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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시기 발해농장의 설립과 독립운동유적지 보존방안 : 한인 이주 경제공동체의 실현 KCI 등재

김주용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한중관계연구 제5권 제2호 2019.06 pp.251-275

...한인들이었다. 타율과 자 율의 경계인이었던 한인들은 일제의 ‘달콤한 유혹’으로 만주에 이주하여 힘든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에 비해 안희제는 자작농창정을 목적으로 한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 려고 했다. 안희제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다. 그의 활 동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그의 생애에서 가장 광폭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민족적 정체성을 발현시키고 만주국 시기 한인들의 경제공동체를 실현한 것이 발해농장이었 음을 밝혔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에서 시행했던 각종 농업이민 정책의 수혜자가 아닌 한인들이 발해농장을 통해 자작농의 꿈을 이루고자 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발해 농장은 해방 이후에도 귀환하지 못한 한인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으며, 안희제가 이루 고자 했던 경제공동체가 미래 한중관계의 평화공동체로 전환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임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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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만주국을 성립한 일본제국주의는 만주 전역에 크고 작은 농장을 설치하 였다. 만선척식회사를 활용하여 만주의 드넓은 황무지를 곡창지대로 바꾸는 장기프로 젝트를 시행하였다. 이를 추진할 인적 동력이 바로 한반도의 한인들이었다. 타율과 자 율의 경계인이었던 한인들은 일제의 ‘달콤한 유혹’으로 만주에 이주하여 힘든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에 비해 안희제는 자작농창정을 목적으로 한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 려고 했다. 안희제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다. 그의 활 동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그의 생애에서 가장 광폭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민족적 정체성을 발현시키고 만주국 시기 한인들의 경제공동체를 실현한 것이 발해농장이었 음을 밝혔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에서 시행했던 각종 농업이민 정책의 수혜자가 아닌 한인들이 발해농장을 통해 자작농의 꿈을 이루고자 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발해 농장은 해방 이후에도 귀환하지 못한 한인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으며, 안희제가 이루 고자 했던 경제공동체가 미래 한중관계의 평화공동체로 전환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임을 확인하였다.

Ahn Hee-je is a multi-faceted independence activist in the history of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Much research has been done on his activities, but it is true that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which has been the most extensive in his life, is less than in other areas. The article looked at the historical status and features of Balhae Farm, founded by An Hui-je. It revealed that Balhae Farm was the one that expressed its ethnic identity and realized the economic community of Koreans during the Manchurian era. It also revealed that Koreans, who were not beneficiaries of various agricultural immigration policies implemented by the Japanese imperialism, wanted to achieve their own farming dream through Balhae farms. And it was confirmed that Balhae Farm is currently being cultivated by Koreans who failed to return to Korea even after liberation, and that the economic community that Anhuije wanted to achieve was an important historical space that could be converted into a peaceful community in future Korea-China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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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인교회의 주일예배 관찰을 통한 필리핀 선교 전략 방안 연구 KCI 등재

정근하

한국실천신학회 신학과 실천 제64호 2019.05 pp.307-338

...한인교회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첫째, 필리핀인 을 주 전도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교회 유형과 둘째, 한인을 주 목회대상으로 하 는 교회 유형이다. 현재까지 발표된 필리핀 선교전략 연구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유 형의 교회들을 위한 연구들로 그 실적이 쌓여져 있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 에 대한 연구는 현재 실태 파악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의 실태와 거기서 나타난 문제점을 발 견하여 그 대안들을 기존의 연구들에 접목하여 제언해 보고자 한다. 선교사가 현지에 파송되어 교회를 세우고 아무리 한인만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겠 다고 하더라도 선교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현지에서 생활하 고 있는 이상 현지인 선교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고, 허드렛일을 하는 현지인이 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었듯이 한인교회와 성도들은 필리핀 사 람들을 위해 ‘무익한 종(Unworthy Slave)’의 모범을 정기적으로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필리핀의 세부와 마닐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한인교회들의 주일의 일상을 관찰하여 조사한 사례연구로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가 필리핀 선교를 어떻 게 전략적으로 전개해 갈 수 있는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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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원

필리핀에서 활동 중인 한인교회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첫째, 필리핀인 을 주 전도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교회 유형과 둘째, 한인을 주 목회대상으로 하 는 교회 유형이다. 현재까지 발표된 필리핀 선교전략 연구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유 형의 교회들을 위한 연구들로 그 실적이 쌓여져 있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 에 대한 연구는 현재 실태 파악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의 실태와 거기서 나타난 문제점을 발 견하여 그 대안들을 기존의 연구들에 접목하여 제언해 보고자 한다. 선교사가 현지에 파송되어 교회를 세우고 아무리 한인만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겠 다고 하더라도 선교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현지에서 생활하 고 있는 이상 현지인 선교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고, 허드렛일을 하는 현지인이 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었듯이 한인교회와 성도들은 필리핀 사 람들을 위해 ‘무익한 종(Unworthy Slave)’의 모범을 정기적으로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필리핀의 세부와 마닐라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한인교회들의 주일의 일상을 관찰하여 조사한 사례연구로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가 필리핀 선교를 어떻 게 전략적으로 전개해 갈 수 있는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Active Korean churches in the Philippines can be classified into two types. First, it is the churches that are mainly engaged in missions activities targeted on local Filipinos. Second, it is the churches that target on Koreans for ministry. Most researches that have been presented about missions strategy in the Philippines until now were accumulated for the first type of churches. Meanwhile, present conditions about research on the second type of Korean churches cannot even be identified. This study will identify the present status of the second type of Korean churches that target on Koreans as well as the problems that appear in the churches to integrate it to previous researches and make a proposal of the measures. Even though Korean churches that target on Koreans in the Philippines are only focused on Koreans for ministry, the churches are built in a mission field and dispatched missionaries are in charge of the ministry, so it is considered that the Koreans should feel responsible about missions for the locals and practice regularly the moral teaching of ‘unworthy slave’ for the Filipinos, just as Jesus washed His disciples’ f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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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한인들의 ‘동해표기’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KCI 등재후보

김재기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7호 2019.02 pp.157-188

...한인 단체인 ‘미주한인의 목소 리’(VOCA)가 중심이 되어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동해병기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미국 주 의회 사상 최초로 동해병기를 명문화한 법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미국 버지 니아주 동해병기법은 공립학교 교과서에 기존의 일본해 단독표기를 ‘동해’와 의무 적으로 병기하도록 하는 법이다. 한국 외교부와 반크(VANK) 등 민간단체에서 동해 표기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 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의 동해병기 의무화 법안의 통과는 매우 의 미 있는 성과이다. 동해표기 문제는 한국 외교부가 해결해야한 중요한 외교정책 사 안 임에도 불구하고 미국한인들이 풀뿌리 정치 운동을 통해 미국 버지나아주에서 입법을 통해 해결했다. 이 논문은 비록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이지만 잘못된 과거 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미국의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운동에 주목한다. 이 논문은 첫째, 디아스포라 정치의 관점에서 미국 유대인의 이스라엘 관 계와 미국 한인들이 모국과 연계한 다양한 풀뿌리 운동에 대하여 이론적 접근을 한 다. 둘째, 국제수로기구에서 동해표기를 위한 한국정부의 활동을 조명해 본다. 셋째, 2012년부터 진행된 미국 한인들의 동해표기 운동의 과정을 조명해 보고 미국 정부 의 입장변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미국 한인들이 2014년 미국 버지니 아주에서 동해병기법 제정과 백악관 청원운동, 뉴욕에서 동해표기운동 등을 조명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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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수로기구(IHO)에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위치한 바다의 명칭이 ‘일본 해’로 되어 통용되고 있는 시간이 90년이 되었다. 동해표기 문제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 국제수로기구(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IHO) 회의가 처 음 열렸을 때,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로 등록해서 생긴 문제이다. 이에 따라 1929 년 출간된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초판본에 동해 수역 은 ‘일본해’로 공식표기 되었다. 제3차 수정판(S-23)이 발간된 1953년에도 한국은 전쟁의 혼란 속에 ‘동해’ 명칭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함으로써, 2019년 현재까지 ‘일본해’라는 명칭이 IHO를 비롯하여 미국 등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한국 정부는 1997년 총회에서 첫 문제 제기를 시작해 2002년, 2007년, 2012년 IHO 총회에서 줄기차게 동해와 일본해 병기(倂記)를 주장해왔다. S-23은 1953년 마지막 개정(3판) 이후 64년 지나 개정할 필요가 있지만, 그동안 한일 간의 동해 표 기를 둘러싼 대립으로 개정판(4판)을 내지 못하고 있다. 2017년 IHO총회에서도 성 과를 내지 못하고, 비공식협의체를 만들어 3년간 논의하여 총회에 보고하기로 한 만 장일치의 결론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해’ 단독표기에 변화를 가져 온 것이 IHO 총회장이 아닌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에서 일어났다. 2014년 미주한인 단체인 ‘미주한인의 목소 리’(VOCA)가 중심이 되어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동해병기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는 미국 주 의회 사상 최초로 동해병기를 명문화한 법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미국 버지 니아주 동해병기법은 공립학교 교과서에 기존의 일본해 단독표기를 ‘동해’와 의무 적으로 병기하도록 하는 법이다. 한국 외교부와 반크(VANK) 등 민간단체에서 동해 표기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 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의 동해병기 의무화 법안의 통과는 매우 의 미 있는 성과이다. 동해표기 문제는 한국 외교부가 해결해야한 중요한 외교정책 사 안 임에도 불구하고 미국한인들이 풀뿌리 정치 운동을 통해 미국 버지나아주에서 입법을 통해 해결했다. 이 논문은 비록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이지만 잘못된 과거 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미국의 풀뿌리 민주주의 정치운동에 주목한다. 이 논문은 첫째, 디아스포라 정치의 관점에서 미국 유대인의 이스라엘 관 계와 미국 한인들이 모국과 연계한 다양한 풀뿌리 운동에 대하여 이론적 접근을 한 다. 둘째, 국제수로기구에서 동해표기를 위한 한국정부의 활동을 조명해 본다. 셋째, 2012년부터 진행된 미국 한인들의 동해표기 운동의 과정을 조명해 보고 미국 정부 의 입장변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미국 한인들이 2014년 미국 버지니 아주에서 동해병기법 제정과 백악관 청원운동, 뉴욕에서 동해표기운동 등을 조명해 볼 것이다.

It has been 90 years that the name of the sea between the Korean Peninsula and Japan was called as “Sea of Japan” in the 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IHO). The East Sea issue was brought up when the first 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IHO) conference was held in 1919, which was the Japanese colonial era, Japan registered the East Sea as the Sea of Japan. Thus, in the first edition of the Limits of Oceans and Seas, which was published in 1929, East Sea was officially marked as the Sea of Japan. Even in 1953, when the third edition was published, Korea failed to claim the legitimacy of the name "East Sea" in the confusion of war that it resulted in the name "Sea of Japan" being used in international society including IHO and the United States. The Korean government has argued parallel notation of the East Sea and Japan Sea at the IHO General Assembly since 1997 till 2002, 2007, 2012. The S-23 needs to be revised urgently because it has been 64 years since the last revision (third edition) was published in 1953. But it has not been able to issue the revised edition (fourth edition) due to the conflict about the notation of East Sea between Korea and Japan. There was no outcome from the IHO General Assembly in 2017. It was unanimously decided to discuss the issue for three years by creating an informal council, it is hard to see this as a result. However, the change of sole representation of "Sea of Japan" occurred in Virginia Assembly, not in the IHO General Assembly. In 2014, Voice of Korean American (VOCA) took initiative of the pass of the East Sea parallel notation in Virginia, USA. This was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the US Assembly that the law stipulating the East Sea was made. The East Sea parallel notation enacted in Virginia, USA, requires the East Sea to be mandatory with the "Sea of Japan" in the existing Japanese Sea sole representation when marking the sea between the Korean peninsula and Japan in public school textbooks. The passage of the mandatory legislation for the East Sea in Virginia, USA, is a very meaningful achievement, as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he private sector such as VANK are working on various aspects to mark the East Sea. Despite the fact that the issue of the East Sea is an important foreign policy issue that the Korea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has to solve, the American Koreans have solved it through legislation in the state of Virginia through grassroots political movement. This paper focuses on the Korean American (who left Korea and live in USA) grassroots democratic political movement, which is trying to correct history through interest in the wrong past. First, from the perspective of diaspora politics, this paper provides a theoretical approach to the grassroots movement linked to the homeland of Korean Americans. Second, it highlights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government for marking the East Sea in the 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Third, it shows the process of the East Sea marking movement of American Koreans since 2012 and looks for ways to change the position of the US government. This paper deals what Korean Americans did, which are the enacting of East Sea parallel notation in Virginia, USA in 2014, the White House petition campaign, and the East Sea signage campaign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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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한인교회의 주일예배 관찰을 통한 필리핀 선교 전략 방안 연구

정근하

한국실천신학회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술세미나 인구절벽시대의 실천신학 과제 2019.02 pp.283-318

...한인교회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눠지는 것 같다. 첫째, 필리핀인을 주 전도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교회 유형과 둘째, 한인을 주 목회대상 으로 하는 교회 유형이다. 현재까지 발표된 필리핀 선교전략 연구들의 대부분은 첫 번 째 유형의 교회들을 위한 연구들로 그 실적이 쌓여져 있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의 한인 교회에 대한 연구들은 현재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의 실태와 거기서 나타난 문제점을 발견하여 그 대안들을 기존 의 연구들과 접목하여 제언하고자 한다. 필리핀에서 한인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 한인교회들이 아무리 한인만을 상대 로 목회를 하더라도 선교지에 세워져 있고, 파송 선교사가 목회를 주관하고 있는 이상 현지인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었듯이 한인들 도 필리핀 사람들을 위해‘무익한 종(Unworthy Slave)’의 윤리를 정기적으로 실천해 나 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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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활동 중인 한인교회는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눠지는 것 같다. 첫째, 필리핀인을 주 전도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교회 유형과 둘째, 한인을 주 목회대상 으로 하는 교회 유형이다. 현재까지 발표된 필리핀 선교전략 연구들의 대부분은 첫 번 째 유형의 교회들을 위한 연구들로 그 실적이 쌓여져 있는 반면, 두 번째 유형의 한인 교회에 대한 연구들은 현재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번째 유형의 한인교회의 실태와 거기서 나타난 문제점을 발견하여 그 대안들을 기존 의 연구들과 접목하여 제언하고자 한다. 필리핀에서 한인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 한인교회들이 아무리 한인만을 상대 로 목회를 하더라도 선교지에 세워져 있고, 파송 선교사가 목회를 주관하고 있는 이상 현지인 선교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었듯이 한인들 도 필리핀 사람들을 위해‘무익한 종(Unworthy Slave)’의 윤리를 정기적으로 실천해 나 갈 필요가 있다.

Active Korean churches in the Philippines can be classified into two types. First, it is the churches that are mainly engaged in missions activities targeted on local Filipinos. Second, it is the churches that target on Koreans for ministry. Most researches that have been presented about missions strategy in the Philippines until now were accumulated for the first type of churches. Meanwhile, present conditions about research on the second type of Korean churches cannot even be identified. This study will identify the present status of the second type of Korean churches that target on Koreans as well as the problems that appear in the churches to integrate it to previous researches and make a proposal of the measures. Even though Korean churches that target on Koreans in the Philippines are only focused on Koreans for ministry, the churches are built in a mission field and dispatched missionaries are in charge of the ministry, so it is considered that the Koreans should feel responsible about missions for the locals and practice regularly the moral teaching of 'unworthy slave' for the Filipinos, just as Jesus washed His disciples' f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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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의 한인 선교와 교육의 사상적 배경과 언어 KCI 등재

오새내

대동철학회 대동철학 제84집 2018.09 pp.173-193

...한인들의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 대상 선교 및 교육과 이에 사용한 언어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 교육선교와 교육의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사회문화적 의의를 논의하는 데 있다. 19세기 당시 러시아의 관제국가주의는 러시아 정교회에 의한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충성과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에 대한 평등한 시민권 인정으로 구성된 제정 러시아의 통치 이념이었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에게도 러시아 정교회의 입교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러시아의 토지를 개간하고 러시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는 길이기도 했다.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은 정교회에 입교하고 정교회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교육 수용이라 할 수 있다. 정교회는 러시아 어 교육, 한국어-러시아어 이중언어 교육과 한국인 대상 한국어 사용 선교 등으로 한인들에게 선교와 교육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한인들은 역사의 격변기에 러시아와 한반도에서 교사, 통역자, 지도자, 사제, 언론인, 기업인,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의 한인 교육은 러시아어, 한국어-러시아어 이중언어로 이루어졌고 한인 선교는 러시아 내 한인들이 사용하는 육진방언을 반영한 이중언어와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통용되던 한국어로 이뤄졌다. 교육 환경은 열악하고 정치적 상황은 항상 급변하고 있었지만 교육을 통해 한인들의 재능을 발견하거나 한인 스스로 자신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여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활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교회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한인들의 적극적인 연해주 개척의 의지와 정교회를 통해 나타난 교육에 대한 열의는 근대 한국인들의 긍정적 도전 정신을 후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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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186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들의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 대상 선교 및 교육과 이에 사용한 언어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 교육선교와 교육의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사회문화적 의의를 논의하는 데 있다. 19세기 당시 러시아의 관제국가주의는 러시아 정교회에 의한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충성과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에 대한 평등한 시민권 인정으로 구성된 제정 러시아의 통치 이념이었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에게도 러시아 정교회의 입교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여 러시아의 토지를 개간하고 러시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는 길이기도 했다.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들은 정교회에 입교하고 정교회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교육 수용이라 할 수 있다. 정교회는 러시아 어 교육, 한국어-러시아어 이중언어 교육과 한국인 대상 한국어 사용 선교 등으로 한인들에게 선교와 교육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성장한 한인들은 역사의 격변기에 러시아와 한반도에서 교사, 통역자, 지도자, 사제, 언론인, 기업인,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의 한인 교육은 러시아어, 한국어-러시아어 이중언어로 이루어졌고 한인 선교는 러시아 내 한인들이 사용하는 육진방언을 반영한 이중언어와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통용되던 한국어로 이뤄졌다. 교육 환경은 열악하고 정치적 상황은 항상 급변하고 있었지만 교육을 통해 한인들의 재능을 발견하거나 한인 스스로 자신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여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활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교회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한인들의 적극적인 연해주 개척의 의지와 정교회를 통해 나타난 교육에 대한 열의는 근대 한국인들의 긍정적 도전 정신을 후세에 전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mission and education of the Korean Orthodox Church in the process of migration and settlement of Koreans in the Primorsky Krai from the 1860s to the 1910s and to discuss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sociocultural significance of it. This study summarizes the history of Korean maritime migrants in chronological order in the late 19th century. In this study, Russian, Russian-Korean bilingual and Korean translation used by the Russian Orthodox Church were discussed. At the time of the 19th century, the Russian Orthodox Church was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the ruling Russian emigration. The Russian orthodox education that Koreans received was the first Western-style education acceptance of Koreans. The Orthodox Church conducted missions and education for Koreans through Russian language education, Korean-Russian bilingual education, and Korean-speaking Korean missions. Koreans accepted sophistication for survival and adjustment in Russia, or spiritual influence, and expressed enthusiasm for education. Russian Orthodox was bilingual, reflecting the dialect used by Koreans in Russia, and standard Korean of Seoul area. Although the educational environment was poor and the political situation was always changing rapidly, the role of the Orthodox Church was great in that it provided opportunities for Koreans to play an active role in the Primorsky Krai by finding out the talents of Koreans through education and by knowing their potentials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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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을 통해 본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KCI 등재

홍웅호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제53호 2018.07 pp.303-328

...한인들의 고향과 사할린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 사할린에서의 교육 문제와 조선학교, 교육과 조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으로 간 사람들, 소련 국적 취득과 대학 입학, 사할린에서의 일상생활 등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와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으로 또는 징집을 통해 노동자로 간 사람들, 사할린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에서 모집해 온 사람들,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교육하고, 사회주의 시민으로 편입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들 대부분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고향이었다. 사할린의 서부지역에 있는 탄광 도시들에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고향이기도 했다. 사할린에는 1946년부터 조선학교가 만들어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대부분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들이었다. 고려인 선생들은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러시아어와 한글을 가르쳤다. 1957년부터 북한의 대학에 입학시켜준다는 선전에 따라 많은 사할린의 젊은이들이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 마을마다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과 단절된 곳에 살면서도 한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사할린 한인은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의 동포이다. 이제는 역사적 고국이 되어가는 우리가 그들의 역사와 삶을 보듬고 같은 동포로서의 삶을 모색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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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구술을 통해 사할린 한인들의 고향과 사할린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 사할린에서의 교육 문제와 조선학교, 교육과 조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으로 간 사람들, 소련 국적 취득과 대학 입학, 사할린에서의 일상생활 등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와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강점기에 자발적으로 또는 징집을 통해 노동자로 간 사람들, 사할린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에서 모집해 온 사람들,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교육하고, 사회주의 시민으로 편입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들 대부분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고향이었다. 사할린의 서부지역에 있는 탄광 도시들에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고향이기도 했다. 사할린에는 1946년부터 조선학교가 만들어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대부분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들이었다. 고려인 선생들은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러시아어와 한글을 가르쳤다. 1957년부터 북한의 대학에 입학시켜준다는 선전에 따라 많은 사할린의 젊은이들이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해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 마을마다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사할린 한인들은 조국과 단절된 곳에 살면서도 한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왔다. 사할린 한인은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의 동포이다. 이제는 역사적 고국이 되어가는 우리가 그들의 역사와 삶을 보듬고 같은 동포로서의 삶을 모색해야만 할 것이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process of coming to Sakhalin’s hometown and Sakhalin through oral, educational issues in Sakhalin and the Joseon school, the people who went to North Korea to go to education and the country, the acquisition of Soviet nationality and university entrance, and the history and life of Sakhalin Korean people. The Sakhalin Koreans are organized people who voluntarily went to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who recruited from North Korea to solve Sakhalin’s labor shortage, and in order to educate the Koreans living in Sakhalin and to join them as socialist citizens. Most of the Sakhalin Korean residents were from Gyeongsang-do and Jeolla-do. Some people living in coal mine cities in the western part of Sakhalin were also home to North Korea. Sakhalin has been established as a shipbuilding school since 1946. Most of the teachers who taught the students were Koreans from Central Asia. Many young people of Sakhalin went to North Korea because of the propaganda that they entered North Korea’s university from 1957. Living in North Korea did not satisfy them and they tried to escape. These stories are said to be “myths” among villagers in Sakhalin. Sakhalin Korean people have lived in a place where they are separated from their motherland, but they have lived in keeping Korean tradition and culture. Korean people in Sakhalin are our compatriots with sick history. Now, as we become a historical homeland, we will have to look at their history and life and find a life as their fellow country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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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 대만 지역 한인 이주와 정착 - 조명하 의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 KCI 등재후보

김주용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한중관계연구 제4권 제2호 2018.06 pp.1-19

...한인들에게는 같은 처지의 땅이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땅 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만주와 같이 지리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 었다. 그래서 이주 한인의 정착과 생활이 용이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1920년대 이후 일제에 의해 채택되었던 내지연장주의가 지닌 허구성을 대만인들에게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8년 5월 14일 조명하 의거는 대만인이 아닌 같은 한인에 의해 의거가 일어났다는 것은 대만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 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조명하 의사의 이주와 정착과정을 통해 한인들의 대만이주의 특징을 도출하려고 했다. 일제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에 대해 생활고에 기인한 불우한 청년의 행위로 폄훼하고자 한 것도 한인의 대만 이주원인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당시 대부분의 한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대만 이주를 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명하 의거는 한인 이주와 연동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일제는 불우한 환경 과 식민지 조선인 청년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품었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일제 는 이주한인들의 처지와 연동해서 보았을 때 조명하의사는 경제적인 곤란으로 생계를 위해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간접적 으로 시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젊은 청년, 그것도 공무원이 경제적인 이유 로 일본과 대만을 떠돌았다는 사실은 일제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만지 역 한인이주의 원인을 경제적 궁핍으로 정형화시킨 일제의 자가당착의 모습이 바로 조명하 의사의 의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침략의 충격이 대만에서는 저항이라는 변용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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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지역은 일제강점기 한인들에게는 같은 처지의 땅이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땅 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만주와 같이 지리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 었다. 그래서 이주 한인의 정착과 생활이 용이하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1920년대 이후 일제에 의해 채택되었던 내지연장주의가 지닌 허구성을 대만인들에게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8년 5월 14일 조명하 의거는 대만인이 아닌 같은 한인에 의해 의거가 일어났다는 것은 대만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 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조명하 의사의 이주와 정착과정을 통해 한인들의 대만이주의 특징을 도출하려고 했다. 일제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에 대해 생활고에 기인한 불우한 청년의 행위로 폄훼하고자 한 것도 한인의 대만 이주원인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당시 대부분의 한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대만 이주를 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명하 의거는 한인 이주와 연동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일제는 불우한 환경 과 식민지 조선인 청년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품었다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일제 는 이주한인들의 처지와 연동해서 보았을 때 조명하의사는 경제적인 곤란으로 생계를 위해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간접적 으로 시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젊은 청년, 그것도 공무원이 경제적인 이유 로 일본과 대만을 떠돌았다는 사실은 일제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만지 역 한인이주의 원인을 경제적 궁핍으로 정형화시킨 일제의 자가당착의 모습이 바로 조명하 의사의 의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침략의 충격이 대만에서는 저항이라는 변용으로 나타났다.

Circumstances such as Taiwan region is Korean for the Japanese occupation of land and also easily inaccessible land. Most of all, they were not as geographically accessible as Manchuria. This is why it was not easy to settle down and live there. In this area, there was an incident that showed Taiwan people the falsification of supermealism that had been adopted by Japan since the 1920s. On May 14, 1928, the fact that the rule was made by the same Korean, not Taiwanese, made the Japanese authorities, including the Governor General of Taiwan more perplexed. In this article, I tried to characterize the migration of Koreans to Taiwan through the process of immigration and settlement by Cho Myung-ha. The reason why Japan wants to disparage the Korean government's decision to follow suit is because it wants to debase it as an act of a poor young man due to a life cycle. At that time, most Koreans chose to move to Taiwan for economic reasons. In this regard was financed under jomyeongha with migration and to the following feature. The focus was on Japan's discontent with poor conditions and the unfair treatment of young Koreans in the Japanese colonies. Japanese company under the boat when I went to work with illumination of economic is economic difficulties moved to make their living from. However, it indirectly admitted that the Japanese colonial rule was wrong. First of all, the fact that a young Korean man, a government official, traveled to Japan and Taiwan for economic reasons is a serious problem for Japan. Cho Myung-ha's willingness to accept independence from Japan is the very reason why Koreans moved to Taiwan in the wake of economic difficulties. The impact of the Japanese invasion was reflected in the transformation of resistance in Tai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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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국제결혼여성의 공동체 활동에 나타난 정체성 협상 KCI 등재후보

남혜경, 김영순

한국국제문화교류학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구 문화교류연구) 제7권 제2호 2018.05 pp.131-151

...한인여성들의 여성 공동체 활동을 살펴보고 공동체 활동에 나타난 정체성협상의 의미를 찾는데 있다. 이를 위해 국제결혼 한인여성의 거주국과 모국을 아우르는공동체 활동, 그리고 의미를 찾고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는 첫째, 이들의 공동체 활동에나타나는 정체성협상의 대상, 둘째, 정체성 협상의 방법, 셋째, 협상의 의미로 분류하였다. 정체성 협상의 대상은 거주국과 모국 그리고 거주국 사회 내 한인사회를 대상으로하고 있다. 정체성 협상의 방법은 공동체를 조직하여 활동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또한 양국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주장하는 한편 봉사하고 도움을 나눔으로써 양쪽 사회 모두와 협력을 시도한다. 정체성 협상의 의미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인식개선과여성에 대한 권리증진을 추구함이 있었다. 한인 국제결혼 여성들은 한국과 거주국 모두에서 소외당하고 배제되는 삶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모국과 거주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자신들을 연결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소속감을 갖기 위한 활동을 공동체를 통하여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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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한인여성들의 여성 공동체 활동을 살펴보고 공동체 활동에 나타난 정체성협상의 의미를 찾는데 있다. 이를 위해 국제결혼 한인여성의 거주국과 모국을 아우르는공동체 활동, 그리고 의미를 찾고 분석하였다. 연구 결과는 첫째, 이들의 공동체 활동에나타나는 정체성협상의 대상, 둘째, 정체성 협상의 방법, 셋째, 협상의 의미로 분류하였다. 정체성 협상의 대상은 거주국과 모국 그리고 거주국 사회 내 한인사회를 대상으로하고 있다. 정체성 협상의 방법은 공동체를 조직하여 활동함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또한 양국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주장하는 한편 봉사하고 도움을 나눔으로써 양쪽 사회 모두와 협력을 시도한다. 정체성 협상의 의미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인식개선과여성에 대한 권리증진을 추구함이 있었다. 한인 국제결혼 여성들은 한국과 거주국 모두에서 소외당하고 배제되는 삶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모국과 거주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자신들을 연결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소속감을 갖기 위한 활동을 공동체를 통하여 행한다.

This study aims to collect the case that Korean inter-married women participated community activities and to find the meaning of identical negotiation shown in their community participation. For this purpose, we searched the activities that combined Korean inter-married women's country of residence and country of birth and analyzed the meaning of the activities. The results classified into three different categories: first, the targeted party of identical negotiation indicated in Korean inter-married women's participation in community activities; second, methods of identical negotiation; and third, the meaning of the negotiation. The targeted party of identical negotiation included the country of residence and country of birth and Korean society found in the country of residence. The methods identical negotiation analyzed by organizing and participating their own communities to strengthen their identity. In addition, they claimed of their needs to the country of residence and country of birth and attempted of increasing the cooperation from both countries by serving and helping the society. The meaning of identity negotiation was to improve their perception of themselves and to promote the rights of women. The Korean inter-married women have experienced elimination and exclusion from both countries. Thus, they constantly connect themselves to the society of country of residence and country of birth, express their identity, and participate in the community activities to obtain the sense of belon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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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들의 재외국민선거 기권요인 고찰 KCI 등재후보

김재기, 임영언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4호 2018.02 pp.33-52

...한인의 선거기권요인을 고찰하는데 있다. 연 구방법은 2016년 3월 미국 뉴욕 뉴저지와 버지니아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재미한인을 대 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174부를 수집하여 본 논문의 분석에 활용하였다.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조사의 인구통계학적 특성은 연령대별로 4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미국거주 기간은 20년 미만의 뉴커머, 직업별 특징은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66.1%, 그리고 대부분이 미국영주권자로 뉴저지 주 에 거주하는 비율이 높았다. 둘째, 재외국민선거 기권이유에 대한 질문결과 재미한인들 은 미국 영주권자로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사니까’, 자영업자와 직장인들이 많은 관계 로‘ 바쁘고 등록절차가 복잡해서’,‘ 재외국민선거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투표소가 멀 어서’ 라는 응답이 많았다. 셋째, 재외국민선거 기권이유에 대한 차이분석결과, 체류신 분에서 영주권자와 연령대가 높을수록 재외국민선거에 대한 기권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 났다. 결론적으로 재외국민선거 기권사유가 ‘일상생활이 바쁘고 등록절차가 복잡하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재외국민선거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인터넷투표, 투표소확대, 우편투표 등의 다양한 투표방법이 도입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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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재외국민선거에서 재미한인의 선거기권요인을 고찰하는데 있다. 연 구방법은 2016년 3월 미국 뉴욕 뉴저지와 버지니아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재미한인을 대 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174부를 수집하여 본 논문의 분석에 활용하였다.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조사의 인구통계학적 특성은 연령대별로 4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미국거주 기간은 20년 미만의 뉴커머, 직업별 특징은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66.1%, 그리고 대부분이 미국영주권자로 뉴저지 주 에 거주하는 비율이 높았다. 둘째, 재외국민선거 기권이유에 대한 질문결과 재미한인들 은 미국 영주권자로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사니까’, 자영업자와 직장인들이 많은 관계 로‘ 바쁘고 등록절차가 복잡해서’,‘ 재외국민선거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투표소가 멀 어서’ 라는 응답이 많았다. 셋째, 재외국민선거 기권이유에 대한 차이분석결과, 체류신 분에서 영주권자와 연령대가 높을수록 재외국민선거에 대한 기권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 났다. 결론적으로 재외국민선거 기권사유가 ‘일상생활이 바쁘고 등록절차가 복잡하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재외국민선거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인터넷투표, 투표소확대, 우편투표 등의 다양한 투표방법이 도입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nsider the election abstention factor of Korean-American in the overseas Korean election. The method of study carried out the survey for Korean-American and utilized for the analysis of the dissertation.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is study showed by age, by dwelling period, local, and various characteristics of Korean-American. Second, the abstention factor of Overseas Korean Election was 'korea is left and lived' 'it is busy and the registration procedure is complicated' 'the Overseas Korean Election is do not know well' 'the polling place is far' etc. Third, as a result of analysis of the abstention reason, the abstention rate showed highly as the US permanent resident and age was high. In Conclusion, the various way of voting has to be introduced including the internet vote, polling place magnification, mail vote and etc. solving the abstention factor of the Overseas Korean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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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동포 귀환과 정착과제 연구 KCI 등재후보

박찬용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4호 2018.02 pp.53-82

...한인들이 이주하게 된 것은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면서 본격 화 되었다. 사할린에 강제 동원된 한인들은 주로 탄광에서 근무했는데 마치 노예와 같 은 생활처럼 비참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 은 소련과 협상하여 사할린에 있는 일본인을 일본으로 귀환 시켰으나 한인은 그 대상에 서 제외 되었다. 일본인 처를 따라 일본으로 귀환된 한인들은 박노학을 중심으로 1966 년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를 조직하고 귀국을 희망하는 한인 7,000명의 명단을 입수해 일본, 한국 그리고 소련정부에 발송하고 귀국조치를 호소했다. 1989년 6월 한국의 국회 통일외교위원들이 한국 최초로 사할린을 공식 방문했으며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민족체전에 사할린에서 189명의 노인이 서울에 왔다. 당시에 민주당의 김영진 의원이 사할린동포 지원법을 발의했다. 식민지와 냉전체제가 남겨놓은 사할린 한인동포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의 문제이고 정부의 문제라는 것을 정부가 인식하고 근본적 해결을 서둘러야 할 것이 다.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의 의미가 없다. 사할린동포 1세들이 죽기 전에 하루 빨 리 마무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과의 청구권 협상을 통해 유가족과 동포2세 3세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무관 심과 냉대를 반성하는 자세로 정부는 최선을 다해야 하며 우리 사회의 지속적 관심도 중 요하다고 본다. 우선 정부는 사할린한인동포의 귀환과 정착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법안을 지체 없이 통과시켜야 할 것이다. 사할린동포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대한민국의 정 통성의 확립과 자국민에 대한 정책적 입장을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탈 냉전시대 과거 역사의 유산을 청산하고 동북아의 다양한 이슈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 서도 정부의 전향적 태도는 그 의미가 높다고 하겠다. 이 논문에서는 사할린동포들의 처 음 처절한 삶을 살펴보고 한인들의 50%가 무국적자로 살아야만 했던 원인을 파악하였다. 또한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영구적인 귀환과 그들의 정착과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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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은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섬으로 러시아와 일본과의 조약에 의해 러시아의 영토로 확정 되었다. 사할린의 역사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사할린 남쪽을 일본이 점령 하면서 시작 되었다. 사할린으로 한인들이 이주하게 된 것은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면서 본격 화 되었다. 사할린에 강제 동원된 한인들은 주로 탄광에서 근무했는데 마치 노예와 같 은 생활처럼 비참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국 은 소련과 협상하여 사할린에 있는 일본인을 일본으로 귀환 시켰으나 한인은 그 대상에 서 제외 되었다. 일본인 처를 따라 일본으로 귀환된 한인들은 박노학을 중심으로 1966 년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를 조직하고 귀국을 희망하는 한인 7,000명의 명단을 입수해 일본, 한국 그리고 소련정부에 발송하고 귀국조치를 호소했다. 1989년 6월 한국의 국회 통일외교위원들이 한국 최초로 사할린을 공식 방문했으며 같은 해 9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민족체전에 사할린에서 189명의 노인이 서울에 왔다. 당시에 민주당의 김영진 의원이 사할린동포 지원법을 발의했다. 식민지와 냉전체제가 남겨놓은 사할린 한인동포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의 문제이고 정부의 문제라는 것을 정부가 인식하고 근본적 해결을 서둘러야 할 것이 다.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의 의미가 없다. 사할린동포 1세들이 죽기 전에 하루 빨 리 마무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과의 청구권 협상을 통해 유가족과 동포2세 3세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무관 심과 냉대를 반성하는 자세로 정부는 최선을 다해야 하며 우리 사회의 지속적 관심도 중 요하다고 본다. 우선 정부는 사할린한인동포의 귀환과 정착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법안을 지체 없이 통과시켜야 할 것이다. 사할린동포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대한민국의 정 통성의 확립과 자국민에 대한 정책적 입장을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탈 냉전시대 과거 역사의 유산을 청산하고 동북아의 다양한 이슈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 서도 정부의 전향적 태도는 그 의미가 높다고 하겠다. 이 논문에서는 사할린동포들의 처 음 처절한 삶을 살펴보고 한인들의 50%가 무국적자로 살아야만 했던 원인을 파악하였다. 또한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영구적인 귀환과 그들의 정착과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grasp the cause which had to examine the life of the fellow Korean in Sakhalin and which they have to live as the stateless person. Also, the permanent return and on their settlement assignments will be examined. Sakhalin's history started while Japan occupied with Japanese victory in the Russia and Japan war in 1905. Immigration of Sakhalin koreans began in earnest while Japan mobilized them in the China-Japan War and Pacific War with the force. Sakhalin koreans who the force is migrated spent the life like the slave in the coal mine. Sakhalin Japanese were returned to Japan but the Sakhalin koreans was excluded due to Japanese defeat from the object at August 15th in 1945. Because their problem is not and sakhalin Korean countrymen problem is the problem of our people and government, it has to hurry the solution. The attitude of the government about the Sakhalin Koreans problem will be the standard judging the political position about the establishment of the legitimacy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people. In Conclusion, the history is paid off and the meaning the positive attitude of the Korean government is the various issue about the Northeast Asia deep in the initiative situation where it has to sol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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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주 한인사회와 비영리단체 KCI 등재후보

장태한, 이재희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4호 2018.02 pp.1-32

...한인인구는 180만을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들 중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LA카운티로 2014년 217,260명 정도 로 나타났다. 상징적으로 미국 한인공동체의 중심은 LA로 알려지고 있다. 코리아타운으 로서 알려진 초국적 집거지는 2000년대 초반 이후 미국 주류사회에서 한국문화와 음식 을 유행시키고 있다. 코리안 바베큐, 드라마, 음악, 한인배우들이 미국 팝 걸쳐 무대를 놀라게 하고 있다. 또한 한인이민자들은 보다 나은 학군과 고용기회를 찾아 남가주 교외 지역에 코리아타운을 건설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LA코리아타운과 남가주 코리아타운의 진화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있다. LA코리타운의 형성은 한인이민자들이 1960년 말과 1970년대 초 올림픽 마켓, VIP레스토랑, VIP플라자 등을 개업하면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 LA시는 공식적으 로 버몬웨스턴과 올림픽 8번가를 코리아타운으로 지정하였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탐구하고 있다. LA코리아타운은 어떻게 고립된 에스 닉 집거지에서 초국적 다인종적 집거지의 중심지로 변모할 수 있었는가? 코리아타운 이 민자들은 남가주 교외지역에 코리아타운을 왜 그리고 어떻게 확산시키고 건설하게 되었 는가? 한인 비영리단체는 남가주 한인이민공동체를 지원하고 형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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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센서스 조사에 의하면 2012년 한인인구는 180만을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들 중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LA카운티로 2014년 217,260명 정도 로 나타났다. 상징적으로 미국 한인공동체의 중심은 LA로 알려지고 있다. 코리아타운으 로서 알려진 초국적 집거지는 2000년대 초반 이후 미국 주류사회에서 한국문화와 음식 을 유행시키고 있다. 코리안 바베큐, 드라마, 음악, 한인배우들이 미국 팝 걸쳐 무대를 놀라게 하고 있다. 또한 한인이민자들은 보다 나은 학군과 고용기회를 찾아 남가주 교외 지역에 코리아타운을 건설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LA코리아타운과 남가주 코리아타운의 진화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있다. LA코리타운의 형성은 한인이민자들이 1960년 말과 1970년대 초 올림픽 마켓, VIP레스토랑, VIP플라자 등을 개업하면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 LA시는 공식적으 로 버몬웨스턴과 올림픽 8번가를 코리아타운으로 지정하였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탐구하고 있다. LA코리아타운은 어떻게 고립된 에스 닉 집거지에서 초국적 다인종적 집거지의 중심지로 변모할 수 있었는가? 코리아타운 이 민자들은 남가주 교외지역에 코리아타운을 왜 그리고 어떻게 확산시키고 건설하게 되었 는가? 한인 비영리단체는 남가주 한인이민공동체를 지원하고 형성하는데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The US Census Bureau estimated the total Korean American population at more than 1.8 million in 2012. The highest concentration of Koreans resides in Los Angeles County, California where the population reached 217,260 in 2014. Symbolically, the heart of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is in Los Angeles. Known as Koreatown, this transnational enclave gained popularity over the years and by the early 2000s, Korean culture and food hit mainstream-American society hard. Korean barbeque, Korean dramas and music, and even Korean American actors took the American pop-culture scene by surprise. Korean immigrants also established several“ suburban Koreatown” in Southern California in search of better school districts and employment opportunitie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trace history of evolution of Koreatown in Los Angeles and Southern California. The formation of Los Angeles Koreatown began late 1960s along Olympic Boulevard and several Korean businesses catering Korean immigrants opened in early 1970s such as Olympic Market, VIP restaurant, and VIP Plaza. By early 1980, the City of Los Angeles designated Vermont-Western and Olympic-8th Street as "Koreatown." This article explores following questions: How did Koreatown in Los Angeles transformed from isolated ethnic enclave to center of transnational and multiracial enclave? Why and how Korean immigrants dispersed and establish "suburban Koreatown" in Southern California? What roles do non-profit organizations play in supporting and shaping Korean immigrant community in Southern Califo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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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인 시민단체들의 현황과 활동 KCI 등재후보

주동완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44호 2018.02 pp.121-152

...한인 이민사회의 역사는 뉴욕 한인 사회단체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1960년 뉴욕 한인 회 (New American Association of New York Association)가 창설된 이후로 2017년 현재 약 1,000여 개의 한인 단체 및 협회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인사회가 이민 정착의 시기를 거쳐 생활의 안정기를 지나 발전하면서 그 사회적 성 격이 변화했다. 또 한인사회의 사회적 성격의 변화에 따라 각 시기별로 한인사회가 필요 로 하는 한인 단체들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 뉴욕 한인 시민단체들(NGO/NPOs)들의 변화와 한인사회의 사회적 성격의 변화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한인 시민단체들의 문제점을 지적 하고 향후 전망과 함께 한인 시민단체들의 활동전략으로써 위키백과의 활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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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에 따라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된 뉴욕 한인 이민사회의 역사는 뉴욕 한인 사회단체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1960년 뉴욕 한인 회 (New American Association of New York Association)가 창설된 이후로 2017년 현재 약 1,000여 개의 한인 단체 및 협회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인사회가 이민 정착의 시기를 거쳐 생활의 안정기를 지나 발전하면서 그 사회적 성 격이 변화했다. 또 한인사회의 사회적 성격의 변화에 따라 각 시기별로 한인사회가 필요 로 하는 한인 단체들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들 뉴욕 한인 시민단체들(NGO/NPOs)들의 변화와 한인사회의 사회적 성격의 변화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한인 시민단체들의 문제점을 지적 하고 향후 전망과 함께 한인 시민단체들의 활동전략으로써 위키백과의 활용을 제안하고자 한다.

The Korean immigrant society in New York began to be formed in earnest in the early 1970s following the amendment of the US immigration law in 1965. The history of the Korean immigrant society in New York can be said to be the history of Korean American social organizations in New York. Since the creation of the New American Association of New York Association in 1960, more than 1,000 Korean organizations and associations have been active in the New York metropolitan area in 2017. As the Korean-American society developed through the stabilization period of immigration and the period of immigration settlement, its social character changed. In addition, according to the changes in the social character of Korean American society,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needs the different social organizations by each period. In this paper, we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anges of Korean NGOs / NPOs and the changes in the social character of Korean American society. We also point out the problems of Korean civic groups and propose the use of Wikipedia as an action strategy for Korean social organizations with future prosp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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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im of this research was to study the relationship between biculturalism, bilingual proficiency and the career maturity of Korean-Australian adolescents. For this end, a sample of 393 Korean-Australian middle and high schoolers who live in Sydney were surveyed. The data was analysed using the SPSS Statistics 24 program. First, frequency of responses were analysed using descriptive statistics. Next, independent t test and one-way ANOVA were utilized for mean comparison to analyse the survey participants’ individual characteristics, biculturalism, bilingual proficiency and career maturity. The results were as follows: among demographic variables, gender, spoken language at home, and the level of communication with parents about career were predictors of career maturity. Those who have high biculturalism and high bilingual proficiency showed high career maturity(p<.001). In conclusion, in order to improve the career maturity of Korean adolescents in a bi-cultural environment, Korean community organizations need to develop and offer a variety of youth programs to improve the biculturalism and bilingual profici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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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한인타운의 확장 - LA 한인교회들의 분열을 중심으로 - KCI 등재

정근하

한국실천신학회 신학과 실천 제56호 2017.09 pp.683-721

...한인타운 등 여러 나라의 에스닉 소사이어티(Ethnic society)가 형성되어 있다.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가 고립과 정체로 정의되는 것과 달리 LA 한인타운과 한인사회는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LA 한인타운의 확장의 요인으로 주목되지 않았던 한인교회들의 분열에 주목하여 한인타운과 한인사회의 확장을 입증해 보려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LA의 수많은 한인교회들은 분열하여 쪼개졌고, 지금 현재도 진행 중이다. 특히 이민초기부터 한인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몇몇의 대표적인 한인교회들이 3차, 4차에 이르는 분열을 계속하는 등 한인교회들은 미국 내의 한인사회와 기독교계에 치명적인 오점과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며 분리되어 나간 성도들이 새로운 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원 교회와 경쟁함으로써 LA 한인타운과 한인사회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이민교회의 분열에 특히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민교회의 구성원이 너무 다양하다는 점이다. 즉 이민교회에는 원래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파 사람들, 무신론자, 심지어 다른 종교 신봉자들까지 출석하고 있어 획일화된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건을 한 시각으로 볼 수 없고,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수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민교회의 이 같은 구조적 특수성과 교회 관계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LA의 한인교회들은 분열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LA 한인타운과 한인사회는 분열하는 한인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팽창할 것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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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에는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 한인타운 등 여러 나라의 에스닉 소사이어티(Ethnic society)가 형성되어 있다. 차이나타운, 리틀 도쿄가 고립과 정체로 정의되는 것과 달리 LA 한인타운과 한인사회는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LA 한인타운의 확장의 요인으로 주목되지 않았던 한인교회들의 분열에 주목하여 한인타운과 한인사회의 확장을 입증해 보려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LA의 수많은 한인교회들은 분열하여 쪼개졌고, 지금 현재도 진행 중이다. 특히 이민초기부터 한인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몇몇의 대표적인 한인교회들이 3차, 4차에 이르는 분열을 계속하는 등 한인교회들은 미국 내의 한인사회와 기독교계에 치명적인 오점과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이며 분리되어 나간 성도들이 새로운 곳에 교회를 개척하여 원 교회와 경쟁함으로써 LA 한인타운과 한인사회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이민교회의 분열에 특히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민교회의 구성원이 너무 다양하다는 점이다. 즉 이민교회에는 원래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파 사람들, 무신론자, 심지어 다른 종교 신봉자들까지 출석하고 있어 획일화된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건을 한 시각으로 볼 수 없고,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수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민교회의 이 같은 구조적 특수성과 교회 관계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LA의 한인교회들은 분열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LA 한인타운과 한인사회는 분열하는 한인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팽창할 것이라 판단된다.

Multiple ethnic societies have been formed in LA, e.g. China Town, Little Tokyo and Korea Town. China Town and Little Tokyo are characterized by isolation and stagnation, whereas Korea Town in LA and the wider Korean society have been continuously growing. The present paper establishes the division and fragmentation of Korean churches as a determinant of the extension of Korea Town and that of Korean society in LA, which has not been well-documented before. Since the 1980s, many Korean churches in LA have been split and even fragmented. In the same vein, it is not hard to find Korean churches undergoing divisions in the region. In particular, despite having served as shelters for Korean immigrants since the early days of Korean migration to the U.S., some influential Korean churches have gone through divisions as many as three or four times, which has brought an indelible dishonor and disappointment to Korean society and Christianity across the board. Serious internal strife and conflict in those churches has begotten new churches, competing with old ones. Meanwhile, the new church planting resulting from such divisions and fragmentation have lent themselves to the extension of Korea Town in LA. The divisions of immigrant churches should be noted in light of the diversity of their membership. That is, immigrant churches are attended by not only their original Christian members but also those from different sects, atheists and even those of different religious backgrounds, which is a stark contrast to the homogeneous membership of church communities in general. Furthermore, the heterogeneous demographics of immigrant churches has conditioned their internal disagreement and conflict, resulting in the division and fragmentation. The demographics specific to Korean churches and the conflict of interests among stockholders have underlain their division and fragmentation, leading to a series of new church planting in LA, which has been, and will be, conducive to the continuous extension of Korea Town and Korean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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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크리에이션 치료가 재미 한인노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 KCI 등재

박은식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제15권 제9호 2017.09 pp.435-441

...한인 노인을 대상으로 현재 뉴욕 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데이케어 프로그램(Adult Day Care Program)의 일환인 치료 레크리에이션의 신체적, 정신적 효과를 평가하고자 시행되었다. 연구 방법은 비동등성 대조군 사후 실험 연구로 2017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다. 본 연구에 참여한 대상자는 실험군 35명, 대조군 35명이었으며 이 중 66명의 자료를 분석하였다. 본 연구에 참여한 대상자의 평균연령은 79.4세 이었으며 미국에 거주한 기간은 평균 24.6년 이었다. 치료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은 데이케어센터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서 본 연구결과, 데이케어센터 치료 레크리에이션에 참여한 노인의 일상생활 수행능력, 우울 및 외로움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향후 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한 노인 대상 다양한 치료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이 개발, 운영되어져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효과를 평가하기 위하여 근거기반 연구가 수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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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노인을 대상으로 현재 뉴욕 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데이케어 프로그램(Adult Day Care Program)의 일환인 치료 레크리에이션의 신체적, 정신적 효과를 평가하고자 시행되었다. 연구 방법은 비동등성 대조군 사후 실험 연구로 2017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다. 본 연구에 참여한 대상자는 실험군 35명, 대조군 35명이었으며 이 중 66명의 자료를 분석하였다. 본 연구에 참여한 대상자의 평균연령은 79.4세 이었으며 미국에 거주한 기간은 평균 24.6년 이었다. 치료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은 데이케어센터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서 본 연구결과, 데이케어센터 치료 레크리에이션에 참여한 노인의 일상생활 수행능력, 우울 및 외로움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향후 문화적 감수성을 고려한 노인 대상 다양한 치료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이 개발, 운영되어져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효과를 평가하기 위하여 근거기반 연구가 수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valuate the effect of recreational therapy as part of Social Adult Day Care Program administered in the state of New York for the Korean American elderly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he study was conducted in a nonequivalent control group posttest-only design from February to April, 2017. The participants included 35 subjects in the experimental group and 35 subjects in the control group; among the sample, 66 participants' data were analyzed. The average age of subjects who participated in this study was 79.4 years, and the average duration of residence in the United States was 24.6 years. Based on the study results, the recreational therapy program provided by the day care center was found to have a positive effect on the participant's daily life performances, depression and loneliness. Therefore, a variety of cultural sensitive recreational therapy program for the elderly population should be developed and operated in the future; furthermore, evidence-based research should be conducted to evaluate the effects of these prog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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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주 한인가계의 재무적 과제와 극복 경험 연구 KCI 등재

손상희

한국소비자정책교육학회 소비자정책교육연구 제13권 3호 2017.09 pp.187-212

...한인가계가 당면하는 재무적 과제와 과제 해결을 통한 재무복지의 달성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한인이민자의 재무복지 증진을 위한 함의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거주기간 3년 이상인 13명의 한인이민1세대를 대상으로 개별심층면담을 기본으로 한 질적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Colazzi의 6단계 자료분석 방법에 의거하여 결과를 도출하였다. 분석결과, 한인이민가계가 당면하는 재무적 과제는 크게 기반닦기, 정착하기, 은퇴하기라는 3가지 범주로 도출되었다. 이민 초반에 이민자들은 취업과 생계비 충당, 역할조정, 절망감 다잡기를 통해 자급자족을 위한 기반을 닦게 되고, 이민 중반에 접어들면 직업의 안정, 주거의 안정, 빚 갚기, 자녀 대학교육을 통해 안정된 정착을 이루고자 한다. 나아가 이민기간의 후반에는 은퇴자금 준비, 은퇴누리기를 통해 은퇴의 소망을 이루어간다. 이러한 재무적 과제는 이민시기에 따른 차이는 없었으나, 이민당시의 경제적 환경 혹은 이민자의 특성에 따라 재무적 과제의 스트레서(stressor)로서의 정도가 다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재무적 과제 가운데 취업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드러났다. 이민자의 취업에 있어서 인적자본이론과 이중노동시장이론이 모두 적용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이민 초기에 단기적 수입뿐 아니라 개인의 발전가능성을 고려한 취업결정을 통해 직업 안정성을 추구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함을 시사하였다. 이 외에도 이민자들은 주택자산의 관리, 부채의 조정과 상환, 은퇴자금 준비에 있어서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나 재무역량에 있어서 취약집단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시사하였다. 본 연구는 한인이민가계의 재무적 과제와 재무복지 달성 과정을 탐구하여, 이민의 성공과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요인으로 여겨지는 이민자의 경제적 적응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적, 교육적 고려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에 본 연구의 결과는 해외한인이민자 적응을 위한 지원정책의 기초자료로서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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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는 일반적으로 언어 및 문화 장벽, 기존 지지망으로부터의 분리 등으로 인해 재무복지에 있어서 취약하다. 본 연구는 미국이주 한인가계가 당면하는 재무적 과제와 과제 해결을 통한 재무복지의 달성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한인이민자의 재무복지 증진을 위한 함의를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거주기간 3년 이상인 13명의 한인이민1세대를 대상으로 개별심층면담을 기본으로 한 질적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Colazzi의 6단계 자료분석 방법에 의거하여 결과를 도출하였다. 분석결과, 한인이민가계가 당면하는 재무적 과제는 크게 기반닦기, 정착하기, 은퇴하기라는 3가지 범주로 도출되었다. 이민 초반에 이민자들은 취업과 생계비 충당, 역할조정, 절망감 다잡기를 통해 자급자족을 위한 기반을 닦게 되고, 이민 중반에 접어들면 직업의 안정, 주거의 안정, 빚 갚기, 자녀 대학교육을 통해 안정된 정착을 이루고자 한다. 나아가 이민기간의 후반에는 은퇴자금 준비, 은퇴누리기를 통해 은퇴의 소망을 이루어간다. 이러한 재무적 과제는 이민시기에 따른 차이는 없었으나, 이민당시의 경제적 환경 혹은 이민자의 특성에 따라 재무적 과제의 스트레서(stressor)로서의 정도가 다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재무적 과제 가운데 취업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드러났다. 이민자의 취업에 있어서 인적자본이론과 이중노동시장이론이 모두 적용되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이민 초기에 단기적 수입뿐 아니라 개인의 발전가능성을 고려한 취업결정을 통해 직업 안정성을 추구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성공적인 이민생활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함을 시사하였다. 이 외에도 이민자들은 주택자산의 관리, 부채의 조정과 상환, 은퇴자금 준비에 있어서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나 재무역량에 있어서 취약집단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시사하였다. 본 연구는 한인이민가계의 재무적 과제와 재무복지 달성 과정을 탐구하여, 이민의 성공과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핵심적인 요인으로 여겨지는 이민자의 경제적 적응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적, 교육적 고려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에 본 연구의 결과는 해외한인이민자 적응을 위한 지원정책의 기초자료로서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financial challenges that the Korean American immigrants face and their coping experiences in order to achieve financial wellness. Specifically, this study intends to identify their major financial stressors and experiences of financial distress by them according to immigration period. For this purpose, a qualitative research method was employed in order to gather the unconfined experiences of the Korean American immigrants. Thirteen first-generation immigrants were recruited and interviewed in-depth. The data were analyzed in six steps by utilizing the analysis methods suggested by Colazzi. Three themes and ten subcategories were produced by the analysis. Participants were found to face financial challenges ‘to establish basis for self-sufficiency’, ‘to increase security by settlement’, and ‘to fulfill hope for retirement’. They struggled for establishing basis for self-sufficiency by employment, meeting the bills for livelihood, financial role adjustment between husband and wife, and overcoming frustration. Participants tried to increase financial security by secure jobs, secure housing, debt redemption, and college education of children. Furthermore, they tried to fulfill hope for retirement by preparing adequate finances for their retirement years and by enjoying retirement life through finding out rewarding things to do. Females were found to have more optimistic and flexible attitudes toward financial situations compared to males, but males tended to struggle with their inner conflict due to their underemployment and the fall of their socioeconomic status after immi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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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태청(樺太庁) 자료를 통해 본 일본제국의 사할린 한인 동원 실태 연구 KCI 등재

이연식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32호 2017.06 pp.151-188

...한인은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강제동원과 집단억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체험한 집단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1990년 한소수교와 영주귀국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문제는 아직도 전후보상 및 배상문제라든가 영주귀국으로 인한 2차 가족이산이라는 형태의 현재진행형 사안으로 남아있다. 그 동안 국내의 관심은 주로 일본과 구 소련의 책임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이 왜 해방 후 돌아오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학계 모두 이들이 어떻게 사할린으로 동원되었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원사료를 통해 검증하기보다는 일본이 강제로 동원했고, 소련이 귀국을 막았다는 선험적인 논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사할린주역사기록보존소(GIASO)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문서들을 화태청 공문서, 경찰관계문서, 기업관계문서로 나누어 915개 파일, 약 1만 매의 국내 수집자료를 통해 그 내용을 소개하고 한인의 동원 및 거류실태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 화태청의 동원 관련 정책, 경찰조직의 감시와 통제 방식, 개별 기업 및 작업장의 노동조건과 처우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 경찰관련 기록은 매우 상세하게 한인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국책에 따라 시기 별로 감시의 대상과 방법을 바꾸어 가며 한인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화태청의 한인 정책은 해당 지역의 독자성 보다는 일본 중앙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기업은 한인을 직접 관리하기보다는 각종 구미(組)라는 하청업자를 통해 간접 관리하고 있었고,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한인의 통제와 관련해 화태청-경찰-기업 간의 공조가 더욱 강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화태청의 정책, 경찰의 감시와 통제, 기업 및 단위 작업장의 노동환경과 처우를 층위별로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보다 면밀한 사료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서 일단 경향적으로 이들 3자간의 연계성이 포착된 만큼 향후 사료를 기반으로 한 대단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사할린 한인의 동원 및 거류실태를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상기 문헌기록을 조선총독부자료, 기 수집 구술자료, 1970년대 이래 일본에서 축적된 사할린재판자료와 교차 검증해 나간다면 사할린 한인문제에 관한 새로운 역사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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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은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강제동원과 집단억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체험한 집단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1990년 한소수교와 영주귀국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문제는 아직도 전후보상 및 배상문제라든가 영주귀국으로 인한 2차 가족이산이라는 형태의 현재진행형 사안으로 남아있다. 그 동안 국내의 관심은 주로 일본과 구 소련의 책임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이 왜 해방 후 돌아오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학계 모두 이들이 어떻게 사할린으로 동원되었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원사료를 통해 검증하기보다는 일본이 강제로 동원했고, 소련이 귀국을 막았다는 선험적인 논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본 연구는 사할린주역사기록보존소(GIASO)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문서들을 화태청 공문서, 경찰관계문서, 기업관계문서로 나누어 915개 파일, 약 1만 매의 국내 수집자료를 통해 그 내용을 소개하고 한인의 동원 및 거류실태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 화태청의 동원 관련 정책, 경찰조직의 감시와 통제 방식, 개별 기업 및 작업장의 노동조건과 처우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 경찰관련 기록은 매우 상세하게 한인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었고, 국책에 따라 시기 별로 감시의 대상과 방법을 바꾸어 가며 한인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화태청의 한인 정책은 해당 지역의 독자성 보다는 일본 중앙정부의 정책을 시행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기업은 한인을 직접 관리하기보다는 각종 구미(組)라는 하청업자를 통해 간접 관리하고 있었고,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한인의 통제와 관련해 화태청-경찰-기업 간의 공조가 더욱 강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화태청의 정책, 경찰의 감시와 통제, 기업 및 단위 작업장의 노동환경과 처우를 층위별로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보다 면밀한 사료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본 연구를 통해서 일단 경향적으로 이들 3자간의 연계성이 포착된 만큼 향후 사료를 기반으로 한 대단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사할린 한인의 동원 및 거류실태를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상기 문헌기록을 조선총독부자료, 기 수집 구술자료, 1970년대 이래 일본에서 축적된 사할린재판자료와 교차 검증해 나간다면 사할린 한인문제에 관한 새로운 역사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The Koreans in Sakhalin was the tragic victims of forced labor groups during the Japanese empire era, and those of detained by USSR after the second world war. Korean society came to have interest in these Koreans in Sakhalin just after 1990, the year of korea-russian treaty of amity and successive repatriation of the koreans who was born before August 15th of 1945. But this issue is still current one until now So far the main interest of korean society is the responsibility of Japan and USSR, and Why the Koreans in Sakhalin was not able to return to homeland, korea. On the other hand, it neglected the reason why the koreas came to be mobilized to Sakhalin and how they lives there. And it did not try to verify the process from mobilization to detention in abroad by historical documents or materials. That’s why this paper was made for, and tried to study the historical documents in Sakhalin Archives(GIASO), which is composed of 3 sections(Karahutocho official documents, police supervision documents, and civil companies documents), 915 files with over 10,000 images. In this study records which include korean mobilization and forced labor was abstracted and sorted from 1,260 images of documents, which are about Karahutocho’s policy for koreans, the way how the local police control the koreans, and labor conditions and reward in workplace. After the study it is verified that Karahutocho itself was the loyal agent of central government of japanese empire, local police took more drastic oppression steps about koreans, and civil companies kept the same steps with Karahutocho and local police, the cooperation among them got stronger for the more exploitation of koreans in the negative process of the war situation. Through this study it is identified we can restore the various historical facts by way of those documents produced in Sakhalin during the japanese era. If those historical documents should be linked oral history of the victims or lawsuit documents produced In japan in 1970s, we can find new images of Koreans in Sakhalin issues.

サハリン韓人は、植民支配と南北分斷、そして世界冷戦という時代的な悲劇を强制動員と集團抑留という極端的な形で体験した集団であった。彼らの存在が韓国社会において浮かび上がった切っ掛けは、1990年代の韓国とロシアとの國交樹立と永住帰国問題であった。この問題は、永住帰国で終わるわけなく、未だに戰後補償及び第2次の家族離散、被害者の遺族確認や墓参り等という現在進行形の課題として残されている。今まで、韓国に於ける主な関心は、なぜ彼らが帰還できなかったのか、それと関連して日本政府と旧ソ連の責任は何であったのか等に集中してきた。しかし、韓国の政府であろうが、学界であろうが、彼らが根本的にサハリンへ動員された歴史的な経緯やサハリンでの生活実態を資料を通じて綿密に検証せず、「日本が強制動員し、ソ連が無理やりに抑留した」という単線的な議論に留まる傾向が強かった。そこで、この論文は、2014年に韓国政府傘下の委員会が、ハリン州公文書館(GIASO)から蒐集した915個のファイル、凡そ1万枚の資料を検討し、この資料を1)樺太庁の行政文書, 2) 警察文書、3)企業関係文書に分け、その内容を韓国学界に紹介し、「樺太庁の政策」、 「警察組織の監視と統制」、「企業や個別作業場での労働条件や処遇」等を総合的に考察するために提案したい内容をを整理した。資料を検討した結果、警察は極めて詳細な所まで動員した韓人の身元を把握・管理しており、国策に沿って時期別に監視の対象と方法を変えながら管理体制を強化しつつあった。また、樺太庁の韓人管理政策は地域的な独自性よりは、中央政府の代理機関の性格が強かった。そして、企業資料によると、大企業は、各レベルの組を通して韓人を管理しており、戦況が悪化すると、「樺太庁-警察-企業」の間の協力監視体制も強くなりつつあったの事が確認できた。ただし、この論文は、これから樺太資料を利用し実態研究を韓国の研究者たちが遂行するためには、まず押さえなければならない樺太資料群の内容と特徴、具体的な活用方法論などを呈示することにより、樺太庁の政策、警察の監視と統制、個別作業場の具体的な労働環境と処遇の相互連携性に注目した上で、動員実態を段階別・層位別に立体的かつトータルに究明できる共同研究の必要性と政府や研究機関の新たな資料蒐集事業の方向をアーピルすることに焦点を合わせた。韓国では、今まであんまり活用していなかった樺太資料を利用した大きな共同研究が活性化すると、サハリン韓人の動員及び居留実態の復元がより正確で豊富になされると期待される。それと共に、この樺太資料を既存の朝鮮総督府資料、1990年代から集積された口述資料、そして1970年代から体系的に整理された樺太裁判資料と連携分析すると、サハリン韓人問題の歴史的な性格もより鮮明に究明できると思わ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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