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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상실기 재미한인과 항일공론장 변동 - 『신한민보』와 『태평양잡지』를 중심으로 - KCI 등재후보

김홍길, 강미희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7호 2022.06 pp.105-142

...한인사회 내 항일공론장의 변동을 살펴보았다. 재 미한인은 해외항일의 거점을 형성했고, 미국사회의 영향 속에서 모국의 독립과 자유에 기여했다. 이 연구는 한인공동체 생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친 신문과 잡 지인 『신한민보』와 『태평양잡지』를 집중 분석했다. 한인단체는 기관지로서 신문 과 잡지를 발행했다. 『공립신보』, 『신한민보』와 『태평양잡지』 등이 항일운동을 표면에 내세운 것도 이런 맥락과 관련된다. 이들 신문과 잡지는 주요기사에 모 국소식을 싣고 모국지향성을 표방한다. 그것은 단체의 정통성 형성 뿐만아니라 잡지 논조에 대한지지 및 구독자 확보와 결부된 것이다. 이들은 미국에서 식민 지 조선의 각종 소식을 알리고, 한인사회 동정을 알리는 역할을 통해 항일 메시 지 생성-확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단체간 이해관계나 갈등으로 위기 를 겪거나 때론 민족담론에서 후퇴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1945년 이전 까지 한인커뮤니티에서 ‘항일담론’은 핵심 요소로 작동했으며, 많은 한인단체의 흥망성쇠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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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국권상실기 재미한인사회 내 항일공론장의 변동을 살펴보았다. 재 미한인은 해외항일의 거점을 형성했고, 미국사회의 영향 속에서 모국의 독립과 자유에 기여했다. 이 연구는 한인공동체 생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친 신문과 잡 지인 『신한민보』와 『태평양잡지』를 집중 분석했다. 한인단체는 기관지로서 신문 과 잡지를 발행했다. 『공립신보』, 『신한민보』와 『태평양잡지』 등이 항일운동을 표면에 내세운 것도 이런 맥락과 관련된다. 이들 신문과 잡지는 주요기사에 모 국소식을 싣고 모국지향성을 표방한다. 그것은 단체의 정통성 형성 뿐만아니라 잡지 논조에 대한지지 및 구독자 확보와 결부된 것이다. 이들은 미국에서 식민 지 조선의 각종 소식을 알리고, 한인사회 동정을 알리는 역할을 통해 항일 메시 지 생성-확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단체간 이해관계나 갈등으로 위기 를 겪거나 때론 민족담론에서 후퇴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1945년 이전 까지 한인커뮤니티에서 ‘항일담론’은 핵심 요소로 작동했으며, 많은 한인단체의 흥망성쇠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dealt with the process of change in the anti-Japanese media, during the loss of national sovereignty, 1910-1945. The Korean Americans contributed to the independence and freedom of their motherland by forming a base for overseas resistance. This study intensively analyzed "Shinhan Minbo" and "Pacific Magazine" that influenced the creation and change of the Korean community. The Korean-American organization published ethnic newspapers and magazines as an organization. It is also related to this context that the anti-Japanese movement was put on the surface from the beginning by Public Shinbo, Shinhan Minbo, and Pacific Magazine. Most of them showed strong native orientation. The main news was news related to the motherland and the life sympathy of Koreans in Korea. This is linked not only to the formation of the legitimacy of the organization but also to the continuous securing of subscribers. They played a role in generating and spreading anti-Japanese messages by announcing the domestic news of Korea, which has become a colony in American society, and informing the sympathy of the Korean community. However, some of them suffered crises due to interests and conflicts between organizations, and sometimes retreated from national discourse. In conclusion, it can be seen that until 1945, the "anti-Japanese discourse" in the Korean community worked as a key factor and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cohesion of the Korean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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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인의 자기역사(自分史)에 관한 기록 특징과 의미 - ‘사랑방의 어머니들’ 사례를 중심으로 - KCI 등재

박신규, 이토히로코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비교일본학 제54집 2022.06 pp.53-76

...한인의 자기역사의 기록 특징과 그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자 기역사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일을 기록하지만 전체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접점 을 이룰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재일한인의 자기역사 기록에 대한 분석은 재일한인 의 역사를 재구성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자기역사의 기록물로 재일한인 1세 49명의 사례가 들어간 ‘사랑방의 어머니들’을 선정하여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자기역사 기록의 의미는 재일한인 1세가 개인의 역사를 기억의 공동체에 보관하 여 본인의 경험을 차세대로 전달하고 계승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사랑방의 어머니들’이라는 사례를 통해 나타난 자기역사의 기록 특징은 교육으로부터 배제와 끊이지 않는 노동기록, 전쟁 경험과 사회적 사건의 체험에 관한 기록, 야간중 학교 생활에 관한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자기역사의 기록 특징은 역사에 대해서 주관 적이지만 나를 드러내어 자기역사를 쓰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자기역사의 의미에 부합하였고 특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고 싶은 목적을 지닌 자기역사는 전쟁체험, 고생한 기억, 사회적 성공 경험, 가족 및 고향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특징과도 일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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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재일한인의 자기역사의 기록 특징과 그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자 기역사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일을 기록하지만 전체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접점 을 이룰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재일한인의 자기역사 기록에 대한 분석은 재일한인 의 역사를 재구성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자기역사의 기록물로 재일한인 1세 49명의 사례가 들어간 ‘사랑방의 어머니들’을 선정하여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자기역사 기록의 의미는 재일한인 1세가 개인의 역사를 기억의 공동체에 보관하 여 본인의 경험을 차세대로 전달하고 계승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 할 수 있다. ‘사랑방의 어머니들’이라는 사례를 통해 나타난 자기역사의 기록 특징은 교육으로부터 배제와 끊이지 않는 노동기록, 전쟁 경험과 사회적 사건의 체험에 관한 기록, 야간중 학교 생활에 관한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자기역사의 기록 특징은 역사에 대해서 주관 적이지만 나를 드러내어 자기역사를 쓰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자기역사의 의미에 부합하였고 특히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지고 싶은 목적을 지닌 자기역사는 전쟁체험, 고생한 기억, 사회적 성공 경험, 가족 및 고향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특징과도 일치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cords of the personal history of KoreanJapanese and their meaning. Personal history records center on one's own experiences, and they are the contact points where the entire history and the individual's history meet. In this study, the collection of Mothers of Sarangbang were selected and analyzed as records of personal histories. This collection contains 49 cases of firstgeneration Korean Japanese. The result shows that the personal historical records of KoreanJapanese have played a role in keeping individual histories in the community of memory and passing on their experiences to the next generation. In addition, the characteristics of personal history recorded through the case of 'Mothers in Sarangbang' are as follows: records of exclusion from education and continuous labor, records of war experiences and social events, and records of night middle school life. Although this characteristic of personal history writing is subjective, it coincides with the meaning of selfhistory, which reveals and places meaning in writing one's history. Personal history with the purpose of being recorded in history is consistent with the characteristics of recording war experiences, hard memories, social success experiences, and the history of family and home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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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기반 메타버스와 재외한인과의 상호교류방안 - 메타버스기반 민족동질성회복방안 - KCI 등재후보

유희수, 김순옥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7호 2022.06 pp.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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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향신료가 가져온 문명의 혁신처럼, 20세기부터 전 세계를 장악한 커피 문화처럼, 메타버스(Metaverse)도 세상을 뒤흔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되고 있습니다. MZ세대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10년대 초반에 태어난 10대 후반 부터 20대 초반까지 주로 사용됩니다. 메타버스 공간의 개념을 바꾸어 비대면 접촉과 대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플랫폼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비대면 접촉의 개념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시대에 좋아하는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메타버 스’를 새로운 공간으로, 비대면 접촉의 개념으로 변화할 것이며, 나아가 메타폴 리스와 같은 메타버스 기반의 한류 문화교류 플랫폼 구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다. 해외 이민의 확대와 함께 민족성과 모국어를 지키려는 우리 동포들의 노력 은 끊이지 않았고, 한국어 해외방송이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에 더하여 시대에 맞추어 역동적인 현실적 체험감을 갖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보다 적극적으로 각 분야에 도입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민자 1세대와 MZ 사이의 한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상세계에서 거래되는 가 상문화교류와 관련된 메타버스 플랫폼과 메타버스 한류 문화교류 플랫폼에서 활동 중인 아바타에 대한 논의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구축 및 운영전략을 수립해보았다.

Like the innovation of civilization brought about by spices in the Middle Ages, like the coffee culture that has occupied the world since the 20th century, Metaverse is also becoming a new wave of change that will shake the world. Generation MZ is widely used mainly by the late teens to early 20s, born in the mid-1990s to early 2010s. By changing the concept of Metaverse space, it will be recognized as a new platform centering on non-face-to-face contact and dialogue. The concept of non-face-to-face contact will also change in the concept of non-face-to-face contact with ‘Metaverse’, which is emerging as a favorite child in the digital transformation era, as a new space, and furthermore, it is time to explore the establishment of a Metaverse-based Korean Wave cultural exchange platform such as Metapolis. In order to restore the homogeneity of the Korean people between the first generation of immigrants and the MZ, the discussion of avatars active on the Metaverse platform and the Metaverse Korean Wave cultural exchange platform related to virtual cultural exchanges traded in the virtual world was examined from a poetic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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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주 한인 정원명의 민족적 활동과 면모(1904~1942) KCI 등재

조규태

숭실대학교 역사문물연구소(구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48집 2022.06 pp.71-92

...한인 정원명에 대한 글이다. 첫째 그의 신분과 계층 및 하와이 이주 배경을 검토하였다. 둘째 그의 미주한인단체의 통합 노력과 무장투쟁적 독립 운동을 고찰하였다. 셋째 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를 이승만 집권기와 이승만 실각기 를 대조하여 살펴보았다. 전보사의 관리로 하와이에 파견된 정원명은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한인합성협회 등을 조직하 고, 한인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를 합하여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대한인국민 회 하와이지방총회의 회장으로 왕실세력과 함께 대동공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군인의 양성을 통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노선의 일환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확장하 려 하였다. 그렇지만 1915년 실력양성노선을 추구한 이승만이 하와이지방총회를 장악함으로써 그 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그는 이승만이 물러난 1925년 이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활동하던 백암 박은식이 대한민국 의 임시대통령으로 부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그는 1925년 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고 상해에 대표원을 파견하고 『단산시보』를 발간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 였다. 그리고 중국 관내에서 대독립당이 조직되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 회’를 조직하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다. 앞으로 정원명의 독립운동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족보 등을 통해 그의 인적사항 과 학맥과 종교, 국내에서의 정치사회적 관계와 활동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그 와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특징과 이들과의 관계도 더 깊이 탐구해야 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그 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의 행적, 그리고 사망의 경위도 추적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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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20세기 전반 하와이에서 활동한 이주 한인 정원명에 대한 글이다. 첫째 그의 신분과 계층 및 하와이 이주 배경을 검토하였다. 둘째 그의 미주한인단체의 통합 노력과 무장투쟁적 독립 운동을 고찰하였다. 셋째 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를 이승만 집권기와 이승만 실각기 를 대조하여 살펴보았다. 전보사의 관리로 하와이에 파견된 정원명은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한인합성협회 등을 조직하 고, 한인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를 합하여 대한국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대한인국민 회 하와이지방총회의 회장으로 왕실세력과 함께 대동공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군인의 양성을 통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노선의 일환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확장하 려 하였다. 그렇지만 1915년 실력양성노선을 추구한 이승만이 하와이지방총회를 장악함으로써 그 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그는 이승만이 물러난 1925년 이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활동하던 백암 박은식이 대한민국 의 임시대통령으로 부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 그는 1925년 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고 상해에 대표원을 파견하고 『단산시보』를 발간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하 였다. 그리고 중국 관내에서 대독립당이 조직되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 회’를 조직하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다. 앞으로 정원명의 독립운동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족보 등을 통해 그의 인적사항 과 학맥과 종교, 국내에서의 정치사회적 관계와 활동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그 와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특징과 이들과의 관계도 더 깊이 탐구해야 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그 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의 행적, 그리고 사망의 경위도 추적해야 하겠다.

This paper is about a Korean immigrant named Chung Won-myeong who was active in Hawaii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First, his status, class, and background of migration to Hawaii were reviewed. Second, his efforts to integrate Korean-American organizations and the armed struggle independence movement were considered. Third, his attitude towar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xamined by comparing the period of Rhee Syng-man's reign with Rhee Syng-man's fall. Jeong Won-myeong, who was dispatched to Hawaii as an official of the telegraph company, organized ‘Ewa Social Association(에와친목회)’ and ‘Korean Synthetic Association(한인합성협회)’, and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by combining the Korean Synthesis Association and the San Francisco Public Association. As the chairman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s Hawaii Regional General Assembly, he organized the Daedonggongjindan(대동공진단) with the royal forces and tried to develop an armed struggle through training soldiers. And as part of the route, he tried to establish and expand the Daejoseon National Army(대조선국민군단). However, in 1915, Rhee Syng-man, who pursued a skill-building route, took control of the Hawaii Regional General Assembly, and Chung Won-myeong failed to achieve his will. He was passive in support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during Rhee Syng-man's presidency, and actively sponsor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fter 1925 when Rhee stepped down. He sponsor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fter Baekam Park Eun-sik, who was active in Beijing, was appointed interim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February 1925, he organized the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Sponsorship Association, dispatched representatives to Shanghai, and published the Dansan Times(『단산시보』) to promote national consciousness. In addition, in line with the formation of the Grand Independence Party in China, he organized the Korean National Unification Promotion Association(대한민족통일촉성회) in 1928 and worked for the unification of Koreans in Hawaii. In order to clarify the nature of Jung Won-myeong's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future, it is necessary to investigate his personal information, academic background, religion, and political and social relations and activities in Korea through genealogy. And the characteristics and relationships of those who worked with him in Hawaii should be explored in more depth. Also we should trace his movements in the late 1930s and 1940s, and ho w he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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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 한인의 자기서사와 반핵(反核)인권의 사상 KCI 등재

신승모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학 제56집 2022.04 pp.75-102

...한인 피폭자들의 자기서사에 관한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 어지지 않았던 원폭2세의 사례와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한인의 사례를 중심으로 논의하면서 이 분야에 관한 기존 연구를 보완하고 연구의 외연을 한층 확장하고 자 했다. 우선 한일 양국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한인 피폭자의 자기서사 단행본의 서지사항과 내역을 종합적으로 정리, 확인하였고, 이어서 케이스 스터디로서 원폭 2세 김형률의 반핵인권활동과 사상,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한인들의 전후 생활과 미래에 대한 지향성을 검토하면서 이들의 사유가 지니는 현재적 의미와 의의를 부각시켰다. 이 검토를 통해 이들 피폭 한인이 전후 한일 사회에서 이중 삼중의 극한적 고통과 고뇌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어떻게든 인간으로서 일상생 활을 영위해나가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읽어냈다. 본고에서 살펴본 김형률의 반핵인권사상을 비롯하여 피폭 한인이 남긴 고뇌와 치유의 사상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반전과 반핵,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갈 구하는 역사적 증언이자 인류의 귀중한 육성이며, 정치군사적 갈등과 배외주의가 첨예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 제시할 수 있는 인문학적 교훈으로서 기 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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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0원

본고는 지금까지 한인 피폭자들의 자기서사에 관한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 어지지 않았던 원폭2세의 사례와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한인의 사례를 중심으로 논의하면서 이 분야에 관한 기존 연구를 보완하고 연구의 외연을 한층 확장하고 자 했다. 우선 한일 양국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한인 피폭자의 자기서사 단행본의 서지사항과 내역을 종합적으로 정리, 확인하였고, 이어서 케이스 스터디로서 원폭 2세 김형률의 반핵인권활동과 사상,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한인들의 전후 생활과 미래에 대한 지향성을 검토하면서 이들의 사유가 지니는 현재적 의미와 의의를 부각시켰다. 이 검토를 통해 이들 피폭 한인이 전후 한일 사회에서 이중 삼중의 극한적 고통과 고뇌 속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어떻게든 인간으로서 일상생 활을 영위해나가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읽어냈다. 본고에서 살펴본 김형률의 반핵인권사상을 비롯하여 피폭 한인이 남긴 고뇌와 치유의 사상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반전과 반핵,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갈 구하는 역사적 증언이자 인류의 귀중한 육성이며, 정치군사적 갈등과 배외주의가 첨예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 제시할 수 있는 인문학적 교훈으로서 기 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This paper aims to supplement existing research in this field and further expand the scope of research, focusing on the case of the second-generation atomic bomb and the case of the Korean people who were exposed in Nagasaki. First of all, Korea and Japan comprehensively summarized and confirmed the contents and details of the Korean victims' self narrative books published so far, and then, as a case study, reviewed the anti-nuclear human rights activities and ideas of the second-generation atomic bomb Kim Hyung-ryul. Through this review, we read the efforts of these exposed Koreans to ultimately lead their daily lives as humans in the midst of extreme pain and suffering in Korean and Japanese society after the war, and to find and practice the meaning of life. Kim Hyung-ryul's anti-nuclear human rights ideology, as well as the anti-nuclear and healing ideology left by the exposed Koreans, is a historical testimony for reversal, anti-nuclear, and true peace, and can serve as humanities les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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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출신 1.5세 한인의 이주 경험과 초국가적 주체성 : 스페인어 문화자본 형성과 활용 전략을 중심으로 KCI 등재

박정하

한국구술사학회 구술사연구 제13권 1호 2022.03 pp.81-124

...한인들의 이주 경험, 특히, 한국으로의 재 이주 현상을 초국가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이 자신 이 소유한 문화적 자원을 사회적 지위 상승을 위한 도구로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초국 가적 주체라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은 남미 거주 경험을 통해 획득한 스페인어 라는 문화자본을 한국 사회에서 활용하였고, 그것의 이용 가능성 및 효과성이 가장 높은 분야인 외국어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사회적장을 이동하는 초국가적 주체성 실천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남미 출신 한인 3명을 대상으로 구술사 연구를 진행하 였다. 먼저 이들이 남미와 한국이라는 사회적 장을 이동하며 초국가적 주체로서 어떠 한 전략을 구상하여 실행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이들이 남미에서 거주한 경험으로 체화된 스페인어라는 문화자본의 활용 양상과 한국의 언어 제국주의적 경향으로 인한 제약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고찰한다. 이를 통해 남미 출신 한인들의 초국가적 이주 양상과 초국가적 주체로서의 행위성, 그리고 한국에 존재하는 외국어 생태계 내 식민주의적 시선에 대한 비판적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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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0원

본 연구는 스페인어권 남미 출신 1.5세 한인들의 이주 경험, 특히, 한국으로의 재 이주 현상을 초국가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이 자신 이 소유한 문화적 자원을 사회적 지위 상승을 위한 도구로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초국 가적 주체라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은 남미 거주 경험을 통해 획득한 스페인어 라는 문화자본을 한국 사회에서 활용하였고, 그것의 이용 가능성 및 효과성이 가장 높은 분야인 외국어 교육에 종사하고 있다. 사회적장을 이동하는 초국가적 주체성 실천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남미 출신 한인 3명을 대상으로 구술사 연구를 진행하 였다. 먼저 이들이 남미와 한국이라는 사회적 장을 이동하며 초국가적 주체로서 어떠 한 전략을 구상하여 실행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이들이 남미에서 거주한 경험으로 체화된 스페인어라는 문화자본의 활용 양상과 한국의 언어 제국주의적 경향으로 인한 제약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고찰한다. 이를 통해 남미 출신 한인들의 초국가적 이주 양상과 초국가적 주체로서의 행위성, 그리고 한국에 존재하는 외국어 생태계 내 식민주의적 시선에 대한 비판적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migration experience of 1.5 generation Koreans from Spanish-speaking South America with a particular emphasis on the re-migration to Korea in a transnational perspective. The re-migration is not regarded as a singular or one-way movement, but as part of routines and daily rhythms of life across the world. The paper also focuses on transnational subjects that strategically use their social and cultural capital as a tool to raise their social status. As a strategy for that, they utilize the linguistic capital of Spanish, which they acquired through their experience of living in South America. They knew that it was the highly prized and effective cultural capital which they possessed in a foreign language education market of Korea. A literature review and in-depth interviews with three Koreans from South America were carried out as research methods. The paper first describes how they act as transnational subjects who crossed over the social fields with social networks, including social media, friends and family ties. It also explains what strategies they consider and utilize to maximize their profits while they move across the two social fields of South America and Korea. In addition, it analyzes how they use the cultural capital of Spanish constructed as embodied capital from their experiences in South America and how they overcome the limitations caused by linguistic imperialism in Korea. The paper is meaningful in that it discusses implications for the transnational migration patterns of Koreans from South America. Also, it argues that they are transnational subjects who willingly cross the borders and design, adjust, and deliver effective strategies to increase their social status, especially in colonial nature of the foreign language system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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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중남미 한인사회 : 멕시코와 브라질의 경험 KCI 등재후보

임수진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6호 2022.02 pp.105-135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다. 멕시코 에서는 영주권자 인구 감소가 크지 않았으나 브라질의 경우 2만 명 가까운 한인이 다른 국 가로 이주하였다. 과거 경제위기에도 이렇게 큰 폭의 감소는 없었으나 주로 의류업에 종사 하는 브라질 한인들이 의류업 불황과 코로나19로 인한 장기 봉쇄로 사업 포기 후 다른 국가 로 재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인들간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생계 곤란을 겪는 한인들도 늘어났다. 이에 한인회를 비롯한 여러 한인단체들이 한인들을 돕기 위해 기부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백신접종에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등 한인들의 연대가 큰 힘을 발 휘하였다. 코로나19 위기는 한인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기도 했지만, 한인회 활동 에 소극적이었던 청년층과 청소년들의 참여가 늘었고, 위기 극복 과정에서 형성된 연대와 협력은 한인사회의 재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정부의 방역물품 전달과 지역사회 기부, 이민 60주년 계기 공공외교에 현지 공관과 적극 협력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외교 자산인 디 아스포라가 공공외교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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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코로나19가 멕시코와 브라질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이다. 멕시코 에서는 영주권자 인구 감소가 크지 않았으나 브라질의 경우 2만 명 가까운 한인이 다른 국 가로 이주하였다. 과거 경제위기에도 이렇게 큰 폭의 감소는 없었으나 주로 의류업에 종사 하는 브라질 한인들이 의류업 불황과 코로나19로 인한 장기 봉쇄로 사업 포기 후 다른 국가 로 재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인들간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생계 곤란을 겪는 한인들도 늘어났다. 이에 한인회를 비롯한 여러 한인단체들이 한인들을 돕기 위해 기부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백신접종에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등 한인들의 연대가 큰 힘을 발 휘하였다. 코로나19 위기는 한인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기도 했지만, 한인회 활동 에 소극적이었던 청년층과 청소년들의 참여가 늘었고, 위기 극복 과정에서 형성된 연대와 협력은 한인사회의 재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정부의 방역물품 전달과 지역사회 기부, 이민 60주년 계기 공공외교에 현지 공관과 적극 협력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외교 자산인 디 아스포라가 공공외교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impact of COVID-19 on Korean communities in Mexico and Brazil. In Mexico, the population of permanent residents did not decrease significantly, but in Brazil, close to 20,000 Koreans migrated to other countries. It seems that Koreans in Brazil who are mainly engaged in the clothing industry have relocated to other countries after giving up their business due to the long-term lockdown and the recession in the clothing industry. Also, inequality among Koreans has deepened. Accordingly, the Korean Association and other Korean organizations actively donated to help Koreans. The participation of young generation who were passive in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Association increased, and the solidarity and cooperation formed in the process of overcoming the crisis became an opportunity for the Korean community to take another leap forward. In particular, they actively cooperated with the Korean embassy in the delivery of quarantine supplies by the government, donations to local communities, and diaspora public diplomacy on the occasion of the 60th anniversary of immigration. This is an example of how diaspora, our diplomatic asset, can become a main actor of public diplom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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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중국의 한인정책과 만주 한인문제를 둘러싼 한중일의 이해관계 KCI 등재

박정현

한중인문학회 한중인문학연구 제73집 2021.12 pp.319-346

...한인문제는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 민족 감정, 중일의 외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1920년대 중국의 주권 수호와 일본의 만주 침략 의지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이 문제는 어느 일방이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만주사 변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이에서 만주 한인은 무국적자로서 중국과 일본의 이용과 견제 대상이 되었다. 만주에서 한인은 중국정부로부터 축출 위협과 탄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 주 침략에 한인을 이용하려는 일본으로부터도 압박을 받았다. 만주 한인에 대한 차별은 조선 에서 화교배척으로 나타나 만주 한인문제와 조선 화교문제가 상호 연계되어 한중일의 국제문 제가 되었다. 20세기 이후 만주에 이주한 한인과 조선에 이주한 화교 문제는 조선·일본·중국 모두 관 심의 대상이었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들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인식했고, 그 대응 도 각기 달랐다. 만주 한인과 조선 화교 문제는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문제의 소재도 달 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에서 상대방 이주민에 대한 대우와 정책을 결정하는 기준 이 되었다. 만주에서 한인이 중국인에게 차별을 받거나 중국정부가 탄압하면,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조선인들은 조선의 화교에게 만주 한인이 당했던 차별과 비슷한 대응 을 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도 만주에 이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만주 한인을 단속하고,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화교에 대한 정책을 만주 한인에 대한 중국의 정책과 연관시켰다. 따라서 만주 한인 문제와 조선 화교 문제는 서로 상호 관련 속에서 인식되었고, 이들에 대한 대우나 대응방식도 상호 관련이 있다. 이 두 문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 으로 일어났지만,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 만주 한인 의 지위문제가 해결되자, 조선에서 화교 배척사건도 현저히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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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한인문제는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 민족 감정, 중일의 외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1920년대 중국의 주권 수호와 일본의 만주 침략 의지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이 문제는 어느 일방이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만주사 변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사이에서 만주 한인은 무국적자로서 중국과 일본의 이용과 견제 대상이 되었다. 만주에서 한인은 중국정부로부터 축출 위협과 탄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 주 침략에 한인을 이용하려는 일본으로부터도 압박을 받았다. 만주 한인에 대한 차별은 조선 에서 화교배척으로 나타나 만주 한인문제와 조선 화교문제가 상호 연계되어 한중일의 국제문 제가 되었다. 20세기 이후 만주에 이주한 한인과 조선에 이주한 화교 문제는 조선·일본·중국 모두 관 심의 대상이었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들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인식했고, 그 대응 도 각기 달랐다. 만주 한인과 조선 화교 문제는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문제의 소재도 달 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에서 상대방 이주민에 대한 대우와 정책을 결정하는 기준 이 되었다. 만주에서 한인이 중국인에게 차별을 받거나 중국정부가 탄압하면,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할 방법이 없었던 조선인들은 조선의 화교에게 만주 한인이 당했던 차별과 비슷한 대응 을 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도 만주에 이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만주 한인을 단속하고,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화교에 대한 정책을 만주 한인에 대한 중국의 정책과 연관시켰다. 따라서 만주 한인 문제와 조선 화교 문제는 서로 상호 관련 속에서 인식되었고, 이들에 대한 대우나 대응방식도 상호 관련이 있다. 이 두 문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립적 으로 일어났지만,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 만주 한인 의 지위문제가 해결되자, 조선에서 화교 배척사건도 현저히 감소했다.

The Manchurian overseas Koreans in issue was intricately intertwined with survival issues, economic interests, ethnic sentiment, and diplomatic issues between China and Japan. In the 1920s, China's protection of sovereignty and Japan's will to invade Manchuria conflicted with each other. This problem was not something that one could concede. These conflicts and conflicts continued until before the Manchurian Incident. During this period, the Manchurian overseas Koreans became stateless and were subject to use and restraint in both China and Japan. In Manchuria overseas Koreans faced various discrimination and expulsion threats from the Chinese government. On the other hand, there was pressure from Japan trying to use overseas Koreans to invade Manchuria. Discrimination against the Manchurian overseas Koreans appeared as the Korean overseas Chinese excretion. The Manchurian overseas Koreans and the Korean overseas Chinese issues were linked to each other and became an international issue between Chosun, China and Japan. After the 20th century, the issue of overseas Koreans who emigrated to Manchuria and overseas Chinese who emigrated to Chosun was of interest to all of Chosun, Japan, and China. Depending on the interests of each country, these issues were recognized differently from each other, and their responses were also different. The problems of Manchurian overseas Koreans and the Korean overseas Chinese showed different aspects, and the materials of the problems were also different. However, This issue became the standard for determining the treatment and policy of other migrants in China and Chosun. In Manchuria, when overseas Koreans were discriminated against or disadvantaged by Chinese, Koreans retaliated against overseas Chinese in a similar manner. Th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tried to use them in the process of expanding their interests in Manchuria with the favorable impression of overseas Koreans in Manchuria. They implemented the policy for Korean overseas Chinese in conjunction with the Chinese policy for Manchurian overseas Koreans. The Manchurian overseas Korean issue and the Korean overseas Chinese issue were recognized in an interrelated manner. In addition, the treatment and response methods for these are also interrelated. These two problems occurred independently in different regions, but were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After the establishment of Manchukuo in 1932, when the status problem of Manchurian overseas Koreans was resolved, the number of overseas Chinese exclusion cases in Chosun decreased significan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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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재외한인학회 정관 외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5호 2021.10 pp.16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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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홋카이도의 민중사발굴운동과 한인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운동 KCI 등재

김광열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학 제54집 2021.08 pp.105-138

...한인 강제동원희생자유골 발굴운동, 그리고 2000년대 초의 초국적 시민운동 등을 검토하여 그들의 상호 관계성을 밝히고 그 주체들이 추구한 바와 그 운동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전개된 민중사연구는 일본사회의 저변에 있던 일반 민중의 이념이나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에 성과가 있었으나, 메이지기의 중앙집권화의 과정에서 동화를 강요당한 소수민족이라든지, 제국주의 영토확장의 결과로서 이주 및 동원으로 일본열도에 존재했던 식민지 조선이나 중국 출신자들은 고려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즉 당시 일본사학계에서 주목한 ‘민중’에는 다수자 위주의 ‘국민’을 기준으로 한 내셔널리티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1970년대부터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사발굴운동은 다른 모습이 확인된다. 오호츠크민중사강좌의 운동은 메이지시대 홋카이도의 개척 과정에서 희생된 민중의 존재를 발굴하는 작업 이외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홋카이도의 군수사업체에 동원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의 피해에도 주목하였다. 그 계기로서 당시 홋카이도에서 실시되었던 ‘조선인 강제노동강제연행 진상조사’와의 만남이 있기는 했으나, 오호츠크민중사강좌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민중사발굴’ 범위에 전쟁동원으로 희생된 조선인과 중국인도 포함시켰다. 그러한 민족을 초월한 민중사운동의 진보적 변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단체가 1976년에 설립된 소라치민중사강좌였다. 이 단체는 1980년부터 벽지인 슈마리나이에서 조선인 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이라는 육체노동을 동반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이 1990년대에는 한국 및 재일코리안 청년들과 함께 하는 국경을 초월한 ‘한일 공동워크숍’ 및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켰다. 즉 소라치민중사강좌를 중심으로 전개된 강제노동희생자 유해발굴운동은 1970년대 홋카이도 민중사발굴운동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실천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운동은 2003년 2월에 설립된 초국적 초이념의 새로운 시민단체 ‘강제노동강제동원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으로 귀결되었다. 홋카이도포럼의 활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동 지역의 진보적 시민들이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한 민중사발굴운동과 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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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후 일본 역사학계의 민중사연구 동향, 1970년대부터 홋카이도에서 전개된 민중사발굴운동과 한인 강제동원희생자유골 발굴운동, 그리고 2000년대 초의 초국적 시민운동 등을 검토하여 그들의 상호 관계성을 밝히고 그 주체들이 추구한 바와 그 운동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전개된 민중사연구는 일본사회의 저변에 있던 일반 민중의 이념이나 역할을 부각시키는 데에 성과가 있었으나, 메이지기의 중앙집권화의 과정에서 동화를 강요당한 소수민족이라든지, 제국주의 영토확장의 결과로서 이주 및 동원으로 일본열도에 존재했던 식민지 조선이나 중국 출신자들은 고려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즉 당시 일본사학계에서 주목한 ‘민중’에는 다수자 위주의 ‘국민’을 기준으로 한 내셔널리티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1970년대부터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민중사발굴운동은 다른 모습이 확인된다. 오호츠크민중사강좌의 운동은 메이지시대 홋카이도의 개척 과정에서 희생된 민중의 존재를 발굴하는 작업 이외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홋카이도의 군수사업체에 동원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의 피해에도 주목하였다. 그 계기로서 당시 홋카이도에서 실시되었던 ‘조선인 강제노동강제연행 진상조사’와의 만남이 있기는 했으나, 오호츠크민중사강좌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민중사발굴’ 범위에 전쟁동원으로 희생된 조선인과 중국인도 포함시켰다. 그러한 민족을 초월한 민중사운동의 진보적 변화에 강한 영향을 받은 단체가 1976년에 설립된 소라치민중사강좌였다. 이 단체는 1980년부터 벽지인 슈마리나이에서 조선인 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이라는 육체노동을 동반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이 1990년대에는 한국 및 재일코리안 청년들과 함께 하는 국경을 초월한 ‘한일 공동워크숍’ 및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켰다. 즉 소라치민중사강좌를 중심으로 전개된 강제노동희생자 유해발굴운동은 1970년대 홋카이도 민중사발굴운동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실천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운동은 2003년 2월에 설립된 초국적 초이념의 새로운 시민단체 ‘강제노동강제동원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으로 귀결되었다. 홋카이도포럼의 활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동 지역의 진보적 시민들이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한 민중사발굴운동과 강제동원희생자 유골발굴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trends in the study of people’s history in post-war Japan, and the excavation of the remains of forced labor victims in Hokkaido,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transnational civic movement in the early 2000s to reveal their interrelationships, what their subjects pursued, and what the significance of the movement. The study of people’s history in Japan since the 1960s has been successful in highlighting the ideology or role of the general population at the base of Japanese society, but did not include ethnic minorities forced to assimilate during Meiji's centralization or colonial Joseon or Chinese. In other words, there was a nationality based on the majority-oriented “people” in the “people” that the Japanese historical community of Japanese history at the time. On the other hand, the Excavation Movement of people’s history, which began in Hokkaido in the 1970s, was different. In addition to discovering the victims of the Meiji invasion of Hokkaido, the Okotsuk People's Lecture also noted the damage of Koreans and Chinese mobilized by Hokkaido's company investigators during the Asia-Pacific War from the late 1970s. As an opportunity, there was a meeting with the “Korea Compulsory Labor Force Investigation” conducted in Hokkaido at the time, but the fact that members of the Okhotsk People's Lecture voluntarily included Koreans and Chinese victims of war in the scope of “People's Discovery” was a level of national awareness. A group strongly influenced by the progressive changes in the popular history movement was Sorachi People's Lecture established in 1976. In order to practice the people’s history excavation movement, the organization launched a movement in Shumarinai, in 1980 accompanied by physical labor called the excavation of the remains of Korean forced laborers. In the 1990s, it developed a new form of “Korea-Japan Joint Workshop” and “East Asia Joint Workshop.” In other words, the excavation movement of the remains of forced labor victims centered on Sorachi people’s history Lecture opened a new horizon by actively inheriting and practicing the values of the Hokkaido people’s history excavation movement in the 1970s. Their movement resulted in a new transnational hyper-ideal civic group, the Hokkaido Forum, which was established in February 2003 to consider victims of forced labor. The activities of the Hokkaido Forum can be said to be the result of the experience accumulated through the people’s history excavation movement and forced mobilization victim excavation movement, which was conducted across national borders since the late 197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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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재외한인학회 정관 외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4호 2021.06 pp.1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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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의 서간도, 북간도 이주와 정착 : 1910년대를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김주용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4호 2021.06 pp.69-96

...한인디아스포라는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으며, 그 첫 번째 지역은 만주지역이다.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은 한인 이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강제 병탄 이전 만주지역 한인 이주는 대부분 함경도와 평안도인들이었다. 원인도 경제적 문제가 절대적이었다. 하지 만 1910년 강제병합을 계기로 정치적인 망명도 눈에 띠게 증가하였다. 일제의 토지수탈이 가속화되면서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은 남부여대하여 가까운 만주로의 이주를 재촉할 수밖 에 없었다. 북간도와 서간도지역으로 더많은 한인들이 이주 정착하였으며, 수전 경작에 능한 남부지 방 농민들의 이주는 초기 한인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었던 만주지역 수전 경작을 더욱 발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한인이주의 증가는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가 확충됨 을 의미하기도 한다. 1910년대 한인의 만주 이주는 중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대립으로 선의 의 피해를 보는 매우 불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제가 한인을 신민으로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이용하여 토지를 구입하는 등 한인을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치중하였다. 중국 지방 정부의 한인 구축정책과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인식 즉 일본의 주 구라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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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디아스포라는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으며, 그 첫 번째 지역은 만주지역이다.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은 한인 이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강제 병탄 이전 만주지역 한인 이주는 대부분 함경도와 평안도인들이었다. 원인도 경제적 문제가 절대적이었다. 하지 만 1910년 강제병합을 계기로 정치적인 망명도 눈에 띠게 증가하였다. 일제의 토지수탈이 가속화되면서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은 남부여대하여 가까운 만주로의 이주를 재촉할 수밖 에 없었다. 북간도와 서간도지역으로 더많은 한인들이 이주 정착하였으며, 수전 경작에 능한 남부지 방 농민들의 이주는 초기 한인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었던 만주지역 수전 경작을 더욱 발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한인이주의 증가는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토대가 확충됨 을 의미하기도 한다. 1910년대 한인의 만주 이주는 중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대립으로 선의 의 피해를 보는 매우 불리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제가 한인을 신민으로 보호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이용하여 토지를 구입하는 등 한인을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치중하였다. 중국 지방 정부의 한인 구축정책과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인식 즉 일본의 주 구라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The Korean Diaspora was staged all over the world, and the first was in Manchuria. The strength of the Japanese Empire in 1910 greatly influenced the migration of Koreans. Most of the Korean immigrants in Manchuria before the forced troops were from Hamgyeong-do and Pyeongan provinces. The cause was also absolutely economic. However, the forced annexation of 1910 also led to a noticeable increase in political asylum. As the land exploitation of Japan accelerated, farmers who gained advantage in the land had no choice but to rush the relocation to Manchuria, which is close to Nambu Women's University. More Koreans moved to the Bukgando and Seogando areas, and the migration of farmers from the southern part of the country, who were skilled in cultivating Susan, further developed the cultivation of Susan in Manchuria, which was started by early Korean immigrants. On the other hand, the increase in Korean immigration also means that the human and physical foundation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will be expanded. Japanese colonial era Koreans' migration to Manchuria came under very unfavorable circumstances, which were damaged in good faith by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Chinese government and the Japanese government. The Japanese government said it would protect Koreans as believers, and focused on expanding their power by using them to purchase land. The Chinese local government's policy of building Koreans and the Chinese people's perception of Koreans, or Japan's persistence, sp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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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과 새로운 경계의 형성과정 KCI 등재

임성숙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한림일본학 제38집 2021.05 pp.101-117

...한인의 영주귀국에 관한 문화기술지이다. 사할린 한인들은 1990년대 동북아시아의 냉전구조의 변화에 따라 이른바 그들의 ‘고향’인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일정부가 실시하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영주귀국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영주귀국은 일반적으로 소위 ‘사할린 한인문제’의 ‘해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이 실제 이 ‘해결’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 않다. 본 글은 사할린과 한국에서 실시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 경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영주귀국의 경험은 사할린 한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본 글은 그 경험 중에서도 그들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경계에 주목하였다. 이 경계의 등장은 영주귀국의 자격을 생년월일을기준으로 구분한 영주귀국정책에 기인한다. 제한된 영주귀국자격으로 인해 귀국자와 귀국하지않는 자 혹은 귀국을 하지 못한 자의 경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본 글은 새로운 경계는 사할린한인들의 초국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행위―소문, 한국 방문, 귀국자와 남은 자의 상호작용―를 통해 만들어지는 점을 고찰했다. 또한 사할린 한인들의 일상은 포스트사회주의 이행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맥락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지역적, 초국가적 공간과 특정 시간 속에서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다양한 물질적 지원과 서비스를 제공받는 영주귀국자들의 생활을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 영주귀국을 하지 않거나 할 자격이 없는 ‘남은 자’들은 영주귀국을 불공평한 지원사업으로 여겨 새로운 경계에 직면한다. 본 글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은 일종의 ‘종결’이나 ‘해결’로 보는 국가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사할린 한인들에게 ‘해결’은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의 시작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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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할린 한인의 영주귀국에 관한 문화기술지이다. 사할린 한인들은 1990년대 동북아시아의 냉전구조의 변화에 따라 이른바 그들의 ‘고향’인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한일정부가 실시하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영주귀국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영주귀국은 일반적으로 소위 ‘사할린 한인문제’의 ‘해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이 실제 이 ‘해결’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 않다. 본 글은 사할린과 한국에서 실시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 경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영주귀국의 경험은 사할린 한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본 글은 그 경험 중에서도 그들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경계에 주목하였다. 이 경계의 등장은 영주귀국의 자격을 생년월일을기준으로 구분한 영주귀국정책에 기인한다. 제한된 영주귀국자격으로 인해 귀국자와 귀국하지않는 자 혹은 귀국을 하지 못한 자의 경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본 글은 새로운 경계는 사할린한인들의 초국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행위―소문, 한국 방문, 귀국자와 남은 자의 상호작용―를 통해 만들어지는 점을 고찰했다. 또한 사할린 한인들의 일상은 포스트사회주의 이행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맥락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지역적, 초국가적 공간과 특정 시간 속에서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다양한 물질적 지원과 서비스를 제공받는 영주귀국자들의 생활을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 영주귀국을 하지 않거나 할 자격이 없는 ‘남은 자’들은 영주귀국을 불공평한 지원사업으로 여겨 새로운 경계에 직면한다. 본 글은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은 일종의 ‘종결’이나 ‘해결’로 보는 국가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사할린 한인들에게 ‘해결’은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의 시작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offers an ethnography about the return migration among older Sakhalin Koreans. Since the 1990s, ethnic Koreans on Sakhalin Island in Russia have migrated to their ethnic homeland, now South Korea in times of post-Cold War and post-colonial transformations. This paper explores why and how a new type of boundary has been produced among them in the transnational space. The new return migration policy limits the eligibility of return migration based on the birth year and date, as producing a new category of “the first generation of Sakhalin Koreans.” As a result, older Sakhalin Koreas are divided into returnees and stayees. However, I highlight that this new boundary has been also constructed through their everyday transnational practices including production and circulation of humors and interactions between returnees and stayees. Within the post-Soviet context in Russia where public services have been disappeared, various material and social support that the Japanese and South Korean governments provide for returnees have brought about a new sense of unfairness among stayees. Although the return migration program generally symbolizes “a solution” for and “the end” of so-called “the historical problem of Sakhalin Koreans,” this paper suggests that Sakhalin Koreans, especially stayees grapple with the new inequality.

本稿は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の韓国への永住帰国に関するエスノグラフィーである。1990年代に おける東アジアの冷戦構造の変化により、2000年から日韓国政府による支援事業の一貫しとて永住 帰国が実施された。この事業は一般的にいわゆる ‘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問題の解決’と言われてい る。しかし、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が実際どのように ‘解決’を経験しているのかについては分析され ていない。本稿はサハリンと韓国で行った現地調査をもとに、彼らの永住帰国の経験について考察 した。 永住帰国は国境を超えた空間において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の暮らしと生き方全般に多くの影響 を与えた。本稿はその中でも新しく形成された境界について注目した。この境界の登場は帰国の資 格を生年月日により分けたことに起因する。そしてこの資格により帰国者と帰国しない者あるいは帰国 できない者との間に境界が発生した。しかし本稿はこの境界は、トランスナショナルな空間において なされる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による文化的行為―うわさ、日常の会話、韓国の訪問、帰国者と ‘残った者’との相互作用―を通じて形成される点を明らかにした。また、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の日 常はポスト社会主義によるロシアとサハリンの社会経済的な変化というコンテクストとも関連している。 このようなローカル、トランスナショナルな空間と特定の時間のなかでサハリンに居住する韓国ㆍ朝鮮 人は、様々な物質的な支援が提供される帰国者の生活を魅力的なものと認識しはじめる。その結果 帰国をしなかったり、帰国の資格がない ‘残った者たち’は永住帰国を不公平な支援事業としてみな し、新しい境界に直面する。 本稿はサハリン韓国ㆍ朝鮮人にとって永住帰国という ‘解決’は新しい形態の不平等のはじまりで あるということを明らかに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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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거주 북미한인의 민족 정체성 및 국가 정체성 형성과 변화 연구 KCI 등재

김영술

한국국제문화교류학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구 문화교류연구) 제10권 제3호 2021.05 pp.31-64

...한인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으로 거주국 국가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북미한인의 정체성을 정치적, 사회 적, 문화적 맥락에 접근해서 분석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치적 맥락에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다. 북미한인 의 정체성은 주로 이중 정체성이나 혼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 인은 한국 사회 내에서 인종에 기반 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의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북미한인들의 삶은 매우 복잡한 스펙트럼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둘째는 사회적 맥락에서 북미한인이 보는 한국 내에서의 사회적 가치 차이에 대해서 다. 국내 이주 경험에 따른 사회 부적응이 북미한인들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차이, 소외, 편견 등 부정적인 인식이 북미한인들의 자기 정체화를 시 도하는 사회적 맥락의 원인과 배경이 되기도 했다. 셋째는 문화적 맥락에서 문화 차이와 한국어와 영어 사용에 따른 한인의 태도와 행 동의 차이에 대해서다. 북미한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새로운 문화 환 경에서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정체성의 변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인은 문화차이와 적응, 한국어 사용, 영어 사용, 이중 언어 사용, 한인들의 성격 및 외모, 태도와 행동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북미한인의 정체성은 혈통에 의한 민족 정체성보다는 관계, 환경, 상황이나 사회적 가치 차이,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따른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거주 북미한인의 정체성 문제는 국내 이주 적응과정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이와 방식, 태도와 행동을 보이더라도 한국 사회가 이들을 수용하며 이해하는 민족 통합적 시각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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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 거주 북미한인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으로 거주국 국가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북미한인의 정체성을 정치적, 사회 적, 문화적 맥락에 접근해서 분석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치적 맥락에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다. 북미한인 의 정체성은 주로 이중 정체성이나 혼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 인은 한국 사회 내에서 인종에 기반 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의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북미한인들의 삶은 매우 복잡한 스펙트럼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둘째는 사회적 맥락에서 북미한인이 보는 한국 내에서의 사회적 가치 차이에 대해서 다. 국내 이주 경험에 따른 사회 부적응이 북미한인들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차이, 소외, 편견 등 부정적인 인식이 북미한인들의 자기 정체화를 시 도하는 사회적 맥락의 원인과 배경이 되기도 했다. 셋째는 문화적 맥락에서 문화 차이와 한국어와 영어 사용에 따른 한인의 태도와 행 동의 차이에 대해서다. 북미한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새로운 문화 환 경에서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정체성의 변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인은 문화차이와 적응, 한국어 사용, 영어 사용, 이중 언어 사용, 한인들의 성격 및 외모, 태도와 행동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북미한인의 정체성은 혈통에 의한 민족 정체성보다는 관계, 환경, 상황이나 사회적 가치 차이,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따른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거주 북미한인의 정체성 문제는 국내 이주 적응과정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이와 방식, 태도와 행동을 보이더라도 한국 사회가 이들을 수용하며 이해하는 민족 통합적 시각이 필요해 보인다.

This study is on the formation and change of ethnic identity and national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living in Korea. To this end, this study analyzed the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by approaching political, social, cultural contexts, and the contents are as follows. The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mainly has a dual identity or a hybrid identity in a political context. Specifically, Korean Americans/Canadians live with ethnic identity based on race and cultural identity of the country of residence in Korean society. However, the lives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existed in a very complex spectrum. In the social context, the social instabil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according to their domestic migration experience affects their identity. In particular, negative perceptions such as differences, isolation, and prejudice in Korea became the cause and background of the social context in which Korean Americans/Canadians attempt to self-identify. In a cultural context, Korean Americans/Canadians leave the country in which they were born and raised and experience various cultural differences in a new cultural environment, showing a change of identity. Specifically, Korean Americans/Canadians were affected by changes in their identities due to cultural differences and adaptation, use of Korean, English, and use of bilingual language, Koreans’ personality and appearance, attitudes and behaviors In the end, the identities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showed a variety of cultural identities according to relationship, environment, situation or social value difference, and cultural difference rather than ethnic identity based on descent. Therefore, the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living in Korea seems to require an integrated perspective on ethnic to accept and understand of Korean society even though they show differences, different attitudes and behaviors from those of us in the process of adapting to domestic mi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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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거주 북미한인의 민족 정체성 및 국가 정체성 형성과 변화 연구 KCI 등재

김영술

인하대학교 다문화융합연구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 제10권 제3호 2021.05 pp.31-64

...한인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으로 거주국 국가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북미한인의 정체성을 정치적, 사회 적, 문화적 맥락에 접근해서 분석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치적 맥락에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다. 북미한인 의 정체성은 주로 이중 정체성이나 혼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 인은 한국 사회 내에서 인종에 기반 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의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북미한인들의 삶은 매우 복잡한 스펙트럼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둘째는 사회적 맥락에서 북미한인이 보는 한국 내에서의 사회적 가치 차이에 대해서 다. 국내 이주 경험에 따른 사회 부적응이 북미한인들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차이, 소외, 편견 등 부정적인 인식이 북미한인들의 자기 정체화를 시 도하는 사회적 맥락의 원인과 배경이 되기도 했다. 셋째는 문화적 맥락에서 문화 차이와 한국어와 영어 사용에 따른 한인의 태도와 행 동의 차이에 대해서다. 북미한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새로운 문화 환 경에서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정체성의 변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인은 문화차이와 적응, 한국어 사용, 영어 사용, 이중 언어 사용, 한인들의 성격 및 외모, 태도와 행동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북미한인의 정체성은 혈통에 의한 민족 정체성보다는 관계, 환경, 상황이나 사회적 가치 차이,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따른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거주 북미한인의 정체성 문제는 국내 이주 적응과정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이와 방식, 태도와 행동을 보이더라도 한국 사회가 이들을 수용하며 이해하는 민족 통합적 시각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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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한국 거주 북미한인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으로 거주국 국가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북미한인의 정체성을 정치적, 사회 적, 문화적 맥락에 접근해서 분석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치적 맥락에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다. 북미한인 의 정체성은 주로 이중 정체성이나 혼종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 인은 한국 사회 내에서 인종에 기반 한 민족 정체성과 거주국의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북미한인들의 삶은 매우 복잡한 스펙트럼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둘째는 사회적 맥락에서 북미한인이 보는 한국 내에서의 사회적 가치 차이에 대해서 다. 국내 이주 경험에 따른 사회 부적응이 북미한인들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차이, 소외, 편견 등 부정적인 인식이 북미한인들의 자기 정체화를 시 도하는 사회적 맥락의 원인과 배경이 되기도 했다. 셋째는 문화적 맥락에서 문화 차이와 한국어와 영어 사용에 따른 한인의 태도와 행 동의 차이에 대해서다. 북미한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새로운 문화 환 경에서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경험하면서 정체성의 변화 모습을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북미한인은 문화차이와 적응, 한국어 사용, 영어 사용, 이중 언어 사용, 한인들의 성격 및 외모, 태도와 행동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북미한인의 정체성은 혈통에 의한 민족 정체성보다는 관계, 환경, 상황이나 사회적 가치 차이,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따른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국내 거주 북미한인의 정체성 문제는 국내 이주 적응과정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이와 방식, 태도와 행동을 보이더라도 한국 사회가 이들을 수용하며 이해하는 민족 통합적 시각이 필요해 보인다.

This study is on the formation and change of ethnic identity and national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living in Korea. To this end, this study analyzed the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by approaching political, social, cultural contexts, and the contents are as follows. The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mainly has a dual identity or a hybrid identity in a political context. Specifically, Korean Americans/Canadians live with ethnic identity based on race and cultural identity of the country of residence in Korean society. However, the lives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existed in a very complex spectrum. In the social context, the social instabil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according to their domestic migration experience affects their identity. In particular, negative perceptions such as differences, isolation, and prejudice in Korea became the cause and background of the social context in which Korean Americans/Canadians attempt to self-identify. In a cultural context, Korean Americans/Canadians leave the country in which they were born and raised and experience various cultural differences in a new cultural environment, showing a change of identity. Specifically, Korean Americans/Canadians were affected by changes in their identities due to cultural differences and adaptation, use of Korean, English, and use of bilingual language, Koreans’ personality and appearance, attitudes and behaviors In the end, the identities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showed a variety of cultural identities according to relationship, environment, situation or social value difference, and cultural difference rather than ethnic identity based on descent. Therefore, the identity of Korean Americans/Canadians living in Korea seems to require an integrated perspective on ethnic to accept and understand of Korean society even though they show differences, different attitudes and behaviors from those of us in the process of adapting to domestic mi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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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 한인 디아스포라 김자순의 행적과 유교 인식 고찰 KCI 등재

한길로, 오경양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제29호 2021.04 pp.131-157

...한인 디아스포라 김자순 (1879∼1916)의 생애를 고찰하는 연구이다. 그를 통해 ‘만주와 간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근대기 재중한인 연구의 확대를 시도하면서, 당대 중국에 머 물던 이들의 다양한 삶의 군상에 접근하려 한다. 김자순에 대한 기록은 크게 한국 유림의 기술과 일본 측 정보기관의 문서로 구분되는데 관련 기록은 1914∼1916년까지, 총 3년 사이에 작성되었다. 필자는 이 둘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그의 생애를 잠정 정리했다. 187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 절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10여 년의 시간을 보내다 1900년을 좌우로 북경에 도착했다. 이곳에 정착한 그는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북경일보』의 주필을 맡으며 생활을 이어갔다. 1912년 중국에 입적한 그는 1914 년 공교 운동을 위해 북경을 찾은 이승희와 이병헌을 만나며 자신의 자취를 최초로 드러냈다. 이후 신한혁명당과 신화민단이라는 조직에 가담하며 활동 반경을 소폭 늘렸지만 1917년 37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모어’를 망각하고 ‘모국’을 벗어난 채 이역의 신민으로 살아가던 그는 필담을 통해 이승희와 대 화했다. 필담을 통해 그는 특히 ‘유교(儒敎)’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력했다. ‘언어’라는 내적 사유 또 ‘국적’이라는 외적 지표를 통 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는, 바로 유교를 통해 이를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특수한 일면을 담고 있는 당시 공교 운동은 사대부들의 집단 이주와 김자순과 같은 정착민의 호응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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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00∼1910년대, 중국 북경에 정착한 한인 디아스포라 김자순 (1879∼1916)의 생애를 고찰하는 연구이다. 그를 통해 ‘만주와 간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근대기 재중한인 연구의 확대를 시도하면서, 당대 중국에 머 물던 이들의 다양한 삶의 군상에 접근하려 한다. 김자순에 대한 기록은 크게 한국 유림의 기술과 일본 측 정보기관의 문서로 구분되는데 관련 기록은 1914∼1916년까지, 총 3년 사이에 작성되었다. 필자는 이 둘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그의 생애를 잠정 정리했다. 187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 절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10여 년의 시간을 보내다 1900년을 좌우로 북경에 도착했다. 이곳에 정착한 그는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북경일보』의 주필을 맡으며 생활을 이어갔다. 1912년 중국에 입적한 그는 1914 년 공교 운동을 위해 북경을 찾은 이승희와 이병헌을 만나며 자신의 자취를 최초로 드러냈다. 이후 신한혁명당과 신화민단이라는 조직에 가담하며 활동 반경을 소폭 늘렸지만 1917년 37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모어’를 망각하고 ‘모국’을 벗어난 채 이역의 신민으로 살아가던 그는 필담을 통해 이승희와 대 화했다. 필담을 통해 그는 특히 ‘유교(儒敎)’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력했다. ‘언어’라는 내적 사유 또 ‘국적’이라는 외적 지표를 통 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는, 바로 유교를 통해 이를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특수한 일면을 담고 있는 당시 공교 운동은 사대부들의 집단 이주와 김자순과 같은 정착민의 호응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study examines the life of Kim Ja-Soon, a Korean diaspora who lived in Beijing from the 1900s to the 1910s. Through him, I try to find out the lives of Koreans who lived in China and to expand the research on the Korean diaspora during this period. The records of Kim Ja-soon were written and recorded by Koreans and Japanese from 1914 to 1916. Korean records were written by Confucian scholars, and Japanese records were confidential documents issued by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The combined results of these two records are as follows. Born in Seoul in 1878, he moved to Japan as a child and lived there for 10 years. After moving to China, he arrived in Beijing in 1900 and continued to live there. In Beijing, he was a reporter for the Beijing Daily and a secret intelligence officer under the command of the Japanese police. However, he died in 1916, when he was only 38 years old. In 1914, he met with a Korean Confucian scholar Lee Seung-Hee, and expressed his opinion, which was the first record. However, at that time, he forgot Korean and already acquired Chinese nationality. He met Lee Seung-Hee and communicated with her by writing, and the main theme of the conversation was Confucianism. Although he was not a Confucian scholar, he discovered his identity through Confucianism. That is why we do not need to distinguish between Korea and China. Through Confucianism, he was able to talk about his beliefs, the soul of his country, and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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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재외한인학회 정관 외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3호 2021.02 pp.259-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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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 팬더믹 상황 속에서의 한인 이민 청소년을 위한 평화, 통일교육의 가능성 KCI 등재

송훈

한국실천신학회 신학과 실천 제73호 2021.02 pp.697-724

...한인 2-3 세대 이민자들 또한 모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재택 문화가 일상화된 코로나 시기에 한인 청소년들을 위한 한반도의 평화, 통일 교육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미국 내 한인 사회는 세대를 경계로 다층화된 사회로 세대 간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매우 미흡한 상황에서 맞이한 기회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상황에서 가 족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 통일 교육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한인 이민 1-1.5 세대들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억의 중 심에 자리잡고 있다. 반면 한인 2-3세대들은 이 문제들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 고 분석하지만 본인들의 삶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공감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코로나 팬더믹 상황과 새로운 한류의 영향은 2-3세대들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더욱 공감하고 앞으로 평화, 통일 이슈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될 것이며, 한인 가족 또한 평화, 통일 교육을 통해 세대간의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의 가치를 위한 깊은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또한 한 류의 부흥으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미국 시민 사회에서 확대되는 배경 속에서 2-3세대 청소년들을 통해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민적 연대의 가능성 또한 제 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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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더믹은 전 지구적인 재앙으로 발전하면서 뉴노멀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 어내며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경우 효과적인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k-방역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새로운 한류로 주목받고 있으며 더불어 BTS와 기생충 으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 세계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한인 2-3 세대 이민자들 또한 모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재택 문화가 일상화된 코로나 시기에 한인 청소년들을 위한 한반도의 평화, 통일 교육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미국 내 한인 사회는 세대를 경계로 다층화된 사회로 세대 간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매우 미흡한 상황에서 맞이한 기회이기도 하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상황에서 가 족을 기반으로 하는 평화, 통일 교육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한인 이민 1-1.5 세대들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억의 중 심에 자리잡고 있다. 반면 한인 2-3세대들은 이 문제들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 고 분석하지만 본인들의 삶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공감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코로나 팬더믹 상황과 새로운 한류의 영향은 2-3세대들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더욱 공감하고 앞으로 평화, 통일 이슈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될 것이며, 한인 가족 또한 평화, 통일 교육을 통해 세대간의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의 가치를 위한 깊은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또한 한 류의 부흥으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미국 시민 사회에서 확대되는 배경 속에서 2-3세대 청소년들을 통해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민적 연대의 가능성 또한 제 시하고자 한다.

COVID-19 has become a global pandemic that challenges conventional paradigms in education, work, and religious activities. We call it 'new normal.' However, South Korea has shown a most successful strategy against the pandemic producing a new word, 'K-Quarantine,' which has become a new global wave originated from Korea with other 'Han-Ryu (Korean Wave)' such as BTS and Parasite, a movie. As the Korean wave is becoming popular in American society, the second and the third generations of Korean Americans started to rethink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mother country. Moreover, home-base daily life in the pandemic situation provides them a promising opportunity to share the vision and thoughts of Korea's peace and unification. Moreover, the unification and peace education for the youth and Sunday school kids with their family would be a good cause for them to invite their friends from other ethnicities to share ideas and visions for Korea's peace and un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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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소련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계획과 이주 과정 - 1937년 이주문서를 중심으로 - KCI 등재후보

김영술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53호 2021.02 pp.51-95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어떻게 계획되었는지, 이주 실상은 어떠 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1937년 8월 21일부터 1937년 12월 19일까 지 구소련에서 작성된 주요 이주 문서 아카이브(АП РФ, ГАРФ, РА ИПСИ ЦС НДПУ, РГ АСПИ, ЦА ФСБ)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연구를 통해 나타난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강제이주의 주요 원인과 배경 으로는 일본의 첩보 활동에 한인들의 이용을 막기 위한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반소 비에트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한인 이주비용은 가구당 6,000루블이었다. 이 중에서 소련 정부는 극동 지역에서 화물 열차 한 가족 운송 비 용 750루블, 가족 음식, 의료 및 문화 서비스에 250루블하여 1,000루블을 지불하였고, 남겨 진 개인 및 콜호즈 농작물에 대한 지불 및 개별 건물, 재고 등의 대가로 2,000루블을 지불받 을 수 있도록 할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000루블은 생계와 건축 등을 위해 지원받는 금액 인데 그것도 대출형식이었다. 셋째,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 이주 과정은 이주 방침과 실행과는 달랐다. 이주열차의 80% 가 지침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알려진 강제이주 열차 탑승 인원과 첫 열차 출발 날 짜도 달랐다. 강제이주 총 인원은 극동 지역 출신 한인 36,442가구 171,781명보다 많은 36,681가구 172,600명이 이주했다. 강제이주자가 실제 이주자 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면 극동 지역에 거주하는 미등록 한인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주 첫 열차 출발 날짜는 계획과는 달리 조정되어 모두가 9월 9일이 아닌 9월 10일이었다. 그리고 강제이주 열차는 음식과 식수 문제, 화장실 문제, 열차에서의 호위(반혁명·사보 타지 등에 대비)직원들의 활동으로 이주자 통제, 환자 발생 시 보건 문제 등이 가장 어려웠 을 것이다. 한편, 강제이주 과정에서 사망한 한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망자는 하바롭스크 근처 열차 충돌 희생자를 포함하여 673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특히 이동과정에 서 열차 충돌 사고는 테러라는 측면에서 보면 안전 문제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 사고는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는 스파이 조직이 행한 것이었다. 또한 강제이주 한인열차 충돌 조사 결과 김 아파나시가 일본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증언은 없었다. 조사에서는 김 아파나시를 일본 정보부의 간첩으로 1937년 강제이주 한인 열차 충돌 사고와 연관시켜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인 강제이주 실상에 대해 밝혀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비밀이 풀리지 못 한 채 남지 않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자료 발굴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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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소련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어떻게 계획되었는지, 이주 실상은 어떠 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1937년 8월 21일부터 1937년 12월 19일까 지 구소련에서 작성된 주요 이주 문서 아카이브(АП РФ, ГАРФ, РА ИПСИ ЦС НДПУ, РГ АСПИ, ЦА ФСБ)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연구를 통해 나타난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강제이주의 주요 원인과 배경 으로는 일본의 첩보 활동에 한인들의 이용을 막기 위한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반소 비에트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한인 이주비용은 가구당 6,000루블이었다. 이 중에서 소련 정부는 극동 지역에서 화물 열차 한 가족 운송 비 용 750루블, 가족 음식, 의료 및 문화 서비스에 250루블하여 1,000루블을 지불하였고, 남겨 진 개인 및 콜호즈 농작물에 대한 지불 및 개별 건물, 재고 등의 대가로 2,000루블을 지불받 을 수 있도록 할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000루블은 생계와 건축 등을 위해 지원받는 금액 인데 그것도 대출형식이었다. 셋째,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 이주 과정은 이주 방침과 실행과는 달랐다. 이주열차의 80% 가 지침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알려진 강제이주 열차 탑승 인원과 첫 열차 출발 날 짜도 달랐다. 강제이주 총 인원은 극동 지역 출신 한인 36,442가구 171,781명보다 많은 36,681가구 172,600명이 이주했다. 강제이주자가 실제 이주자 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면 극동 지역에 거주하는 미등록 한인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주 첫 열차 출발 날짜는 계획과는 달리 조정되어 모두가 9월 9일이 아닌 9월 10일이었다. 그리고 강제이주 열차는 음식과 식수 문제, 화장실 문제, 열차에서의 호위(반혁명·사보 타지 등에 대비)직원들의 활동으로 이주자 통제, 환자 발생 시 보건 문제 등이 가장 어려웠 을 것이다. 한편, 강제이주 과정에서 사망한 한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망자는 하바롭스크 근처 열차 충돌 희생자를 포함하여 673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특히 이동과정에 서 열차 충돌 사고는 테러라는 측면에서 보면 안전 문제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 사고는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는 스파이 조직이 행한 것이었다. 또한 강제이주 한인열차 충돌 조사 결과 김 아파나시가 일본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증언은 없었다. 조사에서는 김 아파나시를 일본 정보부의 간첩으로 1937년 강제이주 한인 열차 충돌 사고와 연관시켜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인 강제이주 실상에 대해 밝혀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비밀이 풀리지 못 한 채 남지 않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자료 발굴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This study examines how Soviet Koreans' forced migration to Central Asia was planned and in reality. This study focused on migration documents stored in the former Soviet Union from August 21, 1937 to December 19, 1937. The details revealed through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main cause and background was to prevent the use of Koreans in Japanese espionage activities, and to eliminate anti-Soviet elements for the construction of socialism. Second, the cost of moving Koreans from Far East Krai to Kazakh and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s was 6,000 rubles per household. Of these, the Soviet government paid 750 rubles for freight train transportation per family in Far East Krai and 250 rubles for family food, medical and cultural services, for a total of 1,000 rubles. Koreans allocated 2,000 rubles to pay for the remaining individual and cohort crops and for individual houses and inventory. This was a really ridiculous amount. And the remaining 3,000 rubles were supported for living and construction, which was also a form of loan. Third, the process of Soviet Koreans' forced migration to Central Asia was different from the migration policy and practice. 80% of convoy trains did not go according to the guidelines. The number and date of forced migration are different from the plan. The total number of forced migrants was 172,600 people from 36,681 households, more than 171,781 Soviet Koreans' from Far East Krai. Looking at the number of forced migrants far more than the actual number of migrants, it can be assumed that there were a significant number of undocumented Koreans residing in Far East Krai. Contrary to the plan, the departure date for the convoy is September 10, not September 9. And it was the most difficult for the forced migrants on the train to solve food and water problems, the toilet problem, control of migrants through the activities of the escorts on the train(preparation for counter-revolution, sabotage), health problems in case of patients, etc. On the other hand, the details of the Koreans who died in the process of forced migration are unknown, but the number of deaths can be estimated to be 673 people, including the victims of a train crash near Khabarovsk. In terms of terrorism, a train crash in the transport process had a big problem with safety. The train accident was done by a spy organization related to Japanese imperialism. In addition, there was no testimony that Afanasy Kim had acted as a Japanese spy in the results of the crash investigation of the Korean train for forced migration. However, the investigation suggests that Kim Afanasy was intended to be linked to the crash of the Korean train in 1937. Although it has been revealed about the fact of forced migration of Soviet Koreans', still many secrets remain unsolved. That is why the discovery of new data is requ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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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제28호 2020.12 p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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