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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6집 (9건)
No
2

Chinese Dances in Ancient Japan and Korea

Jung-rock, SEO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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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려 시대 이전 한국에 중국에서 전래된 당악 춤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기존의 학설에 의하면, 당악(唐樂) 춤의 전래는 고려시대 송(宋)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시대 일본을 살펴보면, 일본 궁중에 한국에서 전래된 고려악(高麗 樂)과 함께 당악(唐樂) 춤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궁중춤의 전래에 대해 연구해 본다면, 혹 고대 한국에 당악(唐樂) 춤의 존재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수도 있다. 일본의 역사서들은 일본의 궁중악무인 가가쿠(雅樂)가 그 시작부터 한국의 영향을 받고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한국과 일본의 역사서들이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몇몇 당악(唐樂) 춤 작품들이 한국에서 건너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악과 당악의 전래는 752년 일본 동대사에서 있었던 대불개안공양회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해 기존학설과는 다르게 고대 한국에 파진악(破陣樂)과 같은 당악(唐樂) 춤의 존재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한국 춤의 연구에서 있어 고대일본의 춤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고대 일본 공연 예술 연구에도한국의 춤 연구가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This research is animated by a curiosity about a possibility that Korea had the Chinese dance repertoires (tangak) before Koryŏ dynasty. In fact, most of researchers in Korea have assumed that Chinese dances in Korea were transmitted from China during Koryŏ dynasty. However, when we look at the Japanese court, many Chinese dance repertoires (tōgaku) as well as Korean dance repertoires (komagaku) from this period still exist. When we inquire the Japanese court dance, we may find the possibility that the Chinese dances existed in the ancient Korean kingdoms. Japanese historical records show that gagaku started as a result of Korean influence at the beginning of its history. Although Korean and Japanese official records often seem to ignore this fact, the Koreans must have introduced not only Korean dances but also some Chinese dances to Japan. One such result of the transmission is likely to have been the Buddha’s Eye-opening ceremony at Tōdaiji in 752. It suggests that ancient Korea should have the Chinese dance repertoires like Hajinraku. It may be an important discovery which overturns previous theories. In this sense, without investigating the Japanese court dance, ancient Korean dance remains surely hidden in a veil of mystery, and vice versa.

8,400원

3

다이쇼(大正)기 ‘문화주택’의 출현과 부르주아 주거 이데올로기의 형성 : 1922년 도쿄박람회 ‘문화촌(文化村)’ 출품주택을 중심으로

정창훈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5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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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다이쇼(大正)기에 출현한 문화주택이라는 근대 주거의 모델을 통해, 일본 도시중간계급(middle-class) ‘가정(家庭)’의 주거 이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한다. 특히 1922년에 개최된 평화기념도쿄박람회(平和記念東京博覽會) 장내에 전시되었던 ‘문화촌’ 출품주택 14동을 중심으로, 그 내부구조에 대한 건축기호학적(architectural semiotics) 분석을 시도하고자한다. ‘문화촌’에서의 전시는 그것이 대중에게 최초로 선보여진 이벤트로서 ‘문화주택’이라는 부르주아 주거양식의 형성에 있어 핵심이 되는 계기였다. 그 14동의 모델 하우스의 구조의 의미론적 차원을 분석함으로써,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코드들을 파악해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에 따라, 문화주택을 기획한 개량주의자(reformers)들의 의도가, 기존의 생활을 폐지하고대중일반의 생활을 ‘서구보편’이라는 새 기준에 맞추고자하는 계몽적 기획에게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남성인 당주(노인)이 주재하던 ‘제가(斉家)’에서 주부가 중심이 되는 ‘가정(家政)’에의 전환, 대가족의 ‘의식본위(儀式本位)’적 가족윤리에서 도시 핵가족의 ‘가정(家庭)’적 가족윤리로의 전환, 그리고 전통적 예의범절에서 근대적인 매너로의 전환을 의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화주택이란 서구의 근대가정학을 모토로 삼아 만들어졌으며, 그것의 방법론을 실천할 일종의 실험장(testing-ground)로서 제안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의 탄생은 서구 부르주아의 주거 이데올로기에 의해 제도화된 ‘일상의 매뉴얼’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Culture house, appeared in early modern Japan, a general term for externally western-like free-standing buildings, was a cultural sign symbolizing urban middle class. That is, it was not for a specific building type. Rather, as one kind of cultural goods produced by the enlightenment project of early modern Japanese intelligentsia. So, this paper try a semiological analysis on the internal structure of the 14 models of Culture house, exhibited at the place of Peace Memorial Tokyo Expo(1922)――It was of first appearance, to study how european bourgeois’ dwelling styles was accepted by Japanese middle class then how this changed their life. In Short, Culture house was produced in the motto of ‘Westernization = Rationalization = Modernization’, so that it was the thing proposed as testing ground for the practice of european Housekeeping methodology. In other words, Culture house provided a manual of daily life, institutionalized by the bourgeois ideology of dwelling, for Japanese urbanpeople.
この論文は、大正期に出現した 「文化住宅」という近代的な住居モデルを通じて、いかに都 市中間階級(middleclass)の「家庭」のなかで住居イデオロギーが形成されたのかを考察した。とくに、1922年に開催された平和記念東京博覽會の場内で展示されていた「文化村」出品住宅14棟を中心にその14棟のモデルハウスの室内構造(トポロジー)を分析し、それらが共にもっていたイデオロギー的なコードを明らかにした。それによって、「文化住宅」を企画した改良主義者たちの意図がいったい何であったのかを推定し得た。それは旣存の生活慣習を廃し、大衆一般の生活を「西欧普遍」という新たな基準に合せようとして生産されたといえる。 つまり、それは男性の当主(老人)が主宰した 「斉家」から主婦の 「家政」へ、大家族制の「儀式本位」的な家族倫理から都市の核家族の「家庭」的な家族倫理へ、そして伝統的な「礼儀作法」から近代的な「マナー」への変化を企てた。それは西欧の近代家政学をモットーにつくられ、その方法論を実践する一種の実験場(testing-ground)として提案されたものだった。それの誕生は、ブルジョア的な住居イデオロギーによって制度化された「日常のマニュアル」の出現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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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방역경험 축적을 통해 본 조선총독부의 방역사업 : 1911년 페스트 유행 대응을 중심으로

김영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8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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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을 둘러싸고 ‘페스트’라는 급성감염증이 유행하였던 사실에 주목하면서 조선총독부의 방역사업의 형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하였다. 1911년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된 페스트 방역사업은 조선총독부가 담당한 첫 번째 페스트 방역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은 조선총독부가 통치를 막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아직 페스트 방역에 대한 독자적인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방역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총독부가 방역사업을 실시할 때에 그 방향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먼저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방역사업을 살펴보면서 방역사업의 현실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조선총독부는 국경검역, 기차검역, 해항검역 등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페스트균을 차단하는 데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 금지, 쥐잡기 등의 방역활동이 펼쳐진 것과 함께 페스트균의 전파경로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두 명의 방역 전문가에 의한 논쟁의 결과, 당시 만주에서 유행하던 폐페스트에 대한 최신 과학의 결과보다 일본에서 실시하고 있던 쥐 구제를 중심으로 하는 선페스트 방역사업을 실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방역사업은 당시의 일본 국내의 페스트 방역사업과 방역기록들과의연관성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1년 당시 조선총독부의 방역사업의 시행 내용과 그 방법은 일본 본국에서 실시해 왔던 페스트 방역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직 과학적으로 페스트의 전파경로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일본에서 1911년은 그때까지 유행한 페스트방역에 관한 의학적, 세균학적인 지식이 가장 확대되어 지배적이던 시기였고, 관련 기록들이출판되어 나오던 시기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일본 국내의 페스트 유행 상황과 관련연구의 성과물은 식민지의 방역사업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preventive measures used b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1911 to prevent the spread of the plague. The administrative and scientific dimensions of these measures are examined, as well as their connection to the accumulation of preventive plague measures in Japan. The preventive plague measures imposed in 1911 could be considered the first anti-plague measures created b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1911, Japan’s official colonial rule over Korea had just begun, and the Korean government had not yet created its own system for preventive measures against infectious diseases. Such preventive measures were essential to the success of Japan’s rule over Korea. This paper examines the concrete preventive measures used by the colonial government at Korea’s borders for both trains and ships. These measures were used to block entry for infected passengers into Korea. At the time, there was an ongoing debate regarding effective preventive measures for the pneumonic plague between two experts, Yaname Masatsugu (山根正次) and Kitasato Shibasaburou (北里紫三郞). Yamane’s side of the argument reflected the opinions of the colonial government regarding preventive measures, while Kitasato was concerned with the findings from the scientists of the time. This debate showed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not to pay attention to newly proved scientific idea; instead, they focused on implementing preventive measures focusing on rat extermination. This decision should be considered in relation to Japan’s experiences with plague prevalence and preventive measures. In 1911, the colonial government of Korea did not have its own preventative system; however, medical and scientific knowledge about preventive plague measures was being produced and expanded through Japanese publications during this time. Japan’s research affected the preventative plague measures taken by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Korea’s colonial government needed to build more extensive preventive measures, and it chose to do so by creating measures against plague centered on the extermination of rats. This decision was made based on the belief of a strong relationship between rats and the plague, which had been provided by Japanese research so f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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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식민지 간 재현 경쟁의 장, 스포츠 : 조선신궁체육대회와 메이지신궁체육대회를 중심으로

박해남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11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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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조선신궁체육대회 및 메이지신궁체육대회라는 식민지기 중요 스포츠 이벤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들 이벤트를 제국의 프로파간다 무대 혹은 피식민자들의 민족주의의 표출 통로가 아닌 두 세력 사이에 재현의 경쟁이 펼쳐지는 장으로 가정하고, 스포츠이벤트를 통한 재현 경쟁에의 참여 의도, 경쟁 양상, 결과 등을 분석하고자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 스포츠는 이를 전유한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신체의 근대화= 서구화의 도구, 제국 및 식민권력과의 헤게모니 경쟁 수단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이라는 독자적인 ‘상상의 공동체’를 ‘세계적’ 무대에서 재현하고자 했다. 메이지신궁체육대회와 조선신궁체육대회는 제국과 식민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벤트로, 전자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국민통합을 위해 만들어졌다. 후자는 식민권력의 통치 과제에 따라 이벤트에 부여된 의미, 그리고 의미화에 따라 재현된 ‘조선’이 달라지는 양상을 보인다. 1920년대 ‘내선융화’가 식민권력의 중요과제였던 시기 ‘조선’은 ‘일본인’과 ‘조선인’이공존하는 공간, 그러면서도 재조일본인이 주도하는 공간으로 재현되었다. 1920년대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신궁체육대회 및 메이지신궁체육대회에 관여하지 않는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일본인 선수와 경쟁하여 승리하고 세계무대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등장하자, 이 대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바뀐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 이후 제국과 식민권력은 이 이벤트들을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통합되고 단련된 ‘국민’의 ‘정신’과 ‘신체’를 재현하는 무대로 바꾸어 갔다. 따라서 피식민 엘리트들의 기대처럼 ‘조선’이 재현될 여지는 마련되지 못했고, 이들의 재현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스포츠를 양 민족간 경쟁과 대결의 장으로 여기는 식민지인들의 존재는통합되고 단련된 제국의 정신과 신체를 재현하려는 시도 또한 실패였음을 보여준다.
This study examines the two major sport events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Korea: the Chosen shrine athletic meeting and Meiji shrine athletic meeting. This study assumes that the sport events were fields of “representation competition” between the Empire and the colonized. On the basis of the assumption, this study analyzes the goal of participation in the competition, the aspects, and the effects of the competition. Since its introduction, modern sport has been tightly intertwined with nationalism in Korea. The significance of modern sport for elite nationalists in colonial Korea was composed of three basic elements: modernization (=westernization) of the Korean body, “hegemony competition,” and the representation of an “imagined community.” The Chosen shrine athletic meeting was created by the colonial rulers in Korea and was utilized for their campaign to the colonized people. Following the colonial government's basic doctrine in the 1920s, at the opening ceremonies, Chosen was represented as a land of peaceful coexistence between Japanese and Koreans. But in the late 1930s, instead of the term “Chosen,” the term ”Japanese nation” was emphasized. The colonized elites did not take part in the colonizer's sport events in the 1920s. However, after 1930, Korean players were encouraged to participate in the sport events so as to win against the “Japanese players” and to advance to the “international stage.” In the late 1930s, “Chosen” could hardly be represented, as the Empire tightened its control over representation by the colonized. At the same time, unlike the Empire's intention, the sport events could not represent “a well-integrated empire” because the colonized were continuing to view the events as a space for confrontation.
この論文では、朝鮮神宮体育大会および明治神宮体育大会というスポーツ・イベントを再解釈する。 このイベント等を、帝国のプロパガンダの舞台もしくは被植民者らの民族主義の表出通路としてではなく、 両勢力の間の「表象競争」が行われる場として仮定し、スポーツ・イベントにおいての「表象競争」へ参加し た意図やその様相、そしてその結果などを分析することが目的である。  植民地朝鮮において近代スポーツは、これを専有していたエリート民族主義者たちによって、身体の 近代化=西欧化への道具、帝国・植民権力との「ヘゲモニー競争」の手段、朝鮮という独自的な「想像 の共同体」の表象の道具などの意味を持っていた。  朝鮮神宮体育大会は、植民地の権力によって作られたイベントであり、朝鮮神宮鎮座祭や明治神 宮体育大会と関係性を持ちながら作られた。このイベントを通じて表象された「朝鮮」を見るとき、「朝鮮」が 帝国のある地域及び独自的な空間の間で動揺しながらも、植民権力の統治課題に応じて変化していたこ とが分かる。  「内鮮融和」が植民地権力の重要課題だった時期、「朝鮮」は「日本人」と「朝鮮人」が共存している 独自の空間として表象されていた。だが1930年代半ば以降、「朝鮮」という名前に代わり、「日本」と「国民 」が強調されながら、帝国のある地域としての位置づけが明らかになっていた。  1920年代のエリート民族主義者たちは、朝鮮神宮体育大会および明治神宮体育大会に参加しな かったが、1930年代から参加することになった。参加を通じて朝鮮人選手が日本人選手と対決し、勝利 し、世界舞台へ進出することが奨励されたのである。この過程を経験した朝鮮人選手を通じて、独自の「 仮想の共同体」としての朝鮮が表象されることが期待された。  1936年以後、戦時体制に入り、「帝国日本」の他の要素は表象される余地が失われてきた。これに よって植民地朝鮮のエリートたちの表象戦略は內破されるようになった。同時に、依然としてスポーツを対決 の場として考えてきた植民地の人たちによって、帝国の戦略もまた、內破されるよう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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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戦時下の娯楽問題と厚生運動の展開

金榮美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14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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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후생운동의 전개와 관련하여 전쟁이 초래한 오락문제의 구체적인 양상과 그 특징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만주 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전쟁을확대했다.당초 낙관했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第一次 近衛文麿 내각은 1937년 10월에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개시하고 이어 1938년 4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함으로써, 총력전체제를 위한 ‘인적 및 물적 자원의 운용’의 원활화를 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상 생활의 모든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총동원체제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일본 후생협회를 중심으로 한 후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인적 자원’의 배양⋅동원을 위한 국책의 일환으로서 등장한 후생운동은,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시행되고 있던 여가정책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총동원체제 하에서 국민의 체력⋅정신력의 강화를 추진하는 한편, ‘건전 오락’을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후생운동의 특징으로서는 전시체제 하에서 야기된 오락문제에 대해 통제와 장려라고 하는대응책을 제시한 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시국의 요청에 따르는 오락⋅여가 생활의 재편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전시 하에서 오락생활에 대한 억제와 오락의 번영이라는 현상이 동시에 확산되고 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전쟁에 의해 오락에 대한 경찰의 풍기단속이 매우 엄격해진 한편, 그와는 대조적으로 전시 호황을 기반으로 오락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의 확대와 오락 상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생운동의 개시는 이와 같은 ‘이상 현상’을 문제의식으로 하고 있으며, 오락의 의의를 전쟁과의 관계에서 규정함으로써 전쟁의 장기화와 총력화, 그리고 생산확충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오락⋅여가를 장려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후생운동의 논리가 오락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인정한 점, 더욱이 전시 하의 물자 부족 및 정신적 불안에 직면한 국민생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생운동의 전개에는 건전한 오락을 장려하고자 했던 강제적 면모와 운동의 지도적 이념과 현실과의 괴리가 노출되었다. 그에 대한 요인으로서는, 전시체제의 일환으로서 국민의 오락⋅여가를 ‘체력 강화’와 ‘사상 교화’에 활용하려고 했던 후생운동의 현실이 오락생활의 실태를 무시한 통제나 관리를 동반하고 있었던 점이나 ‘건전한 오락’에 대한 국민의식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의 후생운동 관계자 가운데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여가운동에 대해서 그와 같은 운동을 잉태할 수 있게 한 ‘전체주의’그 자체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자가 적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후생운동은 오락생활에 있어 개인적 향락을 부정하고, 국민통합을 목표로 하는 전체주의적 여가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 1940년대가 되면, 신체제 하의 문화정책을 반영해 문화운동으로서의 색채를 겸하게 된 후생운동은 ‘국민오락’의 확립을 제창하는 등 다방면의 활동에 관여해 갔다. 하지만 시국의 확대는 여가의 선용이라는 후생운동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었으며, 시국의 악화에 의해 그 활동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the specific aspect and its characteristic in entertainment issue caused by war in relation to the development in recreation. In the wake of the Nogugyo(盧溝橋, Lugou Bridge) incident on July 7, 1937, Japan expanded war into the whole area of China as well as Manchuria. As the war, which had been optimistic initially, was extended, the 1st Geunwimunma(近衛文麿) cabinet began ‘the Nation-wide Mobilization(國民精神總動員運動)’ in October 1937 and sequentially promulgated ‘Nation-wide Mobilization law(國家總動員法)’ in April 1938, thereby coming to strive for the facilitation in ‘management of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for the full-scale mobilization system. In the process of being made the full-scale mobilization system available for controlling all the parts in daly life in this way, the recreation was developed focusing on the Japanese Welfare Association. The recreation, which appeared as part of the national policy for cultivating and mobilizing ‘human resources,’ was what had a model as the leisure policy that had been enforced in Germany and Italy at that time. And under the full-scale mobilization system, it was being aimed to supply ‘sound entertainment’ as well as driving the strengthening in people’s fitness and mental power. A characteristic of the recreation can be taken what proposed the countermeasure as saying of controlling and encouraging the entertainment issue caused by the war system. This is what aimed to reorganize entertainment and leisure life according to the request of the current situation. This is having the background as a situation that had been simultaneously expanded the phenomena such as the inhibition of entertainment life and the prosperity of entertainment in the war time. In other words, the police’s crackdown on public morals related to entertainment caused by war came to be very strict. On the contrary to it, the classes available for enjoying entertainment based on the wartime boom was expanded. The entertainment business was growing at a fast speed. The opening in recreation is having this ‘abnormal phenomenon’ as critical mind and is prescribing the significance of entertainment in the relationship with war, thereby having aimed to promote sound entertainment and leisure that are helpful for the extended and all-out pattern in war and for the expansion in production. What needed to be noted here includes a point that the logic in recreation recognized a human being’s instinctive desire for entertainment and is being additionally based on the premise as saying of understanding about national life that faced the shortage of the commodities and the mental anxiety in the war time. In this sense, the recreation had a character that cannot help recognizing the significance of entertainment and leisure in the face of the war time. This was a point that was differentiated from the spirit of the Nation-wide Mobilization, which requests just people’s self-discipline and tension in the war system. However, the development in recreation was exposed the compulsory aspect, which had aimed to encourage sound entertainment, and the gap between directive ideology and reality. As for a factor on it, the problem can be indicated as saying of a point that the reality of recreation, which had aimed to apply people’s entertainment and leisure to ‘intensifying fitness’ and ‘reforming thought’ as part of the war system, was accompanied by the control or management that neglected the actual condition of entertainment life, or of the shortage in a national consciousness on ‘sound entertainment.’ Also, among the persons relevant to recreation in Japan, there were not a few people who pay their tribute to ‘totalitarianism’ itself that allowed such movement to be born as for leisure movement in Germany or Italy. In conclusion, the recreation was developed as the totalitarian leisure movement targeting national unity with denying individual pleasure in entertainment life. The recreation, which came to combine the tone as cultural movement by reflecting cultural policy under the new system with entering the 1940s, proceeded with being involved in many-sided activity such as advocating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pastime.’ However, the expansion in the current situation was leading to discoloring the original meaning of the recreation called the good use of leisure. Even its activity came to be unable to be maintained any more by deterioration in the current state of affairs.
本稿は、戦争がもたらした娯楽をめぐる諸状況を厚生運動の展開と関わらせしつつ、戦時体制下にお ける娯楽問題の様相とその特徴を考察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 1937年7月7日の盧溝橋事件を契機に、日本は満州のみならず中国全土に対する全面的な戦争を開 始した。当初の楽観とされた戦争は長期化し、第一次近衛文麿内閣は、1937年10月に国民精神総動 員運動をはじめ、さらに、1938年4月には 「国家総動員法」を公布するなど、総力戦体制のための 「人的 及び物的資源の統制運用」の円滑化を図ろうとした。このように日常生活の末端までを統制し得る総動員 体制が作り上げられていくなか、日本厚生協会を中心に厚生運動が展開された。 「人的資源」の培養⋅ 動員という国策の一環として登場した厚生運動は、当時のドイツやイタリアで行なわれた余暇政策をモデル としたもので、総動員体制のもとで国民の体力⋅精神力の強化を推進する一方、「健全娯楽」を普及させ ることを目指した。 その特徴としては、戦時体制下で惹起された娯楽問題について統制と奨励という対応策を工夫しつ つ、時局の要請に即応した娯楽⋅余暇生活の再編成を図っていたことが挙げられる。ここには、戦時下 で娯楽の抑制と勃興の現象がともに強まっていた傾向、すなわち、戦争によって一方で娯楽に対する警察 の風俗的規制は飛躍的に強化されたが、他方で新しい享受者の台頭を含む娯楽の繁栄がこれまでにな い水準に到達したという 「異常な現状」への問題意識が示されていた。このような現象にあたって厚生運動 は、娯楽の意義を戦争との関連で位置づける理論的基盤を構築しつつ、戦争の長期化と総力化、そし て生産拡充政策の下で健全な娯楽⋅余暇への奨励を提唱したのである。そこで注目すべきことは、生活 欲求として娯楽に対する注意と関心が見直されたこと、さらに、戦時下の物資不足⋅精神的不安に直面し た国民生活への理解が前提とされていたことである。このように戦時下において娯楽⋅余暇の意義を認め ざるを得なかったという側面から、厚生運動の理論は戦時体制下に国民にひたすら自粛と緊張を求める国 民精神総動員運動的な思考とは一線を画するも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できよう。しかし、それに込められた 娯楽に対する志向性は、健全娯楽を奨励しようとした強制的な面貌と、運動の指導的理念と現実との乖 離を露呈する要因となった。ここには、戦時体制の一環として国民の娯楽⋅余暇を体力強化と思想教化 に活用していことした厚生運動の現実が娯楽生活の実態を無視した統制や管理をともなっていたことや、「 健全な娯楽」に対する国民意識の不足という問題が指摘できよう。また、モデルとしたドイツやイタリアの余暇運動の賞賛に止まらず、関係者のなかにはそういった運動を生み出した 「全体主義」そのものの賛美に至る者も少なくなかった。結果的にいえば、厚生運動は、娯楽生活における個人的享楽を否定し、国民統合を目指す全体主義的余暇運動として展開されることになった。 1940年代に入ると、新体制における文化政策を反映し、文化運動としての色彩を強めていった厚生運動は 「国民娯楽」の確立を唱えるなど多方面に及んでいった。だが、戦局の拡大は余暇の善用という厚生運動本来の課題の遂行をより困難にしていき、その活動もやがて戦局の悪化のなかで衰退を余儀なくされていくのである。

7,600원

7

전쟁책임과 점령기 일본문학 : 사타 이네코 「포말의 기록(泡沫の記録)」과 ‘전향’을 중심으로

송인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17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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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사타 이네코의 소설 「포말의 기록」을 통해 일본 좌익문학자들의 전쟁에 대한 ‘애매한’ 태도와 그 책임의 ‘애매한’ 매듭의 문제를 함께 조명해 보았다. 사소설의 방식으로쓰인 「포말의 기록」은 여러 실존작가들이 이니셜로 등장하는 모델 소설이기도 하며, 그런 의미에서 패전 직후의 전쟁책임 논의와 일본 문단의 기류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순교자 고바야시 다키지와 전시 중 ‘문단의 어른’으로서 전쟁협력을 주도했던 기쿠치 칸, 이들을 모델로 삼은 두 명의 작가 ‘K’는, 소설 속에서 각각 서로 다른문단 내 위상과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주인공인 작가 ‘도시에’로 하여금 새삼 자신의 애매한위치를 깨닫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소설은 그 양 진영 모두에 관련된 도시에가 전쟁책임과전향을 둘러싼 자신의 모호함을 성찰해가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포말의 기록」 속에서 일본 문학자들의 좌/우 구도는 ‘전후’를 배경으로 해서는 뚜렷이 양분되어 그려진다. 하지만 전시 중에는 ‘천황의 전쟁’을 긍정하고 도왔다는 점에 있어서 좌익과우익의 구분이 모호했다. 일본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사노와 나베야마가 전향한 이후 ‘전전’과‘전중’의 좌익문학자들 대다수가 전향의 단계를 거쳐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전향 논리는, ‘천황’에 대한 대중적 심리를 구실로, 그때까지 반대해 왔던 ‘국체’와 ‘전쟁’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적극적 원리에 근거하는 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의 재편성”(다카바타케 미치토시)이라는 명목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반’ 의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많은 전향자를 낳았다. 정치적 목적에 부응하는 문학에 익숙한 그들이 국책에 가담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었고, 바로 그 지점에 전시 중 좌익과 우익의문학은 애매하게 겹쳐질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패전 직후 일본의 문단에서 벌어진 전쟁책임 추궁은 바로 이 ‘구프롤레타리아문학자’들이 주도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전쟁책임이 전향책임으로 뒤바뀌는 결과”(가라타니 고진) 를 초래하게 된다. 전향에 대한 책임은 공산당 재입당으로 상당 부분이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전후 좌익문학 단체의 재결성과 일부 비전향 문학자들의 권위를 힘입어 전쟁책임추궁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협력의 전력으로 추궁 주체의 자격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추궁의 ‘잣대’역시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포말의 기록」이 전쟁책임을 제재로 삼으면서도 전사자들이나 전쟁피해자들을 향한 주인공의 속죄감보다는 ‘당(黨)’에 대한 건한 태도와 헌신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패전 후 좌익문학자들 사이에서 전쟁책임이 향책임으로 뒤바뀌어 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시에’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전쟁협력 추궁의 화살에 ‘수긍’과 ‘항변’의 심경을 동시에 지니는 것 역시, 그녀 자신이 속한 좌익문학 단체의 애매한 전쟁책임 추궁의 방식을 말해주는 것이다.
This study explored the ‘ambiguous’ attitude on the war taken by the left wing literary persons in Japan and the issue of ‘ambiguous’ conclusion on their war responsibility through the novel “Homatsu no Kiroku”. Two writers belonging to the two opposing literary camps, symbolized by Kobayashi Takiji and Kikuchi Kan, appear in the novel “Homatsu no Kiroku”. The novel has the composition, in which a female writer ‘Toshie’ related to both camps introspect on the ambiguous position of self regarding the war responsibility and conversion. As known, Kobayashi was the person who was respected by ex-proletarian writers including Sata Ineko as a literary martyr. On the other hand, Kikuchi Kan was regard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writers, who were deeply involved in making literature in conformity with state policy and cooperated to the war effort of Japanese government since the 1930s; though Kikuchi Kan also contributed a lot to Japanese literature by finding and supporting new writers. The two writers, who were modeled after Kobayashi and Kikuchi, work as an opportunity for Toshie in learning the ambiguous position of self due to the different positions in the literary circle and the political standings of the two writers in the novel. After the conversion of Sano and Nabeyama, who were the leaders of Japanese Communist Party, the majority of left wing literary persons ‘before the war’ and ‘after the war’ went through the step of conversion and participated in the war effort. The logic for he conversion held by the leaders at the time was that they would go toward the direction of acknowledging ‘kokutai’ and ‘war’, which they had been opposed to, by taking the popular psychology toward the ‘Japanese emperor’ as an excuse. Because it ook the pretext of “reorganizing the proletarian revolution movement based on a new active principle” (Takabatake Michitoshi), it decreased the guilty sense of ‘betrayal’ and resulted in many converters. Meanwhile, the close questioning on the war responsibility in the Japanese literary circle immediately after the defeat in war was led by the same ‘ex-proletarian writers’. It consequently resulted in ‘changing war responsibility to conversion responsibility” (Karatani Kojin). “Homatsu no Kiroku” took war responsibility as the theme of the novel; while it emphasized the solid attitude toward Japanese Communist Party and the will as a companion; instead of emphasizing the sense of atonement held by the protagonist toward the war dead and war victims. It is possible to say that it is the result of the fact that the conversion responsibility worked heavier than the war responsibility among the left wing literary persons after the defeat in war. ‘Toshie’ also has the mind attitude of ‘acknowledgement’ and ‘protest’ at the same time against the close questioning on the war responsibility toward her. It implies that there was ambiguousness in the responsibility questioning method taken by the left wing literature association, to which ‘Toshie’ belonged to. This study paid attention to the I-novel “Homatsu no Kiroku” as a text, which raises the issue of ‘ambiguousness’ of Japanese literary persons regarding the war responsibility, on which the whole Japanese literary circle should contemplate rather an individual, and contemplated the implication of it.
この論文は佐多稲子の小説 「泡沫の記録」をとおして日本の左翼文学者に見られる戦争に関わる曖昧な態度と、その責任の曖昧な締め括り方を照明したものである。私小説の方法で書かれた 「泡沫の記録」は複数の実存作家たちがイニシャルで登場するモデル小説でもある。小林多喜二は佐多稲子を含む旧プロレタリア作家たちにとって尊敬する文学的殉教者として刻印されており、一方、菊池寛は ‘文壇の大御所’として新人を発掘し支援するなど大いに貢献したが、1930年代からは政府と文壇を繋ぎ文学の国策化に深く関わった戦争協力作家として知られる。この相反する二人をモデルにする小説の中の二人の作家 ‘K’は象徴的な後景として物語の中に配置され、ほかならぬその相反する文壇での位相と政治的な立場の故、年枝が新たに自らの曖昧なスタンスを悟る契機を作る。 戦中の日本では大勢の左翼文学者が転向し戦争に加担した。その出発点になった佐野と鍋山の転向は、天皇に対する大衆の心理を口実に国体と戦争を肯定する理論を掲げて行われたものである。それは ‘新しい積極的な原理に基づくプロレタリア革命運動の再編成’ (高畠通敏) を立て前としたものであったため、‘背反’の自責を弱化させ結果的に集団転向をより容易に行えるようにしたと評価される。しかし敗戦直後日本文壇で展開された戦争責任の追及は、 ‘戦争責任が転向責任に切り替えられる’ (柄谷行人) 結果をまねく。転向責任は再建した日本共産党に入党することで解消するものであると信じていた転向文学者たちは、左翼文学団体の再結成に努める一方、少数の非転向者の権威に頼り戦争責任を問う立場に自らを立たせる。しかし戦争協力という前歴でかえって追及主体の資格が問われ追及の基準が曖昧になることは避けられなかった。戦争責任を題材とした 「泡沫の記録」が自らの筆で動員した戦死者や戦争被害者への贖罪意識を描くより、 ‘党’への揺れない心を表明しこれからの確固たる同伴者的意志を強調することで終っているのは、 主人公の内面で戦争責任が転向責任に切り替えられた結果である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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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来成の新聞小説と京城の読者 : 「探偵小説家の殺人」から「仮想犯人」への改作を中心に

張栄順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20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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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김내성은 일본 탐정소설잡지 󰡔프로필󰡕에 발표한두 작품을 한국어로 개작, 번역해서 발표한다. 하나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가상범인」이고, 다른 하나는 종합잡지 󰡔조광󰡕에 발표한 「살인예술가」이다. 탐정소설이나 신문소설과 같은 소설을 둘러싸고 「순문학/통속문학」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던 시기에 개작, 번역된 이 두 작품에는 당시 화제가 되고 있었던 대중문학에 관한 김내성의 견해가 잘 반영되어 있다. 본 논문에서는 특히 신문소설로 개작 번역된 「가상범인」에 초점을 맞추어 김내성이 경성의 신문소설 독자를 위해 원작을 어떻게 개작했는지를 통해 그 견해를 분석하고 있다. 번역작에는 탐정소설로서의 위상에도 변화가 있었으나, 본고에서는 특히 모던한 경성표상의 증가나 연애소설로서의재구성 부분에 중점을 두었다. 김내성은 당시 신문소설의 독자층의 취향뿐만 아니라 문단의 경향까지도 파악을 한 후에번역작에 의식적으로 대중소설적 요소를 첨가하고 있다. 특히 새롭게 재구성된 연애소설에는「장한몽(長恨夢)」을 패러디한 연애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연애소설의 양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930년대에는 이광수의 작품과 같이 육체적인 사랑보다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연애를 그린 소설이 많이 발표되어 독자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오자키코요의 「금색야차(金色夜叉)」의 번안작인 「장한몽」은 돈과 사랑의 갈등 스토리로 알려져 있듯이 통속적인 연애소설로서도 잘 알려져 있으나, 순결이나 순정을 지키는 사랑이나 박애주의적 사랑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적인 소설로서도 재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정신적인 사랑이나 이상주의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있었던 다른 작품들과 같이 독자들에게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 즉 김내성이 「장한몽」을 번역작에 첨가하고 있는 것은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통속적인 연애관과 계몽주의적인 연애관이 대립 혹은 혼합되어 있었던 당시 조선의 연애풍속(연애소설의 양상)을 「장한몽」을 통해 풍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After Kim Nae-sung finished his studies in Japan, he came back to Korea and published his two writings which he once printed in Japanese detective novel magazine Profuiru(Profile in English). The one was A Suspect(仮想犯人) that was published by the newspaper JoSeon Ilbo and another one was Artist and Murderer(殺人芸術家) published by the magazine JoGwang. The two writings which were translated in the time when the debate between pure literature and popular literature of detective novels and newspaper novels were being spread to public reflect the opinions of Kim Nae-sung on popular literature. This article especially focused on A Suspect (仮想犯人) which was translated as a newspaper novel, and analyze the thoughts of Kim Nae-sung by the method he used to modify the original writing into newspaper novel for the readers. The translated version showed the changes in the status of his writing as a detective novel, but the article concentrated more on the increased use of modern symbols of Gyeongseong and restructuring of the writing as a romance novel. Kim Nae-sung consciously added elements of popular novels in his adapted novel after he comprehended the taste of newspaper novel readers and the tendency of literary world. The fact that the adapted novel contains a love story which parodies ChangHanMong shows the close relationship with the aspects of mainstream romance novels. In 1930s, along with the writings of Yi Gwang-su, many writings which give emphasis on ideal and enlightening love that highlights spiritual love were published and popular among the readers. Although ChangHanMong which is modified version of Ozakikoyo’s Konzikiyasha is a popular romance novel that is well known for its story of conflicts on money and love, it is likely that it was read by readers with other writings that emphasizes spiritual and philanthropic love since it is revised as an enlightening novel. Thus, the fact that Kim Nae-sung added the elements of ChangHanMong in his translated version of his writing not only he wanted to have popularity, but also satirize the popular novels, specifically romance novels of that time which consists of a mixture and a conflict of common theory of love and enlightening theory of love.
日本{留学から朝鮮に帰国した金来成は、日本{の探偵雑誌󰡔ぷろふいる󰡕に発表した 二つの作品を朝鮮語で改作⋅翻訳して発表\している。一つは󰡔朝鮮日報󰡕に発表している「仮想犯人」で あり、もう一つは総合雑誌󰡔朝光󰡕に発表\している「殺人芸術家」である。探偵小説や新聞小説 のような小説をめぐって「純文学/通俗文学」の議論が行われていた中で改作⋅翻訳されたこの 二つの作品には、この時期に話題となっていた大衆文学に対する金来成の見解が反映されてい る。本{稿ではとくに新聞小説として改作⋅翻訳された「仮想犯人」に焦点をあてて、金来成が京 城の新聞読者のために原作をどのように改作したのかを通してその見解を分析した。翻訳作には 探偵小説としての位相にも変化が見られるが、本{稿ではとくにモダンな京城表\象の増加や恋愛 小説としての再構\成の部分に重点をおいた。 金来成は当時の新聞小説の読者層の趣向だけではなく、文壇の傾向をも把握した上で、翻 訳作に意識的に大衆小説的な要素を取り入れていた。 とくに、再構\成された恋愛小説には「長恨夢」をパロディ化した恋愛物語が挿}入されていた が、それは当時の恋愛小説のあり方と密接な関係があった。1930年代には李光洙の作品のよう に肉体的な恋愛より精神的な恋愛を強調する理想主義的で啓蒙主義的な恋愛を描いていた作 品が多く発表\されており、読者の反響を呼んでいた。尾崎紅葉「金色夜叉」の翻案作である「長 恨夢」は「金/恋愛」の葛藤物語として親しまれているように、通俗的な恋愛小説としてもよく知られ ていたが、純潔や純情を守る恋や博愛主義的な恋を強調する啓蒙主義的な恋愛小説としても 再構\成されていたので、理想主義的な恋を強調する他の小説らとともに当時の読者に読まれて いた可能\性がある。金来成が 「長恨夢」を朝鮮語作に取り入れていたのは、大衆性を確保する ためだけではなく、大衆的な恋愛観や啓蒙主義的な恋愛観が対立または混在していた朝鮮の恋 愛風俗(恋愛小説の様相)を風刺するためでもあった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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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대중사회 담론의 외연 : 미국 근대화론의 한ㆍ일 이식

임성모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6집 2015.05 pp.23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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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냉전기 1960년대 한⋅일 대중사회 담론이 자리잡고 있던 지적 자장을 ‘문화냉전’ 의 학술 지형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여 냉전기 대중사회 담론 연구의 외연을 확장해 보고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문화냉전’ 연구의 심화에 의해 대중사회의 동향과 연관된 유의미한 연구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대중사회의 변화를 규정하는 지적⋅제도적 역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미국 근대화론이 일본과 한국에 시차를 두고 이식되는 과정과 그 반향을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그에 앞서 먼저 미국 근대화론의 형성과정에서 소비에트 연구라는 냉전 학지가 1930년대부터 제도화되는 가운데 전후의 근대화론과 연결된 점을 밝혔다. 또한 파슨스의일반행위이론이라는 몰가치적 보편주의가 근대화론의 사상적 특징을 이루면서 로스토우의 경제성장 단계론에 반영되었음을 규명하였다. 미국 근대화론의 일⋅한 이식은 하코네 회의(1960)와 아세아문제연구소 심포지엄(1965)을계기로 본격화된다. 본고에서는 이를 주도한 미국의 근대일본연구회의와 미공보부의 활동, 포드 재단의 역할 등을 고찰하는 한편, 두 회의를 연결한 네트워크의 하나로서 문화자유회의의역할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로스토우⋅라이샤워, 이타가키, 김준엽 등으로 이어진 한⋅미⋅일냉전 리버럴리스트의 초국경적 네트워크가 동아시아에서의 근대화론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수행했음을 알 수 있었다.
This article aims at the extension of recent mass society studies through an analysis on the academic topography of the cultural Cold War in Japan and Korea in the 1960s. In spite of the recent appearance of meaningful outcomes on the cultural Cold War, the analysis on the intellectual and institutional dynamics is still important. This article focuses on the process of the transplant of American modernization theory to Japan and Korea and its reaction. U. S. developed the soviet studies, an academic knowledge on the Cold War since 1930s and it was linked on the postwar modernization theory. In this process, American modernization theory was characterized by a value free universalism named ‘general theory of action’ of Talcott Parsons, and this character was reflected in W. W. Rostow’s theory of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 The genuine infiltration of American modernization theory to East Asia had started in 1960s through Hakone conference(1960) in Japan and Asiatic Research Center symposium(1965) in Korea. This article analysed various activities of the Conference on Modern Japan, USIS, and Ford foundation etc. Especially, The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 functioned as the most powerful network linking two conferences. A transnational network of anti-communism liberalists which linked W. W. Rostow, E. O. Reischauer, Itagaki Yoichi, and Kim Jun-yup played important role to spread modernization theory in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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