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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재외한인학회 정관 외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3호 2021.02 pp.259-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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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62

국제한인문학회 회원 여러분께 KCI 등재

박형준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제28호 2020.12 p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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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원

63

제국주의 시대 도시 하얼빈의 한인이주 - 점이지대의 망국민과 신민 - KCI 등재

김주용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한중관계연구 제6권 제3호 2020.10 pp.195-220

...한인이 이주하게 된 것은 이른 바 동청철도가 부설되면서이다. 안중근 의거 당시였던 1909년에는 주로 러시아 연해주 를 통해서 이주한 한인들이 하얼빈 한인사회의 주류였다. 1920년대 하얼빈에 이주했던 한인들은 주거지는 대부분 부두구였으며, 직업도 부정업이 많았다. 1931년 만주사변은 이주한인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은 중국군은 한인 마을을 약탈하였으며, 피난민들은 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얼빈은 거대한 수용소와도 같았다. 도시 하얼빈에 일시적으로 머문 피난민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지만 남은 자들은 하얼빈의 최하층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하얼빈에 특무(밀정, 스파이) 학료를 설립하였고, 하얼빈에서 배출된 특무는 만주지역 전역에서 밀정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에 피체된 후 馴致되어 밀정으로 한인사회를 감시하였다. 일제는 이들 에게 한인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만주국 시기 한인사회는 굴종 과 저항, 감시와 통제를 오족협화라는 미명 하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부여 한 위태로운 이등공민의 자격 역시 한인의 정체성 변용을 담보로 강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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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해방 전 중국 도시 하얼빈은 한국인들에게는 안중근 의거의 도시이자 아시아의 유럽 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중국인들에게는 문화가 이식된 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 침략의 정보원 인재 개발 지역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하얼빈은 동구 의 대표주자였던 러시아 동진의 작품이었다. 이 지역에 한인이 이주하게 된 것은 이른 바 동청철도가 부설되면서이다. 안중근 의거 당시였던 1909년에는 주로 러시아 연해주 를 통해서 이주한 한인들이 하얼빈 한인사회의 주류였다. 1920년대 하얼빈에 이주했던 한인들은 주거지는 대부분 부두구였으며, 직업도 부정업이 많았다. 1931년 만주사변은 이주한인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은 중국군은 한인 마을을 약탈하였으며, 피난민들은 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얼빈은 거대한 수용소와도 같았다. 도시 하얼빈에 일시적으로 머문 피난민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지만 남은 자들은 하얼빈의 최하층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하얼빈에 특무(밀정, 스파이) 학료를 설립하였고, 하얼빈에서 배출된 특무는 만주지역 전역에서 밀정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에 피체된 후 馴致되어 밀정으로 한인사회를 감시하였다. 일제는 이들 에게 한인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 기능을 부여하였으며, 만주국 시기 한인사회는 굴종 과 저항, 감시와 통제를 오족협화라는 미명 하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부여 한 위태로운 이등공민의 자격 역시 한인의 정체성 변용을 담보로 강요되고 있었다.

Before liberation, Harbin, a Chinese city, was recognized by Koreans as a city of Ahn Jung-geun and a European country in Asia. It was recognized by the Chinese as a space where culture was transplanted, and Japanese imperialism was being used as an information source for the invasion of the continent. Harbin was the work of Dongjin, a Russian representative. The relocation of Koreans to this area was due to the construction of the so-called Dongcheong Railway. In 1909, during the Ahn Jung-geun’s reign, Koreans who migrated mainly through Russia's Maritime Province were the mainstream of the Harbin Korean community. Koreans who moved to Harbin in the 1920s mostly lived in docks and had many jobs. The Manchurian Incident of 1931 brought a great change to the Korean immigrants. The Chinese soldiers who were damaged by the Japanese army looted Korean villages, and the refugees moved to the cities. Harbin was like a huge camp. The refugees who temporarily stayed in the city of Harbin returned to the countryside, but the rest of them were forced to live on the lowest floor of Harbin. The Japanese established a special mission (secret and spy) in Harbin, and the special mission produced in Harbin carried out secret activities throughout Manchuria. The independence activists who devoted themselves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until the 1920s were imprisoned by the Japanese and secretly monitored the Korean communit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gave them the function of monitoring and controlling the Korean community, and during the Manchukuo period, the Korean community was forced to accept subservience, resistance, surveillance and control under the guise of five-legged cooperation.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precarious qualification as second-class citizens was also being forced to use the identity of Koreans as collateral.

64

1970-80년대 서유럽으로 유학한 한인 여성의 임파워먼트 형성과정에 관한 생애사적 연구 KCI 등재

남혜경, 김영순

한국국제문화교류학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구 문화교류연구) 제9권 제3호 2020.07 pp.157-197

...한인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생애사 연구기법을 활용하여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프랑스와 독일로 각각 유학한 한국 여성 두 명을 대상으로 질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의 삶에 나타난 임파워먼트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인식, 자기 삶에 대한 주도성,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적 자세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삶에서 자신의 무력감에 관한 인지를 통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는 대신 개인의 주도성과 주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협력, 지지, 그리고 연구참여자 개인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발전하였다. 이들은 생애 동안 자기 자신이 되는 삶을 살아왔으며, 계속되는 성찰적 삶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 되고 있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한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과의 소통은 미약하다. 한국 사회와 재외한인 여성들의 상호이해와 소통을 위해 이들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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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0원

본 연구는 1970-80년대 서유럽으로 유학한 한인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생애사 연구기법을 활용하여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프랑스와 독일로 각각 유학한 한국 여성 두 명을 대상으로 질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의 삶에 나타난 임파워먼트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인식, 자기 삶에 대한 주도성,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적 자세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삶에서 자신의 무력감에 관한 인지를 통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는 대신 개인의 주도성과 주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협력, 지지, 그리고 연구참여자 개인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발전하였다. 이들은 생애 동안 자기 자신이 되는 삶을 살아왔으며, 계속되는 성찰적 삶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 되고 있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한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과의 소통은 미약하다. 한국 사회와 재외한인 여성들의 상호이해와 소통을 위해 이들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This study investigated empowerment has been portrayed in life histories of Korean women who studied in western Europe in 1970-80s, through the life history research method. To fulfill the purpose of this study, researchers conducted qualitative research through the life history research method with two Korean women who studied in France and Germany. The results were analyzed by categorizing empowerment in individual's recognition of hopeless about the self, self-directed living life, and reflective attitude about life. The participants experienced disappointments and frustration in their lives through recognizing hopeless about the self. However, instead of giving up in reality, they developed their empowerment through personal leadership, interaction with others, cooperation, support, and the individual's persistent efforts. They lived to know how they can become the true self, and this continuous reflection of their lives has become a process of finding the self. In fact, there are number of Korean women that reside outside of Korea. Although they hold a strong identity as Koreans, only few connections exist between these women and their home country. For the mutual understanding and communication between Korean society and overseas Korean women, there is a need for various in-depth studies on them.

65

1970-80년대 서유럽으로 유학한 한인 여성의 임파워먼트 형성과정에 관한 생애사적 연구

남혜경, 김영순

인하대학교 다문화융합연구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 제9권 제3호 2020.07 pp.157-197

...한인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생애사 연구기법을 활용하여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프랑스와 독일로 각각 유학한 한국 여성 두 명을 대상으로 질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의 삶에 나타난 임파워먼트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인식, 자기 삶에 대한 주도성,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적 자세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삶에서 자신의 무력감에 관한 인지를 통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는 대신 개인의 주도성과 주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협력, 지지, 그리고 연구참여자 개인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발전하였다. 이들은 생애 동안 자기 자신이 되는 삶을 살아왔으며, 계속되는 성찰적 삶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 되고 있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한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과의 소통은 미약하다. 한국 사회와 재외한인 여성들의 상호이해와 소통을 위해 이들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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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0원

본 연구는 1970-80년대 서유럽으로 유학한 한인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생애사 연구기법을 활용하여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프랑스와 독일로 각각 유학한 한국 여성 두 명을 대상으로 질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의 삶에 나타난 임파워먼트는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인식, 자기 삶에 대한 주도성,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적 자세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삶에서 자신의 무력감에 관한 인지를 통해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굴복하는 대신 개인의 주도성과 주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 협력, 지지, 그리고 연구참여자 개인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발전하였다. 이들은 생애 동안 자기 자신이 되는 삶을 살아왔으며, 계속되는 성찰적 삶은 자신을 찾는 과정이 되고 있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한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과의 소통은 미약하다. 한국 사회와 재외한인 여성들의 상호이해와 소통을 위해 이들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This study investigated empowerment has been portrayed in life histories of Korean women who studied in western Europe in 1970-80s, through the life history research method. To fulfill the purpose of this study, researchers conducted qualitative research through the life history research method with two Korean women who studied in France and Germany. The results were analyzed by categorizing empowerment in individual's recognition of hopeless about the self, self-directed living life, and reflective attitude about life. The participants experienced disappointments and frustration in their lives through recognizing hopeless about the self. However, instead of giving up in reality, they developed their empowerment through personal leadership, interaction with others, cooperation, support, and the individual's persistent efforts. They lived to know how they can become the true self, and this continuous reflection of their lives has become a process of finding the self. In fact, there are number of Korean women that reside outside of Korea. Although they hold a strong identity as Koreans, only few connections exist between these women and their home country. For the mutual understanding and communication between Korean society and overseas Korean women, there is a need for various in-depth studies on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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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맨티카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정체성(1916∼1925) KCI 등재

조규태

숭실대학교 역사문물연구소(구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44집 2020.06 pp.69-96

...한인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글이다. 첫째 1916년 맨티카에 한인이 이주한 배경을 사탕무 경작과 관련하여 살폈다. 둘째 맨티카 거주 한인들이 만든 민족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와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 주목하여 이들의 정치·사회·경제적 활동을 검토하였다. 셋째 미국의 1920·1923년 토지법으로 인한 맨티카 한인이 재이주와 한인사회의 약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캘리포니아 북동부에 위치한 맨티카에 60여명의 한인이 이주한 것은 1916년 초였다. 스프렉클 슈거(Spreckels Sugar) 회사가 맨티카에 설탕 공장을 짓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탕무를 재배를 위한 토지를 제공하면서 캘리포니아의 각지에서 농업과 노동을 하던 한인이 맨티카로 몰려들었다. 맨티카의 한인들은 맨티카에서 1∼2, 5∼6 마일 떨어진 농촌에 정착하여 1916년 1,265에이커, 1917년 1,320에이커, 1918년 821에이커에 사탕무를 재배하였다. 사탕무 재배 자 중에서 이익을 본 사람의 경우 1916년의 경우 인당 150∼200달러의 이익을 보았다. 특히 김원택은 600에이커에 말 60여 필과 농구를 갖추고 100여 명의 일꾼을 고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4월 20일 미주 한인의 자치기관 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맨티카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그 소속 한인들은 1916년 11월 자치규정을 만들어 한인의 언어·행동·생활 태도를 바로게 함으로써 미국인의 무시와 멸시를 없애고, 경무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고 순찰구역 지정을 통해 확보하고,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국어학교인 한흥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소속 한인들은 국치기념일, 대한인국민회 창립일, 추도식 등에 참석하여 망국민의 슬픔을 달래는 것과 아울러 애국가, 독립군가를 함께 부르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미군에 지원한 후 참전하여 향후 미국의 지원을 얻어 독립전쟁 참여를 꿈꾸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는 스탁톤, 트레이시 거주 한인들과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자금의 제공과 대한여자애국단의 조직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윌로우즈 항공학교의 비행사 양성 지원, 일제의 식민통치 비판, 국어학교의 교재인 󰡔초등독습󰡕의 편찬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2월 12일 지방교회인 맨티카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목회는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와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와 선교를 한 황사용과 임정구가 담당하였다. 특히 임정구는 1917년 9월부터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무를 담임하면서, 오클랜드·스탁톤·트레이시 지역의 교회 일도 처리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는 1917년에 교인 51명, 예비교인 11명, 주일학교 교사 40명, 엡웟청년회원 26명이 있었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인들은 미국 감리교 본부와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 교인들의 도움을 얻어 1918년 9월 독립교회를 세웠다. 맨티카의 교인들은 신앙 활동과 아울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여성교인들은 1918년 맨티카한인여자전도회를 창립하고 전도와 아울러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여성의 권위를 신장하려 하였고, 어린 아동과 학생을 위해 주일학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은 1920년과 192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으로 인해 토지의 임차가 금지되어 도시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등지에 재이주하여 여관업 등 장사를 하였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맨티카 한인의 재이주로 맨티카 거주 한인이 격감하자,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는 1921년 해체되었다. 그리고 교인의 수도 줄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는 스탁톤·트레이시의 교인들과 함께 통합관리되었다. 그리고 국어학교도 1920년대 초 폐교되었으며, 1924년 교회에 의해 부활되었으나 존속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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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이 글은 1910∼20년대 캘리포니아 북동부의 맨티카에 거주한 한인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글이다. 첫째 1916년 맨티카에 한인이 이주한 배경을 사탕무 경작과 관련하여 살폈다. 둘째 맨티카 거주 한인들이 만든 민족공동체인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와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 주목하여 이들의 정치·사회·경제적 활동을 검토하였다. 셋째 미국의 1920·1923년 토지법으로 인한 맨티카 한인이 재이주와 한인사회의 약화에 대해 고찰하였다. 캘리포니아 북동부에 위치한 맨티카에 60여명의 한인이 이주한 것은 1916년 초였다. 스프렉클 슈거(Spreckels Sugar) 회사가 맨티카에 설탕 공장을 짓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사탕무를 재배를 위한 토지를 제공하면서 캘리포니아의 각지에서 농업과 노동을 하던 한인이 맨티카로 몰려들었다. 맨티카의 한인들은 맨티카에서 1∼2, 5∼6 마일 떨어진 농촌에 정착하여 1916년 1,265에이커, 1917년 1,320에이커, 1918년 821에이커에 사탕무를 재배하였다. 사탕무 재배 자 중에서 이익을 본 사람의 경우 1916년의 경우 인당 150∼200달러의 이익을 보았다. 특히 김원택은 600에이커에 말 60여 필과 농구를 갖추고 100여 명의 일꾼을 고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4월 20일 미주 한인의 자치기관 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맨티카지방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그 소속 한인들은 1916년 11월 자치규정을 만들어 한인의 언어·행동·생활 태도를 바로게 함으로써 미국인의 무시와 멸시를 없애고, 경무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고 순찰구역 지정을 통해 확보하고,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국어학교인 한흥학교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맨티카지방회와 소속 한인들은 국치기념일, 대한인국민회 창립일, 추도식 등에 참석하여 망국민의 슬픔을 달래는 것과 아울러 애국가, 독립군가를 함께 부르면서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미군에 지원한 후 참전하여 향후 미국의 지원을 얻어 독립전쟁 참여를 꿈꾸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중순에는 스탁톤, 트레이시 거주 한인들과 독립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자금의 제공과 대한여자애국단의 조직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는 윌로우즈 항공학교의 비행사 양성 지원, 일제의 식민통치 비판, 국어학교의 교재인 󰡔초등독습󰡕의 편찬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들은 1916년 2월 12일 지방교회인 맨티카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목회는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와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와 선교를 한 황사용과 임정구가 담당하였다. 특히 임정구는 1917년 9월부터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무를 담임하면서, 오클랜드·스탁톤·트레이시 지역의 교회 일도 처리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에는 1917년에 교인 51명, 예비교인 11명, 주일학교 교사 40명, 엡웟청년회원 26명이 있었다. 맨티카한인감리교회의 교인들은 미국 감리교 본부와 캘리포니아 거주 한인 교인들의 도움을 얻어 1918년 9월 독립교회를 세웠다. 맨티카의 교인들은 신앙 활동과 아울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여성교인들은 1918년 맨티카한인여자전도회를 창립하고 전도와 아울러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여성의 권위를 신장하려 하였고, 어린 아동과 학생을 위해 주일학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맨티카 거주 한인은 1920년과 1923년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으로 인해 토지의 임차가 금지되어 도시로 이동해야만 하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등지에 재이주하여 여관업 등 장사를 하였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맨티카 한인의 재이주로 맨티카 거주 한인이 격감하자,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는 1921년 해체되었다. 그리고 교인의 수도 줄어 맨티카한인감리교회는 스탁톤·트레이시의 교인들과 함께 통합관리되었다. 그리고 국어학교도 1920년대 초 폐교되었으며, 1924년 교회에 의해 부활되었으나 존속이 어려웠다.

This article is about the ethnic lives and national movements of Koreans in Manteca, northeastern California, from 1916 to 1925. First, I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Koreans’ migration to Manteca in 1916 and their economic lives. Second, I reviewed their political activities putting emphasis on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Manteca. Third, I reviewed their religious activities in connection with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Fourth, I contemplated about the Manteca Koreans’ re-migration and weakening of the Korean community, due to the Land Acts of 1920 and 1923, and the Immigration Law of 1924. It was in early 1916 that about 60 Koreans moved to Manteca of northeastern California. As Spreckels Sugar Company built a sugar factory in Manteca and provided land for the cultivation of sugar beet to secure raw materials, Koreans who were working and farming in all parts of California flocked to Manteca. The Koreans of Manteca grew sugar beet at 1,265 acres in 1916, 1,320 acres in 1917, and 821 acres in 1918. Those who benefited from the sugar beet growers saw profits of $150-200 per person in 1916. Especially, Kim Won-taek did beet farming in 600 making use of 60 horses, and hired 100 workers. The Koreans of Manteca established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in April, 1916. They made a self-governing rules for mutual friendship, and established and operated the ‘Hanheung School’, a Korean language school. The Koreans of Manteca, who generally participated in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did a lot of national activities. They attended at the founding day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and other memorial services. By them, they promoted national awareness and anti-Japanese spirit by singing the national anthem and the independent military song together. They applied the U.S. military in 1917 at the end of World War I, In mid-March 1919, they held a meeting for celebrating the declaration of Korean independence. The Koreans living in Manteca founded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a local church. The ministry of it was headed by Hwang Sa-Yong and Im Chung-gu, who had pastoral and missionary work in San Francisco and Oakland.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had 51 members of the church, 11 pre-schools, 40 teachers of Sunday school, and 26 members of the Ebworth Youth Association in 1917. Members of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established the Independence Church in September 1918 with the help of the American Methodist Headquarters and Korean-Americans living in California. In addition to religious activities, the Manteca believers prayed for the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In 1918, women Christians founded the Manteca Korean Women Exhibition Association. And they tried to increase women's authority by doing national movements along with evangelism, and also operated Sunday School for young children and students. By the way Koreans of Manteca had to travel to cities because of the Alien Land Acts of 1920 and 1923, and the Immigration Law. Rich people did business such as inns in cities. However, poor people earned their living by working in rural or urban areas. The re-immigration of Manteca Koreans resulted in a drastic decrease in the number of Koreans living in Manteca. In consequence, the Manteca Local Branch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as disbanded in 1921. And the number of church members decreased, so the Manteca Korean Methodist Church was integrated with the church members of Stockton and Tracy. And the Korean language school was closed in the early 1920s, and was revived by the church in 1924, but it was difficult to surv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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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사회의 디아스포라 음악문화 :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KCI 등재

이용식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동양음악(구 민족음악학) 제47집 2020.06 pp.131-168

...한인사회가 형성 되어 한인 디아스포라 문화가 형성되었다. 본고는 2018년에 개최된 각종 음악공연을 통해 토론토 한인사회의 디아스포라 음악문화를 살펴보았다. 한인사회에서 한인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막중하다. 한인교회는 한인사회 공동체와 음 악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한인 주최 공연이 “교인에 의한, 교인을 위한, 교인의” 행사이기에 교회는 공연장으로 최우선적으로 선택된다. 한인교회가 중산층에 의한 성장주의를 과시하는 장이고, 이는 교회에서 개최되는 아마추어 음악애호가들의 클래식음악 공연을 통해 드 러난다. 특히 토론토 한인들이 거주국의 문화를 선호하는 국민정체성은 서양음악 선호사상으로 드러난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K-pop은 토론토 한인사회에서도 인기가 많다. 그러나 토론토에 서는 티켓 구매력이 있는 중년세대가 선호하는 ‘7080세대’ 가수의 공연이 많다. 교회에서의 ‘찬양콘서트’를 개최하는 가수 출신의 목회자들은 한인사회에서 인기 있는 뮤지션이다. 한인 이민사회에서 전통음악은 ‘모국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한인들에게 전통 음악은 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에 밀린 ‘주변부의 음악’이다. 전통음악은 한인 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구색 맞추기’로 초청된다. 전통공연예술을 배우는 대상은 주로 언어 소통의 한계로 주류 사회에 쉽게 편입하기 어려운 중장년층 여성이다. 그렇기에 전통음악은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된 다. 이는 미주 한인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음악문화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계에서는 전통음악을 소홀히 여기고, 불교계에서는 전통음악을 중시한다. 불교계의 행사에는 사물놀이가 포함되고, 심지어 의식에 작법을 연행하기도 한다. 즉, 한인사회에서 민족정체성은 불교계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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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미주 이민 역사는 1세기 이상이 흘렀고, 미주의 대도시에는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 되어 한인 디아스포라 문화가 형성되었다. 본고는 2018년에 개최된 각종 음악공연을 통해 토론토 한인사회의 디아스포라 음악문화를 살펴보았다. 한인사회에서 한인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막중하다. 한인교회는 한인사회 공동체와 음 악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한인 주최 공연이 “교인에 의한, 교인을 위한, 교인의” 행사이기에 교회는 공연장으로 최우선적으로 선택된다. 한인교회가 중산층에 의한 성장주의를 과시하는 장이고, 이는 교회에서 개최되는 아마추어 음악애호가들의 클래식음악 공연을 통해 드 러난다. 특히 토론토 한인들이 거주국의 문화를 선호하는 국민정체성은 서양음악 선호사상으로 드러난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K-pop은 토론토 한인사회에서도 인기가 많다. 그러나 토론토에 서는 티켓 구매력이 있는 중년세대가 선호하는 ‘7080세대’ 가수의 공연이 많다. 교회에서의 ‘찬양콘서트’를 개최하는 가수 출신의 목회자들은 한인사회에서 인기 있는 뮤지션이다. 한인 이민사회에서 전통음악은 ‘모국의 이미지’를 표상하는 상징이다. 그러나 한인들에게 전통 음악은 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에 밀린 ‘주변부의 음악’이다. 전통음악은 한인 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구색 맞추기’로 초청된다. 전통공연예술을 배우는 대상은 주로 언어 소통의 한계로 주류 사회에 쉽게 편입하기 어려운 중장년층 여성이다. 그렇기에 전통음악은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된 다. 이는 미주 한인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음악문화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계에서는 전통음악을 소홀히 여기고, 불교계에서는 전통음악을 중시한다. 불교계의 행사에는 사물놀이가 포함되고, 심지어 의식에 작법을 연행하기도 한다. 즉, 한인사회에서 민족정체성은 불교계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The history of Korean immigrants to North America has passed more than a century. There are many Korean immigrant societies that has made diaspora culture in metropolitans of North America. However, there are few musicological studies of diaspora music yet. The study of Song Bang-song, investigated the music of Koreans in Toronto in 1974, is the only musicological study so far. In this paper, I explored the diaspora music culture of Korean immigrant society in Toronto by examining musical activities held in 2018. The Christian church is the most important in the Korean immigrant society. Most of Korean Canadians are Christians that the church is not only the religious center but also the center of the Korean community which sustains the Korean immigrant society. The church is also the center of diaspora music culture. Many concerts are held in churches which are located in the suburban area of the metropolitan due to the low rate of the land. Therefore, the church is not an appropriate place to held concerts with its inaccessibility and inefficiency as concert halls. However, Korean Canadians prefer to held concerts in churches because most of concerts are “by the believers, for the believers, and of the believers” of the church. Most of the repertories of concerts held in church are Western classical music. The amateur musicians who have achieved economic success hope to show up their social status as the middle class in church. Their musical preference is tended to Western classical music which symbolizes the status of the middle class, and the ‘national identity’ of the host country. With the globalization of K-pop, it is very popular in the Korean immigrant society. However, the popular musicians are not able to host their own concerts but have appear public in crowded events held by the Korean immigrant societies. Most of musicians appear in the Korean Canadian stages are out-of-fashioned singers who are adored by the elders who are able to purchase expensive tickets. Some musician-pastors are very popular with their ‘gospel concerts.’ The traditional music is the symbol of the ‘image of the motherland.’ However, the traditional music is the ‘peripheral music,’ besides the Western classical music and popular music. The traditional music is preserved by the elder women who have a hard time to join the majority due to their lack of language ability. It made that the traditional music is regarded as the ‘heritage of the past.’ The Buddhists, however, promote the traditional music. Buddhist temples run music schools for the samul nori percussion quartet. Buddhist dances are performed at the services at Pyeonghwasa Temple. The dual perception of Buddhism which preserves the traditional music and ‘ethnic identity’ and Christianity which disrespects the traditional music among Korean Canadians in Toronto reflects the same phenomena of the mother country. The Korean Christian churches are the center of the Western-oriented middle class Koreans who have negative view of ethnic identity. The Korean Buddhist temples still preserve and promote the traditional music and positive ethnic identity. This diaspora music culture is not limited in Toronto but found in most of Korean immigrant societies in North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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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와 오사카 재일한인의 다문화공생 수용에 관한 연구 KCI 등재후보

지충남, 오관석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1호 2020.06 pp.97-130

...한인들이 어떤 태도로 수용하고있는가를 분석하였다. 첫째, 요인분석에서 50∼60대 응답자가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거주년도는 190년 이후 정주자가 많았다. 대학교 이상 졸업자는 과반수에 조금 못 미쳤다. 둘째, 다문화공생을 인식하는 유의도는 연령, 거주년도, 교육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였다. 셋째, 재일한인들은 정치참여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지만, 유의미한 차이는 낮았다. 재일한인들의 정책참여는 미미한 수준인 반면 정치적 의견 표출은 보통 수준이다. 일본 및한국정치에 대한 관심도는 일본보다는 모국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시사점은 첫째, 일본정부는 재일한인을 법률적 주민이 아닌 행정적 주민으로 인식한 결과 인정의 정치가 결여되어 있다. 사회통합을 위한 다문화공생 차원에서 재일한인의 지방참정권을 허용해야 한다. 둘째, 일본의 지자체는 행정의 자문기관으로 외국인시민회의를운영하고 있다. 지방참정권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회의 의제로 회피하고 있다. 정치적인문제도 회의 의제로 상정하여 논의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통합을 촉진시키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소통하고 공존하는 주민으로 수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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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일본의 다문화공생을 도쿄와 오사카의 재일한인들이 어떤 태도로 수용하고있는가를 분석하였다. 첫째, 요인분석에서 50∼60대 응답자가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거주년도는 190년 이후 정주자가 많았다. 대학교 이상 졸업자는 과반수에 조금 못 미쳤다. 둘째, 다문화공생을 인식하는 유의도는 연령, 거주년도, 교육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였다. 셋째, 재일한인들은 정치참여에 긍정적 태도를 보였지만, 유의미한 차이는 낮았다. 재일한인들의 정책참여는 미미한 수준인 반면 정치적 의견 표출은 보통 수준이다. 일본 및한국정치에 대한 관심도는 일본보다는 모국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시사점은 첫째, 일본정부는 재일한인을 법률적 주민이 아닌 행정적 주민으로 인식한 결과 인정의 정치가 결여되어 있다. 사회통합을 위한 다문화공생 차원에서 재일한인의 지방참정권을 허용해야 한다. 둘째, 일본의 지자체는 행정의 자문기관으로 외국인시민회의를운영하고 있다. 지방참정권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회의 의제로 회피하고 있다. 정치적인문제도 회의 의제로 상정하여 논의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셋째, 사회통합을 촉진시키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소통하고 공존하는 주민으로 수용해야 한다

This study analyzed how Korean-Japanese in Tokyo and Osaka were acepting multicultural coexistence in Japan. First, in the factor analysis, the respondents in their 50s and 60s were relatively high, and most of them were residing since 190. Graduates of colege and above were a litle les than half of the respondents. Second, the significance of recognizing multicultural coexistence was statisticaly significant in age, residence year, and education. Third, Korean-Japanese showed positive atitudes toward political participation but the significant diference was low. Korean-Japanese' participation in policy was minimal while expresing political opinions were moderate. As for the degre of interest in Japanese and Korean politics, they were more interested in the politics of the home country than in Japanese. The implications are as folows. First, as a result of the Japanese government's recognition of Korean-Japanese as administrative residents, not legal residents, there is a lack of recognition politics. From the point of multicultural coexistence for social integration, Korean�Japanese should be alowed to participate in local votes. Second, local governments in Japan operate foreign citizens' civil society as administrative advisory agencies. Political isues such as local voting rights are avoided as the agenda of the meting. Eforts should be made to discus political isues as the agenda of the conference. Third, by establishing a human network that promotes social integration, they should be acepted as communicating and coexisting resi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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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베 활동을 통한 식민체험의 기억계승 - 재일한인 1세・2세의 기억의 전달 차이를 중심으로 - KCI 등재

이토히로코, 박신규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비교일본학 제48집 2020.06 pp.119-138

...한인의 상황을 알리는 카타리베 활동을 한 재일한인 1세 A와 2세 B의 사례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1세, 2세 모두 전쟁 및 식 민지 체험의 기억 전달과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문화적 기억의 전달이라는 공통점을 지 녔으나 식민지 체험에서 실체험과 비체험자라는 차이로 인해 증언자와 설명원이라는 역할 차 이, 기억의 계승에 있어서 주요 매개체의 차이가 나타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체험자에서 비 체험자로 계승해가는 이들의 카타리베 활동은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행위로서 전쟁 체험과 알려지지 않는 재일한인의 역사와 기억을 전달하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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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75년이 지난 일본사화에서 전쟁체험자의 감소에 따라 전쟁기억의 풍화와 보존이 중 요한 과제가 됨으로써 이를 계승하고 전수하는 ‘카타리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카 타리베는 후속 세대에게 과거의 기억 계승과 평화, 인권, 평등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 을 수행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전쟁과 식민지 과거 체험을 전달하고, 재일한인의 상황을 알리는 카타리베 활동을 한 재일한인 1세 A와 2세 B의 사례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1세, 2세 모두 전쟁 및 식 민지 체험의 기억 전달과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문화적 기억의 전달이라는 공통점을 지 녔으나 식민지 체험에서 실체험과 비체험자라는 차이로 인해 증언자와 설명원이라는 역할 차 이, 기억의 계승에 있어서 주요 매개체의 차이가 나타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체험자에서 비 체험자로 계승해가는 이들의 카타리베 활동은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행위로서 전쟁 체험과 알려지지 않는 재일한인의 역사와 기억을 전달하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75 years after the war, as the number of war-experiencers decreased, it became an important task for weathering and preserving war memories, and interest in “Kataribe”, who is succeeded to, is growing. Kataribe not only inherits past memories to subsequent generations, but also plays a role in conveying messages such as peace, human rights and equality. In this study, we analyzed the cases of JapaneseKorean, a fist-generation A and a second-generation B, who had been performed as the Kataribe to convey the experiences of war and colonial past and to inform the situation of Koreans in Japan. As a result, both generation had a commonality in the transmission of cultural memories in terms of memory transfer and succession of war and colonial experiences. However, due to the difference between actual experience and non-experience in colonial past, differences appeared in the roles of the witness and the explainer, and the main mediator in the succession of memory. In conclusion, however, the Kataribe activities of those who succeeded from experience to non-experience played a large role in conveying the memory of Japanese-Korean unknown and the history of the war as a socio-cultural act of the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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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Shift 시대 중남미 한인사회의 역할 KCI 등재후보

최금좌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1호 2020.06 pp.1-30

...한인사회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한류 파생경제 구조로가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중남미 한인의 수가 최근 30년 동안 10만 명에 정체되어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코리아타운이형성되어 있는 브라질의 상파울루 경우가 대표적인 예로 브라질인들은 그곳에서 한국 음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의류제조업에 집중했던 브라질 한인사회는 중국의 진출로 더욱 계층화되고 다양화되었다. 그 결과 일부 브라질 한인들이 한류파생 업종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코리아타운 봉헤치루(Bom Retiro) 구(區)에서 새로 오픈한 고급스러운 한국 음식점은 물론, 한국식 찻집, 빵집, 떡집 등은 브라질 사회로부터 좋은반응을 얻고 있다. 비록 중남미 한인사회가 중미와 남미라는 서로 다른 경제 블럭에 속해있지만, 그것과상관없이, 중남미 한인사회는 지구적 대전환시대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자신이 거주하는국가와 경제권역에 전파할 수 있는 장본인이다. 따라서 한류는 오늘날의 K-Pop, K-Fod, K-Culture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가까운 미래에 K-Beauty, K-Performance 등으로 발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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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은 최근 20년 동안 중국의 대 중남미 진출을 ‘지구적 대전환’(Global Shift) 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중남미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은 실제로 무역 및 해외직접투자(FDI)라는 하드파워뿐만 아니라, 공자학원을 앞세운 소프트파워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본 연구는 21세기 중국의 대 중남미 진출이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에서 활발해 짐에 따라서, 그것이 (특히 브라질에서) 일본 및 한국의 소프트파워 전략에 미치는 영향과 더 나아가 수적으로 열악한 중남미 한인사회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한류 파생경제 구조로가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런데 중남미 한인의 수가 최근 30년 동안 10만 명에 정체되어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희망적이라 할 수 있다. 코리아타운이형성되어 있는 브라질의 상파울루 경우가 대표적인 예로 브라질인들은 그곳에서 한국 음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의류제조업에 집중했던 브라질 한인사회는 중국의 진출로 더욱 계층화되고 다양화되었다. 그 결과 일부 브라질 한인들이 한류파생 업종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코리아타운 봉헤치루(Bom Retiro) 구(區)에서 새로 오픈한 고급스러운 한국 음식점은 물론, 한국식 찻집, 빵집, 떡집 등은 브라질 사회로부터 좋은반응을 얻고 있다. 비록 중남미 한인사회가 중미와 남미라는 서로 다른 경제 블럭에 속해있지만, 그것과상관없이, 중남미 한인사회는 지구적 대전환시대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자신이 거주하는국가와 경제권역에 전파할 수 있는 장본인이다. 따라서 한류는 오늘날의 K-Pop, K-Fod, K-Culture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가까운 미래에 K-Beauty, K-Performance 등으로 발전해야 한다

Some scholars have defined China's advance in Latin America in the last 20 years as a Global Shift, which means that major changes are taking place in Latin America. In fact, China is actively investing not only in hard power including trade and 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but also in soft power with Confucius Institute. As China's advance into Latin America in the 21st century is active in hard and soft power, this study shows its impact on the change of soft power strategy of Japan and Korea (especialy in Brazil). And further this study emphasizes that the Korean communities in Latin America, whose number is comparatively por, should transform its economic structure to Korean Wave derived one in order not to be absorbed by Chinese culture. The fact that the number of Koreans in Latin America has ben stagnant at 10,00 in the last 30 years may be disapointing, but on the other hand, it sems hopeful. For example, in Sao Paulo of Brazil, where Brazilians can experience Korean fod and culture, as Koreatown is formed. The Korean community in Brazil, which had ben concentrated in women's clothing manufacturing, has become more stratified and diversified with China's recent advance. In São Paulo, when some Koreans opened luxurious Korean restaurants as wel as Korean-style tea-houses, bakeries, and rice cake shops, they were very welcome and highly praised by Brazilian society. Although the Korean community in Latin America belongs to diferent economies of Central and South America, regardles of that, in the age of Global Shift the Korean community in Latin America should act as a protagonist to diseminate Korean culture not only to their host country but also to the economic block to which their host country belongs. Then the Korean Wave can be developed increasingly from the K-Pop, K-Fod, K-Culture to the more upgraded level of K-Beauty, K-Performance and etc. in the near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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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주현상 안에서 바라본 제국의 해체와 다중의 아우또노미아 KCI 등재

전영의

한중인문학회 한중인문학연구 제67집 2020.06 pp.157-183

...한인 이주’라는 역사적 사실을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동안 디아스포라 담론을 바탕으로 연구되던 이주문학을 ‘제국과 다중’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텍스트를 읽어보려고 시 도한 것이다. ‘한인들의 이주현상 안에서 바라본 제국의 해체와 다중의 아우또노미아’에 대해 연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정래의 아리랑, 김영하의 검은 꽃, 박경숙의 바람의 노래 등 세 작가의 총 14편 텍스트를 기본 텍스트로 선정하고, 식민화된 대중이었던 타자들 이 다중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이들의 생존전략과 대항권력, 아우또노미아 실현방법 등을 알아보았다. 실제 한인들이 주류사회로 유입하면서 보여준 다중으로서 모습은 생체정치 안에 서 자신들의 구성 권력과 자기 통제 및 자율적 자기생산 권리인 재전유권을 주장하는 아우또 노미아 실현이다. 이들은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협동을 하고 제국의 소유권에 대항한다. 긍정 적 노동 안에서 신체들이 지닌 가치와 생산적 지식을 자가 증식하고 스스로 얻은 자유 안에서 실존적 존재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반면 텍스트의 인물들은 급격한 대항의 방식을 통해 다 중으로서 주체성을 갖고 아우또노미아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그 러나 하와이와 멕시코라는 이국 땅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들이 실제건, 텍스트 이건 활력을 통해 대중에서 다중으로 변모하고, 공통되는 사회적 행위를 통해 공통의 욕구를 추구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들의 활력은 상상, 사랑, 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현실적인 운동이 자 연합적이고 사회적인 주체성이다. 다중들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규범과 권리는 창 조․재창조되고 부단한 변증적 과정을 거친다. 이 안에서 제국의 권력은 다중에 의해 붕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중들의 정체성인 ‘활력’은 주체로서의 대항권력이자 민주주의를 창출 하는 절대적 내재성을 가진 힘이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하와이, 멕시코 한인이주를 디아스포라 담론이 아닌 제국과 다중 담론으로 충분히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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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구한말 아메리카 대륙으로 한인 이주’라는 역사적 사실을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동안 디아스포라 담론을 바탕으로 연구되던 이주문학을 ‘제국과 다중’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텍스트를 읽어보려고 시 도한 것이다. ‘한인들의 이주현상 안에서 바라본 제국의 해체와 다중의 아우또노미아’에 대해 연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정래의 아리랑, 김영하의 검은 꽃, 박경숙의 바람의 노래 등 세 작가의 총 14편 텍스트를 기본 텍스트로 선정하고, 식민화된 대중이었던 타자들 이 다중으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이들의 생존전략과 대항권력, 아우또노미아 실현방법 등을 알아보았다. 실제 한인들이 주류사회로 유입하면서 보여준 다중으로서 모습은 생체정치 안에 서 자신들의 구성 권력과 자기 통제 및 자율적 자기생산 권리인 재전유권을 주장하는 아우또 노미아 실현이다. 이들은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협동을 하고 제국의 소유권에 대항한다. 긍정 적 노동 안에서 신체들이 지닌 가치와 생산적 지식을 자가 증식하고 스스로 얻은 자유 안에서 실존적 존재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반면 텍스트의 인물들은 급격한 대항의 방식을 통해 다 중으로서 주체성을 갖고 아우또노미아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그 러나 하와이와 멕시코라는 이국 땅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들이 실제건, 텍스트 이건 활력을 통해 대중에서 다중으로 변모하고, 공통되는 사회적 행위를 통해 공통의 욕구를 추구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들의 활력은 상상, 사랑, 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현실적인 운동이 자 연합적이고 사회적인 주체성이다. 다중들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규범과 권리는 창 조․재창조되고 부단한 변증적 과정을 거친다. 이 안에서 제국의 권력은 다중에 의해 붕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중들의 정체성인 ‘활력’은 주체로서의 대항권력이자 민주주의를 창출 하는 절대적 내재성을 가진 힘이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하와이, 멕시코 한인이주를 디아스포라 담론이 아닌 제국과 다중 담론으로 충분히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The article is based on the purpose of humanistic consideration of the ‘Dissolution of Empire and Multitude of Autonomia in Korean Migration Phenomenon’ from the end of last JoSeon Dynasty to the before liberation. I analyzed texts that are Arirang, Black flower, Song of wind from the post-modern perspective and not from the empire's perspective, And it was an attempt to study through multiple autonomy theories. Arirang, Black flower, Song of wind fourteen texts have the same material and historical background, but Migrant place and space are different. so it was meaningful to find out how they are being changed from the masses to the multitude, and what survival strategies colonized others have to build autonomous, resist power in. Autonomia succeeded or failed to carry on with identity as a multitude in the text. But they change from the mass to the multitude through vitality who are struggled people to survive in the Korean migrant phenomenon, Hawaii, Mexico migrant workers and they pursued a common desire through common social behavior. Autonomia’s vitality is realistic movement by imagine, love, desire, It was a united and social identity Norms and rights were created and recreated in the new social relations of the multitude, Empire's power could be destroyed by the multitude through this endless dialectic process, the vitality that is identity of the multitudes can be seen as the resist power as a subject and the absolute intrinsic power to create democracy in this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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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재일한인의 부두노동에 관한 연구 ― 기타규슈항을 중심으로 ― KCI 등재

최민경

단국대학교 동아시아인문융복합연구소(구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학연구 제60집 2020.05 pp.71-92

...한인이 더이상의 경비를 들이지 않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지역이던 것이다. 기타규슈지역에 유입한 재일한인은 이 지역의 기간산업인 광업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카시, 오늘날의 부두노동도 그 중 하나였다. 기타규슈항은 근대 이후 국내외로의 석탄 수송 거점으로서 크게 성장하는 가운데 석탄을 중심으로 각종 화물의 선, 하적을 담당하는 나카시의 수요도 급증하였다. 그리고 바로 재일한인이 이 수요를 채우게 된 것이다. 재일한인 나카시는 노동강도가 센 석탄의 선, 하적 작업을 해상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나카시 노동력 운용을 위한 구미제도로부터는 일탈하여 존재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지 못하기도 했다. 이들의 임금은 일본인 나카시는 물론 재일한인 광부나 공장노동자에 비해서도 매우 적었으며,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고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본 연구의 고찰은 근대시기 재일한인의 노동세계를 분석한 기존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고 지역 및 업종의 다양성을 높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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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규슈지역은 20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의 인구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도쿄나 오사카와 비교했을 때 시모노세키항과 인접한다는 강점을 지녔다. 즉,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와 시모노세키항에 내린 한인이 더이상의 경비를 들이지 않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지역이던 것이다. 기타규슈지역에 유입한 재일한인은 이 지역의 기간산업인 광업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카시, 오늘날의 부두노동도 그 중 하나였다. 기타규슈항은 근대 이후 국내외로의 석탄 수송 거점으로서 크게 성장하는 가운데 석탄을 중심으로 각종 화물의 선, 하적을 담당하는 나카시의 수요도 급증하였다. 그리고 바로 재일한인이 이 수요를 채우게 된 것이다. 재일한인 나카시는 노동강도가 센 석탄의 선, 하적 작업을 해상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시 나카시 노동력 운용을 위한 구미제도로부터는 일탈하여 존재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지 못하기도 했다. 이들의 임금은 일본인 나카시는 물론 재일한인 광부나 공장노동자에 비해서도 매우 적었으며,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고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본 연구의 고찰은 근대시기 재일한인의 노동세계를 분석한 기존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고 지역 및 업종의 다양성을 높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The Kitakyushu region is a very important area for the migration of population from the Korean Peninsula to Japan, which activated in the early 20th century. This area has the advantage of being adjacent to Shimonoseki Port when compared to Tokyo and Osaka.In other words, it was an area where Koreans who arrived in Japan on the Bugwan Ferry and landed at Shimonoseki Port could search for jobs without any additional expenses. Koreans who flowed into the Kitakyushu region often worked in various jobs related to mining, which is a key industry in the region,. and one of them was Nakashi, namely harbor labor today. Because the port of Kitakyushu had rapidly emerged as a coal transportation base both in Japan and abroad since the modern times, the demand for Nakashi, which was responsible for loading and unloading various types of cargo, mainly coal, had increased significantly. And Koreans in Japan, who had no human and social capital just made up for this demand. Korean Nakashi often carried out the loading and unloading of coal with high labor intensity at sea, and there was a strong tendency to deviate from the Kumi system that was in charge of operating the recruitment labor force at the time. As a results, in some cases, they worked without basic clothing, food and shelter. Their wages were very low compared to Korean miners and factory workers, as well as Japanese Nakashi, and they were relatively insecure and poor. These analysis in this study complement the limitations of previous studies on the Korean working world in Japan in the modern era, and have the meaning of increasing the diversity of regions and industries.

北九州地域は20世紀初めから本格化した韓半島から日本への人口移動において大変重要な地域である。この地域は東京や大阪などと比較した際、下関港と隣接するというメリットを持つ。つまり、関釜連絡船で渡日し、下関港に降りたコリアンが追加の経費をかけずに仕事を探せる地域だったのだ。北九州地域に流入した在日コリアンはこの地域の基幹産業である鉱業に関わる仕事に就くことが多かったが、仲仕、今日の港湾労働もその中の一つだった。北九州港は近代以降、国内外への石炭輸送拠点として急浮上する中、石炭を中心とする各種貨物の船積み・船卸しを担う仲仕の需要も大きく増加した。そして人的資本、社会関係資本が脆弱だった在日コリアンがまさにこの需要を補うことになったのだ。在日コリアンの仲仕は労働強度が大きい石炭の船積み・船卸し作業を海上ですることが多く、当時、仲仕労働力の運用を担っていた組制度からは逸脱したまま存在する傾向が強かったため、基本的な衣食住を保証されないまま労働する場合もしばしばあった。彼らの賃金は日本人仲仕はもちろん、在日コリアンの鉱夫や工場労働者と比べても非常に低く、相対的に不安定で窮乏な生活を強いられていた。こうした本研究の考察は近代における在日コリアンの労働世界を対象とするこれまでの先行研究が持つ限界を補完し、地域及び業種の多様性を高めるという意味を持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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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동포를 위한 소설교육 내용 선정 연구 ― 재중 한인 소설을 중심으로 KCI 등재

조수진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제26호 2020.04 pp.77-104

...한인 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재중동포를 위한 교육용 재중 한인 소설텍스트의 첫 번째 선정 기준은 ‘이주’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하였다. 두 번째 선정 기준은 각 시기의 출판의 공식성이다. 세 번째 선정 기준은 각 시기에 발표된 작가의 ‘이주’ 체험 형상화와 텍스트에 나타난 ‘이산’과 ‘이주’의 정서가 반영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연구는 1) 시기별 ‘이주’의 양상, 2) 출판 시기, 3) 작품에 반영된 ‘이주’의 정서라는 선정 기준에 따라 교육용 재중 한인 소설을 선정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재중 한인 소설을 시기별로 1949년 이전 재만 조선인 시기와 1949년 이후, 그리고 19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로 구분하여 각 시기별 작품에 나타난 정체성의 변화와 ‘이주’의 정서를 중심으로 교육 내용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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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표는 재외동포 교육을 위한 문학텍스트를 선정하여 재외동포를 위한 문학교육의 교육 내용을 모색하는 것이다. 연구의 범위는 재중동포 학습자를 중심으로 조선인이 만주에 처음 이주하여 정착한 시기를 시작으로 개혁·개방 이후와 최근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글로 출간된 재중 한인 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재중동포를 위한 교육용 재중 한인 소설텍스트의 첫 번째 선정 기준은 ‘이주’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하였다. 두 번째 선정 기준은 각 시기의 출판의 공식성이다. 세 번째 선정 기준은 각 시기에 발표된 작가의 ‘이주’ 체험 형상화와 텍스트에 나타난 ‘이산’과 ‘이주’의 정서가 반영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연구는 1) 시기별 ‘이주’의 양상, 2) 출판 시기, 3) 작품에 반영된 ‘이주’의 정서라는 선정 기준에 따라 교육용 재중 한인 소설을 선정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재중 한인 소설을 시기별로 1949년 이전 재만 조선인 시기와 1949년 이후, 그리고 19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로 구분하여 각 시기별 작품에 나타난 정체성의 변화와 ‘이주’의 정서를 중심으로 교육 내용을 모색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elect the literary texts for the education of overseas Koreans and to suggest the contents of literature education for the overseas Koreans. The scope of the study is for Korean-Chinese novels published in Hangeul, from the time when Koreans first moved to Manchuria and settled, after the reform and opening of china, and until the latest. For this purpose, this study was based on the first selection criteria of textbooks for Koreans living in China based on the changing times of identity of migration. The second selection criterion is the official nature of the published text published by the writer who was active in each period. The third selection criterion is the works reflecting the emotions of the 'migration' experience and the 'migration' expressed in the texts presented at each period. This study selected Korean-Chinese novels for education based on 1) aspects of 'migration' by period, 2) timing of publication, and 3) sentiment of 'migration' reflected in works. In this study, Korean-Chinese novels were divided into periods before 1949, after the Joseon period, after 1949, and after the reform and opening of China in the 1990s, and the contents of education were searched for the change of identity and the emotion of 'mi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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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의 재외선거 참여 활성화에 관한 연구 KCI 등재후보

김재기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0호 2020.02 pp.65-83

...한인들의 기권요인 분석을 토대로 재외선거 참여 활성화를 모색해 보고자 하는 논문이다. 재외선거권은 거주국의 시민권자를 제외한 영주권을 갖은 재외국민과 단기체류자에게 헌법상 부여된 참정권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이 보장한 고유한 권리인 정치적 참정권이 제도적 정치적 개인적 정치지향점 들이 복잡하게 얽혀 90%대의 높은 기권율을 보이고있다.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실시된 재외선거 참여율이 낮다고 이 제도를 폐지할 수는 없다. 이 연구는 지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권한 북미지역 유권자 174명을 대상으로 재외선거 참여 활성화 방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첫째, 재외선거에 인터넷투표를 허용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둘째, 우편투표제를 도입하기 바란다. 셋째, 투표소의 확대가 필요하다. 넷째, 영주권자가 아닌 단기체류자들은 한국에 주소가 있기때문에 비례대표 투표와 함께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위헌상태인 국민투표법을 신속하게 개정하여 헌법 개정 등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해 재외국민들의 투표권을 보장해야 한다. 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제21대 국회에서 재외선거 관련법과 제도를 개선하려면 높은 등록률과 투표율이 요구된다. 제21대 국회에서 법과 제도 개선을 통해 재외선거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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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재외선거 ‘기권요인’에 대한 연구(2018) 이후 후속 논문으로, 재외한인들의 기권요인 분석을 토대로 재외선거 참여 활성화를 모색해 보고자 하는 논문이다. 재외선거권은 거주국의 시민권자를 제외한 영주권을 갖은 재외국민과 단기체류자에게 헌법상 부여된 참정권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이 보장한 고유한 권리인 정치적 참정권이 제도적 정치적 개인적 정치지향점 들이 복잡하게 얽혀 90%대의 높은 기권율을 보이고있다.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실시된 재외선거 참여율이 낮다고 이 제도를 폐지할 수는 없다. 이 연구는 지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권한 북미지역 유권자 174명을 대상으로 재외선거 참여 활성화 방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이 설문조사 결과는 첫째, 재외선거에 인터넷투표를 허용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둘째, 우편투표제를 도입하기 바란다. 셋째, 투표소의 확대가 필요하다. 넷째, 영주권자가 아닌 단기체류자들은 한국에 주소가 있기때문에 비례대표 투표와 함께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위헌상태인 국민투표법을 신속하게 개정하여 헌법 개정 등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해 재외국민들의 투표권을 보장해야 한다. 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제21대 국회에서 재외선거 관련법과 제도를 개선하려면 높은 등록률과 투표율이 요구된다. 제21대 국회에서 법과 제도 개선을 통해 재외선거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This paper seeks to promote participation in overseas elections. A high abstention rate in the 90 percent range is because the political suffrage, which is a nature right guaranteed by the Constitution as a citizen of the Republic of Korea, has been complicated as institutional, political and personal factors. It conducted a survey of overseas voters who abstained from the last 20th National Assembly election in 2016 on how to boost their participation in overseas elections. The survey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online voting system should be brought in overseas elections. Second, the postal ballot should be introduced. Third, the expansion of overseas polling stations is needed. Fourth, short-term residents, who are not permanent residents, should be required to participate in parliamentary elections in their constituencies along with proportional representation votes since they have their addresses in Korea. Fifth, the law on national referendums, which is unconstitutional, should be swiftly revised to ensure the voting rights of overseas Koreans in important matters of the country, including the revision of the Constitution. The 21st National Assembly election is planned for April 15, 2020. The 21st National Assembly should promote to revitalize overseas elections by reforming laws and institu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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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미주 한인사회 KCI 등재

장태한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5집 2019.12 pp.127-161

...한인사회에 대한 선행연구를 보충하는 차원에서 첫째, 미국에서 미주한인들의 비공식 법적 위치가 공인된 헤멧 밸리 사건(1913)을 재조명하여 미주한인들이 미국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점을 지적하고, 둘째, 3.1운동 이후 전개된 미주한인들의 무장 독립운동사를 서술보고, 셋째, 3.1운동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강조하고, 넷째, 미국 언론이 보도한 3.1운동 소식 내용의 동향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특히 헤멧 밸리 사건은 미국 거주 한인들이 비공식적으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법적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미주 한인들이 일본 식민국민이 아닌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만주나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 군대와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동포들과는 달리, 미주 한인은 일본의 간섭 없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이는 초기 미주 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이며,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들 고무시키기에 충분했으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는 여성에 의한 외교활동과 반일 경제활동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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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3.1운동 관련 한인사회에 대한 선행연구를 보충하는 차원에서 첫째, 미국에서 미주한인들의 비공식 법적 위치가 공인된 헤멧 밸리 사건(1913)을 재조명하여 미주한인들이 미국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점을 지적하고, 둘째, 3.1운동 이후 전개된 미주한인들의 무장 독립운동사를 서술보고, 셋째, 3.1운동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강조하고, 넷째, 미국 언론이 보도한 3.1운동 소식 내용의 동향을 소개하고 분석한다. 특히 헤멧 밸리 사건은 미국 거주 한인들이 비공식적으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법적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미주 한인들이 일본 식민국민이 아닌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었다. 만주나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 군대와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동포들과는 달리, 미주 한인은 일본의 간섭 없이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이는 초기 미주 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이며,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들 고무시키기에 충분했으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동기가 되었다. 이는 여성에 의한 외교활동과 반일 경제활동 그리고 무장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How did March 1st uprising of 1919 impact Korean immigrant community? Scholars and researchers previously focused on how Korean immigrants in the United States raised substantial amount of funds to support independence activities in the U.S. and elsewhere and how successfully launched pro-Korea/anti-Japan public relations campaign. In this paper, I focus on how the March 1st uprising impacted Korean immigrant community in four previously neglected areas: 1) historical importance of the “Hemet Valley incident” (1913) and how it laid the legal ground for Korean immigrants to continue independence activities in the United States, 2) how Korean immigrants called for direct military action against Japanese militarism, 3) how it engaged Korean immigrant women to independence movements, 4) content analysis of U.S. newspaper reporting of the March 1st uprising. stream before World War Ⅱ.

本論文は、3.1運動と関連して韓人社会に対する先行研究を補うという意味で、第一、米国在住の韓国人の非公式法的地位が認められた1913年のハメット・バレー事件が米国韓国人社会が米国で積極的に独立運動を展開し得る踏み台を確保した点を述べ、第二、3.1運動以降に展開された米国韓国人による武装独立運動史を叙述する、第三、3.1運動以降、米国韓国人社会の女性が積極的に独立運動に参加した事実を強調し、第四、米国マスコミが当時伝えた3.1運動の報道を紹介し、その動向を分析する。 特に、ハメット・バレー事件は、米国在住韓国人が非公式に日本人ではなく韓国人としての法的地位を与えられ、米国韓国人が植民地国民としてではなく韓国人として生きることのできる基礎を確立した事件であった。満州やロシアで独立運動を展開しながら日本の軍隊や警察の弾圧を受けた同胞とは異なり、米国韓国人は日本の干渉から解放され、独立運動に積極的に臨むことができた。これは初期米国韓国人史において最も重要な事件の一つであり、3.1運動の事実を伝え聞いた米国韓国人社会に独立の意志を植え付けるに十分であり、実際に独立運動への積極的な参加が行われた。これはまた女性による外交活動、反日経済活動、そして武装独立運動へと進むこと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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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사회 변화와 한인 2세 창업요인에 관한 사례연구 KCI 등재

민보연, 김민호

한국전문경영인학회 전문경영인연구 제22권 제3호 통권 제59호 2019.10 pp.25-48

...한인 2세 창업요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해당 지역 가족 창업사례를 알아보았는데, 해당가족은 3대에 걸쳐 모두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어 미국 이민사회의 전반적인 행태를 살펴보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창업요인으로 창업자 측면을 살펴보면 기업가정신과 인적네트워크는 매우 필수적인 요인으로 나타났고, 관련경험과 학력 등은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내부적 인 요인으로는 영어응대와 제품개발 등 전문 인력과 자금동업자는 중요한 요인이었고, 아이템과 마케팅차별화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점포입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 다. 외부적인 요인을 살펴보면 경쟁시장 규모는 관련 창업에 중요하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의 규제는 잠재적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한류는 창업에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났 다. 추가요인을 살펴보면 이들의 언어능력은 필수였고, 법적 신분은 창업당시에는 특별하 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가족의 사업적 배경과 부모의 경제적 지원은 중요한 요인이었 고, 가족의 몰입은 오히려 나타나지 않아 한인 2세의 독립적인 창업자세를 알 수 있었다. 과거 1세대가 생계유지의 직접 운영의 형태를 띠었다면 한인 2세는 시스템을 갖춘 경영의 형태를 선호하는 등 창업형태도 달라지는 양상을 나타내 2세 창업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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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미국 이민사회의 변화와 기존에 연구된 적이 없는 한인 2세 창업요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해당 지역 가족 창업사례를 알아보았는데, 해당가족은 3대에 걸쳐 모두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어 미국 이민사회의 전반적인 행태를 살펴보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창업요인으로 창업자 측면을 살펴보면 기업가정신과 인적네트워크는 매우 필수적인 요인으로 나타났고, 관련경험과 학력 등은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내부적 인 요인으로는 영어응대와 제품개발 등 전문 인력과 자금동업자는 중요한 요인이었고, 아이템과 마케팅차별화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점포입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 다. 외부적인 요인을 살펴보면 경쟁시장 규모는 관련 창업에 중요하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의 규제는 잠재적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한류는 창업에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났 다. 추가요인을 살펴보면 이들의 언어능력은 필수였고, 법적 신분은 창업당시에는 특별하 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가족의 사업적 배경과 부모의 경제적 지원은 중요한 요인이었 고, 가족의 몰입은 오히려 나타나지 않아 한인 2세의 독립적인 창업자세를 알 수 있었다. 과거 1세대가 생계유지의 직접 운영의 형태를 띠었다면 한인 2세는 시스템을 갖춘 경영의 형태를 선호하는 등 창업형태도 달라지는 양상을 나타내 2세 창업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This paper studies the changes in Korean-American immigrants society and the factors of second generation entrepreneurship. For this, the cases of family business start-ups in the Korean community in USA are examined. They are selected because they have been running self-employed family businesses for three generations, and it was judged that they are suitable for examining the overall behavior of the US immigrant businesses. Entrepreneurship and human networks are found to be essential factors of entrepreneurship, but related experiences and academic backgrounds are not. Internal factors such as English-speaking abilities, business partners, items, marketing differentiation are important factors while store location is not. When we look at external factors, the size of the competitive market is not important to the start-up, and US government regulations acted as a potential risk factor. In addition, the Korean Wave has a positive effect. Looking at the additional factors, their linguistic abilities are essential, and the legal status had no particular effect. The business background of the family and economic support of the parents are important factors, and thus we find the independent entrepreneurial attitude of the second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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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적 역사문화의 계승과 확산 : 재미한인들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KCI 등재후보

배진숙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9호 2019.10 pp.71-104

...한인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미국의 필라델피아와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중심으로 재미한인들에 의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취지와 행사내용을 살펴보고 그 계획 및 추진과정을고찰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문헌자료, 한인언론기사, 한인회자료, 국가보훈처 보도자료, 한인단체 웹사이트 인터넷검색과 설문조사를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우선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으로 ‘미국내 3.1운동의 영향’, ‘해방 이전 재미한인단체’, 그리고‘ 제1차 한인회의’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기념사업 준비와 실행을 위해 활용된 다양한 자원과 조직을 파악하고, 주요 행사장소에 주목함으로써 공간의 상징성과 미주한인의 도시 내의 위상에 대해 조사하였다. 본 연구를통해 한국독립운동사, 재미한인사의 맥락에서 미국에서의 3.1운동의 역사적,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공공외교의 주체로서의 재미한인의 기여와 역할을 고찰하였다. 결언에서는 미주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활성화와 재조명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사적지와 독립운동가의 지속적인 발굴을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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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으며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한인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미국의 필라델피아와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중심으로 재미한인들에 의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취지와 행사내용을 살펴보고 그 계획 및 추진과정을고찰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문헌자료, 한인언론기사, 한인회자료, 국가보훈처 보도자료, 한인단체 웹사이트 인터넷검색과 설문조사를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였다. 우선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으로 ‘미국내 3.1운동의 영향’, ‘해방 이전 재미한인단체’, 그리고‘ 제1차 한인회의’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기념사업 준비와 실행을 위해 활용된 다양한 자원과 조직을 파악하고, 주요 행사장소에 주목함으로써 공간의 상징성과 미주한인의 도시 내의 위상에 대해 조사하였다. 본 연구를통해 한국독립운동사, 재미한인사의 맥락에서 미국에서의 3.1운동의 역사적,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공공외교의 주체로서의 재미한인의 기여와 역할을 고찰하였다. 결언에서는 미주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활성화와 재조명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사적지와 독립운동가의 지속적인 발굴을 제안하였다.

This year, Koreans at home and abroad held a variety of events and activities to celebrate the 100th anniversary of March 1st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ay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his article examined why and how Korean Americans, particularly those residing in Philadelphia and the Los Angeles area, organized and participated in such celebrations. Methodologically, this study employed existing literature, newspaper articles, documents and online sources from Korean American organizations and South Korea’s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as well as survey data. First, as historical background, information on the“ Impacts of the March 1st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n then Korean Americans,” “Korean American Organizations before Korean Independence,” and “The First Korean Congress” were gathered. Then, this article analyzed the actual process of Korean Americans’ preparation for and execution of events commemorating the 100th anniversary of March 1st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ay, paying particular attention to the historical and present meaning and significance of event venues. This research reappraised the implications of the March 1st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S. both in the past and present, as well as assessed modern Korean Americans’ involvement in public diplomacy in American society in general. The findings suggested the importance of revitalizing research on the contributions of earlier generations of Korean Americans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lso discovering historic sites and as yet unrecognized Korean American leaders who played a role in their home country’s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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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 여성의 구술생애사 :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을 듣나 KCI 등재

유철인

한국구술사학회 구술사연구 제10권 2호 2019.09 pp.177-201

...한인 여성 구술자인 이지원(가명)은 이혼한 후 애리조나 피닉스의 한국식당에 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고 있다. 구술자의 자기서사에서 이혼은 생애이야기의 주제이 자 그녀에게 가장 큰 인생사건이었다. 구술자는 이혼과 이혼 후 삶을 말하고 싶어 한 국남성 대학교수인 연구자에게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였다.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하 기 전 연구자의 관심은 구술자가 애리조나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구술자의 초국가적 활동이었다. 부부가 같이 자영업을 하다가 이혼을 한 후 구술자가 한국식당에서 웨이 트리스 일을 하게 된 배경과 느낌에 대한 이야기는 세 차례의 인터뷰 모두에 등장한 다. 이혼을 하고 혼자 살면서 한국식당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구술자 의 현재를 가장 강력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혼을 한 후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한국남자 와 연결이 되고 한국의 인문학 관련 강의를 들었다는 것도 구술자는 여러 차례 이야 기하였다. 구술자의 생애는 이혼 전 자영업에 매달리는 재미한인의 삶에서 이혼 후 유투브로 한국의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섭렵하는 초국가적 이주자의 삶의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구술자료는 기본적으로 구술자와 연구자의 공동작업의 결과물이기에 이 논문은 구술자는 현재적 관심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고, 구술생 애사 연구자는 어떤 것을 귀담아 들었는지 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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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 여성 구술자인 이지원(가명)은 이혼한 후 애리조나 피닉스의 한국식당에 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고 있다. 구술자의 자기서사에서 이혼은 생애이야기의 주제이 자 그녀에게 가장 큰 인생사건이었다. 구술자는 이혼과 이혼 후 삶을 말하고 싶어 한 국남성 대학교수인 연구자에게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하였다.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하 기 전 연구자의 관심은 구술자가 애리조나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구술자의 초국가적 활동이었다. 부부가 같이 자영업을 하다가 이혼을 한 후 구술자가 한국식당에서 웨이 트리스 일을 하게 된 배경과 느낌에 대한 이야기는 세 차례의 인터뷰 모두에 등장한 다. 이혼을 하고 혼자 살면서 한국식당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구술자 의 현재를 가장 강력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혼을 한 후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한국남자 와 연결이 되고 한국의 인문학 관련 강의를 들었다는 것도 구술자는 여러 차례 이야 기하였다. 구술자의 생애는 이혼 전 자영업에 매달리는 재미한인의 삶에서 이혼 후 유투브로 한국의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섭렵하는 초국가적 이주자의 삶의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구술자료는 기본적으로 구술자와 연구자의 공동작업의 결과물이기에 이 논문은 구술자는 현재적 관심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고, 구술생 애사 연구자는 어떤 것을 귀담아 들었는지 비교하였다.

Jiwon (a pseudonym) has worked as a waitress at a Korean restaurant in Phoenix, Arizona after getting divorced. A divorce is a theme of her self-narrative and a major turning point in her life. She would like to tell h er l ife to a research er, a Korean male professor, in o rder t o talk about her divorce and her life after getting divorced. Before life history interviews, however, a researcher and listener had an interest in Koreans’ living in Arizona and their transnational activities in everyday life. Her story about working as a waitress at a Korean restaurant after getting divorced was said over and over again during a series of three interviews. Such a s tory r epresents her p resent. Sh e also t alked about social media several times by telling how Korean men were connected with her and that she used to fall into various Korean lectures related to the humanities on the YouTube. Her life history shows the transition from the life of a self-employed immigrant before her divorce to the life of transnational activities on the social media after her divorce. Since an oral text including an oral life history is a product of the interaction between a subject and a researcher, this paper compares what the subject wants to say and what the researcher h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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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戰後)를 사는 ‘오모니’ : 재일한인 모성 표상의 계보학 KCI 등재

정호석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비평 제21호 2019.08 pp.232-275

...한인 여성상이 갖는 역사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오모니’는 일본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의 가정에 고용된 조선인 여성 가사사용인에 대한 호칭이었으나 전후, 한인 2세들 및 일본인들에 의해 다양한 맥락에서 언급, 재해석되는 가운데 재일 한인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전후 ‘오모니’가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첫 계기는 한인 2세들의 문제를 극적으로 표출한 ‘김희로사건’으로서, 김희로의 어머니는 지식인 및 시민의 담론적 실천 속에서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민족문제’를 제기하는 ‘조선인’, 혹은 억압적 국가권력과 길항하는 ‘노동하는 민중’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또한 일본인 작가들의 논픽션, 에세이 작품에서, ‘오모니’는1 세 여성들 및 그들의 모습을 재조명하는 한인 후속 세대, 그리고 동시대 일본인들이 함께 직조해내는 전후 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상상을 촉발하는 동시대인, 혹은 전후의 국민 문화에 창조적인 다양성을 더함으로써 일본인 및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타자’로 해석되었다. 한편 ‘오모니’들의 문해활동은 고도경제성장 이면의 소수자들의 문제로 여겨지며 다년간의 시민 운동 속에서 지역사회의 역동적인 현실에 뿌리내려왔으며, 근년들어서는 주류 대중 문화 속에서 유통,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인 사회 내부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담론적 실천을 자극하며 그 의미를 확장해 온‘오모니’에 대한 본 논문의 계보학적 고찰은 문화적 탈식민화 과정에서 모성이 가지는 해방적 잠재력및 모성 표상의 대중적 소비가 갖는 양의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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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전후 일본 사회에서 ‘오모니’(オモニ)라는 표현이 전유되어 온 양상을 밝힘으로써재일한인 여성상이 갖는 역사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오모니’는 일본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의 가정에 고용된 조선인 여성 가사사용인에 대한 호칭이었으나 전후, 한인 2세들 및 일본인들에 의해 다양한 맥락에서 언급, 재해석되는 가운데 재일 한인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전후 ‘오모니’가 대중적인 주목을 받은 첫 계기는 한인 2세들의 문제를 극적으로 표출한 ‘김희로사건’으로서, 김희로의 어머니는 지식인 및 시민의 담론적 실천 속에서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민족문제’를 제기하는 ‘조선인’, 혹은 억압적 국가권력과 길항하는 ‘노동하는 민중’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또한 일본인 작가들의 논픽션, 에세이 작품에서, ‘오모니’는1 세 여성들 및 그들의 모습을 재조명하는 한인 후속 세대, 그리고 동시대 일본인들이 함께 직조해내는 전후 사회에 대한 대안적인 상상을 촉발하는 동시대인, 혹은 전후의 국민 문화에 창조적인 다양성을 더함으로써 일본인 및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타자’로 해석되었다. 한편 ‘오모니’들의 문해활동은 고도경제성장 이면의 소수자들의 문제로 여겨지며 다년간의 시민 운동 속에서 지역사회의 역동적인 현실에 뿌리내려왔으며, 근년들어서는 주류 대중 문화 속에서 유통, 소비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한인 사회 내부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담론적 실천을 자극하며 그 의미를 확장해 온‘오모니’에 대한 본 논문의 계보학적 고찰은 문화적 탈식민화 과정에서 모성이 가지는 해방적 잠재력및 모성 표상의 대중적 소비가 갖는 양의성과 관련하여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기한다.

This paper explores how omoni (ethnic Korean mothers), the most dominant representation of zainichi (ethnic Koreans in Japan) women, has been appropriated in postwar Japan. Omoni was once a term used in reference to Korean housemaids who were employed by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However, it also has its own trajectory in postwar Japanese society. As Kim Hiro [Kin Kiro] Incident came under an intensive media spotlight in 1968, Kim’s mother, depicted as Chosenjin Omoni (Korean Mother) or as Minshu (oppressed people), was understood with Japanese people’s self-transformation and enhanced historical awareness. Since the 1970s, a significant propagation of discourse was brought about by secondgeneration zainichies, who started to speak and write about their mothers. At the same time, Japanese writers also shed distinctive light on various aspects of omoni. A reportage by Yasuharu Honda on female divers from Jeju island, series of essay by Makoto Oda on his zainichi mother-in-law, and local civic movements to teach illiterate zainichi women in evening schools also have dynamically widened the spectrum of omoni, which cannot be limited to the typical stereotype of strong, devoted mothers testifying the past. Moreover, as the cultural location of discourse has diversified, more popular citations of omoni are now observed outside of the zainichi community. This phenomenon raises questions on the emancipatory potential that maternal images might carry in cultural pathways for decolonization, and on the transformations omoni undergoes in new contexts of commercial appropri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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