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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에 대한 내러티브 연구 KCI 등재후보

임지선

한국국제문화교류학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구 문화교류연구) 제6권 제2호 2017.05 pp.129-149

...한인들의 문화적응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이해하 는데 있다. 연구참여자는 유목적 표집 추출 방법에 의하여 미국이주 한인 7명을 선정하 였으며, 자료수집 기간은 2014년 9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약 12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자료분석을 통해 연구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내러티브적으로 코딩하고 주제를 전개하였 다.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의 의미는 ‘사막’으로 은유되었다.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 경험은 ‘설레는 여정의 시작’이자 ‘새로운 곳에서의 당찬 포부’를 의미하는 동 시에, 사막에서의 낯선 여정이 이어지면서 드러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립감’과 ‘생존 을 위한 투쟁’, 그리고 ‘계속되는 도전’ 등의 ‘험난한 사막의 실체’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이와 같은 본 연구의 결과는 미국이주 한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화적응 삶에 대하여 이해하는데 보다 생생하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미국문화 에 적응해가는 미국이주 한인들의 이야기와 문화적응의 의미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살 펴본 본 연구의 결과는 향후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을 위한 기초적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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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이해하 는데 있다. 연구참여자는 유목적 표집 추출 방법에 의하여 미국이주 한인 7명을 선정하 였으며, 자료수집 기간은 2014년 9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약 12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자료분석을 통해 연구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내러티브적으로 코딩하고 주제를 전개하였 다.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의 의미는 ‘사막’으로 은유되었다.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 경험은 ‘설레는 여정의 시작’이자 ‘새로운 곳에서의 당찬 포부’를 의미하는 동 시에, 사막에서의 낯선 여정이 이어지면서 드러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고립감’과 ‘생존 을 위한 투쟁’, 그리고 ‘계속되는 도전’ 등의 ‘험난한 사막의 실체’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이와 같은 본 연구의 결과는 미국이주 한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화적응 삶에 대하여 이해하는데 보다 생생하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미국문화 에 적응해가는 미국이주 한인들의 이야기와 문화적응의 의미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살 펴본 본 연구의 결과는 향후 미국이주 한인들의 문화적응을 위한 기초적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사료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eply understand the meaning of Korean immigrants’ acculturation in the United States. Narrative inquiry which is one of the qualitative research methods was used to analyze the results. Seven Korean immigrants were selected by using criterion-based selection and provided with their experiences and stories of acculturation. The entire data collection period was about 12 months from September 2014 to August 2015. The data were collected through in-depth interviews. In order to analyze the data, the recorded in-depth interviews were transcribed. In addition to the interviews, other unofficial communications with the participants, such as e-mails, telephone calls, text messages were also analyzed. The participants’ stories were coded narratively by adding time and space, person, and events in the past, present, and future to the flow of the stories under the main research theme of Korean immigrants’ acculturation in the United States. After the stories were coded, each participant’s story was restructured. The meaning of the experiences shared by the participants was found by classifying and analyzing the narrative stories. The meaning of the acculturation in each participant’s story was expressed through the metaphor of “desert.” In this study, “desert” is used as a metaphor for the Korean immigrants’ acculturation process. Experience of the Korean immigrants’ acculturation process, which is likened to “desert,” is “brightness of the desert” and it also means “darkness of the desert.” This study provides more vivid and rich materials to understand Korean immigrants’ acculturation process from their perspective. This study would also extend the understanding relating to the meaning of Korean immigrants’ acculturation process in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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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에 대한 내러티브 탐구 KCI 등재후보

이현철, 이채문, 박신규

한국지역문화학회 지역과 문화 제4권 제1호 2017.03 pp.43-61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에 집중하고 이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브라질 현지의 총 20명을 연구참여자로 선정하였으며, 2015년 12월 28일에서 2016년 1월 10일까지 브라질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현지조사와 심층면담을 수행하였다. 이들의 경우 브라질 한인 디아스포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내재하고 있는 디아스포라로서의 특징적인 이주와 정착 과정에 대한 요소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수집된 심층면담자료의 경우 파랑새 2.0을 통해 분석이 이루어졌다. 연구결과 브라질 한인 디아스포라의 이주와 정착에 대한 내러티브는 크게 5가지의 측면으로서 1) 생존기술로서의 봉제기술과 ‘벤데(vendor)’를 통한 이주와 정착, 2) 사회적 연결망에 기반한 브라질 사회로의 이주와 정착, 3) 종교 활동을 통한 한인 공동체 형성을 통한 이주와 정착, 4) 한인의 높은 교육열에 의한 자녀교육 지원을 통한 이주와 정착, 5) 경제적 성공을 향한 강한 열망의 표출을 통한 이주와 정착 등의 측면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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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내러티브 탐구를 활용하여 브라질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에 집중하고 이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브라질 현지의 총 20명을 연구참여자로 선정하였으며, 2015년 12월 28일에서 2016년 1월 10일까지 브라질 상파울루를 중심으로 현지조사와 심층면담을 수행하였다. 이들의 경우 브라질 한인 디아스포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내재하고 있는 디아스포라로서의 특징적인 이주와 정착 과정에 대한 요소들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수집된 심층면담자료의 경우 파랑새 2.0을 통해 분석이 이루어졌다. 연구결과 브라질 한인 디아스포라의 이주와 정착에 대한 내러티브는 크게 5가지의 측면으로서 1) 생존기술로서의 봉제기술과 ‘벤데(vendor)’를 통한 이주와 정착, 2) 사회적 연결망에 기반한 브라질 사회로의 이주와 정착, 3) 종교 활동을 통한 한인 공동체 형성을 통한 이주와 정착, 4) 한인의 높은 교육열에 의한 자녀교육 지원을 통한 이주와 정착, 5) 경제적 성공을 향한 강한 열망의 표출을 통한 이주와 정착 등의 측면으로 드러났다.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explore migration and settlement of the Korean diaspora in Brazil. To achieve the goal of this research, 20 research participants in total were selected. This study was conducted from December 28, 2015 to January 10, 2016 in São Paulo, Brazil through field works and in-depth interview with Korean immigrants. It turned out that those ethnic Koreans in Brazil carried the characteristics of migration and settlement inherent in diasporic lives. This study used qualitative materials gathered from in-depth interviews using the package Blue Bird 2.0. As a result, we identified critical factors of Korean diasporic lives, and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sewing technology and ‘vendor’ as a survival tactic second, social settlement based on social network; third, formation of the Korean diaspora community through religious activities; fourth, education aspiration for their children in Brazil; fifth, a strong desire for economic wealth and success in Brazil, the country of dest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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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한인의 상부상조(相扶相助) 문화, 1904-1960

이덕희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0호 2016.10 pp.41-72

...한인 이민자들이 어떻 게 도움을 주며 살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 논문은 하와이 한인 이민사에서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상조문화를 처음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과학적인 분석에 까 지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임을 밝힌다. 다행스럽게도 이민자 이름, 성별, 나이 등을 포함 한 명단은 있지만 이민자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에 관한 자료는 전무하여, 상조활동을 펼친 사람들의 배경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한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 이민 자의 상조활동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한 연구도 찾을 수 없다. 이민자들이 펼친 도움의 손길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논문은 도움을 주는 주체의 단위 측면에서 1)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펼친 도움, 2) 개인 차원을 넘어 단 체 구성원으로 또는 단체 활동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간 도움, 그리고 3) 정식으로 상조 (相助)를 목적으로 조직된 상조단체(相助團體)의 활동으로 나누어 본다. 이 과정에서 이 민자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적 후원활동, 예를 들어 대한민국 공채 구입, 국민회를 통해 납부한 애국금, 동지회의 동지식산회사 주식 구입 등은 배제하였다. 제 1장에서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9개 활동, 제 2장에서는 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조 직적으로 펼친 10개 활동, 그리고 제 3장에서는 상조를 목적으로 특별히 조직된 5개 상 조단체의 활동을 돌아본다. 제 4장에서는 동시대에 하와이에서 살아간 중국인과 일본인 들이 조직한 상부상조 단체들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살펴본다. 중국인 이민은 한인 이민 보다 55년 일찍 시작되었고, 한인이 오기 5년 전에 끝났다. 일본인 노동자의 이민은 한 인보다 18년 먼저 시작되어 계속되었다. 하와이라는 다문화사회에서 동시대를 같이 살아 간 이 세 아시아민족은 직접적인 접촉과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언어 차이에 따른 소통의 문제가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드렸다. 음식문화가 가장 좋은 예이다. 그러면서도 이 세 아시아민족은 각기의 독특한 문화성격을 유지하기도 하였다.1 이 논문은 자료 부족으 로 중국인과 일본인 두 아시아 민족의 상조단체를 간략하게나마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한인 상조단체와의 본격적인 비교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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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20세기 초 낯선 하와이에서 새 삶을 꾸려간 한인 이민자들이 어떻 게 도움을 주며 살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 논문은 하와이 한인 이민사에서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상조문화를 처음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과학적인 분석에 까 지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임을 밝힌다. 다행스럽게도 이민자 이름, 성별, 나이 등을 포함 한 명단은 있지만 이민자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에 관한 자료는 전무하여, 상조활동을 펼친 사람들의 배경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한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 이민 자의 상조활동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한 연구도 찾을 수 없다. 이민자들이 펼친 도움의 손길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논문은 도움을 주는 주체의 단위 측면에서 1)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펼친 도움, 2) 개인 차원을 넘어 단 체 구성원으로 또는 단체 활동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간 도움, 그리고 3) 정식으로 상조 (相助)를 목적으로 조직된 상조단체(相助團體)의 활동으로 나누어 본다. 이 과정에서 이 민자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적 후원활동, 예를 들어 대한민국 공채 구입, 국민회를 통해 납부한 애국금, 동지회의 동지식산회사 주식 구입 등은 배제하였다. 제 1장에서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9개 활동, 제 2장에서는 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조 직적으로 펼친 10개 활동, 그리고 제 3장에서는 상조를 목적으로 특별히 조직된 5개 상 조단체의 활동을 돌아본다. 제 4장에서는 동시대에 하와이에서 살아간 중국인과 일본인 들이 조직한 상부상조 단체들은 어떠했는지 간단히 살펴본다. 중국인 이민은 한인 이민 보다 55년 일찍 시작되었고, 한인이 오기 5년 전에 끝났다. 일본인 노동자의 이민은 한 인보다 18년 먼저 시작되어 계속되었다. 하와이라는 다문화사회에서 동시대를 같이 살아 간 이 세 아시아민족은 직접적인 접촉과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언어 차이에 따른 소통의 문제가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드렸다. 음식문화가 가장 좋은 예이다. 그러면서도 이 세 아시아민족은 각기의 독특한 문화성격을 유지하기도 하였다.1 이 논문은 자료 부족으 로 중국인과 일본인 두 아시아 민족의 상조단체를 간략하게나마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한인 상조단체와의 본격적인 비교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mutual assistance activities of 7,400 early Korean immigrants in Hawaii. While these activities can be viewed from various perspectives, this paper looks at it from the level of giver or provider. Whether or not the help was rendered spontaneously and informally by individual(s), as a part of group activities or by the organizations which were formed with the specific purpose of providing assistance. In the first section, nine activities rendered by individual immigrants are traced. The second section analyzes ten activities provided as a part of various activities by groups established for other purposes. In the third section, five organizations, which were established with the specific purpose of providing aid to fellow Koreans, are reviewed. In the fourth section, the paper reviews how Chinese and Japanese immigrants provided needed assistance to their fellow immigrants. Chinese contract laborers started to immigrate to Hawaii fifty-one years ahead (1852) of Koreans and ended in 1898, five years before Koreans' arriving. Japanese contract workers arrived in Hawaii eighteen years earlier (1885) than Korean immigrants and ended in 1924. These three Asiatic immigrant groups along with other ethnic immigrants, such as the Portuguese, contributed to forming multicultural Hawaii, while still maintaining their distinct cultural characters. Because of the limited data and informationon Chinese and Japanese mutual aiding organizations, this cursory examination is made without socio-economic or other scientific analysis, hoping to find some similarities and/or differences among these Asian ethnic gro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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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만 한인사회의 자치운동과 민족정체성 - 중화민국시기 남, 북만지역을 중심으로 -

김춘선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한중미래연구 제7호 2016.08 pp.89-109

...한인사회의 자치운동과 민족정체성을 살펴보았 다. 중화민국시기 동북지역 한인사회의 자치운동은 부동한 세력을 중심으로 다양 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1910년대 남만지역의 경학사 및 이를 이은 부민단 등 자 치단체들은 주로 입적운동(入籍運動)과 역복운동을 통해 지방당국을 비롯한 당 지 한족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한인사회를 대표하여 토지문제와 교육문 제 등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한인사회의 자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이들 단체들이 추진했던 한인사회의 자치운동은 한인들의 민족정체성을 재확립 시킴과 동시에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속적인 전개에 크게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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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중화민국시기 재만 한인사회의 자치운동과 민족정체성을 살펴보았 다. 중화민국시기 동북지역 한인사회의 자치운동은 부동한 세력을 중심으로 다양 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1910년대 남만지역의 경학사 및 이를 이은 부민단 등 자 치단체들은 주로 입적운동(入籍運動)과 역복운동을 통해 지방당국을 비롯한 당 지 한족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한인사회를 대표하여 토지문제와 교육문 제 등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한인사회의 자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이들 단체들이 추진했던 한인사회의 자치운동은 한인들의 민족정체성을 재확립 시킴과 동시에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속적인 전개에 크게 공헌하였다.

In this article, I examined the autonomous movement and ethnic identity of Korean society in Manchria during the period of the Republic of China. During the period of the Republic of China, the autonomous movement of the Korean community in the northeastern region was developed into various forms. In the 1910s, the autonomous organizations such as ‘Kyonghaksa’ in Southern Manchuria and ‘Bumindan’ tried to embody the autonomy of Korean society by strengthening their relationship with the Han Chinese and directly intervening in land issues and educational issues on behalf of the Korean community. The self-governing movement of the Korean society that these groups pursued at this time reaffirmed the Korean national identity and contributed to the continuous development of the anti-Japanes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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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사랑방을 통해 본 재일한인 1세의 삶과 고향의식 KCI 등재

박신규, 이토히로코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비교일본학 제36집 2016.06 pp.113-130

...한인의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들려줄 재일한인 1세의 삶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분석해 보고 재일한인 1세의 고령화에 따른 그들의 고향의식 변화도 살펴보는 것이다. 구술생애사라는 연구방법을 선택하고 재일한인거주지 중 60세 이상의 비율이 높은 오사카 지역을 선정하여 사랑방이라는 시설을 이용하는 재일한인 1세 3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과 고향의식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재일한인 1세의 삶의 변화에 따른 고향의식의 특징은 초기 일본 경험에 따른 부유(浮游)하는 고향이미지, 경계인으로서의 삶과 적응, 그리고 상실된 고향, 나이 듦・상상의 공동체로서 고향의식 강화라는 특징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령화와 관련하여 고향지향성이 강화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은 이제 어렸을 때 경험함 환경, 은유의 장소이면서 한민족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하는 상상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고령화와 함께 강화되는 이들의 고향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도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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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전통적인 디아스포라의 개념을 지니면서 재일한인의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들려줄 재일한인 1세의 삶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분석해 보고 재일한인 1세의 고령화에 따른 그들의 고향의식 변화도 살펴보는 것이다. 구술생애사라는 연구방법을 선택하고 재일한인거주지 중 60세 이상의 비율이 높은 오사카 지역을 선정하여 사랑방이라는 시설을 이용하는 재일한인 1세 3인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과 고향의식을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재일한인 1세의 삶의 변화에 따른 고향의식의 특징은 초기 일본 경험에 따른 부유(浮游)하는 고향이미지, 경계인으로서의 삶과 적응, 그리고 상실된 고향, 나이 듦・상상의 공동체로서 고향의식 강화라는 특징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령화와 관련하여 고향지향성이 강화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은 이제 어렸을 때 경험함 환경, 은유의 장소이면서 한민족이라는 관념을 만들게 하는 상상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고령화와 함께 강화되는 이들의 고향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도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lives of the first generation Japanese-Korean through the analysis of their voices. First generation Japanese-Korean have lived like traditional concept of diaspora. So look to analyze their lives in a narrative way of history from below. In particular, this study is find out the immigrants’ lives and the Sense of Home for First generation Japanese-Korean with their aging As a result of having an oral history of the selected 3 first generation Japanese-Koreans in ‘Sarangbang’ Osaka to analyze their lives and the sense of home, it characterized as follows: the floating images hometown according to the early Japanese immigrants living, the life and adaptation as a marginal man and the lost homeland, the aging and strengthening the sense of home as Imagined Communities. Particularly with regard to aging, they have been strengthened the home orientation. However, they got older, home to them are now environment they experienced as a young child. and place of a metaphor. They also get home to make the notion of the Korean people positioning as Imagined Communities. In addition also it showed that physical space is required to relieve their sense of home is enhanced with a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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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의 ‘제호’ 변화를 통한 192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 읽기

주동완, 임영상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9호 2016.06 pp.55-88

...한인사회에서 『三月一日』이라는 이름 으로 창간되었다가 곧 『선봉』(아방가르드, Авангард)이란 이름으로 바뀐 선봉신문의 경우는 다르다. 수시로 제호의 글자체와 글자체의 크기 및 제호의 위치는 물론 제호 디자 인까지 자유자재로 바꾸었고, 이러한 제호의 변화는 1937년 9월 12일 폐간될 때까지 약 15년 동안 이어졌다. 『선봉』의 판형변화를 포함한 제호의 변화를 통해서 192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의 사회 적 변동을 봤을 때, 신문의 판형과 글자쓰기 및 제호 등에서 가장 크게 변한 1925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시기가 연해주 한인사회의 가장 큰 변동의 시기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변동의 방향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었다. 『선봉』은 단순히 연해주 한인 사회의 뉴스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아니었다. 『선봉』은 격동의 시기였던 1920년대 연해주 사회에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공산당의 강령과 정책을 한인사회에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인 선동에 나선 미디어였다. 따라서 『선봉』의 많은 내용은 이러한 공산당의 선전ㆍ선동이 어떻게 연해주 한인사회 에 전파되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선봉』은 당시의 연해주 한인사회의 여론을 이끌어가기도 했지만, 역으로 한인사회의 사회적 변동 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봉』의 제호 변화는 바로 이러한 192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의 사회적 변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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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제호(Nameplate)는 신문 1면의 상단에 위치한 ‘신문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신문의 제호는 신문의 창간과 더불어 그 신문의 성격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일단 신문이 창간되고 나면 신문 제호는, 그것이 신문 1면에서 배치되는 위치조차도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3월 1일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三月一日』이라는 이름 으로 창간되었다가 곧 『선봉』(아방가르드, Авангард)이란 이름으로 바뀐 선봉신문의 경우는 다르다. 수시로 제호의 글자체와 글자체의 크기 및 제호의 위치는 물론 제호 디자 인까지 자유자재로 바꾸었고, 이러한 제호의 변화는 1937년 9월 12일 폐간될 때까지 약 15년 동안 이어졌다. 『선봉』의 판형변화를 포함한 제호의 변화를 통해서 192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의 사회 적 변동을 봤을 때, 신문의 판형과 글자쓰기 및 제호 등에서 가장 크게 변한 1925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시기가 연해주 한인사회의 가장 큰 변동의 시기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변동의 방향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었다. 『선봉』은 단순히 연해주 한인 사회의 뉴스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아니었다. 『선봉』은 격동의 시기였던 1920년대 연해주 사회에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공산당의 강령과 정책을 한인사회에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인 선동에 나선 미디어였다. 따라서 『선봉』의 많은 내용은 이러한 공산당의 선전ㆍ선동이 어떻게 연해주 한인사회 에 전파되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선봉』은 당시의 연해주 한인사회의 여론을 이끌어가기도 했지만, 역으로 한인사회의 사회적 변동 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봉』의 제호 변화는 바로 이러한 1920년대 연해주 한인사회의 사회적 변동과 그 궤를 같이 한다.

The “nameplate” refers to the name of the newspaper, which is located at the top of the first page of the newspaper. It reveals the type and identity of the newspaper when it was first published, and it is hard to be placed including the location on the first page after it is published. However, this cannot be applied to Sunbong(Avant-Garde) newspaper, which was originally named ‘March 1st’ newspapter when it was first published on March 1, 1923 in the Primorsky Krai Korean community. The name of the newspaper was soon changed to Sunbong (Avant-garde). The font style, the size of the font, the location of the nameplate, as well as the design of the nameplate were frequently changed. This continued for about 15 years until the publication of the newspaper was discontinued. It is historically examined the social change in Primorsky Krai’s Korean Community in 1920s by scrutinizing the changes in the nameplate of the newspaper including the format and the size. These changes were evident from 1925 to 1926. It is found that the Korean community went through the biggest changes during the same period and the direction of the changes were to the establishing Soviet Society. Sunbong Newspapter was not simply distributing information about the Korean community of Primorsky Krai. It was a medium that actively advertised Communist thoughts and instigated Communist doctrine and policies in the Korean community. Therefore, much of the contents in Sunbong Newspaper become precious historical records that can reveal how these communist propaganda were spread among Primorsky Krai’s Korean community and influenced the people of the community. Sunbong Newspaper led the public sentiment of modern Korean community of Primorsky Krai. On the contrary, it also revealed the social change of the same Korean community. The change in the nameplate of Sunbong Newspaper reflects the changes in the Korean Community of Primorsky Krai in the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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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디아스포라 한인의 초국적 경험과 의미 분석 KCI 등재후보

문현아, Christian Joon Park

한국구술사학회 구술사연구 제7권 1호 2016.06 pp.137-186

...한인의 경험을 구술생애사 방법론을 활용해 설명하면서 그 경험의 초국적 의미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나 경험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실증 자료를 통해 초국적 경험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이들에 대한 ‘한국인 중심주의’의 해석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이 논문은 그 시도의 일환으로 다중적이고 탈-한민족 중심적인 다층적인 초국적 경험의 의미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활용된 방법론은 협력적 구술생애사 방법론이다. 이를 통해 논문에서 분 석하는 구술대상은 1945년이라는 시기를 공통적 특징으로 공유하는 동질적 측면을 보이는 집단임과 동시에 그 내부적으로 다채로운 차이를 드러내는 집단으로 2000년 을 기점으로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이다. 디아스포라인의 초국적 경험은 구술자 개인들의 이주경로에서의 차이로부터 시작해서 국적을 선택하는 시기와 계기 의 다양성으로 연결된다. 무국적에서 북조선 혹은 러시아국적 취득에 이어 한국 국적 취득으로 이어지는 국적 취득/변경의 경험은 그에 따른 이름과 언어의 변환과 맞물려 초국적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형성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경험은 영주귀국으로 돌아온 사할린 한인의 삶에서 여전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런 초국적 디아스포라인의 경험 은 단 하나의 국적으로 하나의 영토에 뿌리내린 한국인 정체성과는 상당히 다른 과정 일 수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 과정을 추적하는 속에서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는 단일하지 않은 경 험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재외 한인의 이런 현실이 한국인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 결되는지를 되묻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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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사할린 한인의 경험을 구술생애사 방법론을 활용해 설명하면서 그 경험의 초국적 의미를 분석하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나 경험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실증 자료를 통해 초국적 경험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이들에 대한 ‘한국인 중심주의’의 해석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이 논문은 그 시도의 일환으로 다중적이고 탈-한민족 중심적인 다층적인 초국적 경험의 의미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활용된 방법론은 협력적 구술생애사 방법론이다. 이를 통해 논문에서 분 석하는 구술대상은 1945년이라는 시기를 공통적 특징으로 공유하는 동질적 측면을 보이는 집단임과 동시에 그 내부적으로 다채로운 차이를 드러내는 집단으로 2000년 을 기점으로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인’이다. 디아스포라인의 초국적 경험은 구술자 개인들의 이주경로에서의 차이로부터 시작해서 국적을 선택하는 시기와 계기 의 다양성으로 연결된다. 무국적에서 북조선 혹은 러시아국적 취득에 이어 한국 국적 취득으로 이어지는 국적 취득/변경의 경험은 그에 따른 이름과 언어의 변환과 맞물려 초국적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형성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경험은 영주귀국으로 돌아온 사할린 한인의 삶에서 여전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런 초국적 디아스포라인의 경험 은 단 하나의 국적으로 하나의 영토에 뿌리내린 한국인 정체성과는 상당히 다른 과정 일 수밖에 없다. 이 논문은 이 과정을 추적하는 속에서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는 단일하지 않은 경 험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재외 한인의 이런 현실이 한국인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 결되는지를 되묻는 시도다.

This paper aims to illuminate the experiences of Sakhalin ethnic Koreans through oral life history and analyze them from a transnational perspective. Although there are existing literatures that focus on the history and experiences of Sakhalin ethnic Koreans, rarely are there attempts to go beyond the ‘Korean centered’ interpretation of their transnational experienc es. This paper seeks to make this rare a ttempt by illustrating diverse, post-nationalist (breaking away from the boundaries of the Korean nation), and multi-layered aspects of the transnational experiences of Sakhalin ethnic Koreans. While applying the methodology of oral life history to the study of Sakhalin ethnic Koreans, this paper briefly introduces an experimental methodology called collaborative oral life history. The oral life histories gathered through such a methodology are then analyzed with a framework of chronotope which is often used in diaspora studies. In doing so, this paper delves into the variety of migration routes of the Sakhalin ethnic Koreans and the issues that led to their nationality change. Based on these factors, their identity formation is examined through observing changes in their names, languages, and characteristics or stereotypes as an ethnic group. M oreover, with t he p urpose o f c onnec ting t he diasporic history with t he c olonial h istory o f Korea, t his paper trac es t heir d iasporic experiences of how they encountered new realities and cultures in their residing country while maintaining the old culture and customs from their homeland. Ultimately, this paper emphasizes the significance of transnational diaspora towards an imagined community, as the transnational experiences discussed above are treated as continuously unfolding ones with open pos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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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적응의 진자(振子)운동 : 올드커머 재일한인과 일본 사회 KCI 등재

송석원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28집 2016.05 pp.147-176

...한인의 갈등과 조화 사이를 진자(振子)운동하는삶은 ‘재일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민족’을 표상하는 삶이었다. 취업, 공영주택입주조건, 재류권, 국민연금, 지문날인제도, 참정권 요구 등에서 우리는 이러한 ‘재일의 논리’가 일관되게 주장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재일한인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인과의 사이에서만 갈등과 적응의 진자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재일한인 사이의 세대 간에서도, 같은 세대이면서도 모국의 정치현실이 투영된 이념대립의 영향을 받아 서로 반목하는 그룹들 사이에서도, 모국인 한국 및 한국에 거주하는 그들의 친인척과의 사이에서도 이러한 진자운동은 발견된다. 재일한인들은 이와 같이 다층적인 갈등과 적응의 진자운동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재일한인 사회 구성원의 세대교체 및 뉴커머 등장은 진자운동하는 재일한인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터였다. 국적법의 개정과 재일한인과 일본인 간의 국제결혼 건수가 증가함에 따라 재일한인의 일본인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출생한 올드커머 2세, 3세 등의 재일한인에게 ‘민족’은 더이상 표상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초극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들이 조국, 민족을 넘어서려 했을 때, 그것은 ‘배반’이 아니라 ‘초월’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재일한인의 삶은 갈등과 적응, 조화와 저항을 반복하며 “싫어하고, 동경하고, 버려지고, 발견하고, 자각하는”(윤건차) 일상이었다. 일본을 동경하고 한국을 발견하면서 ‘자이니치’를 자각한 재일한인의 삶은 거꾸로 현대 한국과 일본의 민낯을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재일한인에게는 여전히 탈식민주의와 탈냉전이라는 이중적인 과제가 동시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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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戰後) 모국으로 귀국하지도 하지 않고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지도 않은 채 자이니치를 자각하며 산 올드커머 재일한인의 갈등과 조화 사이를 진자(振子)운동하는삶은 ‘재일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민족’을 표상하는 삶이었다. 취업, 공영주택입주조건, 재류권, 국민연금, 지문날인제도, 참정권 요구 등에서 우리는 이러한 ‘재일의 논리’가 일관되게 주장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재일한인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인과의 사이에서만 갈등과 적응의 진자운동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재일한인 사이의 세대 간에서도, 같은 세대이면서도 모국의 정치현실이 투영된 이념대립의 영향을 받아 서로 반목하는 그룹들 사이에서도, 모국인 한국 및 한국에 거주하는 그들의 친인척과의 사이에서도 이러한 진자운동은 발견된다. 재일한인들은 이와 같이 다층적인 갈등과 적응의 진자운동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재일한인 사회 구성원의 세대교체 및 뉴커머 등장은 진자운동하는 재일한인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터였다. 국적법의 개정과 재일한인과 일본인 간의 국제결혼 건수가 증가함에 따라 재일한인의 일본인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출생한 올드커머 2세, 3세 등의 재일한인에게 ‘민족’은 더이상 표상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초극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들이 조국, 민족을 넘어서려 했을 때, 그것은 ‘배반’이 아니라 ‘초월’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재일한인의 삶은 갈등과 적응, 조화와 저항을 반복하며 “싫어하고, 동경하고, 버려지고, 발견하고, 자각하는”(윤건차) 일상이었다. 일본을 동경하고 한국을 발견하면서 ‘자이니치’를 자각한 재일한인의 삶은 거꾸로 현대 한국과 일본의 민낯을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재일한인에게는 여전히 탈식민주의와 탈냉전이라는 이중적인 과제가 동시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Old-comer Korean-Japanese have lived as ‘Zainichi’ and moved back and forth between conflict and harmony as they neither went back to their home country after the World War Ⅱ nor became naturalized as a Japanese citizen. Their lives represented ‘nationality’ and put forward ‘the logic of Korean- Japanese.’ We can find the evidence of ‘the logic of Korean-Japanese’ in getting a job, conditions for moving in public housing, the rights of staying, the national pension, the fingerprinting system, and requiring suffrage. Surely, Korean-Japanese did not make a pendulum movement of conflict and adaptation only between Japanese people in Japanese society. We can detect this kind of pendulum movement in three groups: between the same Korean-Japanese generations, the same generation but at odds among themselves due to ideological confrontations originated from their mother country’s political status, and their relatives living in Korea. Korean-Japanese should lead a life in the multi-layered pendulum movement of conflict and adaptation like this. A shift in generations of Korean-Japanese community and the appearance of new-comers brought about qualitative changes in the life of Korean-Japanese. As the nationality law has been revised and the number of international marriage between Korean-Japanese and Japanese has increased, Korean-Japanese have naturally become Japanese. To Old-comer second or third-generation Korean-Japanese, born and raised in Japan, ‘nationality’ is not what to represent but what to overcome. When they go beyond their country or even nationality, Korean-Japanese seem to pursue transcendence, not betrayal. Anyhow, the life of Korean-Japanese is nothing but routine that ‘hates, admires, is abandoned, identifies, and realizes (Yoon, Keun Cha)’ in a circle of conflict and adaptation, harmony and resistance. Korean-Japanese live a life that admires Japan, identifies Korea, and eventually realizes ‘Zainichi’ and their lives mirror the naked truth of modern Korea and Japan. And at the same time, Korean-Japanese still have a twofold problem: post colonialism and post-Cold War.

戦後、母国に帰国もせず日本の国籍に帰化もせず在日を自覚しながら生きてきたオールド カマー在日韓国人の葛藤と調和とのあいだを振り子のように揺れ動く生き方は ‘在日の論理’ を前面に打ち出して ‘民族’を表象する生き方であった。就職、公営住宅への入居条件、在 留権、国民年金、指紋押捺制度、参政権の要求などで、我々はこうした ‘在日の論理’が一 貫して主張されてきたの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むろん、在日韓国人は日本社会で日本人 とのあいだでのみ葛藤と適応とを繰り返してきたわけではなかった。在日韓国人同士の中の それぞれの世代のあいだでも、同一世代でありながらも母国の政治現実が投影されたイデオ ロギーの対立の影響を受け反目し合うグループのあいだでも、また母国である韓国および韓 国に居住している彼らの親戚や姻戚とのあいだでも、こうした振り子の状況は見受けられる のである。在日韓国人は、このように多層的な葛藤と適応のあいだを揺れ動く振り子のよう な生活を余儀なくされてきたのである。 在日韓国人社会の構成員の世代交代およびニューカマーの登場は在日韓国人の生活にも 質的な変化をもたらした筈である。国籍法の改正、在日韓国人と日本人のあいだの国際結婚 の増加などによって在日韓国人の日本人化現象は自然なもの、であると受け止められるよう になったからである。日本生まれのオールドカマー2世、3世などの在日韓国人に ‘民族’はも はや表象すべき対象ではなく、むしろ超克すべき対象でしかなかった。彼らが民族のカベを 越えようとした際、それは ‘裏切り’ではなく ‘超越’を志向したのではなかったであろうか。 いずれにせよ、在日韓国人の生活は葛藤と適応、調和と抵抗を繰り返しながら、“嫌い、あ こがれ、捨てられ、発見し、自覚する”(尹健次)日常であったといえる。日本をあこがれ韓国 を発見しながら‘ザイニチ’を自覚した在日韓国人の生活は現代の韓国や日本の素顔を写す鏡 でもあるといえよう。しかも在日韓国人には依然として脱植民主義や脱冷戦という二重の課 題が立ちはだかっている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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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 풍물 활동가들의 문화실천과 의미 KCI 등재후보

김연정

한국구술사학회 구술사연구 제6권 2호 2015.12 pp.49-72

...한인 풍물 활동가들의 내러티브를 통해 해외에 거주하면서 전통연희인 풍물을 그들의 삶의 중심에 놓고 활동하는 이들이 어떻게 풍물을 만나고 풍물에 대해 인식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문화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지를 조명하였다. 미국 내 거주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풍물 활동을 하고 있는 5명의 삶 이야기를분석하였는데, 삶의 터전의 급격한 전환을 겪은 이민자들의 삶과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문제, 가족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는 한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개개인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풍물을 만남으로써 자아에 대해 다시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되었으며 자신과 사회, 자신과 민족, 자신과 문화의 관계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삶의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민 생활 속에서 풍물 활동을 하면서 풍물이 가지고 있는 힘 즉, 개방적인통일성과 집단적 신명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풍물에대해 전통적 연희로서의 예술성, 신명성, 그리고 공동체적 대동성이 풍물의 중요한 가치인 것을 경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풍물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아 존중감을 갖게 되고, 지역 사회에서 세계 시민으로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로서 풍물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바탕으로 재미 한인 풍물 활동가들은 미국 내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주류사회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공동체적 연대의 의미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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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재미 한인 풍물 활동가들의 내러티브를 통해 해외에 거주하면서 전통연희인 풍물을 그들의 삶의 중심에 놓고 활동하는 이들이 어떻게 풍물을 만나고 풍물에 대해 인식하며 그들의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문화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지를 조명하였다. 미국 내 거주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풍물 활동을 하고 있는 5명의 삶 이야기를분석하였는데, 삶의 터전의 급격한 전환을 겪은 이민자들의 삶과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문제, 가족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는 한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개개인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풍물을 만남으로써 자아에 대해 다시 인식하는 계기를 갖게되었으며 자신과 사회, 자신과 민족, 자신과 문화의 관계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삶의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이민 생활 속에서 풍물 활동을 하면서 풍물이 가지고 있는 힘 즉, 개방적인통일성과 집단적 신명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풍물에대해 전통적 연희로서의 예술성, 신명성, 그리고 공동체적 대동성이 풍물의 중요한 가치인 것을 경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풍물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아 존중감을 갖게 되고, 지역 사회에서 세계 시민으로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로서 풍물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바탕으로 재미 한인 풍물 활동가들은 미국 내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주류사회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공동체적 연대의 의미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listen to the voices of Korean Americans who had been involved in traditional cultural activities and to illuminate the meanings and values of cultural identity among Korean American Pungmul players. This study focuses on eliciting how the Korean Americans who were involved in their traditional ethnic art form describe and define themselves in their own terms, rather than how others view them. Using narrative methodology, a series of face to face interviews were conducted with a special focus on the same interest group’s narratives. All interviews were recorded and transcribed verbatim. Analysing the narratives, I could ascertain the patterned way of immigration in different generations. Most importantly they are making meaning of their lives through Pungmul even though each of them are socializing it differently. They recognized that Pungmul has the power of self esteem, collective celebration and social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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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를 ‘민족국가’로 회수하지 않기 : 국사편찬위원회 수집 사할린 한인 구술 자료를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이상록

한국구술사학회 구술사연구 제6권 2호 2015.12 pp.11-48

...한인의 경우,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전형으로 상정되어 이들을 영주귀국 시키려는 노력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환’ 또는 ‘영주귀국’으로 사할린 한인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은 한국으로도 러시아로도 회수될 수 없는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재외동포’ 또는 ‘디아스포라’라는 명명은 그런 점에서 경계인으로서의 재외한인의 정체성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한 사할린 한인들의 구술을 살펴보면, 이들은 일제시기사할린 강제 이주 이후 한국으로의 귀환을 강렬히 원하였으나, 귀환이 불가능해진 상황임을 깨닫고도 무국적자로 살아갔다. 무국적자로 이들은 이주의 자유가 제약당하였으며, 학업이나 취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감수해야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소련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국적을 취득하더라도 소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없고,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었던 이들의 모습에서 경계인으로서의삶과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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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었으나 조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자들에 대해 한국사회는 ‘재외동포’라고명명하면서 이들이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거나, 현지에서도‘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모국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재외동포’ 담론을 지배해왔다. 특히 일제의 강제동원 이후 귀환을 강력히 원하였으나 현지에서 억류된 사할린 한인의 경우,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전형으로 상정되어 이들을 영주귀국 시키려는 노력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환’ 또는 ‘영주귀국’으로 사할린 한인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은 한국으로도 러시아로도 회수될 수 없는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재외동포’ 또는 ‘디아스포라’라는 명명은 그런 점에서 경계인으로서의 재외한인의 정체성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한 사할린 한인들의 구술을 살펴보면, 이들은 일제시기사할린 강제 이주 이후 한국으로의 귀환을 강렬히 원하였으나, 귀환이 불가능해진 상황임을 깨닫고도 무국적자로 살아갔다. 무국적자로 이들은 이주의 자유가 제약당하였으며, 학업이나 취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감수해야했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소련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국적을 취득하더라도 소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없고,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었던 이들의 모습에서 경계인으로서의삶과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Overseas compatriots’ discourse has been dominated by the idea that it should be able to return to his country as soon as possible so that even local or overseas Koreans in the constantly pay attention not to forget the fact that Koreans’ home country. In particular, the strong hoe was detained in Sakhalin Koreans mobilized by Japan Empire, was assumed as a typical of the ‘Korean diaspora’ had the effort to return them. However, the problem of Sakhalin Korean as “return home” could not to be solved at once. Koreans living in Russia beings created this new identity can not be recovered even by South Korea in the Russian Federation. ‘Overseas compatriots’ or ‘diaspora’ naming that includes the violence on the identity as a boundary of overseas Koreans in that respect. Reviewing the Sakhalin Koreans oral history archives collected by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they strongly wanted to return to South Korea after Japanese rule in Sakhalin. But they could not return to his country, stateless persons live. Stateless persons as they were limiting the freedom of migration, including academic and employment had to take the discrimination in a number of ways. Even acquiring a lot of effort, but at the end of the Soviet nationality acquire a nationality could not feel the Soviets identity. In view of these could also be equated with identity as a Korean, you can see the boundary as life and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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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한인 문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KCI 등재후보

권택영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제16호 2015.08 pp.9-20

...한인 문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필요한 점이 무엇인지 살피는 소고이다. 그리고 타국에 살면서 모국의 문화를 세계화 시킨 불멸의 작가들로 미국의 헨리 제임스,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러시아계 미국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이창래와 차학경의 성공과 쇠퇴의 배경을 당대 패러다임의 시작과 끝이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타국에서 경험하는 삶의 현장성과 모국의 문화적 뿌리를 잘 조화시켜야한다는 필수조건도 드러났다. 모국의 언어와 타국의 언어가 다른 점이 작가로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두 작가는 바로 그 어려움을 주제로 삼아 성공하였다. 제임스와 조이스는 같은 영어를 사용하였기에 당대의 패러다임을 포착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기법을 개척하였다. 전자는 리얼리즘문학, 후자는 모더니즘문학의 최고점을 성취한다. 나보코프는 이보다 힘든 경우였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옮겨야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들은 더 생명이 길다.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에도 적용되고 최근의 새로운 융복합적 패러다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해 외로움과 낯설음의 고통은 작가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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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창래와 차학경의 작품을 통해 국제 한인 문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필요한 점이 무엇인지 살피는 소고이다. 그리고 타국에 살면서 모국의 문화를 세계화 시킨 불멸의 작가들로 미국의 헨리 제임스,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러시아계 미국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이창래와 차학경의 성공과 쇠퇴의 배경을 당대 패러다임의 시작과 끝이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타국에서 경험하는 삶의 현장성과 모국의 문화적 뿌리를 잘 조화시켜야한다는 필수조건도 드러났다. 모국의 언어와 타국의 언어가 다른 점이 작가로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두 작가는 바로 그 어려움을 주제로 삼아 성공하였다. 제임스와 조이스는 같은 영어를 사용하였기에 당대의 패러다임을 포착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기법을 개척하였다. 전자는 리얼리즘문학, 후자는 모더니즘문학의 최고점을 성취한다. 나보코프는 이보다 힘든 경우였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옮겨야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들은 더 생명이 길다.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에도 적용되고 최근의 새로운 융복합적 패러다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해 외로움과 낯설음의 고통은 작가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Once Russian Formalists thought Literature is an act of defamiliarization to give arise a time to think in appreciating it. For intercultural-writers, that definition would be inverted into familiarization of the differences of languages and cultures existing in different countries. The necessary condition to achieve a success is to overcome those differences by sublimating that difficulty in accordance with the new paradigm. I have examined the ways they succeed and failed through two examples of Korean-American writers, Chang-rae Lee and Hak-kyung Cha. Slightly different yet very similarly, we have three other great writers who made success in adapting new culture in harmony with native culture, and above all, to renovate the form of art corresponding to the new paradigm: Henry James, the 19th century American Writer, James Joyce, the 20th century British Writer, and the 20th century Russian-American writer, Vladimir Nabokov. I have briefly shed light on those writers in terms of the artistic spirits and for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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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pose of this study to 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family support and self-esteem among middle-aged Korean women immigrants in Australia with a focus on the effects of depression, which seems to likely mediate these two variables. For the purpose of this study, 147 middle-aged Korean women who live and work in Sydney, Australia, were studied. A statistical method was carried out using descriptive statistics, correlation analysis and reliability analysis by using SPSS ver.18.0. To verify the hypothesis of the research model that was suggested in this study, with the structural equation, AMOS ver.7.0 program was used. The analytical results are as follows. Firstly, family support had an influence on depression and self-esteem and depression had an effect on self-esteem. Secondly, family support had an influence on self-esteem by having depression as a mediation. This outcome not only offers information on self-esteem, which is the psychological welfare of Korean middle-aged women who live in Australia, but also enhances the self-esteem of all middle-aged Koreanwomen who abroad, not just in Australia. Therefore, the study provide basic data support a program related to the welfare of immigrant women who live overseas along with policies for those immigrant women to have successful lives as immigrants. In addition to this, an exploratory research on relevant variables that influence self-esteem will have significant implications even to policies on multi-cultural families that have immigrate into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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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한인 소설에 재현된 문화적응의 단계 변화 KCI 등재후보

송명희

한국언어문학교육학회 한어문교육 제33집 2015.08 pp.21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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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on M. J. Bennett’s theory of ‘Developmental Model of Intercultural Sensitivity (DMIS),’ this study explores the developmental stages of adaptation to other cultures as represented in the Korean-Canadian novels. Korean-Canadian novels written in the early period of immigration show the stage of denial of difference and defense against difference. Yet as the reaction of Korean-Canadians to cultural differences gradually goes through the stages of minimization of difference, acceptance of difference, adaptation to difference and finally Integration of difference, the Korean-Canadian novels indicate the change from ethnocentrism to cultural relativism. That is, the novels reveal that while Korean Canadians have become part of the new culture of Canada as they stayed longer there, they have maintained the native Korean culture and integrated it to the newly-adopted culture to reach a complex form of values. This implies that the policy of Canada to keep multiculturalism for immigrants is gradually accepted by the Korean immigrants, and Korean Canadians overcome the culture shock they had to face at the early stage of immigration and they are adapting themselves to the local culture as they settle down in the new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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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언론『신한민보』의 정의부에 대한 보도와 그 특징 KCI 등재

조규태

숭실대학교 역사문물연구소(구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34집 2015.06 pp.221-253

...한인국민회의 기관지『신한민보』가 정의부에 대해서 보도한 내용과 그 특징에 대해서 살펴본 글이다. 먼저『신한민보』의 정의부에 관한 기사의 빈도와 출처, 다음으로 『신한민보』의 정의부 관련 기사의 유형과 내용, 마지막으로 『신한민보』의 정의부 관련 기사의 논조와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갖고 근 100회에 가까운 기사를 보도하였다. 특히『신한민보』는 1920년대 중후반 만주의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3부 중에서 의병계열인 참의부보다 애국계몽운동계열인 정의부와 신민부에 더 관심을 가졌고, 두 단체 중에서 상대적으로 평안도 지역 출신이 많고 활동도 더 활발하였던 정의부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는 1920년대 북미대한인국민회의 구성원들이 대체로 안창호를 지지하는 평안도계열의 인사로 구성되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에 관한 정보를 정의부의 기관지인 『대동민보』와 『전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그리고 남만주와 중동선의 통신원으로부터 얻었다. 때로는 국내의 『동아일보』를 읽고 그 내용을 거의 전재하기도 하였다. 『신한민보』는 사건의 발생일로부터 20~40일, 때로는 두 달 후에 보도하기도 하였지만, 국내언론인 『동아일보』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의 조직과 인사,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일제관헌과 친일파 처단, 통일적 활동과 민족유일당운동, 정의부원의 체포와 재판에 관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점을 갖고 보도한 것은 정의부원의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및 일제관헌과 친일파 처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정의부의 통일적 활동과 그 일환으로서의 민족유일당운동도 상당히 여러 차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원의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및 일제관헌과 친일파 처단에 대한 기사에서 정의부원에 대해서는 대담과 용맹과 관대를, 일제관헌에 대해서는 무능과 잔혹과 비인륜성의 특징을 드러내 보였다. 또한 국내에 정의부의 통치력과 지배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정의부의 조직을 남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이란 관점에서 다루었고, 정의부와 제 단체와의 통일적 활동을 강조하였으며, 민족유일당운동을 민족의 대동ㆍ통일을 통해 대단결력을 형성함으로써 ‘독립’이란 대계획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한민보』는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정의부의 투쟁성과 재정적 어려움과 정의부원의 희생을 재미한인에게 알려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이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의부의 통일적 활동과 민족유일당운동을 소개함으로써 분열되어 있는 미주한인사회의 단합을 이루고 미주의 한인들이 대동단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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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주에서 발간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신한민보』가 정의부에 대해서 보도한 내용과 그 특징에 대해서 살펴본 글이다. 먼저『신한민보』의 정의부에 관한 기사의 빈도와 출처, 다음으로 『신한민보』의 정의부 관련 기사의 유형과 내용, 마지막으로 『신한민보』의 정의부 관련 기사의 논조와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갖고 근 100회에 가까운 기사를 보도하였다. 특히『신한민보』는 1920년대 중후반 만주의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3부 중에서 의병계열인 참의부보다 애국계몽운동계열인 정의부와 신민부에 더 관심을 가졌고, 두 단체 중에서 상대적으로 평안도 지역 출신이 많고 활동도 더 활발하였던 정의부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는 1920년대 북미대한인국민회의 구성원들이 대체로 안창호를 지지하는 평안도계열의 인사로 구성되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에 관한 정보를 정의부의 기관지인 『대동민보』와 『전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그리고 남만주와 중동선의 통신원으로부터 얻었다. 때로는 국내의 『동아일보』를 읽고 그 내용을 거의 전재하기도 하였다. 『신한민보』는 사건의 발생일로부터 20~40일, 때로는 두 달 후에 보도하기도 하였지만, 국내언론인 『동아일보』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확한 사실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의 조직과 인사,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일제관헌과 친일파 처단, 통일적 활동과 민족유일당운동, 정의부원의 체포와 재판에 관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점을 갖고 보도한 것은 정의부원의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및 일제관헌과 친일파 처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정의부의 통일적 활동과 그 일환으로서의 민족유일당운동도 상당히 여러 차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신한민보』는 정의부원의 군자금과 독립군 모집 및 일제관헌과 친일파 처단에 대한 기사에서 정의부원에 대해서는 대담과 용맹과 관대를, 일제관헌에 대해서는 무능과 잔혹과 비인륜성의 특징을 드러내 보였다. 또한 국내에 정의부의 통치력과 지배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정의부의 조직을 남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이란 관점에서 다루었고, 정의부와 제 단체와의 통일적 활동을 강조하였으며, 민족유일당운동을 민족의 대동ㆍ통일을 통해 대단결력을 형성함으로써 ‘독립’이란 대계획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한민보』는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정의부의 투쟁성과 재정적 어려움과 정의부원의 희생을 재미한인에게 알려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이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의부의 통일적 활동과 민족유일당운동을 소개함으로써 분열되어 있는 미주한인사회의 단합을 이루고 미주의 한인들이 대동단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This thesis is a paper studying about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articles of Chung-eui-boo in Shinhanminbo, which was the voice of Dae-han-in-gook-min-hoe. In this, first I reviewed the frequency and source of the articles of Chung-eui-boo. Second, I analyzed these by types. Third I investigated the tone of the articles. The number of the articles of Chung-eui-boo inserted in Shinhanminbo is near one hundred. In this point, It is for sure that Shinhanminbo payed a lot of attention to Chung-eui-boo. Korean- americans of Dae-han-in-gook-min-hoe run more the articles of Chung-eui-boo than Cham-eui-boo and Shin-min-boo in Shinhanminbo. Because Korean-americans of Dae-han-in-gook-min-hoe were from Pyeong-an-do by the large as the member of Chung-eui-boo. They had something in common that they were from Pyeong-an-do. Shinhanminbo got the source of the articles of Chung-eui-boo from Daedongminbo, Chunwoo(Fellow Soldier), Doklipsinmoon(Independence Paper), correspondents of Manchuria, and Dongailbo. Though Shinhanminbo reported the accidents 40~60days late compared with the source paper, sometimes it reported accidents more concrete and correct than Dongailbo. The articles of Chung-eui-boo in Shinhanminbo are classified to five categories, organization and personnel matters of Chung-eui- boo, collection of the sinews of war and the a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killing of Japanese officers and pro-Japanese collaborators, and unitive activities as national single party movement. Seen by percentage, the first is the articles of collection of the sinews of war and the a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The second is the articles of killing of Japanese officers and pro-Japanese collaborators, the third is the articles of unitive activities as national single party movement. Shinhanminbo represented member of Chung-eui-boo brave and generous, and Japanese officers stupid and brutal. And Shinhanminbo insinuated that Chung-eui-boo wielded strong influence over the Korean Peninsula. Finally, Shinhanminbo emphasized unification of Korean peoples and parties. In conclusion, Shinhanminbo tried to infuse patriotism into the heart of Koren-american by reporting patriotic activities of Chung-eui-boo members. And Shinhanminbo yearned for Independence of Korea through unification of Korean peoples, including Korean-americans, by publishing the articles of the unitive activities of Chung-eui-boo and its’ me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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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박열의 행적을 통해 본 재일한인사회의 로컬리티 KCI 등재후보

최영호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6호 2015.06 pp.1-40

...한인 사회의 로컬리티(locality)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해방직후 한일관계 변화에대한 박열의 대응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본문에서는 박열에 대한 기존의 평가들을 살펴보고, 한일관계와 관련이 깊은 사건을 정치범 사상범의 석방 문제, 재일한인 사회의 민족단체 문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 본국귀환 문제로 나누어, 각각의 사건에 대해 박열이 각각 어떻게 관여했는지, 가능한 자료에 입각하여 실증하고 있다. 박열은 해방직후 재일한인 로컬리티를 대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현실정치에 속박당하는 일이 없이 소신대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인간으로서 신의와 정의를 지키려고 노력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박열을 운동가 혹은 정치지도자로서 평가하기보다는 지식인 혹은 사상가로서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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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역사적인 어프로치를 통하여 박열의 해방직후 행적을 실증하고 그가 새로운 한일관계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파악하고 있다. 1945년 조국해방으로부터 1949년 박열이 남한에 귀국하기까지를 분석대상 시기로 하며 특히 그가 출옥하는1945년 10월부터 「민단」이 결성되는 1946년 10월까지의 1년 동안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논문의 첫 번째 과제는 해방직후 한반도 국가건설 과정에서 재일한인 사회의 로컬리티(locality)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해방직후 한일관계 변화에대한 박열의 대응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본문에서는 박열에 대한 기존의 평가들을 살펴보고, 한일관계와 관련이 깊은 사건을 정치범 사상범의 석방 문제, 재일한인 사회의 민족단체 문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 본국귀환 문제로 나누어, 각각의 사건에 대해 박열이 각각 어떻게 관여했는지, 가능한 자료에 입각하여 실증하고 있다. 박열은 해방직후 재일한인 로컬리티를 대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현실정치에 속박당하는 일이 없이 소신대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인간으로서 신의와 정의를 지키려고 노력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박열을 운동가 혹은 정치지도자로서 평가하기보다는 지식인 혹은 사상가로서 평가해야 한다.

This study adopts a historical approach to find Bak Ryeol’s activities as a national leader of Korean community in Japan, and to hold of his location on the new rel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around 4 years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n peninsula. It especially reveals his words and deeds intensively during the period from the discharge from Akita Prison on October 1945 to inauguration of Head of Mindan (Korean Conservatives Organization) October 1946. The first object of this study is to make sure a locality of Korean community meeting the nationality tendencies of Korean society that Bak Ryeol also showed in his literatures. And the second object is to reveal how he dealt with Korean transformation such as freedom of political prisoners, organization of nationalistic groups, trusteeship of Korean peninsula, and repatriation to homeland referring to existing evaluations of his respondence. He, as a symbolic spokesman of locality of Korean community in Japan, tried to seek national independence and humane justice without restraints from real political circumstances. He should be recognized as an intellectual or a philosopher rather than an agitator or a political 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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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한일회담과정에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일 미수금 문제에 관한 한국정부의 인식과 태도, 협상의 전개 과정과 처리결과를 살펴보는 데 있다. 특히 본고에서는 한일회담 협상과정의 미수금 문제, 전쟁 피해에 따른 위로금 성격의 보상금 등 청구권 이슈 중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임금 등 미수금 일부가 ‘공탁’된 금액, 즉 ‘공탁금’에 관한 한국정부의 인식과 태도, 이에 대한 협상내용의 변화와 결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실제 협상에 참여한 협상참여자와 기존 연구들에서 청구권과 미수금, 공탁금 등의 용어와 내용이 혼용되어 생기는 문제를 엄밀하게 규명하기 위함이다. 한일회담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미수금 문제는 다음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일회담이 시작되기 이전 시기부터 1965년 한일회담 최종 합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한국정부가 제시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미수금’은 미수령 채권의 ‘미수금’과 사망자ㆍ부상자ㆍ유족에 대한 위자료 등 ‘보상금’의 성격을 포함한 것이었다. 둘째, 그러나 ‘전쟁피해 보상금’의 ‘실질적 성격’은 점차 변질되어갔다. 최종 단계에 접어들어 한국정부가 제시한 피해보상의 개념은 일본인으로 전쟁에 참여한 노고와 수고에 대한 정부의 ‘원호’의 개념으로 변질되었고 금액과 내용은 ‘외국인에 대한 강제징용의 피해보상’의 의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미수금과 보상금 문제는 그 세부내역과 인원 수 및 금액에 관한 수년 간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이상의 논의들과 아무런 관계없이 경제협력자금의 총액으로 합의됨에 따라, 사실상 그 성격이 불분명하고 무의미하게 비쳐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공탁금과 관련하여, 당초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청구권협상에 대비하여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기업으로 하여금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미불금을 공탁하였으나, 일본 정부 스스로 공탁금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고 한국 측이 제2차 한일회담에서 처음으로 ‘공탁분’을 제기한 것이 유일하다. 당시 한국 정부는 사망자ㆍ부상자에 대한 조위금 등의 내역도 공탁금에 포함된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때 제기된 공탁분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미불 임금과 제 수당 정도로 인지했던 것으로 판단되며, 한국 측은 이와 별도로 사망자ㆍ부상자에 대한 조위금 등 미불금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때 한국 측의 문의에 대해 일본 정부가 공탁금의 경위와 내역, 금액 등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며,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들을 토대로 추정컨대,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해 공탁금의 내역과 금액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한국 정부는 공탁금에 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채 한일회담의 청구권협정을 마무리지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미수금과 공탁금에 관한 개념과 성격, 협상 내용이 불일치됨에 따라, 이에 대한 혼란과 오해가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된다.

The purpose of this survey was to focus on what was the perception, attitude, and proposals about arrearages matters of forcefully mobilized korean victim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t the negotiating table between Korea and Japan Government, from the just before start of Talks to 1965. Rather than surveying the whole claims and issues such as economic and financial credit and debt, I shall focus on arrearages, the wages, allowances, reserves, condolence money, and bonus for the injured and family. Here my attention will be focused principally on the unpaid wages and deposit money by both Japanese Corporations and Government which hired korean workers forcefully and directed the unpaid wages to deposit. The founding shows that, first, the “arrearages” proposed at the talks from the beginning was including the meaning of compensation money for the death, injured and their families as well as the unpaid wages, allowances, and reserves. But the nature of compensation money was changed to the relief for the japanese people, still far less than their amounts and volumes. Specially, even 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 have made a series of laws, rules, systems and enforced the deposit money of korean workers, they kept secret that matters from korean government throughout the talks and after. Once, at the 2nd talks, 1952, korean government used a word “deposited money’, they did not realized how it was made, whether the condolence money, and injured and family bonus was included or not. Eventually, korean government little knowledged about deposit money had to negotiated with japanese government after all. The matter of arrearages and deposit money was talked and negotiated between two government for more that 15 years, and the details about its amount and volumes was talked a few of times in the middled of talks. But as everyone knows, the matters and the amounts was substituted to the Economy Coorporation Money at the end of talks. The perception, meaning and nature, result of talks were unclered and miss-matched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That is the reason why the matter of arrearages and deposit money is arguing and matters, until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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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러시아 한인 사회와 정교학교 교육 KCI 등재후보

방일권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6호 2015.06 pp.107-140

...한인 사회는 러시아 혁명까지 50여년을 제정러시아의 영토에서 자신의 역사를 기록했다. 러시아 신민으로 정착하기 위해 이주민들은 정착지의 언어와 신앙, 새로운 교육 체제에 적응하여 삶의 기반을마련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초기 한인 사회가 접한 러시아 정교는 단지 새로운 땅의 주류 민족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형태만이 아니었다. 한인에게 정교회는 새로운 ‘진리’로서보다는 ‘생명’ 을 위해 해결해야만 할 정착의 난제들을 푸는 현실적 ‘길’로서 의미를 가졌다는 점이 더중요했다. 게다가 정교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문맹자나 다름없던 한인들에게 러시아어 교육이라는 ‘빛’을 들고 나왔다. 사실상 정교와 교육이라는 ‘진리와 빛’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엄밀히 말해 러시아 사회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다. 본 글은 극동 한인 이주 사회와 정교회가 주관하던 초등교육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있다. 교육의 문제는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바, 러시아 전제정의국내 정치적 의미라는 맥락에서 접근이 가능한 사안이다. 제정기 러시아 한인 사회의 교육 문제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학교들에 치중되어 있고 교회학교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였다. 학교 설립의 주역이 누구였고, 학교의 수적 변화와 한인 사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극동 한인 사회를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교회학교는 극동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살피기에 적합한 주제이다. 이를 통한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을 재고해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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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1863년 이후 공식적인 이주민의 삶을 개척한 극동의 한인 사회는 러시아 혁명까지 50여년을 제정러시아의 영토에서 자신의 역사를 기록했다. 러시아 신민으로 정착하기 위해 이주민들은 정착지의 언어와 신앙, 새로운 교육 체제에 적응하여 삶의 기반을마련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초기 한인 사회가 접한 러시아 정교는 단지 새로운 땅의 주류 민족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형태만이 아니었다. 한인에게 정교회는 새로운 ‘진리’로서보다는 ‘생명’ 을 위해 해결해야만 할 정착의 난제들을 푸는 현실적 ‘길’로서 의미를 가졌다는 점이 더중요했다. 게다가 정교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문맹자나 다름없던 한인들에게 러시아어 교육이라는 ‘빛’을 들고 나왔다. 사실상 정교와 교육이라는 ‘진리와 빛’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엄밀히 말해 러시아 사회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에게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도 아니었다. 본 글은 극동 한인 이주 사회와 정교회가 주관하던 초등교육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있다. 교육의 문제는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바, 러시아 전제정의국내 정치적 의미라는 맥락에서 접근이 가능한 사안이다. 제정기 러시아 한인 사회의 교육 문제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학교들에 치중되어 있고 교회학교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였다. 학교 설립의 주역이 누구였고, 학교의 수적 변화와 한인 사회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은 극동 한인 사회를 이해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교회학교는 극동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살피기에 적합한 주제이다. 이를 통한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을 재고해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Since 1863 and up to the October Revolution for more than 50 years Korean immigrants recorded their history in tsarist Russia. In order to fix as russian subject and to strengthen their position Koreans should solve the urgent problem to prepare the foundation of life as like learning russian language, adapting the new system in faith and education of territory in which they live. Russian Orthodox Church for the first Korean immigrants was not just a form of christian faith that preached to the citizens, for them, of the new country. Orthodoxy was for Korean immigrants more the way to solve the problem of ‘living’ in the new territory than the way to ‘the truth’. Furthermore, to the Koreans the church was “a ray of light” in the darkness of illiteracy: it gave them the opportunity to learn the Russian language. In fact, to Koreans ‘the truth and the light’ of Orthodoxy were not separated from each other. Strictly speaking, Christianity was the only way to secure the migrants on Russian soil. For korean immigrants being a member of orthodox church had a practical significance in the process of adaptation in the Russian territory: through it they could learn the Russian language, be included in the system of Russian ecclesiastical education, and, in addition, show themselves as loyal subjects of the state and the church. In this article we have focused on the Korean community of immigrants and the elementary school under the control of Russian Orthodox Church. The topics on education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russification’ policy of korean migrants, so they can be accessed in the context of domestic policy. In the korean studies on educational issues in korean immigrant communities in Far East, the topic of parish schools had received little attention comparing with the korean ethnic schools. Our goal is to consider the process of acculturation of korean communities in tsarist Russia through questions on church parish schools - who founded them, how to change their number, what was the reaction from the Korean and Russian leaders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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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신 설화 속의 도래인 : 재일한인의 원류를 찾아서 KCI 등재후보

이경화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5호 2015.02 pp.39-68

...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이 단순한 의학사나 질병사를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 고대 국가의 형성기에 도래인들은앞선 농업기술을 비롯한 여러 첨단 산업 기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 종교와 건축등 다방면의 선진 문물을 전파해 환대받고 존중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래의 것들에 배타적이었던 토착민들에게 도래인은 역병과 재난을 몰고 온 불청객에 불과한존재이기도 했다. 본고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내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신을 단순한 역병을 초래하는 신이 아닌, 병과 재난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주는 민중의 수호신으로 위상을 높여간 도래인들의 모습을 설화를 통해 고찰해보았다. 재일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당시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 치열하게 삶을 영위해간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한일관계의 심층적 연원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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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에는 역병이란 신이 일으키는 재앙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 신화와설화들이 다수 전해져온다. 그런데 일본의 역신(疫神)관련 전승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한반도, 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재일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이 단순한 의학사나 질병사를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 고대 국가의 형성기에 도래인들은앞선 농업기술을 비롯한 여러 첨단 산업 기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 종교와 건축등 다방면의 선진 문물을 전파해 환대받고 존중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래의 것들에 배타적이었던 토착민들에게 도래인은 역병과 재난을 몰고 온 불청객에 불과한존재이기도 했다. 본고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내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신을 단순한 역병을 초래하는 신이 아닌, 병과 재난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주는 민중의 수호신으로 위상을 높여간 도래인들의 모습을 설화를 통해 고찰해보았다. 재일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당시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 치열하게 삶을 영위해간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한일관계의 심층적 연원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Japan has many myths and legends which tell us that plagues are believed to a disaster caused by God’s wrath. Surprisingly, when looking at Japanese myths and folklore related with the God of Epidemics, we find that many traditions have a deep relation to those of settlers who came from Korea. This mythology captures both the lives of the settlers from Korea and broader cultural aspects of the era. The myths also describe them more vividly than most historical medical literature. During the early years of ancient Japan, settlers from overseas spread advanced science and technology such as agriculture, metalworking, and porcelain, as well as abstract cultural advances such as deeper knowledge, thought, religion and architectural design. As a result, they were naturally welcomed and respected. However, settlers from overseas were also seen uninvited guests bringing plagues and disasters to the natives who were wary of exotic things. Nevertheless, through myths and folklore we can find that settlers from Korea, embedded in Japanese society, kept their traditional faith and were able to enhance the status of gods to that of guardians of the people, protecting against diseases and disasters as well as bringing blessings. This paper tries to trace the vestiges of ancient settlers from Korea through Japanese myths which originate from Korean residents in Japan. Studying Japanese myths reveals fierce lives of ancient settlers from Korea, which were deeply rooted in the native communities of Japan. Hopefully, this will help develop a more positiv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native Japanes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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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영어학습동아리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의미 : 한인 이민 여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김은주, 김종민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5호 2015.02 pp.291-331

...한인 이민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된 온라인 영어 학습동아리인 ‘워너비영어’를 대상으로 동아리의 생성및 발달과정, 그리고 학습활동이 그들의 삶에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2년간의 참여관찰과 심층면담을 통해 학습동아리가 어떤 계기로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고찰해보고 그들의 학습활동이 갖는 다면적인 의미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워너비영어’ 참여자들은 우연을 계기로 온라인동아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멤버들의 열정과 절실함을 바탕으로 서로 합심하여 동아리의 정착 및 발전에 노력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학습동아리 활동은 첫째, 미국에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수단인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꼭 필요한 학습수단으로 인지된다. 둘째, 타향살이를 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열혈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동지애를 느낀다. 셋째, 동아리 초기 정착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학습의 장(field)에서의 사심 없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아비투스(habitus)를 경험한다. 넷째, 그들의 언어 자산인 ‘고급영어’를 소속기호(signs ofbelong)로 사용하여 신입 멤버 선출과정에서 일종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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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과 배움의 경계가 불분명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여성학습자는 교육의 기회에 있어 출산, 육아, 가사 등의 다양한 이유로 소외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는 그간 평생학습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해외거주 한인 이민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된 온라인 영어 학습동아리인 ‘워너비영어’를 대상으로 동아리의 생성및 발달과정, 그리고 학습활동이 그들의 삶에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2년간의 참여관찰과 심층면담을 통해 학습동아리가 어떤 계기로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고찰해보고 그들의 학습활동이 갖는 다면적인 의미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워너비영어’ 참여자들은 우연을 계기로 온라인동아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멤버들의 열정과 절실함을 바탕으로 서로 합심하여 동아리의 정착 및 발전에 노력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학습동아리 활동은 첫째, 미국에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수단인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꼭 필요한 학습수단으로 인지된다. 둘째, 타향살이를 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열혈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동지애를 느낀다. 셋째, 동아리 초기 정착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학습의 장(field)에서의 사심 없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아비투스(habitus)를 경험한다. 넷째, 그들의 언어 자산인 ‘고급영어’를 소속기호(signs ofbelong)로 사용하여 신입 멤버 선출과정에서 일종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를 시도한다.

We live without any clear boundary between learning and living. Yet, for centuries, women have been denied long-term educational opportunities due to gender norms that promoted their domesticity and management of childcare and housework. This study aimed to examine the emergence, development, and learning activity of anonline English study circle named Wanna-Be English comprised of Korean immigrant women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hrough participation in the study circle since its launch and in-depth interviews with its six members, this study closely observed trends in the group during its first two years of activity. Along with these trends, the study also identifies what learning meant to group members and how it impacted their lives. Results suggest that thewomen’s learning activity in the online study circle was (1) a tool for learning English necessary for survival in the United States, (2) a source of camaraderie and friendship by way of interactions with other active members, (3) a method of study encouraging a habitus of selflessness, and (4) an instrument by which members distinguished themselves from other novice English learners due to their high-proficiency language ca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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