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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학 [THE EASTERN CLASSIC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INSTITUTE FOR EASTERN CLASSIC STUDIES]
  • ISSN
    1598-1452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5~2019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인문학 > 기타인문학
  • 십진분류
    KDC 910 DDC 950
제21집 (12건)
No

문학과 문화

1

景幾體歌의 불교문화 수용양상 연구

조평환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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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 초기에 불교문화를 수용하여 제작 가창한 <彌陀讚> <安養讚> <彌陀經讚> <西方歌> <騎牛 牧童歌> 등 다섯 편의 경기체가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연구의 절차는 먼저 護佛弘法의 방편의 일환으로 경 기체가를 지은 작가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으로 경기체가에 나타난 불교문화의 수용 양상에 대하여 고찰 하였다.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등 3편의 경기체가를 창작한 涵虛己和, <서방가>를 창작한 義相和尙(가칭), <기우목동가>를 창작한 末繼智訔 등 세 분은, 억불숭유 정책이 강행된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승려들로 불교 홍보 내지 수호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기에 척불 정책이 강행된 상황 속에서도 불교 포교를 위한 경기체가를 창작하여 불교 수호에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涵虛己和는 護佛論인 󰡔顯正 論)󰡕을 통해서 불교의 우수성을 융통성 있게 드러냄과 동시에 儒彿會通 사상까지 거론하여, 鄭道傳과는 격이 다른 방법으로 불교의 本旨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분으로서,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 涵虛己和가 창작한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과 義相和尙(가칭)이 제작 가창한 <서방가> 등 네 편은 淨土信仰의 主佛인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의 장엄 수승함을 찬양한 것이고, 末繼智訔이 창작한 <기우목동가> 1편은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은 見性 涅槃 내지 寂滅 解脫의 경지를 시화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찬> <기우목동가> 등 4편은 변격 형 경기체가이고, <서방가> 1편만 정격 형 경 기체가인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발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서방가>는 경기체가의 완성기에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義相和尙이 제작 가창한 <서방가>의 창작연대가 涵虛己和의 <미타찬> <안양찬> <미타경 찬>등과 末繼智訔의 <기우목동가>보다 앞서거나 또는 동시대일 것으로 간주하였다.
This paper investigated five Gyeonggi-chega, Mitachan, Anyangchan, Mitagyeongchan, Seobangga and Giwumokdongga which composed and sung by accepting the Buddhist culture in early Joseon period. First, the artists reflecting Buddhist culture on Gyeonggi-chega were examined and the acceptance of Buddhist culture observed in Gyeonggi-checa was analyzed. Ham Heo who created three Gyeonggi-chega, Mitachan, Anyangchan and Mitagyeongchan, Uisang Hwasang who composed Seobangga and Malgye Jieun who composed Giwumokdongga were monks in early Joseon period when Buddhism was rejected and Confucianism was revered in accordance with the national policy. Then, they seemed to have special interest on protecting Buddhism. In that reason, they could lead the activity to protect Buddhism by creating Gyeonggi-chega for spreading Buddhism even though the national policy to reject Buddhism and to revere Confucianism was implemented. In particular, Ham Heo acknowledged the superiority of Buddhism by his work "Hyeonjeongron", the theory advocating Buddhism, in the way to be suitable in the circumstances of his times. Furthermore, he discussed about the interconnectedness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He took the initiative to protect main objects of Buddhism in the approach which was not in the same level as Jeongdojeon. He was evaluated to leave significant influence on Buddhism in Korea. With respect to the acceptance of Buddhist culture, "Mitachan", "Anyangchan" and "Mitagyeongchan" by Ham Heo and "Seobangga" by Uisang Hwasang praised AAmitabha Buddha, the main Buddha in Jeongto Sinang(Worship of Amitabha) and solemnity and superiority of Sukkavati(Buddhist heaven). "Giwumokdongga" by Malgye Jieun illsutrated Nirvana and brightness recognized through Buddhist meditations in poetry.

6,700원

2

朴世堂 挽詩의 흐름과 표현 양상

주영아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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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詩는 죽음을 애도하는 시다.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고인의 사회적 명망을 추앙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시다. 만시는 조선시대에 개인 문집이 많이 성행하면서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을 중심으로 작품의 수효가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났다. 만시의 무분별한 성행은 실제 고인의 행적보다 고인의 일생을 더 높게 과장하거나 추앙하 는 병폐를 보이기도 하였다. 본고는 17세기 유학자 박세당이 지은 만시를 중심으로 그 표현 양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의 만시는 『西溪集』에 104명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으로 조선후기 만시에서 보여주는 허위적이고 과장된 것에 서 벗어나 가장 원초적인 죽음에 대하여 읊었으며, 많은 만시에서 보이는 상투성에서 벗어나고 있다. 박세당의 만시 104제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표현 양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죽음에 대 한 인식의 강도가 자신과는 거리가 먼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있으며, 사전적이고 일상적인 의미 이 외의 어떤 것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50대 이후에 쓰여진 만시는 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미련이 드러났으 며 살아남은 자의 애통함으로 확장되어 나타났다. 60대 이후 지어진 만시는 연이은 두 아들의 죽음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살아남은 사람의 비통함을 표현하기도 하였고, 좀더 나아가 죽음에 대하여 초월적 시선을 보이기도 하였다. 박세당의 만시 연구를 통해 만시 표현의 다양성을 찾고자 하였다. 고식적이고 상투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 다고는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전대에 나타났던 전형적인 만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만시의 내용이 다양 해졌다. 특히 고인의 업적을 추앙하기보다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교감, 남겨진 자의 통한 등 직접적이고 구체적 인 일상과 진솔한 감정이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Mansi(만시:condolatory poetry) is a poem of mourning death. In other words, it is a poem of revering the social reputation of the dead and of feeling sorry for death targeting specific character. Mansi was exponentially increased the number centering on people whose social status is high while an individual's collection of works was much prevalent in Joseon period. Due to prevalence of Mansi, the evil practice was ever shown, which exaggerates or reveres more highly than the actual track of the dead. This study aimed to examine its aspect centering on Mansi that was composed by Confucian scholar Park Se-dang in the 17th century. As for Mansi composed by Park Se-dang, there is a work that was written targeting 104 people in 『Seogyejip(서계집)』. Park Se-dang's Mansi recited on the most basic death with escaping from what was false and exaggerated, which is shown in Mansi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and is breaking from convention, which is indicated in many condolatory poems. As for Park Se-dang's Mansi, 104 Je can be known to be varied the expression aspect depending on sequence of time. In the early days, the intensity of recognition was being expressed as the most general meaning, which is distant from himself. Nothing was aimed to be expressed except dictionary and daily meaning. As for Mansi, which was written following his 50s, a sight of looking at the dead was indicated by being expanded into a living person's grief along with lingering attachment. Mansi, which was composed following his 60s, ever expressed a living person's deep sadness rather than a regret for the dead due to two sons consecutive death. Furthermore, the transcendental sight on death was ever shown.

7,600원

3

「京仁行歌」의 仁川 風景과 京城 家禽共進會

田在鎭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6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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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 4월 함봉필에 의해 쓰인 창가 「京仁行歌」를 대상으로 작성되었다. 함봉필은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 遂安郡 城洞의 면장 신분으로 學生 및 다른 地域 代表들과 함께 仁川에 도착 하고 나서, 仁川의 近代的 風景을 두루 살펴보고, 인천항에 입항해 있던 일본의 군함을 관람한다. 함봉필이 관 람한 관함 행사는 4月 17日부터 20日까지 총 4일 간 진행되었으며, 관람객은 총 4만 명이었다. 관함 후 함봉필은 경성의 경복궁에서 개최된 가금공진회에 참석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가금의 품종 과 그 특성에 대해 감탄하며, 농가마다 새로운 품종들이 널리 보급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출했다. 가금공진회를 관람하고 나서 그는 바로 옆 창경궁에 설치된 動物園, 植物園, 博物館 등을 견학하는데, 이는 근 대 시기에 國民國家의 統合을 위해 國家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제도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일제는 家禽共進會 의 관람자들을 무료로 이들 ‘三園’에 입장시켜 地方에서 올라온 鄕民들이 앞 다투어 日帝가 만들어낸 근대적 표상들을 직접 경험하게 유도하였다. 이상으로 「京仁行歌」를 통해 서술된 함봉필의 행적과 그의 시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일제 강점기 친일분자로서 함봉필의 他者化된 시각이다. 나름대로 황해도 수안군의 유지였던 咸鳳弼에 게서는 향토의 근대적 교육에 대한 관심 등을 엿볼 수 있지만, 「京仁行歌」 속 그의 發話 態度는 지극히 객관적 이면서도 민족적 감정이 排除된 냉정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둘째, 宮闕을 무단으로 훼손하고 개최된 共進會라는 行事의 성격이나, 動物園, 植物園 등으로 개조된 昌慶宮 의 모습에 대한 感懷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作品이 수록된 출처가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점에서 애초부터 그런 발화를 기대할 수 없기는 하나, 역으로 함봉필에게 그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존재 했다면 차라리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럼에도, 咸鳳弼은 아무런 감정의 노출 없이 식민지의 훼손된 宮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술하고 있는 것이다. 中世 時代의 풍경이 내면화와 수양의 대상이었다면, 近代 時代의 風景은 소비의 대상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소비의 대상에는 반드시 생산자의 목적이 매개되게 마련이다. 家禽共進會와 三園, 觀艦式 등은 日帝의 內鮮一 體와 國家⋅國民 통합을 위한 고도의 제국주의적 전략에서 구상된 이벤트이다. 그럼에도, 작자는 이 사실을 認 知하지 못한 채, 近代的 制度의 한 個人으로 매몰되어 이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이 점에서 「京仁行歌」는 제도 속에서 소비되는 風景과, 目的을 인지하지 못한 채 風景의 消費者로서 動員된 植民地 知識人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This essay was studied on 「kyunginhaengga(京仁行歌)」 written by Hambongpil in April, 1925. Hambongpil arrived at Incheon with students and the other local representations as a head chief of township-Seongdong, Suan district, Hwang-Hae province. And then, he saw through the modern scenery of Incheon, and was presented at the performance of Japanese warship which was put in at Incheon. The naval review hold from 17 to 20, April, and the number of participants was 40 thousand persons in all. Following the naval review, Hambongpil attend the exhibition of a domestic fowl which have opened at Kyungbok-palace. And then, he studied by inspection zoo, botanical gardens, museum which was near the Changkyung palace, and this complexity was a representative system that have been made for the unity of nation- state in modern period. Over there, the Japanese imperialism makes the tourist of the exhibition of a domestic fowl to see and experience the modern representations by the Japan. Thus far, we grasp the behavior and view point of Hambongpil based on the text of 「kyunginhaengga」, and can know the fact as follows. The first, there was a view point being made other people by oneself. Ham have a concern about spreading modern education at a locality as a public-spirited men of the Suan, Hwanghae province. But he take a cold and objective view point that is excluded a national sentiment. The second, there was no existence like a sentiments about the exhibition that was a event of disgrace to the Changkyung palace, and the scenery damaged and remolded into zoo, botanical garden without leave. Of course, because the 『chosen』 was a organ of government-general, we could not expect the speech like that. But conversely if ham had have a resentment about like this situation, he would rather not make a comment. Nevertheless he described a event that was open in the damaged palace of a colony with a disinterested attitude. In the middle age, the scenery was a subject of an inside view and cultivating of the mind. But in the modern ages, it was an object of consumption. And there was a purpose of producer at the object of consumption. The exhibition of a domestic fowl, three-park(zoo, museum, botanical garden) were contained a high-level imperialistic strategy for the unity of states, nations. In spite of, author did not know the intention, he producted this literary work as a person in modern system. For this reason, 「kyunginhaengga」 was a work that reflected the scenery being consumed in system, and the intellectual mobilized as a consumer without consciousness about a purpose.

8,200원

4

분단 이전 북한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의 유형과 <이성계 신화>로서의 인식체계

권도경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10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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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분단 이전 시기에 북한 지역에서 채록된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의 하위 유형을 이성계 조상⋅여진족 대결담과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으로 나누어서, 해당 텍스트의 전 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은 이성계 조상 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성계 당대에 서 비로소 마무리 되며, 여진족에 대한 대결 승리로 완결되는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은 <주몽신화>나 <왕건신화> 속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신화소들을 다양하 게 동원하고 있는 바, 여진족과의 궁극적인 대결 승리가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정당화 하는 논리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성계 신화>의 전설화 된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성계 신화>의 설화화 된 텍스트가 하필이면 여진족을 그 대결의 대상으로 하여 대결담의 형태로 형상화 되어 있는 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계 집단이 한반도 동북방의 전통적인 여진족 거주 지역에서 여진족과의 정치적 ⋅군사적 헤게모니 다툼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선 창업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역사적 맥 락을 통해 설명할 수 있었다. <이성계 신화>의 설화적 정착 형태로서의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에 내재된 향유층의 신화적 인식 체계는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하였다. 첫 번째는 이성계 조선 건국의 대외적인 정당성 확보이고, 두 번째는 조선 건국의 신화적 합리화이다. 이상과 같은 작업을 통해 북한 지역 전승 이성계⋅여진족 대결담의 유형을 분류하고 이성계 신화로서의 북한 지역민의 인식체계를 분석할 수 있었다.
This paper studied on the category of the confrontation legend between Yiseonggye(李成桂) and the Jurchen(女眞) before division of territory and it's pattern recognition as . The time background of the confrontation legend between Yiseonggye and the Jurchen is started from ancestor and is ended as the victory over the Jurchen in Yiseonggye's lifetime. This the confrontation legend between Yiseonggye and the Jurchen is composed by mythical motives seen typically in . In that the victory over the Jurchen is ended in the theory justifing Yiseonggye's foundation, it seems that the confrontation legend between Yiseonggye and the Jurchen has the characteristics that gets to be the legend. It based on the historical context that Yiseonggye group grew up through the political⋅military hegemony fight with the Jurchen in the tradithional residence and could found the Chosun Dynasty on this base. The mythical recognition system inhered in the confrontation legend between Yiseonggye and the Jurchen can be organized as two point. The first is the secure of the public justification. The second is the mythical raditionalization of founding the Chosun dynasty.

7,300원

5

서울 문묘입지의 풍수적 특징 분석

박정해, 한동수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13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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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 유교의 총본산인 문묘의 풍수입지구성을 규명해 보는 것으로 조선시대 풍수를 연구하는데 대 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한 기타 여러 문헌 속에는 문묘의 터 잡기에 대한 자료 가 매우 소략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문헌고찰과 함께 현장답사를 통해 문묘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전반 적인 입지풍수를 『地理五訣』의 관점에서 龍⋅穴⋅砂⋅水⋅向으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은 유교를 숭상한 국가로서 유학을 가르치고 교화하는 최고의 역할을 담당한 문묘는 그에 합당한 길지를 선택한다. 국가 중요건축물의 터 잡기에는 단순히 풍수적 길지선정에 머무르지 않고 합당한 논리와 상황구성 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의 교화와 교육을 책임진 문묘의 주산인 응봉은 우뚝하고 수려한 武曲 金星體의 형상으로 ‘官星이니 文章 , 顯達, 忠正, 貞然이다’ 라는 풍수서의 해석은 설립취지와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또한 성균관의 명륜당을 혈 처에 입지시키고 있어 명분론과 실리론이 상충하는 가운데에서도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는 성균관에 보다 실 질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중앙에 건설함으로 문묘 가 통치이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문묘의 사격은 穴을 환포하고 보호하는 역할에 충실한 모습으로 물길도 또한 둥글게 환포하여 음양교배를 통 한 생기 충만한 공간을 연출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완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풍미한 호순신의 지 리신법은 문묘의 좌향에는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문묘는 풍수적 논리에 의해 터 선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건축공간을 구성하 고 있다.
To study Fengshui of Joseon Dynasity, It is very important to research spatial composition of the Seoul Confucian shrine(文廟) and SungkyunKwan(成均館). Including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 朝實錄)』, many of old literatures only contain little information of making us known how people in Joseon Dynasty choosed site for Confucian shrine. So, in this study, feature of Fengshui for the Confucian shrine in Seoul will be dealt, by means of field survey, with the view of 『the Five factors(地理五訣)』 of Fengshui. As the Confucianism was placed high value by Joseon Dynasty, Seoul Confucian shrine which was a place for teaching Confucianism was considered to make sure its location. It is reliable that the important building of a nation must be considered not just Feng shui but also rational logic and situation. The epitaph of the Seoul Confucian shrine written by Byeon Gae-ryang(卞季良, 1369-1430) shows good reason and logic for it. A record of Fengshui book shows following; 'As a back mountain, Mt. Eung-bong(鷹峰) which has a huge and gorgeous shape, Moo-gock(武曲, the 6th star of the Big Dipper) and Keum-sung-che(金星體, a round shaped mountain) is a Gwan-sung(官星, a star that control government office). So it takes smart, distinct, loyal, and orderly.' This idea is precisely accord to the establishment intent of SungkyunKwan(成 均館) in Seoul Confucian shrine boundary which played a role of instructing the people in Joseon Dynasty. As the ultimate aim of Fengshui, to find Hyeol-cheo(穴處, a concentrated point of energy on the ground) is just under the Myeong-ryun-dang of SungkyunKwan, which means there was unacademic activity to cultivate talented personnel. And the building, Dae-sung-jeon(大成殿) that contains ancestral tablet for Confucius has been located central area, which means the Seoul Confucian shrine was the most critical factor for rule at that time. It contains all topographic factors along the axis from back to front mountain surround the Hyeol-cheo. Water runs following the axis of abscissas and surrounds the Hyeol-cheo. The water way of Seoul Confucian shrine is Kum-sung water(金星水) type that is the most ideal type, and it has sufficient shape for energetic space with balance of yin and yang. This shows that the Confucianists regarded Seoul Confucian shrine as an divine area and institute many Fengshui factors. However, it looks that the Ho-Sun-Sin`s(胡舜申) Ji-Ri-Sin-Beob(地理新法) was not applied to Seoul Confucian shrine. According to the result of study on Fengshui of SungkyunKwan and Seoul Confucian shrine, Seoul Confucian shrine has been applied with Fengshui for its site selection and architectural space composition. Therefore, Fengshui was a method to make the most rational space harmonizing with nature at the era and it affected confucianism.

8,800원

역사와 철학

6

同位元素 分析을 이용한 新石器時代의 食生活과 貝塚 遺蹟의 占有 季節性 硏究

安德任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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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식생활은 문헌기록, 음식물 유체, 음식물의 획득⋅가공⋅소비와 관련된 도구, 민족지적 유추 등 직⋅간접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식생활과 관련된 문헌기록은 三韓時代부터 나타나며 이러한 문헌기 록은 과거의 식생활과 전통 식생활문화의 확립과정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선사시 대의 식생활은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본 연구에서는 신석기시대 남해안지역의 東三洞貝塚⋅大浦貝塚⋅安島貝塚과 서해안지역의 古南里貝塚⋅大竹里 貝塚에서 출토된 인골에 대한 동위원소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신석기시대 두 지역의 식생활과 유적 점유 계절 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남해안지역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n=11)의 탄소동위원소(δ13C) 값은 -12.7~-14.8‰ (-13.4±0.6‰), 질소동위원소(δ15N) 값은 14.4~18.1‰(15.7±1‰)에 분포하며, 서해안지역 유적 인골(n=2)은 δ13C=-16.6 ±1.7‰, δ15N=9.9±1.1‰을 보여 남해안지역 인골의 동위원소 값이 뚜렷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 다. 남해안지역 인골의 동위원소 값에서 해양자원의 의존도를 결정하는 δ15N이 특히 높은 것으로 미루어 식 생활에서 어패류를 비롯한 해양자원의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하여 서해안지역 패총의 경우 δ13C와 δ15N 값이 모두 낮으므로 육상자원 특히 C3식물의 의존도가 높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러한 동위원소 자료로 미루어 당시 식생활에 있어서 지역적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위원소 값과 유적에서 발견된 유구, 유물 등의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 남해안지역 패총의 사람들은 패총지역에 연중 머물 렀을 것으로 추정되나 서해안지역 패총의 사람은 계절적으로 또는 단기간에 걸쳐 패총지역을 방문하였을 것 으로 판단된다.
This study examines the Neolithic diet and seasonality of the southern and western coastal regions, Korea, based on carbon and nitrogen stable isotope values of human bones. Human bone samples from three (Tongsamdong, Daepo and Ando) shell middens in the southern region and two (Daejukri and Konamri) in the western region were examined. Individuals (n=11) from the southern coastal region show significantly high isotope values(δ13C=-13.4±0.6‰, δ15N=15.7±1‰), indicating that they could have been heavily reliant on marine resources. On the other hand, individuals(n=2) from the western coastal region have relatively low δ13C (-16.6±1.7‰) and δ15N (9.9±1.1‰) values, suggesting that they could have highly exploited terrestial resources, especially C3 plants. Thus, the carbon and nitrogen stable isotope values of the individuals from two regions indicate that there were regional dietary differences at that time. Based on the isotope values and archaeological evidence such as artefacts and features, it can be inferred that the individuals from the shell middens in the southern coastal region could have occupied on the sites year-round. However, the individuals from the shell middens in the western coastal region could have occupied on the sites for short periods.

7,600원

7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왕릉에서 찾을 수 있는 황금비와 금강비

이광연, 김은미, 이유호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21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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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능은 봉분 주위에 난간석과 난간가로대, 병풍석을 세웠고, 남쪽으로 상석과 문석인을 세웠다. 조 선시대에도 이런 구조는 비슷했으며 다만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보다 더 많은 석 조각을 세웠다. 그런데 고려 시대의 능은 대부분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으며 개축된 것도 그 당시의 능 그대로 개축되었는 지 의심스럽다. 반면 조선시대의 능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능은 모두 황금비와 금강비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 대의 능은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측량이 어렵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 구한 여러 가지 부분의 비율은 1.618:1이 라는 황금비와 1.414:1이라는 금강비를 정확하게 만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사된 비율은 모두가 황금비와 금강비의 근삿값이다. 고려시대의 왕릉인 칠릉떼와 조선시대의 왕릉인 건원릉과 제릉에서 우리는 황금비와 금강비가 의도적으로 사 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우리 조상들은 무리수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리수를 왕릉의 건축에 활용하고 무량수전이나 석굴암 등에 활용하여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 던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의 수학 실력은 대단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ombs during Goryeo Dynasty, which was one of ancient Korea’s greatest periods, used stone walls, stone screens, engravings and stone images in the form of a civil officials were displayed at the entrance royal tomb all with the purpose of honoring their fallen king. This way was also similar construction during the Chosun Dynasty but much more intricate and extravagant. However, the tomb from the Goryeo Dynasty has been extremely damaged and it has become really hard to recognize, it stays hard to recognize even after pieces have been recovered. On the other hand, the tombs are from Chosun Dynasty have all been kept well. The common part between the Goryeo and early Chosun generations is that tomb stones were largely created from gold and geumgang ratio. Anyway, it is really difficult to measure the tomb from the Goryeo Dynasty because of all the damage. So, it at least does not satisfies with Golden ratio(1.618:1) or Geumgang ratio(1.414:1) anymore however, the ratios from what could be measured had similar ratio to those perfect ratios. We got to know about construction of all seventh tombs from Goryeo dynasty and two tombs from Chosun dynasty purposely used golden, geumgang ratio and also we can assume that our ancestors used mathematics from later Goryeo era to early Chosun. We also can tell our ancestors were so good at mathematics through all proves about using mathematical method in construction of tombs and our beautiful cultural properties “Mooryangsujeon” or “Seokgu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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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伊川 敎育論에 관한 考察

이천일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253-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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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북송대 신유학자인 이천의 교육론에 대해 그의 대표적 이론인 理 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교육목 적론과 교육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천은 당시 신유학의 과제였던 존재원리이면서 신유학 적 사유체계의 준거이자 근간인 理를 체계화하였고, 이와 더불어 당시 신유학이 도가와 불가에 비해 상대적으 로 열세였던 인간이 가진 마음의 문제를 주체적이고 자각적인 태도로 접근하여 마음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함 으로써, 유학에서 존재원리로서의 理와 함께 인간의 마음을 신유학에서의 또 하나의 핵심적 주제로 부각시키 는 역할을 하였다. 이천의 교육론은 理를 중심으로 크게 교육목적론과 교육방법론으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이천 교육론의 목적 은 선진유학의 전통과 동일하게 ‘성인됨’에 두었다. 성인은 당시의 인간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향해 다채로운 모습으로 인간 생활을 살피는 존재이면서, 천리를 간직한 완전한 인간상이다. 동시에 凡人들과는 현 격하게 다른 지극히 선한 인격을 가진 인격의 化身으로서 상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천이 제시하고 있는 교육 목적으로서의 성인이 갖는 중요한 점은 그것이 정해진 맑은 기를 부여받아 태어나는 성인이 아니라 누구나 배움을 통해서 품부받은 탁한 기질을 선하게 전환시켜 성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 즉 ‘열린 성인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천은 사람이 배움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성인이 되는 배움의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 였다. 마음을 바로잡는(正其心) 함양방법으로서의 居敬과 본성을 기르는(養其性) 진학공부로서의 격물궁리 혹은 格物致知가 그것으로, 이를 통해 자신에게 품부 받은 기질을 선하게 변화시켜 결국 만사만물을 활연히 관통하여 天理를 깨달아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이천이 체계화한 교육론이라 할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theory of education and teaching methodology based on li-system which was studied by Neo-confucianist 伊川(Yi-Chuan)in Northern-Song university. 伊川(Yi-Chuan) systematized li- system which was a principle of existence and a backbone of Neo-Confucian thinking system. He also systematized mind logically by approaching the human mind problem subjectively which Neo-confucianism was relatively inferior to the Taoism and Buddhism at that time. He played an important role to bring not only principle of existence but also human mind into relief in Neo-confucianism. 伊川(Yi-Chuan)’s Education was mainly divided into two categories based on li-system that were education aims and Training methodology. The purpose of his education theory was “being a saint” like the tradition of Advanced Confucianism. Saint is a human being who is checking the life of people in colorful ways in the highest place, and he is also a complete human having the law of nature. At time same time, a saint is an extremely good natured human being that could be presented as a typical model which is different from ordinary people. The importance of a saint as his purpose of education is that he proved a person who has a certain given set of pure energy is not a saint, but anyone could be a saint by converting murky temperament into pure one through learning. In other word, he brought ‘ the conversion of Opened Saint’. He thought that people could be a saint through learning, and he divided learning method into two things. They were 居敬(JuJing) which was the way to cultivate the mind to catch and 格物 窮理(gewuqiongli) which was a pathways to study that fosters nature. He thought that through those, people could change their innate temperament into good one, and it could lead themselves to the state of a saint by penetrating all work and things of the world extensively. This was the theory of education he system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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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신목신앙에 대한 역철학적 고찰

이선행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289-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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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신목신앙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단군신화의 신단수와 고구려 동맹제의의 목수신 그리고 마한의 소 도신앙의 솟대와 신라의 수림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공통적인 요소는 하늘의 뜻이 이 신목을 통해 인간세상 에 내려온다는 것과 인간의 바른 정사를 위해 기도와 제사를 하는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신목을 통해 내려오 는 하늘의 뜻은 홍익인간으로 대표되고, 인간세상에 대한 바른 정사는 재세이화와 광명이세 등으로 드러난다. 『주역』에서는 손괘(巽卦)를 나무와 바람 등으로 상징하고 있는데, 『주역』의 나무로 상징된 손괘가 들어 있는 괘들은 성인이 밝힌 천도⋅신도를 군자의 도덕성으로 주체화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바람 으로 상징된 괘들은 천도⋅신도를 자각하고 진덕수업하는 군자가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원리를 중심으로 밝 히고 있다. 한국 고대 신목신앙의 내용도 또한 『주역』의 손괘가 의미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홍익인간의 의미는 「풍뢰익괘」로 대표할 수 있고, 웅녀의 신단수아래에서의 기원은 「풍산점괘」의 원리로 설명되어질 수 있으며, 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은 「수풍정괘」의 원리로 풀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천도⋅신도를 자각하는 과정은 제의에서 행해지는 제사원리로 상징되고 있는데, 제사원리를 담고 있는 「화풍정괘」⋅「풍지관괘」⋅「풍수환괘」 등을 통해 풀이할 수 있다. 천도⋅신도를 행하는 것을 표상하는 괘들 이 바로 손괘를 바람으로 상징한 괘들이며, 나아가 풍류도로 표상되는 고유사상의 내용도 바람으로 상징된 손 괘를 포함한 괘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바로 풍류도는 천도를 자각하여 덕으로써 세상을 교화하는 것을 내 용으로 하는 도덕성의 실천원리인 것이다.
What we could consider as ancient Korean beliefs in sacred trees are found from Shindansoo(the sacred tree) of Dangun mythology, Moksooshin(the wooden statue of Lady Yuwha) at the Ritual of Dongmaeng of the ancient Korean kingdom of Goguryo and Sottae(the pole of prayer) of the belief in Sodo(the sacred district) of the ancient Korean kingdom Mahan, Soorim(the sacred forest) of the ancient Korean Kingdom Shilla. The common point among them is that the divine will of the Heaven is handed down to the human world through the sacred trees and they were the targets of prayers and rituals for righteous human political affairs. The divine will from the Heaven is represented as Hong-ick-in-gan(Benefit all mankind) and the righteous political affairs in the human world are realized as Jae-seh-yi-hwa(Rule the world and enlighten mankind) and Kwang-myoung-yi-seh(Rule the world with the light of truth). Xùn gua in the Book of Changes symbolizes a tree or wind. The trigrams including Xùn gua symbolizing trees mainly focus on identifying the way of Heaven or the way of God revealed by a saint with a Goonja (the wise man)'s morality. The trigrams including Xùn gua symbolizing wind clarify the principles for Goonja realizing the way of Heaven or the way of God and cultivating his virtue to rule over the world . The ancient Korean beliefs in sacred trees are also interpreted as what Xùn gua in the Book of Changes means. Hong-ick-in-gan(Benefit all mankind) can be represented as Fēng-léi-yì gua, the prayer of Ungnyo(the woman of Bear) under the Shindansoo can be explained as Fēng-shān-jiàn gua and Najeong(The Well of Shilla) where Hyukguseh was born can be interpreted as Shuǐ-fēng-jǐng gua. Furthermore, the process of realizing the way of Heaven or the way of God can be explained by Huǒ-fēng -dǐng gua, Fēng-de-guān gua and Fēng-shuǐ-huàn gua containing the principles of rites practiced in the rituals.The trigrams symbolizing to practice the way of Heaven or the way of God represent the Xùn quas meaning wind, in addition, the indigenous Korean thought represented by Pungryudo(The way of wind and flow) can be inferred through this. The Pungryudo is the principle of practicing the morality to recognize the way of Heaven and edify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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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解釋에 나타난 茶山 丁若鏞 經學思想의 特性

김영호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327-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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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다산 『논어고금주』에서 해석의 정수인 性, 仁, 恕에 대한 견해와 주자 해석과의 대비를 통하여 다 산 경학사상의 특성을 파악해 보았다. 性에 대해 다산은 성을 嗜好로서 파악하고 이를 形軀之嗜好와 靈知之嗜好로 분류한다. 그리고 人物性에 대해 서는 기질지성은 人物이 같이 얻은 바이지만 도의지성일 것 같으면 오직 사람만이 소유한 것으로 금수 이하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先儒의 本然之性은 人物이 다 같으나 기질지성은 사람과 짐승이 다르다는 설에 반 론을 제기한다. 다산은 仁을 治心養性과 行己修身의 근본으로 보고,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향한 사 랑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이 그 본분을 극진히 하는 것으로 보고, 이는 인륜의 완성된 덕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인은 결코 心德이나 天理가 아니고 人德이라 규정하고, 인은 行事에서 이루어지며 결코 마음 에 있는 이치가 아니라고 한다. 충서에 대해 다산은 일이관지의 ‘一’은 바로 恕이고 恕는 근본이 되고 행하는 것은 忠으로 이것은 대대적인 것 이 아니고, 忠을 실행할 때 恕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다산은 恕를 推恕와 容恕로 구분한다. 다산의 논어해석에 나타난 경학의 특성으로는 공문의 원의(수사지구관) 회복 역설, 실천의 중시, 주자학에 비 판적 태도를 견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 평등의식을 강조, 경학과 경세학이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In this study, I tried to look into the characteristics of Dasan's idea of GyeongHak in comparison with Chu Hsi's translation of Seong (性), In (仁) and Seo (恕) of which translation was the essence of Dasan's translation of the Analects in his Annotation of the Analects. He grasped Seong as a sign that was sorted into the Sign of Body and the Sign of Enlightening. Regarding the characteristics of human and object, he argued that character was given to both human and object but justice was owned only by human so it could not be gained by any other than human. As a result, he raised an objection against the idea argued by older scholars that the natural character was same in both human and object while character was different between human and animal. He thought that In was the essence of Raising Good Character by Controlling Mind and Training by Performing; it was made between two people; it was the love toward the others; the two people should value their duties between them; so it was the completed virtue of human ethics. He defined especially In as neither mind-virtue nor heaven's principle but human's virtue, based on which he claimed that In was made by performing work and not the principle located in the mind at all. Regarding ChungSeo (忠恕: doing best for yourself and being tolerant to others), he argued that the 'Il' of IlEeeGwanJi was Seo that was the base for ChungSeo that could be implemented by Chung; so that it was not an extensive one and it had existed since long ago already when you performing Chung. In addition, he sorted Seo into ChuSeo (推恕: modest attitude) and YongSeo (容恕: forgiveness).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Hak shown on his translation of the Analects include emphasis on restoring of the original meaning of official letters (SuSaJiGuGwan), valuing of performance, critical attitude on Neo -Confucianism, emphasis on equality sense, and grasping of GyeongHak and GyeongSeHak on an extended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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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과학의 자생적 성장 : 한국 전통 정치사상의 현재화를 중심으로

안외순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제21집 2011.10 pp.353-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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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현재적 메시지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전통 정치사상 연구는 이 점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때문에 이 논문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과학의 자생적 발전을 위해 한국 전통 정치사상의 현재화(現在化, the present orientation)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목적이다. 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 논문에서는 먼저, 지금까지 진행된 그것의 당대화를 위한 기존의 연구사적 노력들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이전까지의 정치사상 혹은 지적유산들을 당대화하려는 노력으로서 근대 이전의 것으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근대로의 이행기의 성과로는 유길준과 안확의 노력을, 현대 이후의 노력에 대해서는 근대 이전의 전통 한국정치사상에 대한 현대적 연구방법론적 고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어서 현 시점에서 한국 전통 정치사상을 현재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총론적으로는 현대 정치사상의 보편적 문제의식과 전통 정치사상의 공유 및 소통작업이 필요하다는 점, 그러나 이는 반드시 전통 사상의 당대 역사적, 사상사적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 가능하다는 점, 전통 정치사상 연구의 결과와 교훈을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문제의 대안 혹은 처방으로 제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중심으로 논하였다. 각론적 논의로는 고금을 통해 정치현상에 보편적인 핵심 개념, 주요 정치사상가들, 군주나 재상 등 주요 정치주체의 인식, 경연과 서연, 향교, 성균관, 서원 등 정치주체들의 정치교육, 유교적 법치와 예치 등 정치수단, 여말선초를 분수령으로 하는 유교와 불교의 정치이념적 위상과 그 역전상황에서의 긴장, 대립, 공존의 논리에 대한 연구 등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This thesis aims to seek measures to bring the Korean traditional politic thoughts into the present ultimately in order for the Korean social science to have self-sustainable development. The eventual purpose of examining the Korean traditional politic thoughts is to obtain a present-oriented message - no matter what form it takes - from the ideas. However, studies on these political thoughts that have been conducted up to now have not shown satisfactory results. To meet the purpose of this paper, I researched the existing historiographic efforts to trace back related studies; for the efforts made in the pre-modern time to trace back the past political thoughts or intellectual heritage, The Chronicles of the Three States of Kim Bu-Shik was examined; for the transition era into the modern times, Yoo Gil-Jun and Ahn Hwak's efforts were studied; and, for the efforts made until today, the modern-style research methodological arguments toward the traditional Korean political thoughts of the pre-modern era were researched. And the measures to apply the Korean traditional political thoughts in the present times were, then, provided into two sections - introduction and itemized discussion. The introduction mainly discussed the necessity of common critical minds toward the modern political thoughts, of sharing and communication works of traditional political ideologies - yet with the point that these should be possible under the profound understanding about the historical and ideological context of the traditional thoughts - and of efforts to offer the results and lessons of the studies on traditional political thoughts as alternatives or measures to solve the problems of reality in a more active way. The itemized discussion provided the necessity of studies on the following matters: core concepts reflected generally in the political phenomena now and then, the main political thinkers, the recognition of main political subjects including kings and prime ministers, their political education through Kyungyon and Seoyon (royal education especially for those soon to be kings), Hyanggyo (national Confucian high schools to teach local students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Sungkyunkwan (the highest-level education organization in the late Koryo and early Joseon Dynasty periods), Seowon (private Confucian high schools to teach local students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etc., political measures such as Confucian governing law and manners, the political ideological status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with the late Koryo and early Joseon Dynasty periods as turning point, and the logic of tension, conflict, and co-existence during the tran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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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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