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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9집 (11건)
No
1

스자쿠 천황 양위의 정치적 주체성

김홍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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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에 있어서 선임 천황이 생존한 상태에서 후임 천황을 직접 선택하고 즉위를 확인할 수 있는 양위제도는 여성 천황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수용되었고 왕위계승에 있어서 유력호족들의 영향력을 획기적으로 배제할 수 있었다. 또한 양위제도는 왕위계승자 선택을 천황의 권한으로 규정하고 천황의 붕어와 차기 왕위계승자의 즉위에 따른 국가권력 공백상태를 피하면서 원활한 왕위계승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양위권한과 동궁지명권이 긴밀하게 연동되어 황족내 일부 계열이 왕위계승을 독점하는 핵심적인 제도로 활용되었다. 한편 겐지모노가타리에 있어서 스자쿠 천황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던 고키덴노오기사키와 우대신이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고 자신도 병에 걸리며 각지에서 기이한 천재지변이 이어지는 상황 아래에서, 스자쿠 천황은 히카루겐지 복권과 레이제 동궁 양위를 통하여 한편으로는 친부 기리쓰보 상황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권력자로 그려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친모 고키덴노오기사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상황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스자쿠 천황이 오보로즈키요와 관계하여 자신의 권위를 침해한 히카루겐지를 복권시키고 왕권을 레이제 동궁에게 양위한 것은 스스로의 권위와 권력을 파괴하는 자해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레이제 천황 양위와 병행된 긴조 동궁 책봉에 주목하자면 당시 스자쿠 천황이 처한 초자연적 위기정황을 타개하고 전환하는 수단으로써, 양위는 실추된 스자쿠 천황의 권위를 상황의 권위로 새롭게 자리 매기고 레이제 천황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편 긴조 동궁을 통하여 스자쿠 계열 왕위계승을 확고히 하는 유효한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In ancient Japan, the abdication system that the emperor can directly choose the successor himself and check enthronement during his alive, was accepted step by step through the woman emperor, and was able to decisively exclude the influences of the powerful barons in succeeding the throne. In addition, the abdication system regulates the election of successors to the throne as emperor's authority, and has made possible a smooth succession avoiding the emptiness of the state power by the the emperor's death. And also it was closely linked with the abdication right and the prince-nomination right, was used as a core system to monopolize the succession of the throne by a part of the royal family. Meanwhile, the Emperor Suzaku was in a situation where a strange natural disaster occurred in the country, where Kokiden Ogisaki and Udaizin who had a great influence on him, became ill or died. On the one hand, the Emperor Suzaku depicted as a man who could not escape from the shadow of his father, Emperor Kiritsubo, on the other hand, he was being reborn as an independent Emperor away from the influence of the mother, Kokiden Ogisaki, through the rehabilitation of Hikaru Kenji and ascension to Reize. I can not deny the self-injurious aspect of destroying his authority and power, in that the Emperor Suzaku order to rehabilitate Hikaru Kenji, who has infringed on his authority in relation to Obozukiyo, and give his scepter to Reize prince. But let's pay attention to that he make Kinzo prince to successor with the abdication, I think it was an effective way to establish the authority of the Emperor Suzaku as a new independent authority, and way to maintain the political influence on the Emperor Reize, and way to make secure the succession of the Suzaku family throne, as a means to break through and transform the supernatural crisis situation in the Emperor Suzaku.
古代日本において天皇が生存している中で後任の天皇を直接選択し即位を確認できる譲位制度は、女性天皇を通じて段階的に受容されていき、王位継承における豪族の影響力を画期的に排除することができた。また、譲位制度は王位継承者の選択を天皇の権限として規定し天皇の崩御と次期天皇の即位による国家権力の空白状態を避けて円滑な王位継承を可能にする一方で、譲位権限と東宮指名権を緊密に連動させて皇族内の一部の系列が王位継承を独占する核心的な制度として活用された。 一方、『源氏物語』において朱雀天皇に大きな影響力を持っていた弘徽殿大后と右大臣が病に掛かり、自分も病になって各地で奇異な天変地異が続く中で、朱雀天皇は光源氏の復権と冷泉東宮への譲位を決断することで、一方では父親桐壺上皇の陰から逃れられない権力者として描かれながら、もう一方では母親弘徽殿大后の影響から離れた独立した上皇として新しく位置づけられている。 朱雀天皇は朧月夜との関係を持って自分の権威を侵害した光源氏を復権させ、王権を冷泉東宮に譲位することは、自らの権威と権力を破壊し放棄する自害的側面があることは否定できない。しかし、冷泉天皇への譲位と同時に行われた今上東宮の立坊に注目すれば、当時朱雀天皇が直面した超自然的危機情況を打開し転換する手段として、譲位は失墜した朱雀天皇の権威を上皇の権威として新しく位置づけて冷泉天皇に対する政治的影響力を維持しながら、今上東宮を通じて朱雀系列の王位継承を確固としたものにする有効な方法であったと思われる。

5,500원

2

韓日古典の中に見える笑いと怒りの計量文献学的な比較考察(一) : ジャンル別相対比率と笑いの攻撃性

琴榮辰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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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한일양국의 고전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여 웃음과 화를 계량문헌학적 방법으로 고찰해 보았다. 첫 번째로, 일본고전문학대계에서 웃음이 가장 많이 보이는 작품은, 각각『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267건)『우쓰호모노가타리(宇津保物語)』(175건)『진세쓰유미하리즈키(椿説弓張月)』(126건)의 순이었으며, 화를 1로 보았을 때의 웃음과 화의 상대비율을 나타낸 웃음지수는 각각 15.70, 7.00, 2.06이었다. 또한, 한국문집총간에서는『송자대전(宋子大全)』(1245건)『사가집(四佳集)』(513건)『퇴계집(退渓集)』(353건)의 순이었으며, 웃음지수는 각각 1.50, 10.91, 1.48이었다. 또한, 웃음지수가 높은 일본고전작품은『에이가모노가타리(栄花物語)』(71.0),『고쇼쿠이치다이오토코(好色一代男)』(65.0)의 순이었으며, 한국문집총간에서는 웃음의 용례가 50개 이상인 유의미한 자료로서『사가집(四佳集)』(10.91)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 장르별로 상대비율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본고전의 경우, 픽션 장르인①설화・소설(5.48), ②모노가타리(5.24),③렌가・하이카이・하이론・교카(4.54)、④극문학(3.82) 순으로 웃음지수가 높았으며, 반대로, 논픽션 장르인 ⑧역사(0.10), ⑦와카・가요(1.18), 그리고⑥수필・수상・설교(2.46)⑤한시・한문(2.63)의 순으로 그 수치가 낮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모노가타리(物語)같은 픽션 장르 일수록 웃음지수가 올라가고, 반대로 역사서 같은 논픽션 장르일수록 웃음지수가 내려가는 것이다. 세 번째로 웃음의 공격성에 있어서 일본고전의 경우, 근세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공격적인 웃음이 늘어나고, 반대로 에도시대 이후로 내려갈수록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웃음의 향수층이 귀족에서 서민으로 바뀐 점이 큰 요인이라 하겠다. 한편, 한국문집총간에서는 자신에 대한 인생 관조적인 웃음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In this paper, I analyzed the relative ratio of laughter and anger from the database of Japanese and korean classic literature by the method of bibliometric. First, We have known that the best 3 classic literature work which have many laughter are Genji-monogatari(267), Utsuho-monogatari(175) and Chinsetsuyumiharizuki(126) and their relative ratio of laughter per anger are 15.70, 7.00, 2.06. I also surveied the same thing about Korean classic literature, and best 3 work is Seongjadejyon(1245), Sagajip(513), and Taegaejip(353). And their exponential index of laughter is 1.50, 10.91, and 1.48. The highest work of exponential index of laughter is Eiga-monogatari(71.0), the next thing is Koshokuitidaiotoko(65.0). Sagajip is the highest work of Korean things and it's exponential index of laughter is 10.91. Next, the difference of aggression of two countries came from the difference of genre. It seems that exponential index of laughter go up at fiction genre, conversely its number go down at nonfiction genre. Japanese classic literature's exponential index of laughter by genre is 5.48(narrative・novel), 5.24(monogatari), 4.54(Renga・Haikai・Hairon・Kyoka), 3.82(Dramatic literature)、2.46(Essay・Occasion althoughts・Sermon), 1.18(Waka・song)、0.10(History). Finally, We can find that the difference of aggressiveness of laughter between Japan and Korea. We have known the aggressiveness of laughter is goes up at works of Japanese classic literature before Edo era, and conversely it goes down after Edo era.
本研究では韓日両国の古典データベースを利用して、両国の古典に見られる笑いと怒りを計量文献学的に考察してみた。 まず、日本古典文学大系の中で笑いがもっとも多く見られる三作品は『源氏物語』(267件)『宇津保物語』(175件)『椿説弓張月』(126件)の順であって、怒りを1にした時の笑いと怒りの相対比率はそれぞれ15.70, 7.00, 2.06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また、韓国文集叢刊では 『宋子大全』(1245件)『四佳集』(513件)『退渓集』(353件)の順で、笑い指数はそれぞれ1.50, 10.91, 1.48であった。日本古典文学大系で笑い指数がもっとも高い作品は『栄花物語』(71.0),『好色一代男』(65.0)の順であって、韓国文集叢刊では笑いの用例が50を超える有意味な資料の場合、『四佳集』(10.91)が挙げられる。 次に、両国古典の間に見られる笑いの攻撃性の差はジャンルの相違による側面が大きいことがまず言える。すなわち、物語のようなフィクションジャンルであればあるほど笑い指数が上がり、逆に、歴期書のようなノンフィクションジャンルであればあるほど笑い指数が下がるのがそれである。すなわち、笑い指数が高い順で、①説話・小説(5.48)、②物語(5.24)と③連歌・俳諧・俳論・狂歌(4.54)、④劇文学(3.82)となる。また、笑い指数が一番低いジャンルは⑧歴史(0.10)であって、⑦和歌・歌謡(1.18)、そして⑥随筆・随想・説教(2.46)⑤漢詩・漢文(2.63)の順であることが分かる。 最後に、日本古典の場合、近世以前に遡れば遡るほど攻撃的な笑いが増え、逆に江戸時代以降に下がれば下がるほど、減ることが分かった。笑いの主な享受層の変化による自然な結果であろう。一方、韓国文集叢刊からは従来の朝鮮笑話とか平安文学に見られるような攻撃的な笑いが少なく、自分の人生を眺める観照的な笑いが多いのが分かった。随筆、漢詩というジャンル上の特性も影響したであろう。

5,700원

3

『石にひしがれた雑草』: 「愛」に関する一考察

鄭旭盛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4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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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다케오의 소설 “돌에 짓밟힌 잡초”는 등장인물 주인공 A, 아내 M코, 친구 B로를 통해 파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결말에서 세 등장인물은 모두 파탄에 이르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왜 그들은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들을 파탄에 이르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본고에서는 작품분석을 중심으로 그 원인에 대해 추적하고, 작가가 본 작품을 통해 의도하고자 한 바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원인으로서 M코와 친구 B의 부정하기 그지없는 불륜관계를 상정하였다. 이는 소위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비판으로 파탄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본고는 이 둘의 관계에 더하여 M코의 창부적인 성격과 그러한 M코에 대한 A의 ‘불신’이라는 도식을 관계를 추가하여 이 두 등장인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이는 M코를 중심으로 친구 B와 A라는 인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 세 등장인물을 자리매김함으로써 파탄의 원인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가능하였다. 즉, A의 M코에 대한 사랑은 A의 ‘질투’와 ‘알 수 없는 경쟁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쟁취에 대한 만족’을 위해 A가 선택한 ’사랑‘의 방식이었다. 이는 평소 ’사랑‘과 ’위선‘의 관계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던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가 세 등장인물을 통해 ’사랑‘과 ’위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A의 M코에 대한 사랑의 방식 역시 또 다른 ’사랑‘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hief character A in "The weed which was pushed to a stone", the M of the wife, B, nobody of the friend are free from a level of the failure. I taste a fruit of the all failure after all. Did, and have all of them tasted a fruit of the failure? It is this article that considered while squeezing a focus what it is that an author intended through this work while pursuing the cause whether the cause that let all of them fall into failure would be where. At first the causes will include the illicit relations that are extreme in unchastity with M child and B. It is decided that this is criticized seeing from so-called social point of view, and, as for inviting it, there can be a way by failure. However, I stretched out consideration in of A to title the prostitute-like place of the M to such M without perching on this by the main subject. Particularly, A flowed into it, and, as well as prostitute characteristics of M and unchastity and the M with B, it investigated the viewpoint about a cause of the failure to the person that it was said. The love for the M of A was for "jealousy" of A oneself and "deep attachment" to "mysterious emulousness" and "satisfaction of the greed for struggle", and it was found that it was "the love" that A chose through the main subject then. In other words, I clarified that it included "love" of transformed A that it was thought as another cause of the failure with this work through this report.
『石にひしがれた雑草』における主人公A、妻のM子、友のB、誰も破綻の域から自由ではない。結局、みんな破綻の実を味わってしまうのである。なせ彼らがみんな、破綻の実を味わってしまったのだろうか。彼らみんなを破綻に陥らせたその原因はどこにあったのだろうかというその原因を追求しつつ、この作品を通して作者が意図していたのは何なのかに焦点を絞りながら考察したのがこの論文である。  まずその原因としてM子とBとの不貞極まる不倫の関係が挙げられよう。これはいわゆる社会的な観点から見ても批判されることとして、破綻を招くしか道がないはずである。しかし、本論ではこれに止まらず、M子の娼婦的なところとそのようなM子にだいするAの<不信>などなどにまで考察をのばしてみたのである。  とくに、M子とBとの不貞やM子の娼婦性だけではなく、Aいう人物にもその視点を注ぎ、破綻の原因について探ってみたのである。その時AのM子に対する愛がA自身の「嫉妬」や「不思議な競争心」への「執着」そして「争闘欲の満足」の為でAが選択した「愛」であったことが本論を通して明らかにされた。つまり、この作品での破綻のもう一つの原因として考えられることとして、変形されたAの「愛」が挙げられることを本稿を通して明らかにした。

5,200원

4

노사카 아키유키 문학에 있어서의 ‘오키나와편 전쟁동화’ 연구 : 『바다거북이와 소년』 및 『돌라디오』를 중심으로

김명주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6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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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노사카 아키유키의 전쟁서사에 대해 논의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전쟁관의 애매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본고는 그 논의의 맥락 속에서, 2000년 이후, 오키나와전을 소재로 창작된 전쟁동화 『바다거북이와 소년』(2001), 『돌라디오』(2010) 2편을 대상으로 노년의 노사카의 전쟁관이 어떻게 수정되어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바다거북이와 소년』에서는 바다거북이의 관점을 획득하여 오키나와의 자연성, 영속성을 그리고 있으며, 특히 미국에 대해 ‘귀축(鬼畜)’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반미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000년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G7 정상회담을 계기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 등을 염두에 두고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돌라디오』에서는 오키나와 방언이나 모티프를 다용함으로써 류큐왕국으로서의 전통성을 부각시키고, 특히 게르마늄라디오를 라이트 모티프로 일본과 오키나와간의 언어적 격절성을 그리고 있다. 일본을 ‘대일본제국’ ‘야마토’로 반복하여 구사함으로써 일본과 오키나와의 근원적인 거리를 획정하고 배반성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이다. 이는 당시 이슈가 되었던 미일 간의 핵반입 사건을 염두에 두고 창작된 것으로 분석된다. 노사카의 전쟁서사는 대부분 미일간의 정치적 현안이 배경이 되고 있지만, 2010년 전후로 일본인의 내부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차츰 외부적 관점으로 수정되면서 객관적인 시각을 획득하고 있다.
Recently, discussions on Akiyuki Nosaka's war epics have continued, most of those criticize his obscure view of war. Against this backdrop, this paper examines how Nosaka revised his view of war in the years after 2000, focusing on two war fairy tales based on the battle of Okinawa―The Sea Turtle and the Boy (2001) and The Stone Radio (2010). The Sea Turtle and the Boy depicts the naturality and perpetuality of Okinawa, through the sea turtle's perspective. In particular, the novel repeatedly refers to America as ‘savage', thereby resulting in maximization of anti-American sentiment. Analysis reveals that Nosaka, motivated by the G7 summit held in Okinawa in 2000, wrote this story in consideration of the US military base issues in Okinawa. The Stone Radio takes the Okinawan vernacular language or motives in order to bring the traditionality of the Rhykyu Kingdom into focus. For example, the leitmotif of a germanium radio represents the linguistic severance between Japan and Okinawa. Repeated reference to Japan as ‘The Great Japanese Empire’ and ‘The Yamato’ demarcates the fundamental distinction between Japan and Okinawa focusing on its treachery. It is analyzed that the novel was written based on the Okinawa Reversion Agreement which brought attention at the time. In conclusion, Nosaka’s war epics have always been set around the political issues between Japan and the U.S. It is found that his works have gained an objective perspective around 2010 after gradually deviating from the Japanese insider’s point of view to the outsider’s.
最近、野坂昭如の戦争叙事についての議論が続いており、そのほとんどは彼の戦争観の曖昧さを批判するものである。そこで、本稿は、それらを踏まえて、2000年以降に書かれた、沖縄戦を素材にした戦争童話『ウミガメと少年』(2001)、『石ラジオ』(2010)2編を対象に、戦争観がいかに修正されていったかを考察した。  『ウミガメと少年』では、海亀の視点をもって、沖縄の自然性、永続性を描いていることが分かる。特にアメリカに対して「鬼畜」という用語が繰り返されることにより、反米感情が極大化される。それは、2000年沖縄で開催されたG7首脳会談をきっかけに、米軍基地問題などに注目しているためと思われる。『石ラジオ』では、沖縄の方言やモチーフを多用することで、琉球王国としての伝統性を浮き彫りにしている。なお、ゲルマニウムラジオをライトモチーフにし、日本と沖縄の間の言語的隔絶性を描いている。日本の代りに「大日本帝国」や「ヤマト」を繰り返すことにより、日本と沖縄の根源的な距離を画定し日本の背反性を描こうとするのである。それは、当面の日米間の核持ち込み事件を念頭に置いてのことといえる。  野坂の戦争叙事は常に日米間の政治問題が背景になっているが、2010年前後になると、日本人の内部的観点から脱皮し、外部的な観点へと視覚が修正され、最終的に客観的な視覚を獲得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

6,300원

5

이광수의 일본어작품집 『가실(嘉實)』에 투영된 ‘국민작가’의 다짐

강우원용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8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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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무렵부터 해방까지 이어지는 작가 이광수의 행보와 일련의 과정은 일관되게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국민문학’의 추구이며 비교적 그 의미는 명료했다. 조선민족임을 포기하거나 일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민(民)으로서 일본제국의 국민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조선문예상 제1회 수상작가인 이광수는 1940년 3월에 도쿄로 가서 상을 받는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수상 기념으로 작품집 『가실 이광수단편집(嘉實 李光洙短篇集)』을 일본어로 출간한다. 내지와 조선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의도한 『가실』은 ‘국민작가’에의 결의와 노력이 투영된 증거이자 결과물이었다. 본고는 『가실』에 수록된 작품 「무명」, 「꿈」, 「육장기」, 「난제오」, 「혈서」, 「가실」을 통해 이광수의 ‘국민문학’을 향한 의지와 다짐을 추급했다. 『가실』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요구하는 이국취미의 문학적인 표상이었으며, 여기에는 보편적인 국민의식을 부여한 이광수의 절묘한 ‘통역’이 개입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욕망과 다짐의 고백이기도 했다.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한 주체는 일본만이 아니다. 조선문학을 일본문학에 편입시키려는 출판인 마해송과 기쿠치 간의 의도가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민족작가 이광수의 뜨거운 ‘구애’가 있었다. 수용 이상의 적극적인 선도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이광수에게 그것은 전파해야 할 계몽이었다.
Writer Yi Kwang-su’s move and a series of processes from 1939 through the Liberation are consistently headed in one direction. It was a pursuit of ‘national literature,’ and its meaning was relatively clear. It was not giving up a Joseon person or becoming a Japanese, but acquiring the citizenship of the Japanese empire as a Joseon person. Yi Kwang-su, a writer who won a prize in the 1st Chosun Literary Awards went to Tokyo and received the prize in March 1940. Also, one month later, he published works Gashil, Collection of Yi Kwang-su’s Short Stories in Japanese, celebrating the award winning. Gashil, which aimed to serve as a bridge between Japan and Joseon, was evidence and outcome in which his resolution and effort towards a ‘national writer’ were reflected. This study traced his will and promise towards ‘national literature’ through the works included in Gashil, “Mumyeong”, “Dream(Kkum)”, “Yukjanggi”, “Nanjeo”, “Pledge in Blood (Hyeolseo)” and “Gashil.” Gashil was a literary representation of exoticism Japan demanded from colonial Joseon, and Yi Kwang-su’s excellent ‘interpretation,’ which gave a universal national consciousness to this, intervened. Also, it was the very confession of the writer’s own desire and promise. Japan was not the only subject of the promotion of ‘Korea (Joseon) and Japan are One’ policy. Publisher Ma Hae-song and Kan Kikuchi’s intention that attempted to include Joseon literature in Japanese literature, but not to be outdone, there was national writer Yi Kwang-su’s passionate ‘courtship.’ To Yi Kwang-su, who volunteered an active leading role beyond acceptance, it was a sort of enlightenment to spread.
1939年ごろから敗戦まで続く李光洙の作家としての道程と一連の過程は一貫して一つの方向に向っていた。それは<国民文学>の追求であり、比較的に明瞭なものであった。朝鮮民族であることを放棄したり、日本人にな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朝鮮の<民>として日本帝国の国民を取得することであった。朝鮮文芸賞第一回受賞作家である李光洙は、1940年3月に東京へ赴いて賞を受ける。そして、その一ヶ月後に受賞を記念して、作品集『嘉實 李光洙短編集』を日本語で出版する。内地と朝鮮を繋ぐ架け橋役を意図した『嘉實』は、<国民作家>への決意と努力が投影された証拠であり、結果であった。 本稿では『嘉實』に収録された作品、「無明」「夢」「粥庄記」「亂啼烏」「血書」「嘉實」を通して、李光洙の<国民文学>への意志と誓いを追及した。『嘉實』は日本が植民地朝鮮に要求する異国趣味の文学的な表象であり、そこには普遍的な国民意識を与えた李光洙の絶妙な<通訳>が介入した。そして、それは他ならぬ作家自身の欲望と誓いの告白でもあった。内鮮一体政策を進めた主体は日本だけではない。朝鮮文学を日本文学に編入させようとした出版人馬海松と菊池寛の意図もあったが、それに劣らぬ民族作家李光洙の熱い<求愛>があった。受容以上の積極的な先導役を自ら求め止まなかった李光洙にとって、それは伝えるべき啓蒙でもあった。

7,000원

6

일본어 잡지 『京城雜筆』로 본 식민 담론

이민희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11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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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 경성에서 발행된 일본어 잡지 『京城雜筆』에서 조선인의 글은 감정, 심정, 느낌 등의 주관이 배제된 객관 서술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조선인은 식민 담론의 좋은 글감으로 이용되고 발언권을 얻었다 하더라도 일본인을 후견인으로 둔 경우가 그 대부분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 정책에 동조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비호가 있어야만 비로소 발언권 획득이 가능한 조선인의 입지를 확인시킨다. 한편 『京城雜筆』에서 내선융화는 민간에서, 내선일체는 관이 주도하여 주창되었다. 전자가 일상적 레벨에서 실천을 가능케 한 논의였다면, 후자는 슬러건을 앞세운 당위성만이 제시된다. 전기 내선융화의 실천자로 지목한 대상이 일본인 자신이었다고 한다면, 후기는 조선인으로 내선일체의 구현자로서 긍정적·부정적 시선이 혼재되어 있다. 모범으로 보이는 경우가 시각성을 확보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경우는 익명을 빌어 전기부터 있어왔던 본지의 형평성을 유지했다. 이것이 식민 담론을 형성함에 있어서 시국의 부응과 정치색을 배제하고자 한 『京城雜筆』의 취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본지가 채택한 방식인 것이다.
It is the universal phenomena that the Korean at the 『kyeongsungzappil』published in the Seoul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put the Japanese inward, although the Korean is used as material of the colonial discourse and sometimes they have the right to speak. The agreement to the colonial policy of the Japan to the Korea or the appearance forwarding the agreement confirm the position of the Korean acquired the voice only by the Japanese protection. Through this voice, the concealing of the consciousness of the colonized people is the natural result. Meanwhile, at the 『kyeongsungzappil』the Korea-Japan harmony is advocated at the private sector and the Korea-Japan unity is called at the public sector. While the former is the discussion making possible of the action mentioned at the usual level, the latter exhibits the necessity forwarding the slogan. While the Japanese is the target which the doer of the former Korea-Japan harmony is, the Korean is the exponent of the latter Korea-Japan unity at which the positive and negative view is confounded. Also the 『kyeongsungzappil』 maintained the balance of this essay by the anonymity existed in the former period when the procurement of the visual model is the negative. This is the method that the essay chose at the confronting point of the 『kyeongsungzappil』purpose making effort to exclude the political color and the current affair in the formation of the colonial discourse.
植民地時代京城で発行された日本語雑誌『京城雜筆』のなかの朝鮮人は、植民地言説の良い素材として利用された。発言の機会を得たとしてもその多くが日本人の後ろ楯のある場合であった。彼らが朝鮮にたいする日本の植民地政策に同調する姿をみせたのは日本人の庇護をうけるしか発言権をえる方法がなかったからであり、被植民者の意識が表われないのは言うまでもない。 一方、『京城雜筆』で內鮮融和は民が、內鮮一體は官主導によった。前者が日常的な実践を促す議論であったとしたら、後者の場合はスローガンを擧げた朝鮮支配の當爲が示されたものである。前期內鮮融和の実践者と目した対象が日本人であるのにたいして、後期は朝鮮人であり、內鮮一體の具現者として肯定的·否定的視線が混じっている。模範とみえる場合が視覚性を確保したのにたいし、否定的な場合は匿名を借りて前期からみえた本誌の衡平を保った。これが植民地言説の形成において時局の要請にこたえるべき立場と政治色を排斥しようとした立場が突き当たる地点で『京城雜筆』が採択した方式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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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여성 ‘운동가’ 간노 스가(管野スガ)에 관한 일고찰

박은영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152-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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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월,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를 비롯한 일련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검거되는 사건,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이 발생했다. 간노 스가(管野スガ)는 이 대역사건으로 처형당했던 12인 중에 유일한 여성이었다. 주지하듯이 지금까지 대역사건에 관한 연구는 수많은 연구 성과를 축적해왔다. 그러나 이 대역사건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인 간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바가 적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또한 간노를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에서조차 대체로 간노를 둘러싼 두 가지의 ‘표상’, 즉 ‘요부’와 ‘혁명가’ 라는 이념적 모델에 천착하여 그녀를 평가하는 것에 중점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간노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본고는 기존의 선행연구들에서 간과하고 있는 간노 스가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무엇보다 본고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간노가 사상의 중층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점이다. 본고의 초점은 간노를 둘러싼 기존의 두 가지 ‘표상’에서 호출된 간노상에 거리를 두고, 간노의 사상과 행동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살펴본 후에 필자 나름의 평가를 내리는데 있다. 구체적으로 간노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 사람의 여성 ‘운동가’로 조형되어 가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The High Treason Incident(大逆事件), also known as the Kotoku Incident(幸徳事件), was a socialist-anarchist plot to assassinate the Japanese Emperor Meiji in 1910, leading to a mass arrest of leftists, and the execution of 12 alleged conspirators in 1911. Kanno Suga was the only female in 12 people, and the first woman with the status of political prisoner to be executed in the history of modern Japan. As is generally known, the study about the High Treason Incident has accumulated a large number of research results. But It's ironic that there have been few studies on Kanno who is directly involved in this High Treason Incident. Moreover, A Study by focusing on Kanno put emphasis on two representation("temptress" and "revolutionist") of Kanno as ideological model. So an evaluation of Kanno Suga is not yet in clear focus. Therefore, this paper aims at giving a general outline of an individual character called Kanno that previous studies ignore. Above all, I think that thought of Kanno is especially worthy of notice. After examining thought and behavior of Kanno in chronological order, finally I want to make an assessment of Kanno as woman activist.
1910年5月、幸徳秋水をはじめとする一連の社会主義社、無政府主義者などが明治天皇暗殺計画を企てたとして検挙される事件、いわゆる「大逆事件」が起こった。管野スガはこの大逆事件で処刑された12人の中の唯一の女性であった。 周知のように、今まで大逆事件に関する研究は数多くの研究成果を蓄積してきた。しかし、この大逆事件の当事者のうちの一人である管野については比較的に知らされていないという点はアイロニーである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しかも管野を直接扱った研究においても、概して管野をめぐる二つの「表象」、すなわち「妖婦」と「革命家」という理念的モデルに穿鑿して彼女を評価することに重点を置いたので、管野という人物に関する評価は明確していないと言っていいだろう。 したがって、本稿の目的は、先行研究で見落としている管野スガという人物自体に関する理解を深化することにある。何より本稿で注目したいことは、管野が思想の中層性という側面において非常に興味深い人物という点である。本稿の焦点は、管野をめぐる「表象」から呼び出された管野像に距離を置き、管野の思想と行動を時間的流れによって調べた後、筆者なりの評価を下すことにある。これを通じ、管野がいかなる過程を経て一人の女性「運動家」として成長して行くのか確認できる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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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鉱業と植民地朝鮮社会 :李鐘萬の大同鉱業と雑誌『鉱業朝鮮』を中心に

長沢一恵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18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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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근대 개발이 식민지 사회에 가져다 준 문제를 20세기의 기간사업이었던 광업을 주제로 그 사회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재고찰하는 것이다. 후발자본주의국가로 출발한 근대 일본에서 근대 광업은 국책으로 정부가 자본과 기술을 독점하여 자원 개발을 하는 한편, 노동 보호나 환경보전이라는 사회적 요소에 대해서는 억압과 배제가 특징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본국 일본에서의 근대 광업이 내포하는 구조적 결여가 식민지에서의 광업 체제, 나아가 사회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근대 광업제도의 실시 과정을 통해 검토해보겠다. 또한 식민지시기의 조선에서는 민간인이 광업권을 취득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가 관리하는 광산이나 일본 대자본 광업회사 만이 아닌 민간의 조선인에 의한 광산 경영도 많이 있었다. 이중에서는 광산경영에서 얻은 자금을 토대로 변호사 활동이나 학교 경영, 신문사 경영 등 사회 활동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이번 발표에서는 민족운동가로 알려진 광산왕 이종만의 대동광업회사의 광산경영에 대해, 특히 중일전쟁 시기의 산금체제하에서의 광산노동자에의 동원 정책 강화의 정세속에 대동광산의 자영 방식을 통해 어떠한 저항을 시도하고, 그리고 어떠한 노동사회 창조를 지향했는지에 대해 고찰해 보겠다.
This paper attempts to re-examine the social aspects of the mining industry, a key industry in the 20th century regarding to the problem modern development brought to the Chosun Korea colonial society. For Modern Japan, a late-capitalist state at the time, the modern mining industry was monopolized in terms of capital and technology by Imperial Japanese government as a national policy, and has been doing resource developments. Yet as another feature, it is pointed out that social elements such as labor protection or environmental preservation also led to suppression and exclusion. In such circumstances, this paper investigates factors throughout the progression process of the modern mining industry. Particularly, it looks at how structural defects involved with the Imperial Japanese mining industry system which could have had some impact to the mining industry structure, which eventually led to a social formation under the Colonial Chosun State. However, besides those government body companies called the reserved mines by governor-general of Chosun or Imperial Japanese large capitals, a number of mining companies were established with ownerships of Chosun Korean civilians, were able to acquire mineral rights in Chosun Korea at the time. Among those, there were people well known for advancing social activities by serving as attorney operations, education and journalism powered by funds gained through the mining business. Especially, against social condition and reinforcement of the mobilization policy for miners under the system of the product gold law during the Sino-Japanese War, this paper focuses on the mining business of Daidou Kogyo Company (Daidou Mining Company) by Lee Jung Man who was a mining magnate also known as a national activist, examining his resistance, purpose and goal for the labor society creations through the self-employed business model of Daidou Kogyo Company.
近代開発が植民地社会にもたらす問題について、20世紀の基幹産業であった鉱業を取り上げ、その社会的側面に焦点を当てて再考察することが本報告の課題である。後発資本主義国家として出発した近代日本では、近代鉱業は国策として政府が資本と技術を独占して資源開発を行う一方、労働保護や環境保全といった社会的要素に対しては抑圧と排除を加えたことが特徴として指摘される。こうした本国日本での近代鉱業が内包する構造的欠陥が植民地における鉱業体制、ひいては社会形成にどのような影響を及ぼしたのかについて、近代鉱業制度の実施過程を通して検討する。  また、植民地期の朝鮮では民間人が鉱業権を取得することが可能であったため、朝鮮総督府の保留鉱山や日本大資本鉱業会社だけでなく、民間の朝鮮人による鉱山経営も多く行われ、その中には鉱山経営で得た資金をもとに弁護士活動や学校経営、新聞社経営など社会活動を行う者がい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本報告では、民族運動家として知られる鉱山王の李鍾萬の大同鉱業会社の鉱山経営を取り上げ、とくに日中戦争期の産金体制下における鉱山労働者への動員政策の強化といった情勢に対して、大同鉱山の自営方式を通してどのような抵抗を試みたのか、そしてどのような労働社会の創造を目指したのかについて考察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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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児島高等農林学校からみた台湾ㆍ沖縄ㆍ朝鮮

やまだ あつし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209-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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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현재의 가고시마대학 농학부)는 1908년에 설립되었다. 도쿄와 홋카이도 제국대학에 버금가는 고등농업교육 기관으로 졸업생은 일본 본국 뿐 아니라 식민지에 설립된 농업시험장의 기수로서 또는 농업학교의 교원으로서 각각 현장 제일선에 종사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졸업생들이 그들이 처한 식민지 상황(식민지 주민, 식민지 농정 등)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또한 자신이 속한 현장에서 어떠한 모순과 갈등을 마주하였던 것일까? 현지에 파견된 기술자와 교원들은 식민지 논단에는 많은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교 동창회지에는 식민지에 대해 웅변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동창회지에 게재된 식민지에 관한 논설, 근황보고, 재학생의 수학여행기(식민지기 당시에는 오늘날과 달리 매학년 수학여행이 있었고, 수학여행지로 조선, 대만 뿐 아니라 사할린까지 원정을 갈 정도였다.)를 분석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대만, 오키나와, 조선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KICAF (present, Kagoshima University Faculty of Agriculture) was established in 1908. Graduates of KICAF worked at the front line in a colony, as an teacher by agricultural school, or an engineer by agricultural experiment station. How did graduates consider the colony, people in the colony and colonial agricultural policy? What kind of discord was there at the colony where graduates are working? They who don't try to tell at a colony were telling about a colony by alumni bulletins. This thesis analyzes how they recognized Taiwan, Okinawa and Korea while analyzing editorials about the colony indicated on alumni bulletins and records of KICAF student's field trips.
鹿児島高等農林学校(現:鹿児島大学農学部)は1908年に設立された。東京と北海道の帝国大学に次ぐ高等農業教育機関であり、卒業生は(日本本国のみならず)植民地の農業試験場などで技手として、農学校で教員として、それぞれ現場の第一線で働いた。彼ら卒業生は自分が働いている植民地(植民地の人々、植民地の農政)をどう認識していただろうか。働いている現場ではどのような矛盾や葛藤が生じていたのだろうか。植民地の論壇ではあまり語ろうとしない現場技術者や教員たちだが、母校の同窓会誌では一転して同輩や後輩に向かって、盛んに植民地について語っていた。本論は、同窓会誌に記載された植民地についての論説、近況報告、さらには在校生の修学旅行記(今と違い毎学年で行われ、朝鮮台湾だけでなく樺太まで遠征していた)を分析しながら、彼らが台湾、沖縄、朝鮮をどう認識していたのかを紹介したい。

5,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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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における台湾史研究の一考察 -戴國煇と「知」の精神史の視点から-

春山明哲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227-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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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출신의 역사가 대국휘(1931-2001)는 1955년 일본으로 간 후, 1996년 귀국할 때까지 아시아경제연구소, 릿쿄대학에 있으면서 전후 일본에서의 타이완사 연구의 개척자로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대국휘의 연구 방법론의 특색은, 실증분석과 자기검증을 연결시키는 것에 있었다. 또한, 식민지 타이완 통치에 관한 근현대 일본의 「지(知)」 전체에 접근을 시도하였다. 본 보고에서는 이 같은 대국휘의 모티브에 따른 「지(知)」의 정신사라는 시점에서, 일본에서의 타이완사 연구의 역사와 개성을 검토한다. 먼저 고토 신페이의 「타이완지」의 기원과 계보를 살펴보고, 오카마쓰 산타로·오다 요로즈(교토제국대학계), 니토베 이나조·야나이하라 다다오(도쿄제국대학계), 이노 가노리·야나기타 구니오(재야계)로 대표되는 3가지 흐름을 소개한다. 다음으로 이들 근대 일본의 「지(知)」에 대해 대국휘가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소개한다. 그 특징은 「일본인과의 대화」였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의 타이완사 연구에 미친 대국휘의 영향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를 통해 식민지 타이완ㆍ조선의 학지 형성사에서 상호 참조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자고 한다.
Dai Guo hui is a Taiwanese historian(1931"|2001). In 1955 he came to Japan and in 1996 returned to native country. In Japan he worked in the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 and as professor of Rikkyo(Saint Paul’s )University. He is one of pioneers of Taiwan studies and especially wrote many historical works. His distinction"@of methodology is to combine analytical demonstration of history with self examination. He intended to approach to all issues concerning colonial Taiwan and also Japanese intellectual problems. In this report I try to discuss characteristic of historical studies of Taiwan from the viewpoint of historian Dai Guo hui’s intellectual history. First I outlook the origin of Taiwan studies by Goto Shinpei’ government, then take up three knowledge streams. These are Kyoto Imperial University professors Okamatsu Santaro and Oda Yorozu, Tokyo Imperial University professors Nitobe Inazo and Yanaihara Tadao, and non university great scholar Inou Kanori and Yanagita Kunio. I introduce Dai Guo hui’s approach to these Japanese modern intellectuals. His unique method is a dialogue with Japanese. At last I consider his influence on historical studies of Taiwan. According to this report I hope to present some cross-references in making of intellectual history in Taiwan and Korea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台湾出身の歴史家・戴國煇(1931-2001)は、1955年来日以後、1996年帰国するまで、アジア経済研究所、立教大学にあって、戦後日本における台湾史研究の開拓者として多くの足跡を残した。戴國煇の研究方法論の特色は、実証分析と自己検証を結びつけるところにあった。また、彼は植民地台湾統治に関わる近現代日本の「知」の全体に接近を試みた。  本稿では、このような戴國煇のモチーフによる「知」の精神史という視点から、日本における台湾史研究の歴史と個性を検討した。はじめに、後藤新平による「台湾知」の起源と系譜を概観し、岡松参太郎・織田万(京大系)、新渡戸稲造・矢内原忠雄(東大系)、伊能嘉矩・柳田國男(在野系)の三つの流れを取上げる。次に、これらの近代日本の「知」に対する戴國煇のアプローチを紹介した。その特徴は「日本人との対話」であった。最後に、日本における台湾史研究における戴國煇の影響と彼が遺したものを考える。 これらにより植民地台湾・朝鮮の学知の形成史における相互参照の素材を提供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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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前半の大連における都市空間形成と建築

西澤泰彦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9집 2016.12 pp.24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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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20세기 전반, 도시건설이 활발히 이루어진 다롄에 착목하여 제정러시아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형성된 도시공간과 그 공간에 건축된 건축의 특징, 그리고 그 시기활동한 건축가의 인물상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근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19세기 말 제정러시아의 세계 전략의 일환으로서 도시건설이 시작된 다르니(대련)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다심방사형의 시가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또한 기호성 높은 바로크적 도시계획 아래, 지형을 고려한 시가지건설, 인종에 따른 거주지 구분, 해상과 육상을 잇는 항만건설 등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도시 건설이 한참이던 가운데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로 인해 시가지는 극히 일부가 갖추어지는데 그친다. 이후 러일전쟁의 결과, 다롄은 일본의 조차지가 된다. 이 시기에는 제정 러시아에 의한 도시계획을 답습하면서도 일본인 건축가에 의한 건물이 세워지며 도시공간을 형성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경제활동과 도시생활을 지지하는 기반시설의 건설, 도시의 미관과 불연화를 유도하는 건축규칙의 시행, 도시건설로서 세계적 수준의 건축이라 부를 만한 건물의 설계와 건설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1930년 경에는 이미 제정러시아가 계획하고 있던 범위에서의 도시공간이 성립하였으나, 그것은 기호성이 높은 바로크적 도시계획 위에 미관과 불연화를 지향하는 건물들이 들어서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서구열강이 세계 각국에서 전개한 식민지도시건설의 경우, 자국의 건축과 비슷한 건축물을 식민지도시에서 건설하는 것이 통상적이었으나, 다롄의 경우 일본 지배하에 지어진 소위 ‘일본적 건축물’은 종교적인 건물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에 한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일본 본토에서 다롄에 이주하여 살던 일본인에게 다롄은 본토의 지방도시에서는 체험하지 못한 ‘서양풍의 도시공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된다. 또한 이러한 건축물을 설계한 일본인 건축가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This paper focuses on Dalian where urban construction advanced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as a specific example of the theme of the symposium "The Social History Space and Movement in East Asia : Empire, Decolonization, and the Cold War", the emperor Russia and Japanese colonial rule Think of the modernity of East Asia through the urban space formed by, the characteristics of the architectures built there, and the figures of the architects who worked there. Darliny (Dalian), where urban construction began as part of Imperial Russia 's global strategy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as built as a multi - core radiation city in East Asia. There, a memorable baroque city planning, an urban area construction considering the topography, a supremacy according to the race, and a port construction on the premise of the land and sea contact were advanced. However, due to the Russo-Japanese War in the middle of the construction, only a small part of the urban area was established as a city. As a result of the Russo-Japanese War, Dalian became a leasehold land of Japan, a urban space was formed by building a building by the design of a Japanese architect, while urban planning by Imperial Russia was followed. There, a memorable baroque city planning, an urban area construction considering the topography, a supremacy according to the race, and a port construction on the premise of the land and sea contact were advanced. However, due to the Russo-Japanese War in the middle of the construction, only a small part of the urban area was established as a city. As a result, around 1930, urban space was established in the range that Emperor Russia planned, but it is a building that aims at urban beauty and noncombustiblization along with a memorable baroque city planning Was formed. Generally, in the colonial city construction which the Western powers developed in various parts of the world, it was common to build a building equivalent to the building of their own country in colonial cities, but in Dalian, despite being under Japanese rule, It was a big difference that the so-called "Japanese architecture" was limited to religious buildings and some relaxing facilities. Therefore, for Japanese who lived in Dalian from within Japan, 'Western-style urban space' was established which can not be experienced in local cities in the country. Also, Japanese architects who designed these buildings were developing activities reflecting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is time Japan had dominance in East Asia.
本稿は、シンポジウムのテーマ「空間と移動から見た東アジアの近代」に対し、その具体的事例として、20世紀前半に都市建設が進んだ大連に着目し、帝政ロシアと日本の植民地支配化で形成された都市空間とそこに建てられた建築の特徴、そして、そこで活動した建築家の人物像を通して、東アジアの近代を考えるものである。 19世紀末、帝政ロシアの世界戦略の一環として都市建設が始まったダーリニー(大連)は、東アジア唯一の多心放射型都市として市街地の建設が進められた。そこでは、記念性の高いバロック的都市計画、地形を考慮した市街地建設、人種に応じたすみ分け、海陸連絡を前提とした港湾建設、が進められた。ただし、建設途中で日露戦争になったため、都市として成立していた市街地はごく一部であった。 日露戦争の結果、大連は日本の租借地となり、帝政ロシアによる都市計画が踏襲されながら、日本人建築家の設計による建物が建てられることによって、都市空間が形成された。その過程で、経済活動と都市生活を支える基盤施設の建設、都市の美観や不燃化を誘導する建築規則の実施、都市施設として世界的水準にあったいわば「世界建築」とも呼ぶべき建物が設計、建設された。その結果、1930年頃には、かつて、帝政ロシアが計画していた範囲での都市空間が成立したが、それは、記念性の高いバロック的都市計画の上に美観と不燃化を目指した建物が建ち並ぶことで形成された。一般的に、欧米列強が世界各地で展開した植民都市建設では、自国の建築と同等の建築を植民都市で建てることがよくあったが、大連では、日本支配下に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いわゆる「日本建築」は宗教建築や一部の遊興施設に限定されていたことが大きな違いであった。したがって、日本国内から大連に移り住んできた日本人にとって、国内の地方都市では体験できない、「洋風の都市空間」が成立していた。また、これらの建築物を設計した日本人建築家は、日本が東アジアに支配地を持ったこの時期の政治状況を反映した活動を展開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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