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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일본학 [THE HALLYM JOURNAL OF JAPANESE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Institute of Japanese Studies]
  • ISSN
    1738-5334
  • EISSN
    2466-1015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6~2017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일본어와문학
  • 십진분류
    KDC 913 DDC 952
제24집 (7건)
No
1

日本の宮中楽舞の源泉を探って : 高麗楽「しんそりこ(進曾利古)」を中心に

朴泰圭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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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의 궁중악은 정치·경제·사상·종교는 물론 국제문화 교류와 생활에 이르기까지 일국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당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궁중악무에 투영되어 있는 고대 한일 양국의 인적·물적 교류는 물론, 그것의 원천을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시론으로서 백제의 수수코리(須須許理)를 모티브로 한 <신소리코(進曾利古)>에 관해 살펴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오진천황(應神天皇) 당시, 백제인 수수코리가 일본으로 건너와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술을 만들 때 반드시 우물과 아궁이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 어떤 이는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여기서 <가마도마쓰리마이(竈祭舞)>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소리코>에 관해 재고해 보면, <신소리코>의 모티브인 수수코리의 이름 뒤에는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술’, 그리고 술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고대 술과 동일한 기능과 역할을 한 ‘물’이 중층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신소리코>는 물과의 깊은 관련성 속에서, 우물 제사에서 비롯된 악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고에 힘을 더하는 것은 <신소리코>의 어의(語義)이다. 한반도의 고대어를 바탕으로 재고해 볼 때, ‘소리고’는 ‘동쪽 우물 성’ 이나 혹은 ‘동쪽 샘 골’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은 해가 뜨는 곳으로, 첫 새벽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쪽 우물’, 혹은 ‘샘’이란 첫 새벽의 우물이나 샘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 등에서는 신에게 물을 바칠 때, 첫 새벽의 것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동쪽 우물 성’, 혹은 ‘동쪽 샘 골’이란 신에게 바치는 첫 새벽의 신성한 정화수가 끊임없이 솟아 고이는 우물이나 혹은 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교토(京都)의 교타나베시(京田辺市)에는 사가신사(佐牙神社)와 사카야신사(酒屋神社)가 있다. 그 명칭으로 보아 두 신사는 모두 술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양 신사의 주변에 일곱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일정한 지역에 집중돼 있는 이들 우물은 생활용수 뿐 만이 아니라 술을 만들기 위해 축조된 것이라 판단되는데, <신소리코>는 우물로 대변되는 물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relates to . This study reconsidered , and it seems that behind his name, Susukori, which was the motif of , there exist not only 'alcoholic beverages', which made his name widely-known, and the source of alcoholic beverages, but 'water' whose functions and roles were the same as those of alcoholic beverages in the ancient times. In addition, is thought to be a dance derived from the well ancestrial cite in its deep relation with water. Based on the ancient language in the Korean Peninsula, can be interpreted as 'an eastern well castle' or 'an eastern spring valley'. In the meantime, there are two shrines(神社) called Saga(佐牙) and Sakaya(酒屋) in Kyoutanabe-si(京田辺市), Kyouto(京都). What makes more interesting is there are seven wells around these shrines. This study judged that these wells concentrated in this particular area were built not only to provide residents with water, but to make alcoholic beverages, and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its deep relation with water being represented as a well.
本稿では高麗楽「進曾利古」に関して考察してみた。「進曾利古」に関して再考してみると、「進曾利古」のモチーフである須須許理の名の陰には酒と水が重層的に位置している。そして韓半島の古代語をもとに再考してみる時、「曾利古」は「東の井戸の城」もしくは「東の泉の谷」と解析することが出来る。「進曾利古」は聖なる清らかな水が沸いて集まる井戸で行われる祭祀から始まった楽舞であったことが考えられる。一方、京都の京田辺市には佐牙神社と酒屋神社がある。その名称から見ると二つの神社はどちらも酒と深い関係があったことが分かるが、興味深いのは両神社の周辺に七つの井戸があったことである。一定した地域に集中しているこれらの井戸は生活用水のみならず酒造りのために築造されたと判断されるが、「進曾利古」は井戸に代弁される水との深い関連性から出発したと考えられる。

5,500원

2

히시다슌소 (菱田春草)의 <과부와 고아(寡婦と孤児)>에 대한 재검토

김용철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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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시다 슌소의 <과부와 고아>는 작가의 동경미술대학교 졸업작품으로 히시다 슌소의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 <과부와 고아>는 그가 당초계획을 변경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화제를 변경한 배경에는 청일전쟁과 조형적인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 미술계와 도쿄미술학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만큼 슌소도 그 영향권 내에서 <과부와 고아>를 그렸고, 전쟁피해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그린 사실은 청일전쟁 당시 전쟁피해자에 관한 논의와도 깊은 연관을 보여준다. 그런데, 당시에 사용된 ‘고아’라는 단어의 의미를 고려하면 과부와 고아 두 사람은 모자 관계일 가능성이 크고 역사 속의 인물인 도키와 고젠과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는 <과부와 고아>와 유사한 장면이 『헤이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헤이안시대 말기 전쟁영웅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에 관해서는 덴신도 강조한 바 있고, 그에 관한 희곡을 쓴 사실도 그림 속 어린 아이가 요시쓰네일 개연성을 높여준다. <과부와 고아>의 인물들이 도키와 고젠과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일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슌소가 고유명사를 쓰지 않은 점 또한 중요한 과제다. 그것은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첫 번째 이유이자 중요한 이유로서 당시 역사화에 대해 엄격했던 시대고증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즉, 낡은 갑옷으로 여성과 어린 아이가 전쟁피해자라는 점을 부각시켰지만, 『헤이지모노가타리』에는 등장하지 않는 모티프였기 때문에 시대고증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와 같은 딜레마 상황을 해결하기 방도로서 제목에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은 두 번째 이유로 추정되는 도키와 고젠에 대한 인식의 문제와 함께 제목에서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를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생각된다.<과부와 고아>가 그려진 배경에 대한 이해에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메이지시대에 들어 이루어진 무사도에 대한 재조명이다. 무사도를 재조명하여 그 위상을 일본적 정신세계의 핵심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헤이안시대 말기나 가마쿠라시대 초기 무사들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이 이루어졌고,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경우도 그와 같은 무사들 가운데 한 명으로 충군애국을 실천한 존재로까지 부각된 사실은 이 그림이 그려진 배경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슌소의 <과부와 고아>는 청일전쟁이라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전란의 피해자인 점이 더 강조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Shunso Hishida’s graduation work (1895) is the representative work in his historical paintings, although there is no name of specific historical characters in the title. From the meaning of orphan who has not father in the dictionary of Meiji period which is different from today, the two characters who are widow and orphan seem to come from Tokiwa Gozen and Ushiwakamaru, young Minamotono Yoshitsune, after Minamotono Yoshitomo’s death. Shunso seems to change the theme from arson attack Nara City by Taira Shigehira in 12century in the background of Sino-Japanese War. Therefore, he depict widow and orphan who are the victims of the war but he seems to use general noun in the title, because of the problem of historical research. Shunso was influenced very much by Tenshin Okakura who was the principal of Tokyo national School of Fine Art and stressed the importance of historical painting, which was necessary to increase patriotism. As seen in the several writings, Samurai spirit is the most particular Japanese spirit which was rediscovered in Meiji period by intellectuals involving Tenshin Okakura. Minamotono Yoshitsune was said to be the representative character of Samurai spirit through the Japanese history in those days. Therefore, seems to be one of the scenes of where Tokiwa Gozen worried about the fate of three children involving Ushiwakamaru. Shunso Hishida’s the same attitude of nationalist is reflected in the pictorial expression.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line based on the identity Japanese traditional painting, Nihonga, particularly in the depiction of figures.
菱田春草の<寡婦と孤児>は彼の東京美術学校卒業作品であり、もともとの計画からの変わった主題を取り上げた絵画作品である。当初春草は平重衡によって行われた源平合戦期の奈良焼き討ちの場面を絵画化しドラマチックなスペックタークルな画面を提示しようとしたが、何らかの理由でそれをやめ、テーマを変更し<寡婦と孤児>を卒業作品として完成し提出した。彼の卒業作品の制作時期が日清戦争期であり、当時日本の美術界や東京美術学校での動き、そして戦争被害者についての論議、などを考え会わせると、画題変更の理由には日清戦争の影響があったに違いない。それと共に、群像表現が未熟だった点も重要な理由であったと思われる。登場人物の姿や鎧、などのモチーフから見て歴史人物を取り上げたものと見える<寡婦と孤児>は、その題名が一般名詞からなっているのは春草の修業期に描いた歴史画や歴史風俗画とは異なる点であり、これまでの研究では普遍的戦争被害者を取り上げたせいとされてきた。しかし、<寡婦と孤児>の具体的内容から推測してみると、それは特定の歴史人物と関係のある可能性が非常に高く、‘孤児’は今日のように両親のない子供のみならず、父親のない子供に対しても使われた単語であることは大事な糸口になる。それらの点を考えると、<寡婦と孤児>は『平治物語』に登場する常盤御前と幼い頃の源義経から来たものと思われる。また、明治時代に入って岡倉天心が日本的精神世界として武士道を強調し源義経を徳のある武士として評価したのみならず、<ヨシツネ物語>という戯曲を書いた事実と通じる。ただ、古い鎧のように二人の置かれた状況を物語る肝心なモチーフがもともと『平治物語』には登場しない点は当時の歴史画に厳しく求められた時代考証には重大な問題点であり、それによって生じたジレンマを乗り越えるためにその題名において寡婦や孤児といった一般名詞を使ったと推測される。武士道と関係のある人物を取り上げ、天心の歴史画理念を具現しようとした春草の態度は造形表現にも現れており、日本画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意識し線を強調した人物表現を見せている。

6,400원

3

가시와기 기엔(柏木義円)의 주전론(主戰論)과 비전론(非戰論)

박은영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5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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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기 기엔(柏木義円)은 한일강제합병 이후, 조선전도를 이끌어낸 <일본조합교회> 소속 목사로 국내에서는 조합교회의 조선전도를 비판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엔은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두가지 입장, 즉 주전론과 비전론이라는 긴장관계 속에서 최초로 문명론에 바탕을 둔 주전론을 주장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현실에 기반을 둔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와 전쟁에 대한 비판하는 절대비전론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끈 인물이기도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래의 비전론에 관한 연구는 주로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를 중심으로 검토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주로 사회주의자의 비전론에 대한 검토를 축으로 양심적인 기독교도인 우치무라의 비전론이 추가되는 형태를 취하게 되고, 이 외의 연구는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고에서 검토한 가시와기는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적인 군비확장이라는 현실 속에서일반 대중의 희생과 억압을 본인 스스로가 그 현장에서 몸으로 맞써며 사상적으로도 확립을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비전을 나아가 절대적인 비전론을 관철하기에 이른다. 가시와기의 비전론은 평화의 신은 인간이 전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 때문에 전쟁은 악하다고 하는 신앙상, 도덕상의 지상명제에 근거한 위에 사회주의자에 의해 촉발된 현실인식을 더하여 구축된 것이었다. 특히 이 비전론은 사회주의자의 비전론에는 부재하는 기독교 사상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성서에서 호출된 역사관과 선악관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기서 모든 전쟁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악한 것이라는 ‘전적 전쟁부정’의 시점이 도출될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일본기독교의 비전론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유의미한 시점을 준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종교는 비폭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당화 체계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출판부, 2003, pp.74-78. 현재 일본국헌법의 평화주의는 기로에 서있다고 여겨진다. 이에 따라 생명 존중과 약자에 대한 관심, 전쟁을 유발하는 국가의 논리를 비판하고 절대적 전쟁 폐지를 주장했던 가시와기의 비전론이 더욱 자세히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Kashiwagi Gien is a pastor belonging to “Japanese Congregational Church” which pulled Korean missions, and the name is only known as the person who criticized Korean missions of Congregational Church in the country. Although he advocated War-Theory based on the civilization theory to the beginning, but, in the strained relations between War and Anti-War, he criticized the nation and war which put a base on the general public's reality and it forces the weak's sacrifice over the imperialist war of modern Japan, and walked along the way of the ideological conversion to pacifism. As is well known, the research on the pacifism of Christianity was mainly considered focusing on Uchimura Kanzo until now, even this just added the pacifism of Uchimura who is a conscientious Christian while centering on research of a socialist's pacifism. In this paper, Kashiwagi pulled out ideological establishment through facing the general public's sacrifice and oppression sincerely on that spot oneself in the reality of an aggressive expansion in armaments of an imperialism state. The reason to which Kashiwagi was opposed to war is that God of peace is not like a war, therefore war is always 'bad' that is based on moral proposition, and it was also inspired by the Socialists' recognition. In particular, this Anti-War Theory was made by viewpoint of good and evil from the Bible based on the universality of the Christianity thought, that doesn't exist in the Socialist's pacifism. Regardless of any reason, all wars were 'bad', that is the viewpoint of 'complete denial of war' was able to be drawn here.
柏木義円は、韓日強制併合以後、朝鮮伝道を引いた「日本組合教会」所属の牧師であり、国内では組合教会の朝鮮伝道を批判した人物として名前が知られているだけである。彼は、近代日本の帝国主義戦争に対する二つの立場、即ち、主戦論と非戦論という緊張関係の中で、最初には文明論に基づき主戦論を叫んだが、一般民衆の現実に基盤を置き弱者の犠牲を強要する国家と戦争を批判し絶対非戦論への思想的転換の道を歩いた。周知のように、今までキリスト教の非戦論に関する研究は、主に内村鑑三を中心に検討されたが、これさえも大体社会主義者の非戦論の検討を軸に、良心的キリスト教徒である内村の非戦論が追加される形態をとり、以外の研究は皆無であっ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本稿で検討した柏木は、帝国主義国家の侵略的な軍備拡張という現実の中で、一般大衆の犠牲と抑圧を自らその場で誠実に対面することを通じ思想的確立を引き出した。そして、この過程で社会主義思想の影響を含め窮極的には宗教的観点での非戦、さらに絶対的非戦論を貫徹するに至る。柏木が戦争に反対した理由は、平和の神は人間が戦争することを好まず、そのために戦争は「悪い」ことだという信仰上、道徳上の命題に基づいた上に、社会主義者によって触発された現実認識を加え構築されたことであった。特に、この非戦論は社会主義者の非戦論には不在するキリスト教思想の普遍性をベースに聖書から呼び出した歴史観と善悪観が作用していたことで、ここですべての戦争は如何なる理由を問わず「悪い」という「全的戦争否定」の視点が導き出されることができた。

7,600원

4

関東大震災とアナキストと作家 : 和田久太郎と芥川龍之介の場合

後藤優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8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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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인 작년은 관동대진으로부터 90년을 헤아리는 해였다. 흔히 지진은 자연재해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나, 관동대지진은 자연재해였을 뿐 아니라,인재로서, 관민이 하나가 된 반동적 정신의 발로는 일본을 파멸(catastrophe)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 해 차이로 태어난 아나키스트 와타 큐타로 (1893~1928)와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은 이때 순간의 해후를 하게 된다. 대지진 후의 혼란 속에서 동지 오스키 사카에가 자신의 파트너와 8살의 조카와 함께 관헌에 의해 학살된 이듬해 와다는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후쿠타 마사타로우를 저격을 감행하다 실패하여 수감되었다. 수감 중 와다는 <옥중 창문에서> (하이쿠, 단가, 에세이, 서간을 포함하는 작품)을 출판한다. 이에 높은 평가를 하며 서평을 쓴 것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였다. 동시대인인 두 사람은 실로 <다이쇼> 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다. 이 두 인물에게 보여지는 공통의 키워드는 때로는 대립하면서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관동대지진 직후 와다가 사상의 감시를 필요로 하는 인물로서 검거 구속되었던 것에 비해 아쿠타가와가 와다와 같은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으로부터 몸을 지키고자 했던 <자경단>에 참가하였던 사실이다. 이 대조적인 위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본고에서는 문제의 배경에 문학과 정치라는 연관성을 추정한다. 양자의 사상과 행동을 관동대진진이라는 근대사의 한 분수령에 서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다이쇼라는 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함으로써3.11 대지진 이후 일본을 역으로 비추어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It marked the 90th anniversary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in Japan last year. The earthquake was not only a natural disaster but also a man-made disaster because of the reactionary attitudes of both the authorities and citizens that manifested in its aftermath. This led to a catastrophic period in Japanese history. A transient connection occurred at this time between the anarchist Kyutaro Wada (1893–1928) and the writer Ryunosuke Akutagawa (1892–1927). Sakae Osugi, a comrade of Wada's, was brutally killed along with his partner and 8-year-old nephew in the confusion that followed the earthquake. A year later, Wada attempted to assassinate supreme commander Masataro Fukuda, but failed. While in prison, Wada then wrote the book Gokuso kara, which includes haiku, tanka, essays and letters. Akutagawa read the book and gave it a positive review. Wada and Akutagawa were contemporaries who both lived in the Taisho period, which serves as a parallax view. Common keywords occurring in texts by both Wada and Akutagawa are sometimes in opposition to each other but remain inseparably connected. It is worth noting that whereas Wada was held by the police as a person posing a security risk, Akutagawa, in contrast, joined a vigilante group that was organized to protect against socialists, such as Wada, and Koreans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earthquake. What does this antipodal stance mean?Based on the assumption that literature is connected to the political background of the time, I will analyze the thoughts and actions of Wada and Akutagawa at the dividing line of modern history when the Great Kanto Earthquake occurred. I hope to provide a new perspective on the Taisho Period that also has relevance for the present day in the aftermath of the 2011 Tohoku earthquake and tsunami.
関東大震災から昨年で90年が経った。その地震が引き起こしたものは、しかし、天災にとどまるものではなく、人災としての官民が一体となった反動的精神の発露は、日本をカタストロフに導くこととなった。生年が一年違いのアナキスト・和田久太郎(1893-1928)と作家・芥川龍之介(1892-1927)は、このとき、つかのまの邂逅をはたす。震災発生後の混乱のなか、同志・大杉が彼のパートナーと8歳の甥とともに官憲に虐殺されてから一年後、和田は当時の総司令官・福田雅太郎を狙撃して失敗、収監されている間に『獄窓から』(俳句、短歌、エッセー、書簡を含む)を出版する。それに高い評価をあたえ、書評を書いたのが芥川龍之介であった。同時代人のふたりは、まさに視差としての〈大正〉を生きた人物だといえる。両者に見出される共通のキーワードは、ときに対立しつつも分かちがたくからみあ う。注視されるのは、震災発生直後、和田が思想の要監視人として検束されていたのに対し、芥川が和田のような社会主義者や朝鮮人から身を守るとして結成された「自警団」に参加していた事実である。この対蹠的な位置はなにを意味するのであろうか?本論は、問題の背景に文学と政治のむすびつきを措定する。そこで、両者の思想と行動を、関東大震災という近代史の分水嶺において分析したい。それが、大正という時代のあらたなパースペクティブを提出すると同時に、3.11後のわれわれを逆照射することを希望するものである。

6,900원

5

일본의 굿거버넌스와 시민사회에 관한 연구

오오야마 코스케, 이윤석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11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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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일본의 굿거버넌스와 시민의 행정에 대한 신뢰요인에 대해서 검토하고 정부측 요인과 시민측 요인 중 어느 요인이 시민의 정부신뢰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 경제협력개발기구의 거버넌스 정의와 동아시아의 신뢰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 정부에 대한 신뢰는 정부의 성과를 시민의 기대로 나눈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리고 세계가치관조사의 일본 데이터를 사용하여 신뢰받을 수 있는 정부 측 요인과 신뢰하는 시민의 측 요인 중 어느 것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밝혔다. 본 연구가 행한 행정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한 결과, 신뢰받는 정부 측 요인이 신뢰하는 시민 측의 요인보다 다소 설명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인권존중 및 행정실적이 정부 신뢰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임이 밝혀졌다.
The objectives of this research are to examine the factors in Japan behind good governance and the confidence citizens feel in the administration, and to analyze which of the factors among the factors on the government side and on the citizen side affect the citizens’ confidence in the government. Toward this, the definition of governance by the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and the previous research on confidence in East Asia were reexamined, and it was assumed that confidence in the government is the result of the government’s achievements divided by the citizens’ expectations. Data on Japan from within the World Values Survey was used and, among the factors on the government side in which citizens have confidence and the factors on the citizen side who have confidence in it, those factors that have an effect on confidence were clarified. In this research, following the analysis of the factors that have an effect on the confidence placed in the administration, it was understood that the factors on the side of the government in which confidence is placed have slightly greater explanatory power than the factors on the citizen side who have confidence in it. It was also clarified that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an administration’s achievements are important factors in determining citizens’ confidence in their government.
本研究の目的は、日本のグッドガバナンスと市民の行政に関する信頼への要因について検討し、政府側の要因と市民側の要因のうち、どの要因が市民の政府の信頼に影響を与えるのかを分析した。このため、経済協力開発機構のガバナンスの定義と東アジアの信頼性に関する先行研究を改めて検討し、政府に対する信頼は政府の成果を市民の期待で割ったものと仮定した。世界価値観調査の日本のデータを使用して、信頼される政府側の要因と信頼する市民側の要因のうち、どれが影響を及ぼしているのかを明らかにした。本研究において、行政の信頼に影響を与える要因を分析した結果、信頼される政府側の要因が信頼する市民側の要因よりもやや説明力が高いことが分かった。また、人権の尊重と行政の実績が政府の信頼を規定する重要な要因である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

6,400원

6

일본의 진재학과 재해부흥의 역(逆)이미지 : 한국형 위기관리 모델의 시론

김영근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14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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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의 목적은 일본 재해연구(진재학)에 관한 이해를 통해 한국에 있어서 재해연구에 대한 학문적 어프로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재해 후 일본 재해거버넌스의 변용을 본석하는 이론적인 틀을 제공하는 데 있다. 대지진(대재해) 발생 후 일본의 경우 자연재해 뿐 아니라 국민의 사상 (인문학적인 재해)와 사회구조(사회적인 재해), 나아가 경제구조와 경제정책에도 커다란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지진 및 그 이후 사회 문화 역사적인 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진재학도 피해를 입은 지역과 정부, NGO등 다각적인 시점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더구나 지진재해와 쓰나미재해, 원전 사고 등에 의한 방사능 재해로 등 복한적인 연쇄위험을 시야에 넣은 연구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진재학은 의제(아젠다)와 분석 레벨의 다양하가 진행되고 있다. 미증유(예상외)의 대재해를 초래한 동일본대지진은 복합연쇄위기라고도 불리워 지는 융합적인 리스크였다. 일본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래 국제적인 관심을 모아 재해를 거버넌스하는 중요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경향과는 달리 국제적인 제도라고 할 만한 국제적인 레벨의 시트템에서 말하자면, 재해로부터 복구, 부흥과 재생의 프로세스가 충분히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역 이익집단, 의회(일본국회), 정부를 둘러싼 국내정치 프로세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부(국가)가 주도하는 재해거버넌스, 다시 말해 국가에 의해 선택하는 재해부흥제도의 차이에 주목하는 전통적인 재해거버넌스로부터 탈피하고, 한 나라의 재해부흥정책은 국내 피해지의 사정과 정치를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역이미지>에 주목하는 시점이다. 본고에서는 재해부흥에 있어 사회문화정치경제적 구조의 변화에 주목하는 한편 부흥제도(재해발생 이후 체제vs 재해 중 체제 vs 재해 전 체제>의 선택모델 구축도 시도하였으며,결론에서는 일본에 있어서 진재학과 재난복구의 역이미지이론을 한국사회에 소개하여 복합연쇄위기리스트에 관하여 대재난에서 부흥하는 시좌 (한국형위기관리모델에 대한 시론)을 제시하였다.
The goal of this study is to suggest a theory for disaster governance, which has become more significant than ever after the 3.11 Great East Japan Earthquake. Especially, I attempt to analysis the political change and economic structure of Japan and Korea, the way in which they deal with environmental changes. First of all, the analysing level(variables) on disaster studies has become diversified in relation to humane, local, community, trans-local, global, and transnational security. The issue of earthquake not only affects the very region it happens(domestic process) but it is rather a national(government behavior) or transnational one. Therefore, the dealing units for disaster now include a lot of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and even individuals unlike the past. That is why disaster studies covers not only the aftermath of disaster but also its very impact on human, social structure as well as the economic structure and policy. The reversed image on recovery process in this article means the new perspective paying attention to the process of politic(endogenous institutional change: change in the preferences and the power of domestic/community actors), which influences disaster governance. Disaster governance associated with the different combinations of the socioeconomic institutions in local level and government policies, not affected by international economic conditionsI argue that Japan’s disaster governance no longer only rely on governmental policies. In studying Japan’s transformation of risk governance or politic-economy system, the ideal of reversed image(theory) will be a meaningful attempt to link the theory to its practical use(case study).
本論文の目的は、日本の災害研究(震災学)に関する理解と関心を深め、韓国における災害研究への学問的なアプローチの基盤を構築するために、大災害後日本災害ガバナンスの変容を分析する理論的な枠組みの提供である。大震災(大災害)の発生後、日本では自然災害のみならず、国民の思想(人文学的な災害)や社会構造(社会的な災害)、ひいては経済構造や経済政策にも大きな変化が迫られた。これらを研究する震災(災害)学も、被災地や政府、NGOなどから多角的な視点で考えるべきであり、しかも、地震被害や津波被害、原発事故などによる放射能被害から複合的な連鎖危機を視野にいれて研究せざるを得ない時代になった。まさに、震災学は議題(アジェンダ)や分析レベルの多様化が進んでいる。未曾有(想定外)の大災害を招いた東日本大震災は、「複合連鎖危機」とも呼ばれる融合的リスクであった。日本の問題だけにとどまらず、国際的な関心を集め、「災害」をガバナンスの重要性が高まっている。しかしながら、国際制度と言った国際システムレベルの視点では災害からの復旧·復興や再生のプロセスを十分明らかにすることができず、地域の利益集団、議会(日本国会)、政府を巡る国内政治プロセスに着目する必要がある。これは、政府(国家)が主導する災害ガバナンス、つまり国家によって選択する災害復興制度が異なることに注目する伝統的な災害ガバナンスイメージから脱却し、一国の災害復興政策は、国内被災地の事情と政治を反映したものであるとの考えを持つ「逆イメージ」に注目する視点である。その際、災害復興における社会文化·政治経済的構造の変化に注目しつつ、復興制度(災後体制 vs. 災間体制 vs. 災前体制)の選択モデル構築も試みる。結論では、日本の震災学と災害復興の逆イメージ理論を韓国社会に紹介し、複合連鎖危機リスクに関連して、大災害からの復興への視座(韓国型危機管理モデルの試論)を提示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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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과 日本의 半導體 戰爭 : ‘破壞的 革新’을 통한 逆轉

김재훈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4집 2014.05 pp.16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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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쟁에서 ‘역전’의 역사적 시발점이었던 ‘제 3의 역전’의 과정과 요인에 대해 분석하였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가장 진입 장벽이 높고, 경쟁이 치열했던 메모리 시장에 후발기업으로서 진입하여 매우 빠르게 일본의 선도 기업에 역전할 수 있었다. 이 현상은 진입 장벽의 효과나 ASIC패러다임의 효과로는 설명할 수 없고, 한국이나 반도체산업 내부의 특수한 요인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없다. 이 논문의 핵심적인 주장은 ‘제 3의 역전’은 다른 산업에서 후발 기업이 선발 기업을 추월하는 일반적인 과정과 요인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파괴적 혁신’을 통한 역전이었다는 것이다. 파괴적 기술이 하위시장에 수용되고 이를 모태로 급격한 기술 개발을 통해 상위시장의 요구를 만족시키게 되면, 강력한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상위시장에 존재해왔던 선도 기업들을 역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한국의 기업들은 메모리 성숙 제품의 하위시장에 진입을 함으로써 일본 기업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 시장은 시장의 규모가 작고 제품의 가격도 점감(漸減)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투자 재원을 회수하기가 어렵고 수익성도 악화되기 쉬웠다. 하지만 일본 기업 간 과점적 경쟁구조, 미일 반도체 협정의 효과, 엔화 절상과 같은 요인들 때문에 하위시장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한국의 기업들은 이 시장에 대한 점유율을 늘림으로써 후발 기업으로서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파괴적 혁신’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이후 급격한 기술 능력의 발전을 통해 제품 개발 능력과 양산 능력의 격차를 줄임으로써 성숙 제품이나 첨단 제품의 상위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하위시장을 기반으로 다음 세대의 상위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강화하는 나선형의 발전 논리가 반복되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과점적 경쟁으로 인해 시장이 정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철수하였고, 투자 효율이 악화되었다. 더욱이 엔화절상과 일본 시장의 침체 등과 맞물려 시장점유율을 하락시키고 투자 능력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의 반도체 3사는 1993년부터 지속된 ‘4MD램 대호황’에 힘입어 ‘제 3의 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역전은 후발 기업이 선발 기업을 추월하는 ‘로엔드형 파괴적 혁신’의 전형적인 역사적 사례였다.
How, and Why was the catchup happened in the chip war between Japan and Korea that looked like being a David and Goliath contest? This paper tries to answer this question by analyzing the process and factors of ‘the Third Catchup’ as the historical turning point in the ‘War’, focusing on the period from 1987 to 1994. Key point this paper makes is that Japanese firms were overtaken because of ‘disruptive innovation’ not because of entry barriers or diffusion of ASIC paradigm, specific factors in the industry. Once ‘disruptive technology’ becomes accommodated into low-end market and developed through R&D, it leads to the radical outstrip of last producers against leading ones in the industry based on price competitiveness. ‘the Third Catchup’ was possible due to the existence of low-end market. This sub-market enabled Korean firms to overcome the barriers to entry into the semiconductor industry. In product market, starting from the 1988, the Korean corporations entered into residual, low-end market that had many risky factors. But it had been expanded in size by factors such as oligopolistic competition among Japanese firms, Semiconductor Agreement between US and Japan, the rise of exchange rate of the Yen. As a result, Korean firms could shift into high-end market composed of mature and advanced products and expand their market share by raising competitive advantage. On the contrary, Japanese firms were withdrawn from the low-end market before market peak due to oligopolistic competition among them in Japan, this kept on worsening the efficiency of investment and decreasing market share. Korean corporations could be able to catch up Japanese ones owing to 4M DRAM boom from 1993. This, called ‘the Third Catchup’, shows a historical case that great firms were collapsed by last-mover through ‘disruptive innovation.’
この論文では、韓国と日本の半導体戦争において「逆転」の歴史的出発点であった「第3の逆転」が発生した要因とプロセスについて分析した。いわゆる「第3の逆転」と言うのは「破壊的イノベーション」を通じた逆転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この論文の主な主張である。破壊的技術がサブマーケットに収容され、これを母体とした技術の急激な開発により上位市場のニーズを満足させると、強力な価格競争力をベースに上位市場に存在してきた大手企業を逆転する現象が現れる。韓国の企業は、この市場のシェアを増やすことで、後発企業としての不利を克服し、「破壊的イノベーション」の種をまくことができた。韓国企業は、以後、急激な技術力の進歩により、上位市場に参入した。一方、日本企業は寡占的競争のため、市場が頂点に達する前、すでに撤退し、投資効率の悪化や市場シェアの下落がかみ合うという悪循環に陥ってしまったた。韓国の半導体3社は、1993年から継続されている'4MDRAM大好況'に力づけられて「第3の逆転」に成功することができた。この逆転は、他の産業で後発企業が先発企業を追い越すローエンド型破壊的イノベーションの歴史的事例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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