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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학 [THE EASTERN CLASSIC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INSTITUTE FOR EASTERN CLASSIC STUDIES]
  • ISSN
    1598-1452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5~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32집 (13건)
No

일반논문

1

사단칠정논쟁에 대한 재고찰

임헌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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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집대성자로서 朱子는 北宋 五子를 창의적으로 계승하여 독자적인 理氣論의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심성론을 정립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인간의 선한 감정을 나타내는 四端과 인간 감정의 총화를 지시하는 七情이 어떻게 理氣論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했던 조선조 유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성리학적 심성론을 완성하여 聖人에 이르는 길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이 논문은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적으로 정립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그 발단에서부터 전개과정, 그리고 종결에 이르는 논의과정을 면밀히 추적하고, 그 쟁점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쟁점을 분명히 한 다음, 퇴계와 고봉이 논쟁을 제기했던 본래 의도를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평가하였다. 논쟁의 경과를 제시한 다음 우리는 율곡과 다산의 비평을 중심으로 논쟁을 평가해 보았다. 그런데 율곡과 다산은 주로 ‘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에서 퇴계의 이른바 互發說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였다. 이러한 비판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퇴계의 입장에서 어떻게 반론할 수 있을지 그 대안을 모색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의 결론은 퇴계는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금수와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 본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퇴계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 다음 우리는 퇴계의 인간 본성론이 지니는 현대적 의의를 탐구하여 보았다.
This article is to reconsidering on The four-seven debate of T'oegye-Gobong. At the center of songnihak( 性理學) stands the metaphysically based Li-Ki. Chu-Hsi's the Theory of the human mind is based on Cosmology. The four-seven debate involves the status of various kinds of feeling in their relation to human nature and particular with respect to metaphysical composition(Li-Ki). The seed of The four-seven debate was in 1553. T'oegye introduced the expression 'The four beginnings are the issuance of LI : the seven Feeling are he issuance of Ki. But Gobong had spoken critically of this outright spitting of feelings between Li and Ki. T'oegye wrote to in 1559 suggesting a further slight modification : Gobong replied with a more detailed critique. T'oegye carefully corrected in line with what he accepted of Gobong's critique. After three or four years of a further Reconsidering, Gobong wrote a general summary statement of issue. Gobong's summary seemed in basic harmony with T'oegye's position.

6,600원

2

『순자(荀子)』에서 본 ‘정(情)’의 의미

강지연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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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荀子)』에서 ‘정(情)’ 개념 연구에서도덕행위에서 이성적 판단과 감정의 작용, 욕구와 감정에 대한 문제에 대한 순자의 관점을 알기 위해서 원문에 의거한 해석과 문헌연구작업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순자』텍스트 내의‘정(情)’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작업이다. 이런 문헌 연구 작업에서 유가사상사적 조망을 가지기 위해 곽점 죽간본(郭店 竹簡本)의 「성자명출(性自命出)」에서부터 ‘정(情)’ 개념 분석을 먼저 하였다. 「성자명출」에서 ‘정(情)’의 주요한 의미는 인간의 희노애락, 모든 감정 현상을 통칭하였다. 본문에서 필자는 순자 내 ‘정(情)’ 개념의 내용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 밝혔고, 순자가 그의 윤리 사상 체계를 위해 이를 바탕으로 개념의 기초를 세웠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순자에게 ‘성(性)’과 ‘정(情)’, ‘욕(欲)’, 이 세 가지 관념에 대한인식은 구조적이라고 설명했다. 순자가 ‘성(性)’에 대해서 말할 때,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성(性)’, ‘정(情)’, ‘욕(欲)’, 그것은 감각 능력, 자연적 감정과 욕망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세 부분이 모두 ‘정(情)’으로 통칭되어, ‘인정(人情)’이나 ‘인지정(人之情)’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순자가 본성(性)에 대해 가치적으로 악하다(性惡)라고 판단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의 실질적인 내용에 속하는 ‘욕(欲)’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순자』에서 ‘성(性)’에서 ‘정(情)’을 말하고 또 ‘욕(欲)’까지 설명할 때, 우리는 그것의 지시대상범위는 점점 축소되면서, 실질내용은 점점 구체화되고 명확해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구분이라고 해석하였고, ‘성(性)’의 내용이 점점 구체적으로 분명해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A study of the concept ‘Qing’ of Xunzi is the most essential prerequisite for resolving the following ethical questions: When humans embark on conducting moral action, what role should be assigned to rational judgment or emotion, respectively? What would be the putative relation between desire and emotion? Does desire include emotion? Or is emotion considered the superior concept by virtue of its inclusion of desire? To provide a convincing solution to this set of questions as well as to obtain the vantage point of Xunzi, what is called for is an interpretation grounded in the original text and also this includes a discussion of how to interpret the concept ‘Qing’ within the text of Xunzi. In this exegetical research, the article aims to analyze the concept ‘Qing’ within ‘nature derives from mandate (Xing Zi Ming Chu)’ of the ‘Guodian Bamboo Strip.’ This line of research will illuminate, within the ethical system of Xunzi, such questions as “do human emotions possess natural properties only,” or “do human emotions have an intimate relationship with human socializing inclination? What would be the relationship between emotion and desire.” To resolve these questions, an analysis of the concept ‘Qing’ will be the most essential and requisite work.

6,100원

3

탈권위적 여훈서의 성립과 이념성의 문제 <여자행실록>을 중심으로

서경희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5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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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여자행실록>을 중심으로 여훈서의 성립 과정과 특성, 이념성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여자행실록>은 일반 부녀자를 대상으로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내용을 산문체로 기술 한 책이다. 이 자료는 “복선화음가”의 가사 전통과 여훈서의 기록 형태가 결합된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균일 하지 않은 구조와 이질적인 발화자와 어조를 포함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가나 아버지의 윤리를 내면화한 권 위적인 여훈서의 언술과 달리, 여훈의 내용과 방식을 유연하게 조직할 수 있었던 까닭에 탈권위적인 성격을 띨 수 있었다. <여자행실록>은 기존 여훈의 도덕 규범을 기조로 하면서 시가에서의 힘든 생활을 현실적으로 적응하고 극복 하기 위한 실천 덕목을 선한 윤리적 행위로 파악하도록 위치시킨다. “복선화음가”의 여성 향유자들에 의해 승 인된 현실적 경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부조리한 이념과 제도의 울타리 속에서 여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식 임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처신 윤리’는 “여훈서”의 외형을 띤 <여자행실록>에서 도덕 규범 과 동등하게 ‘여훈의 주요 덕목’으로 등재되었고, 귀동어미의 사례를 통해 복선화음의 이치를 강조하면서 더 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여자행실록>은 여성향유자들이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행복 추구를 위해 소극적 대응 방식을 제시하고 이 를 실천하여 주변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으로 심리적 보상을 받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여자행실록 >은 향유자들의 소망이 투영된, 탈권위적 형태의 여훈서로 볼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problem of establishing and ideological tendencies of a de- authoritarian Confucian Women’s Classics, focusing on YeoJaHaengSilLok. YeoJaHaengSilLok is a book that women are described in prose what to observe in everyday life. This material has the combined characteristics of the Gasa tradition of BokSeonHwaEumGa and the written form of Confucian Women's Classics. So contains a heterogeneous structure with non-uniform tone. As a result, unlike authoritarian Confucian Women's Classics, could flexibly organize the content and method of instruction. YeoJaHaengSilLok is to the moral norms of traditional Confucian Women's Classics by default, proposes a realistic Practices for married women to adapt to difficult life, and makes you understand it as a good ethical behavior. In addition, YeoJaHaengSilLok got more persuasive by emphasizing the principles of BokSeonHwaEumGa through the negative case. YeoJaHaengSilLok presents a passive responses to real happiness and as a result of practice it, is done so that the psychological rewards of praise around them. Therefore This material was reflected in the desire of readers, a non-authoritarian Confucian Women's Classics.

7,800원

4

『공손룡자』 「견백론」 연구 - 실체의 부정과 속성 보편주의

손영식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9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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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백론」은 반대자와 공손룡의 논쟁 형식으로 되어 있다. 1) 반대자는 ‘딱딱한, 하얀, 돌 자체’의 셋을 인정하는 반면, 공손룡은 ‘딱딱한, 하얀’의 둘을 주장한다. ‘돌 자체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가 논쟁의 초점이다. 공손룡은 ‘지각=존재’와, ‘교차 부정’ 논증을 통해서 ‘ 돌 자체’를 부정한다. 반대자는 ‘돌’이 ‘딱딱한, 하얀’을 ‘담아 채움’(盛盈), ‘널리 닦음’(廣修), ‘따름과 취함’(循 取)라는 용어를 동원해서 ‘돌 자체’의 존재를 주장한다. 공손룡은 ‘돌 자체’를 부정한다. 따라서 ‘딱딱한, 하얀’ 등의 속성은 분리된다. 나아가 ‘돌’과 같은 개별 사물이 담아 채우지 않아도, 속성들은 ‘홀로이면서 바른’(獨正) 보편자이다. 그는 눈과 손이 속성을 마음에 저장함(藏)을 논의의 근거로 삼는다. 마음에 저장된 것으로 볼 때, ‘돌 자체’는 없고, ‘딱딱한, 하얀’은 분리되어(離) 있다. 이런 인식 주관에 근거한 논의에 대하여, 반대자는 객관 실재론으로 나간다. ‘딱딱한, 하얀, 돌’은 서로 담아 채운다.(盛盈) 공손룡이 ‘藏·離’에 근거한다면, 반대자는 盛 盈에 근거한다. 2) 공손룡의 ‘실체’ 부정, 속성 보편주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는 음양 오행론의 철학적 기초가 된 다. 실체가 부정되고, 속성만 남아야, 음양 오행론처럼 분야를 넘나드는 분류가 가능하다. 둘째, 중국 철학사 상 거의 유일하게 철저한 경험론이다. 노자나 장자, 묵자, 맹자, 한비자 모두 제각각 실체를 설정하고, 세계를 설명한다. 철저하게 경험에 근거한 철학은 공손룡이 유일하다.
"On Hardness & Whiteness" is consist of discussion between Gong Sun Long and an opponent. The opponent acknowledges ‘hard, white, stone itself’, but Gong only ‘hard, white’. The focal point is being of ‘ stone itself’(substance). Gong denies the existence of ‘stone itself’ through the theory of ‘perception = being’ & cross-denial. While antagonist defends ‘stone itself’ by the terms such as ‘put-in & fill’, ‘widely construct’, ‘follow & take’ . Gong repudiates ‘stone itself’, so the attributes such as ‘hard, white’ are separated. In advance, the attributes are independent and correct even though the ‘stone itself’ does not put them in and fill itself. His arguments ground on the perception of eyes & hands which store the mind with the attributes such as ‘hard, white’. But the ‘stone itself’ is not stored. Therefore ‘stone itself’ does not exist, and ‘hard, white’ are separated. The opponent goes to the objective realism that the ‘stone itself’ puts attributes in and fill itself, while Gong stays at a subjective empiricism that mind does not store ‘stone itself’, so ‘hard and white’ are separated. The meaning of denial of ‘stone itself’ ; First, it is the basis of yin yang & Five Agents theory which classify the attributes across all fields of world. In this case we can classify, only if the substance such as ‘stone itself’ is denied. Second, Gong is probably only one empiricist in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On the contrary, Laozi, Zhuangzi, Mozi, Mencius, Han Feizi each set substance up, and explain the world by it.

7,600원

5

예(禮)와 덕(德)

이장희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12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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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에서 예는 사덕(四德)의 하나이며 인간들 사이에 지켜져야 마땅한 규범인 까닭에 예의 “윤리적” 성격 이 의심되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예의 “윤리성”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손에 잡히게 느끼 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예를 윤리적인 것이라고 부르기에는 현대적 감수성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요소 들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계급적이고 가부장적인 요소 이외에도, 단순한 관습성을 넘어선 윤리성 을 예의 어디에서 담보할 수 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예의 ‘윤리적 성격’에 대한 탐구를 기존 연구에 기대어 하고자 한다. 공자의 사상에서 ‘예’의 중요성을 새삼 부각시킨 허버트 핑가레트의 글에서 시작하여 예의 성격을 인(仁)과의 관계를 통해 파악하고자 시도한 뚜웨이밍과 신광래의 글, 그리고 의(義)와의 관계에서 예를 바라본 이명한의 글을 통하여 예의 성격을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덕(德)으로서의 예와 규범으로서의 예라는 두 층위에서 예를 검토해 봄으로써 예 의 ‘윤리적 성격’에 대해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시야를 확보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In traditional society there has never been a doubt about the value of li as one of the four virtues as well as the norm people should abide by. However, today there are few people who can clearly understand li's "ethical validity." We can point to some elements that are not considered desirable in today's society. In addition to being classiest and patriarchical, it is not easy to think of ethical elements in li that can go beyond simple conventionality.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ethical nature of li based on previous studies, namely, Herbert Fingarett's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li in Confucius's thought, Tu Wei-ming's exploration of the relation between jen 仁 and li, Kwong- loi Shun's careful examination on the subject of li's relation jen, and Myeong-hwan Lee's understanding of li in terms of the concept of yi 義. Finally, characterizing li as objective norm and subjective virtue as well, I will attempt to gain some comprehensive perspective on the ethical nature of li.

6,600원

6

북한문학사와 상고시가

조규익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15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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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문학사들의 문학작품 해석은 대단히 연역적이고 작위적이다. 상고시가 중 집단 노동이나 儀式을 반영한 <구지가>의 단계에서 개인 창작시가의 단계로 넘어가는 어름에 <두솔가>가 있고, 그로부터 한시와 향가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 창작 시가들이 앞 시대에서 지속되어오던 집단 가요들과 공존하는 시대적 맥락을 형성했다. 원시사회가 무너지고 고대국가가 출현하던 시기부터 개인 서정가요들은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 한역을 통해 기록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 <공후인>이다. 그들은 그 다음 단계인 삼국을 봉건국가로 규정했고, 첫 봉건국가를 고구려로 보았으며, 그 시기의 문학을 ‘중세문학’이라 했다. 이 시기 <황조가>를 비롯한 당대의 시가들을 통해 한자로 기록된 사실과 함께 ‘개별국가들을 초월하는 보편성’이라는 중세문학적 성향을 읽어냈다. 고대사회에 이미 이루어진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의 분화에 따라 양자 간의 대립과 투쟁을 바탕으로 계급 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지배계급에 복무하는 ‘반동적 문화’와 착취 및 억압에 신음하는 하층민들의 요구를 구현한 ‘진보적인 문화’로 갈라지게 되었고, 고대의 노래들 역시 그런 현실의 소산이라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집단적(공동적) 노동, 집단예술’ 등을 바탕으로 계급투쟁 이전의 원시성만 강조한 해석의 이면에서 이념지향의 욕구나 읽어내는 데 그친 것이 <구지가>였고, 노예 소유자 사회의 단계에 이르러 ‘개인의 정서와 감정을 반영한 서정가요’로서의 <공후인>이 출현했다고 보았다. 유리왕의 영웅성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황조가>를 소략하게 다룬 것도 이념 편향의 해석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The interpretative viewpoint or tone is very deductive and contrived in that they interpret literary works, using the ideology with social realism or Juche idea added to social realism. There was Dusolga in the point of contact from the step of Gujiga which collective labour or ceremonies were reflected in to the step of personal creative poetry. From it, personal creative poetry centering around Chinese poems and Hyangga works formed the context of times existing with the collective songs persistent from the past era. The personal songs had been made following collapse of the primitive society and appearance of the ancient countries, Gonghuin is only one song left of them. They defined the Three Kingdoms as feudal states, regarded Goguryeo as the first feudal state, and called the literature at that time as medieval literature. They learned out the fact that poems of the age including Hwangjoga were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and universality to transcend the individual state. Exploiting class and exploited class had been divided in the ancient society. The reactionary culture devoted to the ruling class and progressive culture materialized demand of the lower class were divided based on the conflict and strife between the two classes. They saw the ancient songs as an output of the reality. They learned out the ancient people’s desire of ideology orientation in the hidden side of interpretation about Gujiga, based on the collective labour, collective art, and they saw Gonghuin as a lyrical song reflected in personal emotion and feeling in the stage of slaveholders’ society. Comparing to Gujiga or Gonghuin, Hwangjoga is treated with disregard to such an extent as to refer to only song title or deal with background story and song contents. In fact, North Korea emphasized the Goguryeo history to maintain their own legitimacy, it was also an ideological means to protect and keep their ruling system. If Hwangjoga was a song for complaining to the King Yuri himself about his own loneliness and conflict with surroundings, and the King Yuri was just a monarch as well as a main character of failed love story, it could not be a figure of heroic sovereign who they admired with respect. The fact that we can’t discover any hidden structure except for emotional content or theme, based on mediocrity i.e. love and anguish not the trace of class strife, social realism, and Juche aesthetics was a limit of this song. Therefore, they could not help finishing it to the extent of equivocating or discounting the existence of this song, differently from the prior two songs. However, strictly speaking, we can’t deny that the very equivocation is an action no less ideology-biased than interpretation with class strife.

6,700원

7

『南行錄』소재 퇴계 기행시의 특징과 의미

조유영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18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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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퇴계 이황이 계사년 남행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들을 대상으로 여행 일정과 장소, 여행 기간 동안 교류했던 인물들을 재구성하였다. 퇴계의 남행은 대략 두달 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고, 여행지의 풍물들을 다채롭게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여정 체험들을 기행시로 창작하였다. 『남행록』소재 기행시의 특징은 두 가지 정도로 제시할 수 있다. 먼저 퇴계는 계사년 남행에서 만난 여러 사 람들과 시로써 교류하기도 하고, 옛 선현들과 관련된 장소를 유람하면서 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만 남을 통해 퇴계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를 긍정하고 공감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 속에서 형성된 긍정적 가치는 기행시에서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형상 화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남행에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섬세한 감성과 그만의 시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형상화하였다. 『남행록』소재 기행시는 두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청년기 퇴계에게 계사년 남행은 자신이 살아 왔던 삶을 되돌아보고,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며, 이러한 내적 성찰의 결과가 기행시에 투영되었다. 둘째, 계사년 남행 중 창작한 기행시들은 여정 체험의 감성적 기록이었으며, 청년기 퇴계의 시 세계를 온전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This thesis recast journey's schedule, place, and peaple who were meet on journey by Toegye's poems was written at the southern provinces journey on Year of Gye-Sa(癸巳). He met many people and the institutions and customs of southern provinces on two month journey. Then he write travel poetries by journey experience. Travel poetries in Nam-hang-rok(南行錄) have two features. First, Toegye interact with people who were met on southern provinces journey, by poem, and verse at the place was related with ancient sages. Through these, Toegye internalize by affirm and sympathy people's values or life attitude, the poems seek identity with object. For this his poetic imagination recast and embody new world what he detected on the journey. Travel poetries in Nam-hang-rok have two meaning. First, the journey was an opportunity that could life rumination and introspect inside, and the results are travel poetries in Nam-hang-rok. Second, these poems are the journey's product of esthetics and emotional record. Furthermore Toegye make collection of travel poems show Wa-yu(臥遊) culture's the actual figure of the time.

7,500원

8

<馬灘忠烈祠碑銘>에 나타난 박세당의 글쓰기 전략

주영아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219-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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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탄충렬사비명>은 『서계집』에 실린 여타의 비문(碑文)과 다른 구조로 쓰였다. 일반적 비지류(碑誌類)의 글이 갖는 속성에서 벗어나 개념어에 대해 설명과 대립되는 단어 간의 관계를 정립하는 등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 비지류(碑誌類)에서처럼 연혁을 소개하고 유교적 규범을 모범을 삼았던 고인에 대한 추모글에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간봉(奸鋒)’과 ‘흉염(凶焰)’은 ‘인기(人紀)’ ‘민이(民彝)’과 같은 상대어를 통해 충신열사(忠臣烈士)와 난신적자(亂臣賊子)에 대한 관계에 대한 정립을 명확하게 하여 충신열사의 강개 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하늘’은 ‘사람’과 상대어로 짝을 이루며, 한 발 더 나아가 ‘난신적자’와 ‘사람’이 상대적 의미로 쓰였다. 이러한 상대어의 반복과 점층적 의미 부여는 주제를 부각하는 데 중요하는 역할을 하였다. <마탄충렬사비명>은 7인의 전사자를 기리는 비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괄의 행적이 다. 공격자의 강포한 힘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고 그것에 비해 7인의 방어는 끝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서술하 였다. 서술의 초점을 충신열사가 아니라 난신적자 이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난신적자 이괄의 역심(逆 心)을 드러내 충신열사를 강조하는 효과를 주기 위한 전략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 비명에서 보이는 구체적인 의미는 충렬사에 배향한 장수 7인에 대한 추앙이지만 7인을 드러내기 위해 시도 한 글쓰기의 전략은 비명(碑銘)이 갖는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확인하였다. 단순히 7인의 공적을 추 앙했다기보다는 정사공신 이괄이 난신적자 이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가져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짚어보 고 있다. 비문(碑文) 또는 비지류(碑誌類)에서는 찾기 드문 글쓰기 형식이라 할 것이다.
was written with the structure different from other epitaph(碑文)s that are reported in Seogyejip(西谿集). There is even a point that it is not the epitaph of honoring individual accomplishment, but there is a great difference from general epitaph even in its narrative style. is taking a unique writing method such as establishing relationship between words of being opposed to the description on conceptual language with escaping from the property that the writing in the general Bijiryu(碑誌類, something like a biography written on funerary slabs, gravestones and so on) has. It is contrary to the form of the memorial writing on the dead man that introduced history and had example as Confucian code of ethics as in the general Bijiryu( 碑誌類). ‘Ganbong(奸鋒)’ and ‘Hyungyeom(凶焰)’ were aimed to reveal righteous wrath in advocate faithful subjects by clarifying the establishment on relationship between Chungshinyeolsa(忠臣烈士, advocate faithful subjects) and Nanshinjeokja(亂臣賊子) through relative term like ‘Ingi(人紀)’ and ‘Mini(民彝).’ ‘Heaven’ makes a pair with ‘person’ as relative term. Furthermore, 'Nanshinjeokja(亂臣賊子)' and 'person' were written as relative meaning. The repetition and the gradually semantic assignment in this relative term played an important role in highlighting topic. is Lee Gwal's past that is felt in the face of being epitaph that pays a tribute to 7 people killed in battle. An assailant's outrageous power was markedly expressed. Compared to it, 7 people's defense was described as if falling endlessly. That is because the focus of narration is being put on Lee Gwal who is Nanshinjeokja(亂臣賊子), not Chungshinyeolsa(忠臣烈 士). This can be said to be strategic writing for giving the effect of emphasizing Chungshinyeolsa(忠臣烈士 ) by revealing a traitorous mind of Lee Gwal as Nanshinjeokja(亂臣賊子). As for the specific significance that is seen in this epigraphy, the writing strategy that was attempted for revealing 7 people even if being the reverence for 7 commanders who oriented the Chungnyeolsa Shrine, was confirmed to be completely contrary to the form that epigraphy(碑銘) has. Rather than having simply revered 7 people's accomplishments, it is looking at a way as a human being that Lee Gwal as Jeongsagongshin(定社功臣) will need to have in the process of being changed into Lee Gwal as Nanshinjeokja(亂臣賊子). It will be said to be the writing form that is rarely found in epitaph(碑文) or Bijiryu( 碑誌類).

6,700원

9

교육고전의 양상과 대학 <글쓰기> - 『심청전』을 중심으로

엄현섭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247-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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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서 ‘효(孝)’는 정치이념이었던 여러 사회사상에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다. 효는 단순히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개인윤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효제충신(孝悌忠信)’, ‘충효절의(忠孝節義)’ 등과 같이 ‘충’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국가통치의 가장 기본적인 이념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심청전>은 여성이 원 톱(one top) 주인공으로 대중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효는 전사회적으로 확산이 되었고 사회에 집중화시키는 양상으로 변모하였다. <심청전>은 현대에 넘어오면서도 그 위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다양하게 매체를 활용해 변용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고전문학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대학의 <글쓰기>와 결합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원형을 갖고 있는 이야기는 단시간에 여러 작품으로 변형할 수 있고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 스스로 엮어 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도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할 수 있다. 인물을 바꾸어볼 수 있고 배경을 고쳐볼 수 있으며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할 수 있다.
'Filial duty(孝)' of the Joseon Dynasty were highlighted common to many social thought was a political ideology. Effect simply been recognized as the most basic principles of the national government that forms the basis of the parents and not be limited to personal ethics of the fathers ' loyalty(忠)'. This, coming into effect late Joseon was transformed into a pattern that became more centralized in women spread throughout the society. With this background Simcheongjeon is recognized for its work in popularity. Simcheongjeon has been Transfiguration also take advantage of a variety of media without losing its power came over in modern times. In this way a lot of room to be combined with University that beyond simply reading the classics. Talk to have a round can be modified in a number of work in a short time and can be modified freely. Self-made story, as well as others who say the story can be modified in various ways. Changing the figures we can see, it is possible to see the background corrected, can transform the case in a number of ways.

6,300원

10

신숭겸 관련 콘텐츠가 가지는 관광문화축제의 속성 및 계승

이학주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27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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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신숭겸 관련 콘텐츠가 가지는 관광문화축제의 속성 및 계승의 필요성에 대한 고찰이다. 먼저 신숭겸 관련 이야기가 관광문화축제로 성공할 수 있는 속성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신숭겸이 죽 어서 신이 되어야 하는데, 곡성의 성황신이 되고 여러 사당에 배향되고 있었다. 둘째는 살았을 때 신이한 행적 이 있어야 하는데,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 기러기를 쏘아 맞힌 사건, 대의를 볼 수 있는 예지력 등이 있었다. 셋째는 신으로써 영험을 보여야 하는데, 귀신을 보는 신통함, 도굴꾼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등이 있었다. 다음은 고려 축제인 팔관회에서 행해지던 신숭겸 관련 콘텐츠를 현대에 계승하는 문제였다. 이미 태조 왕건이 처음 팔관회를 열 때부터 고려 내내 팔관회에서는 신숭겸이 가상으로 반열에 올라있음을 보았다. 팔관회에서 있었던 신숭겸 관련 콘텐츠로는 가면극 잡희, 한시놀이, 향가놀이 등이 이미 행해졌으므로 신숭겸 관련 관광 축제의 놀이형태를 현대적으로 활용하여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춘천의 ‘외바퀴수레싸움놀이’도 신 숭겸 관련 팔관회 놀이의 한 유습일 수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신숭겸 관련 이야기는 축제의 속성을 갖추고 있으며, 현대적 계승이 가능함을 알 수 있었다.
This studies the attributes of the contents related with Shin Sunggyeom for cultural trourism festival and the necessities for inheritance. Shin Sunggyeom-related contents has three attributes as for Cultural tourism festival. First, Shin Sunggyeom became a god as a guardian of community and enshrined in several places. Second, he had some features as a god such that he had the Big Dipper shaped warts, he shot down a wild goose, and he had foresight of the Right. Third, He had a special power as in his ability to see ghosts, in the episode of grave robbery and in the episode of fairies. Second focus is on the necessities for inheritance of Shin Sunggyeom-related contents which featured in Palguanhoe Festival from Korea Dynasty. Shin Sunggyeom was already a god with the form of imaginary figurehead in the first Palguanhoe Festival by Wanggeon, the 1st king of Korea Dynasty. Masquerade, Chinese Poetry Play and old Korean Folk Song Play which were held in Palguanhoe Festival can be items for the Shin Sunggyeom-related tourism festival. "One-wheeled Chariot Fight" can be a variation of Shin Sunggyeom-related item in Palguanhoe Festival. So Shin Sunggyeom-related strory has enough attributes to be a Festival and to be worthy of inheri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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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灣 民間信仰의 童乩 硏究

상기숙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30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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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무의 일종인 동계의 선행연구사, 연원과 성무과정, 의식과 분장, 법기와 법술, 사회적 공능 등을 다각적으로 고찰하여 대만 민간신앙― 샤머니즘의 내용과 형식 및 특징, 나아가 민간사고를 이해하고자 한다. 동계 분장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경 대만지방지와 시문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동계 연구는 대만 일본식민시기 현장조사를 병행 도록을 첨부하여 가치있으며, 현재까지 대만 지역을 중심으로 활성화된다. 동계는 의식에서 도교 신앙적 성향을 띤다. 성무과정은 첫째, 선천적으로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로 각종 증상을 거친다. 둘째, 연로한 동계가 퇴직 전 적합한 인물을 찾아 의발을 전승한다. 셋째, 후천적으로 부계 현장에서 스스로 강신된다. 동계가 되면 법사에게 고된 법술을 훈련받고 검증을 거친다. 의식 시 남자는 문신한 상반신을 벗고 허리나 몸에 붉은 수건을 두르며 맨발이다. 여성의 복식은 비교적 자유롭다. 마조제전 외 각종 영신새회에서 행해지며 청신→강신→의례→오신․송신의 과정을 거친다. 동계는 대표적 법기인 오보로 신체에 자상을 가한다. 무술활동은 釘床, 坐釘椅, 爬刀梯, 過釘橋, 背五鋒, 煮油, 解運 등이 있다. 주요법술로 跳童, 落地府, 驅邪, 過火, 進花園, 貢王, 脫身, 討嗣, 討嫁, 坐禁, 炸油 등을 거행하여 민중을 치병하고 驅妖避邪한다. 근래 동계는 의식분장에 있어 구속과 형식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법기의 사용법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추구한다. 현대 대만사회에서 동계의 사회적 공능은 여전히 민중의 각종 난제를 점치고 해결하고 進慶辟邪를 추구 이상향을 염원한다. 나아가 관민 축제의 장으로 승화되어 민중의 결집력을 모으며 국가적 브랜드로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킨다.
The paper proposes to feature the characteristics of shamanism in Taiwan in general with a focus on “TongJi(童乩)” in particular. With a view to approaching the shamanistic world of the country, a general review has been made to take note of the variety of shamans in Taiwan and of the preceding examples of “TongJi”, along with its origin and its procedure to take form of it. In order to have a notion of “TongJi”, it is necessary to contemplate the ritual rule, the appropriate costume, the implements to be used for the ritual performance and the public function that implicates for the society. The records of “TongJi” first appeared at the Regional Chronicle issued around 19th century which usually covered the social, political, economic, cultural and natural situation of the region. It was also presented in poetic and literary works. In “TonJi” we observe some strange aspects such as the man with disheveled hair, the sword in hand to hurt oneself, riding a palanquin on which a knife or nails are installed and a man diving into an iron pot filled with oil. These are considered to be surrealistic actions. The study on “TongJi” has been carried out by the Japanese scholars when Taiwan was under the colonial rule of Japan. All reports and statistical data from 1970 to today have been made mainly around Taiwan. In order to become a “TongJi,” first, one has to be chosen by a deity and gets through a series of symptoms. second, an aged “TongJi” should discover an appropriate person, to whom the words of his spirit be thoroughly transmitted. third, a posteriori one should prepare oneself to be on the full shape to receive the descending god to become a “TongJi.” In case of a male, a tattoo is applied in his body. He takes off his shirts and wears a red towel or red cloth and with no shoes on. In case of a woman, it is relatively free with respect to the clothes she wears. The rituals of “TongJi” are to proceed as the following order: Invitation to the deity, - The descending deity, - Ceremony rituals – Entertainment for deity. – Withdrawal of deity. “TongJi” may be incarnated into different gods, and with WuBao(五寶), a Buddhist implement, hits his head, his forehead, cuts his tongue, pricks his arms, thrust his back or with two long needles pierce both cheeks making holes to be connected from one cheek to another. With blood all over the body, he is to demonstrate his supra- capability. When one falls into a trance, one gets submerged in a confusing state, unconsciously dances with both hands and feet, murmuring some unknown words with closed eyes and moving one’s head. When one is with empty stomach, one is forced to vomit, trembling whole body including hands and feet. “TongJi” is obliged to submit himself to the diverse training course dictated by a Master Monk in terms of various shamanistic arts and religious affairs. A man becomes “TongJi” when he passes the test. Through the time past and present, “TongJi” has been contributing to the society, solving social problems as a religious mediator, but it has been subject to be socially disregarded. In fact, “TongJi” aspires to save people eliminating disasters, epidemic disease and evil spirits. At the same time, “TongJi” prays for peace in the world and in every family with good health and good fortune. In Taiwan of today, “TongJi” has a social role for everyday life, maintaining the traditional Chinese folk culture as a sound folk belief. Now “TongJi” is sublimated to be a folk festival with the official and popular participation, as a cultural event with a power of activating the economic social life of the 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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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樂健志詠』으로 본 17세기 漢江 下流의 새로운 문화 공간 杏湖

정후수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33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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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는 동호를 비롯한 용호, 서호 지역에 많은 누정과 별서(別墅)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정들은 대체로 조선 초기에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로는 세인들의 관심사도 덜해지기 시작하였고, 폐 허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 새로운 누정이 생성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 일대의 행호 부근이다. 『낙건지영』이란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이곳에는 약 22개소의 누정과 별서가 자리잡고 있 었는데 모두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 이후에 생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의 누정 혹은 별서 중 특히 樂健亭은 白下 尹淳의 글씨가 현판 혹은 주련으로 걸려 있던 듯하다. 그리고 謙齋 鄭敾의 그림으로도 남 아있어 그 당시의 모습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더구나 그곳 행호 일대 사방 십리에 걸친 지리에 대한 『杏湖八景圖』라는 지도까지 남아있어 과거의 화려했던 행호의 문화공간 모습을 상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행호 일대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문인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한강 하 류의 마지막 정착지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 사실만 갖고도 매우 큰 문화사적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는 셈이다. 이 밖에 왜 하필 양란 이후에 생성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후속 논문에서 밝힐 일이다.
There were many Nujeongs(樓亭) and Byeolseos(別墅) in the Yongho(龍湖) and Seoho(西湖) areas as well as the Dongho(東湖) area along the Han River, and many of the Nujeongs started to emerge in early Joseon(朝鮮). After Japanese Invasion in 1592, however, they lost the interest of the public and were ruined. There was one area that built a new Nujeong after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it was Haengho(杏湖) near the Haengju Mountain Fortress in Goyang, Gyeonggi Province. Nakgeonjiyeong(樂健志詠) recorded that there were approximately 22 Nujeongs and Byeolseos there. It is estimated that all of them were built after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Manchu War of 1636. Of the Nujeongs and Byeolseos, Nakgeonjeong particularly seems to have hung up the calligraphy of Yun Sun as a signboard or verse couplet carved or written on a plank which was put on a pillar. There are also the paintings of Gyeomjae(謙 齋) Jeong Seon(鄭敾) depicting them, and they make it easier to estimate what they were like those days. There is even a map called "Haenghopalgyeongdo(杏湖八景圖)" covering the Haengho area in a 10-ri radius in every direction. It is thus not difficult to imagine the splendid cultural spaces of Haengho in the past. Those materials suggest that the Haengho area must have settled down as a place of culture for literary figures in the second half of Joseon and been the last settlement on the lower Han River. Those facts alone raise very big curious questions about it in the cultural history. Follow-up studies need to figure out why it was established after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Manchu War of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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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금도(古今島) 관왕묘(關王廟) 연구

유성웅, 장경희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2집 2015.02 pp.35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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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古今島) 관왕묘(關王廟)는 정유재란을 기억하는 역사적 상징이다. 본고는 1598년 창건된 이후 한·중·일 삼국 의 역사적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어 오늘에 이른 고금도 관왕묘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첫째, 고금도 관왕묘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병된 진린(陳璘) 도독과 명나라 수군(水軍)에 의해 1598년 창건되어, 군신(軍神)인 관우(關羽)와 해신(海神)인 마조(媽祖) 등을 함께 배향하였다. 둘째, 고금도 관왕묘는 조선 후기에 묘사(廟祠) 건물의 구조와 향사 대상이 변화된 것이 특징이다. 1598년 정전(正殿) 에 관왕과 마조를 모시고 명수군들의 제향을 받았다. 1666년 정전과 동·서무(東西廡)를 갖춘 品자형 구조였다. 정전 에는 관우를 모셨으며 동무에는 진린 도독과 이순신 장군을 함께 배치하여 조선 수군들의 제향을 받았다. 1791년 고금도 관왕묘에 ‘탄보묘(誕報廟)’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묘격(廟格)이 승격되었고, 노량대첩 당시 전사한명 등자룡( 鄧子龍) 장군이 합사되었다. 이에 따라 동무에는 진린 도독과 등자룡 장군이, 서무에는 이순신 장군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40년 고금도 관왕묘는 훼철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이충무공 유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16 세기 한·중 문화 교류를 실질적으로 증명하는 문화유산인 고금도 관왕묘가 향후 원형대로 복원되길 기대한다.
Founded In 1598, when the Japanese invaded Korea for the 2nd time, Gogeumdo Gwanwangmyo is a historical symbol to rememb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Since the foundation, Gogeumdo Gwanwangmyo has gone through continuous transformations as responses to changing relationships among Korea, China and Japan. The paper aims to bring to light important historical facts and argue for the necessity to restore Gogeumdo Gwanwangmyo to its original form. First, Gogeumdo Gwanwangmyo was founded in 1598, by the Admiral Chen Lin (陳璘) from the Ming Dynasty. The shrine housed the war god (軍神), King Guan Yu (關羽) and the god of the sea (海神), Majo (媽祖). In their hometown, Guangdung (廣東) in China, these military leaders followed the tradition of dedicating memorial service to both King Guan Yu and Majo. In founding Gogeumdo Gwanwangmyo, they applied the same concept. Particularly in 1583, Chen Lin had previously erected a Matang Gwanjemyo (馬塘關帝廟) in Guangdong. This experience offered him the motivation to build Gwanwangmyo in Korea. Secondly, the late Joseon dynasty witnessed shifts in commemorative service tradition, which centered on the architectural structure of shrine, and the target of commemorative service. In 1598, the main shrine housed the King Guan Yu and the Majo. In 1666, the entire structure of shrines changed to have the 品 shape, having the East shrine and the West shrine under the main shrine. The main shrine was dedicated to King Guan Yu. The East shrine was dedicated to the Admiral Chen Lin and the Admiral Lee Sun-shin. In addition to the East and the West rituals buildinges, the year 1713 saw an addition of a small temple(玉泉寺) whose role is today’s equivalent of the guard office. The same year saw the elevation of national status of the commemorative service for King Guan Yu (關羽), the Admiral Chen and the admiral Lee. In 1791, the King Jongjo granted Gogeumdo Gwanwangmyo a signature board that reads ‘Tanbomyo (誕報廟)', which also contributed to raising the shrine’s status. That year also saw the expansion of the scope of the memorial service to dedicate to one more soul, the general Deng Zi Long (鄧子龍), who died during the Battle of Noryang. Accordingly, the structure is re-arranged to have the East shrine dedicated to the admiral Chen and the general Deng, and the West shrine to the admiral Lee. In the post Battle of Noryang era, Gogeumdo Gwanwangmyo became an internationally renowned shrine housing souls of national heroes of the Joseon and the Ming dynasties. But,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Gogeumdo Gwanwangmyo was destroyed. After liberation, in light of the shrine’s value as a relic of the admiral Lee, the Korean government designated Gogeumdo Gwanwangmyo as Historic Site No. 114. Currently, the main shrine is used to hold a national memorial service for the Admiral Lee, with the general Lee Young-nam. In particular, this latter represents important historical heritage to prove the cultural exchange that existed between China and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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