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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31집 (7건)
No
1

戦時期国土計画における朝鮮

安達宏昭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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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전시기(戰時期) 일본 기획원에서 입안한 국토계획에 대한 여러 계획안 중 식민지조선에 대해 산업배치와 인구배치를 어떻게 기획하고 있었는가를 밝힘으로써 대일본제국의 본국정부가 조선을 어떤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국토계획은 계획기간을 15년으로 잡은 장기계획이며, 실제로는 기획원 내의 검토로 그쳤으나, 정부에 대해 답신(答申)을 한 대동아건설심의회의 수치목표와 일치시키는 등 정부 내에서 참고로 한 내용이기도 하였다. 국토계획은 공업과 농업, 그리고 인구문제 등 여러 정책을 통합할 목적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농공업의 생산목표와 공업배치만이 중시되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북 조선의 중화학공업개발에 대해서는 실제로 전개되던 북부의 전력개발을 참고로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일본 내지 공업에 대한 보완을 내지 자본으로 시행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철강과 석탄 등의 광공업의 생산목표는 당시 생산량에 비하면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예를 들면 철강은 300만 톤이라는 목표가 설정되었으나, 당시 생산량이 41만 톤(1941년)에 불과했다. 였던 것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로, 그 대표적인 예라하겠다. 농업생산 중 특히 미곡의 목표량은 내지에 이송하는 물량도 확보 가능한 3240만석이라는당시 총독부 증산계획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농업생의 증대에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 내지, 만주에서 광공업 부문에 공급되는 노동력의 원천은 조선의 농촌에서 종사하는 농민들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농업 재편성의 목소리가 나왔으나, 구체적이지 못했다. 인구배치도 공업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수치만 제시될 뿐, 농가의 가구 수와 그 가구 당 필요한 경작면적의 적정규모 등 농공(農工) 조정에 필요한 근거가 명확하게 명시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조정이야 말로 증산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실제로는정부의 공출(供出)에 의해 농촌에서 노동력이 빠져나가 미곡생산이 감소하였다. 국토계획에서 조선에 대해서는 장래적인 관점에서 산업배분계획에 의해 중공업화가 중시되어, 조선이 제국일본의 내지를 보완하는 지역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공 조정은 명확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조선인에 대한 구체적인이동계획은 제시되지 않는 등 내지에 대한 계획보다 명확하지 못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내지인’ 배치에 대한 수치는 명확하게 명시되어, ‘지배민족’으로서의 ‘내지인’ 즉 ‘야마토민족’ 의 ‘지도성’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
This paper analyzes the ways in which the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defined its territory on the Korean peninsula by exploring the plans for industrial allocation and population management contained in the Planning Board’s (kikakuin) Greater East Asian Land Development Program. The Program was a long-term plan covering a period of 15 years, and it became a reference for government planning. Unlike other regions in the empire, the Program on Korea focused solely on agricultural and industrial production targets and industrial allocation. Among these, high hopes were placed on the development of the heavy chemical industry in the northwestern Korean peninsula, based on the development of power generation already accomplished in the region. The goals of industrial production, such as steel and coal, outlined targets significantly higher than the production at that time. On the other hand, the rice production target was 32.4 million koku, which was close to projected increases in production at that time. There was, however, a problem with the expansion of agricultural production. Industry required a steady supply of rural labor, but concrete plans for the coordination of the restructuring of agriculture and industry were not included in the Program. In actuality, the industrial labor supply was drawn from rural areas, causing declines in rice production. The Program’s future industrial allocation plan for Korea placed its emphasis on heavy industry, showing that Korea was being positioned as an area complementing the mainland in Imperial Japan.
本稿は、戦時期に日本の企画院で立案されていた国土計画についての諸計画案にお いて、植民地·朝鮮に対していかなる産業配置·人口配置を企図していたかを明らかに することにより、大日本帝国の本国政府が、朝鮮をどのような空間として認識してい たのかを考察するものである。 国土計画は、計画期間を15年間とした長期的な計画で、実際には企画院内での検討 で終わったが、政府に答申を出した大東亜建設審議会の答申の数値目標を一致させる など、政府内で参考とされる内容でもあった。 国土計画は、工業や農業、そして人口問題など、諸政策を総合する目的で出発した ものであった。しかし、朝鮮においては、農工業の生産目標や工業配置のみが重視さ れる内容であった。なかでも西北朝鮮の重化学工業開発に対して、実際に進展してい た北部の電源開発を背景として、大きな期待をかけるものであった。ただ、それは内 地工業の補完を、内地資本によって行おうとするものであった。そして、鉄鋼や石炭 などの鉱工業生産の目標は、当時の生産量に比べるとかなり高い目標であった。一例 をあげれば、鉄鋼は300万トンという目標が立てられたが、当時の生産量は41万トン程 度(1941年度)にすぎなかった。 農業生産とりわけ米穀の目標量は、内地への移出量も確保できる3240万石という、 当時の総督府の増産計画量に近い。しかし、農業生産の増大には問題を抱えていた。 朝鮮内·内地·満洲での鉱工業部門への労働力供給の源泉は、朝鮮農村の農業従事者で あった。このため農業の再編成が掲げられたが、具体的ではなく、人口配置も工業地 域への移動を示す数値のみが示されて、農家の戸数とその農家一戸あたりに必要な耕 作面積の適正規模など農工調整に必要な根拠が明らかにされていなかった。しかし、 こうした調整こそが増産には欠かせないことであった。実際には農村から労働力の供 出がなされ、米穀生産は減少することになった。 国土計画における朝鮮の部分では、将来的な産業配分計画により、重工業化が重視 され、朝鮮が帝国日本において内地を補完する地域に位置づけられたことがわかる。 しかし、農工調整ははっきりせず、それに伴って朝鮮の人びとの移動に関する具体的 な計画は示されず、内地の計画より不明確なものであった。その一方で、「内地人」の 配置数が明確化され、「支配民族」としての「内地人」すなわち「大和民族」の「指導性」が 顕著に示され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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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側は「満蒙開拓団」をどうみたか - 中国各地で刊行された雑誌ㆍ評論を手がかりに -

細谷亨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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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과제는 쇼와 전전(戰前)과 전시기(戰時期)에 일본에서 송출된 만몽개척단에대한 중국 측 인식을 분명히 하는 데에 있다. 본고에서는 당시 중국 각지에서 간행된 잡지와 평론 등 중국어 사료를 통해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은 중국 측 인식의 일단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분석 대상으로는 난징과 상하이 등의 도시에서 간행된 잡지의 평론으로, 이민정책이 개시된 전후부터 이민이 본격화되기 직전까지인 1930년∼1937년으로 한정하였다. 분석 결과 이하와 같은 점을 밝힐 수 있었다. 만주이민이 시작되자 ‘일본이민’에 관한 기사가 점차 증가하였다. 이 시기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 측이 만주이민의 동향을 상세하게 파악하여 중국인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민계획의 내용과 영농상황, 실적, 평가에 관한 수많은 기사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사중 주목할 만 한 점은 대체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보이는 만주이민에 대한 위기의식이전면에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민 실적이 열악하더라도 결코 낙관시해서는 안 된다는점을 언제나 경계하였고, 이민자의 입식(入植)을 실력으로 저지하자는 식의 논조에 자주 등장한다. 이 외에 일본인 이민으로 인한 동화에 대한 공포와 국토침략의 위기를 주장하는 기사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항일’에 앞서 공산당 토벌에 우선순위를 두는 장개석 정권의 소극적인 자세에 대한 지식인들의 강한 불만이 깔려있다. 실제로 기사 중에는 정부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이러한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와맞물려 만주국 외부로부터 만주로의 이민에 대한 중국 민중의 관심은 전체적으로 저조했던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기사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기조는 위기의식의 선전이야말로 중국민중의 각성을재촉하고, 강력한 민족적 저항을 실현한다는 지식인들의 의도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중국지식인에게 있어 일본제국에 의한 만주이민이란 중국동북지방의 장래에까지 화근을 남기는정책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scertains the attitudes of Chinese towards Japanese emigration to Manchuria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 Chinese attitudes towards Japanese emigration have not been fully elucidated, so this work interprets historical sources in Chinese, such as journal articles and critiques that were published in various parts of China at the time. The analyzed materials were journal articles and critiques that were published in cities such as Nanjing and Shanghai from 1930–1937. Materials were specifically from the period starting at around the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launched its emigration policy until just prior to full-fledged emigration. The current analysis yielded several findings. When Japanese emigration to Manchuria began, numerous articles mentioned “Japanese immigration.” In those articles, Chinese authors discerned trends in Japanese emigration to Manchuria in detail and they sought to widely inform the Chinese public of those trends. This interpretation is readily substantiated by numerous articles on the details of the immigration plan, agricultural conditions, and the achievements of and views on immigration. A point particularly worth noting is that in the articles intellectuals largely perceived Japanese emigration to Manchuria as a crisis. This was often expressed as a sentiment calling for a steady refrain from optimism even if immigration failed and instead urging readers to earnestly thwart colonization. Moreover, articles highlighted the threat of assimilation and occupation of Chinese territory by Japanese immigrants. The context for those attitudes was great dissatisfaction among intellectuals with the passive stance taken by Chiang Kai-shek, who prioritized putting down the communist party over “resistance to the Japanese.” In fact, articles notably called for the government to take appropriate action. In combination with the government’s stance, the Chinese public outside of Manchuria felt little concern about Japanese emigration to Manchuria overall. Many articles trumpeted the crisis, reflecting intellectuals’ desires to fully arouse the Chinese public and foster a strong ethnic resistance. Chinese intellectuals commonly viewed Japanese emigration to Manchuria by the Empire of Japan as a policy with ominous portents for northeastern China.
本稿の課題は、昭和戦前・戦時期に日本から送出された満洲移民に対する中国側の認識 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ある。本稿では、当時中国各地で刊行されていた雑誌・評論など中 国語の史料を読み解くことで、これまで十分に解明されてこなかった中国側の認識の一端 にアプローチする。分析の対象は、南京や上海などの都市で1930~37年に刊行された雑 誌・評論であり、移民政策の開始前後から移民が本格化する時期の直前までに限定され る。 本稿の分析からは以下の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満洲移民が始まると、「日本移民」に関 する記事が多くみられるようになった。記事からは、中国側が満洲移民の動向を詳細に把 握し、中国民衆に広く伝えようとしていたことが読み取れる。そのことは、移民計画の内 容や営農状況、移民の実績・評価に関する多くの記事が存在していたことからもよくわか る。記事のなかでとくに注目すべき点は、知識人たちがおしなべて満洲移民に対する危機 意識を前面に出していることである。それは、移民の成績が劣悪であっても楽観視するこ とを常に戒め、移民の入植を実力で阻止するよう呼びかける論調によく表れている。ま た、日本人移民による同化の恐怖と国土侵略の危機を強調するものもみられた。その背景 には、「抗日」よりも共産党の討伐に優先順位をおく蔣介石政権の消極的な姿勢に対する知 識人たちの強い不満があった。実際、記事では、政府に対して適切な措置をとるよう要請 するものが目立っていた。そうした政府の姿勢とも相まって、満洲国外の中国民衆の満洲 移民に対する関心は全体的に低調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 多くの記事に通底する危機意識の喧伝こそ、まさに中国民衆の覚醒を促し、強力な民族 的抵抗を実現するという知識人たちの意図を表すものであった。中国側の知識人にとって 日本帝国による満洲移民は、中国東北の将来にとって禍根を残す政策という認識が広く共 有されてい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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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東北地方における農民と満洲移民 - 宮城県の地主·小作人を中心に -

Christopher Craig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5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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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과 ‘만주국’을 논함에 있어서 제국주의 · 파시즘과 일본 일반민중과의 깊은 관계가 지적되곤 한다. 그러한 해석의 하나로서 일반농민이 만주농업이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을 들곤 한다. 경제적 불황을 배경으로 농민은 제국의 확장이라는 기회를 잡아서 새로운 삶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것이며, 만주로 이민한 이들 농민들은 제국주의자이거나 제국을 묵인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쪽이든 국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들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만주농업이민과 일본 농촌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만주로 건너간 농민이 제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해석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특히 후에 국책이 된 만주분촌이민계획을 처음 발안한 미야기현 난고촌(南郷村) 사례는 민간 차원에서 전개된 제국주의와 만주농민이민문제와 관련해서 선행연구와는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1930년대 난고촌농민은 일본의 다른 농민과 같은 문제 즉 높은 소작료와 소작율, 경지부족, 인구과잉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난고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마을을 두 개로나누여 과잉인구를 만주에 이주시켜 자매촌을 만들고, 이민 간 사람들이 남긴 경작지를 마을에 남은 사람들에게 할당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인 실시되자, 소작인이 줄어들어서 경작지 수요도 감소해서 마을회(村會)와 행정을 지배하고 있던 대지주는 이주 계획을 저지하고, 이를 촌시(村是) 즉 마을기본정책으로 해야 한다는 소작인의 요구를무시하였다. 당시 중앙관료와 군인은 만주국 방위작전을 위해서 재향군인을 대상으로 만주농업이민을 촉진하고 있었으나, 이민자 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센다이에 주둔하고 있던 제4 연대장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를 통해 난고촌의 만주분촌이민계획은 중앙관료에게 알려졌고, 그 결과 숨통이 막혀있던 만주이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관료의 기대와 의도에도 불구하고 난고촌을 둘러싼 계획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분촌을 추진한 세력은 단순히 농민의 이익을 위해 국책에 동조해서 만주 땅을 착취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난고촌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는 소작농들은마을 지배를 독점하고 있던 소수의 지주에 대해 분촌계획을 경제적·정치적인 위협수단으로사용했던 것이다. 단순히 소작료를 낮추는 것뿐 아니라, 분촌계획에 대한 중앙관료의 승인을 얻어냄으로서 마을 행정을 관장하는 지주층이 분촌계획에 반대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관료와 마을주민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분촌이민계획은 지주의 지배를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기에, 지주들이 국책에 협력을 하게되자, 난고촌 소작인은 굳이 분촌계획에 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져서 이민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The emigration of Japanese farmers to Manchuria in the 1930s and 1940s is often taken as a sign of popular support for empire and fascism. Presented with new opportunities by the conquest of Manchuria, farmers saw a means of escaping their economic distress and agricultural villages a way to jettison their excess populations and eliminate strains on their limited resources. While the attitudes of those involved towards Japan’s imperial expansion may have varied from tacit endorsement to enthusiastic support, these farmers and their villages were participants in and agents of empire. The case of the Miyagi village of Nangō, birthplace of the mass Manchurian emigration plans that were adopted as national policy, raises problems with this interpretation and suggests new ways of understanding the links between popular imperialism and Manchurian emigration. Nangō farmers faced the widespread problems of high rents, overpopulation, and high tenancy rates, and formulated plans to send half of its population to Manchuria to found a sister village in response. This was not, however, a simple attempt to exploit imperial conquests. In Nangō,  Manchurian immigration was a threat levelled by tenant farmers at the landlords who controlled village administration. The appeals to empire bought the support of the central government, which helped break the landlord monopoly on power, after which the villagers abandoned their plans for Manchuria.
帝国日本における「満洲国」については、しばしば帝国主義・ファシズムと日本の一般民 衆との深い関係が指摘される。こうした解釈の一つとして、一般の農民が満州農業移民に 対して熱心に参加をしていたことが主張されている。経済不況を背景に、農民は帝国の拡 張という機会をとらえ、新生活を送るために渡満したのであり、移民した農民は帝国主義 者あるいは帝国を黙認する人であったが、どちらにせよ国策に積極的に参加したものでも あったというのである。 しかしながら、満洲農業移民と日本の農村を具体的に検討すると、渡満した農民が帝国 の発展に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という解釈に対して疑問が生じる。特に、のちに国策と なった満洲州分村移民計画を最初に案出した宮城県南郷村の事例は、民間レベルで展開さ れた帝国主義と満州農業移民に関して、先行研究とは異なる解釈を示唆するものである。 1930年代に、南郷村の農民は日本中の農民と同様の問題-高い小作料や小作率、耕地不 足、過剰人口等-に直面していた。南郷村では、そうした諸問題の対策として、村民が村 の住民を二分し、過剰人口を満州に送り出して姉妹村を創立し、渡満した村民が残した耕 地を村に残っている人口に割り当てるという計画を立てた。しかし、そうした計画が実施 されると、小作人の人口が減少して耕地への需要が減少するために、村会や村の行政を支 配していた大地主はその計画を阻止し、村是とせよという小作人の要求を無視した。その 当時、中央官僚や軍人は「満洲国」の防衛作戦として、在郷軍人を対象に満州農業移民を促 進していたが、移民の人数は期待されたものには及ばなかった。仙台に駐留していた石原 莞爾を通じて、南郷村の満州分村移民計画は中央官僚に知られるようになり、それまでの 満州移民の行き詰まりを解決するための手段として、国策に組み込まれた。 しかし、帝国の官僚の期待や意図にもかかわらず、南郷村における計画の形成過程をみ ると、分村を推進した勢力は単なる農民の利益のために国策に同調して満洲の地を搾取し ようとしていたわけでは、必ずしもなか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る。南郷村の人口の過半を 占めた小作人は、村の支配を独占していた少数者の地主に対して、分村計画を経済・政治 的な威嚇として使った。小作料を下げることだけではなく、計画に中央官僚の承認を得る ことで、村の行政を担う地主層に計画に対する抵抗を諦めさせて、官僚や村民に協力せざ るを得ない状況を作ろうとしたのであった。実際に南郷村から移民を希望した者は非常に少なく、姉妹村を創立する人数まで及ばなかった。最初から分村移民計画は地主の支配を 崩すためのもので、地主達が国策に協力を強いられるようになりさえすれば、南郷村の小 作人は分村計画に関する関心を失い、移民には同調しなかったの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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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소지(嘘字)를 통해 보는 에도(江戸)의 언어문자 유희문화 - 한자(漢字)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금영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7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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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근세의 한자문일본근세 한자문자유희인 우소지(嘘字)에 보이는 에도(江戸)문화적인 방법요소 세 가지를 한자(漢字)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연상연결과 동물조합, 그리고 가타기(気質)가 그것이다. 첫 번째로, 조합된 글자의 음과 훈을 회의(会意)하여 문자를 읽는 한자의 방식과는 달리, 우소지에서는 연상연결의 중간단계가 개입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매개체들은 에도시대의 동화나 속담인 경우가 많았는데 한 글자에 이러한 중간 매개체가 포함되는 것은 우소지만의 특징이다. 두 번째로, 한자에서는 동종 또는 이종의 동물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에 주목하여 해당동물들을 나타내는 글자 둘, 혹은 셋 이상을 조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우소지에서는이종(異種)의 동물조합을 나타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다. 또, 세 가지 이상의 동물또는 동물과 사람의 조합이라는 우소지의 형태는 한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라 할수 있다. 세 번째로, 한자에 비해 우소지에서는 인간의 신분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발달하였으며, 이 경우 한자와는 달리 일정한 읽기방식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것은 에도시대에 유행한 가타기모노(気質物)방식의 영향 때문이다.
In this paper, I tried to study the three method elements(Associative concatenation, Assigning animals, Temperament) of Edo culture in character play of Usoji(Non-existent Chinese characters) through comparison with Chinese characters. First, I found that there is an intermediate stage in process of associative concatenation of Usoji's reading and proverbs and fairy tales of Edo period can be cited as an intermediary of the intermediate stage of Usoji's associative concatenation. Second, the method of assigning animals is developed in Usoji, which is the character representing the animals of different kinds, on the other hand, the method of assigning allogeneic animals is developed in kanji. In Kanji let's focus on animal characteristics, but Usoji let's focu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animals and animals of Edo period's Fairytales.  Third, Usoji has the method element that represent the human being's temperament, Which is called Katagi(気質) in Japanese. This, of course, is also related to the epidemic of the temperament in the Edo period. These three method elements of Usoji reflect the main characteristics of Edo culture well, and it shows a unique idea of Japanese that is quite different from kanji's.
本稿では式亭三馬の嘘字尽くしに見える文字遊びの江戸文化的な方法要素三 つ(連想連結・動物の取り合わせ・気質物)の特徴を漢字との比較を通して検討し てみた。そしてその結果、次の事実が分かった。 まず、漢字の会意文字方式とは違って、嘘字の文字の組み合わせ過程には、中 間段階を経る連想連結が行われることが分かった。そしてその中間段階の媒介と なるものとしては江戸時代の諺や童話、そして故事成語などが挙げられる。  次に、同種、あるいは異種の動物二匹以上を表す文字の組み合わせの場合、漢 字では、それらの動物の特徴の共通点に着目した場合が多いが、嘘字では江戸時 代の諺や迷信、童話、じゃんけんぽんなどに見える異種の動物の取り合わせをそ のまま利用した文字の組み合わせが多かった。  最後に、漢字と比べ、嘘字には職業や身分などによる人間の気質の特徴を表す ものが発達していることが分かった。これはもちろん江戸時代の気質物の流行と も管見する。嘘字に見えるこの三つの方法要素は、江戸文化の特徴をよく反映し ており、漢字とはだいぶ異なる日本人独特の発想を見せてくれるといえる。 本稿で試みた漢字と嘘字との比較は、現代中国の創作漢字や日本で生まれた漢 字である国字に対するこれからの東アジア漢字文化の比較考察においても大いに 役立つことが期待されよう。

6,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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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안중근’ : 다니 조지(谷讓次)의 희곡 「안중근:14장면」을 중심으로

홍선영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10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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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에 등장하는 ‘안중근’ 관련 연극의 상연기록을 확인하고 일본 작가가 ‘안중근’ 을 어떻게 작품화하였는가라는 문제를 검토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다니 조지의 희곡「안중근」을 주목하였다. 열네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희곡의 구성상의 문제, ‘팬터마임’으로 연기하게 한 의도 등을 분석함으로써 일본인에게 범접할 수 없는 타자로서 등장한안중근의 문제를 조명해 볼 수 있었다. 이 희곡에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즉, 암살계획의 실행되기 직전에 끝나 있다. 1909년의 안중근과 그의 암살 계획을 둘러싼 상황을극의 주요한 모티브로 설정하면서 계획이 실행되는 ‘15장’은 그리지 않았다. 이는 근대시기 일본 문학인들에 의해서 그려진 ‘안중근’ 표상은 동시대 일본인의 인식과 맞닿아 있었다. 안중근 사후 동시대 일본 작가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등의 문학인에 의해 그려진 안중근 표상은 범접할 수 없는 타자로서 온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그러하다.
This paper examined the performance record of theater related to ‘ANJUNGGUN(安 重根)’ appearing in Japanese literature and examined how Japanese writers used ‘ANJUNGGUN’ in works. It mainly focused on "ANJUNGGUN" which is the play of Tani Jouzi. I examined the problem appearing as others in Japanese. I was able to clarify the problem surrounding ANJUNGGUN appeared as a person not mentioned in Japanese by analyzing the composition of the play composed of 14 scenes and the intention of acting in "pantomime" This play has remarkable features, it is concludes just before the execution of the assassination plan. The main motif of the theater is the situation of 1909 planned by the person ANJUNGGUN and the plan of assassination, but the "15 chapter" in which the plan is being carried out is not portrayed to the end. It seems that the representation of ‘ANJUNGGUN’ drawn by Japanese modern literary writer is linked to the recognition of the Japanese of the same age. After ANJUNGGUN died, The representation to him is is likely to remain in "blank" completely in the sense that can not be depicted in other literary of contemporary Japanese writers such as Natsume Sose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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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 투어리즘에 의한 지역문화콘텐츠의 가능성 : 사이타마현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규헌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1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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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일본 지역문화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사이타마현 관광 테마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있는 ‘아니메 투어리즘’에 주목한 것이다. 2007 년의 <러키스타>와 2011년의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는 사이타마 지역을 배경으로 한 흥행작이다. 이 두 작품의 성공은 사이타마현이 애니메이션을 지역브랜드로추진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사이타마현의 애니메이션 관광 · 지역 진흥정책이 지역을 방문하는 방문객과의 소통을 <부타이 메구리>라는 ‘아니메 성지순례’를 위한어플리케이션과 적극적으로 연계시키는 점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치치부시 요시다의 전통축제인 류우제이사이(龍勢祭)는 애니메이션의 스토리에 활용됨으로써 이 축제가 기존의 축제참여자 – 지역주민 – 애니메이션 팬이 교류하는 새로운 플랫폼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있었다.
This study pays attention to Anime Tourism, which emerges as the core of the theme of tourism in Saitama Prefecture in order to seek a new possibility of research on local cultures of Japan from the perspective of cultural contents. Lucky Star in 2007 and Anohana: The Flower We Saw That Day in 2011 are box office hits, set in the Saitama area. The success of the two works became a catalyst for Saitama Prefecture’s promotion of animation as a local brand. In particular, this study focused on the fact that Saitama Prefecture’s animation tourism and local promotion policy actively connect communication with the visitors who visit the area to the application for Anime Tourism of the “Trip to the Stages.” Along with this, as Ryusei Festival (Annual Grand Festival at the Muku Shrine), the traditional festival of Yoshida, Chichibu City was utilized in animation stories, it could be noted that this festival has become a new platform in which the existing festival participants, residents, and animation fans interact with each other.
本稿は文化コンテンツの視点から日本の地域・文化研究の新しい可能性を探る ため、最近、埼玉県の観光テーマとなったアニメツーリズムに注目したものであ る。2007年の「らきすた」と2011年の「あの日見た花の名前を僕達はまだ知らな い」は埼玉の地域を舞台とした作品である。この両作品の成功は埼玉県がアニメ を地域ブランドとして推進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そこで本稿では埼玉県のアニ メ観光・地域振興施策において、地域を訪問する観光客と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 を、いわゆるアニメ聖地巡礼アプリ「舞台巡り」と積極的に連携することに注目 した。また、秩父市吉田の椋神社の祭事である龍勢祭はアニメのストーリーに活 用されたことから、この祭りが既存の祭り観光客と地域住民に加え、アニメファ ンまでが交流する新しいプラットホームを役割を果してることを確認で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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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돌봄자 증가와 젠더질서의 역동 : 일본남성의 노인돌봄을 둘러싼 담론과 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지은숙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1집 2017.12 pp.139-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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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노인돌봄을 하는 남성 가족돌봄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현상에 주목해 이를 젠더질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노인돌봄과 관련한 문헌자료와 남성돌봄자들의 자조활동에 대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정책, 담론, 그리고 당사자의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개괄하면서 남성돌봄을 둘러싼 전체적인 흐름을짚어 본다. 주요하게 다음 사항에 중점을 두고 접근한다. 첫째는 노인을 돌보는 남성이 증가하게 된배경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것은 장기불황과 급속한 고령화가 겹치면서 저성장사회로 진입한 일본사회가 남성들의 삶에 초래한 변화를 살펴보는 작업과 궤를 같이 한다. 둘째는 남성돌봄을 둘러싼 담론과 정책을 시계열적으로 가늠해 보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를 크게 ① 1990년대 중반~ 2005년 ② 2006년~ 2015년 ③ 2016년 이후로 구분한 후 각 시기의 남성돌봄을 둘러싼 특징적인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시기 구분은 연구자가 검토한 가족돌봄의 주요 정책과 이에 대한 선행연구를 기준으로 삼았다. 셋째는 남성돌봄자의 증가가 강한 성별분업과 남성생계부양자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젠더질서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지그 함의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남성돌봄자 모임이 지니는 정치적 가능성을 따져보고, 남성돌봄자의 증가가 젠더평등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는 작업이다.
This article aims at examining the phenomenon that male family caregivers who take care of the elderly have been remarkably increasing in Japan. Based on references related to elderly caregiving and field surveys on support group activities of male caregivers, I will look into overall progress of male caregiving while exploring relevant policies, discourses and their works comprehensively. I’ll focus on following three matters. First, I’ll search for circumstances explaining why male elderly caregivers are increasing. It comes along with surveys on changes of their lives caused by Japanese society which is entering low-growth era because of long-term depression and ageing of population. Second, I’ll estimate discourses and policies about male caregivers in time serial manner. That is, after dividing recent years since 1990s into three phases: ① mid 1990s-2005, ② 2006-2015 ③ after 2016, I’ll look into distinctive aspects of male caregiving in each phase. Third, I’ll find out changes in strict gender division of labor and patriarchal gender norms ruled by male breadwinner, caused by the increase of male caregivers. This work is intended to examine whether increase of male caregivers can be an opportunity to open a new chapter of gender equality and what kind of political possibilities their support groups have.
日本で家族を介護する男性は1990年代から飛躍的に増加しつつある。この研究 の目的は男性介護者の増加に注目し、その現象をジェンダー秩序の変化という視 点から捉えることである。男性介護に関する文献資料と男性介護者の自助グルー プの活動に対するフィルドワーク・データを合わせて、政策、言説、当事者の活 動などへ総合的にアプローチすることがこの研究の特徴である。それによって男 性介護者を囲む現状や歴史的な流れを明らかにする。  本文は主に次の三つの問題に焦点をおく。第一は介護する男性の増加をめぐ る社会的・経済的な背景を解明することである。長期にわたる経済低迷と急速な 高齢化の進展の中、男性たちの生涯にその転換がもたらした変化を明らかにする ことが重要である。第二は1990年代から現在まで男性介護に対する言説や政策の 時間的な展開を捉えることである。分析の便宜のために時期を三つに分ける。① 1990年代半ば~2005年 ② 2006年~2015年 ③ 2016年以後。区分点は家族や介護 に対する新たな法律及政策の登場である。第三は男性介護者の増加が強い性別分 業に基づいた日本社会のジェンダー秩序にどのような変化をもたらしているのか を検討することである。この問題にとっては特に男性介護者の自助グループが持 つ政治的な可能性に注目を浴びる。それを通じて男性介護者の増加がジェンダー 平等に新しい地平を開くきっかけになる可能性を期待を込め分析することであ 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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