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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비평 [Korean Journal of Japanese D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Institute for Japanese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 pISSN
    2092-6863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2009 ~ 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주제분류
    사회과학 > 지역학
  • 십진분류
    KDC 309 DDC 306
제2호 (13건)
No
1

6,000원

특집 : 전후 일본의 제국 기억

2

6,400원

일본낭만파(Nihonromanha)는 1930년대 이래 일본의 반근대적 주체성을 추구한 대표적 운동 이다. 이 글은 일본낭만파에 대한 기억이 아시아주의와 관련하는 양상을 고찰했다. 중국혁명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1950~60년대에 아시아 민족주의가 고양되었고, 일본에 서는 일본낭만파를 재인식하는 담론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일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 은 GHQ하의 평화적 민주화를 거부하고, 일본 민족주의의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모택동주 의에 의거했다. 그들은 서구식 근대화에 저항하는 ‘아시아적 주체’를 세우려고 했다. 그래야만 서구근대의 ‘노예’라는 일본민족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3

7,600원

김소운의 『조선시집』은 일제강점기 및 전후 일본에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 중 가장 높은 평가 를 받고 있다. 이 역시집이 달성한 높은 완성도에 대해서 전전의 일본문학 대가뿐만 아니라 전 후의 일본지식인들도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번역자인 김소운은 종주국 일본인에게 ‘조선의 마음’을 알려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고자 했다 고 이 역시집의 출판의도를 밝혔다. 그러나 『조선시집』의 번역 내용을 살펴보면, 역자의 주장 을 수긍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이 역시집에 채택된 시가 거의 모두 서정시라는 점과 미묘한 정치적 표현조차도 역자에 의해 서정적으로 분식(粉飾)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형식 상에서도 대부분의 원시를 일본 시가의 전형적 운율형식인 7・5조로 바꾸어 놓았고, 내용 면에 서도 원시의 세계를 일본전통의 시적 규범과 정서 속으로 수렴시키는 번역 태도가 뚜렷하다. 우에다 빈의 『가이초온』(海潮音)을 통해 많은 일본인들이 일본어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했 듯이, 김소운의 『조선시집』 역시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운 일본어’라는 자국어 관념을 강화했 다. 『가이초온』을 모범으로 삼은 『조선시집』 역시 원천 텍스트인 조선의 근대시를 일본어로 끌고 갔다. 식민지 현실, 그것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시 시국에서 조선문화의 복속 상태는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이 시점에 종주국 일본에서 출판한 김소운의 번역시집은 ‘포로’를 또 한 번 ‘포로화’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이 역시집에 수록된 시인들에 대한 폭력이었고, 배반이었다. 김소운은 언어와 민족의 경계에서 언어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번역자는 반역자”(traduttore, traditore)라는 이태리 격언을 실천했다. 『조선시집』과 이에 관한 언설에서 드러나는 ‘기형적’ 양상은 일차적으로는 식민지 지배/피지 배의 역사와 그 결과로서의 문화적 권력관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아울러 식민지 지배에 대 한 전후 지식인의 역사 수정주의적 인식과 대응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총력전 체제와 기업공동체의 재편

이종구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호 2010.02 pp.8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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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0원

이 글은 산업보국회를 중심으로 제국과 기억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작성되었다. 국가 총동원법 시행을 비롯한 총력전 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노조가 해산되고 하향적으로 조직된 산 업보국회가 노동력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산업보국회는 군국주의 시대의 탄압 기구이지만 도구적・관료제적 합리성의 원리에 입각한 노동력 관리 기구이기도 하였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대중의 집단적 기억 속에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업보 국회는 기업 내 사회관계를 이질적 집단 간의 계약적 관계가 아니라 유사 공동체 내부에서 생 활 단위를 공유하는 성원간의 정의적 관계로 해석하는 가치관을 노동자들에게 내면화시키는 잠재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전후에 형성된 소위 일본적 노사관계의 가장 큰 특징인 연공 제와 기업별 노동조합의 기원과 의미를 파악하려면 산업보국회가 기업이 노동자의 생활을 보 장하는 기능을 발휘하도록 선도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일본의 노사 관계를 공동체적 협력관계로 파악하는 시각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점은 현재도 유효하다. 또한 산업보국회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기업과 국가라는 노동자가 소속된 조직의 거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시에 일본 기업은 산업보국회가 주도하는 정신운동 으로 대량생산 방식을 확립하려 시도했으나 물질적 유인을 제공하여 노동자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 낙후되어 있었으며 기업 내 노사관계 관리를 경찰에 의존했다. 패전으로 국가와 자본가의 권위가 상실되었을 때 생산의 주체라는 권리의식을 가지고 있던 노동자들은 급진 적 노동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즉, 미군정이 주도한 노동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기본권 이 법과 제도로 보장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중요하다. 산업보국회에 대한 노동자의 집 단적 기억은 전후 일본에서 진행된 노사관계의 제도화와 인사노무관리의 합리화 과정에 지속 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전후 일본의 만주 기억, 그 배후와 회로

임성모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호 2010.02 pp.13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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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전후 일본 사회의 만주 기억은 식민지 기억의 전형에 해당한다. 만주 기억은 점령과 냉전의 틀 아래 1960년대 전반까지 ‘침략’과 ‘식민’의 주류 서사에 의해 억제되었다. 그러나 만주 체험자 그룹을 중심으로 배양되고 있던 이 기억은 고도경제성장과 중일 국교 재개를 계기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만주 ‘귀환자’들의 각종 수기, 소설, 사진, TV 다큐멘터리 등 활자・영상매체들, 그리 고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활성화된 만주 관광 등이 기억을 유통・확산시키는 주요 회로로서 기 능했다. 전후 일본의 ‘기억 정치’는 식민지 지배의 가해의식을 봉인하고 ‘고난’의 피해의식을 부각시키면서 ‘반전평화’와 내셔널리즘을 결합한 ‘일국평화주의’를 구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귀환’ 서사로 상징되는 만주 기억은 ‘제국’과 ‘근대화’의 ‘향수’를 부추기는 새로운 주류 서사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월경적’인 식민지 기억은 동아시아 냉전의 향배에 의해 서 재규정될 것이다.

6

9,700원

히로시마 남부의 소도시 구레에서는 2005년 ‘해사역사과학관’이라는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이 박물관은 별칭으로 ‘야마토뮤지엄’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태평양전쟁에서 활동했던 군함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기억을 되살려 지역의 상징으로 삼으려는 지역정치의 산물이다. 이 박물관의 설립과정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풀뿌리 보수주의 의 전개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의 피폭, 전재(戰災)라는 역사적 경 험을 내세우면서 평화를 고수하려는 흐름간의 경합과 갈등, 타협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논문 은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는 ‘히로시마의 평화’를 재고하기 위해서 ‘바다로부터 히로시마만(灣) 을’ 바라보는 시각을 채택하여, 구레의 전쟁기억의 재현의 정치를 분석하였다. 지역사회의 박물관 건립프로젝트는 패전 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전쟁의 직접체험 세대들이 자 신들의 경험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로, 전쟁에 대한 기념산업은 지역사회 내부에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의식・무의식적 기억에 의존하지만, 사회 교육적 동기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경제적 동기가 결합하여 역사적 경험의 자원화를 향 한 열망을 자극한다. 구레의 경우, 서로 다른 세 가지 구상으로 나타났으며, 평화주의나 기술중 심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군사주의에 가까운 구상이 시장의 리더십에 의해 실현되었다. 이 과정을 좀더 거시적으로 바라본다면, 전쟁이라는 역사적 체험은 쉽게 망각되지 않으며 그 것은 우경화의 자원이 되기도 하며 평화운동의 자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되는 조건 속에서 각 지역사회는 자신만이 지닌 역사적 자원들을 강조하므로, 전전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이는 오랫동안 지속된 지역의 풀뿌리 평화운동의 근거가 점차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7

5,500원

본 논문은 전함 야마토를 기념하는 장소로서 야마토 박물관의 급작스러운 인기와 현재 일본의 대중 문화에서 야마토의 재현에 대해 검토하였다. 전함 야마토가 전쟁과 파괴력을 상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야마토가 수용되고 이해되는 방식은 하나의 논리나 원칙 하에 설명될 수 없 다. 다시 말해, 혹자가 해군 기술에 있어 일본이 이룬 최고의 성과물, 즉 국가적 자부심의 상징 으로 야마토를 떠받치는 반면, 어떤 이는 야마토를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바라본다. 여 전히 다른 이들에게 야마토는 일본이 스스로의 후진성을 인지하고 극복해 냈음을 증명하는 궁 극의 자기증명이라 평가한다. 이 모든 인식들은 일본의 전쟁사에서 야마토가 자리매김되는 군 국주의 체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검토의 대상으로 삼았던 자료는 고노 후미요의 최근 만화,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 였다. 필자의 주된 질문은, 현대 일본에서 패배한 자들의 대중 기억의 형성에 있었다. 박물관과 대중문화를 통해 출현하는 전함 야마토는, 전후 일본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적당하고 감당할 수 있는 이미지를 통해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방식을 고찰하는 데 있어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 다. 1974년 우주전함 야마토의 예와 같은 이전의 예에서 보여지듯, 전함 야마토에 대한 일본의 매료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평화 박물관 건설의 대유행과 야마토의 확고 부동한 인기는, 전함에 대한 문화적 재현과 더불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와 관련된 더 큰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려는 일본 사회의 움직임에 주목하게끔 한다.

특집서평 : 전후 일본의 제국 기억

8

끝나지 않는 전쟁을 기억하다

김효진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호 2010.02 pp.22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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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연구노트

9

히노데소학교의 덕혜옹주 : 기억의 파편에 조우하며

권숙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호 2010.02 pp.252-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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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0원

이 글은 필자가 우연히 발견한 덕혜옹주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다. 단편적으로 알려진 바대로 덕혜옹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태어났지만 일본의 식민통치에 의해 기구하고 비극적 인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패망한 황실의 일원인 까닭에 그간의 역사에서 거의 가시화되지 못 한 인물이다. 이글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옹주가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전에 4년간 수학 했던 경성 히노데소학교의 일본인 동급생들이 옹주의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단편적 인 글들이다. 기껏해야 사소한 비공식 자료에 그칠 내용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옹 주의 삶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이 아직 많은 부분 누락되어 있는 덕분일 것이다. 나아가 불편한 역사적 기억의 복구란 과제가 조금은 더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즈음, 무엇을 어떻게 복구하고 기억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조그마한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겠다.

연구논단

10

9,700원

시대는 사람을 만든다. 어느 특정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그 시대를 만들었던 문화담당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니시무라 신지가 살았던 시기는 메이지-다이쇼-쇼와를 이어 가는 일본의 근 대화와 제국일본의 위상이 전쟁으로 이어졌던 시기를 관통하고 있다.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친 것으로 생각되는 러일전쟁 참전으로부터 대동아전쟁이 격해지던 시기에 그는 전쟁선 동의 데마고그로 변신하는 면모도 보였다. 그가 전쟁인류학이란 분야를 언급한 적도 없지만, 그의 인류학은 사실상 제국일본의 전쟁이라는 구도와 별개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쟁 기를 살았던 한 인류학자의 행로로서 니시무라 신지의 학문적 역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 시무라에 대한 나의 평가 작업은 사실상 일본인류학사라는 틀에서 시작된 일부분이다. 전체적 인 틀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작업이기 때문에, 앞으로 진행되는 다른 학자들의 작업들 과 비교선상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부분들이 남아 있다. 말리노브스키와 레드클리프-브라운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사회인류학이 기능주의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을 즈음, 역사적 문헌의 축적이 오래된 일본에서 시도했던 인류학의 토착화는 역 사주의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싶다. 진화론의 인류학을 학습했던 쓰보이(坪井)가 일본인류학을 언급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고문헌들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고문헌의 자료들을 토속학적 자료의 해석에 원용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인 도리이(鳥居龍藏)와 이노(伊 能嘉矩) 등도 의심의 여지없이 고문헌들을 중요한 자료로서 구사함으로서 일본인류학의 새로 운 방법론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을 가장 과감하게 심도있게 구사한 사람이 니시무라 신지라고 생각한다. 전파론을 습득하면서 인류학을 전개했던 니시무라는 산적한 고 문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문화의 전파를 설명하기 위한 자료들을 발굴하였다. 기능 주의가 횡행하던 1920년대 세계인류학계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니시무라의 입장은 역사 주의 방법론이라고 명명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다만 그가 역사적 자료의 채택과 분석에 대해서 명시적인 방법상의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그는 행동으로서 역사주의를 실천하였던 인류학자였다. 그러한 노력을 우리는 토착화의 시도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간판교수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학으로 시작하여, 신문과 잡지의 편집, 그리고 인류학, 일본사, 일본학으로 귀결된 메이지-다이쇼-쇼와의 학계를 잇는 대표적인 인류 학자였다. 니시무라 신지는 쓰보이(坪井正五郞)의 총합인류학의 내용을 승계하려고 노력한 사 례이기도 하며, 도리이 류조의 스타일과 지극히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도리 이는 동아시아인류학으로 자리를 잡았고, 니시무라 신지는 일본학으로 귀결되었다. 고대선박 과 고대경제에 대한 그의 문화인류학적 업적은 앞으로도 재조명되어야 할 여지를 충분히 남기 고 있고, 그러한 재조명이 일본인류학의 학문사와 학설사를 구축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학문이 ‘국가학’으로 종속될 때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사례가 니시무라의 경우다. 쇼와 말기 대 동아전쟁의 대표적인 옹호론자였던 그의 입장은 “공존공영”, “사해동포”, “광역문화권” 등의 레토릭으로 포장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데마고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해 온 문화인류학자 니 시무라 신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의 심도있는 분석을 기다리고 있다. 말기 니시무라의 전쟁 인류학이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던 문화인류학적 업적을 매몰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11

6,700원

독일과 일본의 교류사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활발한 교류가 일어났던 때는 아마도 제2차 세계 대전시기일 것이다. 동맹국이었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정치・군사적으로 긴밀한 교류의 흔적을 남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음악문화교류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일본학계나 한국 자료의 해석에 원용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인 도리이(鳥居龍藏)와 이노(伊 能嘉矩) 등도 의심의 여지없이 고문헌들을 중요한 자료로서 구사함으로서 일본인류학의 새로 운 방법론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방법론을 가장 과감하게 심도있게 구사한 사람이 니시무라 신지라고 생각한다. 전파론을 습득하면서 인류학을 전개했던 니시무라는 산적한 고 문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문화의 전파를 설명하기 위한 자료들을 발굴하였다. 기능 주의가 횡행하던 1920년대 세계인류학계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니시무라의 입장은 역사 주의 방법론이라고 명명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다만 그가 역사적 자료의 채택과 분석에 대해서 명시적인 방법상의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그는 행동으로서 역사주의를 실천하였던 인류학자였다. 그러한 노력을 우리는 토착화의 시도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간판교수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학으로 시작하여, 신문과 잡지의 편집, 그리고 인류학, 일본사, 일본학으로 귀결된 메이지-다이쇼-쇼와의 학계를 잇는 대표적인 인류 학자였다. 니시무라 신지는 쓰보이(坪井正五郞)의 총합인류학의 내용을 승계하려고 노력한 사 례이기도 하며, 도리이 류조의 스타일과 지극히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도리 이는 동아시아인류학으로 자리를 잡았고, 니시무라 신지는 일본학으로 귀결되었다. 고대선박 과 고대경제에 대한 그의 문화인류학적 업적은 앞으로도 재조명되어야 할 여지를 충분히 남기 고 있고, 그러한 재조명이 일본인류학의 학문사와 학설사를 구축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될 수 있기에 충분하다. 학문이 ‘국가학’으로 종속될 때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사례가 니시무라의 경우다. 쇼와 말기 대 동아전쟁의 대표적인 옹호론자였던 그의 입장은 “공존공영”, “사해동포”, “광역문화권” 등의 레토릭으로 포장되었고, 대동아전쟁의 데마고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해 온 문화인류학자 니 시무라 신지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의 심도있는 분석을 기다리고 있다. 말기 니시무라의 전쟁 인류학이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던 문화인류학적 업적을 매몰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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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정치의 사상과 실천

도자와 히데노리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호 2010.02 pp.344-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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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0원

하토야마 유키오가 새 정부의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한 ‘우애’의 사상적 기원은 유럽통합의 주 창자로서 알려진 쿠덴호프 칼레르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전에서 전후에 걸쳐 일본에서 쿠덴 호프 사상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가지마 모리노스케, 하토야마 이치로, 그리고 창가 학회이다. 하토야마 이치로가 쿠덴호프의 사상을 접한 것은 전후 공직에서 추방되어 아타미에 머물 던 시기에 쿠덴호프의 저서 Totalitarian State against Man(1936)을 접한 것이 계기였다. 하토 야마 이치로는 이것을 번역하여 1952년 『자유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특히 그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혁명은 있었지만 우애를 위한 혁명이 없었다는 쿠덴호프의 말에 감명을 받아 번역서의 출판과 함께 일본우애청년동지회를 조직한다. ‘우애’ 사상이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의 외교 정책에 미친 영향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미국 주도의 글로벌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비판적이고 동아시아국가들과 의 관계를 중시하는 하토야마 정권의 외교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에서 보 듯이 미일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이런 갈등 상황이 어떻게 수 습될지 좀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주창한 ‘자립과 공생의 원리’는 ‘우애’ 사상이 내정에 반영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내정 과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첫째, 쇠약해진 공적 영역의 부흥, 둘째, 공적 영역의 부흥을 뒷받침하기 위한 철저한 행・재정 개혁, 셋째, 지자체의 권한과 책임의 강화를 골자로 하는 지역주권국가의 확립 등이다. 특히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관계를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성의 원리로 재편한다는 지역주권국가의 발상에서 ‘우애’ 사상의 강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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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호 2010.02 pp.368-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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