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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0집 (10건)
No
1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과 조선사회

이형식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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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은 조선귀족, 한방의회, 일본인의사회, 서양인 선교사 등의 민간 부분과의 대립・교섭・경쟁하는 과정에서 결정되었다. 조선에서의 위생행정은 지배 권력과 피통치자 사이의 이항대립적인 구도가 아니라 지배권력, 피통치자, 재조일본인, 선교사 등이 참가하는 중층적인 구조에서 결정되었으나 1910년대 헌병중심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전제성이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는 묘지문제에 대해서 조선귀족들한테도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묘지문제를 둘러싸고 포섭과 회유의 대상이었던 조선귀족들과도 갈등을 빚어갔다. 조선귀족들은 한방의들이 추진한 한방식피병원설립운동에도 관여하지만, 동 운동은 한방의의 정치세력화를 경계하는 헌병경찰의 탄압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데라우치 총독은 부임당시 의료기관의 확충을 시정의 중요한 사업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식산이나 교통정비를 우선시하여 대한의원부속의학교를 축소하는 등 의학교육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인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요망을 수용해서 서양선교사는 적극적으로 의학교육기관의 설치와 확장을 시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위생을 둘러싼 헤게모니 경쟁에서 수세적인 입장에 처해지게 되자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의학교육에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인가하기 전에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총독부는 의료, 교육을 통해 서양인 선교사들이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일본인의사회는 임시경성위생위원회에 참가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진회 준비를 위한 비상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의사회도 참가할 수 있는 중앙위생회 설치는 전염병예방령의 제정과정에서 논의는 되었지만, 결국 설치되지 못하고 민간의 위생행정에의 참가는 대만과 비교해 보더라도 극도로 제한되었다. 이처럼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행정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조선인, 재조일본인, 서양인선교사를 포함한 조선 사회와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The hygiene policie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in the 1910s were determined in the process of conflicting, negotiating and competing with the private sectors including nobles of Joseon, the oriental medicine assembly, the Japanese medical association, western missionaries and so on. The hygiene administration in Joseon was decided not in the binary confrontation between the ruling authority and the oppressed, but in the multilayered structure where the governing power, the subjugated class, Japanese residing in Korea, missionaries participated, but the repressive reign by the military force in the 1910s led to noticeable autocracy. The Department of Police Affairs General Inspection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lung to their strict position against the nobles of Joseon with regard to a tomb problem and came into conflict with them, the target to win over and conciliate to their side. Korean nobles were also concerned with the oriental hospital establishment movement carried forward by herb doctors, but only to fail because of the oppression by the military police alerted to the herb doctors’ gaining political power. Whil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was passive about medical education, western missionaries actively tried to set up and expand medical education organizations, which pressure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found a medical college. This le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o fall into a defensive position in the competition for hegemony centered around hygiene and to change their previous attitude to a forward-looking one toward medical education. It didn’t want western missionaries to extend their influence through medical care and education. The Japanese medical association joined a provisional hygiene committee of Gyeongseong in order to prepare for a competitive exhibition, but it was nothing more than an emergency measure for a show. A central medical association in which the medical association could also participated was discussed in the process of legislating an infectious disease prevention law, but failed, and the participation of the private sector in the hygiene administration was extremely restricted compared to Taiwan.
朝鮮総督府の衛生政策は朝鮮貴族、漢方醫会、日本人醫師会、西洋人宣教師などの民間セクターとの対立⋅交渉⋅競争の過程において決定された。朝鮮貴族と連携しつつ推進された漢方醫師らによる漢方式避病院設立運動は、漢方醫の政治勢力化を警戒する憲兵警察の弾圧によって失敗に終わった。他方、日本人醫師会は共進会の準備のため、臨時京城衛生委員会に参加したが、それはあくまでも共進会準備のための非常処置にすぎなかった。醫師会も参加できる中央衛生会については伝染病予防令の制定過程で議論はされたものの、結局設置されず、民間の衛生行政への参加は台湾に比べて極めて制限された。さて醫学教育に消極的な朝鮮総督府に比べ、西洋宣教師は積極的に醫学教育機関の設置及び拡張を試み、朝鮮総督府の醫学専門学校設立に圧力をかけた。このように一九一〇年代の衛生行政は朝鮮総督府、特に警務総監部の専制性が顕著になるなかで、民間セクターと結びつきながら重層的に決定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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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프롤레타리아음악운동과 우타고에운동 1 - 방침ㆍ인물ㆍ활동양상을 중심으로

이지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2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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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일본 프로레타리아음악운동과 우타고에운동을 비교하여, 양자간의 관련성에 대해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프로레타리아 음악운동과 우타고에 운동은 다양한 방면에서 유사성을 보이는데,먼저, 일본공산당의 도입 하에 문화공작에 대한 임무를 띠고 대중을 포섭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행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번째 이 두 운동은 예술지상주의 음악을 벗어나 노동자들의 편향적 선동을 위한 투쟁가를 부르거나 기업 속에 음악 서클을 육성하는 등 중요방침을 함께 하였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인적 네트워크 면에서도 프로레타리아 음악운동의 중심인물은 우타고에운동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藏原惟人는 2차세계대전 이전부터 이후까지 문화정책을 담당한 인물이고, PM의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세키 아키코( 関鑑子)는 藏原의 경험을 살려 우타고에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프로레타리아 음악 운동의 주요한 활동은 우타고에 운동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표현된다. 가령 우타고에 운동의 음악회는 연주자와 청중이 호응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프로레타리아 음악운동에서 보여준 음악회의 형태와 같은 형태이다. 프로레타리아 음악운동과 우타고에 운동의 무엇보다 중요한 활동 중 하나인 기업 안에 음악서클을 조직하는 것으로, 프로레타리아 음악운동에서 활용했던 방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디어 이용에 있어서도프로레타리아음악운동의 경우『音楽新聞』과『프로레타리아音楽』을우타고에운동의 경우는 『うたごえ新聞』을 발행하는 등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양 운동은 기본방침, 주요인물, 음악회, 서클조직, 출판물의 각면의 활용에 있어 관련성 깊은 점을 확인할 수 있어 전후 우타고에 운동이 적어도 1950년대 초엽까지 전쟁 전의 프로레타리아음악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생, 성장해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e current study, I have studied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ese Proletarian Music Movement and Utagoe Movement by comparing various aspects of these two musical movements. Proletarian Music Movement and Utagoe Movement have similarities in that both musical movements had conducted various activities to win public over under the control of Japanese communist party. These movements had proceeded with such a course of actions as overthrowing the art-for-art principle, providing struggle songs for an agitation propaganda, and nurturing music societies in corporations. Key figures in Proletarian Music Movement also played central roles in Utagoe Movement. Kurahara Gorehito took charge in cultural policy of communist party both before and after the second world war. Seki Akiko, who served as the first chairman of Association of Proletarian Musicians, had led the Utagoe Movement, taking advantage of his previous experience. Similarities between the two movements can also be found in the major activities. These include concerts with audience participation, systematization of the corporate music societies, dispatching music bands, and publication of newspaper as a bulletin. Taken together, Proletarian Music Movement and Utagoe Movement were highly related in terms of basic policies, key figures, concert, music societies, and publications. Therefore, I conclude that at least until early 1950’s, Utagoe Movement had been developed and progressed as an extension of Proletarian Music Movement.
本研究は日本の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とうたごえ運動を比較し、両者の関連性について考察した。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とうたごえ運動は、日本共産党の指導のもとに文化工作の任務をもって大衆を包摂するために様々な活動を行なったことに共通点がある。また、両者は、芸術至上主義の音楽を打ち破って、労働者のアジプロのために闘争歌を歌うことや企業のなかに音楽サークルを育成することなど、重要方針を同じくしている。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の中心人物はうたごえ運動においても核心的な役割を果たしている。藏原惟人は戦前や前後に共産党の文化政策を担当し、P·Mの初代委員長であった関鑑子はその経験を活かしてうたごえ運動を導いた。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の主な活動は、うたごえ運動において類似した形で表れている。うたごえ運動の音楽会は演奏者と聴衆が呼応する形を持っていたが、これは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の音楽会と同じ形である。また、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とうたごえ運動のもっとも重要な活動の一つは企業のなかに音楽サークルを組織することであり、この側面からも両音楽運動の関連性が分かる。うたごえ運動が機関誌を発行して普及活動を行なっていた方法も、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で用いた方法である。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では『音楽新聞』や『プロレタリア音楽』を、うたごえ運動では『うたごえ新聞』を発行した。要するに、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とうたごえ運動は、基本方針、重要人物、音楽会、サークル、出版物の各側面において関連性が深く、戦後のうたごえ運動は少なくとも一九五〇年代の初頭までは戦前のプロレタリア音楽運動の延長線上で発生し、進行してきたと言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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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言語の政治学-朝鮮言語政策ㆍ社会史再考

三ツ井崇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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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특히 식민지 시기 조선의 언어 정책에 대해서는 최근에 국어학, 사회언어학, 국문학 등의 분야에서 주목하게 되었는데, 그에 비해 충분한 실증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기가 어려운 연구상황이다. 본 논문은 그러한 연구동향을 전제로, 식민지 시기 언어정책과 언어사회에 관한 분석을 통해 식민지 권력의 침투과정과 조선사회의 대응에 대해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언어-문자 내셔널리즘을 토대로 네이션(nation)을 만들 만한 ‘국어(national language)’의 정비가 추진되었지만,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그 시도를 관철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식민지 시기로 접어들면서 두 개의 ‘국어’의 논리가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어의 위신은 위에서부터 높아지기는 했으나 일본어의 세계가 조선 사회로 쉽게 침투하지는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그러한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어의 세계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언어지배를 전개하여 갔다. 총독부가 조선어 규범화 과정에 나서게 된 사실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침을 채용하는 것 자체가 식민 지배의 시작 단계에서 지적되었던 ‘국어=일본어’를 통한 ‘동화(同化)’의 논리와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총독부 언어지배가 안았던 모순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교육정책 상은 일본‘국민성’을 함양시키는 ‘국어’조차 미디어의 역할로서 보면 위험한 언어일 수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전근대적 가치를 남기고 있던 한문에 존재가 있었고, 특히 전시체제기에는 한문 또한 ‘국어’의 논리에 저항적 존재일 수 있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식민지 시기 언어환경을, 단순한 지배와 ‘말살’이 아닌 복잡한 권력관계로서 그려낼 필요가 있음을 확신한다.
We have often paid an attention to Language Problems in Modern Korea from the viewpoint of education of Japanese language for Korean prople, and often put an emphasis on its forcefulness. Though these cases are established facts, they aren’t all of language problems under colonial Korea. The author of this paper(=Mitsui) cares about some language problems in Modern Korea, such as education and standardization of Korean language, languages of media, and thinks about the character of ‘language problems’. As I have proved until now, standardization of Korean language was held as movements by Korean Intellectuals, but was too held as cultural management policy by Korean Government General. Here was a conflict between Korean nationalism and Japanese nationalism. And there was other conflicts among languages of media, Japanese, Korean, and traditional Chinese, too. We can recognize the language politics which value, function, and prestige mingled. We have to analyze the complex mechanism of policy, movements, and society of language, and understan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9,100원

4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역사화 속의 국가주의

김용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10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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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正館의 역사화나 전시회에 출품된 역사화 등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의 역사화는 황국사관에 바탕을 둔 그림들로서 역사교육의 교재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전선동의 매체로 사용되었다. 역사인물에는 14세기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같이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을 보필하였고, 카마쿠라(鎌倉)막부 토벌을 시도한 무장이나 에도(江戶)시대 미토학파(水戶學派)의 학자들, 임진왜란 때의 장수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등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장르상으로 일본화가 대부분이고 전투장면을 그린 역사화가 없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그 이유는 일본화와 서양화의 차이, 그리고 일본화가의 인식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화는 서양화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역사화는 일본의 전통적인 기호와 상징, 그리고 은유로 전쟁을 선전선동하는 매체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Historical paintings during Asia-Pacific War in Japan, including historical p aintings of Yosei-kan養正館, and others exhibited in exhibition were painted in the view point based on nationalism ideology, which were used as teaching material and media for propaganda of war except ones of Yosei-kan. Among historical figures there are 14th century samurai Kusunoki Masashige楠木正成 who fought for Emperor Go-Daigo後醍醐 in his attempt to wrest rulershi p of Japan away from the Kamakura鎌倉 shogunate, war hero Minamotono Y oshitsune源義経 who helped establishment of Kamakura shogunate in 13th ce ntury when the Samurai spirits was developed, Edo江戶 period Mito水戶 schoo l scholars who advocated emperor, and Kato Kiyomasa加藤淸正 who was mil itary leader during Japanese invasion in 16th century. But it is very difficult to see real combat in historical paintings, which wer e almost Japanese traditional painting. The reason seems to be the differenc e between western style painting and traditional painting, and recognition of J apanese painting painters. They thought Japanese war painting to be different from western. Nevertheless it is the solid fact that historical paintings during Asia-Pacific War in Japan were the media for war propaganda and teaching materials through metaphor and using traditional code and symbol.

6,400원

5

일본의 대외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윤상인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13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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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문화가 세계적이 차원에서 인지되어 널리 유행하게 된 계기를 이룬 곳은 늘 서양이었다. 자포니즘에서 쿨재펜에 이르기까지 일본문화는 대외적으로 서양의 인식적, 미적 규범에 의해 인정과 평가를 거쳐왔다. 그러던 중 메이지시기 이후 1980~90년대까지 일본문화는 보편적 가치와 특성보다 그 특수성이 강조되는 형태로 국제사회 속에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일본문화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쿨재팬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쿨재팬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일본의 대중문화가 지니는 경쟁력과 비정부적인 차원의 영역 즉 시민과 문화소비자로서의 문화주권을 행사 가능한 사회풍토 속에서 싹틔운 거으로 이러한 풍토가 정비된 것이 전후의 평화, 민주주의노선이었다. 아울러, 이본 인문학연구는 쿨재팬의 다국적 혹은 무국적적인 속성에 민족정인 아이덴터티와 문화적 연속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Historically, it was the West which provided an opportunity for Japanese cul ture to be globally acknowledged and widely spread. From Japonisme to ‘Co ol Japan’, Japanese culture have been recognized and evaluated on the basis of Western standard of epistemology and aesthetics. Since Meiji period, Japa nese culture had been internationally spread with peculiar form rather than uni versal feature until 1980s. However, ‘Cool Japan’ a new symbol of Japanese culture after 1990s,chose different way from the past. The power of Japanese popular culture which have been the cornerstone of ‘Cool Japan’ stems from the area of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is derived from a society that citizens exert cultural sovereignty as cultural customers, and it is postwar peaceful and democratic line which made that special feature. The Japanese humanity studies intervene to endow national identity and cultural continuity with multinational and non-national characteristics of ‘Cool Japan’.

5,500원

6

전후 일본의 문화정책과 인문학

조관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15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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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후 일본의 문화정책 형성과 인문학의 상관성을 조사, 분석하였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과거와 ‘경제동물’의 이미지를 극복하고 ‘문화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인문학은 중요한 사상적⋅정책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전후 혼란기에 인문학자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아마노 테유(天野貞祐), 법학자 다나카 고타로(田中耕太郎), 사회사상가 모리토 다츠오(森戸辰男)는 문부대신으로 등용되어 평화주의에 입각한 법제정 및 인문주의에 기초한 교육개혁을 주도하였다. 1968년 이후 문화청은 전 국민이 지역개발과 결합하여 문화시대를 추구하는 문화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1970년대 이후에는 국제적인 문화 발신 및 국위 선양을 목적으로 한 문화외교를 시작하고 1980년대에는 인문학적 성과에 기반한 학술외교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고도성장기에 축적된 문화자본을 기반으로 하여 경기침체를 적극적으로 돌파하는 문화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문학의 전통이 사회의 문화적 기반을 강화하고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Cultural Policy and Humanities of Japan after the War Cho, Kwanja This paper investigates and analyzes about cultural policy development of Japan and correlation of humanities after the World War II. Humanities provided important ideological and political foundation when Japan was overcoming imperialism and the ‘economic animal’ image of the Japanese. Especially, the four scholars (Abe,Amano, Tanaka, Morito) who lived at the time of political chaos after war are focused in this paper. As appointed ministers of education, they leaded law establishment and educational reforms based on peace and humanities. Since 1968, the agency for cultural affairs conducted cultural policy which combined regional development and pursue of cultural period of the entire nation. Also since 1970’s, cultural diplomacy purposing international cultural dispatch and enhancement of national image has started. The academic diplomacy based on achievement of humanities progressed actively since 1980’s. After 1990’s, cultural policy for breaking through economic stagnation is continuing with cultural capital accumulated in the Era of High Economic Growth. In that process, tradition of humanities is reinforcing cultural infrastructure and enhancing national competitiveness.

7,000원

7

富士川流域における盆と施餓鬼供養の地域的変容 -柳田国男の固有信仰論の再検討

池映任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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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불교민속의 관점에서 후지가와(fujigawa) 강 유역에서 행해지는 본(bon)행사 와 세가키(segaki)공양의 지역적 특징을 검토하여, 야나기타쿠니오의 고유신앙론을 재검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후지가와 유역에서 나타나는 본행사와 세가키공양은 나가레칸 죠(nagarekanzyo), 해충쫓기(mushiokuri), 전사자제사와의 습합이 보이는데, 특히 나가레칸 죠, 해충쫒기와의 습합은 이 지역의 특징임과 동시에 지역적변용이다. 이러한 행사들이 세 가키공양과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는 것은 익사자의 영혼을 애도하는 목적 이외에도 질병이 만연하기 쉬운 무더운 여름을 무사히 극복하려는 바람으로 무연물(muenbotoke) 또는 비참 한 죽음을 맞이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영혼에 대한 공양의 의미가 크다 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본 행사에 특히 강조되는 무연불, 아귀의 존재의 본질은 불교 등 의 외래의 요소와 일본의 재래의 민속과의 습합으로 간주해야하는 부분이 있으나. 야나기타 쿠니오는 고유신앙론을 축으로 일본인의 영혼관을 설명함으로써 불교뿐만 아니라 일본 고 유의 타계관마저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점은 가설로서의 야나기타의 고유신앙 론이 직접적인 필드에 근거하여 재검토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regional features of the Bon Festival and he rite for bestowing food on hungry ghosts(=Segaki) offering which were practiced on the riverbasin of Fujigawa from the Buddhist and folk perspective to reexamine Yanagita Kunio’s theory of proper-belief. The Bon Festival and Segaki offering in Fujigawa basin show mixed aspects of Nagarekenzyo, Mushiokuri and a memorial for war dead. Especially, a mixture of Nagarekenzyo and Mushiokuri is not only a regional feature, but at the same time, it is also a regional transformation. Despite the purpose of showing lament to the drowned, there are several more elements in common that these ceremonies share with Segaki offering. For example,Muenbotoke, which wishes to get over with sweltering summer without severe diseases, or an offering for straying souls that could not go to the world beyond because of their tragic death. The essence of Muenbotoke, and the hungry ghost’s existence that were emphasized on the Bon Festival, is apt to be considered as a mixture of outer factors likes Buddhism and traditional folklores. But, Yanagita Kunio explained Japanese’s spiritual concept by focusing on the theory of proper-belief which led to a denial of Buddhism and Japanese traditional view on the otherworld. This research points out that Yanagita’s hypothetical theory of proper-belief should be reappraised based on the direct field.
富士川流域で行われた調査に基づいて、盆行事と施餓鬼供養の地域的変容を探ってみた。家の盆行事の際には無縁仏も祀られているが新仏、祖霊に重点が置かれており、寺や村共同の川施餓鬼の際には祖霊も祭られているが餓鬼⋅無縁仏、新仏の供養に重点が置かれている。まず、盆に寺院で行われる施餓鬼の場合、新仏に重点をおかれているものが多い。事例1、2、3、4のように施餓鬼供養には新盆の家がゲストとして参加しているが、地区によっては新仏供養が中心になっているところもある。最上は『西郊民俗』無縁仏特集号(1960)とその後の資料から、「無縁仏が盆における供養の中心からはなれてゆき、非業の死にあって、浮かばれない亡霊がそれに代わり、やがて新仏が、それから一般の仏が供養の中枢にすわり、それも場合によっては全く忘れられてゆく」と分析している。最上の施餓鬼供養における供養の対象への変化は富士川流域の寺院で行われる施餓鬼の場合にも当てはめることができよう。一方で、村共同で行われる施餓鬼も無縁仏または水死者の霊を慰めるためであったものが、いつか新仏も祀るようになり、祖霊のための供養も併せて行われていることも注目できる。 このように無縁仏から新仏へと供養の対象が変化するのは無縁仏と新仏の類似のためであろう。死後の祭りを十分にうけられない無縁仏は、安らかに落ち着くことができず、絶えずこの世にさまよいでて、世の人々に禍をおよぼすと考えられている。新仏も充分に清まった落ち着いたものではないため、人々に不安を与えるものである点において、無縁仏に類するものがある34)。したがって、寺や村共同体の施餓鬼供養において無縁仏の祟りやすい性格を有する新仏を盆に迎え祀ることによって、その性格を和らげることに意味があったと考えられる。 それでは実際に盆にくる霊はどのように変化したのだろうか。また、それは柳田がいった「三種の霊」とどのように違うのだろうか。この点と関連して興味深い点は、静岡県富士郡芝川町廻沢の事例である。廻沢では村人中心の施餓鬼に僧侶が来て読経を上げるが、支度をするのは村人であり、僧侶は一切関与しない。また、参考になるのは山梨県南巨摩郡南部町本郷の事例であるが、本郷寺の住職は施餓鬼を寺の行事というより住民の積極的な働きかけによって習慣的に行われる行事であると語った。このことは、村共同の施餓鬼と寺院の施餓鬼の由来が異なることを意味し、また、その対象も異なることを物語る。最上は、仏教が伝来された最初のごろの盆行事は「村人共同に浜辺や川原その他の広場で華々しくまつられ、その期間も盆月一杯におよぶ長期にわたるものともなった。後々仏寺が檀家の死者供養に力をそそぐようになると、仏寺で行われる施餓鬼供養も、施餓鬼といいながら檀家新仏の供養を主とするようになり、さらには檀家一般精霊の供養のみがめだつようになる」と述べている35)。最上のこの指摘は、元々村人共同の祭りであった盆行事が、江戸時代以降成立した檀家制度により、各家の死霊供養が中心となり、また寺で行われていた施餓鬼も各家の死霊供養に力を入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意味する。すなわち、先祖祭や祖霊祭の原型となるものは、村施餓鬼や寺施餓鬼であり、村施餓鬼のほうが歴史的には古いと考えられる36)。 ところが、最上のこのような主張は柳田の主張と相反するように思われる。盆を祖霊の去来する日とみたのは柳田であったが、盆は日本では祖霊祭祀的な面が強められる一方で、施餓鬼の語にあるように、餓鬼に食を施すという観念も強い。しかし、柳田は日本人の伝統的な固有信仰を追求することに主力を注ぎ、固有信仰と互いに影響しあっている仏教などの外来宗教の固有信仰への影響を探ることを忌避した。柳田は『先祖の話』において、「日本の外精霊は統一も何にもなく、またどうして手分けをして入って来るのかの、理由が明白ではないものが多かった」(p102)、「仏教はむやみに個人の年期の供養のみを強調し、省みられない幽霊は多くなるにきまってる」(p103)など無縁仏の要素を仏教の影響とし、また新しい追加としてとらえている。すなわち、柳田は無縁仏の要素が仏教の影響であることを主張することによって仏教が先祖の供養より、無縁仏の供養に力を入れたという解釈を成り立たせたのである。無縁仏の本質をなすものを、仏教などの外来の要素とまた日本の在来の民俗との習合としてとらえるべきであったが、祖霊信仰を軸に日本人の霊魂観を説明することによって、仏教だけではなく、日本人固有の他界観までも否定する結果になったのである。 柳田が『先祖の話』で提唱した固有信仰論は現在まで多くの民俗学者によって受け継がれており、現在まで多くの民俗学者に多大な影響を与えている。しかし、柳田の固有信仰論が戦時下、特定な状況のもとで提出された学問であったがゆえに、そのような特殊の状況を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柳田は『先祖の話』の最後の部分で「少なくとも国のために戦って死んだ若人だけは、何としてもこれを仏徒のいう無縁ぼとけの例に、疎外しておくわけには行くまいと思う」と述べている。戦死者は日本人の伝統信仰からすると無縁仏になるのだが、柳田はそうした伝統信仰を否定し、その無縁仏を仏教の影響とすることで戦死者が無縁仏になることを防ごうとしたのではないか。こういう論理からすると、盆は祖先⋅無縁仏のための祀りではなく、「我が国固有の祖先祭」にならざるを得ないのである。したがって、柳田国男の固有信仰論は具体的な民俗事象に基づき、再検討される余地を多く残している37)。 本稿は仏教民俗の観点から富士川流域における盆と施餓鬼供養の地域的変容を通して超時代的に連綿と固有信仰が存続してきたと捉えがちであった柳田の固有信仰論を再検討する作業を試みることができた。今後の課題として、東アジアにおける「盂蘭盆供養」の受容における変容とその意味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によって、日本にの盆行事をより広い視野で眺めて行き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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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의 온라인지역커뮤니티의 재조직화에 대한 비교 연구 -「電子町内会」와 ‘인터넷반상회’를 중심으로

민주현, 안병곤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20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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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던 지역커뮤니티인「町内会」와 ‘반상회’를 온라인상의 게시판․카페․클럽 등을 통해 형성된 온라인지역커뮤니티로서「電子町内会」와 ‘인터넷반상회’로 재조직화한 것에 대해 ‘지역성’, ‘사회적 상호작용’, ‘공동의 결속’을중심으로 한일 양국의 상대적 특징을 비교 고찰 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특징이 나타났다. 첫째, ‘지역성’에서 한국과 일본은 모두 인터넷 이용 증가의 추이에 따라 양국의지역을 기반으로 하는「電子町内会」와 ‘인터넷반상회’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SNS를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지역커뮤니티 출현은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의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이트의 존속에 있어 한국이 46개의 폐쇄 및 미갱신 사이트가 있는 반면 일본은 531개로 가상공간이라는 특성상 한국보다 관리가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은 디지털 리터러시(정보격차) 현상을 줄이기 위한 정보화 교육을 병행하여 온라인지역커뮤니티의 유지 및 활성화에 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새로운 커뮤니티의 단위인 공동주택을기반으로 온라인지역커뮤니티가 생성되는 반면, 일본은 전통적인 지리적 경계인「町」를 기반으로 기존의 명맥을 유지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둘째,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양국 모두가 동호회 등을 이용한 정보교환 및 친목의 형성에 의해 전통적 인간관계를 대체 및 보완하는 현대사회를 반영하고 있다는것이다. 그리고 이미 오프라인상에서 인맥이 유지되어 있으므로 그 파급효과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동호회는 정보교환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나 대화가 지속적으로유지될 경우 최종적으로 지역사회의 참여로 연결될 가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본다. 상대적 특징으로 한국의 ‘아나바다’ 사례는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자원 등의 재활용 소비를 통해 소비주의 현상을 극복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생태적 삶과 공생이라는 현대 미풍양속의 현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공동의 결속’에서 한일 양국 모두 지역에 관련된 현안이나 행사 등의 정보게시를 통해 주민이 지역사회의 주체로서 참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역현안에 있어서 댓글(답글)을 통해공동체 의식 표현과 참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온라인지역커뮤니티는 온라인 공간에서 생성되는 지역커뮤니티로 재조직화된 것이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불명확하다는 것과 IT 기술의 환경적 변수가존재함으로 인해 모든 온라인지역커뮤니티 사이트를 조사할 수 없는 것이 본 연구의 한계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상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온라인지역커뮤니티로서의「電子町内会」와 ‘인터넷반상회’는 ‘지역성’, ‘사회적 상호작용’ 및 ‘공동의 결속’ 으로 분류한 지역커뮤니티로서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으며 지역사회 발전에 매우 유용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intends to classify the constituents of community into locality, social interaction and community solidarity and presents reorganization and development of online community such as Electronic Neighborhood(called as chonaikai) and Internet Neighborhood(called as Bansanghoi) and a comparative analysis in these three community factors of Japan and Korea is performed.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It is discovered that Electronic Neighborhood and Internet Neighborhood based on the region are increasing as Japanese and Korean people have the increase of Internet use in common in the local aspect. Appearance of a new local community with SNS can be the result of the paradigm shift for community revitalization. There are about 518 web sites that are closed or not updated for a long time and the number of those web sites is relatively high in Japan. This means that those web sites are not maintained in cyberspace continuously, so they seem to try to revitalize online local community by teaching and sharing information to narrow information gap or digital literacy in Japan. Also, the new local community of Japan is complementary to the existing community by maintaining traditional local unit area or boundary. However, in Korea, the local community builds up a new form of community such as an apartment house. Second, with respect to social interaction, the case of exchanging information and forming solidarity through online communities or clubs complements the existing human relationships. Especially, this reflects the phenomenon of forming human relationships mainly made by common interest in modern society. This kind of social interaction can have a great ripple effect because it is based on the local relationship. In Korea, ANABADA is an example of social interaction that shows the present economic and social circumstances and it is considered as one thing of resources recycling for ecological and symbiotic sense representing modern fine customs. Third, the communities in both countries commonly require us to participate actively for community solidarity through posting information on local area issues. In Korea, people express and join in the online local community for the community sense by posting their comments on the current local issues.
本稿は地域コミュニティの再組織化の視点で、日本の「電子町内会」と韓國の‘インターネット班常會’をコミュニティの構成要素である‘地域性’、‘社会的ネットワーク’、‘共同の絆’を比較したものである。‘地域性’において韓国と日本は共通的にインターネットの利用の増加に伴って地域を基盤とする「電子町内会」と‘インターネット班常會’は増加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このような地域SNSを用いた新しい地域コミュニティの出現は地域の活性化を図ったパラダイムの結果として見なすことができる。特に日本の場合、閉鎖または未更新のサイトが相対的に韓国より高い傾向を見せているのは、仮想空間の特性上管理およびメンテナンスがなされていないことを意味している。このようなデジタル․リテラシー(情報格差)現象を減らすための情報化教育を通じてオンライン地域コミュニティの活性化の努力を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社会的ネットワーク’においては、韓日両国ともに地域情報、クラブなどのを用いた情報交換及び住民の交流を拡張させている。このような結果は地域基盤の人脈が主になるため、その波及効果は大きいと見られる。韓国の特徴であるアナバダという資源リサイクル運動は、現在の社会現象を現れであり、生態及び共生意識の一つである現代的な美風良俗の特徴であることが分かる。‘共同の絆’においては、韓日両国ともに地域に関する懸案などの情報掲示を通して地域社会の主体として参加を促している。日本の事例から見られない韓国の特徴は、地域の懸案に対する意見の表し方である。韓国の場合、掲示された懸案に対して自分のコメントを添える形で共同体としての意識を表明または討論をする形態を見せていることが分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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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泉의 우정민영화 전략과 일본의 정치기업가

후카호리 스즈카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0집 2012.05 pp.233-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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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우정민영화 사례를 통해 일본의 정치기업가에 대해 고찰했다. 연구 대상으로 小泉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정치기업가로서 행위했는지를 밝히려고 했다. 우정민영화는 小泉의 지론이었고 小泉의 개혁 이전까지는 논의가 부상하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던 개혁이었다. 이것은 자민당의 족의원과 관료들 그리고 이익집단의 강한 유착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정민영화를 달성한 것은 이유착관계를 어느 정도 파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정치사에서 매우커다란 개혁이었던 우정개혁을 사례로 선정한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치기업가를 정의하는 것은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우정민영화는 小泉가오래 동안 지론으로 주장해 온 개혁이었으며 그가 주장한 우정민영화에 의한 복지효과는 국가공무원의 삭감, 산업의 활성화, 자금 흐름의 변화, 그리고 재정의 건전화였다. 이러한 이익들은 국민들에게는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국민들은 우정개혁을 긴급한 과제로서 인식하지 않았고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즉 그는 우정사업을 민영화하면 전체 국민에게 복지효과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개혁안으로 추진하였다. 둘째로 개혁 내용의 대국민 홍보 과정에서 小泉는 많은 노력을 했다고 평가된다. 이메일 배신 서비스와 TV 캐러밴에 의한 홍보 활동도 국민들의 이해를 얻는데 기여했지만 가장 효과적이었던것은 하드 이슈를 이지 이슈로 전환한 전략이었다. 국민들이 우정민영화를 긴급과제라고 인식 못했던 이유가 그 문제를 가깝게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小泉은 우정민영화가 국민들이 불만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본 정치의 현상을 바꿀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小泉는 포퓰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국민들이원하는 경기대책이나 고용대책에 직접 대처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일본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우정개혁이 국민들이 원하는 정책과 관계가 있다고하여 이해를 얻으려고 했다. 마지막 조건은 정당 내부의 반대 세력을 공략한 것이다. 우정개혁은 자민당 내의 반대 세력의 반발이 강력한 개혁이었다. 이 개혁은기득권을 보호하려고 하는 족의원과 관료들에게는 아주 위협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小泉는 총리의 입장을 활용하고 탑다운 방식에 의해 위로부터 관료들의힘을 약화시켰다. 공인권의 사용과 기존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인사 등, 지금까지일본의 총리들과 다른 강한 리더십을 보였다. 그리고 스스로 우정민영화에 관한법안 작성에 참여하고 민영화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주변에 민영화에 찬성하는 세력을 배치했다. 본 연구의 결론을 말하자면 小泉는 우정민영화 개혁에서 정치기업가로서의 행위를 했다고 할 수가 있다. Olson은 대집단을 조직화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우정개혁은 국민이라는 대집단의 조직화에 성공한 사례였고 조직화되지 못하는 그들을 ‘개혁을 지지하겠다’는 선택으로 한 조직처럼 만들고 그 지지를 동원하여 개혁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우정민영화의 찬성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인 총선거에서 정책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정치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무관심한 대중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반대 세력을 배제하는 것으로 개혁을 주도하려고 했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었다.
This paper is about that why Koizumi’s reform of postal privatization was succeed. I applied the concept of "political entrepreneur" to analyze his strategy. I analyzed Koizumi’s reform strategy of the postal privatization and conditions of political entrepreneurs as follows. First, Koizumi had continuously emphasized on postal privatization reform for long time. Koizumi argued that postal privatization would offer positive effects that are the reduction of national public servants, industrial activity, changes in the flow of funds and financial soundness. These effects have no direct relationship with the everyday life of general public. It is difficult to make public to understand necessity of postal system reform since people tend not to recognize that the postal reform is urgent problem. Koizumi presented a reform plan that it would offer a positive effect to the public welfare in the long run. Second, Koizumi made effort in the process of gaining national publicity which is needed for the reform of postal privatization. E-mail magazine and TV caravan were used to make the public understand to reform the postal system. It was the most effective strategy to switch the Hard Issue to the Soft Issue. As mentioned earlier, people did not fully recognize the urgent issue of postal privatization since the influence would not have a direct relevance to people. Therefore, Koizumi had stressed that "it is possible to change the current state of politics in Japan that people are discontented with by the privatization of postal services". Since Koizumi was not a populist, he did not present the measures to boost the economy and to spur employment that people want. Instead, he tried to persuade the public that postal reform can change the Japanese politics and the policy that people want be realized by the postal reform. Third, Koizumi had overcome the internal opposition from the political parties. Postal privatization reform had been up against stiff opposition from the LDP.
本稿では、小泉の郵政民営化改革がなぜ成功したのかについて、"政治企業家(political entrepreneur)"という概念を適用して考察を試みた。先行研究を調査し小泉の政治的戦略について整理する過程を通して、先行研究の不足や残された課題をを補おうするのが本稿の目的である。 郵政民営化は小泉の持論であった が、小泉が改革する以前は議論の浮上と衰退が繰り返されていた。これは、自民党の族議員や官僚、そして利益集団間に強い癒着関係があったためである。郵政民営化という目標が達成されたことは、小泉がこの癒着関係に切り込んだという点で評価に値する。このように、日本政治において大きな改革であったといえる 郵政改革を研究事例として取り上げることは、今後日本政治を研究していく上での重要性を含んでいる。 本論文で定義した政治企業家の条件と小泉の郵政民営化改革の戦略を分析した結果は以下のとおりである。第一に、郵政民営化は小泉が長く持論として主張してき改革だったことが挙げられる。小泉は郵政民営化が国家公務員の削減、産業の活性化、資金の流れの変化、財政の健全化などの福祉効果を与えると主張した。しかし、これらの効果は日常生活と直接的な関連がないため、一般国民が理解しにくいものであった。郵政改革を緊急課題と認識していない国民の無関心の中で、小泉は「郵政事業民営化が国民に福祉的に良い効果を与える」という自身の改革案を提示した。第二に、郵政民営化などの改革の内容を国民に広報する過程で、小泉が多くの努力と戦略を用いたことに関する評価である。メールマガジンのサービスとTVキャラバンによる広報活動も国民の理解を得るために貢献したと言える。しかし、最も効果的だったのはハードイシュー(Hard Issue)をソフトイシュー(Soft Issue)へ切り替えた戦略であった。国民が郵政民営化を緊急の課題であると認識していなかったのは、その問題に対する直接的な関連性を感じ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である。したがって、小泉は「郵政民営化を通して国民が不満に思っている日本の政治の現状を変えることができる」と強調した。小泉はポピュリが不満に思っている日本の政治の現状を変えることができる」と強調した。小泉はポピュリストのように国民が望む景気対策や雇用対策を提示するのではなく、郵政改革が長期的には日本の政治を変えることに繋がるので国民が望む政策と関連していると説得を試みたのである。 第三に、政党内部の反対勢力を攻略したことである。郵政改革は、自民党内の反対勢力による反発が強い改革であった。この改革は、既得権を保護しようとする族議員と官僚たちには非常に脅威的なものであった。小泉は首相の地位を利用し、トップダウン(top-down)方式で官僚の力を弱化させた。公認権の使用や従来の慣習に従わない人事など、これまで日本の首相としては珍しい強いリーダーシップを見せた。このような改革戦略から、小泉の政治企業家としての行為が郵政民営化を成功させる鍵であった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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