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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교육 [The History Education Review]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역사와 교육학회 [The History Education Association]
  • pISSN
    2093-5021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0 ~ 2025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사회과학 > 교육학
  • 십진분류
    KDC 374 DDC 370
제11집 (9건)
No

연구논문

1

慶順公主와 敬惠公主의 생애와 비구니 출가

황인규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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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0원

본 논문은 조선의 공주인 태조의 딸 경순공주와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비구니 출가를 다룬 연구이다. 왕후가 비구니로 출가한 사례는 단종의 비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하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폐비되어 출가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왕후가 비구니로 출가한 경우는 없다고 하겠다. 이전의 시기인 고려시대에도 없었고 고대의 시기에 법흥왕과 진흥왕의 왕비가 비구니로 출가하였다. 공주가 비구니로 출가한 인물은 조선시대 이전의 시기에는 없었다. 조선시대에 태조의 딸 경순공주와 문종의 딸 경혜공주가 비구니로 출가하여 한국 역사상 공주가 출가한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주목된다. 경순공주와 경혜공주가 비구니로 출가하게 된 것은 정변으로 부군을 잃고 출가한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고대나 고려시대이래의 불교신행의 발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두 공주의 비구니로 출가한 배경과 그 의미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두 공주의 비구니 출가는 실록에 나타나고 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러한 비구니 출가사실을 중요하게 간주하였고 공주의 가계와 생애 및 비구니 출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This paper is to explore Buddhist belief in the early Joseon Dynasty by examining the document that describes the women of a royal family, especially a princess born of king’s concubine, who became Buddhist nuns. Princess Gyeongsun, daughter of King Taejo and Princess Gyeonghye, daughter of King Munjong became Buddhist nuns after they lost their husbands to political upheaval. They became Buddhist nuns who were only Buddhist in Korea history. They was lost the husband in political change and became Buddhist nuns. In fact, It was because of Buddhist belief. and so this paper aims to explore Women in the Royal Family Tree and life, entering the Buddhist priesthood and Buddhist actvities.

2

일제의 국권강점에 관한 대한제국 집권세력의 대응과 그 한계

한철호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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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병탄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를 맞이해서 그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작업은 한국근현대사의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고 현재 한일 양국의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일제의 한국강점 원인은 명백하게 일본의 무력 침략에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최고통수권자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이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독립을 수호하지 못한 책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대한제국의 집권세력이 일본의 강점에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가를 밝혀보는 데 초점을 맞춰보았다. 고종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외압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일환으로 황제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전제정치를 추진하였다. 근황세력을 적극 등용함과 동시에 궁내부․내장원 등을 중심으로 통치기구를 이원화하여 파행적으로 운영했던 것이다. 그 결과 민의의 수렴과 동의를 거쳐 국민을 통합․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황제의 정치기반을 축소시키고 국민의 지지기반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집권세력은 상공업을 육성하고 황실재정을 확대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고 물적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황실재정의 확대로 정부재정은 축소되었고, 그나마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탓에 식산흥업정책도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못함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집권세력은 근대식 무기를 보유하고 친위대․진위대를 설치하고 원수부를 두어 군사조직을 총괄하는 등 군사력을 증강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국권 수호의 근간인 징병제를 통한 상비군 설치는 재정부족뿐만 아니라 지배질서의 동요를 두려워 한 집권세력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하였다. 더욱이 러․일 양국의 외압이 겹치면서 군대는 자주 국방을 도모하기보다 국내 치안 유지 및 민란에 대처할 수 있을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집권세력은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용해서 중립외교를 펼치는 등 독립을 보존․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위력이 뒷받침되지 않은데다가 외교력의 부재 혹은 해외주재 공사관의 파행적 운영으로 국제정세를 올바로 파악하지도 못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묵인한 구미 열강에 중재와 원조를 요청하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한 정책은 반일적․자주적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모두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일제의 한국강점 원인은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총체적 부실과 위기관리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한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황제권과 황실의 강화․유지에 치중한 나머지 국권과 민권확대를 통한 국민통합과 부국강병을 추진하지 못했던 집권세력의 失政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日本の「韓國倂呑」の100年になる意味のある年を迎えてその原因を冷徹に分析する作業は、韓國の近現代史の性格を正しく把握し現在の韓日兩國の當面課題を解決するにおいて重要な手がかりを提供してくれる。日帝の韓國强占の原因は明らかに日本の武力侵略にあった。しかし大韓帝國の最高統帥權者としての高宗をはじめとする執權勢力が急變する國內外の政勢に能動的に対応して獨立を保持できなかった責任も見逃してはならない。そこで本稿においては大韓帝國の執權勢力が日本の强占にどのように對應し、またその限界は何であったのを明らかにすることに焦點をおく。 高宗は日本をはじめとする列强の外壓に迅速に対応するために皇帝にすべての權力が集中された强力な專制政治を推進した。勤皇勢力を積極的に登用すると同時に、宮內府․內藏院などを中心に統治機構を二元化して跛行的に運營した。その結果、民意の收斂と同意をへて國民を統合․結集することのできる政治制度の改革は失敗することによってむしろ皇帝の政治基盤を縮小させ、また國民の支持基盤さえも喪失してしまった。また執權勢力は商工業を育成し皇室財政の擴大に主力することによって部分的には列强の利權侵奪を防ぎながら物的な基盤を整える成果をあげた。しかし皇室財政の擴大によって政府財政はむしろ縮小され、また財政の非效率的な管理によって殖産興業政策も體系的に推進できず實效をあげ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執權勢力は近代式の武器を保有して親衛隊․鎭衛隊を設置し、また元帥府をおき軍事組織を總括するなど軍事力を增强するのに力を注いだ。しかし國權守護の根幹である徵兵制を通じた常備軍の設置は財政の不足だけではなく、支配秩序の動搖を怖がった執權勢力の反對によって実行できなかった。さらにロシアと日本の外壓が重なることによって軍隊は自主國防より國內の治安維持および民亂に對處する組織に轉落してしまった。 執權勢力は列强の間の勢力均衡を利用して中立外交を展開するなど獨立を保存․維持しようと努力した。しかし自衛の力が充分ではない状況のなかで外交力の不在あるいは海外駐在の公使館の跛行的な運營によって國際情勢を正しく把握す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したがって日帝の韓國侵略を黙認した歐米列强に仲裁と援助を要請し、「乙巳勒約」の無效を呼訴した政策は反日的․自主的なものとして評價されることもあるが、これらのすべては失敗に歸結されるしかなかった。 このように日帝の韓國强占の原因は高宗をはじめとする執權勢力の總體的な不實と危機管理の能力の不足から起因した點も見逃してはならない。 皇帝權と皇室の强化․維持に力を注いだがゆえに國權と民權の擴大を通じた國民統合と富國强兵を推進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執權勢力の失政は日帝が韓國を强占しこれを正當化する口実を提供したのである。

3

수원지방 기독교계의 3ㆍ1운동과 이후 동향

김권정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5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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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원

이 논문은 수원지방 기독교인들의 3ㆍ1운동과 이후 동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 기독교인들의 3ㆍ1운동에 참여 배경에는 3ㆍ1운동 이전 수원지방의 교회조직 활성화와 기독교 학교의 탄탄한 조직력을 들 수 있다. 수원지방의 기독교 3ㆍ1운동은 감리교회들이 주도했는데, 이 교회들은 당시 수원지방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조직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 1903년에 정식 개교한 삼일학교는 일제 강점 하에서도 민족교육과 인재양성을 실시하였고, 여기서 성장한 이들이 3ㆍ1운동과 이후 수원지방 민족운동을 이끄는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둘째, 수원지방 기독교인들의 3ㆍ1운동은 이전부터 민족운동에 참여해 오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었다. 3ㆍ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주로 교회 책임자로 전도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항일사상을 고취하고 동지의 규합을 통해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시도하던 인물들이었다. 1910년대 기독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셋째, 수원지방 기독교인들의 3ㆍ1운동이 도시 중심보다 농촌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선교사의 직접 관리를 받던 수원읍내 교회보다 한국인 교역자들이 직접 목회하던 곳에서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현저했다. 이것은 당시 농촌지역의 교회가 민중의 현실 속에 철저히 뿌리박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일로, 교회를 지도하는 교회 교역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음을 알 수 있다. 넷째, 3ㆍ1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수원지방의 민족운동에는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의 피해가 다른 여타의 지역에 비해 컸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저항이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3ㆍ1운동 이후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운동을 모색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March 1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alization) Movement of Christians in the Suwon area. First, the reason for the participation of Christians in the March 1 Movement was due to the high activity of church organizations in the Suwon area, as well as the tight organization of Christian schools. The Christian March 1 Movement in the Suwon area was led by the Methodist Church, and they procured a religious organization that included the entire Suwon area. Furthermore, the Samil School, which was officially opened in 1903, conducted folk education and fostered young talents even under Japanese Occupation, and those who were educated here later became leaders of the March 1 Movement and the national movements in the Suwon area. Second, the March 1 Movement of Christians in the Suwon area was ensued as an extension from national movements that they were involved in the past. Christians participating in the March 1 Movement usually conducted missionary work as church supervisors, while also heightening the sense of anti-Japanese sentiment, while continuously attempting and planning to national movements through unity of comrades. In the 1910s, movements were unfolded focusing on Christian churches and schools to heighten a sense of national sentiment based on Christianity. Third, the March 1 Movement of Christians in Suwon was more active in farming areas rather than in the city. Compared to the churches in the city area of Suwon that received direct administration by missionaries, Christian participation was much more considerable where there was pastoral activities by religious workers of Korean nationality. This would have been impossible if churches in the rural areas of the time were not completely and thoroughly enrooted in the lives of the people, and it shows that the church workers in charge of the churches and the laity leaders had played a major role. Fourth, it is evident that even after the March 1 Movement, churches, Christian schools and Christians played important roles in national movements in the Suwon area. The fact that Christians inflicted more losses and damages compared to other areas represent that their resistance was much stronger. After the March 1 Movement, new national movements were sought after focusing mainly on Christian youths, and during this process, they also assertively participated in social mov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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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조선족 동포의 인구 문제

김인호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8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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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0원

중국내 조선족 인구는 지난 10년 동안 크게 인구가 감소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보이지 않는 해외 자산이 급감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며, 앞으로 한국경제의 대외적 확산이나 한국 사회의 세계화 과정에서 중요한 지원세력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를 통해서 밝힌 국내 조선족 인구의 사회적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조선족 인구는 중국내 조선족 인구의 정체와는 달리 급증하며, 특히 한국 내 전체 결혼 중에서 조선족과의 결혼이 30% 이상을 점한다. 또한 결혼 후 자녀의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둘째, 국내에 취업한 조선족의 학력이 전반적으로 하향 평준화하거나 직업도 고급 전문직보다는 서비스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만큼 취업선이 다변화되거나 고급화되지 못하다. 셋째, 거주지역이 경기와 서울에 집중되고, 공단 지역인 부산ㆍ대구ㆍ울산에는 거의 거주하지 않는다. 즉, 조선족 기능 인력이 지방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넷째, 국내 거주 조선족의 평균연령이 크게 상승하고 있다. 이전에는 고등학교 학력 수준의 20대 남성과 여성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30대 남성과 30대 여성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조선족 처우에 관한 몇 가지 정책적 개선사항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주 연변 지역 등 현지에서 직접 공장을 설립하고 거기서 직접 기능 인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거시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국내 기능직 혹은 기술직 취업에 기여할 실업 교육 기관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국내에 진출한 조선족이 한국인과 효과적으로 경쟁하는데 기여할 각종 기술과 기능의 함양과 표준화의 기회를 부여한다. 특히 지방자치체에 의한 조선족 취업기구와 기능 실습 교육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결혼에서 조선족과 결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조선족 중 가임기 혹은 결혼기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여 결혼과 자녀 양육에 필요한 복지 시설을 증설함으로써 조선족 2세 혹은 젊은 남녀가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요컨대, 조선족이 한국사회의 잠재적 지원세력이라는 인식에서 한발 나아가 미래 또 다른 모습의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다질 필요가 있다. 그저 맹목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어떻게 그들의 정체성을 한국인의 그것으로 바꿀 것인가? 혹은 그들에게 무엇을 던져 줄 것인가? 하는 자세보다는 그들이 우리 삶에게 얼마나 소중한 역할과 기여를 하고 있는지 먼저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선결조건 위에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은 욕망이 넘치도록 철저한 기술기능교육과 결혼 양육 방면에서의 한국인에 버금가는 지원 등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들 속에서 사라지는 자아 정체성의 회복과 함께 조국과의 연대하려는 의식이 촉발되고, 또 다른 한국인으로 자신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는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The aim of this Research is to clarify the demographic characteristic of ethnic Koreans living in Korea(chosun tribe). This study may be contribute to welfare of ethnic Koreans and to raising his Korean identity. Population of ethnic Korean population decreased greatly in China in the last 10 years. This phenomenon says to decrease invisible assets abroad in Korea. And It will interfere with the globalization of the Korea economy. Also It means that lose supporter in the process of globalization. The following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local ethnic Koreans. First, ethnic Koreans are increasing in Korea. This phenomenon is opposite to ethnic Koreans marrige reduction in China. Especially more than 30% of all marriages in Korea carried out with ethnic Koreans. After this marriage increased, too many children were born between korean and ethnic Koreans. Second, education level of employed domestic ethnic Koreans were leveled down. There is no professional jobs. Most people are employed in the service. Employment structure of ethnic Koreans seems to look really simple. Third, the mostly residential areas of ethnic Koreans were concentrated in Gyeonggi Province and Seoul. they did not live a little in local Industrial Complex as Busan, Daegu and Ulsan. Also ethnic Koreans technician did not live in the rural provinces. Fourth, the average age of ethnic Koreans have been rising dramatically. Previously, the high school level of education were 20s' men and women. But now, 30s’ men and 30s’ women group has increased significantly. In short, ethnic Koreans is the potential support for Korea society. Furthermore, in the future, they will be recognized as another Korean member. Blind nationalism is very danger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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汉代人的灵魂观与死后世界观

具圣姬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11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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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인간의 혼백과 귀신 및 사후세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어떠한 형식으로든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대부분의 종교신앙의 기본적인 전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후의 존재는 어떠한 형태일까? 商代 갑골문에서도 영혼이나 혼백을 의미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이 상대 혹은 상대 이전의 시대에는 영혼관념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순장을 행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만약 상대인들이 신하나 노예들의 사후존재를 믿지 않았다면 그들을 순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한시대의 황실귀족ㆍ관료ㆍ부자와 일반평민들 대부분은 인간사후의 영혼불멸을 강하게 믿는 선진시대의 예제를 중요하게 여겨 死者에 대한 장례와 제사 등의 여러 가지 활동들에 대해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때문에 한대에도 더욱 장엄하고 복잡한 예의제도와 풍속이 생기게 된다. 또한 한대의 영혼불멸관은 상당한 발전을 거듭하여 한대 전반에 걸쳐 음양오행학과 참위미신, 신선방술 등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한대 말에는 신선방술의 기초 위에 마침내 도교가 성립되었다. 한대 영혼불멸관과 사후세계관의 심화는 바로 당시 후장풍속을 더욱 성행하게 한 토양과 기초가 된다. 한대는 중국역사상 후장이 가장 발달한 시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후장이 상당히 유행했던 시기이며, 이러한 한대의 후장풍속의 형성과 발전은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의 구체화 즉 영혼불멸관에 대한 강한 믿음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한대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이전시대에 비해 매우 깊고 분명해 졌다고 할 수 있다. 한대 민간에서 유행한 풍속을 보면, 대부분의 한대인들은 ‘鬼神’을 맹신하였으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거의 귀신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할 정도로, 귀신의 지배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사람이 죽은 후 승천하든 혹은 지하의 사후세계로 가든 대부분의 한대인들은 이러한 사후존재를 자유의 귀신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이 한대 민간의 풍속은 상당 부분이 ‘귀신’과 관계된 것이 많았으며, 이러한 한대의 귀신관이 한대인들의 생활을 좌우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무당(巫)’이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인간과 귀신간의 다리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人的魂魄与鬼神ㆍ死后世界有着密切的联系。绝大部分宗教信仰的基本前提是确信人死后仍会以某种形式继续生存。那么人死后会以什么样的形态存在呢? 商代甲骨文中还看不到关于灵魂或是魂魄的记录, 即便如此也不能断定商代或是商代以前没有灵魂观念。因为通过殉葬的事实可以看出, 商代的人若是不信臣下或是奴隶死后仍存在, 就不会进行殉葬。 秦汉时期的皇室贵族ㆍ官僚ㆍ巨富以及大部分普通百姓重视灵魂不灭的先秦礼制, 对死者的葬礼和祭祀等各种活动相当谨慎, 因此汉代形成了更为庄严ㆍ复杂的礼仪制度和习俗。这种 “灵魂观”经过长足演进, 在整个汉代促进了阴阳五行学ㆍ谶纬学说ㆍ神仙方术等的发展到汉末, 在神仙方术的基础上最终形成了道教, 且汉代 “灵魂不灭观”的深化正是当时盛行厚葬风俗的土壤和基础。秦汉时期的宗教迷信思想渗透到社会各阶层, 使得禅ㆍ求仙ㆍ推灾异ㆍ图谶等在统治阶层中自然地流行起来。 可以说汉代是中国历史上厚葬风俗最为鼎盛的时期, 这种厚葬风俗的形成和发展是源于对死后世界想象的具体化, 即与牢固的 “灵魂不灭”信仰有关。汉代并不是厚葬风俗的起始阶段, 更不是信仰灵魂和死后世界的开始,但汉代人对死后世界的想象力比以往更加具体和丰富。 如果看先秦时期史料里所涉及的鬼神与灵魂的内容, 不难发现鬼神被视为人死后的存在形态, 有时称之为鬼或是鬼神。考察汉代民间流行的风俗, 就会看到大部分汉代人盲信鬼神, 他们的日常生活几乎被鬼神所左右, 很难从鬼神的支配中摆脱出来。人死后无论升天还是下地, 大多数汉代人认为人死后的存在就是自由的鬼神, 所以神和人之间需要有 “巫”这种中介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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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 北魏前期 皇室의 혼인정책을 駙馬(公主혼인)와 外戚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北魏前期 部落首領들이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정치적․사회적 지배층을 형성한 상황에서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北魏皇帝들은 이들 중 유력 세력을 결혼을 매개로 포섭하였다. 그리고 北魏皇帝들은 유목민 집단 가운데 拓跋氏에 충성한 가문들을 대대로 駙馬로 삼아 그들의 충성을 재확인하고 결속력을 다졌다. 또 北魏前期 정복전쟁 과정 중에 통합한 胡漢세력을 체제내로 포섭하기 위해 萬氏․乙弗[乙]氏․紇奚[嵆]氏 등 투항한 집단의 수장과 대대로 通婚관계를 맺으며 이들을 皇室의 藩屛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밖에도 北魏는 北魏에 항복하거나 정복된 각종 胡․漢의 유력세력을 駙馬로 삼아 이들을 지배층으로 편입시켰다. 심지어 北魏는 당시의 주변국인 柔然․北涼 등에도 公主를 시집보내는 결혼동맹을 추진했다. 이때 반드시 상대방 군주의 누이 등 딸을 취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결혼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인질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北魏와 주변국은 서로 여자를 교환하는 결혼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北魏는 外戚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음 皇位계승자의 生母를 살해하는 子貴母死제도를 채택하여 外戚이 발호하는 현상은 적어도 北魏前期에 는 없었다. 外戚 대신 皇帝의 保母 保太后가 臨朝稱制했지만 保太后 가문의 발호는 없었고, 그 정치적 지위는 保太后 사후 쇠락하였다. 北魏는 子貴母死제도를 통해 外戚의 발호를 견제하였지만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 혹은 공존의 대상으로 보았다. 즉 外戚들을 高官으로 임명했지만 권력을 주지 않는 형태로 우대하였고 外戚의 일원을 駙馬로 삼았다. 즉, 北魏皇室은 公主를 外戚인 姚氏․杜氏․馮氏와 결혼시켜 겹사돈婚을 맺었고, 특히 長樂馮氏는 3대에 걸쳐 公主의 駙馬와 北魏皇帝들의 皇后와 左昭儀를 배출하였다. 이는 外戚을 皇室의 지지세력으로 편입하려는 정략적인 통혼정책으로 볼 수 있다. 또 序紀時代에도 이러한 통혼형태가 빈출하고, 契丹의 外戚인 蕭氏가 대개 皇室인 耶律氏의 공주들과 결혼하는 예를 보면 “外戚=駙馬”, 즉 두 집단의 교차결혼은 유목민 고유의 풍습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비슷한 시기 南朝시기에도 劉宋皇室과 王․徐․江氏의 복잡한 近親婚과 異輩婚처럼 近親婚, 즉 형식상 겹사돈婚과 항렬이 다른 친척끼리 결혼하는 異輩婚이 빈출하였다는 지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南朝와 北朝에서 겹사돈婚이 보이므로 北魏의 현상을 胡族的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南朝의 겹사돈婚은門閥과 家格이 맞는 家門끼리 결혼하는 배타적 通婚圈, 즉 門第婚의 성격이 강하다. 門第婚하에서 소수의 가문이 通婚하면서 겹사돈婚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北魏에서는 孝文帝가 門閥위주의 定姓族과 혼인정책을 실시하기 전까지 胡族지배층 사이에서는 門第婚이 통용되지 않았다. 또 序紀時代에도 外戚, 혹은 駙馬가문과도 世婚과 겹사돈婚이 빈출하기 때문에 南朝 門第婚의 영향이라기보다 序紀時代 유목민의 婚俗이 北魏前期에도 여전히 유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北魏後期 皇室과 駙馬․外戚 사이에는 北魏前期처럼 世婚과 겹사돈婚이 행해졌다. 이는 序紀時代와 北魏前期에 지속된 胡族的 通婚이 여전히 北魏後期에도 지속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외형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北魏後期 皇室의 通婚정책은 外戚의 발호로 北魏前期에 보여준 外戚의 발호와 정치적 부상을 통제, 혹은 견제하면서 外戚을 우대하는 절묘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상실하였다. 이는 子貴母死 관행이 깨지면서 生母가 어린 皇帝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는 관행이 되살아났고, 황제의 신임을 얻거나(高肇) 禁軍을 장악한(于忠) 외척들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北魏後期 皇室과 駙馬․外戚과의 통혼형태는 여전히 胡族的성격을 지녔으나 외척에 대한 견제와 우대라는 정책은 계승되지 못하였다.

北魏前期部落首領仍然行使权力, 形成政治的ㆍ社會的支配層的狀況下, 北魏皇帝为了統合他们, 以婚姻为媒介收买了他们中的有力勢力。卽, 以拓跋氏为頂点, 拓跋氏和拔拔氏等九个血緣ㆍ或是以擬似血緣形成的帝室十姓形成了北魏支配结构的最上層。为了确保帝室十姓的支持, 道武帝時期把忠誠于拓跋部的穆氏代代封为駙馬, 要以此作为皇室的藩屛。这同样体现在擁立文成帝有功的陸氏家族。如此北魏从序紀時代以來, 就在服屬的遊牧民集團中, 封忠诚于拓跋氏的家族代代为駙馬, 以此确认他们的忠誠ㆍ并加强了团结。并且, 为了把北魏前期征服戰爭中統合的胡漢勢力收买进来, 北魏采取了下嫁公主的婚姻政策, 和萬氏ㆍ乙弗[乙]氏ㆍ紇奚[嵆]氏等投降集團的首長代代通婚, 以此收买他们作为皇室的支持勢力。此外北魏还把投降或征服于北魏的各種胡ㆍ漢的有力勢力封为駙馬编入到支配層内。于是北魏把公主下嫁到有力勢力, 以此把他们收买为皇室的支持勢力, 并下赐他们王爵等爵位, 優待了他们。北魏也把公主下嫁到當時的周邊國柔然ㆍ北涼等, 促进了結婚同盟, 同时也一定要把对方君主的姊妹或女儿娶为後宮。可以看出为了维持婚姻同盟ㆍ互相确保人质, 北魏和周邊國采取了互相交换女人的婚姻形態。 北魏为了牵制外戚勢力, 采取了杀害皇位繼承者生母的子貴母死制度, 因此至少在北魏前期不存在外戚跋扈的現象。虽然皇帝的保母保太后曾代替外戚臨朝稱制, 但是没有出现保太后家族的跋扈现象, 而且其政治地位在保太后死后就衰落了。北魏虽然通过子貴母死制度牵制了外戚的跋扈现象, 但是 没有把他们当作除去的對象, 而是把他们当作相生ㆍ共存的對象。卽, 虽然任命外戚为高官, 但是没有赋予他们權力, 只任命外戚的一員为駙馬。可以认为这是要把外戚编入皇室支持勢力的政略的通婚政策。而且, 序紀時代也频频出现这种通婚形態, 契丹的外戚蕭氏大都和皇室耶律氏的公主結婚, 从这一例子可以看出 “外戚=駙馬”, 卽两个集團的交叉婚姻也有可能是遊牧民固有的風習。当然就象这一时期南朝的劉宋皇室和王ㆍ徐ㆍ江氏複雜的近親婚和異輩婚一样, 频频出现门閥間的通婚现象。相反在北魏孝文帝和門閥爲主的定姓族实行婚姻政策以前, 胡族支配層之间不存在門第婚。而且, 序紀時代也频频出现和外戚或是駙馬家族的世婚和親加親婚, 所以可以说这不是南朝門第婚的影響, 而是序紀時代遊牧民的婚俗一直流行到北魏前期, 这种解释才是合理的。 北魏后期仍象北魏前期一样存在皇室和駙馬ㆍ外戚之间的世婚和重亲家婚。这表明序紀時代和北魏前期的胡族通婚一直持续到北魏后期。但是北魏后期皇室的通婚政策因外戚的跋扈丧失了北魏前期控制外戚的跋扈和政治上浮起, 或是牽制ㆍ优待外戚的絶妙的牽制和均衡原理。这是因为子貴母死慣行打破以后, 生母代替幼皇帝垂簾聽政的慣行复活, 得到皇帝的信任(高肇), 或掌握禁軍(于忠)的外戚在政治全面浮起。因此可以认为北魏后期皇室和駙馬ㆍ外戚的通婚形態仍然具有胡族的性质, 但是对外戚的牽制和優待这一政策却没有能繼承下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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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고등학교 학교 현장에서 사용하고 7차 국사 교과서가 표방하고 있는 분류사 체제가 제대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분석한 뒤, 앞으로의 국사교과서 개편 서술에 대한 시사와 새로운 방향 제시를 위한 자료의 일단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행 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분야에서 정치사 분야와 분류사 분야를 검토해 본 결과 현행 7차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불완전한 분류사 체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행 국사교과서가 이전 6차 교육과정 하에서 편찬된 국사 교과서와 달리 분류사 체제로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서술 내용에 있어서는 이전 국사교과서의 기계적인 재구성에 머물고 있다. 물론 대단원 도입부에 있는 ‘단원의 길잡이’에서 각 분류사의 의미와 함께 서술 방향을 제시한 것은 좋았으나 본문 내용에 이러한 각 분류사의 서술방향을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였다. 특히 고대사 단원의 서술 체제와 분류사별 내용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제대로 된 분류사 체제를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전반적인 서술 체제와 내용에 대한 개선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하였다. 우선 분류사 속에 또 다른 분류사를 상정해서 체계적으로 서술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학생들은 각 주제를 기준으로 역사의 발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정치사의 경우 정치사 단원의 길잡이에서 정치사에 대한 개념과 서술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근거하여 본문 내용을 정치 세력, 정치 구조, 정치 운영, 정치 운영론 둥과 같은 핵심 주제를 상정하여 그 주제 안에서 통시대적으로 서술해야 할 것이다. 둘째, 경제사의 경우 대단원 도입부에 있는 경제사 단원의 길잡이를 통해 경제사의 개념과 경제 활동에 대한 개관을 한 후, 본문에서는 농업 생산력, 토지 제도, 수취 제도, 상공업, 대외무역 등을 항목으로 정한 다음 서술 내용도 이 항목에 맞추어 통시대적으로 서술해야 할 것이다. 국사교과서 서술이 제대로 된 분류사 서술을 하기 위한 궁극적인 방향은 모든 단원에 똑같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체제를 지양하고 각 단원의 성격과 특색에 따라 다양한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간략하게나마 빠짐없이 다루겠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각 분류사별 특징에 맞는 다양한 서술 원칙을 살려서 꼭 필요한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취급함으로써 학습자로 하여금 우리 민족의 활동상을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역사상 중요한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사고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identify and revise the defective parts of the existing Korean history textbooks, and finally provide a next-curriculum authors a guideline or a framework of subject-based textbook writing. To write this thesis, I have examined and analyzed the ancient history and the three Kingdom period from all highschool Korean history textbooks issued during the 7th educational curriculum. The main is the style of historic writing and its contents. I’ve found out almost all Korean history textbooks in the 6th educational curriculum were written chronologically, but there was a big change in the 7th curriculum. The guidelines given by government required the textbook authors to describe Korean history in a different perspective not based on chronology but classification, they wrote the subject-based Korean history. The theme-based or subject-based writing itself is significant but it has a problem. That means the authors just rearranged the contents of the 6th curriculum history textbooks. Their books were subject-based but still chronological. Through this thesis, I will make some suggestions how to write a Korean history textbook on subject-based description. To establish a right framework of thematically organized history textbooks, the author should classify korean history into four categories or more; political history, economic history, social history, and cultural history. The writer should choose major themes relevant to the category. The themes are classified into many topics that are covered during class. In each chapter or unit, the author organize the textbooks in order not only to provide the sequence of events in textual documents but also show the way of investigating objectively the patterns of cause and effect that determine events. At the end of the chapter, the author should develop high quality questions and activities that practice students’ own historical perspective. Learning history shows its real worth when students can get a valuable lesson from interpreting the past properly.

교수학습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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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일 쟁점 사건의 프로젝트 수업을 통한 기능적 자율성 신장

송석종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225-256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300원

9

학회 행사 휘보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학회 역사와 교육 제11집 2010.10 pp.257-269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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