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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19집 (10건)
No
1

몽골의 일본 침략 - 연구사적 고찰과 교과서 비판

남기학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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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3세기말 몽고의 일본침략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주요 연구동향을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행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기술 관련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분야의 연구가 전후 한 때 중단된 적도 있으나, 1960년경부터 다시 활발한 기조를 보인다. 특히,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일본사를 조명하고자 하는 일본 역사학계의 새로운 기조와 가마쿠라 후기의 일본 역사를 단면적이 아닌 총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가 등장하였다. 최근 이루어진 일본의 몽고침략에 대한 연구의 주요한 특징은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일본을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이 한층 다양하고 세밀해진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문화교류사의 심화 또는 참신한 13ㆍ4세기 아시아역사상의 제시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의해 국제정세의 다이나믹한 파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몽고침략에 대해 고려와 원의 관계사라는 틀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근 일본사의 입장에서 다루는 논문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한일관계사에서 몽고의 일본침략의 위상과 왜관과의 역사적인 관련성, 그리고 삼별초의 군사 및 외교적 움직임과 큐슈 지역의 동향 등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동아시아사적인 시각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려고 하는 부류와 2차 세계대전 전에 주류를 이루던 전쟁사적인 견해에 가까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교과서의 2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의 시도는 어느 정도 평가를 할 수 있다고는 하나 아직 국제관계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 후자는 아직도 군국주의시대에 적용되었던 무사상에 대한 허구로서의 “신풍”과 연결 지으며 신비주의적인 신국사상과 호조토키무네에 대한 정쟁영웅사관이 그대로 엿보인다.
The study examines the major trends of the historical research into the Mogol invasion on Japan(which happened in the late 13th century) conducted by Japan and Korea, and takes a critical look at its relevant contents in the existing middle school textbooks in Japan. Though interrupted for a while after World War Ⅱ, the Japanese research on the invasion became active again in about 1960. There appeared two trends;one was to view the Japanese history from a perspective of East Asian history; the other tried to grasp the Japanese history of the late Kamakura era in its entirety. 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recent research on the invasion is that the approach to Japan is getting more wide and detailed as it places itself in the history of East Asia. For example, there have appeared the deepening of the history of cultural exchange in a wide sense, the novel historical presentation of Asia in the 13th and 14th century, and the more dynamic understanding of international situation thanks to the discovery of new data. Meanwhile, Korea has considered the Mongol invasion on Japan basicall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lational history of Goryeo(高麗) and Yuan(元) for a long while, but there has recently appeared a self-contained study where the invasion is dealt with from an angle of the Japanese history. And various approaches are now underway; the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the invasion in the relational history of Korean and Japan, and on its historical relation with Japanese pirates(倭寇); the research into the military and diplomatic actions of Sambyeolcho(三別抄) and into the conditions and movement in Kyushu. The study takes two Japanese textbooks as object of comparison and analysis; one is a textbook which tries to incorporate the results obtained through the perspective of East Asian history, and the other is one whose 몽골의 일본 침략 33viewpoint comes close to that of the history of war, which was a main stream before World War Ⅱ. The former can be considered relatively valuable, but it needs more detailed information about the international relation, while as for the latter, it is clear that it shows the fictional idea of samurai which was circulated in the age of militarism, the mystical idea of divine land(神國)connected with Kamikaze(神風), and the war heroism about Hōjō Tokimune(北条時宗).
本稿は、13世紀末の蒙古襲来という歴史的事件についての日本と韓国での主要な研究動向を考察し、日本の現行中学校歴史教科書に記述されている関連内容を批判的に検討したものである。日本における研究は戦後一時中断されたが、おおよそ1960年頃から再び活発になり始めた。東アジア史的視角から日本史を照明しようとする歴史学界の新しい潮流と、鎌倉後期の日本の歴史を総体的に捉えようとする試みが現れた。最近、蒙古襲来研究の主な特徴は、東アジアの中で日本を眺める見方が一層多様かつ細密になったことである。広い意味での文化交流史の深化、斬新な13ㆍ4世紀アジア歴史像の提示、新資料の発見による国際情勢のダイナミックな把握がなされている。一方、韓国では、蒙古襲来を基本的に高麗ㆍ元関係史の枠組の中で捉えてきたが、最近、この事件を日本史の立場から取り上げた専論が現れつつある。また、韓日関係史における蒙古襲来の位置づけ、倭冦との歴史的関連性、三別抄の軍事的ㆍ外交的動き、九州地域の動向などの研究が行なわれている。日本の中学校歴史教科書は東アジア史的視角の研究成果を取り入れようとしたものと、戦前の主流だった戦争史的な見方に近寄っているもの、2種を比較分析した。前者は、その試みをある程度評価できるが、もう少し、国際関係について詳しく叙述する必要がある。後者は、かつて軍国主義時代に通用された虚構の武士像、「神風」と結び付いた神秘主義的な神国思想、そして、北条時宗に対する戦争英雄史観が窺われる。

7,000원

2

제국형성에서 공간인식과 학지

야마무로 신이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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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와나미강좌(岩波講座)로 간행된 제국일본의 학지(「帝国」日本の学知) 시리즈에서 필자가 편집을 담당한 제8권 「공간형성과 세계인식」은 제국과공간의 관련성 규명의 중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공간형성’과 ‘세계인식’의 관계성을 문제로 삼은 것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분야에서 근대의 학지는 시간 축에중심을 둔 역사학적 인식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반면, 공간이라는 대상이 어떠한시각과 방법론으로 학문영역 속에 수렴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재고(再考)의 필요성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논문에서는 제국이라는 분석대상이 기본적으로 공간확장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지의 존재양태와 제국분석과의 관련성에서부터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했다. 특히 제국통치의 학지인 식민정책학, 척식학(拓殖学), 문화인류학, 민족학등 제국형성과 그 통치의 정당화에 기여해온 ‘보여지는 학지’만이 아니라, ‘감추어진 학지’로서의 측면도 함께 지니는 ‘지도’ 제작에 주목하였다. 가시적인 지도는 학교교육을 통해 스스로가 속한 정치사회에 대한 귀속감과 충성을 육성하는도구로서 기능하지만, 한편으로는 군사시설과 귀중자원 등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서도 이용되어왔다. 이러한 공간학지에 의해 작성되고 축소된 지도로부터 사람들은 제국의 범역을 ‘상상’하고 이것에 의한 의식 속에서 제국을 ‘창조’하며 본국의 사람들은 제국의 중심에 있다는 의식을, 식민지 사람들은 제국의 주변에 있다는 의식을 갖도록 교육받아 간다. 지도를 작성하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고 제작하는 욕망의 표명일 따름이다. 즉제국일본에서 권역을 측정하고 지도를 작성한다는 것은 그 공간을 통치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I groped for some clue to the studies on imperial Japan focused on the knowledge of spacial perception. It is worth to notice how to mapping for reign over the colonies. Map has two functions. One is to cultivating the feeling of jurisdiction and loyalty, the other is to conceal the military establishments and precious natural resources. People living in colonies could imagine the boundary of empire by maps made by spacial perception and knowledge. They are educated that living in outskirts of empire, while Japanese centre. Mapping in imperial Japan was expression of the strong will for rule the space that indicated in maps.
2006年に日本で岩波講座として刊行された 「帝国」日本の学知_において、私が編集を担当した第8巻は 「空間形成と世界認識」というタイトルで、帝国と空間との関連を究明課題として提起した。敢えて 「空間形成」と 「世界認識」の関係性を問題の帝国日本を分析するにあたって焦点に据えたのは、人文科学や社会科学の分野における近代の学知が時間軸を機軸とした歴史学的認識を中心として発展してきたものの、その反面で空間という対象がいかなる視角や方法論をもって学問領域の中に取り込んできたのか否かについて再考する必要性を痛感してきたからであった。このような認識のもと、 帝国という対象を分析するに当たっては、それが先ずは空間拡張として現れる以上、空間を対象とする学知のあり方と帝国分析との関連性を検討し直すことに焦点を当て論を展開した。 特に帝国統治の学知である植民地政策学、 拓殖学、文化人類学、民俗学など帝国形成とその統治の正当化に貢献してきた「可視化された学知」だけではなく「隠れた学知」としての側面も併せ持っている「地図」の政策に注目した。可視化された地図は学校教育を通じて自分が属している政治社会に対する帰属感と忠誠を育成する道具として機能するが、一方では軍事施設と貴重資源などを隠蔽する道具としても利用されてきた。このような空間学知によって作成されまた縮小された地図から人は帝国の法域を‘想像’し、これによって意識の中で帝国を‘創造’して本国民は帝国の中心にいて、植民地の国民は帝国の周辺にいるという意識を持つよう教育されていく。 地図を作成するということは、世界を把握し製作する欲望の表明に近い。言い換えれば、帝国日本の圏域を測定し地図を作成するということはその空間は統治しようとする強い意思表現に違いないものである。

6,100원

3

帝国形成における空間認識と学知

山室信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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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와나미강좌(岩波講座)로 간행된 제국일본의 학지(「帝国」日本の学知) 시리즈에서 필자가 편집을 담당한 제8권 「공간형성과 세계인식」은 제국과공간의 관련성 규명의 중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공간형성’과 ‘세계인식’의 관계성을 문제로 삼은 것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분야에서 근대의 학지는 시간 축에중심을 둔 역사학적 인식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반면, 공간이라는 대상이 어떠한시각과 방법론으로 학문영역 속에 수렴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재고(再考)의 필요성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논문에서는 제국이라는 분석대상이 기본적으로 공간확장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지의 존재양태와 제국분석과의 관련성에서부터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했다. 특히 제국통치의 학지인 식민정책학, 척식학(拓殖学), 문화인류학, 민족학등 제국형성과 그 통치의 정당화에 기여해온 ‘보여지는 학지’만이 아니라, ‘감추어진 학지’로서의 측면도 함께 지니는 ‘지도’ 제작에 주목하였다. 가시적인 지도는 학교교육을 통해 스스로가 속한 정치사회에 대한 귀속감과 충성을 육성하는도구로서 기능하지만, 한편으로는 군사시설과 귀중자원 등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서도 이용되어왔다. 이러한 공간학지에 의해 작성되고 축소된 지도로부터 사람들은 제국의 범역을 ‘상상’하고 이것에 의한 의식 속에서 제국을 ‘창조’하며 본국의 사람들은 제국의 중심에 있다는 의식을, 식민지 사람들은 제국의 주변에 있다는 의식을 갖도록 교육받아 간다. 지도를 작성하는 것은 세계를 파악하고 제작하는 욕망의 표명일 따름이다. 즉제국일본에서 권역을 측정하고 지도를 작성한다는 것은 그 공간을 통치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I groped for some clue to the studies on imperial Japan focused on the knowledge of spacial perception. It is worth to notice how to mapping for reign over the colonies. Map has two functions. One is to cultivating the feeling of jurisdiction and loyalty, the other is to conceal the military establishments and precious natural resources. People living in colonies could imagine the boundary of empire by maps made by spacial perception and knowledge. They are educated that living in outskirts of empire, while Japanese centre. Mapping in imperial Japan was expression of the strong will for rule the space that indicated in maps.
2006年に日本で岩波講座として刊行された 「帝国」日本の学知_において、私が編集を担当した第8巻は 「空間形成と世界認識」というタイトルで、帝国と空間との関連を究明課題として提起した。敢えて 「空間形成」と 「世界認識」の関係性を問題の帝国日本を分析するにあたって焦点に据えたのは、人文科学や社会科学の分野における近代の学知が時間軸を機軸とした歴史学的認識を中心として発展してきたものの、その反面で空間という対象がいかなる視角や方法論をもって学問領域の中に取り込んできたのか否かについて再考する必要性を痛感してきたからであった。このような認識のもと、 帝国という対象を分析するに当たっては、それが先ずは空間拡張として現れる以上、空間を対象とする学知のあり方と帝国分析との関連性を検討し直すことに焦点を当て論を展開した。 特に帝国統治の学知である植民地政策学、 拓殖学、文化人類学、民俗学など帝国形成とその統治の正当化に貢献してきた「可視化された学知」だけではなく「隠れた学知」としての側面も併せ持っている「地図」の政策に注目した。可視化された地図は学校教育を通じて自分が属している政治社会に対する帰属感と忠誠を育成する道具として機能するが、一方では軍事施設と貴重資源などを隠蔽する道具としても利用されてきた。このような空間学知によって作成されまた縮小された地図から人は帝国の法域を‘想像’し、これによって意識の中で帝国を‘創造’して本国民は帝国の中心にいて、植民地の国民は帝国の周辺にいるという意識を持つよう教育されていく。 地図を作成するということは、世界を把握し製作する欲望の表明に近い。言い換えれば、帝国日本の圏域を測定し地図を作成するということはその空間は統治しようとする強い意思表現に違いないものである。

6,100원

4

사람ㆍ물자ㆍ감정의 지역적 재편과 국민적 학지(學知)의 탄생 - 절첩(折疊)된 제국의 재산과 생명의 행방

아사노 도요미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8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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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미국의 계획 아래 수행된 히키아게는 대규모 사람의 이동과 함께 일본 제국시대에 축적된 다양한 재산과 채권채무에 대한 정산을 수반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후 일본과 주변지역에서 사회경제적 여러 관계의 재편과 연동하며 ‘전후(戰後)’ 를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히키아게’는 제국과 식민지 지배의 종착점임과 동시에 전후 동아시아세계의 출발의 원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미국에 의한 초기의 강제적인 히키아게 정책은 재외일본인이 생활기반으로 삼았던 주요 산업자본설비를 현지에 남겨둠으로써 배상에 충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현지의 경제발전에 공헌해야 할 자본설비가 사람이 구사하는 기술 없이는 이용될 수 없었고, 미국의 정책도 공산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경제의 부흥을 최우선한다는 방향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남겨진 재외재산에 대하여 민족적 감정이 부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국교정상화교섭의 장에서 충돌하여 오늘날 역사인식문제의 한 가지 기원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히키아게가 가진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패전에 의한 제국 해체와 전후 일본의 탄생, 그리고 일본과 아시아와의 관계, 특히 한일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최초로 규정한 배상 문제를 축으로 밝혀나감으로써 전후 동아시아세계의 기원을 기술하였다.
Repatriations that had been carried out under the plan of the U.S. after the defeat of Japan in 1945 were accompanied by confiscation of Japanese properties and liabilities as a part of Japanese reparations. These Japanese external assets were accumulated during the era of Japanese imperial rule by Japanese repatiates who had been a master of the land and controlled imperial societies in modern industrial sectors such as railroad, financial companies and bureaucratic administration. In that sense, repatriation was combined with regionalrearrangement of social economic relations of Japan to surrounding countries after each ex-colony became independentI It may be said that Repatriation symbolize not only the end of Japanese Empire but also the starting point of East Asian Regional order. Initial compulsory Repatriation policy by the U.S. intended to get Japanese industrial facilities converted to indigenous economic development. However, heavy industial facilities could not have been properly utilized unless indigenous technicianwere to be trained with enough educational background, which destined the U.S. policies to make much of economic revival of Japan proper first in order to prevent the expansion of communism in Asia. At the same time, Japanese properties had been regarded as a result of colonial rule for independent nations like Korea, while Japanese repatriates in Japan regarded them as their ancestors’ precious legacies for colonial cultivations. In short, two sets of different national sentiments were attached to the same properties, which came to crash over claim issues in the negotiation for normalizing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after 1952 to 1965. Claim issues which have been related with such national emotions became a origin of history- recognition problem today.
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の敗戦直後、結節部分にあたる朝鮮半島と沖縄を手始めとして、日本周辺地域と日本本土との間で、帝国の解体にともなう大規模なヒトの移動(日本では「引揚」、韓国では「帰還」と呼称。以下、両方を含め引揚と称する) が展開された。しかし、引揚は戦後日本人だけの問題ではなかった。そもそも引揚を遂行したアメリカは、日本帝国の地域的再編というプランのもとに、日本人全面引揚、朝鮮人ㆍ台湾人ㆍ琉球人の帰還を推進していた。引揚は、旧帝国の解体と、日本内地・華北・旧満州における植民地的生活社会空間を、国民が主体となった国民国家を単位とする地域へと再編するための最初のステップであった。さらに、引揚げによるヒトの移動には、帝国の時代に蓄積された様々な財産と債権債務の清算が伴った。ゆえに、引揚は戦後日本と周辺地域での社会経済的諸関係の再編と連動し、東アジア地域の戦後をもたらした直接の契機であった。その意味で「引揚」は帝国と植民地支配の終着点であると同時に、戦後東アジア世界出発の原点であった。また、引揚は、アメリカのアジアへの全面的関与の幕開けであった。アメリカの強制的初期引揚政策の推進は、日本の再膨張を封じ込めるための戦略的な意味を有した。そして、日本人強制引揚は、在外日本人が生活基盤とした主要な産業資本設備を現地に残置させ賠償に充てるためという目的も伴っていた。しかしながら、実際にそれを実行しようとすると、現地の経済発展に貢献すべき資本設備がヒトの介在する技術なしに利用され得ないことがわかり、また、共産主義の地域への拡大を阻止するために、日本経済を最優先で復興する必要が認識され、アメリカは政策を転換した。その一方、敵産として残された旧植民地における日本の在外財産は、植民地支配を受けた側にとっては、搾取の産物以外の何物でもなかった半面、引揚日本人にとっては祖先の貴重な遺産であった。異なる民族的感情が付着した在外財産問題は、理사람ㆍ물자ㆍ감정의 지역적 재편과 국민적 학지(學知)의 탄생 115不尽な戦争で失われた人命にもまさって、講和条約以後の日韓国交正常化交渉の場で衝突し、今日の歴史認識問題の起源の一つが生みだされていく。本論は、以上のような引揚が有していたさまざまな歴史的意味を、敗戦による帝国解体と戦後日本の誕生、および、日本とアジアとの関係、特に日韓関係に焦点を当てて、それらを最初に規定した賠償問題を軸に解き明かし、戦後東アジア世界の起源を素描せんとするものである。

7,600원

5

植民地台湾における社会的公共圏の可能性 - 三面記事に潜んだ〈輿論〉の機能

李承機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11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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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1945년까지 일본 식민지지배하에 있던 대만 사회에서<여론>의 사회적 함의에 대해 고찰하는 것에 있다. 하바머스의 공공성관련 논의에 의하면 <여흥>의 장은 공공권이라고 한다. 이념형으로서의 공공권의 움직임은 관점과 의견이 서로 경쟁하는 아리나와 같은공개적인 장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근대사회의 사회시스템은 신문과 집지에서부터오늘날의 전자미디어에 이르는 메스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대만의 식민지 시기에 발행된 신문의 3면 기사에 나타난 사회규범과 도덕관을 추적함으로써 당시 3면기사라는 여흥의 장이 어떻게 인식되었고, 어떠한 개념을 통해 사회규범을 형성해 갔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법률안건으로서의 간통죄와 살인죄에 대한 기사를 통해 자살사건과 미망인데 대한 사회적 규제에 대한 인식론을 추구하고자 한다. 3면 기사에 숨겨진 <여론>은 사회를 구성하는 전원에 대하여 매일같이 네가티브한 행위의 발생을 제시하고 그에 의해 사회규범을 일상적으로 확인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는 일본에 의한 대만의 식민지 지배하라는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 컨트롤되지 않은 이슈가 아닌 사회적, 도덕적 이슈 또는 팩터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이러한 연구는 지배와 피지배, 이 양자간의 투쟁사에 가까운 기존의 식민지 연구와 더불어 향후 식민지의 사회적인 메커니즘을 보다 잘 보여주기 위한 연구로 기대된다.
The purpose of the paper is to examine the social implication of in the Taiwan society under the colonial rule of Japan till 1945. Place for is said to be public sphere according to the discussion related with “Struc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of Habermas Movement of public sphere as ideal type (Idealtypus, German) is to provide public place like arena that viewpoint and opinion mutually competes. Social system of modern society that the movement is most starkly revealed can be said to be mass media that gets to electronic media today from newspaper and magazine. The paper intended to examine how place of public opinion of the 3rd page news was recognized, and through what concept social ethos was formed by tracing social ethos and moral sense that was shown on 3rd page news of newspaper published during colonial period of Taiwan. Epistemology was intended to be pursued about social control for suicide case and widow through the news about adultery and murder as bill. hidden at 3rd page news shows occurrence of negative behavior to all members of society everyday, and has function to make them check social ethos by this daily. It shows that social, moral issue or fact which was not the issue that was not politically controlled existed in the political 136 한림일본학situation of colonial rule of Taiwan by Japan. This study is considered to be the study to show social mechanism of colony better in the future as well as existing colony studies concentrated on history of rule and being ruled, and struggle between both sides.

5,200원

6

식민지 말기 일제의 항공정책과 아동의 전쟁동원

송혜경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13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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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ane of the Early Modern Ages was the target of wonderness that represent the progress of the Western civilization. With the extension of Sino-Japanese War and the beginning of the Pacific War, planes had been used for warfares. The Japanese Empire made plane familiarized into the life of children through diverse policies. Recreations with model airplanes and gliders got through to homes and school educations which added fuel to the aviation boom. The heat of aviation can be seen as the intention of the Japanese Empire, willing to take advantage of the children as future Air Force. Planes which soon conquered the sky acted as a symbol of admiration and imagination to children. However they also took a role as a subjugator and destroyer at the same time which was later depicted in many poetries and novels. In fact, as far as it confirms, all members of the “Joseon Special Attack Unit” had been “Boy Airman” in the past. Kim-Duk-Dae, who was a member of the “Joseon Special Attack Unit” stated that he yearned after planes and parachutes at the event celebrating Aviation Memorial Day which was held in HamAnn, Gyungsangnamdo in 1942. The avian policy Japanese Empire promoted and pro-Japanese literatures wiped out the fear of warfare children had and made it positive and desperate for us to help them invade other regions. They also made death while in battles a lofty and noble thing.
近代初期朝鮮にての科学は驚異的な西洋文明として、また、1920年代には民族主義の原動力になるものとして認識されたのである。1940年代に戦争が激しくなるにつれ、科学は戦争に勝つための手段になっていく。「科学の粹」として認識された飛行機もまた驚異的な西洋文明の機器として登場し、児童には空を飛べる夢や幻想を与えるものとして位置づけられる。しかし、中日戦争の長期化とともに太平洋戦争が深刻化になっていくにしたがって飛行機は戦争を遂行する手段として利用される。このため日帝は、多様な航空政策を設け、飛行機を児童の日常生活に浸透させて親しいものにしていく。模型飛行機やグライダーのような遊びは、家庭や学校教育にまで浸透され、航空熱を高調させる。このような航空による熱気は、児童を潜在的な兵士として認め、航空兵力として利用するための日帝の意図であったと思う。人間の至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領域への征服を可能にさせた飛行機は、憧憬や想像の対象になるとともに、征服や破壊の役割をにな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日帝の航空政策や飛行機表象は多様な詩や小説を通して再現されたのである。日帝の航空政策やこれに応じる親日文学は児童の戦争への恐怖や不安を追い払い、積極的な戦争への参加を可能にさせ、戦争に随伴される死までも崇高の美的対象にしたのである。

5,500원

7

<まつらさよひめ>研究

吉岡浩人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15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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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쯔라사요히메>의 세 개의 広本 오토기조우시(広本お伽草子)중에서의 위치(독특성)를 정리해 보면 세 개의 広本 오토기조우시는 공통적으로 효심과 신앙심의 중요함을 작품의 주제로서 나타내고 있지만, <마쯔라사요히메>의 작자만이자비심과 공덕을 쌓는 것의 중요함을 작품의 주제로서 새롭게 추가하고 있었다. 또 <마쯔라사요히메>의 작자만이 법화경의 종교적 선전(宣伝)을 강하게 시도하려고 했다. 특히 불교를 깊게 신봉하고 있던 <마쯔라사요히메>의 작가가 <사요히메사우시>와 <사요히메>에게는 없었던 새로운 주제를 추가해 독자를 계몽하자고 하는 강한 의도가 보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작가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봉과 포교심이 새로운 주제를 작품에 추가한 기인(起因)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마쯔라사요히메>의작가가 세대를 넘어 집의 번성을 바라는 당시의 독자의 지향에 응하여 집의 영속적인 번성을 위해 父、母、子供、富의 네 개의 요소의 충족의 필요성을 계몽하고있었다.
Only an author of added the importance of merciful heart as the subject newly in <Sayohimenosaushi>, <Sayohime>, <Matsurasayohime>. And only an author of added the importance of accumulating virtuous deeds as the subject newly in <Sayohimenosaushi>, <Sayohime>,<Matsurasayohime>. In addition, only an author of was going to strongly try the religious advertising of the Lotus Sutra in <Sayohimenosaushi>,<Sayohime>, <Matsurasayohime>. On the other hand, it was thought that I was big, and deep belief and propagation feeling for the Buddhism of the author of acted as the origin that added the new subject. Furthermore, the author of was going to accept the intention of the reader in hope of the prosperity of the house beyond the generation. As a result, the author of showed father, mother,a child, the need of four elements such as the wealth for the permanent prosperity of the house.

7,000원

8

韓国における国語醇化運動と日本語系借用語

李光濟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19집 2011.12 pp.18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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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광복 이후의 국어순화정책을 개관하고, 일본어계 어휘가 어떻게유입되었는가에 대해서, 시기구분과 그 유입형태를 살펴보았다. 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어순화는 외래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소수의 의견도 있었으나, 일본어계 어휘에 관해서는 전면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형태로 추진되어왔다. 현재까지의 국어순화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금후의 방향에 관해서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어휘에서 일본어계 어휘의 실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현대 한국어 어휘체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또한, 진정한 ‘국어순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국어순화운동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어느 특정시기의,어느 특정국가로부터 유입된 단어를 대상으로 하여 ‘순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데에는 수긍할 수 없다. 언어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일본어계 어휘를 다루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고는 일반적인 통념상 1945년 이후 이루어진 국어순화운동으로 인하여 일본어계 어휘의 유입이 줄었다고 생각되는 점에 대하여, 정대균의 주장과 같이,오히려 광복 이후에도 유입이 계속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 아닌가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증적으로 그것을 확인해 나가기 위한 예비작업의 단계이다.
According to the original article, the refinement campaign of Korean language was initiated in 1945. In the same year, the way that Japanese vocabulary settled in Korean language was studied in periodic segments. From 1945 to present, it was proven that the assertion which is for complete exclusion of Japanese vocabulary in the refinement of Korean language is overwhelmingly dominant, despite the assertion from minority that partial acceptance of foreign elements ought to be embraced in the refinement campaign of Korean language. The critical analysis of refinement of Korean language until today, and search for direction henceforth are required. Thus,for understanding the system of modern Korean vocabulary and the correct refinement of Korean language, comprehending the actual condition of Japanes!e vocabulary in Korean vocabulary is assumed to be required. The author is not in a position against the refinement campaign of Korean language, but in a position opposing to the assertion that refinement towards the vocabulary from a specific nation in a specific period. In the perspective of Language Nationalism, dealing with Japanese vocabulary creates the risk of misunderstanding the fundamental nature of the problem suggested. The original article suggests that after the refinement campaign of Korean language,accomplished i! n 1945, the frequency of import from Japanese vocabulary had decreased. About this matter, Jeong Daekyun(Tei Taikin) suggested that import has continued as of Liberation and being lasted until today. We are in the preparing process of establishing the theory of Jeong Daekyun(Tei Taikin), and finding actual evidence of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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