 죄악이라는 중세의 전형적인 인식과는 상당히 달랐다. 마르게리타는 늦은 나이인 20대 중 반에 글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글쓰기를 연마했다. 이러한 그녀 의 노력은 여성의 글쓰기를 권장하지도 않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에 맞선 나름의 자의식의 발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마르게리타는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중세인의 모습과 인식의 틀에 서 벗어나 있었다. 이는 그녀가 살았던 1400년경 이탈리아 도시라는 시공간적 인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결국 그녀가 살았던 이탈리아 도시는 동시대의 농촌이나 다른 국가에 비해 새로운 변화를 먼저 경험하고 있었다.
This article aims to investigate the daily life of the medieval women in Italian cities, by analyzing the daily routine of Margherita, wife of the famous Italian merchant of Prato, Francesco Datini. The analysis focuses on her married life, economic activities, and literacy. The principal goal of the present article is to show whether she represents a typical medieval common woman or a new type of woman that is a modern woman. Sixteen years old Margherita got married in Avignon in the year of 1376 with Francesco Datini, a 41-year-old Italian merchant. Even if this kind of marriage was not rare, something exceptional in their marriage was that she was a noble woman, while the merchant was a common citizen. Their marriage reveals that the boundaries between the noble and the common merchants have not been absolute. Margherita’s infertility was one of the main causes for the conflict in their married life. However, their perception of infertility and its treatment was scientific and reasonable, being different from many other contemporary people who used to consider infertility as a curse wrought by God or the devil’s diablerie. The major activities of married women in Medieval European societies were housework. The churches and the priests preached during the Renaissance period that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married women was to do well in their housework. But her role was not limited to housework. She was engaged in diverse commercial activities, payment of salaries, giving loans and obtaining its receipts, etc. Her perception of interest was different from the common opinion that any interest was considered as a sin. Margherita decided to learn reading and writing in her 20s, even if reading and writing were male monopolies at that time from which women were excluded, and continued to improve her literacy for long time. This suggests that she had a sort of self-consciousness against the general perception of female literacy. In summary, Margherita was different from her contemporary common women and their general perception of several matters such as infertility, interest-loan, etc. This distinction seems to derive from the environments of Italian cities where she had lived in the 1400s. In effect, Italian cities like Florence was in transition into the modern world at a much earlier time than contemporary rural areas or other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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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빵 이야기 연작>을 통해 본 15세기 이탈리아 귀족들의 전원생활

구지훈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제42호 2018.09 pp.7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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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벤티볼리오라는 마을에 있는 작은 성의 한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는 <빵 이야기 연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 흥 미를 끈다. 본 작품의 미술사적 해석으로는 15세기 말, 이탈리아 북부 포 강 유 역에서 나타났던 볼로냐-페라라 지역의 화파, 특히 프란체스코 델 코사의 영향 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이지만 정치,사회적 해석은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우선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귀족들은 밀과 곡식을 수확해야하는 여름에는 전쟁도 멈추고 곡식 확보에 열성을 다했고 이 시기를 보다 쾌적하게 보내기 위 해 도시 외곽 방앗간이 있는 마을에 자신들의 별장을 지어 여름 휴양과 함께 밀가루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가루와 흰 빵은 도시민들에 게 있어 단순히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의 한 가지가 아니라 도시민과 시골 농민 의 삶을 구분지어주는 하나의 사회적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빵 이야기 연작> 은 이러한 15세기 북부 이탈리아 귀족들의 여러 가지 삶의 단면들을 여실히 보 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Fresco painting worked in a small castle in the town of Bentivoglio, about 20 km north of Bologna, are interesting because it is titled . The interpretation of this work in art history reveals the influence of Bologna - Ferrara , especially by Francesco del Cossa , which appeared in the Po River basin in northern Italy at the end of the 15th century. However, the political and social interpretation of this fresco series is more significant. First, during the Renaissance period, the Italian nobles had to harvest wheat and grain. In the summer, the war stopped and the enthusiasm for grain was secured. In order to make this period more comfortable, the villagers built their own villas in the towns with the outskirts of the city, and that the power has been exhausted. Wheat flour and white bread were not just one of the foods on the table, but a social symbol that distinguishes the lives of urban and rural peasants. The Story of Bread is a good example of the various aspects of life in these nineteenth-century Italian no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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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르티노, 15세기의 ‘위대한’ 요리사

라영순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제42호 2018.09 pp.10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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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오늘날의 ‘이탈리아’에서 15세기에 활동했던 요리사 마르티 노의 삶을 살펴보고 그의 이름으로 남겨진 요리 필사본들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오늘날 스위스의 칸톤 티치노에 속하는 작은 마을 출신인 그는 밀라노 에서 요리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아퀼레이아 대주교 로도비코 스카람 피 메자로타와 용병대장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요리사로 활동하며 일련의 요 리 필사본들을 제작했다. 이후 이 필사본들이 담고 있는 요리법들이 당대의 인 문주의자인 바르톨로메오 사키, 일명 플라티나의 책에 포함되어 유럽 각지로 확 산되며 마르티노의 요리법 또한 널리 전파된다. 이것은 보다 발전한 요리책으로 나아가는 흐름의 변화 및 새로운 사회로 점차 전환하는 당대 유럽의 모습을 보 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티노의 필사본은 당대의 유럽을 새로운 접경의 관점 에서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This article aims to trace the life of Maestro Martino, who worked as a cook in the 15th century in today’s ‘Italy’, and to examine the meaning of his recipe manuscripts. As a native of a small mountain village in today’s Canton Ticino in Switzerland, he started his career as a cook in Milan. He served later in Rome as a cook for Cardinal Patriarch of Aquileia, Lodovico Scarampi Mezzarota, and he also served as a cook for Milanese captain of the mercenary, Gian Giacomo Trivulzio. His five remaining recipe manuscripts were written in vernacular Italian, but most of his recipes were included in the first European gastronomic printed book, De honesta voluptate et valetudine(On Honest Pleasure and Good Health) . The author Bartolomeo Sacchi, called Platina, acknowledged the source of his recipes too. Thanks to the book’s success throughout Europe, the recipes of Martino were also widely spread. This shows a change for more advanced cookbook(s) and a gradual shift to a new society in Europe. At the same time, Martino’s manuscript also challenges understanding of Europe from a new perspective as contact z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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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앙리 드 나바르의 개종과 그 의미

박효근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제42호 2018.09 pp.14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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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나바르의 개종은 “파리는 미사를 드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선언처럼 프랑스 역사에서 종교적 관용과 정치적 세속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앙리 드 나바르의 개종이란 16세기 종교내전이 초래한 분열을 극 복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 중 절대왕정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전면에 등장하 게 된 역사적 분기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말 프랑스 종교내전 시 대, 위그노와 리그, 그리고 ‘폴리틱’이라 불리는 세 분파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왕권과 종교의 역할, 그리고 국가운영의 방법론에 있어 서로 다른 철학을 지니 고 있었다. 위그노와 리그 세력은 각자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바탕으로 왕의 권 위를 축소하고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혼합군주정을 제안했다. 반면, 폴리틱이라 불렸던 ‘충성파’는 내전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전통의 권위를 갖 춘 강력한 군주가 이끄는 절대군주정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결국 앙리 드 나바 르가 개혁파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건은 왕권의 권위와 전통의 힘, 그리고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특권계층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로 작용했 다. 결과적으로 앙리 드 나바르의 개종은 근대적 왕권개념의 형성과 절대왕정의 출현을 예고한 은밀한 출발점이라 하겠다.
The conversion of Henri de Navarre has been interpreted as a symbol of religious tolerance and political secularization in French history, as the declaration “Paris is worthy of a mass”. However, the conversion of Henri de Navarre needs to be approached as a historical turning point where the absolute monarchy emerged in front of various alternatives to overcome the confusion caused by the religious civil war in the 16th century. At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there existed three factions, the Huguenot, the League, and the ‘Politique’, which had different philosophies in the role of kingship and religion, and in the methodology of state administration. The Huguenot and the Leagues proposed a mixed monarchy to reduce the authority of the king and strengthen their religious identity. On the other hand, the ‘loyalist’, called the Politique, has invented a new political structure: the absolute monarchy. The loyalist party believed that only a powerful kingship with a traditional authority could overcome the turmoil of the civil war. In the end, Henry de Navarre ’s conversion to Catholicism served as a catalyst for the power of the kingship, the power of tradition, and the unity of a group of full - fledged supporters. As a result, Henri de Navarre's conversion is a secret starting point for the formation of the concept of modern kingship and the emergence of absolute monarc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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