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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학 [THE EASTERN CLASSIC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INSTITUTE FOR EASTERN CLASSIC STUDIES]
  • ISSN
    1598-1452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5~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37집 (12건)
No
1

자로(子路)의 인물됨과 사승(師承) 관계 고찰

손세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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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는 공문 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특히 정사(政事) 방면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제자였다. 그는 노나라 변 땅 사람으로, 공자보다 아홉 살 적었으며, 공자를 만나기 전에는 낭인 생활을 하였다. 그는 공문의 제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따뜻한 정을 갖고 있었고, 정의로운 일을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실천했으며, 좋은 물건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쓰고자 했다. 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지냈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은자들도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세련된 교양을 갖춘 사람들로 가득한 공문의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칠고 조잡했으며 격식보다 실질을 중시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공자에게 ‘온당치 못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성정을 지닌 자로가 공자와 사제관계를 맺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불굴의 노력으로 어려운 가정 환경과 주위의 냉대를 극복하고 성웅(聖雄)의 덕과 인간다움[仁]을 이룬 공자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후 자로는 공자를 ‘주군’으로 받들며, 때로는 보디가드로서 때로는 조언자로서 때로는 공문의 해결사로서, 공자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공자 또한 자로에게서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은 문(文)과 예(禮)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행할 수 없는 것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로를 보면서, 자신에게도 인간적이고 순수한 면을 발견하였고, 소위 ‘뜨거운 정열의 사나이’로서의 품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자로가 자기 곁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자로와 공자는 서로에게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사제 간이었지만 동지애로 뭉쳐진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끌려 사제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Tsze-lû(子路) was one of the ten leading disciples of Confucius(孔門十哲) and renowned for political affairs. He was born in Biàn(卞), Lu(魯) nine years after the birth of Confucius(孔子) and roamed around until meeting Confucius. Then when meeting Confucius for the first time, Tsze-lû was so impressed by his moral virtue(德) so asked him to accept as a disciple. Since then, Tsze-lû never left his side except for the last year of the death and sometimes acted as a bodyguard, an counselor, or a trouble-solving broker in the Confucian school(孔門). No-one was more warmhearted and unreserved than Tsze-lû in the Confucian school, and he had the courage of his convictions in justice. He also had no qualms about sharing good things with his friends. His honor and distinction was spread out to the world, so all the people, even hermit scholars wanted friendship with him. Tsze-lû, However, seemed ill-matched with the sophisticated Confucian cultures. He took a serious view of substance more than formality, so he was coarse and uncultivated. Even Confucius was always worried that Tsze-lû would die an unnatural death. If then, despite of his rough personality, why did Tsze-lû request to be permitted for the Confucian school? As a result of the research, the following facts were found. Tsze-lû was impressed by Confucius who overcame all kinds of adversity by strenuous effort. He also respected Confucius for his virtues proper to a protagonist of an epic and humanity, both which he adored badly. That’s why he asked to accept as a disciple, and he devoted himself Confucius as his master ever since. Confucius’ motivation to accept Tsze-lû as a disciple was not much different. Confucius perceived himself many points of likeness in character with him. Besides, he was inspired by Tsze-lû who did his way in everything without any hesitates, which Confucius could never do because of the cause of truth(文) and the rites of propriety(禮). Through it, Confucius discovered that he had a pure heart and passion like Tsze-lû. They, so to speak, recognized their own identities from each other. It was the motive for them to make a relationship. It formally seemed between a master and a disciple, but intrinsically it was comrade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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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호 윤휴의 『주례』 이해와 정치관 ― 「독주례(讀周禮)」와 「만필(漫筆)」을 중심으로

김인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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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백호 윤휴의 『주례』이해와 그의 정치관>을 「독주례(讀周禮)」와 「만필(漫筆)」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주지하디시피 백호(白湖) 윤휴(尹鑴)는 17세기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의 1, 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로, 서인들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예제를 설정하려는 데 반해, 그는 고례(古禮)를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예적(禮的) 질서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특히 윤휴는 17세기 예송논쟁의 와중에서도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개혁의 모델을 『주례』로부터 새로운 이념과 제도의 원형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술된 것이 「독주례」이다. 그는 『주례』를 구직(九職), 십윤(十倫), 육경(六卿), 삼공(三公), 삼고(三孤), 십오례(十五禮), 삼십육관(三十六官)으로 이해하고, 『주례』에서 제시하는 군주정치의 핵심을 군왕(郡王)의 ‘수덕(修德)’과 ‘수도(修道)’를 근본으로 한 완비된 제도(制度)에 있었다고 보았다. 아울러 「만필」에서 삼대(三代) 정치의 대요를 건방(建邦), 설관(設官), 분민(分民), 경야(經野), 명형(明刑), 제군(制軍)으로 보았으며, 『주례』의 이념에 입각한 과거제(科擧制)보다는 추천제(推薦制)에 의한 인재선발, 재상정치의 부활, 관직의 재정비를 통한 요⋅순(堯舜)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독주례」는 윤휴가 『주례』를 이해한 독서기라면, 「만필」은『주례』 이념을 구체적으로 현실 정치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시론(試論)이라고 하겠다.
This paper is to examine focusing on Dokjurye (讀周禮) and Manpil (漫筆). As is generally known, Baekho Yoon Hyu is a figure at the center of the 1st and 2nd Ritual Controversy between Seoin and Namin in 17th century and he attempted to recover ritual (禮的) order of Joseon society based on old manners (古禮) while Seoin intended to establish rites based on Zhuxi's Family Rituals. Yoon Hyu made special efforts to reform Joseon society even during the 17th-century Ritual Controversy and to find new ideology and prototype of system for the reform model from Zhouli. Dokjurye was written in this perspective. He understood Zhouli as nine occupations (九職), ten ethics (十倫), six ministers (六卿), three First Lords (三公), three liege men (三孤), fifteen proprieties (十五禮) and thirty six government positions (三十六官) and thought that a system was complete with the core of monarchy presented by Zhouli based on king’s ‘cultivating virtue (修德)’ and ‘cultivating morality (修道).’ In addition, he regarded establishing a state (建邦), giving government positions (設官), distinguishing people (分民), organizing land (經野), systematizing punishment (明刑) and building army (制軍) as the substance of politics of Three Dynasties (三代) on Manpil and he tried to recover politics of Three Dynasties with Yao and Shun through talents selection by recommendation, revival of politics by prime minister and reorganizing government positions rather than Imperial examination based on ideology of Zhouli. In other word, Dokjurye is a book report on Yoon Hyu’s understanding of Zhouli and Manpil is an essay on how to concretely apply Zhouli ideology to real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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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뢰천 기독사상 중 중국적 수양론

강지연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6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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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의 기독사상가, 오뢰천(吳雷川)은 당시 비기독교(非基督敎)운동 때 주장된 이론, 기독교 신조를 반대하던 이론에 대응하는데 주력한다. 그는 기독교와 유가사상을 결합해서 중국기독교도들의 강건한 인생관을 정립하고자 했으며, 이로써 사회에 봉사하려고 했다. 고난에 흔들리지 않을 인생관을 세우고, 자기 수양을 하는데 기독교 정신과 전통중국문화는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작업을 위해, 그는 인(仁)의 이타성과 성령을 유비시킨다. 타인에 대한 공평무사한 관심은 도덕성의 기초가 되는데, 이런 점에서 성령의 완전성과 인의 정신은 상통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령이 가진 특성 중 인격성보다 성령의 완전한 능력 등 다른 특성에 집중한 결과이다. 또한 그는 유가의 경(敬), 성(誠)과 기독교의 기도의 공통점을 지적했다. 스스로 완성하고 성숙하게 된다는 성(誠)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로서 유교에서 말하는 경(敬)의 태도는 기독교에서 기도를 통해 강건해지는 정신적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당시 급변하는 사회 속 고난을 겪는 민중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인생관과 사회개조를 위해 오뢰천은 중국문화의 수양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연결하고자 하였고 이것은 서구 기독교의 중국적 토착화 작업으로 평가될 수 있다.
Wu Leichuan focused on rebutting various Anti-Christianity theories advocated in the Anti-Christianity movement. He hoped to synthesize Christianity and Confucian thought to present a correct view of life for the Chinese Christians as a remedial measure and so contributed to the society at large. Wu argued that the spirit of Christianity and traditional Chinese culture have many commonalities in both establishing a correct view of life and pursuing moral self-cultivation. He drew an analogy between the altruism of ren (benevolence) and the Holy Spirit. In his view, the foundation of morality springs from disinterested concern for others and argued that the completeness of the Holy Spirit that arises from these features and the spirit of benevolence have myriad things in common. This line of Wu’s thought is indeed a product of his focused attention on other features of the Holy Spirit other than the personhood and reformability of the Holy Spirit. Further, Wu connected Confucianism’s Jing (composure) and Cheong (Integrity) with the Christianity’s prayer.The Confucianist’s concept “cheong (integrity)” thought to reach its perfection and maturation through one’s own arduous pursuit is related to the Christianity’s spiritual attitude that prayer can cultivate strengthening of one’s own self.

5,700원

4

동주 이용희의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안외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8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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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현대 한국국제정치학계의 태두인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 1917-1997)의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시각을 고찰하였다. 민족주의와 사대주의, 모두 논란이 많은 개념이지만 적어도 양자 사이에서는 전자가 일방적 승리를 거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주는 이와 달리 현대 국내외 정치/외교에 있어서 양자를 혼합해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대내적으로 주권주의 곧 시민민주주의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힘의 질서에 기초한 갈등적/배제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여 제국주의를 귀결한 책임을 물었다. 반면 사대주의는, 굴종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기존의 오랜 오해와 달리, 국가간의 예(禮)라고 하는 규범질서를 상호 준수하면서 천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평화적 국제질서를 구축해왔던 하나의 국제질서 시스템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그는 오늘날에도 대내정치는 민족주의에서 시민주권 체제 확보라는 평등의 원리를, 대외질서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서 사대(事大)/사소(事小)라는 상호주의적 예에 입각한 평화의 원리를 결합할 것을 추구하였다. 양자에 대한 이러한 동주의 인식은 근대 중심적 혹은 서구 중심적 인식을 극복하고 지구문명사적 관점에서, 또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균형적 관점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민족주의를 근대 고유의 것으로 인식한 것, 사대주의에 대해 사소의 측면을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점들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와 사대주의에 대한 인식은 1960-70년대 국내외 지성계를 고려할 때 충분히 독창적이면서도 유의미한 것임이 분명하다.
Dong-Joo Lee Yong-Hee overcomes the modern-centric or West-centric perspective of the world history or the international relations, and views it from a global civilization perspective, in addition, from a balanced perspective between tradition and modernism. In particular, he did not view nationalism as a one-sided win of the traditional order of international relations but analyzed pros and cons of both sides and as a future alternative for above, he combines the advantages of each side respectively. As a result, regarding nationalism in the domestic level, he found big advantage in the establishment of sovereignty, soon civil democracy. On the other hand, instead of the conflictual/exclusionary characteristic of the nationalism based on power order, he suggested the restoration of the traditional order of international relations through normative arbitration of the absolute power for building peaceful international order. Dong-Joo’s reason on combining nationalism and the traditional order of international relations, as a matter of fact, nationalism strongly spread all around the world in a short period of time, and tributary system has the history of maintaining international peace in the East Asia for over a long period of 2000 years, can be evaluated as a positive proposal that can be considered fully.

7,500원

5

两宋乡治体系中“管”的几个问题

朱奎泽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12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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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시기, “치민지기(백성을 다스리는 기초)”로서의 향촌관리체계는, 통치이념이나 제도설계, 구체적실시 등 어느 면에서든 변혁시대의 특징을 도드라지게 나타냈는데, 그 상황은 날이 갈수록 세세해지고 복잡해졌다. “관”은 송나라시기 향촌하부관리체계 중 비교적 오랫동안 사용된 중요한 제도 중 하나로, 그 독특한 향촌저변의 관리기능을 발휘하였다. 북송 개보7년 향촌체제를 “관”으로 분리한 것을 시작으로 “관”은 송나라시기 농촌사회의 특수한 하부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관”은 그 설치와 소멸, 조직의 편제, 농촌사회 관리방면의 효과 등에서 특별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관”의 실제 제도시행은 모두 세 가지로 상황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관”의 조직과 편제, 둘째 호장과 장정계층의 기형적인 혼합, 셋째 호적의 작성과 편찬, 토지세와 각종세금 나아가 농촌치안의 감독과 관리책임이었다. “관”의 기본기능의 쇠퇴와 소멸은 송 대 기타 향촌하부관리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점진적인 전개과정을 거쳤다. “관”급 제도의 설립과 폐지, 조직편제, 관리효과 등은 우리가 심도 있는 연구를 할 가치가 충분하다.
The countryside governance system was "the base of governing people" in the Song Dynasty. No matter governance concept, the system design or specific implementation, there was times change characteristics of the connection to be highlighted. Situation got closer and more complex. The Guan was a important organization of the countryside governance system in a long time. It was a special case in the countryside governance system in the Song Dynasty. It is also to play the special governing function. From the beginning of "from Xiang to Guan" in the seven years of Kaibao in Song Dynasty. Guan as a special grassroots organization entered Song Dynasty primary governance system. There were special parts for Guan's establishment, organization, governance effect and withdrawing. There were three different situations for Guan's actual practice. Guan's organization is a syntheses with Qizhang, Huzhang and Zhuangding. They took charge of the compiling of household registration, the taxation of the governor, social security and so on. The retreat of Guan's basic functions has a gradual process. That was like other countryside grass-roots organization in Song Dynasty.

6,000원

6

근대 조선의 ‘탈중화’와 지역의식의 재구성 - 『독립신문』의 논설을 중심으로 -

김수자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147-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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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개항하면서 한중일 3국은 조선과 청의 전통적인 조공, 책봉관계, 그리고 자주 개념을 서로 다르게 이해, 해석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일본은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사용한 ‘자주국’이라는 용어를 통해 조선이 중국에 대해 자주, 독립국임을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나 내치외교는 자주(自主)라고 하는 ‘형식적인’ 종속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이 자국의 속국임을 실제화하려 했다. 이와같이 선명하지 않은 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나라가 패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리고 1899년 대한제국이 중국과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정치적 의미와 중세적 지역의식에서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개화 지식인들은 탈중화의 주요한 방법으로 문명담론을 활용하였다. 문명담론에 의거해 중국적인 것은 거의 예외없이 배격, 부정되었다. 중국의 것이 야만적인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유교문명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독립신문』은 중국을 서양이 갖추고 있는 문명의 양상들이 모두 결여된 어리석고, 천하고, 더러우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미개화 혹은 야만과 동격화 하였다. 중국은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지역’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을 주변국으로 간주하면서도 동양의 방어를 위해서는 조선과 중국, 일본이 연대하여야 한다는 지역연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연대의식은 자연스럽게 서양과 대별되는 아시아 지역공동체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위치를 독립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역할을 규정한 것이기도 하였다.
In 1876, when Chosun was opened by Japan. It was revealed that the three countries of Korea, China and Japan had different understanding about Chosun-Qing Relation, Tributary and Investiture. Japan tried to make it clear that Chosun was independent country from Qing by using a word ‘independent state’ at the Chosun-Japan Treaty. Chosun wanted to maintain a ’formal’ subordinate relationship with Qing, but was able to use its own independent diplomacy . But Qing tried to actualize that Chosun was Qing’s subject country. However, this unclear relationship ended with when Japan won and Qing lost at the Sino-Japanese War. And in 1899, by the Korean empire and Qing signing at the Korea-Qing Commercial Treaty, de-sinocentralism were composed at the political meaning and medieval regional consciousness. The intellectuals developed the moves that the movement to de-sinocetralism in terms of culture and consciousness. Based on the discourse of civilization, Qing style was rejected and denied almost without exceptions. Furthermore the China’s things were thought as barbaric. Also they seemed attitude that they denies with the confucianism too. Especially The Independent become equaled Qing same with barbarism that is insufficient civilization which Western has, and foolishness, dirty, and lack of interest for country. The reason why the intellectuals of Chosun made Qing as the barbarian country was they thought that dele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Qing which blocked the Chosun’s independence traditionally would announce that Chosun is independent country and make Chosun rich and strong. It was for showing that China was no longer the center of the culture anymore and it was just a local like other countries in East Asia. And in the process, it was defined the role of the Chosun state in that it should stand as an independent country.

6,900원

7

陽關三疊의 歌唱 方式 考察

박종훈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177-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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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唐 王維의 송별 작품인 「送元二使安西」와 관련된 ‘陽關三疊’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四庫全書 電子版과 한국고전번역원DB에서 관련 언급을 추출하여 그 제 양상을 소개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왕유의 작품은 후대 시인들에 의해 ‘陽關曲’, ‘渭城曲’ 등으로 불리며 송별의 장소에서 수없이 언급되었고 실제 왕유 작품을 가창하면서 ‘양관삼첩’이라는 독특한 양상을 낳았다. 그러나 ‘양관삼첩’의 가창 방식을 고증할 명확한 자료가 없어, 그 가창에 대한 이견이 분분하다. 그 이견 중 대표적인 것이 宋 蘇軾의 언급이다. 소식은 왕유 작품 중 1구를 제외하고 2,3,4구를 再唱하는 것을 삼첩의 양상으로 보았는데, 후대문인들 역시 소식의 견해를 수용한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소식은 양관삼첩의 방식을 소개하면서 白居易의 작품을 근거로 들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꼼꼼히 변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식 이후 문인들은 소식의 견해를 큰 틀로 삼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 양상에 대해 소개한 바 있다. 그 중에서도 2,3,4구를 재창하면서 작품 사이사이에 시인의 정회를 추가한 양상이 눈에 띈다. 또한 李瀷은 『星湖僿說』 「歌詞三疊」에서 1,2,3구의 마지막 3글자만을 재창하는 것을 삼첩이라고 한 바 있다. 다음으로는 세 구를 재창한다는 소식의 논지와 다른 견해를 살펴보았다. 왕유 작품 중 3,4구만을 하나의 덩어리로 삼아 이 부분만을 삼첩한다는 견해도 있었고 매 첩을 할 때마다 왕유 작품의 글자 수를 줄여가면서 가창을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aspect of 'Yanggwansamcheob(陽關三疊)' related to Tang(唐) Wang-yu(王維)'s farewell work 「Songwonisaanseo(送元二使安西)」. The main points of the study were to extract the relevant references from the electronic version of the whole book and the Korean translation service database. Wang Yu's work was called by the late poets to be 'Yanggwangog(陽關曲)', 'Wiseonggog(渭城曲)', and was mentioned many times in the place of farewell. Actually, created a unique aspect of 'Yanggwansamcheob' while singing the Wang Yu's work. However, there is no definite data to confirm the actual mode of the 'Samcheob'. So, the disagreement about the method is different. A typical example of the disagreement is the mention of Song(宋) Sosig(蘇軾). He saw the re-enactment of 2,3,4 phrases except for 1 phrases. Later writers have also accepted the views of Sosig. This part seems to need to be scrutinized thoroughly. Since Sosig, the writers have made the view of the news a big framework and introduced various aspects of the change in it. Among them, the reappearance of 2,3,4 phrases, and the addition of the poet's poetry among the works are remarkable. Next, I looked at the views of the Sosig of re-opening the three districts and other differences. There was also a view that only 3,4 phrases of the WangYu's work were made into one lump and only this part was trashed. There was also an explanation that every time perform a concert, the number of characters in the WangYu's work will be reduced and the vocals will be performed. Lee-Ik(李瀷)'s 『Seonghosaseol(星湖僿說)』 「Gasasamcheob(歌詞三疊)」 were presented in the 1,2,3 phrases of the which suggested that the last three letters of each sphere would be re-opened. This paper is based on the intention of introducing aspects of the Yanggwansamcheob. I will continue to gather various data from various perspectives and try to get closer to the aspects of the Yanggwansamch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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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려 팔관회와 춘천 외바퀴수레싸움의 축제적 상관성을 통한 관광문화콘텐츠 활용

이학주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20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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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춘천의 민속놀이 외바퀴수레싸움과 고려 팔관회의 축제적 상관성을 알아보고, 이를 통한 관광문화콘텐츠로의 활용방안을 찾고자 고찰했다. 이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하며, 전통문화를 활용하여 발전시키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이다먼저 고려 팔관회의 연희와 외바퀴수레싸움의 상관성을 밝힐 수 있었다. 특히, 외바퀴수레싸움의 주인공이 팔공산 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해 어차(御車)를 타고 견훤과 싸우다 죽은 신숭겸임을 다시 입증했다. 아울러 고려 팔관회는 고려의 축제였으며, 이때는 다양한 연희가 행해졌는데, 그 가운데는 외바퀴수레싸움도 있었음을 고찰했다. 다음은 외바퀴수레싸움의 관광문화콘텐츠 활용을 이끌어 내었다. 춘천외바퀴수레싸움은 정월대보름축제와 같은 축제에서 행해진 마을대항 수레싸움 놀이였다. 이를 관광문화콘텐츠로 활용할 경우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첫째는 춘천의 민속축제행사 소양제 등에서, 둘째는 춘천과 가평의 대항으로, 셋째는 신숭겸과 관련이 있는 시도의 대항으로, 넷째는 전국체전과 전국민속축제에서 대항전으로, 다섯째는 세계적인 스포츠가 될 수 있다. 또한 장난감 놀이, 운동회 경기로도 할 수 있으며, 가상현실과 결합해서 4차 산업으로 만들 수 있음을 말했다.
This study shows the relationship between ‘Palgwanhoe’ and ‘One-wheeled Chariot Fight’ in Chuncheon. It convinces that the main fighter of ‘One-wheeled Chariot Fight’ characterizes the General Shin Sung-gyeom who died in a fight against Gyeon-hweon instead of Wang-geon. ‘One-wheeled Chariot Fight’ is sure to be one of the sessions in ‘Palgwanhoe’, a national festival in Korea Dynasty. It shows how to utilize ‘One-wheeled Chariot Fight’ as Tourism Culture Contents. ‘One-wheeled Chariot Fight’ was an inter-local communties fight play. It gives some five ways to utilize it as Tourism Culture Contents. First, as a session of Soyangje Festival in Chuncheon. Second, as an inter-communities' game between Gapyeong and Chuncheon, Third, as a game among Shin Sung-gyeom related communities. Fourth, as a session in National Athletic Games or National Folk Festivals. Fifth, as an international sports game. Last, as a kids play or a play in seasonal sports day or as one of the virtual reality game of 4th industry.

6,100원

9

이규보 문학에 나타난 생태 정신과 생태 글쓰기

박수밀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229-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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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이규보(李奎報)의 문학에서 생태 정신을 찾아내고 그의 생태적 사고가 작품에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살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규보의 문학 기반을 이해하고 나아가 생태 글쓰기의 개념을 보완해가고자 했다. 먼저는 이규보의 문학 사상과 생태 정신이 어떤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를 바탕으로 이규보의 생태적 사고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작품에 나타난 생태 글쓰기 양상을 셋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는 이에 대한 이규보의 생태 글쓰기 변모 양상을 살펴보았다. 「슬견설」에서 보여준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의 글쓰기는 관념론에 머물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생태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쥐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성찰의 글쓰기 양상을 살폈다. 그의 작품에는 쥐와 고양이에 관한 경험을 담은 흥미로운 작품들이 있다. 쥐에 대한 일련의 글쓰기와 쥐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에는,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는 쥐조차 놓아주는 작가의 생태적 성찰이 담겨 있었다. 세 번째는, 매미와 거미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담은 「방선부(放蟬賦)」를 살펴보았다. 「방선부」는 호생지심(好生之心)에 바탕을 두고 우의(寓意)의 방법으로 쓴, 생태적 사고를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규보의 생태 글쓰기는 오랜 시간의 성찰과 반성을 거치면서 생태적 사유를 심화해간 것이었다. 그는 자연 사물을 도덕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사물의 생태(生態) 자체를 존중하면서 대상의 연약함을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와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생태 글쓰기 이론을 발전적으로 탐구해가고자 한다.
This study is to find out the ecological spirit in a writer of Korea dynasty, Kyubo Lee’s literature, and to reveal the way of containing this spirit in his works. To this approach, it explores his literatural background and makes up the concept of ecological writing. At the beginning, it shows the aspects of his literatual thought and ecological spirit. There are three aspects in his ecological spirit revealed in his works, in terms of consciousness change in his ecological thought. Firstly, it reveals the change aspect of his ecological writing. He did not stop his writing in a philosophical and ontological idealism in , led his writing up to the practical action. Secondly, it is about the consciousness change about rat and the change aspects of his reflection writing. Among his works, there are exciting works of his own experience about rat and cat. His writing about rat and process of thought change contains his ecological consideration. Thirdly, is a work of new reflection about cicada and spider. This work shows the ecological thought, in an allegorical way, on the basis of the love to living thing - so called “Ho-Seang-Ji-Sim”. The ecological wring of Kyubo Lee’s had been deeply developed along with his long insigt meditation and reflection. At the same time, he did not consider nature things as the instrument of morality. He respected the ecology of things as it is, looked into the weakness of things with warm heart and compassion. The concept of ecological writing shall be continuously put in hard work, and make an advanced fruitful study outcome.

6,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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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에 대한 조선지식인의 문학적 수용 태도 ― 明나라 遺民 康世爵의 실상을 중심으로 ―

주영아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25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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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에 조선에 입국한 중국 이민자 중에는 자의에 의해 월경하였다기보다는 혼란한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국경을 넘은 유민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이방인으로 혹은 디아스포라로 조선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면서 겪게 되는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강세작은 단순히 유민이 아닌 정착지인 회령은 물론이고 중앙의 관리들에게까지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강세작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이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실제 그의 대한 기록은 박세당의 「강세작전」처럼 사실을 기록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시문와 묘지명도 전한다. 심지어 사후 100년에 전설이 되어 실존 인물과 관련하여 남겨진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강세작의 삶이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의 문학으로 새롭게 재해석되어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고 있다는 반증이다. 본 연구는 17세기 명나라 유민을 대하는 조선지식인의 인식과 산재한 강세작의 이야기를 일갈하여 문학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핀다. 아울러 그가 쓴 「자술」과 역사의 기록이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와 유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With paying attention to refugees of crossing a frontier amidst the chaotic situation in East Asia rather than having willfully crossed the border among Chinese immigrants who entered Joseon in the 16th~17th century, there is a need to have an interest in the image of life that they come to suffer while arranging a site of living in Joseon as an alien or Diaspora. Gang Se-jak was known his existence even to central government officials as well as to Hoeryeong where is settlement, simply not a refugee. As a researcher into Gang Se-jak, a response to this is recognized to be necessary. As for a record on him in reality, there is a section that recorded a fact like Park Se-dang's 「Gangsejakjeon(康世爵傳)」. On the other hand, a poetry & prose(詩文) and epitaph(墓誌銘) of being contained a view of looking at him are also reported. There is even a story that was left in relation to a real person as it became a legend 100 years after his death. These records are a contrary evidence as saying that Gang Se-jak's life is growing as strong vitality with being newly reinterpreted into many forms of literature depending on a situation. This study inquires into Joseon intellectuals' perception of refugees in Ming(明) dynasty of the 17th century, and into how it is expressed in literature with thundering the scattered stories on Gang Se-jak. In addition, its significance is discussed with recognizing that there is a difference in 「Confession」 written by him and a historical record.

6,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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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邑誌』 및 문헌 소재 喜慶樓 題詠詩와 누정문화 콘텐츠 활용

임준성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28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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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5세기에 건립된 광주목 관아의 부속 누정 희경루를 대상으로 하여 그 제영시의 특성과 누정문화 콘텐츠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희경루 제영시는 『광주읍지』 및 문헌소재 자료에서 현재까지 16편 21수의 작품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조선 전기와 중기가 대부분이고, 후기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희경루 누정의 건립과 중수 그리고 戰禍에 따른 변천과정에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제영시에 대한 연구방법으로 건축학의 주요 개념인 공간성과 장소성을 도입하여 제영시의 시적 의미를 다양하게 드러낼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살폈다. 희경루의 공간적 특성은 주로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관리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덕목을 공적인 건축물에 의탁하여 개인의 서정을 토로하기보다는 임금의 은혜, 경로효친, 경세제민 등에 더 주안점을 두고 표출하고 있다. 희경루의 장소적 특성은 ‘광주목’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과 위치 그리고 자연환경으로 인해 접객과 교유 그리고 주변 풍광의 완상에 있다. 희경루 제영시 대부분이 이에 해당하며, 개인적 소회와 서정 그리고 만남과 이별의 장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누정문화 콘텐츠로는 울산 태화루 복원 사업의 사례를 통해 광주 희경루 복원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다행히 희경루는 적지 않은 수의 제영시와 16세기 후반에 그려진 <희경루방회도>는 복원사업 기초적 자료가 되고 있다. 향후 추진될 희경루 복원사업은 호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지역문화역사 교육은 물론 문화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This article is about pavilion Heekyungroo built in the 15th century. Therefore, we talked about how to use the poetry and cultural contents that are targeted. So far, there are 16 works of 21 literary works related to Heekyungroo. Many literary works are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mid and late has hardly appear. As a method of studying poetry, we introduced the concept of space and place. The spatial characteristics of Heekyungroo were centered on the public domain. Instead of putting the basic literacy and virtue that management needs to have into public buildings, the emphasis is on the grace of the wage, the efficacy of the parents, and the management of the nation. The location characteristic of Heekyungroo is to appreciate the guest greetings and the surrounding scenery because of the local location and natural environment of Gwangju. In the case of reconstructing Taehwaroo in Ulsan City, I tried to explore the possibility of restoring Gwangju's Heekyungroo. I tried to relate the possibility to cultural contents. Fortunately, he has a large number of literary works. It is important to see the drawn in the late 16th century. These two are the basic data of the restoration project. The restoration project of Heekyungroo, which should be promoted in the future, can be a symbolic structure that reveals the identity of Gwangju. It is expected to be able to actively utilize cultural and historical education as well as cultural tourism resources in the region.

6,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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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론을 이끈 풍수서와 시대별 발전과정

박정해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37집 2017.08 pp.31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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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풍수이론의 구성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과 의미가 부여되었고, 각각의 풍수서는 용에 대해 다양한 이론과 논리를 제시하게 된다. 용과 관련한 풍수이론은 상상의 동물인 용의 성질을 활용하여 다양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절묘한 선택을 하였다. 또한 자연의 여러 특징적인 모습을 논리적인 틀 속에 반영시켰으며, 풍수 논리의 핵심으로써 그 시대를 풍미하던 학문세계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섭구승은 『지리대성이기사결』에서 용을 진실로 주라 하였고, 조정동은 지리오결에서 지리의 도는 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던 만큼, 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클 수밖에 없다. 혈의 크기와 형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혈의 결지여부 조차도 좌우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합리적인 논리의 틀 속에서 정리할 필요성이 컸고, 연구할 필요성 또한 컸다. 용론의 시대별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용의 개념은 풍수가 이론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때부터 활용되고 있었으나, 도입초기에는 구체적인 논리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풍수논리의 발전과 더불어 구체적인 논리체계를 가지게 되는데, 당대의 양균송에 의해 확립되었다. 송·원시기에는 당과 명을 이어주는 과도기에 해당하며, 명대에는『감여만흥』과『지리인자수지』에 의해 용론의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 청대와 현재에 이르는 기간은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정체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용론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져야 하며 논리체계의 확립을 이루어야 한다.
The Dragon(龍) has been inspired in considerable roles and has had some crucial meanings in the logical construction of Fengshui Theory. The fengshui idea about the Dragon that was an imaginary creature was used in order to explain various natural phenomenons. So various natural features were reflected in the logical framework of Fengshui which became a core of Fenshui logic. And the logic also had a interrelationship with that of academic world in the ancient time. Ye Jin-sheng(葉九升) said that the Dragon is the genuine chief part through his book Dilidachengliqisijue(地理大成理氣四訣), and Zhao Ting-dong (趙廷棟) also said that the Dragon is the most important factor in the Tao(道) of geography through the book, Diliwuju(地理五訣), which shoes the Dragon was more important than all other factors of Fengshui. The reason is that it played a crucial role not just determining the scale and shape of the propitious spot(穴) of ground but also defferentiating the palaoe is really propitious site or not. Thus, it is necessary to study the Dragon in Fengshui more concretely with rational logical framework. The concept of the Dragon had been used when Fengshui Theory had been first established. However, at the time, there was no clear logic system. According to its theoretical development, it had been refined steadily, and eventually it was established by Yang Yun-song(楊筠松) in the period of Tang(唐) Dynasty. The time of Song(宋) and Yuan(元) Dynasty was a transiyional period which connected between Tang and Ming(明) Dynasty, and the theory of the Dragon was developed through Kanyumanxing(堪輿漫興) and Dilirenzixuzhi(地理人子須知) of the period of Ming. And the time from the Qing(淸) Dynasty to the has been its stagnant age without any proper adaptation to the rapidly changing society. It is necessary to research the Theory of the Dragon without pause and to establish its logic system.

7,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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