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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5집 (12건)
No
1

志賀潔と植民地朝鮮

松田利彦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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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기요시(1871-1957)는 일본의 저명한 세균학자로 주로 1945년 이전에 활동하였다. 그러나 시가가 연구자로서의 인생 후반의 10여 년 간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가는 1920년에 조선총독부의원장(醫院長)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서 조선에 건너왔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개교와 관련해서는 비록 실현은 하지 못하였으나 미국식 기독의학과 임상의학을 연계하려고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장을 거쳐 1929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1931년 총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10여년에 이른다. 본 논문에서는 학술연구와 식민지주의라는 문제를 체현하는 인물로서 시가 기요시의 업적에 대해 고찰하였다. 시가 기요시는 주관적으로는 가치중립주의적인 학문 태도를 신조로 삼는 학자였으나, 그가 속한 전염병 연구소(후에 기타사토연구소)는 실학적 지향이 강하며, 시가도 결핵과 각기병과 같은 국민병의 조사와 예방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와 접점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시가 본인 스스로는 순수한 학문연구와 국가공헌 이라는 양자 사이에 모순되는 바 없이 한결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식민지조선으로 공간을 옮기면 그러한 그의 생각이 지니는 정치성이 뜻밖의 곳에서 표면화된다. 시가는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보급을 중시하며 조선인 의학자 육성에 힘을 쏟은 한편, 전통적인 한방의학 (의생)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교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뿐 만 아니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일어난 구보사건(1921년)과 관련하여서도 일본인 교수의 차별발언에 조선인학생들의 항의에 대해서도 그는 끝내 조선학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시대는 한센병 연구에 주력하였으나, 한센병 치료를 둘러싸고 구미인 선교사와 조선총독부 간에 헤게모니 경쟁이 일어나자, 시가의 한센병 대책을 둘러싼 언설 또한 1920년대 후반 치료퇴원주의로에서 30년대 초 강제격리주의로 급전환하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한센병 대책과의 관련이 농후하다.
Kiyoshi Shiga (1871-1957) was an eminent Japanese bacteriologist who built his career as a scholar before 1945. However, it is a very little-known fact that he spent ten years of his later life in Japanese-ruled Joseon. Shiga came to Joseon in 1920 as a clinical manager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and also Principal of Gyeongseong Medical College. Although he did not complete his plan, he tried to connect American Christian medicine with clinical medicine when Gyeongseong Medical College opened in 1926. His career in Joseon ranged over 10 years; through the medical director of Gyeongseong Medical College to its president in 1929; he retired as president in 1931. This study examines his achievements as a person representing issues about academic research and colonialism. Shiga thought his principle was value neutrality, but the direction of the Infectious Diseases Institute (later the Kitasato Institute) he belonged to was very practical; he came to have a point of contact with society through research into national diseases like tuberculosis and beriberi, and preventive campaigns against them.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political nature that his thought implied came to the surface within the bounds of colonized Joseon in an unexpected way, though he himself believed that there was no contradiction between his academic research and contribution to the state. While Shiga regarded as important the dissemination of Western medicine in Joseon and made every effort to foster Korean medical scientists, he considered oriental medicine (physicians of the traditional school) as a mere object of reformation. Furthermore, when the Kubo case happened in 1921 during his term of office, he could never understand Korean students’ protest against the Japanese professor’s discriminating remarks toward Koreans. Shiga focused on Hansen’s disease during his period at GyeongseongImperial University . When some hegemonic competition occurred between Western missionaries an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over the treatment of Hansen’s disease, his comments on the treatment of the disease showed a sudden change from the hospital treatment principle of the late 1920s to the forced segregation principle in the early 1930s. His involvement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s management over Hansen’s disease was quite substantial.
志賀潔(1871~1957年)は、赤痢菌の発見で著名な戦前日本の細菌学者である。しかし、志賀潔が、研究者としての後半生10数年間を植民地朝鮮で送ったことはほとんど知られていない。志賀は、1920年に朝鮮総督府医院長兼京城医学専門学校校長として朝鮮に渡った。1926年、京城帝国大学の創設においては、実現はしなかったもののアメリカ式の基礎医学と臨床医学の連繋を構想した。そして、京城帝国大学が開学すると同医学部長、ついで1929年に京城帝国大学総長に就任した。1931年京城帝国大学総長を辞職するまで朝鮮での活動期間は10余年にわたる。本稿では、学術研究と植民地主義という問題を体現する人物として志賀を取りあげ考察した。 志賀潔は、主観的には価値中立主義的な学問的態度を信条とした。しかし、志賀の属した伝染病研究所(後に北里研究所)は実学志向を強く持ち、志賀も結核や脚気の調査や予防キャンペーンを通じて社会との接点をもつことになった。志賀本人としては、純粋な学問研究と国家への貢献は矛盾なく結びついていたと思われるが、植民地朝鮮という磁場ではそうした思想の政治性がはしなくも表面化した。志賀は朝鮮において西洋医学の普及を重視し朝鮮人医学者の育成に力を入れた反面、伝統的な漢方医(医生)は一方的な教化対象と見なした。また、京城医学専門学校校長時代に起こった久保事件(1921年)においては、日本人教授の差別発言に対する朝鮮人学生の抗議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京城帝国大学時代はハンセン病研究に注力したが、その研究は欧米人宣教師と朝鮮総督府の医療をめぐるヘゲモニー競争という文脈の中に置かれていた。志賀のハンセン病対策をめぐる言説が、1920年代後半における治癒退院主義から30年代初期の強制隔離主義へと大きく転換したことも、朝鮮総督府のハンセン病政策と関連していた可能性がある。

10,600원

2

시가 기요시(志賀潔)와 식민지 조선

마쓰다 도시히코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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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기요시(1871-1957)는 일본의 저명한 세균학자로 주로 1945년 이전에 활동하였다. 그 러나 시가가 연구자로서의 인생 후반의 10여 년 간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가는 1920년에 조선총독부의원장(醫院長)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서 조선에 건너 왔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개교와 관련해서는 비록 실현은 하지 못하였으나 미국식 기독의학 과 임상의학을 연계하려고 구상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장을 거쳐 1929년에 는 경성제국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1931년 총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조선에서 활동한 기간은 10 여년에 이른다. 본 논문에서는 학술연구와 식민지주의라는 문제를 체현하는 인물로서 시가 기 요시의 업적에 대해 고찰하였다. 시가 기요시는 주관적으로는 가치중립주의적인 학문 태도를 신조로 삼는 학자였으나, 그가 속한 전염병 연구소(후에 기타사토연구소)는 실학적 지향이 강하며, 시가도 결핵과 각기병과 같은 국민병의 조사와 예방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와 접점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시가 본인 스 스로는 순수한 학문연구와 국가공헌 이라는 양자 사이에 모순되는 바 없이 한결같다고 생각하 고 있었으나, 식민지조선으로 공간을 옮기면 그러한 그의 생각이 지니는 정치성이 뜻밖의 곳 에서 표면화된다. 시가는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보급을 중시하며 조선인 의학자 육성에 힘을 쏟은 한편, 전통 적인 한방의학 (의생)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교화의 대상으로 여겼다. 뿐 만 아니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일어난 구보사건(1921년)과 관련 하여서도 일본인 교수의 차별발언에 조선인학생들의 항의에 대해서도 그는 끝내 조선학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시대는 한센병 연구에 주력하였으나, 한센병 치료를 둘러싸고 구미인 선 교사와 조선총독부 간에 헤게모니 경쟁이 일어나자, 시가의 한센병 대책을 둘러싼 언설 또한 1920년대 후반 치료퇴원주의로에서 30년대 초 강제격리주의로 급전환하게 된다. 조선총독부 의 한센병 대책과의 관련이 농후하다.

6,400원

3

학교의식에 나타난 식민지 교육 : 현대일본의 ‘국가신도’ 논쟁과 관련하여

樋浦 郷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5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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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신도를 역사적으로 서술하는 연구사의 시점은 오늘날까지 대부분 기독교 및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신사참배 강요, 신앙 탄압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식민지에 있어 강요한(받은) 것은 신사참배 뿐 만 아니라 (신사는 그다지 많은 지역에 설립되지 않았다),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보통학교 안에 만들어진 신사를 대신하는 가미다나(神棚)와 가미다나에 모시는 신궁대마, 그리고 교육활동이라는 명목으로 강요한 배례(경례) 등, 폭넓은 강요 또는 폭력장치와 방법에 관한 문제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견지에서 종교 강요 문제가 학교교육의 ‘세속성’ (비종교성) 원칙을 배경으로 가시화 되지 못한 채 존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애초 일본교육에 있어 학교의례는 ‘국가제사’의 비종교적인 상시형으로, 일본 국내에서 밖에 통용되지 않는 특이한 제도였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에서, 종교 신앙적 측면이 큰 ‘오하라이’ 등이 공립학교 교육에 침투된다. 원래 신사참배는 ‘기도’ 라는 마음의 행위와 ‘가시와데(拍手=박수)’라는 신체행위가 동시에 포함되는 의례이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황국신민 서사’ 와 같이 ‘목소리를 낸다’, ‘기립한다’ 와 같이 신체 의례적 측면만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강화되어, 전시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심각성을 더하게 된다. 이는 종교적 측면에서강당에 ‘교에이’를 걸고, 가미다나를 설치하여, 신체의례적 측면에서는 의례규정에 명시도지도 않은 ‘서사’를 순서에 끼워 넣는 임시방편을 택하여 미봉의 끝에 붕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일본에서 종교역사 연구는 식민지시기 연구를 중심으로 학교생활 속의 천황숭배 문제등 ‘풀뿌리’ 적인 일상생활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다룸으로써 종교를 폭 넓은 의미에서의 역사적 과제로 다루고자 하는 움직임이 요구되고 있다.
State-Shinto [Kokka-Shinto] paradigm has long been discussed and reconsidered in modern Japan. One viewpoint is to grasp it restrictively as the term which means the prewar Jinja [Japanese Shrine] system that had been under the administrative control of the Imperial Japan’s government. On the contrary, another viewpoint is to understand this as broad framework, including school history or Imperial Rituals which sustained after WWII. This script stands on the latter viewpoint and tries to reconsider the colonial Korea’s school education. The standpoints of extant research on Jinja-Shinto field have mainly focused on the problem of the compulsive shrine visitation and violent oppression toward Christians and their churches in Korea. However, it is not only Christians’ shrine visit that was compelled violently by colonial government or other colonial powers. For instance, Jinja shrine were not always existed all over Korean regional communities. Instead, it is important to review carefully such historical facts that many numbers of substitute equipment, which were made as small and inexpensive Jinja-typed apparatus, were set up in public school all over Korea. By taking a careful look at Imperial Japan’s school system, its textbooks and education methods, we can find some forms of broader compulsion than seen in the extant research. When modern Japanese school system had been prepared in Meiji Era in mainland Japan, school rituals were made under the principle of non-religion. But this system could not be applied to colonial schools. In Korean schools, Emperor worship itself could not be understood as non-religion one even if school teachers would insist it as not. Under such situation, not only students’ shrine visit but opportunities to join shrine rituals, which were held not by schools but by shrines, were more and more increased. This went beyond the boundary between non-religion and religion. On the one hand, as seen above, religious compulsion was emphasized day by day. But it is not only the form of oppression toward Korean residents. For example, the education method of "Imperial Subjects Oath”, which was forced only in Korea, tried to highlight the aspects of physical move such as saying it in a loud voice or standing upright position, on the other .Primarily Jinja-Sanpai consists of the two aspects at the same time. One is the mental pray and the other is physical clap. In spreading Japanese typed schools, various types of the violent enforcement with strange divergent of those two aspects came with them. When Imperial Japan’s school system, in which Emperor worship was its core, was once introduced and spread in Korea, lots of contradiction and logical impasse were continuously exposed. Japanese Government General cannot choose but respond with temporal expedients.
現代日本の宗教史研究では、「国家神道」のパラダイムが再考され続けている。一つには、国家が神社を管理していた時代や制度を指す意味で厳密に、狭義に用いようとする動きである。もう一つは、学校教育や宮中祭祀の存続など、幅広い宗教性の問題として把握しなおそうという動向である。本稿は後者の視座から、朝鮮の学校教育を再考するものである。 神社、神道を歴史的に叙述しようとする研究史の視点は、これまで大部分キリスト教及びキリスト教会に対する神社参拝の強要、信仰の弾圧の問題へと集中してきた。しかし、植民地で強要されたのは、神社参拝だけではない(神社はそう多くの地域に設立されたわけではない)。地域社会に存在する普通学校の校舎内に作られた神社代理の施設―神棚や大麻殿や教育勅語奉安殿など―に着目する必要がある。 具体的な学校教育、学校生活を注意深く眺めると、教育の名目で強要された拝礼(敬礼)など幅広い強要、または教材や教育方法もまた、神社、神道との関連において叙述すべき歴史的な課題として浮かび上がる。 そもそも日本国内では近代教育を確立するとき、学校儀式は「国家祭祀」の非宗教性を取り入れて整備された。しかし、これは日本国内にしか通用しない特異な制度であった。朝鮮の学校教育において、天皇制が非宗教であるという建前は説得力を持ち得なかったのである。そうした状況下、1930年代以後の朝鮮では、学校儀式の原理である非宗教ではなく、宗教信仰を強いる側面が大きい宗教行事が、公立学校の児童生徒の参列のもとで、神社において実施され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一方ではこのように、宗教信仰という心の側面を統制する側面が強められた。しかしそればかりではない。 例えば「皇国臣民ノ誓詞」のように朝鮮のみで利用された教育行為は、「声を出す」「直立する」など、身体規律の側面がとりわけ強化されたものであった。元来神社参拝は、「祈り」のような心の中の動きと、「拍手」のような身体動作とが一体となって行われるものである。

5,200원

4

植民地朝鮮における天理教の布教について : 機関誌『みちのとも』を中心に

川瀨貴也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7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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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의 조선침략에 발을 맞추기라도 하듯 일본의 다양한 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상륙을 개시한다. 그 중 일본의 신흥종교인 천리교는 일찍이 한반도에 건너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연구자들 사이에도 신앙 계승의 측면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당시의 천리교의 포교실태와 식민지와 신앙에 대한 천리교도의 의식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 고찰할 목적으로 우선, 총독부·조선총동부의 종교정책을 개관하고 천리교의 기관지였던 『미치노토모』(道乃友)의 한반도 포교와 관련된 기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아울러, 시대적으로는 1930년대 초반까지를 대상으로 고찰하였다. 『미치노토모』 분석 결과, 천리교는 제국일본의 확대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제국 논리와는 다른 포교의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Japanese religions went over Korean Peninsula with the invasion of imperial Japan from late19th century. Tenrikyō was the first Japanese new religion that went Korean Peninsula and surviving till now. Some scholars examines the reason of succession of Tenrikyō. This paper attempt to introduce the religious policies of Government General Korea at first and investigate the tendency of Tenrikyō in colonial Korea. To testify the tendency, I use the articles about missionary on Korean Peninsula of Tenrikyō’s official organ Michi no Tomo. These articles gives us the information of Tenrikyō expanse, consciousness for colonial situation, and their faith. Investigating the articles of Michi no Tomo, we will find the conclusion that Tenrikyō kept the motivation of missionary different from the logic of empire in spite of keeping step with imperial Japan.
日本の諸宗教は、帝国日本の朝鮮侵略と歩調を合わせ、19世紀末から朝鮮半島への渡航を開始した。天理教は日本の新宗教の中で最も早く朝鮮半島に渡り、しかも現在までその命脈が保たれているものとして、その信仰の継承などについての研究が重ねられている。  本稿ではまずは統監府・朝鮮総督府の宗教政策を概観し、天理教の機関紙であった『みちのとも(道乃友)』の朝鮮半島布教に関する記事を中心に取り扱い、当時の天理教の布教実態、そして植民地や信仰に対する天理教徒の意識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のかということを、1930年代初頭までを対象に探ってみる。 『みちのとも』の分析から、天理教は帝国日本の拡大と歩調を合わせながらも、帝国の論理とは違う布教の動機を持っていたことが明らかとなった。

5,800원

5

식민지조선에 있어 천리교포교에 대하여 : 기관지『미치노토모』를 중심으로

가와세 다카야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9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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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의 조선침략에 발을 맞추기라도 하듯 일본의 다양한 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한 반도 상륙을 개시한다. 그 중 일본의 신흥종교인 천리교는 일찍이 한반도에 건너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연구자들 사이에도 신앙 계승의 측면 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당시의 천리교의 포교실태와 식민지와 신앙에 대한 천리교도의 의식이 어떠하 였는지에 대하여 고찰할 목적으로 우선, 총독부·조선총동부의 종교정책을 개관하고 천리교의 기관지였던 『미치노토모』(道乃友)의 한반도 포교와 관련된 기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아 울러, 시대적으로는 1930년대 초반까지를 대상으로 고찰하였다. 『미치노토모』분석 결과, 천리교는 제국일본의 확대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제국 논리와는 다른 포교의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500원

6

김억의 와카(和歌) 번역 텍스트 연구 : 「殉難遺珠」를 중심으로

박상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119-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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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하 식민지 조선에서 김억은『만엽집』을 발췌・번역한「万葉集鈔譯」,『愛国百人一首』를 완역한「鮮訳愛国百人一首」, 막부 말기 우국지사로 미화된 인물들의 와카를 조선어로 옮긴「殉難遺珠」와 같은 와카 번역 텍스트를 연달아 발표했다.「万葉集鈔譯」과「鮮訳愛国百人一首」에 대해서는 선행연구가 다소 있었지만,「殉難遺珠」에 대해서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글은 김억의 와카 번역 텍스트인「殉難遺珠」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한 최초의 글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 의의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9월부터 다음해인 1944년 3월까지 6회에 걸쳐 김억이 총 55수의 와카를 조선어로 옮긴 후, 와카 원문과 함께『半島の光』에 연재했던「殉難遺珠」라는 와카 번역 텍스트를 고찰했다.「殉難遺珠」는 김억이 막부 말기의 와카를 조선어로 번역한 것인데, 그 번역 의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殉難遺珠」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억은 일본 역사상 국가의 위기 및 국난 상황에 의로이 죽기를 각오한, 유명하지는 않지만 훌륭한 막부 말기의 애국지사로 칭송되는 인물들과 그들이 남긴 와카를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고 싶었다. 둘째, 단행본『鮮譯愛國百人一首 附憂國遺珠』에 실려 있는 조선문인보국회 회장이었던 야나베 에사브로의 서문과 김억 자신이 쓴 권두소언을 종합해보면, 김억은 식민지 조선에 황국신민화와 더불어 국어(國語) 곧 일본어(日本語)를 널리 보급시키고 싶었다. 김억의 와카 번역 텍스트인「殉難遺珠」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기고 있다. 예컨대 김억이 번역할 때 참조한「殉難遺珠」의 번역 대본 문제,「殉難遺珠」와 이것을 증보한「憂國遺珠」와의 관계 문제,「殉難遺珠」및「憂國遺珠」와「鮮譯愛國百人一首」와의 관련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추후 새롭게 다루고자 한다.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im Eok released various translations of wakas (a form of Japanese poetry) including the abridged translation of ‘Mannyousyu’, ‘One Hundred Patriotic Poems in Korean Translation’ and ‘Zyunanyuizyu’ which translated wakas on patriots during the late Bakuhu period into Korean. Even though there were some previous studies on the abridged translation of ‘Mannyousyu’ and ‘One Hundred Patriotic Poems in Korean Translation’, it wasn’t able to find any information on ‘Zyunanyuizyu’. Therefore, this study is significant in that it first investigated Zyunanyuizyu, one of Kim Eok’s translations of waka. When the Pacific War was in full swing, Kim Eok translated a total 55 wakas into Korean from September 1943 to March 1944. This study investigated ‘Zyunanyuizyu’ which was published with its original poem. ‘Zyunanyuizyu’ is the Korean translation of waka which described patriots during the late Bakuhu period. The purposes of the translation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as predictable from the title ‘Zyunanyuizyu’, Kim Eok wanted to plant the patriots who dared to die for their nation during the late Bakuhu period and their wakas in the colonial Joseon. Second, according to Yanabe Eisaburo (Chairperson of Joseon Writers’ Association)’s preface which appeared in ‘One Hundred Patriotic Poems in Korean Translation’, he intended to promote Hwangguk Sinminhwa and spread Japanese across the country.
植民地朝鮮で金億は『萬葉集』を拔萃・飜譯した「万葉集鈔譯」、『愛国百人一首』を完譯した「鮮訳愛国百人一首」、幕末における憂國志士の和歌を朝鮮語で訳した「殉難遺珠」といったような 和歌翻訳テクストを相次いで發表した。今まで「万葉集鈔譯」と「鮮訳愛国百人一首」についての先行硏究はあったが、一方「殉難遺珠」については皆無に等しかった。本稿は「殉難遺珠」について本格的に論じた最初の論文だったという点でその意義は少なくないと思われる。 金億の和歌翻訳テクスト「殉難遺珠」は大東亞戰爭の最中、すなわち1943年9月から翌年の3月まで6回にわたって朝鮮語で訳されたもので、ここには計55首の和歌が対訳の形で掲載されている。そして「殉難遺珠」では主として憂國志士の和歌が載せられているが、それを金億が朝鮮語で翻訳した意図は以下のようである。まず、「殉難遺珠」といった題目からうかがえるように、金億は日本歷史において國家の危機及び國難の狀況の中で死を覺悟した、有名ではないが優れた幕末の愛國志士や彼らの和歌を植民地朝鮮に植え付けたかった。 次に、『鮮譯愛國百人一首 附憂國遺珠』に掲載されている朝鮮文人報國會會長だった矢鍋永三郎の序や、金億が書いた卷頭小言を合わせたみると、金億は植民地朝鮮に皇國臣民化と共に、「國語」すなわち「日本語」を広く普及させたかった。さて、金億の和歌飜譯テクスト「殉難遺珠」に対する硏究は私たちに多くの課題を残している。たとえば、「殉難遺珠」の飜譯臺本は何だったのか、「殉難遺珠」とそれを增補した「憂國遺珠」との關係はどうなのか、「殉難遺珠」及び「憂國遺珠」と「鮮譯愛國百人一首」とはいかなる関係にあるのかといったようなものである。それらについては今後の課題としたい。

5,500원

7

在朝日本人の怪談と探偵小説研究 : 怪談における〈謎解き〉と京城記者を中心に

中村静代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13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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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식민지시기 재조선 일본인에 의해 발간된 일본어 잡지 『조선 공론(朝鮮公論)』에 실린 괴담과 탐정소설의 분석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어 대중문예의 특징과 그 오락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최근 문학, 민속학, 비교문화 등의 연구 분야에서 요괴, 귀신, 괴담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호러 붐과 괴담의 기원 및 그 이미지 변천을 논할 때 주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일본과의 관련성이다. 이들 연구는 대개 현재 한국의 귀신 이미지와 괴담 문화가 식민지시기 일본에서 수용된 것이며 그 변화 과정에도 일본과의 문화적 영향 관계가 개입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일 비교문화사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설명이긴 하나, 일제시기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조선어와 일본어로 구성 되어 있었던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적 교섭의 양상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는 재조선 일본인의 문예물들이 대중 문예물의 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주로 경성의 잡지 기자들에 의해 창작된 괴담이나 탐정소설들은 동시기 관련 장르를 선도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그 중 한 작품인 「봄 괴담 경성의 야밤중(春宵 怪談 京城の丑滿刻)」을 통해 괴담 속 수수께끼 풀이의 기법과 당시 탐정소설의 특징에 대해 분석하였다. 언뜻 보면 ‘옛날이야기’와도 같은 이 작품은 경성에서 생활하던 재조선 일본인의 시선에서 복층적인 식민지 공간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괴담과 탐정소설의 경계적인 작품으로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문적인 문예 작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의 문화 사정으로 인해, 당시 괴담이나 탐정소설을 비롯한 일본어 문예물은 주로 잡지기자 등 아마추어 문필가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일본인의 아마추어리즘은 잡지 동인들에 의한 ‘탐정 취미 모임’ 활동을 촉진시켰고, 나아가 ‘괴담’ 또는 ‘탐정소설’이라는 장르적 경계를 넘나들며 ‘재미’에 주안점을 둔 오락적 읽을거리를 더욱 활성화시켰다. 식민지시기 조선에서 일본어로 쓰인 ‘괴담’과 ‘탐정소설’의 오락적 특성은, 당대 경성의 잡지 기자들에 의한 아마추어 문예 활동을 통해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This research considered the characteristic of Japanese public literature in colony Joseon and its amusement through the analysis of the ghost story and detective novel in a Japanese magazine 『Joseon gongron (朝鮮公論)』, published by Japanese settlers in Korea during the colonial period. Recently, researches on monster, ghost, ghost story, etc. are actively progressed in the research field of literature, folklore, comparative culture, etc. However, when discussing Korean horror boom, the origin of ghost story, and the change of the image, the point which is mainly mentioned is the relation with Japan. These researches mention that mostly Korean ghost image and ghost story culture have been accepted from colonial period Japan, also, cultural influencing relationship with Japan is intervened in the change process. That is a meaningful explanation in the aspect of Korea and Japan comparative cultural history, however it has limitation that it doesn't contain all the aspects of more various and complex cultural relationship which was composed of Joseon people and Japanese people, Joseon language and Japanese language, in Japanese Imperialism colony Joseson. The literary works of Japanese settlers in Korea during the colonial period has a field of public literary work. Among those, mostly ghost stories or detective novels, creative by Gyeongseong magazine journalists lead the relevant genre during that time. Here, this research analyzed the technique of puzzle solution in ghost story and the characteristic of detective novel of the period through a work of them, 「Spring ghost story, the middle of the night in Gyeongseong(春宵 怪談 京城の丑滿刻)」. In an instant, this work, just like 'an old story', describes multi-storied colonial space from the viewpoint of Japanese settlers in Korea who lived in Gyeongseong. Also, this work is remarkable that it shows a special aspect as a boundary work between a ghost story and a detective novel. Due to the cultural situation of colony Joseon, which had no professional literature writer, Japanese language literary works including ghost stories or detective novels during that time were mainly written by magazine journalists or amateur writers. This Japanese amateurism promoted 'detective hobby meeting' activity by the magazine coterie members, furthermore, more activated entertaining reading matters beyond the boundary of genre, 'ghost story' or 'detective novel', by focusing on 'amusement'. The entertaining characteristic of 'ghost story' and 'detective story' written in Japanese in Jose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can be said to be formed through the amateur literary activity by the magazine journalist in Gyeongseong of the period.
本稿は、植民地時代の再朝鮮日本人によって出版された日本語の雑誌『朝鮮公論(朝鮮公論)』に掲載された怪談と探偵小説を分析し、植民地朝鮮における日本人大衆文藝の特徴とその娯楽性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近年、文学、民間伝承、比較文化などの研究分野で妖怪、幽霊、怪談などに関する研究が活発におこなわれている。そこで韓国のホラーブームおよび怪談の起源、そのイメージの変遷を論じる際に主に言及されるのが日本との関連性である。これらの研究は、現在の韓国の幽霊の画像と怪談文化が植民地時代に日本から受容されたものであり、その変化の過程にも、日本との文化的影響関係が介入されていると述べている。日韓比較文化史の観点からは意義ある説明ではあるが、日帝時代の植民地朝鮮に存在していた朝鮮人と日本人、朝鮮語と日本語からの多様な文化的空間の複綜性やその特殊性の把握には至っていない。植民地期の朝鮮では在朝日本人による文藝が大衆的読物の領域を形成していたが、そのなかでも主に軟派の雑誌記者たちによって創作された怪談や探偵小説は、同時代の大衆文藝ジャンルでも目立っている。本稿ではその中の一作品である「春怪談京城の丑満刻」を中心に、怪談における謎解きの技法と当時の探偵小説の特徴を分析した。一見すると昔話のようなこの作品は、京城に住んだ在朝日本人の視線から複層的な植民地空間を描き出している。また、怪談と探偵小説に跨る境界的な独特の様相を見せているという点で注目すべきものがある。専門の文芸作家が存在しなかった植民地朝鮮の文化事情のなかで当時の怪談や探偵小説をはじめとした大衆文藝は、主に雑誌記者などアマチュア文筆家たちによって書かれていた。これら在朝日本人のアマチュアリズムは雑誌同人らによる「探偵趣味の会」の活動を促進するさせ、さらに「怪談」または「探偵小説」というジャンル的境界を行き来しながら「面白味」に主眼を置いた娯楽的読み物を活性化させた。植民地朝鮮で日本人によって書かれた「怪談」と「探偵小説」の娯楽的特性は、当代京城の雑誌記者によるアマチュア文芸活動を介して形成されたも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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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환기와 소거, 그리고 일본어문학 : 김석범의 『1945년 여름』

김계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165-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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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25년이 지난 시점에서"1945년여름"을 환기하고, 일본어로 문학활동을 재기한 재일한국인 작가 김석범의 문학을 통해 해방과 패전이라는 관몀과 현실을 넘어 역사적인 기억을 작품 속에서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즉 일본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김석범의 문제의식에 대해 고찰하하였다. "1945년 여름"은 김석범의 자전적 소설로 1971년부터 73년 사이에 발표된4편의 단편 "장화", "고향", "방황" 그리고 "출발"을 한데 묶은 것으로 1974년에 간행되었다. 소설의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방황"까지는 해방 이전의 시기를 다루었고"출발"이 해방이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8.15 의 기록이 없다. 8.15는 해방으로부터 1개월이 경과한 시점에 과거의 기억으로서 추인된다. 장편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부분은 가필이 더해졌으나 중요한 8.15의 기록은스토리의 시간에 따르지 않고, 나중에 추인되는 형태로 기록되고 있다는 스토리텔링법은매우 흥미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여름"이라는 제목을 달고 전후의 내용을 배치하여 장편으로써 구성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1945년 여름"에 그려진 8.15를 전후한 기록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와 함께 언어의 문제가 이러한 기억에 간섭하여 지연시키고 있다. 해방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한반도로 또한 일본으로 돌아가는 왕복의 과정에서 관ㄴ념적으로 상상한 조국, 조국어와 자신과의 사이에 놓이 거리, 넘고싶은 단절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다. 일본과 조선, 그리고 일본인과 재일한국인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그들은 해방과 패전이라는 어느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자신들이 나아갈 길로 나아간다. 관념과 몽상의 조국보다는 자신의 현실에 한 발 내 딛는 결의를 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통해 작가 김석범의 일본어문학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김석범은 재일 1세대로서 의식적으로 일본어를 가지고 재기를 하고자 하였으며8.15의 기억을 환기하여 폭력의 기억과 내면의 저항이라는 재일한국인문학을 전개해 간다. 김석범이 일본어문학의 기점에서 제기한 문제는 현재까지 미해결인채 남아 있는 탈식민지사회 속에서 망각되고 있는 기억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This study considers Summer in 1945 written by Kim, Seok-bum, an autobiographical novel. This novel consists of four short stories, which are later edited in the form of a novel in 1974, when Kim Seok-bum reactivated novel writing in Japanese. In this novel, the main character Kim Tae-jo went over to Colonial Chosun and returned to Japan before liberation in 1945. In other words, he couldn't see the liberation of his own country. So, the record about '8·15' is not seen in this novel. However, not that he wrote defeat of Japan. Nevertheless, Kim Seok-bum combined four stories under the title of 'Summier in 1945'. This study analyzed the meaning of this narrative style. Kim Tae-jo received violence three times both in Japan and Chosun, and by Japanese and Koreans living in Japan. He didn't participate in either side of liberation or defeat. And he realized what he imagined about his own country as a mere romantic dream. He felt a sense of alienation between himself and his country. Especially Korean language he heard in Seoul was impassable barrier. Since then, he decided to take a step forward basing on the real life of his own. Japanese language to Koreans domiciled in Japan since colonial period is a strangling language. However, ironically through Japanese language they can liberate themselves. If so, what should be written in Japanese? This question was asked when Kim Seok-bum consciously reactivated Japanese writing in 1970's. Kim Seok-bum is the first generation domiciled in Japan since colonial period. He raised the meaning of writing in Japanese turning back to '8·15', which is the starting point of Japanese-language literature by Koreans. His problem posing arouses historical memory being forgotten in post-colonial society.
本稿は日本の植民地から解放されて25年が経った時点で、「1945年夏」を喚起し、日本語で文学活動を再起した在日朝鮮人の金石範の文学を通して、「解放」と「敗戦」という観念と現実を越え、歴史的な記憶を如何に語っていくかを、日本社会に向けて問うている金石範の問題意識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金石範の自伝的な小説『1945年夏』は1971年から1973年まで発表した「長靴」、「故郷」、「彷徨」、そして「出発」の四つの短編を長編に編んだもので、1974年に刊行された。小説の内容から見ると、「彷徨」までは朝鮮解放の以前の時期を扱っており、「出発」が解放以降の時期を背景にしている。ところが、「8・15」の記録がない。「8・15」は解放から一ヶ月経った時点で、過去の記憶として追認される。長編化する過程で、他のところは加筆が行われている反面、肝心な「8・15」の記録は物語の時間に沿って書かれておらず、後から追認される形で記憶されている語り方は興味深い。にもかかわらず、あえて、「1945年夏」という題名の下に、前後の内容を配置して長編として構成している理由を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1945年夏』に描かれている「8・15」を前後した記憶は、暴力で点綴されている。そして、言葉の問題がこの記憶に干渉し遅延させている。解放を前後して日本から朝鮮半島へ、また、日本へ帰る、という往復のなかで、観念的に想像してきた祖国、祖国語と自分との間に隔たりがあり、越えがたい断絶があることを作中人物は認識する。日本と朝鮮、そして、日本人と在日朝鮮人に暴力を受けながら、彼は「解放」と「敗戦」のどちらにも加担せずに、自分の進むべき道を求めていく。観念や夢想の「祖国」より、自分の現実に沿った道に一歩踏み出す決意をする彼の内面を通して、作者の金石範の日本語文学の意味を探ることができる。金石範は在日一世代として、意識的に日本語をもって文学活動を再開していこうとして、「8・15」の記憶を召還し、暴力の記憶と内面の抵抗としての在日朝鮮人文学を展開しているのである。彼が日本語文学の起点で提起した問題は、現在なお解決できずに残っており、脱植民社会のなかで忘却されていく記憶を我々に喚起している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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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芥川龍之介におけるゲーテとイエス :「或阿呆の一生」と「西方の人」をめぐって

林薫植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18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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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 괴테와 예수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을괴테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의 삶을 비추어 고찰하는 데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아쿠타가와의 대표적인 자전적인 작품인 "어느바보의 일생" 과 "서방인"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이른 통해, 아쿠타가와는 두 명의 인물을 대조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괴테에 경도되었던 아쿠타가와는 작가와 정치가로서 정력적인 활동을보인 괴테에 대한 강한 동경을 보였다. 초인적인 <운명>에 사로잡히지 않고 문예 뿐 아니라과 정치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재능을 발휘한 괴테는 아쿠타가와의 눈에 예수보다도 위대한 인물이었다, 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쿠타가와의 눈에 비친 예수는 <운명적인 출생>과 생애 <운명>의 지배를 받으며 인생을 살아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쿠타가와는 괴테는 처세술에 능한 인물로 보이나 예수는 처세술에 능하지 못한 인물로 인생에서의 실패자로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쿠타가와에게 괴테로부터는 초인의 모습을 찾은 반면 예수로부터는 인생의 낙와자로서 상바보의 실체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쿠타가와의 시각에는 아쿠타가와 자신이 산 인생에 대한 관념이 투영되어 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괴테는 아쿠타가와 자신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예수는 아쿠타가와의 회환의 자화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괴테와 예수의 인생을 통해 아쿠타가와가 자신의 인생관 운명관이 피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A purpose of this work is to study the meaning of the existences of Goethe and Jesus for Ryunosuke Akutagawa by focusing on Goethe and comparing Goethe with Jesus. After studying with emphasis on autobiographical works, The Man of the West and the Fool’s Life, it turned out that Akutagawa had realized Goethe and Jesus as the two contrasting figures. Akutagawa, who was devoted to Goethe, had strong admiration to Goethe’s vivid activities as an author and politician. Akutagawa considered Goethe as the greater being than Jesus, because Goethe showed amazing talents in various areas without being captured by the “destiny”, while he regarded Jesus as the one who was born as a “son of destiny” and lived His entire life governed by the “destiny”. In addition, Akutagawa thought Goethe knew how to get on well in the world, while he considered Jesus as the one unsuccessful in life due to His lack in worldly wisdom. After all, Akutagawa’s own notion about life is reflected in his such viewpoint. In summary, Goethe was the one on whom Akutagawa put his own hope, while Jesus was Akutagawa’s own portrait of repentance. Through this study, it turned out that Akutagawa’s viewpoints toward the life and destiny were represented in the lives of Goethe and Jesus.
本稿の研究目的は、芥川龍之介にとってゲーテとイエスはどういう存在であるかを、ゲーテに焦点を合わせると共にイエスにも照らしつつその意味を究めることにあった。自伝的な作品「或阿呆の一生」と「西方の人」を中心として考察した結果、芥川は二人の人物を対照的な存在と把握していたことが分かった。 学生時代からゲーテに傾倒していた芥川は、作家や政治家として精力的な活動ぶりを見せるゲーテに強い憧れを感じた。デモーニッシュな<運命>に捕らわれずに、文芸面や政治家など、多方面ですぐれた才能を発揮していたゲーテは、芥川の目にはイエスよりも偉大な人物だったのである。と言うのは、芥川の目に映ったイエスは<運命の子>として生まれ、生涯<運命>の支配を受けつつ人生の道を歩んでいったからであった。したがって芥川は、ゲーテは処世術に長ける人物と見たが、イエスは処世術の下手な人物であり人生での失敗者と見ていたのである。 要するに芥川は、ゲーテからは「超人」の様子を見たのに比して、イエスからは人生の落伍者としての「超阿呆」の実体を見ていたことが分かった。このような芥川の視角には、芥川自身の過ぎし人生に対する観念が投影されていたのは言うまでもなかろう。つまり、ゲーテは芥川自身の<願望の対象>であり、イエスは芥川の<悔恨の自画像>だったのである。 以上のような考察を通して、ゲーテとイエスの人生の上には芥川自身の人生観や運命観が披瀝され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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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센에도상(歌仙絵図像)의 변천 : 출판문화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김지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209-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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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헤이안 시대의 유명한 가인들의 모습을 그린 ‘가센에(歌仙絵)’라는 일본의 전통적 회화주제에 대한 연구이다. 가센에는 가마쿠라 시대의 에마키(絵巻)에 그려진 ‘삼십육가센(三十六歌仙)’을 시초로 하고, 이후 병풍, 족자, 편각, 책 등의 다양한 미디어에서 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미디어를 바라보는 감상자의 시선이 정형적인 가센에도상 안에서 군상(群像), 가합(歌合)의 표현 등의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일본에서 연구되었던 삼십육가센에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근세대중문화, 특히 출판문화의 형성과 그 영향을 전통적인 가센에 도상의 변천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그 결과, 출판 이전에는 ‘벽의 그림’을 중심으로 가센들이 정형화 된 이미지로 표현되었다면, 출판 이후의 ‘책의 그림’에서 가센들은 유녀(遊女)의 모습으로 또는 가부키 배우의 모습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의 에혼(絵本)『스가타에햐쿠닌잇슈(姿絵百人一首)』에서 묘사된 가센들의 당세풍(当世風) 표현은 상류계층의 문화가 대중화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패러디를 통해 누구든지 고전문학을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이해도를 높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a study on a traditional Japanese painting theme called Kasen-e (歌仙絵), which is about the celebrated poets in Heian era. Kasen-e can be found in variety of media, such as folding screens, hanging scrolls, framed pictures and books starting from Thirty-six Immortals of Poets (三十六歌仙)- an Emaki (絵巻) drawn in the Kamakura era. To categorize the characteristics of Kasen-e in each media, the study on the change of the images was done with periodic division of before and after the publication. If each kasens were drawn in a specific posed images as 'pictures on the wall' before publication began, they were shown in the form of prostitutes or kabuki actors as 'pictures in the book' in the after period. To heighten the understanding of traditional Japanese literature, the study used the picture book (絵本 ehon) Portrait of One Hundred Poets (姿絵百人一首 Sugata-e hyakunin isshu) by Hishikaga Moronobu (菱川師宣) which adapted parody,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 of Edo culture to describe touseihuu (当世風) - the modernization during the Edo era - as a reference.
本論文は平安時代における著名な歌人たちの姿を描いた「歌仙絵」という、日本の伝統的な絵画主題に関する研究を行ったものである。歌仙絵は鎌倉時代の絵巻(『佐竹本三十六歌仙絵巻』)に初出してから、屛風、掛軸、扁額、本など様々なメディアに図像をみることができる。本論分では、各メディアに現れた歌仙絵の特徴を分類するために、出版文化以前から出版文化以後にかけて起きた歌仙絵図像の変化に注目した。筆者は日本で研究された三十六歌仙の先行研究をもとに、近世大衆文化、なかでも出版文化の形成とその影響について考察するに当たって、伝統的な歌仙図像の変遷を中心に考えた。その結果、出版文化以前には「壁の絵」を中心として歌仙たちの定型化されたイメージが描かれたならば、出版文化以後の「本の絵」には歌仙たちが遊女の姿で、あるいは歌舞伎俳優の姿として表れていることがわかった。特に、菱川師宣の絵本『姿絵百人一首』に見られる歌仙たちの当世風表現は、上流階層の文化が大衆化される過程に現れる見立、やつし、もどきといったパロディを用いて、誰もが古典文学に容易に接して楽しめるよう、古典文学に関する理解度を高めることに貢献した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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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태평양동맹 : 지역 간 교류와 협력의 강화를 중심으로

송석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23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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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의 지역 협의체 외교의 추이와 거기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특성에 대해 살펴보고, 중남미의 지역 협의체인 태평양동맹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 강화를 설립 목표 가운데 하나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태평양동맹 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태평양동맹은 일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일계(日系)인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과 태평양동맹의 지리적 거리감과 심리적 거리감은 반드시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심리적 거리감이 지리적 거리감을 크게 좁히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부 및 민간 기업 레벨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진출과 지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은 태평양동맹의 옵서버 국가이다. 아직 태평양동맹이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완비하여 추진하고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실행되기에는 앞으로도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 산업별 기업에게 태평양동맹은 향후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태평양동맹 가맹국들이 개별 국가로 존재하는 것보다 집단으로 결속함으로써 일정한 시장 규모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태평양동맹의 결성은 일본 정부나 기업으로 하여금 태평양동맹 가맹 각국에 대해 통일적으로 요구할 사항을 국가별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동맹 레벨에서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 일본 기업에게는 비즈니스 면에서 투자나 기업 진출에 긍정적인 조건이 될 것이다. 현재 태평양동맹에서 성공적인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제조업에 한정되어 있으나, 이미 이 지역에 진출하고 있는 기업 수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앞으로 다른 산업별 기업의 진출과 투자의 가능성은 결코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태평양동맹 설립은 또한 이 지역에서의 한국, 중국, 일본 간의 치열한 비즈니스 경쟁을 촉진할 것이다. 태평양동맹은 일본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에게도 기회로 여겨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일계인이 이 지역에 존재한다는 점도 일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This article examined regional consultative foreign policy of Japan and its general characteristics. In particular, the Pacific Alliance was closely analyzed since it is one of regional consultative bodies for Central and South America, aiming to promote political and economic relations with the Asia Pacific region. Despite the long physical distance between Japan and the Pacific Alliance, many Nikkeijins have resided in Central and South America. Alberto Kenya Fujimori, the former Peruvian president, is exemplary case. This circumstance indicates that geographic and psychological distance might not always match. However, more assertive expansion and support both at governmental and civil levels will be necessary to reduce the gap. Being one of observer states of the Pacific Alliance, Japan has not established specific action plans and implemented them. However, the Alliance has a high potential to provide good opportunities for Japanese industries for two reasons. Firstly, group unity of state parties of the Pacific Alliance creates basis of scale economy. Secondly, it becomes easier for Japanese government as well as corporations to negotiate since the Alliance can function as a representative body of member states. These factors may well create positive conditions for investment and expansion of Japanese corporations in Central and South America. So far, it has been only manufacturing industry being successful in the region. Yet, an increasing number of Japanese companies entering into the regional market suggests that further progress by other industries is predictable. Moreover, establishment of the Pacific Alliance would accelerate business competition among Japan, South Korea and China as the other two countries have also sought for an opportunity in the region. In this context, strong presence of Nikkeijins in Central and South America will provide Japan a better business environment.
本稿は、日本の地域協力体外交の推移とそこから発見される一般的特性について検討し、中南米の地域協力体である太平洋同盟がアジア太平洋地域との政治的、経済的関係の強化を設立目標の一つとしているところから日本の太平洋政策について分析したものである。太平洋同盟は日本から遠く離れた地域であるものの、多数の日系人が存在している。こうした事実は日本と太平洋同盟の地理的距離感と心理的距離感とは必ずしも一致しないということを示唆するものであろう。日本は太平洋同盟のオブザーバー国である。まだ太平洋同盟が具体的なアクション・プランを備えて推進している段階であるとは言えない。こうしたプロジェクトが実行されるにはもっと時間がかかるであろう。しかし、日本の製造業をはじめとする様々な産業別企業には、太平洋同盟は今後大きなチャンスになり得るだろう。太平洋同盟の加盟国が個別国家として存在するよりは集団として結束することによって一定の市場規模を備えたからである。太平洋同盟の結成は、日本政府や企業をして太平洋同盟の加盟国ごとに対して統一的に要求しようとする事項を国ごとに要求するのではなく太平洋同盟のレベルで要求できることでもある。こうした事実は、確かに、日本の企業にはビジネスの側面で投資あるいは企業進出にポジティブな条件になるであろう。現在、太平洋同盟の地域に進出している日本の製造業の企業数が少なくないことから、今後ほかの産業別企業の進出や投資の可能性は決して無視できないだろう。太平洋同盟の設立は、またこの地域における韓国・日本・中国の間の激しいビジネス競争を惹き起こすであろう。太平洋同盟は日本だけではなく、韓国や中国にもチャンスと見なされるであろうからである。こうした点において、多数の日系人がこの地域に存在していることは日本にとっては特別な意味があると言える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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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기 일본총리의 한반도 및 한일관계 인식변화(1991-2013) : 국회소신표명 연설 분석

양기웅, 안정화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5집 2014.12 pp.265-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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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미야자와 내각에서 아베 2기 내각까지 탈냉전 시기 일본총리들의 소신표명연설 중 한반도와 한일관계에 대한 발언을 시대 순으로 정리하고 빈도분석과 담론분석을 실시한다. 분석결과를 정리하면 ‘빈도조사’를 통해서, 과거사 사죄와 반성의 발언이 가이후 총리 시기에서 무라야마 총리 시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담론수준의 분석’을 통해서 핵과 미사일 그리고 납치문제를 포함하는 북한문제와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북정책과 북일교섭에서 「한국과 긴밀히 연계한다」는 일본정부의 단서조항이 2000년 중반 이후 사라진 것을 발견한 점도 흥미롭다.
This study examines Japanese prime ministers' general policy speeches (shoshin hyomei ensetsu) from Kiichi Miyazawa to Shinzo Abe through discourse analysis and frequency analysis, focusing on statements on the Korean peninsula and Korea-Japan relations during the Cold War. The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the frequency of "apologies' for past history by Japanese prime ministers increased in the specific period since prime minister Toshiki Kaifu to Tomiichi Murayama. The second, the discourse on Korea-Japan cooperation in the North Korean problem and Japan's relations toward North Korea relation in general policy speeches has been modified from the statement by prime minister Koizumi in 2004.
この論文では宮沢内閣から安倍2期内閣まで脱冷戦の時代、日本総理の所信表明演説の中に韓半島と韓日関係に対する発言を時代順に整理して頻度分析と談論分析を実施した。分析結果を整理すると、「頻度調査」を通じて、過去への謝罪と反省の発言が海部総理の時期から村山総理の時期に集中しているという点を発見した。そして「談論水準の分析」を通じて核とミサイル, そして拉致問題を含む北朝鮮問題と国交正常化に向けた対北朝鮮政策と日朝交渉において、「韓国と緊密に連携する」という日本政府の前提条件が次第に変化していることを発見した点が興味深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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