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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7집 (13건)
No

<특집 1>

2

内地-外地を結ぶ書物のネットワー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日配時代を中心に

日比嘉高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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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 내지와 외지를 연결한 서적 유통네트워크에 대해 고찰하였다. 특히 중점적으로 검토한 것은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일배) 성립 이후의 내지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유통망이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이 시기 한반도의 소매서점의 존재형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이 후년 정리한 상세한 역사인 『日配時代史』가 있다. 단, 이 자료는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일배 전체의 업무나 조직의 변천을 대체로 편년체로 서술한 것이며, 특정한 테마나 지역에 대해서는 정보가 분산되어 있어 윤곽을 파악하기 곤란하다. 여기서는 『日配時代史』의 기술을 참고로 하면서, 거기에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가 간행하고 있던 책자 『日配通信』,『出版普及』,『新刊弘報』,『出版弘報』, 기타를 교차시켜 한반도를 무대로 한 서적유통의 실태를 파악하고, 조선반도 소매서점의 실태에 대해서도 고찰하였다. 이러한 조사고찰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시대 말기 한반도에 있어 일본어서적의 유통과정의 한 단면을 밝힐 수 있었으며, 아울러 서적 판매에 대한 추이를 살펴봄으로써 일본인과 조선인의 접촉과 공생, 충돌 양상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국가는 사회전반을 통제하려고 했다. 출판인들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을수록 국가 권력에 따르는 형태로 조직을 바꿔 나가야했다. 이리하여 출판산업의 단체들은 국책과 일체화하여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그것은 강제적이었지만 동시에 조직인으로서 자주적이기도 했다. 그것은 비판과 반성을 동반하는 역사이자 과거이다. 그리고 현대에도 돌아봐야 할 교훈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력과 통제의 측면만을 보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장치에서 움직이는 문화의 동태는 보다 다양하며, 사회 시스템 자체는 이데올로기와는 별도로 존속, 기능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배(日配)를 실현한 서적의 중앙배급 시스템은 전후일본의 중개 시스템으로 발전하였다.
This paper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book distribution network to connect the in and outside of Japan before the World War II with a special focus on the distribution network to connect Japan with the Korean Peninsula after the foundation of Japanese Publishing and Distribution Corporation. The study also mentioned the forms of retail bookstores around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ose days. The activities of Japanese Publishing and Distribution Corporation are recorded in History of Japanese Publishing and Distribution Corporation, which depicts its detailed history sorted out by the persons concerned later. As its title indicates, it records the overall affairs and organizational changes of the Corporation in a chronological order and makes it difficult to grasp the outlines of certain themes and areas due to the scattered information about them throughout the material. Consulting its records, the present study crossed it with publications issued by it including Communication of Japanese Publishing and Distribution Corporation, Publishing and Distribution, Promotion of New Books, Promotion of Publication, and others, looked into the actual state of book distribution around the Korean Peninsula, and examined the actual state of retail bookstores in Joseon. Those investigative efforts helped to understand an aspect of distribution process for books written in Japanese around the Korean Peninsula at the end of Japanese Empire. The findings about the progress of book sales were also expected to reveal the contacts, symbiosis, and clash patterns between Japanese and Korean people. During the war, the Japanese imperialists tried to control every aspect of society. The publishers belonging to an organization had to transform their businesses to follow the national power. The organizations of publishers had themselves in line with the national 50 한림일본학 27집policies and deteriorated into the tools of power, which was forced and, at the same time, voluntary as members of organization. It is a piece of history and the past that is accompanied by criticism and reflection, offering a lesson for modern Koreans. It cannot help being limited, however, to look into only the power and control aspects. The movements of culture moving inside a social device are diverse, and a social system itself can exist and function separate from ideology. The central book distribution system realized by the Japanese Publishing and Distribution Corporation, for instance, developed into a relay system in Japan after the war.
本論文では、第二次世界大戦以前における日本内地と外地を結んだ書物流通ネットワークの考察を行った。とりわけ、重点的に検討したのが日本出版配給株式会社(日配)成立以降における内地と朝鮮半島とを結んだ流通網である。また関連して、この時期の朝鮮半島における小売書店のあり方についても言及した。日配の活動については、関係者が後年まとめた詳細な歴史『日配時代史』が存在する。ただしこの資料は名前の示す通り、日配全体の業務や組織の変遷を、おおむね編年体で追いかけるものであり、特定のテーマや地域については情報が分散していて輪郭が掴みにくい。今回は、『日配時代史』の記述を参考にしながら、そこに日配が刊行していた冊子『日配通信』『出版普及』『新刊弘報』『出版弘報』他を交差させ、朝鮮半島を舞台とした書物流通の実態に迫り、また日配関連資料である『日配通信』や『出版普及』『新刊弘報』なども取り扱った。また、朝鮮半島の小売書店の実態についても、報告を行い、これらの作業により、日本帝国主義時代末期の朝鮮半島における日本語書物の流通過程の一端が明らかになるとともに、書物の売買を通した日本人、朝鮮人の接触と共棲、衝突のありさまが浮かび上がっていくものと考えている。  戦時国家は、社会を隅から隅まで統制しようとした。出版人たちは、組織に所属していればいるほど、国家権力に沿うかたちに自からと、自からの所属する組織を変え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くして、出版業の諸団体は国策と一体化し、権力の手先と化した。彼らはそれを強制されて行ったが、しかし同時に組織人としてそれを自主的にも行った。それは批判されるべき歴史であり、反省を引き継ぐべき過去である。そして、現代においてなお顧みるべき教訓でもある。だが、そうした権力と統制の側だけみるのは、時代の一部分でしかあるまい。社会装置の上で駆動する文化の動態は、より多様であり、社会装置そのものはイデオロギーとは別に存続し機能しうる。たとえば、日配が実現した書物の一元配給システムは、戦後日本の高度な取次システムへと引き継がれた。

5,500원

3

像(イメージ)の力 : 近代日本における像の普及

平瀬礼太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5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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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에서 국가권력을 표상하는 하나로 ‘어진영(御真影)’은 니노미야 타카노리상(二宮尊徳像), 구스노키 마사시게상(楠木正成像)과 함께 전국의 각 학교로 보급되어, 매일‘어진영’숭배하는 의식을 반복함으로써, 황국에 대한 관념과 근로, 충성에 대한 의식이 육체화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안전상의 문제로 봉안전에 봉납되는‘어진영’은 점차 그 불가시성을 더하여, 1940년대 초엽에야 비로서 공출되었다. 한편, 적개심을 배양하는 미디어로써 적국의 이미지가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길거리에 설치되는 동상은 국가가 추진하는 방향을 대표하는 인격을 드러냄으로써, 민중을 국가에 길들이고 권력을 증폭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위인의 동상이라고는 하나 개인적 가치관에 입각해 제작되어지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보편적 가치를 오랫동안 지속하여 표출할 수 있는 동상은 극히 드물었다. 예술전에 출품된 동상은 미술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도록 명맥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표현의 자유와 한계가 있다고는 하나 마지막까지 예술성을 담보로 나상(裸像)을 만들어 갔기에 전후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동상을 통해 일종의 의식을 보편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동상의 경우, 국가는 규제에 의해 난립을 조정하는 정도의 영향력에 그치고, 예술에서 그 지도성을 발휘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한 가운데 어진영, 그리고, 적개심을 조장하는 적의 캐릭터는 주지와 같이 명백하게, 일반에 이해되기 쉽도록 보급되어 일반에 침투되기 쉬운 효과적인 미디어였던 것이다.
In Japan, “the Imperial portraits” which were representation of the modern nation -state promoted the spread of authority of the Emperor and penetrated with the bronze statues of Sontoku Ninomiya and Masashige Kusunoki into schools of the whole country. They contributed to the incarnation of Imperial ideas, hard work and loyalty through being prayed in the daily ritual. However, stored inside of the “Hoanden” in security matters, imperial portraits increasingly enhanced its invisibility. Statues of Ninomiya and Kusunoki which spread rapidly in the 1930s would be delivered in the early 1940s. On the other hand, the image of the person from enemy country functioned effectively as the media which bred hostility. The bronze statues installed in the street were expected to publicize the national direction, tame the people, and amplify power. But even the statue of great person which was able to express universal value continuously for a long term was rare, because it was produced based on personal sense of values. It may be said that the statues of the art exhibition kept existence most obstinate in art genres. In the limit of the freedom of expression, sculptors had continued to make the nude sculptures in the name of art since wartime to postwar. It is not easy to generalize a consciousness through images. The nation could only prevent the bronze statues from being raised too much by regulation. It could not even show leadership in art-world. Imperial portraits and those of enemy promoting hostility became intelligible and effective media in both popularization and the penetration.
日本において、近代国家権力の一つの表象である 「御真影」は天皇の権威普及を促進し、二宮尊徳像、楠木正成像と共に全国の学校に浸透、毎日儀式的に拝まれることを通じて、皇国観念や勤労、忠誠などへの意識の肉体化に寄与した。しかしセキュリティの問題で奉安殿に収納される御真影は益々その不可視性を高め、1930年代に急速に普及した尊徳像や楠木像は、1940年代初めに供出されることとなった。その一方で敵国人のイメージが敵愾心を醸成するメディアとして有効に機能した。 街頭に設置される銅像は、国家が進むべき方向を代表する人格を公にして、民衆を国家に馴致させ、権力を増幅する役目を期待された。しかし、偉人の像といえ、私的価値観に基づいて制作されるが故に時代の変化にさからえず、普遍的価値を長期に渡って継続的に表出し得た像は稀であった。   芸術展の彫像は美術の中で最もしぶとく命脈を保ったともいえるかもしれない。表現の自由度の限界はあれ、最後まで芸術性を担保に裸像を作り続け、そのまま戦後へと連続していく。 像を通じてある意識を普遍化させ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銅像では国家は規制により濫立を調整する程度の影響力に止まり、芸術でも指導性を発揮するに至らなかった。そのような中で、御真影、そして敵愾心を助長する敵のキャラクターは主旨も明確で、一般に理解しやすく普及度においても浸透度においても効果的なメディアで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るであろう。

5,200원

4

식민지 대만 관전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김용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6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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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대만의 관전에서 활동한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은 대만 관전의 설치 및 운영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양화가 이시카와 긴이치로(石川欽一郎)와 시오쓰키 도호(塩月桃甫), 일본화가 고바라 고토(郷原古統)와 기노시타 세이가이(木下静涯) 등은 대만 관전의 설치를 대만 총독부에 건의하여 실현시키고 1927년 제 1회 대만미술전람회 이래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심사원으로서 활동했다. 특히 시오쓰키 도호와 기노시타 세이가이는 마지막 관전인 1943년의 총독부미술전람회에까지 심사원이었다. 그들은 대만미술교육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대만의 자연경관을 그린 풍경화나 대만인을 묘사한 인물화를 통해 소위 대만 향토색을 주도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부전시기에는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적극적인 전쟁협력보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만근대미술사와 일본근대미술사 어느 쪽에서도 단편적으로밖에 조명되지 않은 그들은 ‘애매한 문화권력’으로서 대만 근대미술사는 물론이고 동아시아근대미술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주제다.
Taiwan residence Japanese examiner in colonial Taiwan Government Exhibi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it. Western style painter ISHIKAWA Kinichiro SHIOZAKI Toho, and Japanese style painter KOBARA Koto, KINOSHITA Seigai proposed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Exhibition of Fine Arts to colonial Taiwan Government, and realized. They acted as an examiner until return to Japan. In particular SHIOZAKI and KINOSHITA had been examiner to the last government exhibition in 1943. They were also important teachers in education of fine arts during residence in Taiwan, and leaded ‘Taiwanese local color’ in landscape painting and figure painting. Since second Sino-Japanese War occurred, Government Exhibition of Fine Arts changed it’s name to The Government-General Exhibition of Fine Arts, and it’s organizer from association of Taiwanese education to Government-General of Taiwan, too. Although there are some hard aspects to understand activity during the Government-General Exhibition of Fine Arts era, they seem hard to say acted with active attitude. It is certain that Taiwan Residence Japanese Examiner’s roles which are studied fragmentarily in modern Japanese Art history and Taiwanese modern art history so far, are very important theme in Taiwanese modern art history and East Asia modern art history.
台湾官展において活動した台湾居住日本人審査員は台湾官展の設置及び展開で大きな役割を果たした人々である。西洋画家石川欽一郎と塩月桃甫, 日本画家郷原古統と木下静涯らは台湾官展の設置を台湾総督府に建議し実現させ、1927年第1回台展以来日本へ帰国するまで審査員として活動した。とりわけ、塩月桃甫と木下静涯は最後の官展の1943年総督府美術展覧会まで審査員であった。彼らは台湾美術教育においての中枢的役割を果たし、台湾の自然景観を描いた風景画や台湾人を描写した人物画を通していわゆる台湾郷土色を主導した。日中戦争勃発以後総督府美術展覧会が開かれた時期には判断しにくい側面もあるが、積極的戦争協力よりは消極的立場を取ったと解釈される。台湾近代美術史と日本近代美術史どちら側からも短篇的にしか照明されていない彼らの台湾居住期台湾官展審査員としての役割は台湾近代美術史は勿論のこと、東アジア近代美術史においても非常に重要なテーマといえる。

5,500원

5

芥川龍之介の 「西方の人」 論 : 「21 故郷」をめぐって

林薫植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8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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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아쿠타가와류노스케의 「서방의 사람」 속의 제21장 「고향」에 나타나 있는 아쿠타가와의 관념의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선교활동 중 예수는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들어가서도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예수의 성장과정을 잘 알고 있는 고향사람들은 그를 선지자(예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향에서 비난과 배척을 당한 예수는 「선지자는 고향에서는 존중받지 못한다.」라고 말하고서는 고향을 떠나 다른 유대지방에서 선교하게 된다. 그런데 아쿠타가와가 예수의 고향에서의 냉대와 응수에 주목한 것은, 자신의 작품활동에 대한 당시 문단의 비평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아쿠타가와는 문단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사조(思潮)나 사상의 차이 때문에 특히 자연주의파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예민한 신경으로 비평에 민감했던 아쿠타가와는 그들의 비판에 대해 야유가 숨겨진 작품으로 반격한 것이 寓意小說 「MENSURA ZOILI」였다. 결국 아쿠타가와는 문단으로부터 비판받는 자신의 입장을, 고향에서 배척받았던 예수의 입장을 빌려서 기술한 것이 「21 고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본문 끝에 포오(Edgar Allan Poe)에 관한 한 문장을 첨부하고 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고 하겠다. 포오가 고국인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평가 받은 것처럼, 아쿠타가와는 자신도 현재는 고향인 토쿄에서 비판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평판이 좋아서 인기작가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아쿠타가와는 고향에서 배척 받은 예수와 포오를 빌려서, 문단의 비평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피력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eaning of Ryunosuke Akutagawa’s notion, represented in Chapter 21, ‘Hometown”, of his book The Man of the West. In missionary, although Jesus tried to spread the gospel at His hometown, Nazareth, people there who already knew how Jesus had been growing up did not accept Him as a prophet. Criticized and excluded from His hometown, Jesus left Nazareth, saying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r except in his own town and in his own home” (Matthew 13:57), and continued His missionary work at other Judean regions. However, the reason Akutagawa paid special attention to inhospitality and reaction toward Jesus in His hometown was that he was conscious of criticisms towards his works from literary world those days. Not long after Akutagawa’s appearance in literary world, Akutagawa received huge criticisms, especially from Naturalists, due to his differences in notion or the trend of thought. Since Akutagawa was so sensitive to such criticisms, he refuted them by writing an allegory MENSURA ZOILI, a work his ridicule toward such criticisms is hidden. After all, Akutagawa wrote the Chapter 21, ‘Hometown,’ by reflecting his situation of getting criticisms from literary world into Jesus’ exclusion from His own hometown; this seems to be verified by Akutagawa’s addition of one sentence about Edgar Allan Poe at the end of the chapter. As Poe received evaluation not from the United States, his home country, but from France, Akutagawa convinced that, although he was getting criticisms from his hometown, Tokyo, at that time, he could become a popular writer by getting good reputations from people. As studied thus far, it became evident that Akutagawa was expressing his own thoughts about criticisms from literary world by quoting Poe and Jesus, both of whom were excluded from their hometowns.
本稿の研究目的は、芥川龍之介の 「西方の人」第21章 「故郷」に現れた芥川の観念の意味を考察することにあった。 宣教活動中のイエスは、自分の故郷であるナザレにも赴き福音を伝播しようと努めたが、イエスの成長過程を知り尽くしている郷里の人々は、伊勢巣をメシアとして認めようとしなかった。故郷の人々からさえ避難と排斥されたイエスは、「メシアは故郷から尊重されることはない」と言い、故郷を離れ、他のユダヤ地方で宣教活動を行う。 ここで、芥川龍之介がイエスの故郷からの冷遇に注目したのは、芥川ご自分の作品活動に対する当時日本文壇の批評を意識したからであった。芥川は文壇に登場してまもなくから思潮や思想の違いにより親善主義派文学者から厳しく批判されていた。鋭敏な神経で批評に敏感であった芥川は、彼らの批判に皮肉混じりの作品をもって反駁し反攻したが、それが寓意小説 「MENSURA ZOILI」であった。 要するに、芥川は文壇から批判される自身の立場を、故郷から排斥されたイエスのそれに託して記述したのが 「21 故郷」だったのである。これは、ポーのことを終りに添付していることからも裏付けられた。 芥川は、ポーが故国のアメリカではなくフランスで評価されたように、自身も現在は郷里の東京で認められず排斥されてはいるものの、いつかは評判が立って人気作者になることを確信していたのである。ひょっとすると、芥川は自分が高く評価されるところを、故郷の東京ではなく 「ゾイリア(ZOILIA)共和国」と夢見ているかも知れない。 以上、「西方の人」の 「21 故郷」の上に現れている芥川の観念を考察してみた。その結果、芥川は故郷から排斥されたイエスのエピソードとポーに託して、文壇の批評に対する自身の観念を披瀝し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芥川はそのようなイエスの立場に共感を覚えていると思うが、それにはイエスと芥川は共に誕生の地と成長の地が異なっているという、二人の同質性も影響を与えたに違いなかろう。

6,100원

6

<집 없는 천사>와 식민지 영화 검열

서재길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11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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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식민지 말기의 영화 <집 없는 천사>(1941)의 검열 문제를 검토한 것이다. 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호평을 등에 없고 일본으로 수출되어 조선영화로서는 최초로 문부성 추천을 받은 작품이다.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내무성의 검열 과정을 거쳐 조선군 보도부와 문부성 추천작이 되었음에도 일본 개봉을 앞두고 내무성의 재검열 과정에서 필름의 상당 분량이 삭제당하고 일본어로 자막을 입힌 조선어 발성영화가 일본어 더빙판으로 바뀌게 되었다. 검열과 문부성 추천 취소 과정을 둘러싼 논란은 식민지 시기 조선 영화의 제국적 소비의 (불)가능성이라는 맥락에서 이 영화에 대한 논의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새로 발굴한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영화 필름과 잡지의 기사 등을 상호 비교하면서 <집 없는 천사>의 검열 문제를 검토하였다. 검토의 결과 겸열의 과정에서 삭제된 필름의 가장 많은 부분은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찬송가를 부르거나 성경을 읊는 장면 등은 통째로 삭제되는가 하면, 방성빈이 목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구절, 향린원의 아동들이 기도를 하거나 성서를 읽는 장면, 대화 속에서 성서의 한 구절을 읊는 장면, 교회가 작품의 배경으로 나오는 장면 등이 삭제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과 각색이 총독부 검열과에 근무한 이력이 있는 일본인 니시키 모토사다에 의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기독교와 일본 사회에서의 기독교가 지니는 위상과 의미가 달랐고, 특히 천황제 파시즘 체제에 완전히 포섭된 주류 기독교 교단과 달리 가가와 류의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기독교는 천황제 파시즘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193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천황제에 저촉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신흥종교와, 공산당, 기독교가 이단으로 몰리기 십상이었고, 이 시기 발생한 일련의 적색조직 사건에서 보듯 국가가 직접적으로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이 영화가 일본에 개봉된 것은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개전을 목전에 둔 무렵이었기에, 국체 속에 포섭되어 있던 기독교에 대해서도 권력에 의한 새로운 통제가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집 없는 천사>의 필름에 대한 일본 내무성의 가위질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This study examines the issue of censorship surrounding the film Homeless Angels (1941), released in the latter period of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The news bureau of the Japanese army in colonial Korea and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Japan recommended this film for viewing in Japan after censoring it. However, before its release in Japan,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removed a considerable part of the film during an additional round of censorship, and the original Korean dialogues, which were accompanied with Japanese subtitles, were re-recorded in Japanese.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 censorship and the withdrawal of the Ministry of Education's recommendation of the film takes center stage in the academic debate on the film, raising the issue of the (im)possibility of a Korean movie being accepted by the Imperial regime during the colonial era. After comparing the film to the newly discovered scenario, I found that the parts that had been censored most extensively were related to Christianity, for example, scenes of reciting from the Bible and the singing of hymns, where Bang Seongbin's identity as a pastor is disclosed, when children at Hyangrinwon prayed or read the Bible, and even when a church building appears in the background. The film, due to its Christian content, could not escape cuts during the censorship process despite the fact that its original screenplay and dramatization was by Nishiki Motosada, who had worked for the office of censorship of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These cuts can be attributed to the status and meaning accorded to Christianity in colonial Korea and Imperial Japan. More so, this can be explained when we consider that mainstream Christianity in Japan had become an integral part of Japanese imperial fascism, while the Kagawa Toyohiko faction of Christianity, which was an influence on the film's actual model, Bang Su-won, had been keeping its distance from imperial fascism. Since the 1930s, Japanese imperialism had strengthened its direct control over the church, as can be seen from a series of incidents repressing communist organizations and Christian uprisings. New religions, communism, and Christianity were subject to state sanctions if found to be in conflict with Japanese imperialism. Furthermore, the film was released right before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when there was a renewed call by the imperial regime for strengthening state control over Christianity. This was the context in which the film Homeless Angels was censored.

6,600원

7

경성제국대학 일본어잡지 『청량(清涼)』발간과 초기 작품 연구 : 1920년대 재조일본인 학생의 글에 나타난 <조선>상을 중심으로

김욱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14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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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24년에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서 1925년에 발간된 최초의 공식 일본어 잡지인『청량』에 대해 살펴보는 글이다. 개교 1주년을 기념하여 1925년 5월 18일에 제1호를 낸 『청량』은 30호(1941)까지 발행되어 16년간 경성제국대학의 주요 잡지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청량』은 문예잡지의 성격을 뛰어넘는 종합잡지의 성격을 지녔으며 문예란 이외에도 여러 학교 소식을 전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지에 세우는 최초의 제국대학이라는 점 때문에, 설립 당시부터 잡음이 많았다. 조선인에 의한 민립대학 설립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제가 기존에 논의되던 식민지 제국대학 설립의 논의를 3⋅1운동 이후에 ‘문화통치’ 정책의 연장선상으로서 조선제국대학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제국’의 대학으로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배경은 『청량』이 공식 잡지이자 필진과 편집위원이 조선인⋅일본인이 공동으로 참여한 ‘내선’학우회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조선인 학생의 참여비중이 줄어드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밖에도 『청량』이 불완전한 ‘내선’학우회잡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편집후기에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인과 일본인이 생각하는 잡지의 지향점에 ‘균열’이 있었던 것. 더불어 경성제국대학이 위치한 조선이라는 장소를 표상하는 방법에 드러나는 두 민족 학생들의 시선에도 또한 균열이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균열은, 조선인과 재조선일본인이라는 구성원을 가진 경성제국대학의 학생들이, ‘내지(內地)’일본에 있는 학생들과 교류하고 싶다는 공통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같은 잡지에서조차 ‘조선’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에 의해 결국 『청량』이라는 잡지에서 동상이몽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같은 교수의 밑에서 일본어라는 공용어로 공부를 하고, 또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엘리트 학생 집단이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구성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융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지만, 한국어 잡지의 창간과 『청량』 후기(後期)의 조선인 집필진 수의 감소는 한계성 또한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This paper is a piece of writing which examines 『Cheong-ryang』, the official Japanese-language magazine which was first published by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1925.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first opened in 1924. 『Cheong- ryang』 which published the first issue on May 18th, 1925 to celebrate of the 1st anniversary of its founding got to play the role as the major magazine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for 16 years until the 30th issues were published in the checked data. 『Cheong-ryang』 had the characteristics of the general magazine which surpassed the features of the literary magazine and broke the several school news with the literature part. There were a lot of noise in the Keijo Imperial University since it was founded because of the point that it is the first imperial university established in colony. There was a sign of establishment of a private university by a Korean. However, Japan established the organizing committee of Joseon Imperial University through discussion of establishment of the Colonial Imperial University which had been done before in a continuation of the policy since the March Fist Independence Movement and got to do the university of . This background became one of the causes that Korean students’ participation in the magazine gradually reduced despite 『Cheong-ryang』 was the student union magazine that Korean and Japanese students jointly participate in the official magazine as the writing staffs and editors. Except this, 『Cheong-ryang』 could not helping being the incomplete student union magazine because there were cracks in the aims that Korean and Japanese students thought of and the different viewpoints which showed in the methods to express the place of Joseon that Keijo Imperial University was located in as shown in the editors’ comments. These different viewpoints resulted in showing the different purposes in the magazine, 『Cheong-ryang』 due to the different perspectives to look at ‘Joseon’ even in the same magazine with the common desire that the students in the Keijo Imperial University which consists of the Korean students and the Japanese students who lives in Korea wanted to make an exchange with the students in Japan. The aspect about the possibility of harmony was shown in the magazine in that they studied under the same professors with an official language called Japanese and the Korean and Japanese elite student groups were composed as the common ground. However, foundation of Korean magazines and reduction of the number of Korean writing staffs in the late 『Cheong-ryang』 clearly show the lim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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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경성의 일본전통공연예술 동호회 활동 양상 : 『경성신보』와 『경성일보』의 1907∼1915년 기사를 중심으로

이지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17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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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경성신보』와 『경성일보』의 1907년부터 1915년까지의 기사를 분석하여 20세 기 초 경성에 존재했던 일본전통예술 관련 동호회의 활동 양상에 대해서 파악하였다. 경성에는 요쿄쿠(9종), 기다유(6종), 비와(5종), 산쿄쿠(2종), 나가우타(1종)의 동호회가 있 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가장 이른 시기에 결성된 분야는 요쿄쿠(1906년 10월경)이고, 다음은 기다유, 나가우타, 산쿄쿠, 비와 순이다. 동호인의 수에서 보면 요쿄쿠(600-700여명)와 비와 (450여명)의 애호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요쿄쿠와 비와의 연주회는 ‘연주행위’를 주체로 하는 온습회의 전형적인 형태였던 반면에 기다유와 나가우타의 연주회는 성과 발표와 ‘감상’의 측면이 공존하고 있었다. 요쿄쿠는 중·상류사회에서 애호되었고, 지쿠젠비와는 관청 관리나 부인들이 주류였으며, 소쿄쿠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샤쿠하치는 남성들 사이에서 향유되었다. 또한 기다유와 나가 우타는 화류계와 깊은 관련을 갖고 연행되었다. 내지에서 온 사범들은 경성에서 문하생들을 모아 각 조직을 이끌면서 경성 일본인사회에 전통예술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성에서 다양한 일본전통예술 관련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었던 점, 온습회 형태의 발표회 가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었던 점, 내지에서 온 사범들이 각 단체를 주도했던 점, 요쿄쿠의 애호가가 많았고 나가우타가 크게 유행한 점, 서양음악에 비해 일본음악이 선호된 점 등으로 볼 때, 경성 일본 거류민사회의 전통예술은 내지와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유사한 형태로 전 개되어 가고 있었다고 하겠다.
This paper aims to find out the aspects of activities by various societies of amateur lovers of the traditional Japanese performing arts which existed in Seoul in the early 20th century, by analyzing the relevant articles in the Gyeongseong sinbo and Gyeongseon ilbo from 1907 to 1915. The earliest establishment of societies appeared in the Nogaku genre (before October 1906), followed by the societies for Gidayu, Nagauta, Biwa, Sankyoku, from the earliest. Nogaku had the most number of affinity groups and members. Each of the societies held regular monthly meetings and seasonal gatherings where they displayed their skills. Considering that the recitals were held in large theaters, Gidayu, Nagauta, Sankyoku are found to have been the popular genres. The majority of the Nogaku societies are male officials, while the male and female members are in a similar ratio in the Gidayu societies. In the Nagauta societies were many geishas while in the Koto societies were many housewives, displaying different aspects in their members. The masters of each society were mostly those who migrated to Seoul from Japan where they used to work, and some of them were invited from Japan temporarily. There is also an alliance for Japanese and Western music. The performances by the alliance are found to have Japanese music in the far higher ratio, and they essentially included the Japanese music performance by Western musical instruments. As such, the traditional Japanese music was preferred to Western music in the Japanese residents community in Seoul, which was the same phenomenon as in Japan.
本稿では日本語日刊紙 『京城新報』及び 『京城日報』の1907年から1915年までの記事を分析 し、20世紀初頭の京城に存在した日本伝統芸能関連の同好会の活動様相について把握した。 京城には謠曲(九種の会)、義太夫(六種)、琵琶(五種)、三曲(二種)、長唄(一種)の同好会 があった。このうち、もっとも早い時期に形成された分野は謠曲(1906年10月頃)であり、次 は義太夫、長唄、三曲、琵琶の順である。 同好者の数からみれば謠曲(600-700餘名)や琵琶(450余名)がもっとも多いが、温習会は小 規模な場所で長い時間かけて行われていることから、日頃の稽古の成果を発表する性格のも の、鑑賞より演奏行為を主体とする温習会の典型的な形であったと思われる。その一方、義 太夫と長唄の温習会は出演者は多くないが、開催場所は大劇場で1000名も越える観客が来 場していることから、成果発表の場としての性格のほか、鑑賞を目的とする公演としての側 面も共存していたと考えられる。 謠曲の会員は官僚などが含まれた男性中心であったが、家庭婦人や未婚女性も活動して いた。琵琶は役所の管理や婦人が主流であり、箏曲はほとんど女性であった。また義太夫や 長唄の同好者には芸妓など花柳界関係者も少なくなかった。 各団体の師匠は、京仁地域に居住していた音楽専門家がほとんどであり、主な人物とし ては筑前琵琶の鶴崎賢定や箏曲の中菅道雄(宮城道雄)があげられる。また一時的に日本から 招聘した場合もあり、第七代芳村伊三郎がその例である。 日本では、1910年代の半ばから西洋音楽に追い越された日本音楽が再び人気を博してい たが、このような現状は京城の日本人居留民社会においても見られた。京城で様々な伝統芸 能の稽古が行われていたこと、温習会という発表会を定期的に開催していたこと、謠曲の愛 好者が多かったこと、長唄が流行ったこと、西洋楽器による日本音楽の演奏が行われていた ことも内地と共通であった。このように、京城の日本人社會における傳統藝術は、内地と大 きな時間の差を置かず類似な形で展開していたと言え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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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오키나와(인)의 성찰적 자기서사 『신의 섬(神島)』 : ‘오키나와 전투’를 사유하는 방식

손지연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21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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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오키나와에 있어 전전(戦前)과 구분되는 전후(적) 사유, 혹은 본토와 구분되는 오키나와(적) 사유의 출발은 모두 오키나와 전투의 경험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시로 다쓰히로의 『신의 섬(神島)』(1968)은 오키나와 전투가 내재한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여과 없이 담고 있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일본 본토인들에게도 오키나와인 스스로에게도, 더 나아가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불편’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를테면 본토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마이너리티라는 유사한 입장에 있던 식민지 조선과의 관계, 오키나와 내부 주민들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양상들이 그러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다음 세 가지 관점에 주목해 보고자 하였다. 우선 (1) 소설 『신의 섬(神島)』이 작가 자신은 물론 본토인, 오키나와인 모두에게 불편한 소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고, (2) 주인공 다미나토 신코와 후텐마 젠슈의 팽팽한 대결구도를 통해 드러나는 오키나와 특유의 성찰적 사유와 그 의의와 가능성을 짚어본 후, (3)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는 ‘가해’와 ‘피해’ 구도의 역설 혹은 균열, 그리고 그 역설적 구도가 내포하는 의미를 문제 삼고자 하였다.
For postwar Okinawa, it is not so exaggerated that the thought of postwar distinguished with before war, or the beginning of Okinawa’s thinking distinguished from mainland, has all been unleashed by the experience from the battle of Okinawa. ‘The God’s Island’ by Oshiro Tatsuhiro (1968) requires attention for the fact it depicted the various and complex problems inherent in the battle of Okinawa. Its meaningful since this is a novel with the content that can be ‘uncomfortable’ not only for Japanese of Mian land, and Okinawans themselves, but also for us, Koreans, because of such aspects that the relationship with mainland, with the colony, Joseon, with similar position as the minority, conflict among Okinawa residents, and the generations acutely clash each other. In this thesis, three perspectives are to be focused on. First, it will observe the reason why the Novel ‘God’s Island’ had to be an uncomfortable novel not only for all the Okinawans but also for author himself as well, second, see the meaning and possibility of Okinawan’s distinctive reflective thinking shown through confrontation of the main characters, Daminato Shinco and Hutenma Jenshu, and then lastly, will make an issue about the paradox or collision in structure of harm and harmed, and the meaning connoted by paradoxical structure.
戦後沖縄における戦前と区別される戦後(的)の思考、あるいは本土と区別されている沖縄(的)思考の出発は、すべて 「沖縄戦」の体験から触発される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大城立裕の 『神島』(1968)は、「沖縄戦」に関わる複雑な問題をあますことなく含んでいる点で注意を要する。何よりもその内容が日本本土においても沖縄みずからにおいても、さらには、われわれ韓国においても決して 「愉快」な小説ではないという点である。それは、例えば本土との関係だけでなく、マイノリティという同様の立場にあった植民地朝鮮との関係、沖縄内部の住民との間の葛藤、世代間の葛藤などが激しくぶつかり合う様相が描かれていることからも、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 こうした問題に着目し、本論文では、次の3つの観点を立ててみた。まず(1)小説 『神島』が作者自身はもちろん、本土人、沖縄人すべてに 「愉快」な小説ではない理由を考え、(2)主人公⋅田港真行と普天間全秀の対決構図を介してあらわれる沖縄特有の省察的思考と、その意義や可能性を探った後、(3)小説全般に流れる 「加害」や 「被害」の構図の逆説あるいは亀裂、そしてその逆説の構図が持つ意味を考察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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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자립론의 한 사례 : 류큐공화사회헌법C사(시)안을 중심으로

이지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235-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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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19세기 말 이후 일본제국, 미국 및 현대 일본 하에서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왔다.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다양한 자립론이 분출되어 왔다. 가와미츠 신이치의 ‘류큐공화사회 헌법C사(시)안’(이하 헌법사안으로 약칭)은 그 중에서도 독특한 사례이다. 대부분의 자립론은 국가로서의 독립을 추구하거나, 일본 내에서 자치의 폭을 확대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헌법사안은 국가를 철저히 부정하고 공화사회를 지향한다. 전쟁과 군대 보유에 반대하며, 침략을 당할 경우에도 방어적 무력조차 행사하지 않는 절대평화주의를 추구한다. 이러한 헌법사안의 내용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결여된 발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헌법사안의 출현 배경과 현실성 및 현재적 의의에 대해 검토하였다. 헌법사안의 국가 부정 및 절대평화주의는 매우 공상적이나, 수백년 이상 지속된 오키나와의 ‘비무장’의 전통 및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현실이라는 면에서 실은 적지 않은 현실성을 지닌다. 또한 일본의 헌법개정국면에서 ‘호헌론’을 넘어서는 ‘창헌론’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발상은 ‘쿠로시오 로드 평화헌법’ 구상 및 아시아공동체 구상으로 확장되면서, 해양세력 및 대륙세력의 긴장 및 갈등 속에 위치한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Okinawa has been subject to “colonial dominance" of imperialist Japan, the United States, and modern Japan since the late 19th century, and accordingly, there have been attempts to overcome this situation in various forms of theories of self-reliance. Among such efforts is the “Draft C of the Constitution of Ryukyu Republican Community" (hereafter referred to as “Draft C") written by Kawamitsu Shinichi. Most theories of self-reliance pursue independence as a nation state or greater autonomy within Japan. "Draft C," however, is a peculiar case in that it completely rejects the idea of a nation; instead, it seeks to build a republican community. It also pursues absolute pacifism that is opposed to war and the use of military force even in self-defense. Many have found these ideas posited”Draft C" too ideal and utopian and thus criticized them for being unpractical. This essay examines the background of this draft of constitution and speculates on its significance in our present age. Although the rejection of a nation and absolute pacifism in this draft may sound too unrealistic, these ideas actually have some solid foundation considering the tradition of "demilitarization" in Okinawa that has been continuing for hundreds of years as well as its geographical location among powerful nations. "Draft C" also holds great significance in our present age as it serves as a specific example of a case of “new framing of a constitution” that goes beyond “protection of the constitution” in terms of constitutional amendments in Japan. And this idea was developed into “the Kuroshio road demilitarized zone” and “the East Asian Community” Initiative, and then it also provides significant implications for the situ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middle of conflicts between Superpowers.
沖縄は、十九世紀末以降、日本帝国、アメリカ、現代日本による 「植民地的状況」に置かれてきた。そして、このような状況を打開するため様々な自立論が展開されてきた。川満信一の 「琉球共和社会憲法C私(試)案」(以下、憲法私案)は、その中でも独特なケースである。殆んどの自立論は、国家としての独立を求めるか、日本国内での自治の幅を広げることを目指す。憲法私案はしかし、国家を徹底して否定し、共和社会を目標とする。戦争と軍隊保有に反対し、絶対平和を守る。このような憲法私案の内容はあまりも理想的で現実性が欠けている発想にも見える。しかし、憲法私案の国家否定および絶対平和主義は、数百年以上続いた琉球王国の 「非武」の伝統や強大国の間に挟まっている地政学的位置という面で実は相当な現実性を持っている。そのうえ、日本の憲法改正局面において 「護憲論」の乗り越える 「創憲論」の具体的な例であるという点で現在にもつながる意義を持つ。また憲法私案の発想は、「黒潮ロード平和憲法」構想およびアジア共同体構想の方向へ展開する。これらの構想は、海洋勢力と大陸勢力の緊張と葛藤のど真ん中に位置している韓半島にも大いなる示唆点を与えるも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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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 장르 형성 연구 : 1971년 이회성(李恢成)의 아쿠타가와상(芥川賞) 수상을 중심으로

이영호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265-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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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1971년 이회성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이라는 사건이 장르로서의 재일조선인 문학이 성립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고찰하였다. 1970년대에 재일조선인 문학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 시작에는 이회성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이 있었다. 이후 198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은 각종 일본 문학사에 등장하며 정식으로 일본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받는다. 이처럼 1970년대는 재일조선인 문학이 장르로 성립하는데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다. 1960년대 일본은 보수적 단일민족론과 비판적 단일민족론이 공존했던 시기로 1960년대 후반에 각종 인권운동이 발생하며 마이너리티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시기였다. 이후 재일조선인 작가 이회성과 오키나와 출신 오시로 다쓰히로(大城立裕)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마이너리티 작가가 일본 문단에 등장한다. 이들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선정이라는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회성은 수상작인 「다듬이질하는 여인(砧をうつ女)」에서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해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1940년대 조선을 보여준다. 이회성의 이 같은 창작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이라는 목적 때문이었으며, 이회성은 일본인들이 가장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을 보여주는 전략으로 작품을 창작한다. 이회성은 조선 국적을 유지한 채 한국에 입국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아쿠타가와상이 필요했다. 때문에 이회성은 수상 가능한 경향의 작품을 창작한 것이라는 재평가가 가능하다. 이회성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을 기점으로 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것은 재일조선인 문학사에 커다란 의미가 있으며 1980년대 장르로서의 재일조선인 문학의 성립의 시발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 가능하다.
This study considered the effect on conclusion of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s a genre, of an incident that Lee Hoesung received Akutagawa Prize in 1971.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had its heyday in the 1970s, and there was the incident that Lee Hoesung received Akutagawa Prize in the start. After that,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ppeared formally in the history of Japanese literature in the 1980s, and was formed as a genre of Japanese literature. In the 1970s, this foundation was solidified. In the 1960s, conservative single-race theory and critical single-race theory coexisted in Japan, and in late 1960s, all sorts of minority civil-rights movements happened. Interest in minority increased. After that, Lee Hoesung who is Korean writer in Japan and Oshiro Tatsuhiro who is a writer in Okinawa received Akutagawa Prize, and minority writers advanced to Japanese literary world. Their Akutagawa Prize can be interpret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election reflecting the then social atmosphere. However, Lee Hoesung wrote a work strategically by using the most typical image of Joseon in 1940s the then Japanese recognized in [Woman Beating on A Stone Block] that is a prize-winning novel of Akutagawa Prize. This writing was to enter Korea while keeping a nationality of Joseon, and Lee Hoesung wrote a novel to receive a prize. After receiving the prize, Lee Hoesung entered Korea as planned, keeping a nationality of Joseon. At receiving Akutagawa Prize of Lee Hoesung,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took a new turn in the 1970s. It can be evaluated that this was an incident representing much to the history of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becoming the trigger to form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as a genre in the 1980s.
本研究では1971年李恢成の芥川賞受賞と出来事がジャンルとしての在日朝鮮人文学成立に与えた影響を考察した。1970年代に在日朝鮮人文学は全盛期を迎えて、そのはじめには李恢成の芥川賞受賞という事件があった。以後1980年代に在日朝鮮人文学は正式に日本文学史に登場し、日本文学の一ジャンルとして成立したが1970年代にはこのような土台を整えた時期であった。 1960年代の日本は保守的な単一民族論と批判的な単一民族論が共存した時期で、1960年代の後半いろんなマイノリティ人権運動が発生していた時期で、マイノリティについての関心が高まった時期であった。以後、在日朝鮮人作家の李恢成と沖縄作家の大城立裕が芥川賞を受賞してマイノリティ作家が日本文壇に進出する。彼らの芥川賞受賞は当時の社会的雰囲気が反映された選定という観点で解釈ができる。しかし、李恢成は芥川賞受賞作の 「砧をうつ女」で当時日本人達が類型的に認識している1940年代の朝鮮像を活用して作品を創作した。李恢成は芥川賞の受賞のため、「日本に知られている朝鮮を見せる」というストラテジーを使い、執筆活動を行っていたと再評価することができよう。また、李恢成は、これを手段として韓国を訪れようとしていて、それぞれの作品からは受賞を目的とした彼の意志が垣間見える。朝鮮国籍を維持して韓国の入国する目的のためで、李恢成は受賞できれ傾向の作品を創作した。受賞以後、李恢成は自分の予想通りに朝鮮国籍で韓国に入国する。 李恢成の芥川賞受賞を基点に1970年代の在日朝鮮人文学は新しい転換点を迎えた時期であった。これは在日朝鮮人文学史において大きな意味があり、1980年代のジャンルとしての在日朝鮮人文学の成立の始発点となった出来事として評価でき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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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판(英文版) 일본역사서 속의 한국사 및 한일관계사 관련 서술에 관한 조사 연구 : 왜구 문제를 중심으로

이영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29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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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 역사학계는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왜곡, 굴절시켜온 한국 역사상(歷史像)은 이미 오래전부터 구미(歐美) 역사학계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구미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된 일본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는 노력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해왔다. 그 과정에 일제(日帝)는 식민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춰서 마음대로 왜곡해왔다. 이러한 왜곡은 영어 등 구미어(歐美語)로 출간된 일본 역사 서적을 통해서도 이루어져 왔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런 문제에 대한 실태 조사나 연구는 일체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왜곡된 한국 역사상(歷史像)을 토대로 한 한일관계사의 서술에 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해 우선 영문판 일본 역사책에 기재된 한국사 및 한일관계사 관련 서술의 실태, 그 중에서도 왜구 문제에 한정해서 특히 <왜구=고려(조선)인 실체>설을 중심으로 조사, 분석하고 이어서 그러한 서술의 배경 및 그 문제점 등에 관하여 연구사적(硏究史的)으로 접근해가고자 했다. 영어로 출간된 일본 역사서 안의 왜구 관련 서술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일본의 패전을 계기로 하여 서술 내용이 크게 변모한다. 그 내용은 문헌 사료에 입각한 연구 성과에 입각한 서술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학문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대외팽창을 당연시하고 명분화하기 위한 정치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의 무위(武威)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왜구의 구성원은 당연히 일본인이어야만 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일본은 새롭게 평화국가의 수립을 지향한다. 그러면서 왜구에 관한 서술의 내용은 물론 그 수준도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사 편수관이었던 나카무라 히데다카의 실증주의를 표방한 한국사 및 한일관계사 연구에 의거해, 표면적으로는 탄탄한 학문적 모양새를 갖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1959년 이후 일본 학계에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 <왜구=고려(조선)인 실체>설이었다. 그리고 구미의 일본 역사학계는 이 설의 배후에 깔려있는 정치논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대로 수용했다. 이처럼 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계기로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는 평화국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알렸던 일본은 전전(戰前)의 ‘왜구=일본인 해외발전의 상징’ 내지는 ‘일본인의 무용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를 내던지고 <왜구=다국적⋅다민족>설을 내세웠다. 그것은 <왜구=고려(조선)인 실체>설은 물론 중국인 해적과 포르투갈인 해적까지 왜구로 변모시킴으로써 왜구의 실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The description of Japanese pirates in English version can be divided into two categories on the basis of the end of the World War Ⅱ. Before 1945, it was included the political end that was to propaganda the strength of Japanese military power. Therefore, Japanese pirates were described as very brave sea robbers. But after 1945, the description had changed completely. Although, the study of Japanese pirates reached to certain academic level, those books about the Japanese pirates in English version had newly suggested . The theory was originally presented by Nakamura Hidetaka, former editorial official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by the thesis of 「the relation of Japan – Korea in the Muromachi period(室町時代の日鮮關係」.
英語で出版された日本の歴史書のなかの倭寇に関する敍述は1945年, 第2次世界大戰の日本の敗戰を契機にしてその内容が大きく変わる。戦前の叙述は文献史料に基つく研究成果に立脚したものではなく政治的目的を達成するためのものであった。すなわちそれは帝国主義日本の対外侵略を正当化するためのものでありまた日本の武威を宣伝するものであった。従って倭寇の構成員は当然純粋な日本人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ところが, 敗戦後の日本は新たに平和国家の樹立を目指す。その一環の流れのなかで倭寇に関する敍述は内容とともにその水準も完全に変わっていく。朝鮮史編修官中村榮孝の實證主義を標榜した韓國史及び韓日關係史硏究に依拠し, 表面的には堅実な學問としての形態を整えながら1959年以降日本の学界に新しく登場してくるのが<倭寇=高麗(朝鮮)人 實體>說であった。この学説は今まで日本の学界の定説になっておりまた歐美の日本歴史学界もその背後に潜んでいる政治論理を認識できず、そのまま受容している。 敗戦以降、戦争を永遠にしない平和国家として新たな出発を知らせた日本は戰前の‘倭寇=日本人の海外發展の象徵’乃至‘日本人の武勇の象徵という主張を捨てて<倭寇=多國籍⋅多民族>說を打ち出した。それは<倭寇=高麗(朝鮮)人 實體>說は勿論中國人海賊やポルトカル人海賊までも倭寇に変貌させることで倭寇の実態を曖昧なものにする内容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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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베트남 ODA 지원에 대한 한일 비교분석

강철구, 윤일현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7집 2015.12 pp.31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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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국제개발협력 지원 1위국인 베트남의 사례를 일본과 비교하여 한국이 지니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파악하였다. 일본은 1991년 지출액 기준으로 미국을 제치고 이후 2000년도까지 세계 최대의 원조 공여국의 지위를 유지해 온 ODA 선진국이며, 60여년 이상의 ODA 역사를 지나면서 이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는 국가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대 베트남에 대한 원조가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운영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어 ODA의 기획과 검토, 평가 등이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정책은 외무성이 결정하되 유무상 등의 모든 원조는 JICA에서 이루어지는 등 통합된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한국은 아직도 부처 간 ODA 사업이 분산(이원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추진기관 간에 사업의 중복과 조정기재 부족 등으로 원조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저하되면서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둘째, 일본의 ODA 정책은 과거 경제실익형 모델에서 이제는 서서히 서구식 인도주의형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의 해외개발원조의 양적인 규모는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경제규모에 비해서는 아직까지 부족한 실정이며, 질적인 프로그램에서도 개선해야 할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 ODA를 통한 진정한 선진국의 면모를 갖추어야 할 때라고 본다.
This paper is to study comparative analysis of the ODA supporting to Vietnam for between Korea and Japan. Korea is the most supportive nation of ODA to Vietnam. Compared with Japan, Korea has limitations and problems. In conclusion, first, Systematic organization with ODA’s planning, review and rating should be runned to have the Korea aid for Vietnam prepare for the practically and efficient operating system. Second, Japan’s ODA policy in the past had the economic profit model, but now has gradually transformed into a western humanitarian model. Third, the quantitative scale of Korea’s ODA is increasing steadily every year, but compared to the economic scale of Korea, it is not enough and has to be improved in quality of ODA programs. For solving these problems, we should let Japan’s case be a good lesson to Korea.
本研究では、韓国の国際開発協力支援一位の国であるベトナムの例を日本と比較して、韓国が持つ限界と問題点を把握した。日本は1991年、アメリカを追い抜き、2000年度までは世界最大の援助供与国を維持してきたODA先進国であり、またそれに対し、あらゆる評価を受けている国でもある。結論的には、まず、ベトナムに対する韓国の援助が今後実質的かつ効率的に管理され、運営体制を整えるためには体系的な組織としてODAの企画と検討、評価などが連動するよう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日本の場合は、政策は外務省が決定し、援助はJICAで実施するなどの統合された体系を持っているが、韓国はまだ省庁(部と所)の間にODA業務が分散(二元化)されているだけでなく、業務の重複と調整などの問題が残っており、援助の効率性と効果性が低下している。第二に、日本のODA政策は、いままでの経済実益型モデルから徐々に欧米型に変化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第三に、韓国の海外開発援助の量的な規模は毎年増加しているが、経済規模に比べると必ずしもそうではない。このような問題に対しては、日本を反面教師とし、ODAを通して本当の先進国としての体制を整える必要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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