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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채호의 일본관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신채호는 통념적으로 ‘항일운 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본관은 꼭 일본에 대한 적대심만을 내포한 것은 아니 었다. 개화기의 신채호는 ‘개화선배’로서의 일본의 ‘주체적 외부 문명 수용’ 등을 적지 않게 흠모하는 동시에 한국인들의 ‘외부 문명 모방 지향’, 그리고 전근대적 한국 사회 의 “노예성” 등을 부정시했다. 이 부분에 대한 신채호의 시각은, 그 의도는 비록 신속 한 ‘근대화’에 대한 열망에 기반했지만 그 형태는 사실상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조선에 대한 “정체성론”, “타율성론”과 일맥상통했다. 양쪽의 정치적 지향은 정반대였지만 사 회, 문화 측면에서 양쪽은 근대지상주의 영향권에 속했다. 1920년대의 무정부주의자 신채호는 대체로 더 이상 일본을 ‘모델’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비하 인식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와 동시에 고대사학자 로서의 신채호는 일본을 “백제의 제자”, 백제문화의 일종의 “연장”으로 생각하면서 이 를 한국인의 ‘민족적 자랑’으로 인식했는데, 이와 같은 시각은 남북한 사학에서 그대로 계승, 발전됐다. 고대 일본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과 관련된 그의 평가는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백제와 일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 자체는 당시 일본 사학의 영향이 라고도 볼 수 있다. 다소 균형을 잃은 신채호 식의 일본관은 이제 남한 사학에서 상당 부분 극복됐지만, 일본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최근 일각의 평가에서도 신채호와 같은 근대지상주의의 잔영(殘影)을 엿볼 수 있다
한국병합 전후 한국신종교 창시자들의 일본관 - 수운, 증산, 소태산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3호 2010.08 pp.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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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한국종교의 창시자 가운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동학 (東學, 천도교)을 비롯하여,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증산교(甑山敎),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의 원불교(圓佛敎)를 중심으로, 한국병합 (1910년)을 전후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들이 보인, 일본에 대한 관점과 대응의 방식 을 비교연구하고자 한다. 수운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세력뿐만 아니라 일본세력의 확장은 조선의 안위를 위 태롭게 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수운은 역사적 관점에서 일본의 임진왜란 등 조선침 략과 한국인의 희생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으며, 일본을 원수로 설정하고 멸해 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수운의 이러한 사상은 후래 제자들이 동학혁명 (1890~94)과 삼일독립운동(1919)을 전개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증산은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본에 비해 중국, 러 시아, 유럽국가 등을 상대적으로 위협적으로 보았으며 이들의 세력을 막기 위한 일본 의 조선통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일제 식민지 상황의 극복은 상제의 권 능과 후천도수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보았다. 반면, 소태산은 일제 치하의 한국의 식민지 상황을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부당한 약탈 로 보고 있다. 서구유럽국가와 일본이 어떻게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움의 과정과 왜 한민족이 약자로서 식민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동시에 요구한다. 약자인 조선이 강자가 되기 위해 근검과 저축을 통한 경제적 자립, 교육기관 설치를 통한 인재양성 및 구성원들의 단결력을 강조하였다. 또한, 강자 와 약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자리이타의 조화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 후천개벽의 낙원세계를 이루는 길임을 밝히면서 이를 이루기 위한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수운, 증산, 소태산은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후천선경 도래, 한민족의 도덕의 부모국, 세계의 정신적 지도국으로의 부상을 예언하고 희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 민족이라는 새로운 부족주의적 동질감을 강화해 배타적 집단을 만들고자 한 것이 아 니다. 이들의 일본에 대한 관점은 다르지만, 한민족의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역할을 도 출하면서도 침략과 식민지배의 아픈 역사를 넘어 일본까지도 포용해 후천개벽의 평화 문명을 지향하려 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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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로 분류되는 윤치호(1865~1945)가 일본에 대하여 가졌던 정서는 흠모와 증오 가 교차하는 복잡한 것이었다. 이 글은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일기를 토대로 그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일본인의 성정과 식민정책 에 대한 평가를 분석한 후, 태평양전쟁기 협력행위의 근거를 추적함으로써 그의 대일 관을 정리해 본다. 윤치호는 한마디로 일본인을 대단히 편협하고 왜소하며 힘에만 의지하려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감탄할 만한 일본인의 장점은 상무정신, 즉 전사적 정신이다. 윤치 호가 볼 때 “천황으로부터 오두막의 가장 가난한 노무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 사 람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상이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싸우는 정신이다. 반면, 조선왕 조는 500년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전사적 정신을 뿌리째 뽑아버림으로 써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 따 전사적 정신을 되 찾기를 바랐고 그것이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 지원병제에 찬성한 하나의 이유였다. 윤치호에게 일본은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동시에 보여 준 반면교사였다. 일본인들 은 칼과 꽃을 동시에 사랑한, 이해하기 힘든 민족이었다. 일본의 전사적 정신은 일본을 식민지로 전락시키지 않고 강력한 근대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지 만 동시에 일본을 나락에 떨어뜨렸다. 윤치호는 이 모순적인 일본이라는 실체에 직면 하여 그것을 헤쳐 나가려 노력했지만 좌절하고 만, 식민지사회의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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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에는 인물로서 일본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 소설에 일본과 일본인이 있 다면, 그것은 과도하게 추상화·정형화된 존재일 뿐이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면 소 설은 공동체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의 배제를 통해서만 민족적 공동체가 상상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정형화(고정)됨으로써만 우리를 비춰줄 수 있는 거울이 기도 했다. 이러한 근대 이후의 일본상은 이광수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광수에게 일본은 해방(문명)이면서 동시에 억압(지배)이었다. 우선 일본에 유학했 던 이광수는 일본의 문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의 개조를 시도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광 수에게 일본은 우리가 좇아야 할 문명으로서의 거울이었다. 그에게 일본은 근대 자체 였으며, 그런 점에서 일본에 대한 어긋난 상을 그린 셈이지만, 그것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1938년을 경계로 하여 서구적 문명으로서의 거울은 탈서구(일 본주의)로서의 거울로 바뀌지만, 일본이 모델인 점은 변함이 없었다. 반면에 이광수에게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억압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거나 임시정부에서 일을 한 것은 이러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근대적 문명에 이미 억압과 지배가 내재되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 고 그러한 억압을 특수한 것, 예외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1938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억압으로서의 일본은 이광수에게 있어 식민지배에서 민족적 차별로 전환되지만, 그것 을 넘어서기 위해서 또다시 모델로서의 일본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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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의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강한 반일의식을 표출하였으며, 그의 반일이데올로기는 통치이데올로기의 일환 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재임 시 발언을 보면 단 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반일의식을 표출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우선 그의 반일의식은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일 본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의 적대 국가였고, 오히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한국전쟁 을 겪으면서 미국의 냉전정책에 복무했기 때문에 한국이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반일의식은 북한에 대한 고려 속에서도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959년에 시작된 일본의 북송정책을 전후한 시기 이승만 자신의 발언과 북송정책에 대한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발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북한과 일본의 접촉 및 재일교포들의 북한으로의 귀환은 이데올로기적 전 쟁터인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한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인식 하에, 역할 분담을 통한 새로운 파트너십을 추구했다. 일본이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의 파트너 가 된다면, 한국은 안보, 군사적 측면에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정 책 하에서 집단 안보동맹을 추진했고,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파병을 미국에 제안했다. 이렇게 본다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시기 이승만의 반일의식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나왔다기보다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의 위 치를 적극적으로 고려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정치인 및 과거사에 대한 발언 속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실용적인 대일인식은 이미 식민지 시기부터 계속되 었던 그의 반일인식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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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개발체제(1961~1979)의 식민적 연원은 연구의 빈 공간 이다. 이 글은 그의 해방 전, 특히 그의 생시에 언급이 금기였던 만주국 시절(만주국 사 관학교 졸업과 만주국군 장교 시절)에 초점을 맞추어, 그 경험이 후일 개발체제의 운행을 과다 결정(혹은 예정)했음을, 그리고 그 중요 요소가 독일, 소련 등에서 발원, 만주국을 경유한 하이 모더니즘(총력동원, 건설의 속도전을 강조하는 발전의 확신)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개발체제의 중요 환경인 냉전시대의 남북한 체제경쟁, 특히 한국 사회 동원의 뿌리가 만주국 시기에 있음을 아울러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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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박경리의 장편 대하소설 『토지』를 멜로드라마의 관점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토지』는 강렬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같은 멜로드라마의 요소 를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악랄하고 잔인무도한 악당들과 영웅적 초인들의 대결이 『토 지』의 기본적인 서사문법이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도덕적 양극화이다. 선(인)/악(인) 의 선명하고도 가차 없는 이분법은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이 소설에서 조금도 변치 않 는 원칙이다. 이 선악의 선명한 양극화는, 뜻밖에도, 아니 당연히, 양적으로 방대한 이 소설의 내부적 밀도를 매우 느슨하고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 양극화된 세계 속에서 선(인)의 무리는 만주벌판을 누비는 독립투사들, 지하에서 암약하는 혁명가 들,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과 혐오감을 간직하고 있는 다수의 민중이 며, 악(인)의 무리는 소수의 일본(인)과 ‘친일파’들이다. 이 멜로드라마의 세계 속에서 궁극의 승리를 향해 가는 선(인)의 총칭(總稱)은 ‘민족’이다. ‘민족’ 또는 ‘조국’은 선(인)의 근거이며 또한 종착지이다. 다시 말해, 출발점이자 회귀점으로서의 ‘민족’은 이 멜로드라 마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토지』를 민족-멜로드라마로 명명한 까닭은 거기에 있다. 통속 멜로드라마의 상투적 묘사법, 즉 흉악하고 포악한 ‘악당’과 지고지순한 ‘선인’의 극단적인 대비는 『토지』의 서사를 이끄는 기본 동력이다. 추악하고 타락한 ‘악당들’ (‘왜놈’,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반대쪽에 선량하고 도덕적이며 인간적 미덕과 초인적 용기로 가득 찬 ‘선인들’(항일독립투사들, 민족주의적 지식인들, 농민을 비롯한 ‘민초들’)이 존재한다. 농촌 공동체의 일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토지』 전체를 지배 하는 인종주의, 제노포비아, 국수주의적 문화본질론 등은 이 소설의 즐거운 독서를 크 게 방해하고 있다.
일본,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의 입구 -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읽는 한 후기식민지인의 초상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3호 2010.08 pp.166-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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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일본만이 홀로 공업 경제국으로 구미 문호와 같은 대열에 낄 수 있게 되었는 가?”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이 출간된 시점은 1980년대 일본의 경제대 국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일본(인)론에의 요구가 비등했던 때였다. 이어령은 이 책에 서 후기식민지 출신의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서구 대 일본이라는 일본 인론·일본문화론의 틀을 깨고 동아시아 내에서의 차이라는 새로운 비교문화적 담론 틀을 제기했다. 즉 후기식민지인의 식민본국론이라는 틀 자체가 일종의 문화접경지대 로부터의 논의로서 비상한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어령의 일본문화론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검토했다. 첫째 축소 지향으로 설명된 그의 일본문화론을 일관하는 방법은 사회 및 역사, 정치경제분석과 는 전혀 다른 기호론적 방법— 실제로는 국민성의 제유 배열에 의해 구성되었다. 쥘 부채, 도시락, 워크맨과 같은 일상의 사물과 세부가 국민성을 대표하게 되는 ‘유사기 호학적 제유’의 방법은 이 문화접경지대의 논의를 다시 문화본질주의의 유형학에 귀 착시키는 원인이 된다. 둘째 한일 비교의 방법을 통해 전개되는 그의 일본문화론의 심 층심리에는 일본문화론 읽기의 기대지평 안에 한국문화론을 기입하려는 후기식민지 인의 독특한 도전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렇게 일본을 통해 동양론의 심부로, 이를 통해 세계성·보편성으로 매개되고자 했던 그의 구상은, (후기)식민지인이 (구)식민본국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려 할 때 택하게 되는 제국 에이전시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게 한 다. 셋째 축소지향이라는 일본문화론의 키워드가 실재하는 일본 상품과 문화 형식을 일부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축소지향이란 일종의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은 것으로 유한한 장치를 통해 무한과 숭고를 다루려 한 근대문화 일반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이어령의 일본문화론 속에서 한국은 직접적으로 언표할 수 없지만 내내 잠재 하는 사고의 한계 혹은 활력으로서 작용하는데, 저 작은 나라 한국의 표상불가능성은 바로 그렇게 해서 숭고한 것으로 전화된다. 이어령의 일련의 일본문화론은 축소지향 이라는 ‘작아진 일본’ 안에서 한국문화론을 세계적 차원으로 승화(sublimation)시키 려 했던 후기식민지적 실천의 일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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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의 용일(用日)에 관한 것이다. 이병철은 삼성의 성장 과 정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본을 통해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 등 배움의 터 전으로 활용했다. 더불어 일본은 모방의 대상이었다. 부족한 자본과 기술, 경영방식 을 일본과의 제휴를 통해 보완하면서 일본처럼 되려고 노력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의 의존도가 매우 컸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병철은 일본을 극복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을 모방하면서 자본과 기술력이 어느 정도 축적된 1970년대 후반부터 이병철은 기술 및 자본 제휴선을 미국과 유럽 쪽으로 돌렸다. 더 불어 이병철은 일본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은 생 전에 극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건희에 와서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이병철의 일본인식은 식민지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이중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남긴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피해의식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설령 이병철의 일본인식 이 매우 부정적이었다고 해도 이것이 이병철의 용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 으로 짐작된다. 기업경영은 인식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경제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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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리무라(束荷村)와 하기(萩) 기행 :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을 찾아서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3호 2010.08 pp.24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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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후’와 재일조선인관 - 미군 점령당국에 보낸 편지들에 나타난 일본 사회의 여론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3호 2010.08 pp.26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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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미군 점령기에 점령당국과 맥아더 장군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점령 당국은 이 편지들을 분석하거나, 일본인들 사이에 교환된 편지를 검열했고, 그것들을 일본 사회의 여론 동향을 파악하는 자료원으로 활용하거나 점령정책에 대한 일본인들 의 반응을 고찰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대체로 일본인들의 편지는 식량난, 귀환 등 개 인들의 일신상의 이해관계를 반영했지만 천황제 폐지, 전후개혁, 전범재판 등 당시의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제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패전 직후 일본인들이 맥아더 장군과 점령당국에 보낸 편지들은 그 시기 일본인들의 생활세계와 생활감정을 잘 드러낸다. 이 글의 목표는 일본인의 보통사람들이 보고 겪 은 전후 일본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고, 또 일본인들은 그것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살 펴보는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의 편지에 나타난 전후개혁, 전쟁책임, 재일조선인에 대 한 인식과 태도를 분석하였다. 점령당국의 주도로 수행된 이른바 전후개혁은 상징천황제의 확립, 대의민주주의 제도 의 수립 등 전후 일본 정치구조의 골격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일본인들은 대체로 이를 환영하거나 수용했다. 하지만 편지에 의하면 보통의 일본인들이 일상 생 활에서 접하는 개혁과 민주화의 실상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매우 높았고, 그에 대한 비 판도 신랄했다. 특히 통치기구의 말단과 지방 사회에서 개혁과 민주화에 대한 반응은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의견이 많았고, ‘특권계급’의 온존을 강하게 비판했다. 개혁과 민주화가 제도의 수립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운영주체의 변화를 포함하여 운영 의 실상이 보다 중요한 평가기준이라고 할 때 편지에 나타난 이러한 반응은 전후개혁 자체에 대한 재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쟁책임 문제를 언급한 편지들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점령 직후만 해도 전범 고발 편지가 많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범 혐의를 부인하거나 무죄를 주장하는 편 지들이 많아지고 심지어 전범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편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미국의 주도로 천황이 면책되는 등 전범재판이 일본과 미국의 합작에 의한 정치재판 의 성격을 띠게 됨으로써 전쟁책임이 희석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고, 전범 재판이 A급 전범재판에서 B·C급 전범재판으로 옮아가면서 전쟁책임이 부정될 수 있 는 사회적 여건이 확대되었다. 전쟁책임과 관련해 국민 사이에 지배자는 가해자, 국민 은 피해자라는 ‘피해자론’이 확산되었고, 전쟁책임의 방기는 지배층의 타민족 침략과 식민지화의 가담자로서 국민의 책임에 대한 자각도 봉쇄했다. 일본인들의 편지에서 재일조선인은 식량난의 원인,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골치 덩어리, 정치적 불안을 일으키는 빨갱이로 인식되었다. 또 그러한 인식의 밑바닥에서 전전부터 존재하던 인종적·민족적 편견이 여전히 작동했으며, 한반도 분단, 냉전의 도 래와 같은 전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가 그러한 편견에다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당 시 일본 사회의 재일조선인관을 그것이 형성되는 정치·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배경까 지 시야에 넣고 보면 재일조선인은 전후 일본 사회가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식민지 배의 상징이었다기보다 일본 사회의 혼란과 모순을 은폐하거나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기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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