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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17집 (10건)
No
1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가 표상한 <혼합민족>논리와 ‘臣民’

전성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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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는 차별은 역사적 조건 작용 즉 경우의 문제로서, 특히 ‘귀천’에 관한 인식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 또한 과거의 ‘경우’에 의해 편제된 또 하나의 재편 논리라고 보았다. 그러한 측면에서 기타는 ‘차별’이 경우상의 재편논리가 경우의 ‘권력’에 의해 형성되는 히에라르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타는 더더욱 차별이라는 범주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학지의 편제라는 ‘근대적 특징’과 연동시켜 ‘과학적 학지’로 산출해 낼 필요가 있었다. 기타의 기존적 역사과인 ‘문헌’중심주의 특히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읽어내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역사학’ 영역에 근대적 과학의 학지인 고고학적 발굴품의 해석 논리를 끌어들이면서 ‘역사학 담론 편제’에 ‘균열’을 일으키며, 새로운 학지의 개념을 정의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기타의 인식과정은 결국 일본민족 속에 존재한 아이누와 에미시가 일본민족과 혈액으로 혼효하고 동화했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천황이라는 정점을 제시하면서, 일본민족의 ‘정신세계’을 통한 일본을 주조해 냈다. 그와 동시에 ‘차별’적 존재로서의 동북지방의 에미시는 ‘일본민족으로 혼효되지 못한’ 이인종으로 선언했고, 천황의 은혜에 포섭되지 않는 ‘차별적 인종’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또한 식민지 조선을 연동시켜 일본민족으로 혼효되어 천황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일본인’으로 빚어냈다.
喜田貞吉は‘区別’による‘差別’は近代の学問的認識の上で成立した偶然なるものだと考えた。つまり、歴史学の論理展開の中で、偶然にそのような境遇によって、差別されるようになったと考えた。ところが喜田はこのような理論を自覚していたために、この観念を作為することをも想定することができた。つまり、喜田は差別という概念を使いつつ、日本の『記紀』神話に現れてくるエミシの概念を取り出して、考古学と人類学の人種論を活用し、新しく「日本民族論」を作り出し、その延長線上で「日本臣民」論を導き出した。ここには、喜田の独特な論法が活用され、脱歴史学的な立場をとっていた。言い換えれば、喜田は既存の歴史学的認識をもちつつも、考古学的実証物の証拠とか、人種学的人種解釈の論法を「援用」していた。これはトランスポジションの思想であり、反歴史学的な見地でもあった。しかしながら、喜田は「血」の混合をもって「濃い薄い」との違いをもって、日本民族になる人種と「異種族」として残る人種の境界を再設定し、つくり直した。そのうえ、天皇の恩恵を民族を「臣民」と創出していった。これいは、差別を取り消しつつも、新しく臣民を作り出すことで、新差別を生むオリエンタリズムの眼差しが隠れていたのであろう。

5,500원

2

역사의 재현과 ‘역사영화’ 제작운동 - 미조구치 겐지의 <겐로쿠 츄신구라>를 중심으로

강태웅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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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한 장르로서 영화탄생 기부터 제작되어 온 시대극은가부키의 시대물에서 파생된 말로, 현재가 아닌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가리킨다. 주로 칼싸움하는 장면에 많은 공을 들여 만들어져 왔으나,1930년대 후반부터 이전의 시대극과는 다른 '역사영화'를 제작하려는 주장이일부 평론가와 감독에 의해 제기된다. '역사영화'운동은 기존의 싣대극에서 시대 고증적인 인식이 결여된 점을 비판하며, 등장인물의 복식, 말투, 걸음걸이와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史實)에입각하여 철저한 재현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본고는 대표적인 '역사영화'라 할 수 있는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겐로쿠 츄신구라>를 중심으로 '역사영화' 운동이 어떻게 스크린에 표출되었는지와 운동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의미와 그 한계를 일본주의와 근대성의 추구가 뒤섞인 모습을 다야한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하였다.
日本映画のひとつのジャンルとして映画誕生の時から製作されてきた時代劇は、歌舞伎の時代物から派生した言葉であり、現在ではない以前の時代を背景にしている映画を指している。主に殺陣のシーンを見せ場として作られて来たが、1930年代後半から、以前の時代劇とは異なる、「歴史映画」を製作しようとする主張が一部の評論家と監督によって提起される。「歴史映画」運動は、既存の時代劇において時代考証の認識が欠けていることを批判し、登場人物の服飾、話し方、歩き方、そして、セットに至るまで、歴史的史実に基づいて徹底的に再現しようとした動きであった。本稿は、代表的な「歴史映画」である溝口健二監督の<元禄忠臣蔵>を取り上げ、「歴史映画」運動がどのようにスクリーンに表出されていたか、そして、その運動が持っている時代的意味とその限界を日本主義と近代性の追求の錯綜と融合的な側面から追究してみた。

4,800원

3

'사회과학ㆍ혁명논쟁’의 네트워크 - 일본자본주의논쟁 (1927-1937)을 중심으로

조관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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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논쟁 및 NK과 PD의 탄생은 이미 1920~30년대그리고 1945년~50년대 동아시아의 막스주의 진영에서 경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30년대와 8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논쟁은 일본의 네ㅡ워크 속에서 진행된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고찰함에 있어 그 기초적인 수단으로본고에서 전쟁 전의 일본자본주의논쟁(1927-1937)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논쟁에 참가한 연구자들이 일상 속에서 그 사회과학 / 혁명이론을 넓히기 위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들의 네트워크는 대학, 연구소, 출판사, 민중단체 등 국경을 넘다들며 구축되어논쟁을 확대 재생산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본고에서 말하는 네크워크란 단순한 인적인 연계 뿐 만이 아니라,사상과 운동의 결합, 그리고 양자의 괴리 및 세계사적인 연쇄를 모두 포함하여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네트워크를 움직인 사상과 운동은 자본주의적인 이념을 추구하였으나, 네트워크자체는 자본의 힘이 작용하는 공공의 장 속에서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 갔던 것이다.
1980年代韓国における社会構成体論争および、NLとPDの誕生は、すでに1920-30年代、そして1945-50年代東アジアのマルクス主義陣営において経験されたものである。また1930年代と80年代韓国で起った論争は日本とのネットワークの中で進行したものである。筆者はその歴史的な全体像にアプローチするための基礎的な作業として、本稿で戦前の日本資本主義論争(1927-1937)について考察した。とくに論争に参加した研究者たちの日常から社会科学/革命理論を広めるネットワークが形成されていた事実に注目した。そのネットワークは大学、研究所、出版社、大衆団体、国境を往来しつつ構築され、また論争を拡大再生産する装置であった。ここでいうネットワークとは、単なる人的連携だけではなく、思想と運動の結合および乖離の場であり、世界史的な連鎖をも全体的に網羅する概念である。ネットワークを動かした思想と運動は、反資本主義的な理念を追求したが、ネットワーク自体は資本の力が作用する公共的な場の中で大衆と疎通する道を開いていたのである。

5,700원

4

1930년대 일본 농민의 만주 이주와 농법 개량

김영숙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6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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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설을 위해 일본에서는 자국민의 만주이주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런 가운데 군사적인 필요와 함게 농업생산력 향상이라는 이유에서 농업이주가 주목을 받게 된다. 일본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고, 토지부족에 시달리는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인의 만주이민은 육군성과 척무성의 주도 하에 정책적으로 성립, 시행된다. 1930년대 일본인의 만주농업이민은 미국 등 주권국가로의 이민 또는 식민지이주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돈을 벌기 위해 나가는 개인적인 목적이 아니라, 만주국의 통치를 강화하고, 소련과의 국경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서 일본 정부가 국가의 정책으로서 시행했다는 다른 점이 있다. 그렇기에 만주농업이민은 특정한 지역사회 또는 촌의 일부를 만주에 이식시키는 분향 도는 분촌이라는 형태로까지 행해졌다. 그 결과 이러한 방식은 일본의 농업문제 해결이라는 근본적인 목적 이외에도 개인의 불안을 해소하고, 일본문화와 생활양식을 만주에 이식시키는 효과를 나았다.
満州事変以後、満州国建設のために日本人の満州移住が重要な問題になった。軍事的な必要とともに農業生産力向上の理由から農業移民が注目された。日本の過剰人口を解消し、農村の土地不足を解決するために、日本人の満州移民は陸軍省と拓務省の主導で国策として成立だれた。1930年代日本人の満州農業移民は、アメリカなど主権国家への移民あるいは植民地移住とは性格が異なった。出稼ぎの個人的目的ではなく、満州国の統治を強化し、ソ連との国境地域を防御するという政治的軍事的目的から日本政府が国策として推進した事業であった。 満州農業移民は、ある地域社会あるいは村の一部を満州に移植させる分郷または分村という形で行われた。この方式は日本の農村問題を解決するという根本的目的以外にも個人の不安を減らし、日本文化と生活様式を満州に移植させる効果を表した。 北海道開発に導入された西欧大農場制が再び満州に持たされ、一部成功した場合もあった。しかし、100万戸農民移民の計画を達成する前に日本は戦争で敗北し、日本人農民の農法改良の試みはまだ満州で影響力を発揮できないまま終わった。

5,400원

5

Japan’s Inter-ministerial Sectionalism and Coordinating Mechanisms in the 1920-1952

Kim, Yoon-Ho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8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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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관료시스템을 지닌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정부의 부처이기주의는 성청(省廳)들간의 강한 독립성과 경쟁성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후 지속되어온 일본 중앙정부 관료제의 오래된 관습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1920년에서 1952년까지의 전반적 일본 관료제의 변천과정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일본정부의 부처이기주의의 기원과 부처 간 갈등상황에 있어서의 조정 메커니즘에 관한 분석에 그 연구목적을 둔다. 본 연구결과에 의하면, 1) 1920년대는 강력한 관료엘리트그룹의 등장으로 부처이기주의가 팽배하였으며; 2) 1930년대는 기획원과 같은 파시스트 군국주의자 지배하의 감독기관의 존재로 인해 부처 간 갈등이 약화되었으며; 3) 2차대전의 막바지로 다가감에 따라 일본의 군사력도 분산되었고 따라서 기존 감독기관들이 행사하던 강력한 조정기능도 미약하게 되었으며; 4) 2차대전 종전후 일본을 지배한 미국 GHQ는 경제안정원과 같은 내각기관에게 부처 간 조정기능을 할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부처이기주의도 어느 정도 약화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결과들은 일본의 부처이기주의를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리더십과 내각수준에서의 조정 메커니즘이 중요한 기능을 함을 암시한다. 부처이기주의를 완화시키기 위한 다른 대안들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Japanese government has been well known for its strong bureaucratic system since prewar-period. Particularly, numerous scholars identify sectionalism in Japan as the “old traditions” of intense independence and of rivalry among ministries and it has persisted since the prewar era. This paper investigates the origins of sectionalism and the coordinating mechanism of inter-ministerial conflicts (or fragmentation) reviewing the history of Japanese bureaucracy between 1920 and 1952. According to the analysis, this research identifies followings: 1) the 1920s was a time when sectionalism was pervasive over the entire bureaucracies due to the emergence of powerful elite group, ‘examination men’; 2) in the 1930s the super agencies, such as the Planning Board, weakened the inter-ministerial conflicts exercising enormous power championed by the fascist militarists; 3) as the military force waned at the end of the WWII, superagencies’ coordinating power seemed to also fade out; and 4) after the Japan’s defeat in the war, GHQ entrusted some Cabinet agencies, such as Economic Stabilization Board, with their tremendous power and allowed them to play a role of coordinating ministries, which probably weakened sectionalism. These results imply centralized leadership and the Cabinet level’s coordinating mechanism are important to alleviate the extent of ‘sectionalism.’ Other alternatives for ministerial coordination are also discussed.

6,700원

6

역사적 관점에서 본 한일문화교류의 성격과 상호관계의 변화

이지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11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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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문화교류의 기본적인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최근의 자본과 시장의 글로벌화 및 문화의 국경을 초월하는 현상에 의한 효과그리고 그 외에도 오랜기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양국의 문화교류의 역사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왕조/에도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기간을 4단계 (전근대, 근대, 현대, 최근)로 구분하여, 각 시기의 특징을 고찰해 보았다. 전근대기 조선은 중국 중심의 유교문명과 화이사상에 기초하여, 일본을 야만, 스스로를 문명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 이러한 관계가 역전되어 서구중심의 근대문명과 적자생존이라는 관념을 보다 빨리 도입한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 여려나라를 야만이라고 보게 된다. 또한 문명화를 위해 일본 스스로가 제국주의화 하여 타이완 및 조선을 식민지화한다. 한편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도 한국은 반일내셔널리즘, 일본은 무관심이 상대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였다. 즉, 서로를 <문명과 야만>으로 인식하는 우열관계의 반복과 그 연장으로서의 <적대와 무관심>이 긴 세월 동안 주요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 후, 한국의 민주화와 88서울올림픽, 경제성장, 해외여행자유화 등의 변화와 탈냉전, 정보화가 진전함에 따라 한일문화교류의 규모와 내용은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서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세, 대중문화의 비중확대와 글로벌화의 일상화 및 정보화에 의한 국가간 교류와 소통이 비약적인 발전을 꾀하는 등, 한일의 세대간 문화의 격차해소가 일반화 되었다. 그 결과, 상대국에 전근대나 근대의 낡은 우열개념은 존재한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는 서브컬쳐화하여, 지배문화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오히려 과거의 <문명과 야만>의 우열전쟁은 문화적인 취향과 문화상품간의 매력 경쟁으로 대체되고 같은 기반위에서 경쟁하기 위해 이질성은 약화된다. 또한 국경을 넘나드는 문화의 시대에는, 문화컨텐츠의 국적성은 약해지며 탈국정성이 빈번히 논의되기에 이르나, 국가간의 제제가 존속하는 한 국정분류 및 같은 국적을 가지는 아이템에 대한 연결효과도 없지지니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기반 하에, 문화내셔널리즘과 문화산업의 확장, 애니메이션적인 소비주의와 타자표상의 증식, 변용이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이해, 공감, 연계라는 길이 열릴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韓日文化交流の基本的な性格と特徴を理解するためには、最近の資本と市場のグローバル化及び文化の越境現象の効果のほかにも、長年密接な関係であった両国の文化交流の歴史について検討する必要がある。この論文では、朝鮮王朝/江戸時代以降現在までの期間を、四段階(前近代、近代、現代、最近)に区分し、その特徴を確かめることにした。 前近代において朝鮮は中国中心の儒教文明と華夷思想に基づき、日本を野蛮、自らを文明とみなす関係であった。しかし近代に入った後は、その関係が逆転し、西欧中心の近代文明と適者生存の観念をいち早く導入した日本側が朝鮮やアジア諸国を野蛮とみなした。また、その文明開化のために自らも帝国主義化し、台湾や朝鮮を植民地化した。第二次世界大戦後から1980年代後半にいたるまでの期間も、韓国側は反日ナショナリズム、日本側は無関心が相手に対する基本的な態度であった。すなわち、お互いを<文明/野蛮>とみなす優劣関係の繰り返しと、その延長としての<敵対/無関心>が長年の主な傾向であった。しかし、その後、韓国の民主化やソウル五輪、経済成長、海外旅行自由化などの変化、脱冷戦、情報化が進むにつれて、韓日文化交流の規模と内容も大きく変わった。そして、等身大の相手を理解しようとする姿勢、大衆文化の比重拡大と越境現象の日常化、情報化による国家間交流と疎通の飛躍的な発展、韓日の世代文化の格差解消という面が一般的になった。   その結果、お互いの国において、前近代や近代の古い優劣観念、またはその最新の変種は依然として存在するが、基本的にはサブカルチャー化し、支配文化になる可能性は高くない。かえって、過去の<文明/野蛮>の優劣争いは、文化的嗜好、文化商品同士の魅力の競争に代り、同じ基盤の上での競争になっため異質性は弱化する。また超国境的文化の時代には、文化コンテンツの国籍性は弱まりつつ、脱国籍性が盛んに議論されているが、国家間の体制が続く限り、国籍分類、そして同じ国籍を持つアイテムにおいての連繋効果も無くなることは無い。その基盤のもとで、文化ナショナリズムや文化産業の拡張、マニア的な消費主義や他者表象の増殖・変容が進行しているが、それだけではなく、人と人との理解、共感、連帯への道が開けることも可能である。

7,000원

7

北朝鮮と日本革新運動 - 日本における日韓会談反対運動の発生(1960~62年)

박정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14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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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에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북한의 대일 통일전선전술과의 연관 속에서 해명하고, 이를 통해 북한과 일본 혁신운동 간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일본혁신운동의 최고조였던 안보투쟁의 연장이었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이 점은 한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었고, 이 때문에 한일 양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별개의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종주국, 즉 중소 양국과 직접적인 연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매개한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실제로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전개는 대일인민외교 또는 통일전선전술에 매우 밀도 높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관련한 기존연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지점이기도 하다. 본고는 북한과의 연관 속에서 일본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발생과정을 실증적으로 검토함으로서, 그 것의 기원과 고유의 역학을 드러내고자 했다. 본고에서는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이 한일 양국을 대상으로 전개되어 온 만큼 한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과의 관계 또한 북한을 매개로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일한대련의 한일회담 분쇄투쟁에서, 일조협회의 블럭연쇄집회, 국민회의의 한일회담반대통일행동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한반도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 내 혁신운동의 연대조직 및 그 운동의 구체적 양상을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 일본공산당과 일본사회당의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틀이 형성되었다. 안보투쟁이후, 일본 혁신운동 진영에 있어 통일전선이 부활 및 쇠퇴 또한 동일한 맥락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日本における日韓会談反対運動の展開過程を北朝鮮との関係という視点から再構成してみた。その絶頂ともいえる日韓会談反対統一行動は安保闘争の熱気を再起させようとした革新運動の最後の試みであったともいえる。そこには、北朝鮮の統一戦線戦術と絡み合いながら、関連連帯組織の発生、進化および分化が行われた。北朝鮮が主に日朝協会を通じて実現させようとしたのは日韓会談反対のための日本国内における統一戦線運動の復活、すなわち国民会議による日韓会談反対統一行動の再稼動であった。そこには日本共産党が、朝鮮労働党との国際共産主義運動の連帯という形で、もっとも積極性を見せていた。しかしその後の国民会議の日韓会談反対統一行動は非連続性と浮き沈みを繰り返した。革新系の統一戦線が再結集されるのは1965年に行われた日韓基本条約が妥結されてからである。いわゆる日韓基本条約批准阻止闘争は、安保闘争以来最大の動員力を示したが、国民会議はすでに解体されており、北朝鮮との連携戦線も崩れたままであった。その背景には中ソ紛争と社共対立として現れた国際共産主義運動の分裂と日本における統一戦線運動をめぐる激しい対立があった。こうした分裂と対立は朝鮮労働党と日本共産党の密着、北朝鮮と社会党との乖離を伴い、その結果、北朝鮮の対日統一戦線戦術は失敗に終わった。これに至るまでの経緯を踏まえながら、以下関連したいくつかの議論の示唆点をまとめる。本稿で明らかになった北朝鮮と日本共産党の関係は国際共産主義運動の再編が日朝関係に如何に投影されていたのかを物語る。日本共産党と朝鮮労働党は中ソ紛争の渦中において同じ立場を貫いたが、国際共産主義運動の分裂はいずれ両党の利害関係にも変化をもたらす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を予言させる。一方、北朝鮮と社会党の関係も中ソ関係の影響を受けていた。ただし、社会党は日本革新系を代表する政治勢力であり、第一の野党でもあった。社会党の日韓会談反対運動は日本共産党のそれに比べ消極的なものであったが、日韓基本条約に対する社会党の一貫した批判的な態度は、同党の朝鮮半島政策が次第に北朝鮮への傾斜する可能性を秘めるものであった。社会党と日本共産党が日朝友好運動という共通の目標の下で結集した場こそ日朝協会であった。日朝協会内部の両党の対立と勢力関係の変化は日朝友好運動の進退として現れた。1965年の日韓基本条約を境に、日朝協会における両党間の勢力均衡は崩れ、その間の日朝友好運動の成果、なかんずく各部門別日朝間の交流の場は閉鎖されつつあった。これは日朝間の「人民連帯」の崩壊にまでつながった。

5,400원

8

『源氏物語』에 나타난 加持 - 그 樣相과 意義에 관하여 -

이미령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16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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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겐지모노가타리』에 나타난 加持의 양상과 그 역할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았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에게 있어 淨土敎가 來世의 淨土往生을 담보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면, 密敎의 加持는 지극히 현세적인 소원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 그리고 당시 의학의 미발달로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만 했던 출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加持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모든 불행의 원인으로 주목받았던 모노노케의 퇴치를 위해서도 강력한 加持를 진행하여 구원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터무니없는 儀式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대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이 외부에 있건 내부에 있건 간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불교의 加持祈禱와 修法을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상은 『겐지모노가타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모노가타리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승려들의 수많은 加持를 통해 신체적, 정신적 치료를 받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근본원인인 모노노케의 調伏을 통해 안정을 되찾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결국 『겐지모노가타리』에 나타난 加持는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헤이안시대의 習俗을 반영한 것임과 동시에 加持라는 행위를 통해 등장인물들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을 제거하고, 이를 통해 心身의 淨化를 달성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本稿は『源氏物語』の中で数多く行われている「加持」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る。加持の効験による疾病治癒、安産、物の怪の調伏の三つに分けて考察した。 まず、加持は物語の中では手法・祈祷と大抵同じ意味で使われており、元々は仏の加護という意味であったが、密教では手に印契を結び、口には真言を唱え、心に仏・菩薩を観ずると、行者は仏と一体になり、仏の超自然的な力が現われるものを意味する。そして仏の力を現すために、加持を担当していた僧侶たちは色々な密教の道具、たとえば金剛杵などを使って五壇法や護摩法という仏教の儀式を行ったのである。 平安時代の人々にとって加持は、ごく現世的な念願を成し遂げる手段であった。即ち、身体的・精神的な疾病、そして当時、命をかけて挑戦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出産の脅威を免れるために加持が行われたのである。また、物の怪の退治のためにも頻繁に行われた。こういう時代像は『源氏物語』にもそのまま反映されて、物語の登場人物たちは強力な加持を通じて身体的・精神的な治療を受けており、さらに全ての不幸の原因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物の怪の調伏によって安定を取り戻している。 結局、『源氏物語』に現われた加持は、作品の背景になっている平安時代の習俗を反映したものであると同時に、加持という行為を通じて登場人物たちに迫った不幸の原因をよりたやすく除去する、大事な仏教儀式である。また、こういう加持は心身の浄化を達した人物たちが物語の中で新たな人生を生きてゆくのに大切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

5,500원

9

나쓰메 소세키의『도련님』에 나타난 학벌의 어두운 그림자 고찰 -「아카샤쓰(赤シャツ)」를 중심으로-

權赫建, 朴惠敏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18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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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시대는 제국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의식이 팽배하여학력취득에 대한 작렬한 경쟁이 개막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동경제국대학의 발전사와 『帝國文學』 아카샤쓰의 별명 등을 종합적으로살펴보건데, 아캬샤쓰는 동경제국대학출신의 엘리트 지식이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메이지정부는 학벌에 의한 급여의 차, 신분의 벽 등을 만들었으나, 이러한 제도는 제국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열등감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제국대학을 졸업 여하에 의해 월급과 지위가 정해저 그것이 권력화해 가는 데 대한 경계와 학벌에 의한 승진의 격차, 학교라는 직장에서 조차 이루어지는 업무 내용의 격차를 생산해 내는 제도는 교사에 정신적인 불평등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나쓰메 소세키는 제국대학이라는 하벌의 폐해와 불평등, 중학교라는 직장내에서 학벌이 권력화하고 남용되는 모습, 학벌과 교감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적욕망을 충족시켜 나가는 근대 엘리트 지식인의 어두운 면을 아카샤스라는 인물을 통해 과감히 부각시키고 있다고 판단된다.
明治時代は帝國大學を卒業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學閥取得の熾烈な競爭が幕開けした時代だ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東京帝國大學の發展史と『帝國文學』、赤シャツのあだ名などを総合的に考えると、赤シャツは東京帝國大學出身のエリート知識人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明治政府は學閥による給料の差、身分の壁などをつくったが、このような制度は帝國大學に入れなかった人々には劣等感と精神的ストレスを与えた。漱石は帝國大學を卒業したかどうかによって給料や地位が決められ、それが權力化していくことを警戒しており、學閥による月給と昇進の格差、学校という職場での勤務內容の格差を生み出す制度は敎師に精神的に不平等を感じさせていることを『坊っちゃん』を通して作品化したと考えられる。さらに、漱石は帝國大學という學閥の弊害と不平等、中學校という職場內で學閥が權力化し濫用されている様子、そして學閥と教頭の權力を利用して、私的欲望を満たそうとする近代エリート知識人の暗い影を赤シャツの言行を作品化することで果敢に浮かび上がらせたと考え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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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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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일본학DB <아사히신문 외지판(朝日新聞外地版)〉기사명 DB - 1935.12~1936.6 -

서정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7집 2010.12 pp.1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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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 외지판 기사명DB〉는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학DB 사업의 하나로, 연구소장이 중심이 되어 기획, 추진하였다. 연구소 연구보조원들이 분류 및 입력 작업을 수행하였다. 1차 입력을 마친 후 두 차례에 걸쳐서 오타와 판독이 어려운 글자 등에 대한 자체검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전체 구성에 대해서는 심재현 연구원이, 데이터 입력창의 개발과 관리는 최형섭 연구보조원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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