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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p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 ~ 2025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309 DDC 300
제32집 (9건)
No
1

『新撰姓氏錄』의 原型과 편자의 편찬 태도

서보경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2집 2018.05 p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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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0원

『신찬성씨록』의 일문 기사와 초략본을 비교, 검토하여 『신찬성씨록』의 원본의 형식과내용을 분석하였다. 먼저『신찬성씨록』의 원본에서는 서문에서 언급한 「삼례」 형식에 기초하여 계보 관계가 기재되었지만, 초략이나 書寫 과정에서 일부 기사의 누락이나 변형이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또 『신찬성씨록』의 원본에는 氏姓本系 아래에 1) 「삼례」, 2) 씨성 유래를 비롯한 조상의 史蹟, 3) 기내 지역만이 아니라 각국에 산재한 본종과 別祖의인명, 4) 사성과 개성에 관한 내력(일족 포함), 5) 본계장 제출에 관여한 인물의 인명 등이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8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나카토미노무라지(中臣連)씨의 시조전승 기사를 분석한 결과 이른바 ‘始祖加上’을 통한 세수 증가가다양한 세수 표기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또한 같은 인명이나 신명의 異表記는 헤이안시대의 勘籍에서도 허용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므로 『신찬성씨록』 편자는 당시 사회의 현실에 기초하여 인명이나 신명, 세수 표기 등을 통일하지 않은 채 게재한 것이다. 따라서 표기 면에서의 불일치는 현실에 기반을 둔 『신찬성씨록』 편자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The original documents were written based on the format of ‘Sanrai(三例)’, or the basic format of 『ShinsenShōjiroku(新撰姓氏錄)』, but while abridging and narrating of the original text, the omission and transformation were shown. Also, the contents contained 1) sanrei, 2) ancestors’ historical achievements with the fact how they received their sise, 3) the names of honshu(本宗) and Besso(別祖) not only in the region of Kinai but also throughout scattered kunis, 4) the history about sisei(賜姓) and kaisei(改姓)(including kinship), 5) the names of people participating in submitting Honkeicho(本系帳). In addition, there were different writings of the same names and gods names put in 『ShinsenShōjiroku』; and various writings of the number of generations. This inconsistency in the respect of writing was outgrowth through editors’ allowing different writings, various writings of the number of generations in use on a basis of the common sense in that period. Therefore, that inconsistency in writing came from the proper editing attitude adjusted to society at that time, not the lack of control.

『新撰姓氏錄』の原本では基本の體制である「三例」形式に基いて記載されているが、抄略ある いは書寫の過程で記事の漏落とか變形が生ずることになった。また、原本の內容は、氏姓本系 の下に 1) 「三例」, 2) 氏姓の由來及び先祖の史蹟, 3) 畿內だけではなくおのおのの國に散在し ていた本宗と別祖の人名, 4) 賜姓と改姓に関する來歷(一族含み), 5) 本系帳の提出に關與する 人物の名等が含めていた。そして、『新撰姓氏錄』に記載された同一人名と神名の異表記、世數 の表記の不一致等は、編者が當時の社會の一般的な常識に合わせて社會で通用している表記の 方法に従った結果のこと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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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離と罪 -六条御息所の人物造型の方法-

金兌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2집 2018.05 pp.3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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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0원

노노미야(野宮)에서의 만남 이후 로쿠조미야스도코로(六条御息所)가 이세로 내려가게되면서 히카루겐지(光源氏)와 로쿠조미야스도코로는 이별하게 된다. 미야스도코로가 이세로 내려간 후 겐지는 우대신 일파의 정치적 계략에 휘말려 스마(須磨)로 가게 된다. 두사람은 이세와 스마라는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공통점과 저지른 죄로 인해유랑을 한다는 두 가지 공통점 아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겐지가 저지른 <죄>가 정치적인 대립관계 속에 희생양이 된 명목상의 모반죄라고 한다면, 미야스도코로를 이세로 내려가게 만든 원인은 생령(生霊)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겐지에 대한 깊은 애집(愛執)을 품은 죄라고 할 수 있다. 겐지에 대한 깊은 집착을 품은 죄로 이세로 내려간 미야스도코로는 불교 교리에 반하는 신(神)을 섬긴다는 또 하나의 죄를 범하게 된다. 미야스도코로의두 번째 <죄>는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미야스도코로가 「아오이(葵)」권에서 모노노케(物の 怪)가 되어 아오이노우에(葵上)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과 연관되는 것이다. 또한 미야스도코로의 조형에는 딸과 함께 이세로 낙향했던 기시 여왕(徽子女王)이라는 역사 속 인물이준거(準拠)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 속 실존인물을 준거로 사용하면서 죄를 짓고 유랑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 점에서, 독자적인 인물조형을 통해 겐지와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After Miyasudokoro went down to Ise, Genji was entangled with the political scheme of a faction of Woodaesin and went down to Suma. They form a consensus on two things in common: that they are in Ise and Suma far from the city, and that they are wandering because of their sin. If Genji’s <sin> is a nominal rebellion that has become a scapegoat in a political confrontation, the cause that led Miyasudokoro down to Ise is a sin of deep love for Genji. Miyasudokoro, who went down to Ise due to a deep obsession with Genji, commits another sin of serving God against Buddhist doctrine. The second <sin> of Miyasudokoro relates to Buddhism, which is related to the fact that Miyasudokoro became Mononoke and led to the death of Aoinoue in 「Aoi(葵)」. It is because of the power of Buddha to force Mononoke, which is called jobok.(preventing or controlling by the power of Buddha). Also, a historical figure, Queen Kishi, who went down with her daughter to Ise, is used as a criterion in the formation of Miyasudokoro. It is thought to show the relationship with Genji through the independent character formation in that it emphasizes the wandering life for committing a sin while using the existent person in history as a criterion.

優雅であった野宮の逢瀬以降、御息所の伊勢下向によって光源氏と御息所は別れを 迎えた。その伊勢下向の後、源氏も右大臣側の政治的な計略に巻き込まれ、須磨へ流 離することになる。そこで二人は、須磨と伊勢という都から遠く離れたところにいる という共通点、さらに 「流離」という共通点によって深く共感し合う。源氏の 「罪」が 政治的な対立関係の中での名目上の謀反の 「罪」であったならば、御息所が伊勢へ流 離することになったその 「罪」とは、生霊事件を引き起こすほどの源氏に対する深い 愛執の 「罪」であったといえる。しかも、その 「罪」によって流離された 「伊勢」とい う神域で、御息所はさらなる 「罪」を犯すことになるのである。御息所の二番目の 「罪」 は、仏教でいう罪なのであり、それは、御息所が 「葵」巻で 「もののけ」になって葵上 に取り憑いたこととも関連していよう。伊勢下向という面において御息所の人物造型 が、娘と共に伊勢下向した徽子女王という史実を準拠として用いていることは確かで あろう。だが、その準拠の上に 「罪」を負っての 「流離」という側面が加えられたこと によって後に現れる御息所の死霊とも関わる、御息所の独自の人物造型がなされたと 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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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모노가타리』가 시작되는 「기리쓰보」권 후반부에는 히카루겐지의 성인식 모습이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남성의 성인식을 겐부쿠라고 칭하는데 히카루겐지의 성인의례는 여러 성인식 장면 중에서도 의식의 순서 및 개요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당시 풍습의 이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겐지의 겐부쿠 장면은 당시의 의식을 기록한 『세이큐키』등을 바탕으로 헤이안 시대의 규범을 철저히 반영하면서도 모노가타리의 논리 및 주제에 맞게끔 작자의 상상력을 가미한 변용에 의해 겐지의 겐부쿠를 한층 성대하고 격식있는 행사로 그려내고 있다. 겐부쿠 장면에 이어 소이부시라는 형태로 좌대신의 딸인 아오이노우에와 겐지의 결혼장면도 그려지고 있다. 이 결혼은 동궁 측에서도 입궁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좌대신이 이에 응하지 않고 겐지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예로부터 기리쓰보 천황과의 결탁을 통해 겐지를 매개로 좌대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여 장래를 도모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좌대신의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분석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작품 속 어디에도그러한 좌대신의 심정이 기술된 부분은 없다. 모노가타리에 쓰여 지지 않은 내용을 토대로임의로 판단하는 것을 과연 모노가타리의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있을까. 좌대신은 차기천황에 등극할 동궁 측의 요청을 거절했으며 오히려 이러한 이례적인 선택이 정치적 불리함으로 이어짐은 명명백백하다. 그러한 가능성을 감수하고라도 겐지의 이상성에 매료되어그를 사위로 맞이한 점이야말로 바로 좌대신의 선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기리쓰보 권의 겐부쿠 장면은 히카루겐지가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계기가 되며 이후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겐지 모노가타리』는 한층 더 버라이어티하게 그려지게 된다.

The latter half of Kiritsubo-no Maki, the first volume of The Tale of Genji, describes Genpuku (the rite of passage where one becomes an adult) of Hikaru Genji. This part of the narrative particularly describes the rite in detail, providing a reasonable perspective from which one learns the custom of the time. The Genpuku scene reflects the actual cases of Genpuku during the Heian period based on Seikyuuki, and the author of the story portraits the rite in a luxuriant and solemn manner by transforming it in accordance with the logic of the story. This writing style has the effect of emphasizing the affection of Hikaru Genji’s father towards him as well as the idealized nature of Hikaru Genji, who appears in the story as a main character in the scene. What follows the Genpuku scene is the scene where Genji marries Aoi-no Ue, a daughter of the Ministry of the Left, in the form of soibushi. Although Touguu also insisted on marring her, the Ministry of the Left declined it and decided to let Genji marry her. It is inevitable to say that this is a quite unusual choice. In some previous studies, it has been assumed that the choice made by the Ministry of the Left is the result of his political consideration. Such an attitude of the Ministry, however, is not depicted in any part of the narrative, which suggests that the assumption held in these past works is not reasonable. The Ministry of the Left declined the request from Touguu, who is expected to be the next emperor, and this is likely to engender political disadvantages. It is essential to take into account such a possibility in discussing the Ministry’s judgment. Genpuku sets the scene where Hikaru Genji is introduced to the story as a main character, which enriches the story through the description of his various human relationships with a number of other characters.

『源氏物語』の最初の巻である桐壺巻の後半部には光源氏の元服の場面が詳しく描 かれている。元服とは男性の成人式のことをいう。十二歳で行われた光源氏の元服は 󰡔源氏物語󰡕のなかでもその儀式の次第が詳細に描写されているので、当時の風習を理 解するという点でも重要である。源氏の元服の場面は、当時の儀式書である 『西宮記』 などをもとに平安時代の実例を充実に反映しながらも、物語の論理に合わせた作者の 想像力を加えた変容により、源氏の元服をより盛大で格式のある行事として織りなす ことができたのである。これによって父桐壺帝の源氏への寵愛ぶりや成人として物語 に本格的に登場する光源氏の理想性をより効果的に強調することも可能になった。 元服の場面に続き、副臥というかたちで左大臣の娘である葵上と源氏の結婚も行わ れた。この結婚は東宮側からも入内の要請があったにも関わらず、左大臣がそれを断 り、源氏と婚姻させることを決めたのである。それは非常に異例な選択であると言い ざるを得ない。従来、こうした左大臣の決定について、それが政治的な判断の結果で あると論じた説がいくつかあった。しかしながら、そうした左大臣の心境は物語のど こにも書かれていない。物語に書かれてもいない内容をそうであろうと判断するのは 物語の正しい読み方とはいえないであろう。左大臣は次の天皇に即位するはずの東宮 側の要請を拒否したのであり、むしろそれは政治的な不利につながるに違いない。そ うした可能性まで甘受したうえで源氏を婿に迎え入れたことこそ左大臣の判断の特徴 である。 またこの元服は光源氏がこの物語の主人公として本格的に登場するきっかけとな り、以後多様な人間関係を通し、この物語をより豊かに織りなすことが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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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아시아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청일⋅러일 전쟁의 이념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전시기의 내셔널리즘을 형성하는 양상을 확인했다. 일본은 자국의 주권선을지키기 위해 한반도를 무력으로 방어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에서의 관심은 주로 공세적인 제국주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동시대의 체제 혁신의 문제와 결부했다. 그 결과, 그 전쟁이 조선⋅청나라⋅러시아의 낡은 질서를 개혁하기 위한 권력 투쟁과 관련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논문의 새로운 관점은 조선과 일본의 민족적 대립, 민권과 국권의 정치적대립,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 대립을 넘어, 서로 분열된 세력이 연계되면서 동시대를 변화시켜가는 참모습을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의 존왕양이 운동(민족주의)은 자유민권 운동 (민주주의)으로 변모해 갔다. 자유 민권 운동은 아시아주의와 동양적인 사회주의로 나뉘어 다시 제국주의에 흡수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는 다양한 세력의 모순을 흡수하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역사의 변화 자체가 모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국인이 스스로를 역사의 약자로 자처해온 역사 인식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미래 역사의 행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행위 주체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The main researches about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in Korea were concentrated mainly on the offensive imperialist war. However, I combine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Russo-Japanese War with the problem of system innovation in the same era. This paper focused on the fact that the drastic changes in the old regime in Korea, China, and Russia were connected to each other, so that it was clarified more specifically the relevance. I tried to exceed the national confront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the political conflict between civil rights and national rights, and the ideological conflict between left wing and right wing. This stance tries to find out the true figure to which the split power is connected. The Sonnō jōi (Revere the Emperor, expel the barbarians) movement as Japanese nationalism has turned into a civil rights movement as the democracy. The democracy was absorbed again into Asianism and imperialism. The changes to the new regime in East Asia occurred absorbing contradictions of various forces. Therefore, historical changes themselves do not mean resolving conflicts. To solve the contradiction, Koreans need to get out of the yoke of the historical weak. We need to be aware that we are an actor that plays a decisive role in history.

この論文は、アジア主義と社会主義の思想が日清⋅日露戦争の理念と政策に影響を 与え、ひいては戦時期のナショナリズムを形成される様子を調べた。日本は自国の主 権線を守るために韓半島を武力で防衛するという戦略を立てて日清戦争と日露戦争を 起こした。韓国での関心は、主に攻勢的な帝国主義戦争に集中していた。しかしこの 論文では、日清戦争と日露戦争を同時代の体制革新の問題と結びつけた。その結果、 その戦争に対する同時代人の姿勢が朝鮮⋅清国⋅ロシアの旧い秩序を改革するための 権力闘争と関わっていた状態が明らかになった。この論文の新たな視点は、朝鮮と日 本の民族的対立、民権と国権の政治的対立、左翼と右翼という理念対立を超えて、お 互い分裂した勢力が連携されている真の姿を探りうとしたことにある。 日本の尊王攘夷運動(ナショナリズム)は自由民権運動(デモクラシー)へと変貌して いった。自由民権運動はアジア主義と東洋的社会主義へと分れ、再び帝国主義に吸収 された。東アジアで新しい体制への変動は、様々な勢力の矛盾を吸収しながら行われ た。したがって歴史の変動そのものが矛盾の解決を意味することはない。その矛盾の 解決のためには、韓国人が自らを歴史の弱者として位置づけるような歴史認識を脱す る必要がある。私たちは、歴史的な行方に決定的な役割をかける行為主体であること を自覚する必要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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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재조일본인 교육을 담당했던 단체를 중심으로 통감부 시기와 ‘한국병합’ 을 거쳐 거류민 교육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거류민 사회는 아동 교육을 중요 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자치’적으로 거류민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거류민 인구가 증가하고 학령인구가 늘어나자 교육사업은 일본인의 정착과 해외 진출과 관련해 더욱 중요시되었다. 우선 교육 제도 측면에서 본국의 교육 제도를 어떠한 방식으로 거류민 아동에게 적용할지가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거류민 학교에 대한 국고 보조, 교원 확보, 본국 학교와의연계 등이 과제로 부상했다. 이들 과제는 문부성의 재외학교 지원 정책과 통감부의 정책이더해지면서 개선된다. 통감부 시기는 거류민 학교에 관한 업무가 문부성에서 통감부로 이관되는 과도기적 시기였는데 핵심적인 교육 제도는 대체적으로 통감부령 제정을 통해 해결되었다. 통감부는 본국 일본의 교육 제도를 준용하면서도 일정 정도 한국 사정에 적합한방식을 취했다. ‘한국병합’ 후 재조일본인들의 교육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거류지에서 태어난 아동들이 증가하면서 ‘모국을 모르는 아동’의 증가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들을 어떻게‘일본인’으로 교육시킬지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내지’에 관한 관념과 충군애국의 정신 함양이 강조되었고 일본인에게는 조선인을 지도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거류민 교육은 피지배 민족을 지도하는 ‘내지인’ 교육으로 점차 변모해갔다. 통감부 시기 소규모의 거류민사회에서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단체로 도입된 것인 학교조합 제도였다. ‘한국병합’ 후에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학교조합은 일본인의 교육재정을 담당하는 모델로 폭넓게 채용되었다. 또한 거류민단이 해산되고 교육 사업이 학교조합으로 승계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재조일본인들은 총독부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학교조합 승계 문제는 재조일본인들에게 총독부가 내건 ‘동화’와 ‘일시동인’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모순적인지 간파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Japanese settlers’ education transformed during the protectorate period and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focusing on educational organization. From the opening port era, Japanese settlers’ community considered children education important and they established elementary schools by their own efforts. The population of Japanese settlers as well as children at school age rapidly increased after Russo-Japanese war. Regarding their settlement and overseas expansion of the Empire of Japan, settlers set a high value on children education. Japanese settlers started to discuss on how to apply the educational system of motherland to settlers’ children. Government subsidy, inviting teachers, recognition of schools are the most discussed issues. After the protectorate period, the population of second generation of colonizers increased and their parents generation worried about their children who were considered to be getting ignorant of motherland. Accordingly, parents discussed how to educate them as Japanese in colony and ideas about motherland Japan, loyalty and patriotism are emphasized. Meanwhile, School Association system was introduced for small communities.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School Association system was widely adapted in colonial Korea. Regarding dissolution of Japanese Residents Association and succeeding to School Association, settlers recognized contradiction of assimilation policies tha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proposed.

本稿は、統監府時期と「韓国併合」を経て居留民教育が変容する過程を、在朝日本 人教育を担っていた団体を中心に考察したものである。 早い時期から居留民社会は子弟教育を重要な課題として捉えており、「自治」団体に よって居留民学校の運営にあたっていた。日露戦争を経て居留民人口が急増し、これ によって学齢児童が増加すると、教育事業は居留民の定着と日本人の海外進出を促す 益々重要視されれいく。 教育制度に関しては、本国日本の教育制度をどのように居留民児童に適用するのかが 議論された。特に居留民学校に対する国庫補助、教員の確保、本国学校との連結問題が課 題として浮上した。これらの課題は文部省の在外学校支援策や統監府の政策によって改善 されていく。統監府時期は居留民学校に関する監督権限が文部省から統監府へ移管される 過渡期的な時期であったが、主要な教育制度は統監府令をもって解決された。統監府は本 国日本の教育制度を準用しながらも、ある程度韓国の事情に合わせる方式が採用された。「韓国併合」後、在朝日本人の教育は変容を余儀なくされた。居留地で生まれた児童 が増加し、「内地を知らない児童」の増加が懸念されるようになると、朝鮮で生まれた 子どもたちをどのように 「日本人」として教育するかが課題として認識された。この 風潮によって、「内地」に対する観念と忠君愛国精神の涵養が強調されるとともに、 朝 鮮人を指導する役割が日本人に与えられた。この過程で 「本国同様」の教育を目指し ていた居留民教育は、被支配民を指導する 「内地人」教育へ変容する。 なお、統監府時期に小規模の居留民社会で教育事業を担う組織として導入されたのが学 校組合であった。「韓国併合」後、地方制度が整備される過程で学校組合は日本人の教育財政 を担当するモデルとして広く採用される。そして、居留民団が解散され、教育事業が学校組 合に継承される問題をめぐって、在朝日本人は総督府の支配イデオロギーの矛盾を認識する ことになる。学校組合継承問題は総督府が掲げていた 「同化」や 「一視同仁」というモットー がいかに虚構的であることを在朝日本人に認識させるきっかけとな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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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루돌프 오이켄(R. Eucken, 1846∼1926)은 20세기 초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에도 오늘날 서구철학사에서 거의 잊혀 진 인물에 가깝다. 그의‘신이상주의’ 철학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기존 사회진화론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가치를 표방하려했던 ‘문화주의’ 담론과 호응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의 철학에 내재한 특징은 물론 그의 철학과 ‘문화주의’ 담론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이 글은 오이켄이 평생에 걸쳐 주창한 ‘신이상주의’ 철학의 정체를 밝히고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오이켄의 철학을 유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일본에서 오이켄 철학의 수용 현황을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일본에서 오이켄의 수용과 그에 관한 담론의 생산이 다이쇼 초기에 집중되어있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당시 일본에서는 국가지상주의의 분위기를 비판하고 ‘개인’의 독립성을 표방하기 위한 근거로 오이켄의 철학을 활용하려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또한오이켄은 자연과학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문화주의’의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사회적인 방면으로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문화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오이켄의 ‘신이상주의’를 정초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글은 오이켄의 철학을 통해 20세기 초 한국과 일본에서 ‘문화주의’가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현상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향후 동아시아 차원의 ‘문화주의’에 접근할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The German philosopher Rudolph Eucken(1846∼1926) received an enthusiastic welcome from East Asian intellectuals in the early 20th century, but he has sunk into obscurity in today’s Western philosophy of history. His ‘Neo-idealism’ philosophy was able to respond to the discourse of ‘culturalism’ which tried to express human spiritual and personal values in order to overcome the negative effect of the existing social evolution theory in East Asia. However, the discussions regarding the relation between the inherent characteristics in his philosophy and the ‘culturalism’ discourse have not been done properly. Under the consciousness of this problem, this article find out the identity of the ‘Neo-idealism’ philosophy advocated by Eucken and tried to trace the acceptance of the Eucken philosophy in Japan, which played a major role in circulating the philosophy of Eucken in East Asia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particular, as we can see from the fact that the acceptance of Eucken and the production of the discourse about it were concentrated in the early days of Taisho, at that time in Japan, Eucken’s philosophy was used as a basis for criticizing the atmosphere of national superpower and expressing the independence of ‘individual’. Around the same time, the intellectuals of Joseon also accepted it as the basis of ‘culturalism’ to overcome the world-view of natural science. However, they sought to establish the ‘Neo-idealism’ of Eucken in a different context from Japanese culturalism in terms of seeking to explore the possibility to expand the ‘personality’ of individual into a social aspect. Therefore, the article tried to establish the foothold for further study on ‘culturalism’ at the East Asian level by reveling that ‘culturalism’ was a universal and special phenomenon in Korea and Japan in the early 20th century through the philosophy of Eucken.

ドイツの哲学者ルドルフ⋅オイケン(R. Eucken, 1846∼1926)は20世紀初め東アジア 知識人たちに熱烈な歓迎を受けたことにもかかわらず、今日の西欧哲学史でほとんど 忘れられた人物に近い。彼の「新理想主義」哲学は当代東アジアで既存の社会進化論の 弊害を克服するため、人間の精神的で人格的な価値を標榜しようとした「文化主義」談 論と呼応することができたが、まだ彼の哲学に内在した特徴はもちろん、彼の哲学と 「文化主義」談論の関連性に関する論議も行われなかった。こうした問題意識の下この 文はオイケンが一生にわたって主張した「新理想主義」哲学の正体を明らかにして20世 紀初め東アジアでオイケンの哲学を流通するのに大きな役割をした日本でオイケン哲 学の収容現況を追跡しようとする。特に、日本でオイケンの収容と彼に関する談論の 生産が大正初期に集中されていることから分かるように、当時日本では国家至上主義 の雰囲気を批判して「個人」の独立性を標榜するための根拠としてオイケンの哲学を活 用しようとした。同じ時期に朝鮮の知識人たちにもオイケンは自然科学の世界観を克 服するための「文化主義」の根拠として受け止められた。しかし、彼らは個人の「人格」 を社会的な方面に拡大できる可能性を模索しようとしたという点で、日本の文化主義 とは別な脈絡でオイケンの「新理想主義」を定礎しようとした。したがってこの文はオ イケンの哲学を通じて20世紀初め朝鮮と日本で「文化主義」が普遍的ながらも、特殊な 現象だ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ことで今後東アジアにおける「文化主義」に接近する足 場を用意しようと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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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상법 강좌 교수 니시하라 간이치(西原寛一)의 연구 작업을 분석한다. 식민주의의 전개와 그 유제의 문제에 있어 ‘법제(法制)’는 인간 생활의 근간을 규율한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일찍이 한국 학계에서는식민지 법제에 대해 연구를 집중시켰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분야는 ‘민법(民法)’이었다. 민법은 헌법, 형법과 더불어 법률의 기초이면서, 또 가족과 상속 등 전통적인 사회 규범의 문제를 직접 규정하는 법률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식민지 상법(商法)에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상황이다. 상법은 경제생활에 관한 법률이면서 경제의 기초 단위인 회사기업에 관한 법률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운용에 있어 어느 무엇보다필수적인 법령이다. 니시하라는 바로 회사법 전문가로 법령의 체계화와 정교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경제 질서를 구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강력한 국가개입을요체로 하는 통제경제 체제의 발흥기이기도 하였다. 식민지 제국대학의 교수라는 조건 속에서 니시하라는 자유-자본주의 회사법과 국가개입주의 경제통제법이라는 두 상반된 법제가 갖는 충돌을 해결해야만 했었다. 이 글에서는 니시하라를 식민주의-자유주의-국가주의가 교착되는 지점에 서 있던 인물로 설정하고, 그의 연구 작업을 분석하여 식민지 학지(學知)의 특징과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works of Nishihara Kanichi(西原寛一) who was the professor of commercial law in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matters of colonialism, the legal system has had more influence on the colonial society than anything else because it forms the basis of human life. So, from early on, Korean scholars have been focused their research on colonial legislations. Among them, it was the civil law that received the most attention. This is because civil law, along with the Constitution and criminal law, is the basis of the law and directly defines the problem of social norms such as family and inheritance. In contrast, little research has been carried out on the commercial law of colonial Korea. The commercial law is essential to the operation of the capitalist economic system. Nishihara, an expert in corporate law, attempted to establish the legal order of capitalism by organizing and refining statutes. However, his time was also the rise of controlled economic system characterized by strong state intervention. As the faculty of the university in colony, Nishihara had to resolve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opposing laws, the free capitalist economy and the state interventionist economy. In this article, Nishihara is set to be the figure who stood at the point where colonialism, liberalism and statism were at a deadlock. In this setting, I will reveal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lonial knowledge by analyzing his researches on corporate law.

本稿では、京城帝国大学の商法講座担当教授、西原寛一の研究活動を分析する。植 民主義の展開とその遺制の問題において、法制は人間生活の根幹を規律するという点 から最も深い影響を与えた。そこで、早くから韓国の学会では植民地の法制に関する 研究が集中的に行われてきたが、その中で最も関心が高かった分野は「民法」であっ た。民法は憲法、刑法と並んで法律の基礎とも言えるものでり、また家族や相続など 伝統的社会規範の問題を直接定めた法律であるためである。一方、植民地の商法に関 してはほとんど研究が進んでいない状況である。商法は、経済生活に関する法律であ りながら、経済の基礎単位である会社企業に関する法律であり、資本主義経済体制の 運用においては他の何よりも必須的な法令でもある。西原はこの会社法の専門家とし て、法令の体系化と精巧化を通じて資本主義経済の秩序を構築しようとした。しか し、彼が活動していた時代は強力な国家介入が要諦になる統制経済体制の勃興期でも あった。植民地の帝国大学の教授という条件の下で、西原は自由‐資本主義の会社法と 国家介入主義の経済統制法という、二つの相反する法制の間に存在する衝突を解決し 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本稿では、西原を植民主義-自由主義-国家主義が膠着して いる地点に立っていた人物として設定し彼の研究内容を分析することで、植民地にお ける学知の特徴と性格を究明してみ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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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나가무라 기치에몬과 이치가와 엔노스케의 조선위문순업의 실태를 해명함으로써 그들의 공연이 조선의 총력전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밝히는 것이다. 기치에몬과 엔노스케의 위문순업의 목적은 황군위문과 출정군인유가족의 위안으로, 그들의 위문 공연은 조선총독부, 조선군관계자의 큰 환대를 받았다. 이들의 공연은 위안 뿐만 아니라 공연 수익을 위문 사업을 통괄하였던 조선군사후원연맹에 헌금 함으로써 운영에도 도움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총력전을 위해 식민정책의 하나인 내선일체을 내세워 조선인들의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를 실시함으로서 동화정책을 실행하였는데, 기치에몬의 경성청년단발단식의출석과 엔노스케의 조선인의 징병발포기념공연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찬동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기치에몬과 엔노스케의 위문순업의 연목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작품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애국극<기요마사 추세이로쿠>와 익찬극<오무라 마스지로>가 포함되었다. 이상으로 기치에몬과 엔노스케의 순업공연은 재조선 일본인조선군의 위안 뿐만 아니라재조일본일의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조선의 총력전에재조선 일본인조선군의 협력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가부키공연을 통하여 일본정신을 호소함으로써 전시 국면을 극복하려고 한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In this research, the nature of the Provincial Sympathy Tour of Nakamura Kichiemon and Ichikawa Ennosuke and the role that their performances played in the Total War period of the Korean Peninsula are clarified. The purpose of the Provincial Sympathy Tour of Nakamura Kichiemon and Ichikawa Ennosuke was to offer solace to the bereaved families of members of the Imperial Army and other soldiers at the front. This was received enthusiastically by the Government-General and by the Korean Army personnel. In addition to providing solace to bereaved families, the profits from the performances were dedicated to the national defense and to the condolence operations of the Korean Army Support Federation. The programs included the patriotic and supporting dramas such as Kiyomasaseichūryoku and Ōmuramasajirō. These programs provided a means of solidarity among Japanese on the Korean Peninsula, without which the Korean Government-General and Korean Arm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face the Total War period. The Japanese Korean Army played a critical role in the Total War period in Korea. Its aim, as well as the aim of the Korean Government-General, was to overcome their wartime position by appealing to the “Japanese Spirit”. This was facilitated in part by the tours of the above-mentioned important Kabuki Actors.

本研究は、中村吉右衛門と市川猿之助による朝鮮の慰問巡業の実態を解明すること で、彼らの公演が朝鮮の総力戦においてどのような役割を果たしたのかを明らかにす るものである。 吉右衛門と猿之助の慰問巡業は、皇軍慰問と出征軍人遺家族の慰安がその目的であ り、彼らの慰問公演は朝鮮総督府、朝鮮軍関係者に大きな歓待を受けた。これは、在 朝鮮日本人朝鮮軍およびその遺家族やその関係者の慰安になるだけではなく、その公 演収益は国防献金として納められ、慰安⋅慰問事業を統括していた朝鮮軍事後援連盟 の運営にも役立てられた。 彼らが行なった演目の中には、愛国劇、翼賛劇である 󰡔清正誠忠録󰡕 󰡔大村益次郎󰡕 が含まれており、これは在朝鮮日本人の結束力をなくしては総力戦に臨めない朝鮮総 督府、朝鮮軍の事情と一致する演目でもあった。 以上、吉右衛門と猿之助の朝鮮における慰問巡業は、在朝鮮日本人朝鮮軍関係者の 「慰安」のみならず、 「在朝鮮日本人の結束」の役割を果たし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 なった。これは、朝鮮の総力戦において在朝鮮日本人朝鮮軍の協力は不可欠であり、 大物歌舞伎俳優たちによる巡業公演を通じて 「日本精神」をアピールすることで一致 団結し、戦時局面を乗り越えようとした朝鮮総督府、朝鮮軍の狙いがあったとみ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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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00% 영어화에 의해 소위 ‘외국인’ 대상 텔레비전 국제방송으로 2009년 재출범한 NHK월드TV를 사례로 삼아 현재 국가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일본’을 둘러싼 이미지 정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우선 출범 8주년을 넘긴 NHK월드TV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조명하고 이 문제들이 소프트파워론에 대한 성급한 맹신과 국제방송이라는 특정한 미디어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었음을 논증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소프트파워 제고와 국제방송 확충 사이에 상정되어왔던 상관관계를 상대화한다. 또한 국제방송이 구축하는 ‘일본’ 이미지를 분석하여 소프트파워 개념이 전지구화에 대응할 수 있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일본’을 상상하도록 추동하는 정언명령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전지구화 시대의 시장경쟁 논리를 체화한 현대 일본의 이미지 정치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This paper critically examines the government-led image politics surrounding “Japan” by investigating the case of NHK World TV, which was re-launched in 2009 as an English-only international television broadcasting channel designed exclusively for “foreigners.” First, it explores the chronic problems faced by NHK World TV over the last eight years, arguing that these issues stem from the rather uncritical acceptance of soft power discourses, as well as the lack of understanding of specific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s of the international television broadcasting medium. This approach allows for the questioning of the imagined correlations between soft power enhancement and the expansion of international broadcasting. In addition, by analyzing the image of “Japan” constructed by NHK World TV, this study reveals the fact that soft power discourses provide a strong impetus for Japanese elite and ordinary citizens to re-imagine the national community on the basis of global competitiveness. This finding urges us to take a critical look at the present state of image politics surrounding “Japan,” which increasingly prioritizes the neoliberal logic of market competition.

本稿は、100%英語化により、いわゆる 「外国人」向けテレビ国際放送として再ス タートしたNHKワールドTVを例にして、現在国家主導で推進している 「日本」をめぐ るイメージ政治を批判的に検討する。 まず発足8周年を超えたNHKワールドTVが抱えている諸問題を照明し、これらの問 題がソフト⋅パワー論の性急な盲信と国際放送というメディアに対する理解不足より 生じたことを論証する。それによって、ソフト⋅パワーの向上と国際放送の拡充の間 に想定されてきた相関関係を相対化する。 また、国際放送が構築する 「日本」のイメージを分析して、ソフト⋅パワーの概念 がグローバル化に対応できる競争力を基準に 「日本」を想像するように促す現実を表 わし、グローバル化時代の市場競争の論理を内面化した現代日本のイメージ政治の現 状を批判的に直視する必要があることを強調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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