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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학연구 [The Journal of Seoul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The Institute of Seoul Studies]
  • pISSN
    1225-747x
  • 간기
    계간
  • 수록기간
    1994 ~ 2018
  • 주제분류
    사회과학 > 지역개발
  • 십진분류
    KDC 911 DDC 951
제64호 (6건)
No
1

근세ㆍ근대이행기에 있어서 일본 수도공간의 변화의 단면 - 구 에도성문의 재편성을 중심으로 -

이와부치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제64호 2016.08 pp.1-49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수도, 도쿄의 중심에는 1.5㎢를 차지하는 천황의 주거, ‘황거 皇居’가 존재한다. 이는 도쿄의 모체였던 도시 에도가 성을 중심으로 한 죠카마치 城下町 의 형식을 취한 도시였으며, 황거는 에도성의 공간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에도 성은 국내의 정치적인 안정으로 의례를 통한 쇼군 將軍의 권위를 선양하는 장소 로 기능하였다. 이중으로 해자를 두르고 중핵에는 도쿠가와 쇼군가 德川將軍家 의 거처와 정무공간, 그 외 관청이 위치하였다. 해자에는 다리와 성문이 설치되 었으며, 쇼군의 방문자와 외출하는 쇼군 행렬의 송영이 성문에서 행해졌다. 성문 은 서열의 확인과 권위를 발현하는 장으로 기능하였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 의 례공간은 축소되어 외측 해자의 성문은 철거되었다. 그리고 내측 해자의 성문 중 9개소가 남겨졌으며, 이 공간이 오늘날의 ‘황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공 간이 무조건적으로 ‘황거’로 치환된 것은 아니었다. 첫째, 처음에는 황거와 관청 가를 합쳐 ‘황성 皇城’으로 구상되었다. 그러나 결국 성의 가장 중핵에 해당되는 혼마루 本丸1) 부분에는 황거도 관청도 설치되지 않았다. 또 관청가의 용지로서 확보된 또 다른 공간도 관청으로 이용한 경우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의례공간으로서의 광장이 확대, 재생되었다. 둘째, 에도시대에는 통행이 가능했던 북측 부분(北の丸·山吹)의 도로는 일시 개방되었으나, 천황을 지키는 근위연대의 주둔지 설치에 의해 ‘황성’에 흡수되어 통행이 폐쇄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의 ‘황성’은 천황가가 거주하는 ‘황거’ 이외의 기능도 가졌기 때문에 거대한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부는 공원으로 개방되었으나 여 전히 ‘황거’는 거대한 공간으로서 도시의 중심을 점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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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옛 도성에는 8킬로미터나 되는 긴 중축선(中軸線)이 있는데, 여기에 자 리한 건축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보여준다. 옛 도성이었던 베이징에는 주 로 성벽과 성문·골목[胡同]·사합원(四合院)과 점포들이 있었다. 건물의 색조는 대부분 회색 벽에 회색 기와였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베이징 옛 도성의 남북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 남쪽으로 영정문(永定門)에서 시작하고 천교(天橋)를 거쳐, 정양문(正陽門)·대청문(大淸門)·천안문(天安門)·단문(端門)·오문(午門)을 거 쳐 황제가 있는 금란보전(金鑾寶殿)인 태화전(太和殿)에 이어지며 중화전(中和 殿)ㆍ보화전(保和殿)을 지나 황제와 황후의 침전인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 殿)ㆍ곤녕궁(坤寧宮)으로 이어지며 어화원(禦花園)과 종교건물인 흠안전(欽安殿) 으로 이어진다. 황궁의 후문인 신무문(神武門)·경산(景山)의 만춘정(萬春亭)· 황성의 후문인 지안문(地安門), 그리고 만녕교(萬寧橋)·고루(鼓樓)·종루(鍾樓) 까지 이어진다. 전체 길이가 7.8 킬로미터나 되는 중축선에는 붉은 벽에 누런 기 와로 꾸며진 높고 큰 건물들이 들어서 도심을 장식하여 베이징 옛 도성의 풍모와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베이징 옛 도성의 도시의 등뼈로 일컬어지는 중 축선에는 도시의 정기와 신력(神力)이 숨어 있는 도시의 용맥(龍脈)이라고 할 수 있다. 원(元)·명(明)·청(淸) 삼대에 거쳐 베이징 옛 도성의 중축선은 계획에서 건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확충되고 다듬어지면서 황제의 도성을 상징하는 지 금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 중축선과 베이징 도 성은 전란을 겪으면서 파손되었고 심지어는 불타버리는 재앙을 맞이하였다. 지 금의 모습은 재건한 이후의 모습니다.

北京の都城には8キロにいたる長い中軸線が存在する。 中軸線の上に位置され ている建築は中国の歴史と文化をよくみせる。 旧都城であった北京には主に城 壁、城門、胡同、四合院と店舗がある。 建物の色は大体、灰色の壁に灰色の瓦である。 また、中軸線は北京の旧都城の南北をつないでいる。 南側には永定門からはじめ、 天橋をわたして、正陽門、大淸門、天安門、端門、午門を通って皇帝がいる金鑾寶殿で ある太和殿につながる。 また、中和殿、保和殿を通って皇帝と皇后の寝殿である乾 淸宮、交泰殿、坤寧宮をわたって、禦花園と宗教施設である欽安殿につながる。 皇宮 の裏門である神武門、景山の萬春亭、皇城の裏門である地安門、また萬寧橋、鼓樓、鍾 樓までつながる。 全体の長さが7.8キロにおよぶ中軸線には赤い壁に黄色の瓦で 飾っている高い建物が並び、北京の旧都城の風貌と特徴を鮮やかにする。 北京の 旧都城の背骨にあたる中軸線には都市の精、気、神がこもっている龍脈ともいえる。 元、明、淸の三時期にかけて北京の旧都城の中軸線は計画から建設にいたるまで絶 えず拡充され、整備されながら皇帝の都城を象徴する現在の姿になる。 ところが19 世紀末、20世紀のはじめにこの中軸線と北京の都城は戦乱を経て破損され、そのう えに類焼したこともあった。 現在の都城と中軸線は再建した姿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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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수도 하노이의 제국주의적 경관 : 공공기념물과 비스타

우신구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제64호 2016.08 pp.77-12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1010년 리씨 왕조에 의해 수도로 선택된 후 19세기 초 반까지 역대 왕조의 수도로서 베트남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도시였다. 본 연구는 베트남의 역사적 도시였던 하노이에 19세기 후반 프랑스 제국주의가 침략하면서 인도차이나 연방의 수도에 어울리는 도시경관을 구축했던 다양한 방식을 드러내 고자 했다. 특히 인상적인 도시경관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공공 기념물과 공공건축에 주목하였으며, 당시의 사진과 지도를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구상적인 형태에 기반하는 공공기념물은 첫째, 프랑스 혹은 인도차이나 연방 이라는 국가, 둘째, 인도차이나 식민지배와 관련된 프랑스인, 셋째, 프랑스가 참 전한 전쟁 등 세 가지 주제를 조형으로 표현하면서,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배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설득하였음을 발견하였다. 식민지 시대 하노이의 인상적인 도시경관을 지배한 것은 도시 곳곳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길과 공공건축으로 구성된 비스타의 경관이었다. 식민시대 발간된 시 대별 지도를 통해 공공건축과 주변의 가로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하 노이의 비스타 경관은 다음과 같은 교묘한 방식을 통해 도시공간 속에 장치되었 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단부가 막혀 있는 가로, 혹은 중간에 꺾여 있는 가로를 활용하여 공공건축을 배치하였다. 둘째, 기존의 도로 중간 구간을 폐도하고 공공건축을 배치하여 비스타 가로로 전환하였다. 셋째, 공공건축이 비스타의 초 점이 되도록 정면에 새로운 도로를 신설하였다. 넷째, 도로의 양 단부에 공공건 축을 배치하여 이중의 비스타를 형성하였다. 다섯째, 새로운 공공공간을 추가 확 보하여 공공공간의 중심축을 건물축과 일치시킨다. 이런 다양한 방식으로 구축 된 비스타는 도시의 가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시각을 전유할 수 있었다. 특히 하노이의 비스타 경관이 특정한 하나의 마스터플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개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구축되었다는 점은 매우 주 목할 만하다.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하노이의 도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경관으로 구축되었는 지 분석한 본 연구는 식민지 시대 아시아 도시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식민지 시 대 형성된 도시공간과 경관을 여전히 품고 있는 현재의 아시아 도시에 대한 다양 한 독해방식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Hanoi, the capital of Vietnam, has been the symbol of national pride since it had been decided as the capital in 1010 by Ly Dynasty until early 19c. This study aims to disclose various ways of constructing townscapes of Hanoi suitable for the capital city of Indochinese Union after French imperialism's invasion in late 19c. Focused on the public monuments and public buildings which played important role to construct impressive townscapes, this study analyzed photos and maps of colonial era and found following results. The public monuments based on figurative forms expressed three subjects like, first, the nation of France or Indochinese Union, second, the french persons related to Indochinese colonial domination, third, the wars of France. The dominating townscapes of colonial Hanoi were vistas consisting of streets and public buildings throughout the city. By tracing the process of constructing the public buildings and surrounding streets through the maps published in various periods of colonialism, the vistas in colonial Hanoi were found to have been constructed in various tactful ways as following. First, the public building was arranged using the one-ended street or bended street to create vista effect. Second, public building was placed in the middle of existing street to create vista. Third, new short street was constructed in front of public building to make the building as focus of vista. Fourth, public buildings were placed at both ends of a street to make a double vista. Fifth, new public space was constructed to make the central axis of the public space coincide with the axis of public building. The vistas created by above mentioned various ways were able to exclusively attract public gaze of the people moving along urban streets. It is notable that the vistas of Hanoi had been constructed individually and persistingly over in a long time without conforming to any particular master plan. This study, which has analyzed the way and process how the French colonialism had been embodied as townscapes in urban space of Hanoi, is expected to expand the understanding of Asian cities of colonial period and to provide a new way of reading contemporary Asian cities which still contain the urban space and townscape constructed during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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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05년 일본에서 간행된 한국어 학습서인 〈獨學 韓語大成 全〉에 대해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그 체재와 한국어 학습서로서의 특징을 기술하고, 이 학습서의 한국어가 보여 주는 개화기 한국어 자료로서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 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우선 한국어 학습서로서 〈獨學 韓語大成〉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저자인 伊藤伊吉 의 한국어 습득 경험 및 주요 거주 지역과 〈獨學 韓語大成〉의 한국어가 갖는 상 관성에 대해 검토하고 한글 표기와 가타가나 표기가 보여주는 개화기 한국어 발 음의 특징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한국어 학습서로서 〈獨學 韓語大成〉이 보여주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 1편 ‘文字語法及連語’에서는 조사, 어미와 더불어 의존명사와 결합된 문법항목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어간과 어미를 분리하여 표기하는 방식을 고안하여, 어간에 다른 어미를 결합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제2편 ‘會話’에서 는 주로 한국어 문장에 대한 일본어 대역 문장의 제시 방식을 검토하였는데, 한 국어 학습뿐만 아니라 일본어 학습에도 이 학습서가 사용될 수 있도록 일본어 대 역 문장을 의역과 직역을 함께 제시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일본어 대역 문장의 제시 방식과 제2편 회화에 등장하는 문장의 유사성을 근거로 伊藤伊吉이 당시의 한국어 학습서 가운데 〈日韓通話〉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음 을 주장하였다. 〈獨學 韓語大成〉의 한국어를 검토하기 위해 우선 저자인 伊藤伊吉의 한국어가 함경남도 원산 지역의 방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그의 생애와 경력을 바탕으 로 추론해 보고 실제 자료의 검토를 통해 그 지역의 방언이 반영되어 있음을 주 장하였다. 그러나 〈獨學 韓語大成〉의 한국어는 저자 伊藤伊吉이 자연스럽게 습 득한 원산 지역의 방언을 반영하면서도 경성 지역의 어휘도 함께 제시함으로써 한국어 학습에서 경성말이 우선되어야 함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 한 음장에 대한 기술과 가타가나 표기의 검토를 통해 이 시기의 음장이 운소로서 기능하고 있었으며 보상적 장모음화를 보여 주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시기의 한국어 학습서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서지적인 검토에 치중된 면이 없지 않았다. 기존의 서지적인 검토에 대한 확인과 아울러 개화기 한국어 자 료로서의 한국어 학습서에 대한 검토가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Dokhak Haneodaeseong Jeon(獨學 韓語大成 全)”(1905), Korean Textbook for Japanese learners with a special focus on the organization of the book and phonological characteristics of Koean in the textbook. This paper raises two key points. First, This Korean Textbook shows impressve description about verb conjugation which other Korean textbook at same period did not show. Second, korean sentences and conversation of this material are translated both literally and freely. It means this book is not only Korean textbook for Japanese but also Japanese textbook for Korean people. This material also give us two important facts about features of Korean language. First, the writer of “Dokhak Haneodaeseong Jeon(獨學 韓語大成 全)” had lived at Wonsan in Hamgyeong province, so Korean language of this book reflected on Hamgyeong dialect. But the writer did not presented only dialetal vocabulary, he always presented standard vocabulary which was used at Gyongseong(京城). Second, the writer of this book described phonologial length of korean language., and we found this charateristics of vowel length with Katagana descripon of this book. It seems to reflects pronunciation of Modern Period’s Korean which we could not get from other materials at that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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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조선형 특수회사, 「京春鐵道(株)」의 연구

정안기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제64호 2016.08 pp.155-21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는 ‘1930년대 식민지 공업화와 조선형 특수회사 연구’의 일환으로 경춘 철도㈜의 설립과 경영의 전체상을 실증적으로 검토하였다. 1936년 7월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설립된 경춘철도㈜는 경춘철도기성회와 조선식산은행이 주도하 였고, 초대 사장에는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출신의 牛島省三이 취임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건설비 5%의 사철보조금을 교부해서 회사 설립과 경영을 지지하는 한 편,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민간자본의 공동출자와 쌍대적 통제의 지배구조를 설 계하였다. 경춘철도㈜는 당시 조선 최대의 메트로폴리스 경성부를 교차점으로 경인과 삼척공업지대를 연결하는 중부 조선의 횡단선 부설이었고, 1939년 7월 경 성부 성동역과 춘천역을 연결하는 93.5km의 경춘선을 개통하였다. 경춘철도㈜의 사례 연구는 식민지기 조선총독부가 단순한 식민통치의 헤게모니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경제환경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경제제도와 산업정책의 설계자 혹은 실행자라는 경제사적 역할과 의의를 시사한다.

As part of the research project investigating colonial industrialization and Joseon special- purpose companies during the 1930s, the present study was conducted to empirically examine the formation and overall management of Gyeongchun Railroad Corporation. Founded in July 1936 with a capital of 10 million won, the corporation was led by staterun Joseon Siksan Bank and the Gyeongchun Railroad Support Association representing local people of Chuncheon, and Usijima Shozo(牛島省三) who had been served as Director of Home Affairs a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was appointed its first presiden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supported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the corporation by granting subsidies to cover five percent of construction costs. On the other hand, it had private capital pooled from investors with different interests and designed a dual-control governance structure. The establishment of Gyeongchun Railroad Corporation was intended to build a rail line across the central part of Joseon between the industrial areas of Gyeongin and Samcheok, crossing Gyeongseongbu (now Seoul), the largest metropolis in the country at that time. Eventually, the railway line running 93.5 kilometers from Seongdong Station in Gyeongseongbu to Chuncheon Station was opened in July 1939. The case study of Gyeongchun Railroad Corporation indicates that the presenc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was of economic significance in that it presented itself not merely as a colonial ruler, but as a designer of reasonable, efficient economic systems and policies, responding to the changing economic enviro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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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京慶線(서울-경주)의 부설과 운영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제64호 2016.08 pp.215-257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일제 말기(1936.11-1942.4)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부설한 경경선은 서울과 경주를 잇는 국유 간선철도이었다. 1.435m의 표준궤간에 383㎞의 노선으로서 조 선의 제2 종관선을 형성했다. 그 중 서울-영천 구간(345㎞)은 새로 부설한 노선 이었고, 영천-경주 구간(38㎞)은 조선철도주식회사로부터 매수하여 개축한 노선 이었다. 일제가 경경선을 부설한 목적은 식민지 조선의 내륙에 부존한 광물과 목재 등 의 자원을 개발하고, 일본-조선-만주-중국을 신속·안전하게 연결하는 수송동 맥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 기존의 경부선(서울-부산)만으로는 폭주하는 군수 물자와 전투 병력을 원활히 운반할 수 없었다. 더구나 경부선은 미국의 함포공격 에 노출되기 쉬웠다. 일제는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萬難을 무릅쓰고 험악한 내륙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경경선을 부설했다. 경경선의 부설에는 8천 7백여 만 원의 자금이 투입되고, 2천여 만 명의 노동자가 돌관공사에 동원되었다. 장대한 교량과 터널 공사에서 최신공법을 처음 활용했지만, 위험에 노출된 공사현장에 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개통한 경경선은 일제 군부의 지휘 감독 아래 군수 물자와 전투 병력을 수송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경경선이 개통된 지 불과 3년여 만에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기대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경경선은 탄생하자 마자 세상과 주인이 바뀌어 半身不隨 의 처지로 전락한 機能不全의 철도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The Gyeonggyeong line built at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November 1936 - April 1942) by the Railway Bureau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was a state-owned mainline railway that connected Seoul and Gyeongju. As it featured the standard gauge of 1.435m and a line length of 383㎞, the Gyeonggyeong line formed the second North and South-connecting line in Joseon. Of the line, the section from Seoul to Yeongcheon (345㎞) was newly built and the Yeongcheon to Gyeongju section (38㎞) was rebuilt after it was purchased from the Joseon Railroad Corporation. The purpose of Japan’s construction of the Gyeonggyeong line was to develop natural resources in Joseon, such as minerals and timber, and secure a transport artery that quickly and safely connects Japan, Joseon, Manchuria, and China. With only the existing Gyeongbu line (Seoul - Busan), a tremendous amount of war materials and combat troops could not be transported smoothly. Besides that, the Gyeongbu line was prone to exposure to the bombardment of the U.S. warships. To make up for these disadvantages, Japan built the Gyeonggyeong line, which went through rough mountainous areas, through all kinds of difficulty. For the construction of the line, capital of about KRW 87 million was invested, and the first-ever cutting-edge technology was used. Around 2,000 workers were mobilized for the construction work, and dozens of them lost their lives during this dangerous job. The Gyeonggyeong line, which opened in the middle of the war, significantly contributed to transporting war materials and combat troops under the supervision of military authorities. However, Japan was defeated just three years after the Gyeonggyeong line was opened. Therefore, it cannot be said that the line performed its role sufficiently. Considering that the line, which was charged with an important mission, lost its original owner well before it properly fulfilled its duty, it may be right to say that the Gyeonggyeong line was just a railroad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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