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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30집 (8건)
No

<일반논문>

1

『新撰姓氏錄』의 기초적 연구

서보경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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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찬성씨록』(이하 『성씨록』이라 약칭)이 편찬된 간무조(桓武朝)는 덴무계(天武系)에서 덴지계(天智系)로 황통이 변화된 시기였다. 그래서 간무천황의 황통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조치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특히 간무조 전반기는 황친질서의 개편과 덴무, 덴지계 황친에 대한 ‘賜姓’을 통해 간무 직계 중심의 황친체제를 구축하였고, 후반기는 이러한 질서 위에 ‘親 王任官’책을 통해 천황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황친을 대상으로 한 사성과 임관 정책은 사가조(嵯峨朝)에 계승되어 한층 진전을 보았다. 따라서 홍인 5년에 완성을 본 󰡔성씨록󰡕(1차) 이 미나모토노아손(源朝臣) 사성과 좌경 관부 등의 일련의 작업을 마친 뒤 『성씨록』의 좌경황별조의 필두에 미나모토노아손 등을 게재하였다. 보완된 『성씨록』(2차)에 다시 상표문을붙여 홍인 6년에 상주하였다. 그리고 각 씨가 제출한 본계를 공인하는 방식은 古記와 本宗 氏 本系와의 대조라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이 두 가지 방법에 의거해 국가가 본계장을 제출한 씨족의 本枝 관계를 인정한 표지가 「三禮」이다. 또 어떤 씨족과 「同祖」 관계를 맺은 씨족인지, 어떤 始祖나 別祖를 둔 씨족인지가 정해지면 皇別, 神別, 諸蕃이라는 「三體」로 각씨족의 출신을 분류하여 『성씨록』에 게재하였다. 이러한 『성씨록』의 서술 체제는 내적으로는 씨족의 계보를 공인하는 역할과 황별을 중시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고, 외적으로는 고대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지역을 모두 제번이라 규정하여, 황별, 신별 아래에 부속시켜천황 중심, 일본 중심의 관념을 체현하려 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Kanmucho was a period when the imperial line changed from Tenmu to Tenji and Kanmu-Tennno’s thoughts of the imperial line showed strongly. The reduction of the scope of relatives of the imperial family on Kanmucho was promoted by excluding those who have obtained the imperial name of Tenji or Tenmu through sisei. In addition, Kanmu-Tennno let relatives of the imperial family participate in politics and support the Tennno’s authority by commissioning sinnnos. In the period of Saga-Tennno, a surname of MinamotonoAsomi was bestowed to an imperial prince who was one year old, and let sinnnos, who have lost the right of succession to the throne, be gentlemen ushers through sisei and play a role in strengthening the Tennno’s authority. Therefore, there was a reason that, though 『ShinsenShojiroku』 was primarily completed in the year of Konin 5, it was again published in the year of Konin 6 in order to arrange the records on the Tennno’s sisei. Next, the basic system of 『ShinsenShojiroku』 is regarded to have been composed by the form of 「santa」i and 「sanrai」.
『新撰姓氏錄』の編纂された桓武朝は天武系から天智系への皇統の變化期である。桓武 朝の前半期は天武․天智系の皇親に對する‘賜姓’を通じて桓武直系中心の皇親體制を築き、 後半期は‘親王任官’政策を基づいて天皇權を强化している。このような皇親に対する賜姓と任 官は嵯峨朝へ続いた。よって、『新撰姓氏錄』の完成された弘仁5年は、嵯峨天皇が1世皇子 に源朝臣の賜姓と左京に編貫などの作業が終わってから『新撰姓氏錄』の左京の皇別條に記 載することになった。そして、補完する『新撰姓氏錄』に上表文をつき、弘仁6年再上表された。 また、『新撰姓氏錄』は提出する本系を公認するために古記と本宗氏の本系との對照という原則 を適用している。この二つの方法は國家の各氏にたいする程度認定で、「三禮」で表記してい る。そのうえ、各氏は「同祖」関係、始祖、別祖が誰なのかにによって出自が決まり、皇別․ 神別․諸蕃という「三體」で分けて『新撰姓氏錄』に入錄するようになった。また、『新撰姓氏錄』 は皇別がらはじまっているし、諸蕃は皇別․神別の下に付屬したりして、天皇中心․日本中心 觀念を現すように構成された系譜書である。

6,700원

2

일본 고전에 나타난 뱀의 상징성 고찰

문인숙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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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 고전문학에 나타나는 뱀의 상징성을 뱀눈 문양(蛇の目)과 관련지어 재조명했다. 상대문학의 뱀은 주로 확대 과장한 외형적 특징을 이용해 영웅성을 획득하는 통과의례의의미와 함께 수호신과 재앙신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상징의미를 갖는 것을 알 수 있다. 平安 時代의 섬세하고 우아한 세계를 추구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뱀의 신체적 특징은 노골적으로남근이라는 남성성의 상징이 되는 한편,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 육도윤회 사상 등과 맞물려종교적, 교훈적 색채가 농후해지는 현상을 보이며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상고문학의 남성적, 공격적, 신적인 이미지는 퇴색되고, 불교와 접목되어 축생의 하나로 다뤄지거나 엽기적 음담패설의 대상으로 전락된 측면이 강하다. 중세문학에서는 뱀은上代에 비해 왜소해지고 독자적 신위가 아닌 불법을 수호하는 주변적 신위로 격하되면서도전쟁과 관련된 영웅성을 입증하는 뱀의 영력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원시적이지만 강력한 영적 존재로 그려지는 상대 문학의 이미지를 향수하며 하나의 상징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재앙신과 수호신이라는 상징의미와 뱀신의 후예가 영웅을 낳는다는 三輪山 전설의 신앙이 呪符로써의 蛇の目 문양과 합치하면서 家紋으로 발전했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뱀의 공격성과 원추형 모습이라는 뱀 이미지의 대표성과는 상관없이 뱀의 모든 영력의 결정체로써 구슬과 같은 주술성을 상징하는 뱀눈이 家紋에 투영되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This study has been reviewed the symbolism of the snake appearing in the classical Japanese literature in relation to the snake's eye. In the ancient literature of Japan, it can be understood that snakes have an antinomical symbolic meaning of guardians and disasters as well as the meanings of the rites of passage through which to acquire heroism mainly through the use of the exaggerated external features. Unlike the atmosphere of the Heian era, which pursued a delicate and elegant world, the snake became blatantly a symbol of man, the penis because of the physical feature. With the Buddhist thought such as punitive justice, the eternal cycle of birth, etc, religious and instructional colors were enriched and the spectrum of the various meanings was expanded. As a result, the masculine, aggressive, and divine image of the ancient literature has been faded and it was treated as one of the humble animal with the Buddhism or fallen into the subject of obscenity. In the medieval literature, the snake succeeded to the snake's spiritual power, which proves heroism related to war, even though it had been dwarfed as compared to the ancient literature and demoted as Buddhism guardian which does not have an original divinity. Embracing images the images of the ancient literature drawn as a primitive but powerful spiritual being, a symbolic system was formed. As the snake's eyes combined with the symbols of the guardian and disaster and the Miwansan legend that the descendants of the snake god lays heroes it seems to be developed as a family crest. It is claimed that the snake's eye, which symbolizes the crystal of all spiritual powers, was projected on the snake eyes of the family crest, regardless of the representive images of the snake like attackability and conical shape.
本稿は、日本の古典文学に於ける蛇の象徴性を家紋蛇の目と関連付けて再照明した。 上代文学のヘビは、主に拡大誇張された外形的特徴を利用して英雄性を獲得する通過儀礼 の意味と守護神とタタリ神という二律背反的なシンボルの意味を持つことが分かる。しかし、繊細 で優雅な世界を追求していた平安時代の雰囲気とは違って、ヘビの身体的特徴は、露骨に陰 茎という男性性の象徴となる一方、仏教の因果応報思想、六道輪廻思想などが、かみ合って 宗教的、教訓的色彩が濃厚になる現象を見せ、さまざまな意味のスペクトルが拡大された。そ の結果、上代文学の男性的、攻撃的、神的なイメージは衰退して、仏教と融合されて畜生の 一つとして扱われたり猟奇的ひわいな話しの対象に転落した側面が強い。中世文学では、ヘビ は上代に比べて小さくなって独自の神位ではなく、仏法を守護する周辺的神位に格下げされな がらも、戦争に関連する英雄性を立証するヘビの霊力はそのまま継承されていた。原始的だが 強力な霊的存在で描かれる上代文学のイメージを形成している。 これらのタタリ神と守護神という象徴の意味と蛇神の子孫が英雄を生むという三輪山伝説の信 仰が呪符としての蛇の目と合致しながら家紋にまで発展したと思う。したがってヘビの攻撃性と円 錐形の姿という蛇のイメージの代表性とは関係なく、ヘビのすべての霊力の結晶として呪術を象 徴する玉のような蛇の目が家紋蛇の目に投影されたと主張するものである。

6,400원

3

Golden Balls and Moon Forehead :Understanding Ancient Korean Performing Arts through the Japanese Court Dances

Jung-rook, SEO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5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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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오수」중 「금환(金丸)」과 「월전(月顚)」을 분석하여 고대한국 춤 보다 더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우선 공묘기를 묘사한 금환이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이었음을 밝히었다. 또 본 연구를 통해 최치원이 이 공연을 경주나 울산 부근에서 관람하였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환은 일본의 󰡔신서고악도󰡕에 시라기가쿠(즉 신라악)이라고 소개한 「타마토리(弄玉)」와 유사함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향악’이라는 개념이 고려시대부터가 아닌 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함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월전」의 경우 본 연구를 통해 이 춤이 고대 음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본 연구는 일본의 「코토쿠라쿠(胡德樂)」 「월전」이 매우 유사한 작품임도밝히었다. 특히 두 춤의 비교를 통해 그 동안 의문시 되었던 「코토쿠라쿠」의 가면에 코가삐뚤어지는 이유가 바로 음주와 관련이 있으며, 이 가면의 모습을 통해 지금까지 정확하게의미가 파악하기 어려웠던 ‘月顚’이라는 의미가 코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살펴보았다. 본연구는 고대 한국의 춤은 일본의 춤의 기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 한국 춤 이해에 있어 일본 궁중춤의 연구가 좀 더 촉진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This study is a research to understand the ancient Korean dances through the analysis of Five poems regarding various Korean performances(鄕樂雜詠五首Hyangak chapyŏng osu) particularly, ‘Kŭmhwan’ (金丸) and ‘Wŏlchŏn’ (月顚). With the study, we may find Kŭmhwan is a juggling dance to wish to make peace. We could also discover that the poet watched this performance in Ulsan area or Kyŏngju. In addition, Tamatori (弄玉) in an old Japanese painting could be related to Silla Kŭmhwan. On the other hand, Wŏlchŏn could be connected to the Wine-drinking Game in the Ancient East Asia. It is interesting that The Japanese court dance Kotokuraku (胡德樂) is quite similar to Wŏlchŏn. Through the comparison between Wŏlchŏn and Kotokuraku, we could explain why the mask of Kotokuraku has a wrenched nose. Korean idiomatic phrase has a similar expression to the Kotokuraku mask: “as crooked as the nose (코가 삐뚤어질 만큼)”. It corresponds well with the theme of Kotokuraku. Through the comparison, we could also guess that the meaning of the unique title Wŏlchŏn may depict the nose of the mask. In this sense, we can assume that the mood of this dance could be funny and comical.

6,900원

4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방설림(防雪林)」연구

황봉모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8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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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바야시 다키지의「방설림」을 연구한 것이다. 그리고「방설림」에서「부재지주」에 이르는 변화과정에 대하여 비교분석하여 보았다.「방설림」에서 농민들은 소작료 감면을 부탁하려고 지주를 찾아가지만 경찰에 잡혀간다. 이 작품에서 농민들의 행동은 실패로끝난다. 하지만 농민들의 행동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도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비로소 자신의 적이 누구인가 알게 된다. 농민들은 이러한 상대에 대비하기 위하여 다음 행동을 준비할 것이다. 한편「부재지주」에서 농민들의 쟁의는 성공을 거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농민들은 농민조합이라는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부재지주」에서는 도시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아 농촌의 농민의식이 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농민들의 요구는 단지 개개의 지주에 대한 불만이라는 형태만이 아니고, 계급적 지배자로서의 지주제에 대한 요구로 변해갈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일본자본주의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요컨대「방설림」에서「부재지주」에 이르는 변화를 보면, 개별적 운동에서 조직적 운동으로 바뀌고, 일시적인 운동에서 상시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종래 개인적인 지배관계였던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지배계급대 소작인 계급이라는 관계로 변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This paper studied Takiji Kobayashi's "a snow forest". Then, we made a comparative analysis in the process of change from "a snow forest" to "absentee landowner". In "a snow forest", the farmers visit the landlord to request reductions of farm rent, but they are stopped by the police. In this work, the actions of the farmers end in failure. However, even if the farmers' actions failed, it was meaningful. For the first time, the farmers finded out who their enemies are. The farmers will prepare for the next action to fight this opponents. Meanwhile, in "absentee landowner", the struggle of the farmers succeeds. Above all, the farmers of this work had an organization called the farmer unions. In "absentee landowner", the farmers' consciousness grows in the rural areas with the help of urban labor unions. From now on, the demands of the farmers will change not only in the form of dissatisfaction with individual landowners, but also in the demand for landowners as class dominators. And the farmers will criticize strongly to Japanese capitalism. In short, when we look at the change from "a snow forest" to "absentee landowner", it changes from individual exercise to organizational movement and develops from temporary exercise to constant movement. This means that the personal relationship between the landowner and the tenant has changed to the relationship of the ruling class and the tenant class.
本稿は小林多喜二の「防雪林」を研究したものである。そして「防雪林」から「不在地 主」に至る変化過程について、比較分析してみた。「防雪林」の中で、農民たちは小作料 の減免を要求するために、地主を訪ねていくが、警察に止められる。この作品の中で、農民た ちの行動は失敗に終わる。しかし、農民たちの行動が失敗に終わったとしても、意味がないので はなかった。農民たちははじめて自分の敵が誰なのかが分かることになる。農民たちはこういう相 手に戦うために、次の行動を準備すると思われる。 一方、「不在地主」の中で、農民たちの争議は成功を収める。何より、この作品の農民た ちは農民組合という組織を持っていた。「不在地主」の中では、都市の労働組合の助けを得 て、農村の農民意識が成長する。これから、農民たちの要求はただ個々の地主に対する不満 というより、階級的支配者としての地主制に対する要求へ変わっていくと思われる。そして、その 背後にある日本資本主義への強い批判を表すだろう。 要するに、「防雪林」から「不在地主」に至る変化を見てみると、個別的な運動から組織 的な運動に変わり、一時的な運動から常時的な運動に発展している。また、これは以前の個人 的な支配関係であった地主と小作人との関係が支配階級対小作人階級という関係に変わった のを意味する。

5,800원

5

강원도 화교사회의 형성과 변화 : 1900년대∼1940년대를 중심으로

이정희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11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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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0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약 50년에 걸친 근대시기 강원도 화교의 형성과 역사를 인구의 추이, 경제활동, 그리고 화교배척사건과 중일전쟁의 영향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분명히 밝혀진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화교의 강원도 정착은 대체로 1900년대에 이뤄졌으며 1920년대 타 지역에 비해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화교 전체에서 강원도 화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1-3% 에 불과, 화교의 거주가 희박한 지역의 하나였다. 강원도 화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둘째, 강원도 화교의 직업은 상인,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었으며, 타 지역에 비해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다. 화상은 포목상점과 잡화점을 경영하여 각 군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는 수리조합, 철도, 도로공사의 노동자로 일했다. 농민은 상업 목적의야채재배를 활발히 전개, 춘천의 경우 야채시장을 독점하는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화교건축청부업자는 1910년대 풍수원성당, 용소막성당, 원주성당의 고딕식 붉은 벽돌 건물을 시공했다. 셋째, 강원도화교는 1931년 7월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으로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타 지역보다 중국으로 귀국한 화교가 많았다. 그것은 강원도 화교 가운데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 때도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화교가 귀국하여 화교의 경제활동이 많이 위축되었다. 1938년 이후 인구가 점차 회복되었지만 이전의 인구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This paper examined mainly on the population transition of Overseas Chinese , their economic activities and anti-Chinese movement in Gangwon Province during 50 years from the 1900’s through the 1940’s. The analysis gives the following results. First of all, overseas Chinese started to settle down in Gangwon Province in 1900s, their population increased rapidly compared with other regions in the 1920s. But, Gangwon Province was a lower density of population that accounted for only 1-3% in the population of overseas Chinese in Korea. They were mainly from Shantung Province in China. Secondly, their main job was merchants, workers, and farmers. Compared with other regions, worker’s share in their population was high. Chinese merchants managed dry-goods stores and general stores which formed influential force in respective areas in Gangwon Province. Chinese workers worked in the workplace of reservoirs, railroads, and roads as a coolie. Chinese farmers mainly cultivated vegetables and especially made a monopoly of supplying commercial vegetables in Chuncheon region. Chinese building contractors constructed religious building in the Gothic style with red bricks like this Pungsuwon, Yongsomak and Wonju Catholic Church in the 1910s. Thirdly, they were severely damaged by Korean rioters in anti-Chinese movement of 1931, and a great number returned home in china. The reason to have high ratio of returning home compared with other regions has relation to the high ratio of workers in their population. The Second Sino-Japanese War brought about much damage to weaken their economic activities. Their population started to recovery from 1938 according to their returning to Gangwon Province, but never amounted to their population of the previous war.
本稿は、1900年代から1940年代までの50年間に亘る近代における江原道華僑の人口推移、経済活動、そして華僑排斥事件と日中戦争による影響などを中心に検討し た。分析の結果、次のような結論を導き出すことが出来た。 第一に、華僑の江原道への定着は大体1900年代に行われ、1920年代の人口増加率 は他の地域より高かった。しかし、朝鮮華僑の人口において江原道華僑が占める比重 は1-3%に過ぎず、華僑の居住が希薄な地域であった。江原道華僑の出身地は山東省 がほとんどを占めた。 第二に、江原道華僑の職業は商人、労働者、農民が中心で、他地域に比して労働 者の比重が高かった。華商は織物商店と雑貨商店を経営して各郡において相当な勢力 を形成していた。華僑労働者は水理組合、鉄道、道路工事の苦力として働いた。華農 は野菜栽培を活発に展開、春川の場合野菜供給を独占する勢力を保っていた。なお、 華僑建築請負業者は1910年代豊水院聖堂, 龍召幕聖堂, 原州聖堂などゴシック型赤レ ンガ建築を施工した。 第三に、江原道華僑は、1931年7月に発生した華僑排斥事件によって大きな人的・ 物的被害を蒙り、とりわけ他地域より本国への帰国者が多かった。それは江原道華僑 のうち労働者が相対的に多かったことと関係がある。日中戦争勃発直後にも他地域よ り帰国者が多く、華僑の経済活動は大いに萎縮された。1938年から中国から戻って くる華僑が多くなり、人口は増えつつあったが、日中戦争以前の人口を回復せず、解 放を迎えた。

6,900원

6

일본 우익의 국가주의와 아시아주의 연구 :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과 이시와라 간지의 쇼와유신론

조관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13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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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 우익의 이념인 국가주의와 아시아주의를 고찰하기 위해,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과 이시와라 간지의 쇼와유신론에 주목한다. 일본에서 쇼와유신론은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1930년대 국가개조 운동으로 이어졌다. 본고는먼저,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일본 안팎의 정세 변화에서부터 쇼와유신이 대두하는 과정을 고찰했다. 그 과정에서 기타와 이시와라는 동시대 일본의 국수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일본 개조의 의지를 펼쳤다. 그들은 아시아의 민족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의 계획은 심지어 사회적 평등의식과 메시아적 윤리의식을 품고 있었다. 기타는 아시아 연맹과 세계연방을 향한 혁명적 대제국을 설계했다. 이시와라는 제국주의 패도에 대한 저항과 왕도의 실현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것은 일본인의 우월의식과 특권을 배제시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세계사를 선도할주체의 적극적 투쟁과 희생을 요구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다가올 대영(미)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실패했다. 하지만 냉전기 동아시아의 좌우 모든 진영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국가주의와 아시아주의가 재현되었다.
This paper considers nationalism and Asianism as the ideology of Japanese right wing. For that purpose, I focuse on Kita Ikki's The Fundamental Principles for the Reorganization of Japan (Nihon Kaizō Hōan Taikō) and Kanji Ishihara's The theory of Showa Ishin (Showa revitalizing reforms). Showa-Ishin was raised seriously from 1927, and led to the Movement to revolutionize the state in the 1930's. This paper examined the process of the emergence of Showa-Ishin since the Russo-Japanese War (1905). Kita and Ishiwara expanded the will for the Reorganization of Japan in a different dimension from contemporary Japanese nationalists. They tried to resolve Asian ethnic conflicts. Their plan also connoted consciousness of social equality and the morality of salvation like Nichiren-shū. Kita designed a revolutionary empire aimed at the Asian Federation and the World Commonwealth. Ishiwara resisted the supremacy of imperialism and tried to realize the rule of right such. They excluded Japanese superiority complex and privileges. They also demanded armed struggle and sacrifice of the subjects that should lead the world. Its ultimate purpose was to promise Japan's victory in the forthcoming War against British (US). They failed. However, the nationalism and Asianism which resembles what they tried, was reproduced through the era of the Cold War in East Asia, in all the left and right camps.
本稿は、戦前の右翼思想の基調となっていた国家主義とアジア主義について考察している。そのた め、北一輝の国家改造論と石原莞爾の昭和維新論に注目する。昭和維新論は1927年から本格的に提 起され、1930年代の国家改造運動につながった。その歴史的な過程をたどるため、本稿ではまず、大正 デモクラシー期から日本内外の情勢がいかに変化するのかを考察した。 そこで、北一輝と石原莞爾は、同時代の日本の国粋主義とは別の次元で、日本改造の意志を広げ た。彼らは、アジアの民族的な対立を解消させようと取り組んだ。その計画は、さらに社会的な平等意識と メシア的な倫理意識を抱いていた。北は、アジア連盟と世界連邦を掲げて、「革命的大帝国」を設計し た。石原は、帝国主義の覇道に対する抵抗と王道の実現を目的とした。彼らは、日本人の優越意識と特 権をも排除した。彼らはまた、世界史をリードする主体の積極的闘争と犠牲を要求した。その究極の目的 は、来るべき英・米との世界最終戦で日本の勝利を約束するためのものだった。彼らは失敗した。しか し、冷戦期の東アジアにおける左右の両陣営では、彼らの思想と方法に類似している、国家主義とアジア 主義が再び現れた。

7,500원

7

일본 ODA의 국제규범 준수와 공여국 중심주의 : 개발협력대강을 중심으로

강우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17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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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일본의 ODA 정책에 국제규범을 준수하기 위한 노력과 공여국 중심주의의 담론들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규명해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2014년 2월 개정된 개발협력대강의 주요 쟁점들 가운데 기존의 정책문서와 차별성이 가장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원조 이념, ODA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 개발협력의 투명성 확보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개발협력대강 이전의 일본 ODA는 현실주의적 ODA로 논의되어 왔다. 분석의 결과, 개발협력대강에서 국제규범보다 공여국 중심주의가 더욱 강조되었음을 발견할수 있었다. 개발협력대강은 원조 이념으로서 일본의 국익을 명시하고 ODA의 군사적 이용가능성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공여국 중심주의가 강조된 것은 국가재흥전략, 국가안전보장 전략, 특정비밀보호법과 같은 아베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의 수단으로써 ODA가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인 경기 침체와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복구 재원의 부담이인도주의적 ODA 강화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개발협력대강 전후의 일본 ODA는 공여국 중심주의가 강조되는 점에서 연속성이 나타나지만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일본 ODA가 강조하는 국익의 개념은 단기적 경제 이익에서 평화구축활동을 위한 ODA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안전보장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규범의 구속성의 한계를 나타냄과 동시에 원조국의 국내환경 변화가 정책형성의 강한 요인으로 작용했음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ODA 가 안전보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원조 효과성이 제고되지 않는다면, 자국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힘들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국익을 실현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show how both efforts to comply with international norms and donor centralism are reflected in Japan’s ODA policy, and discuss the implications. This study focuses on three topics in the Development Cooperation Charter – philosophy, military usage, and transparency of development cooperation –, and concludes that the donor centralism of Japan’s ODA has been strengthened. The Charter newly introduces both Japan’s “national interest” asa philosophy and the possibility of using ODA for military goals. Thus, the Abe administration promoted ODA as one element of its central policies: the Japan Revitalization Strategy, the National Security Strategy of Japan, the Act on the Protection of Specially Designated Secrets. Furthermore, the financial burden arising from the Great East Japan Earthquake had a negative influence on attempts to strengthen the humanitarian aspects of ODA. Finally, the study examines implications: broader conception of national interest, importance of domestic factors, and the limits of international norms. Nevertheless, if Japan prioritizes national security over aid effectiveness, its ODA will lose taxpayer support, and be less able to enhance the national interest.
本研究の目的は、日本のODA政策にノーム(国際規範)の尊重と援助国中心主義に関 する議論がどのように反映されたのかを明らかにし、政策的な含意を導き出すことである。そのた め、2014年2月に閣議決定された開発協力大綱の主な論点の中で、援助理念、ODAの軍 事的利用の可能性、援助の透明性の確保を取り上げて分析を行った。開発協力大綱の以前 の日本のODAは主にリアリズムのモデルとして議論されてきた。分析の結果、開発協力大綱に おいて、ノームより援助国中心主義が更に強調されたことを確認した。開発協力大綱は、援助 理念として日本の国益を記した上で、限られた条件であればODAを軍事的に利用できる基盤を 整えた。このように援助国中心主義が強調されたのは、国家再興戦略、国家安全保障戦 略、特定秘密保護法など、安倍内閣が取り組む政策の手段としてODAが認識されたからであ る。更に、長引く低成長の中、東日本大震災の復興予算が財政的な負担になり、人道主義 的なODAを実施する否定的な要因として働いた。 開発協力大綱前後の日本のODAは、援助国中心主義が強調される点において連続性が みられるが相違点もあった。すなわち、日本のODAのが強調する国益の概念は、短期的な経 済利益から平和構築活動のためのODAの役割が浮上することによって、安全保障の領域まで 拡大されていることである。このような変化は、ノームの限界が現れると同時に援助国の国内環 境の変化が政策形成の主な要因として働いたことを示唆する。それにもかかわらず、日本の ODAが安全保障を確保する手段として用いられ、援助の効果性が向上されない限り、納税者 である国民からも支持を得ることが困難になり、結果として日本の国益を追求するにも妨げになる の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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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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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식탁에 커피향 흐르고』

성혜경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0집 2017.05 pp.197-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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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는 전후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본 연구는 이바라기의 7번째 시집인 『식탁에 커피향 흐르고』에 실린 22편의 시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보면 일본의 전쟁책임, 일상의 생활 속에 감춰진 생의 신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성찰, 인생에 대한 관조, 그리고 언어에 대한 천착 등 그 주제가 다양하다.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시가 대부분이며 시 번역과 소개를 통해 이바라기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Ibaragi Noriko(1926-2006) is a representative postwar Japanese poet. Coffee Fragrance Flowing Over the Table (1992) is her seventh collection of poems. This research includes a full translation of the 22 poems in this collection and a detailed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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