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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1집 (8건)
No
1

人々の移動と帝国の不安 - 沖縄をめぐる危機の文化について

冨山一郎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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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매우 소박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과연 제국의 문제에 있어 문화통합이라고 할 때,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규범이 존재하는 것일까?인도출신의 비평가 호미 바바는 대영제국의 인도지배에 대해 언급하며, 한편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규범으로 표방하는 국가가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으로서 타자를 지배할 때 식민지 또는 식민지주의가 그 보편적 규범을 충족할 수 없다는 것에서 전제적인 통치가 정당화한다고 언급하고 이러한 지배를 ‘하나에 이르지 못함과 동시에 이중적이다’(less than one and double)고 하였다. 그렇다면 대영제국에 비해 국민국가 성립과 동시에 제국으로써 지배 범위를 급격하게 확장해간 일본제국의 경우, 특히 90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류큐를 통합하고 동시에 아이누 민족의 토지(아이누・모시리)를 홋가이도로써 획득하고, 이후 대만, 조선, 남양제도, 중국동북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대동아 공연권으로 치달은 일본제국에 있어 문화통합의 규범은 과연 존재하였던 것일까?특히 점령과 통치가 확대되는 속에서 일본제국은 지배하는 타자를 정의하고, 동시에 지배자인 스스로에 대해서도 발견하기 위해 수행되었던 일본 근대의 학지문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생활개선, 방언논쟁과 같은 일상생활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더 오키나와 인류학의 역사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5,500원

2

植民地ㆍオリエンタリズム・ポストモダン ― 周辺からみる帝国の交錯

陳永峰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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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냉철하게 정의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는 국민에게 글로벌화시대를 살아 나갈 저력은 없다. 이러한 이해가 바른 것이라면 정치 뿐 아니라 경제적ㅇ로도 국제사회에서 고립하고 국내적으로는 막다른 골목에서 고뇌하는 오늘날의 타이완 사회의 모습은 필연적 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특히 중국이 금속도로 강해지며 세계사적 복권을 노리고 있는 조류 속에서는 더욱 현저하다. 대만은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상대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한 채 근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는 대만이 100년 이상이나 ‘다중적식민지화’에 의한 근대화 과정을 거쳤다는 역사적 진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만은 오래 전부터 중국의 영향권아래에 있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 의해 일본제국의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9년 중국내전에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망명하게 되고 부터는 미국에, 그리고 오늘날에는 다시 중국을 통해 세계와 이어지려고 하고 있다. 미크로역사에서 보자면 대만은 동(대륙적・내향적・정치적)과(해양적・개방적・경제적)역사의2대 조류의 교차점에 위치하며 끊임없이 양쪽에 의해 이끌림을 당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동도 서도 아니라는 딜레마 속에 대만은 속해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대만의 역사적 노정을 주변국과의 관계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향후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만, 한국, 일본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시사하고자 한다.

5,100원

3

만주개척단 영화<오히나타 마을(大日向村)>을 통해본 만주국의 표현공간

강태웅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4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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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개척단 파견은 1936년경부터 정부와 군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개별적인 이주 보다는 단체이주가 바람직하다고 여겨졌으며 이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로 구성함으로써 현지에서 보다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하여 마을 전체를 이주시키는 ‘분촌’이 고안되었다. 1937년 분촌하여 만주국으로 이주한 나가노현 오히타니마을은 가장 유명한 규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오히타니마을 이야기는 소설로 쓰여지고 연극으로 상연되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41년 제작된 국책영화 <오히타니마을>은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조선에까지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주국에서는 ‘만주인’에게 상연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본고에서는 만주개척단을 다룬 영화가 만주국의 ‘만인’에게 상영금지당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만주국이 갖고 있던 만주문화의 표상이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일본과 공유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음을, 일본영화와 만영의 영화, 그리고 검열자료 등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만영이 추구하고, 보여주려고 했던 영상이 무엇인지를 “만주 스타일”이라는 용어로 수렴하여, 이것과 <오히나타 마을>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만주에 대한 동경보다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떠난 이들의 영화 <오히나타 마을>이, 만주국에 의해서 상상되어진 “만주스타일”과 괴리가 있었음은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상의 괴리의 발견은 만주국이 일본이 만들어낸 ‘가구(假構)’에 불과했음을 반증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1936年から満州開拓団の派遣は、政府と軍によって本格的に推進された。また、個別的な移住よりは、団体移住が望ましく思われた。それは、移住の前から知り合っていた人々が、より現地適応に勝れるという考えからであった。それで、一つの村から集団で移住する「分村」が考案された。1937年に分村して満州国に移住した長野県の大日向村は、一番有名な模範的な事例になった。大日向村の物語は、小説に書かれ、芝居にも上演され、映画にもなった。1941年に製作された国策映画<大日向村>は、日本で大きな反響を呼び起こし、朝鮮においてもその影響が見つけられる。だが、満州国においては、「満人」に上映されることは禁止された。その原因を本稿は、映画と原作との比較、満映の映画との対照、そして、検閲資料の分析を通じて追究し、当時の満州国が求め、見せようとした映像が何かを「満州スタイル」という言葉に收斂して、それと<大日向村>との差異を指摘した。満州に対する憧れよりも、現実的な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移住した者たちの映画<大日向村>が、満州国において想像されていた「満州スタイル」との乖離があったことは当然であろう。

5,800원

4

최승희의 조선무용과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이진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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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식민지출신 무용가 최승희(1911-1969)가 창안한 조선무영이 제국일본의 문화권력과의 관계성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논설화되었는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무용에 대한 논설이 다루어진 시기를 아래와 같은 3 시기로 분류하고 각각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제1기(1926-1945) : 식민지조선의 모던덴서 최승희,제2기 (1933-1937) : 최승희의 조선무용과 제국일본에서의 수용양상제3기 (1937-1945) : 동양의 무희 최승희를 둘러싼 대표적인 동양주의데뷔 초기 조선에서 모던댄서로써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한 최승희는 1933년 이후 일본에서 조선무용이라는 새로운 컨셉과 구미공연에서의 성공을 거쳐 식민지조선을 넘어 제국일본에서 또한 동양전체를 대표하여 서양예술과 경쟁하는 무용가로써 성장하며 제국일본의 문화적 팽창과 함께 그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30년대 중후반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제국에서 식민지조선의 향토문화를 표방하고 있었다면, 오랫동안의 구미공연을 거친 1940년대는 동양무용을 통해 제국일본의 근대적초극, 서양에 대응할만한 동양문화로써 표상되었으며, 최승희는 반서양공간으로서의 동양을 무용을 통해 표현하는 동양의 무희였다. 그러나, 최승희 무용의 기반이 된 조선무용은 1930년대 후반 이후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일본의 대표적 동양주의를 통해 이중적으로 소외됨과 동시에 소유 동양무용으로써 확장되어 변용된, 다시 말해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중심으로 한 동양무용을 추구하고자 하였으나, 제국일본에서 최승희에 기대하였던 것은 ‘일본적인 동양무용’이었고, 이 과정에서 문화적인 딜레마가 나타났다. 더불어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문화권력과 교착하면서 ‘로컬 오리엔트 얼터너티브’를 표상하여 혼성적으로 재구성되었으며, 문화권력을 구축하는 지식인들에게 제국의 문화적 위계질서를 구성하는 예술적 근거로써 제공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승희에게 1940년대는 표면적으로 당대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동아시아 최고의 스타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은 시대이나, 예술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스스로의 기반을 잃게 됨과 동시에 내적 모순과 갈등이 초래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was aimed at considering how Chosun dance created by dancer Choi Seung-hee(崔承喜, 1911-1969) born in colonial Chosun had been changed and discussed in a relation with cultural power of imperial Japan. In order to do that, the author classified three periods as the initial stage(1926-1933): Modern dancer Choi in the colonial era of Chosun, the secondary stage(1933-1937): Choi's Chosun dance and acceptance phase in imperial Japan and the third stage(1937-1945): an alternative Pan-Asianism surrounding dancer Choi in the East and discussed them concretely. Choi was not received well in the early of her debut in Chosun as modern dancer, however, since 1933 she succeeded with a new concept ‘Chosun dance’ in Japan, and throughout successful performances in United States, which let her be a dancer representing the whole East beyond colonial Chosun and imperial Japan and a dancer capable to compete with Western art. She could stand her ground firmly with cultural expansion of imperial Japan. In the middle and later of 1930s, Choi's Chosun dance showed native culture of colonial Chosun but in 1940s after long run performances in Western countries, she could be represented as Eastern culture responding to the West through Eastern dance as beyond modern times as well as an Eastern dancer expressing the East as the anti-western space. Chosun dance which was a base for Choi's performing art, however, was doubly isolated by Western Orientalism and alternative Pan-Asianism of imperial Japan. At the same time, it was expanded and changed as so called Eastern dance. That is, Choi sought Eastern dance based on Chosun dance but what was expected to Choi was ‘Japanese Eastern dance’. In this process, cultural dilemma was revealed. Choi's Chosun dance was reorganized by standing for ‘local-orient-alternative’ by mixture and offered to intellectual who pursued cultural power as artistic base consisting of imperial cultural order of rank. Eventually, though Choi was evaluated as the best then and stood her ground as a star in Eastern Asia in 1940s, however in the light of art inner aspect, that period stood for time having troubles with losing her ground work and inner dilemma to her.
本稿では植民地出身舞踊家崔承喜(1911-1969)が創案した朝鮮舞踊が帝国日本の文化権力との関係性の中でどのように変容されて談論化されたのかにいて考察することを目的にした。このために三つの時期に区分して第1期(1926-1933): 植民地朝鮮のモダンダンサー崔承喜, 第2期(1933-1937): 崔承喜の朝鮮舞踊と帝国日本での収容様相, 第3期(1937-1945): 東洋の踊り子崔承喜を取り囲んだ代案的東洋注意という側面からそれぞれ具体的に考察した。デビュー初期朝鮮で崔承喜はモダンダンサーとしてこれといった注目を浴びることはなかったが、1933年以後日本で朝鮮舞踊という新しいコンセプトと欧米公演での成功を経って植民地朝鮮を越して帝国日本で, また東洋全体を代表して西洋芸術と競争することができる舞踊家に生まれかわりながら帝国日本の文化的な膨脹とともに自分の立地をもっと確固にできた. 1930年代中後組崔承喜の朝鮮舞踊が帝国中で植民地朝鮮の郷土文化を標榜することだったら長期的な欧米公演を経った以後の1940年代は東洋舞踊を通じて帝国日本の近代超極的な, 西洋に対応することができる東洋文化として表象されたし, 崔承喜は反西洋的空間としての東洋を舞踊を通じて表現する東洋の踊り子だった. しかし崔承喜の舞踊芸術の基盤になった朝鮮舞踊は1930年代後半以後西洋のオリエンタリズムと帝国日本の代案的東洋注意を通じて二重的に疏外される同時にいわゆる東洋舞踊として拡張されて変容された. すなわち崔承喜は朝鮮舞踊を中心にした東洋舞踊を追い求めようとしたが帝国日本で崔承喜に期待されたことは ‘日本的な東洋舞踊’であったし, この過程で文化的ジレンマが現われた. これと共に崔承喜の朝鮮舞踊は文化権力との交錯の中で ‘ローカル-オリエント-オルターナティブ’を表象して混成的に再構成されたし, 文化権力を構築する知識人たちに帝国の文化的位階秩序を構成する芸術的根拠として提供されたのだ. 結局崔承喜に1940年代は表面積には当代最高の評価を受けて東アジアのスターとして位置づけされた時代だったが, 芸術内的な側面では自ら自分基盤を忘れてしまう同時に内的矛盾と葛藤を起こす時間だったというのを意味する。

7,600원

5

内村鑑三의 사회개혁과 그 사상

윤복희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9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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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의 사회개혁사상은 초기에 사회주의와 일치되는 지향점을 찾기도 했지만 점점 사회주의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그의 사회개혁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재림사상으로, 나아가 재림운동으로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그런 간조의 행보는 그의 생전은 물론, 그가 유명을 달리하고 20년, 30년이 지나도 일부계층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일본사회의 공감을 부르지 못했다. 그 사실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언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본사람이 종교의 필요를 인정하기까지 50년 걸렸다. 그들이 기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기까지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외국선교사가 전하는 기독교가 아닌, 일본국에서 자생한 기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기까지는 또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주장이 인정받기까지는 빨라도 지금부터 백년 뒤의 일이다. 내 뼈가 무덤 속에서 썩을 무렵, 나는 내가 소원하는 일본인의 각성을 보게 될 것이다. (「백년 뒤(百年の後)」, 1914.2, 『성서지연구』, 전집20, 249쪽)생전에 사회는 물론, 제자들로부터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그가 처한 입장을 인용문이 대변해 준다. 간조의 사회개혁사상과 사회주의와의 넘을 수 없는 차이점, 및 재림운동과의 관련 등은 차후에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기에 본고의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While beginning his employment at the newspaper "Yorozu choho", Uchimura Kanzo mainly presented editorials dealing with domestic and foreign current affairs. Thereafter, carrying on movements against the keeping of concubines and against pollution from the Ashio copper mine, etc., he did try to make direct attempts at social reform, but his editorial activities were still his main means of social reform. Especially through "Tokyo dokuritsu zasshi" and "Seisho no kenkyu", both of which he himself founded, he gradually came to strongly put forth his desire for social reform based on study of the Bible. Since his death, several scholars who have analyzed Uchimura’s unique social reform have discussed the unique elements of his thought. Dohi Akio’s "Nigenron" [Dualism] and Shibuya Hiroshi’s "Enshinteki shakai kairyoho"[Centrifugal Social Reform Method] are representative works. While the two put forth opposing views, it seems that neither can on their own explain Uchimura’s thought. In conclusion, Uchimura’s social reformist thought is a "centrifugal social reform method" predicated upon "dualism". That is to say that while Dohi and Shibuya’s ideas seem at loggerheads, in fact they do explain Uchimura’s thought by acting as completion for each other.

5,500원

6

인터넷 확산 시기의 한일 온라인 커뮤니케이션과 선순환적 교류의 조건

이지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12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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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말부터 2000년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교류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마침 브로드밴드 보급도 급속히 진전되어 인터넷 이용이 대중화 일상화가 실현되게 되었다. 그 결과 문화교류의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이버공간은 기술혁신에 의한 새로운 대화의 장으로 국경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기회의 확대가 상호이해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자동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터넷상에서는 무례한 비난과 배외주의적인 발신이 넘쳐나게 된다. 한월드 게시판 폐쇄의 경우가 바로 넷우익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말살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 쉬리 게시판과 같이 네셔널리스틱한 충돌의 위기를 회피하고 원만하게 교류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그 성공 용이느오서 커뮤니티와 같은 친밀한 관계형성, 넷 분쟁의 경험을 지닌 key person의 존재와 조정능력, 포퓰러, 컬쳐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시판이라는 체널(장)의 성격 등을 들 수 있다. 단, 넷우익에 의한 난임, 게시판공격과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신권을 부여하기 전에 일정한 수속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고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인 레벨에서 인터넷 리터리시 및 다문화주의에 대한 교육이 착실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넷상에서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들으려고 하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양국간의 쟁점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함으로써 넷상에서 종종 대두되는 집단극성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을 약화시켜 숙의 가능한 선순환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communication phenomena between Japan and Korea during the expansion of the internet and to explorer conditions of virtuous cultural exchange. From the late 1990s to the early 2000s, the rapid penetration of the information highway enhanced the cultural exchange at the level of citizens. Cyberspace opens a new field of conversation and gives an opportunity of cross-border communication without physical constraint. However, the extended opportunity does not automatically guarantee a mutual understanding and a more rational communication. We observe uncountable cases of online flaming and conflict due to extreme chauvinism. For example, the definitive closure of HANworld is a symbol of a demolition of communication by the net right. A case of online forum on the film "Shiri" is a counter example that avoids a nationalistic clash and finally finds a harmonious way of cultural exchange. To explain this successful experience, we can count on the making of intimate relations as we see in online communities, the existence of key persons who have know-how on the conciliation of conflict online, and the characteristic of the site dealing with popular culture. In conclusion, to ameliorate the condition of cross-border cultural exchange, we propose some measures to the intrusion and the cyber attack of intentional net right in the site. In the broader context, it is necessary to introduce digital literacy and multi-culturalism in education programs. To make a deliberative communication situation between two countries which have adversary historical background, we should try to attenuate the group polarization tendency observed in online for a by being disclosed to the different perspectives concerning critical issues.
1990年代末から2000年前半に至る時期は、韓国と日本両国の文化交流において画期的な転換期であった。丁度この時期にブロードバンドの普及も急速に行われ、インターネット利用の大衆化・日常化が実現されるようになった。その効果は文化交流の分野にも及んだ。サイバースペースは、技術革新による新しい対話の場であり、国境を越えて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機会を与えた。しかし、コミュニケーション機会の拡大が、相互理解と合理的な意思疎通を自動保証するのではない。返って、ネット上では無礼な非難、排外主義的な発言が溢れる恐れもある。ハンワールドの掲示板閉鎖のケースは、まさにネット右翼による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抹殺を意味する。ただ、映画シュリ掲示板のように、ナショナリスティックな衝突の危機を回避して円満に交流が行われたケースもある。その成功の要因としては、コミュニティのような親密な関係形成、ネット紛争など経験のあるキー・パーソンの存在と調整能力、ポピュラー・カルチャーである映画のことを話す掲示板というチャンネル(場)の性格などを挙げられる。ただし、ネット右翼による乱入・掲示板攻撃のようなことを防ぐためには、発言権を得る前に一定の手続きを通すようにする必要があり、根本的には社会的レベルでのインターネット・リテラシー及び多文化主義についての教育が地道に行われるべきである。そして、ネット上で異見を聞き取ることにより寛容さが高まる、という研究成果を踏まえて、両国間の争点をめぐる様々な意見に馴染む訓練をすることにより、ネット上でありがちな集団極性化 (group polarization)現象を弱化させ、熟議の可能な好循環を求めることもまた必要なことであろう。

7,500원

7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의 성립과 일본의 무형문화재 보호정책

김현정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15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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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이하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이하 ‘보호협약’)에 기초한 제4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조선족농악무’가 중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중국정부는 이에 앞서 국내의 소수민족의 모든 무형문화재를 자국의 ‘비물질문화유산목록’에 게재하고 그 중에서 농악무를 포함하여 아리랑 등의 민요가 조선족의 문화유산으로 포함시켰다. ‘농악’과 ‘아리랑’은 한국의 문화라는 등식을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한국인은 유네스코라는 국제기관에 의해 그것이 타국의 ‘것’으로써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분노와 울림을 감추지 못하였다. 마침 이 시기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문화전쟁’이라는 격한 논의가 펼쳐지게 된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싼 인접국구간의 갈등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정책의 초기의 목적과 이념을 크게 흔들어 놓으며 부작용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상과 같이 그 운영에 커다란 문제를 보이고 있는 유네스코에 의한 무형문화유산 보호정책에 대해 2013년 32회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무형문화유산보호조약’을 중심으로 성립배경과 목적, 변천의 프로세스에 대해 고찰하였다. 특히, 보호 대상의 선별할 국제표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조약이 국가 레벨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한국보다 약 12년 빨리 성립하고 한국의 문화재보호법의 이론적 토대로써 참조 된 일본의 문화재보호법에 기초하여 일본 무형문화재보호제도에 대해 검토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2008년 7월 일본 문화청에서 발표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관한 조약에 대한 대응에 관하여’라고 표명된 일본정부의 방침이 그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식’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의 대표 일람표에 제안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라고 상정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로컬 문화의 다양성을 네셔널한 생활문화를 포함하는 형태로 성립하는 ‘일식’의 제안이 글로벌한 무형문화유산 보호정책과 네셔널한 무형문화재와의 사이에서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Farmers' dance of China's Korean ethnic group was decided to be inscribed on the 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in the fourth session of the intergovernmental committee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UNESCO held in September 2009. Since Korean farmer's dance and music whic his commonly known as the ‘Nong-ak’ have been considered as a Korean cultural heritage without a doubt, the inscription of Farmers' dance of China's Korean ethnic gro up as a Chinese cultural heritage has caused the heated debate on which country owns the culture. It is obvious that the UNESCO convention has brought on this kind of cultural war on the ownership of certain cultural heritages, which is not intended from the very purpose of the convention. In this paper I examine the UNESCO 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focusing on the history and background of establishment of the conv ention and its contents. Secondly Japanese protection system of intangible cultural pr operties is investigated in terms of the history, purpose and means of protection to lo ok at how the UNESCO convention has been accepted or utilized at national level. Fin ally I look into the Japanese response to the UNESCO convention focusing on the first 2008 announcement and the second 2012 announcement of the nomination of WASH OKU; Traditional dietary cultures of the Japanese to the representative list of the conv ention which can be the repetition of Gastronomic meal of the French which was inscr ibed on the representative list in 2010 and implies that the first announcement by Jap anese government has been changed. By this work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first Japanese decision was facile and overbearing which was made without careful consideration about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 UNESCO convention and the Japanese protection act of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which means the task to reconsider prudently each system has been left.
2009年アラブ首長国連邦のアブダビで開催された第4回政府間委員会で「朝鮮族の農楽舞」が中国の無形文化遺産として「人類の無形文化遺産代表一覧表」への記載が決まった。中国政府はこれに先立って国内の少数民族のあらゆる無形文化を自国の「非物質文化遺産目録」にリストアップしており、この中には農学舞のみならず、アリラン等の民謡が朝鮮族の文化遺産として含まれた。「農楽」や「アリラン」等は韓国の文化であるという等式を自明のこととして疑わなかった韓国人たちは、ユネスコという国際機関によりそれらが他国の「モノ」としてお墨付きをもらったことに対し、驚きと怒りを隠さなかった。ちょうどこの時期から韓国と中国との間でいわゆる「文化戦争」のような激しい議論が繰り広げられることになる。このような文化の「所有権」をめぐる燐国同士の葛藤はユネスコの無形文化遺産保護政策の最初かつ究極的な目的や理念とは大きく掛け離れたところでみられる副作用といえよう。本稿は、以上のようにその運営において大きな問題を抱え始めたユネスコによる無形文化遺産保護政策について、2003年第32回ユネスコ総会で採択された「無形文化遺産保護条約」を中心にその成立の背景と目的、変遷のプロセスから探る。特に、保護すべき文化遺産を選別するグローバル・スタンダードに位置づけられ得るユネスコの無形文化遺産保護条約が、ナショナル・レベルにおいてはいかように受容されているか調べるために、韓国より約12年早く成立し、韓国の文化財保護法の理論的土台として参照された日本の文化財保護法に基づく日本の無形文化財保護制度についても検討する。注目すべきは、2008年7月、日本の文化庁から発表された「ユネスコ無形文化遺産の保護に関する条約への対応について」に表明された日本政府の方針が覆され、だれもが予想だにしなかった「和食」をユネスコの人類の無形文化遺産代表一覧表に提案したことである。本稿では、「国家」を一つの共同体と想定し、そのなかの様々なローカル文化の多様性をナショナルな生活文化の中に含み入れる形で成立する「和食」の提案がグローバルな無形文化遺産保護政策とナショナルな無形文化財との狭間で示唆するのは何かについても考えてみた。

6,300원

8

Japan's Economic Crisis - A Lost Decade or More Decades?

Il-Hyun Yoon, Cheol-Gu Kang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1집 2012.12 pp.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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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산업발달을 이룩하였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인한 엔화의 초강세는 경제의 중심축이던 수출산업의 저조를 초래하였고, 이어진 금리인하와 금리인상 조치는 자산거품현상과 거품붕괴를 가져왔다. 저조한 경제성장을 보인 90년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지만 경제지표나 향후전망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20년 이상을 잃고 있다. 2000년대의 경제성장률은 0.7%에 불과해 90년대의 1%보다 저조한 수준이다. 일본의 GDP 대비 국가채무는 꾸준히 상승하여 올해 말 예상채무비율은 238%로 주요국가들 중 최고 수준이며, 현재 외채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국가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및 스페인)의 채무비율보다 월등히 높고, 향후 계속적인 상승이 예상되고 있다. 인구구조는 일본 경제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미 세계최고의 고령화 사회인 일본은 초고속으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출산율 저하로 인한 총국민의 수는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비노동 인구의 수는 급증하고 있다. 정부 관료의 위기관리능력 미숙과 일본의 불안한 정치구조로 인한 강력한 경제구조개혁의 부재도 장기경제 불황의 요인이 되고 있다. 본 연구는 일본 경제위기를 분석하고, 90년 초의 일본과 비슷한 한국의 경제상황을 제시하여 이웃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제언한다.
After experiencing spectacular economic growth and industrial development after the Second World War, Japan plunged abruptly into financial trouble in the early 1990s and since then has suffered a prolonged period of economic recession into the 2000s. The yen's sharp appreciation against the dollar after the 1985 Plaza Accord caused the export sector uncompetitive, leading to a comparatively sluggish growth in the late 1980s. A subsequent interest rate cuts and hikes triggered asset bubbles in 1989 and the bubble burst in 1990, followed by economic stagnation thereafter. A crisis in Japan following the burble burst lasted for the whole period of 1990s with the economic growth rate of just 1 percent per year which is thus called Japan's "lost decade." The Japan's economy has not recovered so far with the annual growth rate of 0.7 percent in the 2000s, and the country have lost not one but more than two decades. The total amount of Japanese sovereign debt is estimated to be 238 percent of the GDP in 2012, the highest among the major countries. The debt ratio is expected to rise over time. Its demographic structure has negative impact on long-term economic performance, with an increasingly large percentage of non-working population of declining national population. Government policy fallacy of handling at the start of the financial crisis and retreat of planned reform measures also contributed to Japan's long-term economic malaise. Korea should learn lessons from neighbor's experience in order not to follow in its footst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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