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 년
6,300원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은 율곡 이이와 함께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조선조는 물론 지금까지 우계는 율곡의 그늘에 가려 그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여 왔다. 우계는 율곡과의 성리학 논변을 통해 조선 성리학사를 의미 있게 장식하였음에도 그의 주장들은 율곡의 주장에 가려지거나 묻혀서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또 우계의 학맥은 조선 후기까지 연면히 계승되어 율곡학파와 대비될 정도로 뚜렷한 학파를 이루었고, 나아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영향력이 상당하였음에도, 율곡학파와 그 후예들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우계의 학문 전통이 소홀하게 다루어져 왔다. 본고에서 ‘우계와 우계학 다시 보기’ 차원에서 우계 성혼의 성품과 학문 태도를 고찰하고 이를 기초로 우계학과 우계학파를 재평가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재 학계에서는 ‘우계학’이란 명칭이 통용되고 있지만, 그 학문적 특성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계학파의 사상사적 의의’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본고와 관련하여, 우계학과 우계학파에 대한 재조명-재평가는 조선 후기 학술사와 사상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본다.
Together with Yoolgok Yi Yi, Ugye(牛溪) Sung Hon (成渾: 1535∼1598) is one of the eighteen Confucian scholars representing Korea. Under the shadow of Yoolgok, however, Ugye has not yet been disclosed of his real worth till now as well as during the period of Chosun dynasty. Through the academic dispute of Neo-Confucianism with Yoolgok, Ugye meaningfully made the history of Chosun Neo-Confucianism. His arguments, however, have not been lighted up only because they were eclipsed or pressed by Yoolgok’s arguments. In addition, Ugye school’s scholarly lineage had been succeeded ceaselessly to the age late in Chosun dynasty, so that it grew up to a school clear enough to be contrasted with Yoolgok school. Furthermore, it largely influenced the history of thought late in Chosun dynasty. However, Ugye’s academic tradition has been little dealt with only the tradition and successors of Yoolgok school focused on. For such reasons set forth above, this study looks into the personality and academic attitude of Ugye Sung Hon in the dimension of ‘Reviewing of Ugye and Ugye Learning’ based on which this study further reassesses Ugye learning and Ugye school. Today the name ‘Ugye Learning’ is commonly used but its relevant academic characteristics is little exposed. ‘The meaning of Ugye school in the history of thought’ is also not yet fully studied. Based on this study, reexamination and reassessment of Ugye learning and Ugye school are required to understand the history of academy and thought.
16세기 기호유학 성립기 “율곡⋅우계⋅구봉”의 의례(儀禮) 논변에 대한 연구 : 『三賢手簡』중심으로 KCI 등재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6호 2024.06 pp.93-118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400원
이 논문은 16세기 기호 유학 성립기(成立期)에 “율곡 이이(1536∼1584)⋅우계 성혼(1535∼1598)⋅구봉 송익필(1534∼1599)”이 예(禮)에 대한 논변을 펼친 것을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삼현(三賢)은 파주(坡州)에서 도우지교(道友之交)를 맺고 서로 변치 않는 우정과 흠모를 가지고 34년(1560년∼159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우(交友)와 학술 활동을 지속하였다. 각자가 가학(家學)의 연원과 학문적 관점 그리고 출신 신분과 각자의 재능이 각기 다르지만, 논변(論辯)의 과정에서 드러내었던 문제의식과 사유를 함께 공유하였고, 때로는 냉정한 비판과 애정 어린 충고를 이어 나가면서 각자의 학문에 대한 신념과 확신을 정립되게 되었다. 삼현(三賢)의 논변을 통하여 기호 예학이 형성되는 시기에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는 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러한 논변은 이후 예학의 발전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토대(土臺)가 되어 주었다. 이후에 “율곡 ⋅우계 ⋅구봉”의 학문적 교류(交流)를 후학들이 공유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다. 또한 삼현의 예학에 대한 논의는 서로 공통된 특성과 예학적인 면에서 사계(沙溪)를 중심으로 한 기호 예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the arguments of "Yulgok Yi I(1536- 1584)⋅Ugye Sung Hon(1535-1598)⋅Gubong Song Ik-pil(1534-1599)" during the establishment of symbolic study in the 16th century. Samhyun formed Dowoojigyo Bridge in Paju and continued his academic activities with friendships and admiration that did not change with each other, exchanging letters for 34 years(1560-1593). Although each person had different origins, academic perspectives, status, and talents, they shared the problem consciousness and thoughts that were revealed in the course of the argument, and sometimes continued cold criticism and affectionate advice, establishing their beliefs and confidence in their respective studies.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lay the foundation for a more three-dimensional view of the future development by considering various aspects of the era in which symbolic pre-study is formed. Later, as the exchange of "Yulgok⋅Ugye⋅Gubong" was shared by later juniors, it became a starting point for further study of their thoughts. In addition, the discussion of pre-study by Samhyun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pre-study for symbols centered on the four sectors in terms of common characteristics and pre-study.
7,600원
1561년에 퇴계는 남명을 남쪽지방에서 유일한 고상한 선비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남명을 칭찬하는 뜻이 아니라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자신의 지조만 지키는 선비라고 비판하는 말이다. 그 이전에 낙동강 중하류 연안에는 몇몇의 이와 같은 선비들이 독특한 학풍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모두 세상을 떠나고 오직 남명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남명은 원래 이곳이 삶의 터전이 아니었지만 30세 이후 처가가 있는 이곳에서 강학을 하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였다. 남명과 삼족당은 21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벗으로 지냈다. 남명은 삼족당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비’, ‘하나의 허물도 없는 인물’, ‘세상을 뒤덮을만한 영웅’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를 ‘왕도정치를 도울 수 있는 인재’이지만 ‘시대와 그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렇지만 삼족당은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기미를 살펴서 벼슬을 포기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살아간 식견이 탁월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남명은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로부터 그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명이 삼족당의 묘갈에서 그를 평가한 내용은 나중에 남명이 죽은 후에 대곡 성운이 남명의 묘갈에서 남명을 평가한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In 1561, Toegye evaluated Nammyung as the only noble scholar in the southern region. However, this evaluation does not mean to praise Nam-myeong, but rather to criticize him as a scholar who does not go to a post and keeps only his tenacity. Prior to that, some scholars like this had a unique academic tradition in the middle and lower reaches of the Nakdong River, because they all passed away and only Nammyung was alive. Nammyung had not originally lived here.He has been heavily influenced by them since the age of 30, studying in this province where his wife's home resides.Among them, Kim Dae-yu was a representative figure. Nammyung and Samjokdang were friends even though there was a 21-year age gap. Nammyung praised Samjokdang as ‘the best scholar in the world’, ‘a person without a single fault’, and ‘a hero who can cover the world’. And he regretted that he was ‘a person who could help ideal politics’ but ‘a person who could not meet the times and a king who recognized him’. However, he was evaluated as a person with excellent insight, who did not resent other people, looked for signs, gave up his post, and lived a leisurely life. In this respect, Nam Myung was deeply influenced by him and came to establish his own ideology. We can see that Nammyung's evaluation of the Three Jokdang in the stele and Daegok's evaluation of Nammyung in the inscription are almost identical.
7,000원
권근(權近, 1352∼1409)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대사상가로서 그의 학문은 조선시대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주역(周易)』에 관련된 저술로는 『입학도설(入學圖說)』 가운데 여러 도설(圖說)이 있으며,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가운데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이 있다. 본 논문은 그의 양대 저작인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주역천견록』) 속에 나타난 역학관점인 체용론(體用論)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겠으며 권근의 독창적인 측면을 부각하도록 하겠다. 또한 그의 역학사상의 특징인 불교비판과 존고정신(尊古精神)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았다. 『입학도설』의 내용 중 『주역』에 관한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역』을 대체(大體)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보통 『입학도설』 가운데 심성론(心性論)의 측면인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와 「천인심성분석지도(天人心性分釋之圖)」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전체적 내용을 볼 때 『주역』에 관한 여러 도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아 『주역』이 학문(특히 성리학)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됨을 권근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하도(河圖)」⋅「낙서(洛書)」를 설명하는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주역천견록』에서도 권근의 관심은 체용론에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가 『주역 상하경을 체용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 천도의 체용과 인도의 체용을 나누어 보면서도 체용일원(體用一源)의 측면에서 하나로 귀결시키는 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입학도설』에서는 「하도」⋅「낙서」, 선천(先天)⋅후천(後天), 자연역(自然易) - 복희역(伏羲易) - 문왕역(文王易)을 단순히 체용관계로 파악하고 있지만 『주역천견록』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체용일원이라는 원칙하에 서로가 서로를 머금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즉, 체용의 구조는 결국 체용일원으로 포괄되며 결국은 천인합일로 귀결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경(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Gwongeun(權近 was a great thinker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arly Joseon Dynasty, and his studies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entire Joseon Dynasty. His writings related to the Book of Changes include several diagrams in the Entrance Diagram, and in the Book of Five Classics, There is. This paper will conduct a discussion focusing on Cheyongron, an epidemiological perspective, expressed in his two major works, Iphakdoseol and Five Gyeongcheongyeonrok (Juyeokcheongyeonrok), and highlight Gwongeun's original aspects. would. We also briefly looked at his critique of Buddhism and the spirit of honoring ancient gods, which are features of his epidemiological thought. Considering that the part about Juyeok occupies a large proportion of the contents of Iphakdoseol, it can be seen that Juyeok was used as a replacement. Usually, among the Iphakdoseol, aspects of the theory of mind nature, such as “Heavenly and Human Mind Unity Map” and “Heavenly and Human Mind Analysis Map,” are considered important. When looking at the overall content, it appears that Gwongeun was able to see that the Book of Changes was an important background for the formation of scholarship(especially Neo- Confucianism), as many books on the Book of Changes occupied a large proportion. This point is clearly shown in the part that explains “Hado”⋅“Nakseo”. In Juyeokcheongyeonrok, Gwongeun's interest was in the Ti-Young. This point is also clearly shown in his understanding of the upper and lower scenes as a relationship of use in Juyeok. In addition, it is clearly shown in the fact that while dividing the Cheondo's body and India's body, they are concluded as one in terms of the body's unity. In Iphakdoseol, “Hado”⋅“Nakseo”, pre-heaven(先天)⋅post-cheon(後天), natural station(自然易)-Bokhui station(伏羲易)- Munwang station(文王易) are simply understood as a relationship of employment. However, in Juyeokcheongyeonrok, it goes one step further and focuses on the fact that they support each other under the principle of Cheyong Il-won. In other words, the structure of Cheyong is ultimately encompassed by Cheyong Il-won and ultimately results in the unity of heaven and man. Basically, this is achieved through ‘respect.’
7,500원
본 논문은 윤동규의 역학사상에 대해 살펴 본 것이다. 윤동규의 저술은 「행장[邵南先生尹公行狀]」과 「제문[祭邵南尹丈東奎文]」을 지은 안정복(安鼎福)의 말처럼 후대에 전할 만한 것은 없고 ‘지의(志疑)’ 몇 권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안정복은 「행장」에서 이익이 윤동규가 『태현경(太玄經)』을 잘 알고 있다고 칭찬한 점을 언급하였다. 『태현경』은 윤동규의 역학(易學)을 이해하는데 열쇠가 되는 부분이다. 성호학파에서 윤동규의 위상은 이익이나 초창기 제자들이 언급한 부분에서 그가 제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음은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에 신후담(愼後聃)으로부터 비롯된 ‘공희로(公喜怒) 논쟁’에서 젊은 제자들이 윤동규를 따르기 보다는 신후담의 견해에 동조했던 이병휴(李秉休)의 입장을 따름으로써 성호학파에서 점점 잊히게 되었다. 윤동규가 「계사지의(繫辭志疑)」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소옹(邵雍)의 가일배법(加一倍法)으로 『주역(周易)』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하는 것이다. 윤동규는 「계사전(繫辭傳)」이 『주역』의 범례와 같으므로 『주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사전」을 열심히 읽고, 그로부터 『주역』의 이치가 건괘(乾卦)⋅곤괘(坤卦)에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윤동규의 서법(筮法)에 대한 견해는 이익을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익은 「시괘고(蓍卦攷)」와 같이 주희(朱熹)의 서법(筮法)에 의문을 가지고 많은 기록을 남긴 반면 윤동규는 ‘자득(自得)’의 정도가 적어서 이익의 범위 내에서 짧은 글 몇 편만을 남겼다. 『역학계몽(易學啟蒙)』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해 『태현경』 「현리(玄攡)」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의 내용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윤동규의 주장은 여기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멈춘다. 『태현경』은 한나라 때 만들어진 서적이다. 윤동규가 『태현경』을 연구한 본래 목적은 소옹과 주희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확장하여 『주역』의 주석서로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소옹과 주희를 비판하는 언급에만 그치고 있다. 아쉬운 부분이다. 윤동규의 역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으므로 그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This paper examines Yun Dong-Gyu(尹東奎)'s theory of the Book of Changes. As An Jeong-Bok(安鼎福), who wrote “Haengjang[邵南先生尹公行狀]” and “Jemun[祭邵南尹丈東奎文]” said, Yun Dong-Gyu's writings are nothing worth passing down to future generations, and only a few volumes of “Jiui(志疑)” exist. However, An Jeong-Bok mentioned in “Haengjang” that Yi Ik(李瀷) praised Yun Dong-Gyu for knowing the Taixuanjing(『太玄經』) well. The Taixuanjing is a key part to understanding Yun Dong-Gyu's study of the Book of Changes. Yun Dong-Gyu's status in the Seongho School was good, and we can see from the comments made by his early disciples that he was faithful to his role as a disciple. However, later, in the ‘Gonghuiro(公喜怒) debate’ that originated from Shin Hu-Dam(愼後聃), the young disciples followed the position of Yi Byeong-Hyu(李秉休), who agreed with Shin Hu-Dam's views, rather than following Yun Dong-Gyu, and as a result, he was gradually forgotten in the Seongho School. What Yun Dong-Gyu wanted to say through “Gyesajiui(「繫辭志疑」)” is that we should not try to understand the Zhouyi(『周易』) through Shao Yong(邵雍)'s Jiayibeifa(加一倍法). Yun Dong-Gyu wanted to say that since “Gyesajeon(「繫辭傳」)” is like a legend to the Zhouyi, in order to understand the Zhouyi we must diligently read the “Gyesajeon” and from there the principles of the Zhouyi are contained in the Geon(乾卦) and Gon(坤卦) hexagrams. Yun Dong-Gyu's view on divination seems to have followed Yi Ik. However, while Yi Ik left many records, such as the “Sigwago(「蓍卦攷」)”, which questioned Zhu Xi’s calligraphy, Yun Dong-Gyu only left a few short writings within the scope of Yi Ik, as the degree of “self-confidence(自得)” was low. He claims that the “Ha-do(「河圖」)” and “Nak-seo(「洛書」)” of the Yixueqimeng(『易學啟蒙』) were influenced by the contents of “Xuanli(玄攡)” of the Taixuanjing and “Yiwenzhi(「藝文志」)” of the Hanshu(『漢書』). However, Yun Dong-Gyu’s argument stops here and cannot go any further. Taixuanjing is a book written during the Han Dynasty. The original purpose of Yun Dong-Gyu's study of Taixuanjing was to criticize Shao Yong and Zhu Xi(朱熹). It would have been good if it had been expanded to become a commentary on Zhouyi, but it only ends with criticism of Shao Yong and Zhu Xi. It is regrettable. Yun Dong-Gyu's I-xue gives us many implications today, so we need to ponder his words.
간재 전우의 心說과 理氣論 : 사상사적 배경과 心氣 이해를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3호 2022.12 pp.57-85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900원
이 논문은 心是氣가 김장생 이후 강조되는 담론이고, 낙론의 心 이해가 이러한 흐름과 맞지 않으며, 따라서 낙론이 김장생―송시열의 心是氣가 가지는 담론적 한계를 인식한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간재 전우가 주자학이나 율곡학을 心是氣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낙론의 기본 입장과 전우의 주장이 일관성을 가지는지, 전우의 담론과 비판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전우에 대한 연구의 지평을 기존의 것보다 조금 더 넓혀, 전우의 주장을 조선 주자학의 쟁점이라는 맥락에서의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장생과 송시열의 心是氣, 理無爲氣有爲 논리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理를 無爲라고 보면 主宰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理는 그저 도덕의 근거일 뿐이다. 둘째, 理氣不離를 전제한다고 해도 心 자체를 氣로 규정하게 되면 도덕 행위의 필연성 역시 사라진다. 도덕은 理에 있는데 행위는 心이 하기 때문이다. 결국, 김장생―송시열의 이황 비판은 理의 주재성 약화 혹은 도덕 근거의 부재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맥락에서 김창협은 율곡의 주장을 회의하고 이황의 주장에 근접한 주장을 하였고, 이간과 한원진은 주희가 “妙”로 봉합한 보편과 특수, 性·理와 心의 틈새를 다시 벌려 純善 혹은 絶對善의 근거를 인간 내면에서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였다. 종래 김장생―송시열 계열이 無爲의 理와 心是氣를 주장함으로써 性과 未發心體의 연결이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理의 주재성 또는 도덕 근거를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홍직필은 오희상에게서 영향 받아 이황 식의 理發을 神으로 언급하였다. 氣의 청탁수박은 결국 本心≒明德≒神을 天理의 流行에 상응하는 純善의 主宰를 구별해내기 위한 장치이고, 道器의 구분은 心是氣라는 명제를 지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내면의 순수 도덕 주체를 확보한다는 낙론의 심학적 목표를 율곡의 논리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홍직필이나 오희상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우는 홍직필―임헌회 계보로서, 心氣를 形氣로부터 구분하여 無爲의 理와 有爲의 氣라는 전제에서 주장되는 氣로서의 心이 純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無爲의 理와 有爲의 氣라는 전제에서 理 또는 性이 단지 규범일 뿐임도 주장한다. 心은 理 또는 性을 준칙으로 한 성찰적 실천을 해야 한다는 “性師心弟”를 주장이나 理 중심 心 이해를 異端이라고 보는 입장이 이 맥락에서 가능했다. 전우는 이러한 논리가 주자학의 정통이라고 믿고, 자신이 이 정통성을 지켜야 할 종장이라고 확신하였다. 그가 벌인 많은 논쟁들은 바로 이러한 儒宗으로서의 책임감에 따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In the affiliation of Yulgok studies after Yi-Yi, especially Kim-Jangsaeng, there was a tendency to present the proposition “Mind is Qi(心是氣)” by paying attention only to the movement of the subject, and to exclude the manifestation of pure morality. However, Kim-Changhyeop, Yi-Gan, Yi-Hangro, Ki-Jeongjin, etc., think otherwise, “the mind encompasses the principles and reality of the metaphysics(心合理氣).” Therefore, they claim that “the principle of metaphysics and reality are of the same essence(理氣同實)” or “the human heart is consistent with its moral nature(心性一致)”. It is the position that the moral body in the human subject is the master of actual human behavior. On the other hand, Jeon-Woo tried to distinguish spirit(心氣) from general Qi(氣) and ensure that it is pure. By this, I tried to prove the premise that "the principle of metaphysics is immobile, but the actual qi is in motion" and the proposition "Mind is Qi". In this context, Jeon-Woo compar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ain body and the subject to that of a teacher and a disciple, and argued for “exaltating good nature.” And, claims that contradicted this were criticized as heretical theories that deviated from Zhu Zi-Yulgok's orthodoxy. This discourse of Jeon-Woo focused on the rationalization of the “Mind is Qi” discourse. Jeon-Woo did not stop making these claims even in the situation where national sovereignty was lost and many scholars started an armed struggle. He thought that it was more important to clarify what the reality should aim for rather than the immediate reality. If you see that what the reality should aim for is more important than the actual reality, and if that orientation is based on the tradition that has been handed down, not the current self, then the “Moral Principle” This is because it can take the position that the establishment of “the principle of morality comes first.” There were cases such as Song-Siyeol, which already practiced this position. In this way, it can be said that Jeon-Woo focused on preserving and disseminating discourses handed down from previous generations throughout his life. The core of the discourse that Jeon-Woo wanted to preserve was “Mind is Qi” based on the premise that “the metaphysical principle does not move, but Qi actually moves.”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5집 2013.02 pp.67-106
...사상을 정통 성리학으로 尊崇하면서 학술 의 주류로 삼았다. 약 500년 기간 동안에 많은 名儒들을 배출하였고, 다 양한 형태로 성리학을 표현하였다. 그 중에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16세기에 퇴계와 율곡이 쌍벽을 이루었다. 그들의 성리학적 논점은 이 후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성립하 게 하였다. 이어 조선 후기 한말시기에 郭俛宇와 田艮齋사상에도 師承 의 영향을 주었는데, 곽면우는 퇴계학술 계승자이고, 전간재는 율곡학술 계승자이다. 곽면우와 전간재는 방대한 저술과 정묘한 논변을 통하여 조선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대립의 종지부를 찍었다.1) 사실 조선 성리 학의 발전은 전후의 맥락을 서로 관통하면서 논점을 계승하고 있기 때 문에 어떤 것 하나만을 독립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는 기호학파에 속한 간재가 율곡과 우계의 성리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고, 아울아울러 간재학술 사상의 주축과 핵심적인 의제를 밝혀 드러내고자 한다.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8,500원
조선시대의 유학은 주자의 사상을 정통 성리학으로 尊崇하면서 학술 의 주류로 삼았다. 약 500년 기간 동안에 많은 名儒들을 배출하였고, 다 양한 형태로 성리학을 표현하였다. 그 중에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16세기에 퇴계와 율곡이 쌍벽을 이루었다. 그들의 성리학적 논점은 이 후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성립하 게 하였다. 이어 조선 후기 한말시기에 郭俛宇와 田艮齋사상에도 師承 의 영향을 주었는데, 곽면우는 퇴계학술 계승자이고, 전간재는 율곡학술 계승자이다. 곽면우와 전간재는 방대한 저술과 정묘한 논변을 통하여 조선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대립의 종지부를 찍었다.1) 사실 조선 성리 학의 발전은 전후의 맥락을 서로 관통하면서 논점을 계승하고 있기 때 문에 어떤 것 하나만을 독립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는 기호학파에 속한 간재가 율곡과 우계의 성리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고, 아울아울러 간재학술 사상의 주축과 핵심적인 의제를 밝혀 드러내고자 한다.
朝鮮時代(1392~1910)的儒學,以尊崇朱子思想為正統的性理學為主幹,前後發展五百餘年,名儒輩出,大放異彩。其中,朝鮮前期的性理學者,以十六世記的李退溪(名滉,1501~1571)與李栗谷(名珥, 1536~1584)為雙璧。他們的性理學論點,影響往後的性理學發展,而有嶺南學派(退溪學派)與畿湖學派(栗谷學派)的流衍。降至朝鮮後期的韓末時期(十九世紀末二十世紀初),郭俛宇(名鍾錫,1846~1919)與田艮齋(名愚,1841~1922),亦學有師承,前者宗主退溪之學,後者祖述栗谷之學,他們以龐大的著述與精微的論辯,為朝鮮的嶺南學派與畿湖學派,劃下終結的句點1))。實則,朝鮮性理學的發展,前後相貫,論點相承,不能孤立地看待。因此,本文之作,主要探究畿湖學派田艮齋如何詮釋栗谷與牛溪的性理說,並由此彰顯艮齋思想的主軸,及其關切的議題。
郭店楚簡 『尊德義』에 나타난 德治에 관한 연구 KCI 등재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8호 2025.06 pp.215-243
...사상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유가 덕치 사상의 전승 및 현대적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덕치의 전제 조건, 덕치의 방법, 덕치의 구현 양상의 순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존덕의(尊德義)』에 담긴 덕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덕치를 위해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 수양을 통해 덕을 갖추고 천명을 깨달은 경지에 이른 위정자의 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덕치 수행을 위한 방법으로 솔선하는 위정자의 덕행에 의한 교화를 주장하였으며, 예악을 통한 감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제시하였다. 셋째, 인간 내면의 인륜과 도덕을 회복시키고, 민생의 안정과 화합을 이루는 것이 덕치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유가의 이상임을 설파하였다. “덕과 의를 높이고 백성의 인륜을 밝혀야 군자라 할 수 있다”라는 첫 문장의 선언처럼 『존덕의』는 덕에 의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위정자의 도덕심과 솔선하는 덕행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정치 지도자에 있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통행본 유가 경전을 참고하여 『존덕의』의 문장과 비교 분석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유가 경전과 문장이 유사하거나 의미가 상통하는 부분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존덕의』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유가계열학파의 저작임이 분명하며, 유가 덕치 사상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문헌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공맹의 사상 외에 순자나 한비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그 저작 시기를 전국시대 말기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900원
본 논문은 곽점초간(郭店楚簡) 『존덕의(尊德義)』에 담긴 덕치(德治) 사상을 고찰하고 이를 통해 유가 덕치 사상의 전승 및 현대적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덕치의 전제 조건, 덕치의 방법, 덕치의 구현 양상의 순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존덕의(尊德義)』에 담긴 덕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덕치를 위해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 수양을 통해 덕을 갖추고 천명을 깨달은 경지에 이른 위정자의 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덕치 수행을 위한 방법으로 솔선하는 위정자의 덕행에 의한 교화를 주장하였으며, 예악을 통한 감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제시하였다. 셋째, 인간 내면의 인륜과 도덕을 회복시키고, 민생의 안정과 화합을 이루는 것이 덕치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유가의 이상임을 설파하였다. “덕과 의를 높이고 백성의 인륜을 밝혀야 군자라 할 수 있다”라는 첫 문장의 선언처럼 『존덕의』는 덕에 의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위정자의 도덕심과 솔선하는 덕행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정치 지도자에 있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통행본 유가 경전을 참고하여 『존덕의』의 문장과 비교 분석을 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유가 경전과 문장이 유사하거나 의미가 상통하는 부분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존덕의』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유가계열학파의 저작임이 분명하며, 유가 덕치 사상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문헌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편 공맹의 사상 외에 순자나 한비자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그 저작 시기를 전국시대 말기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governance by virtue contained in the Guodian bamboo manuscript ZundeYi (尊德義), and through this, clarify the transmission of Confucian thoughts on and their modern significance. To achieve this, the discussion unfold in the following order: the prerequisites of the governance by virtue, the methods of the governance by virtue, and the forms of its implementation. In summary, the key points are as follows: First, in order to achieve the governance by virtue, it is essential that politics based on the people, self-cultivation to attain the virtue of the middle path. Second, the method for implementing the governance by virtue is through the ruler’s exemplary virtuous conduct, edify the people, with influence through rites and music (ye-ak) being the most effective means. Third, the Confucian ideal pursued through the governance by virtue is the restoration of human morality and ethics, as well as the achievement of stability and harmony in the people’s lives. As stated in the first sentence, “A monarch is one who respects virtue and righteousness and can enlighten the people‘s morality,” ZundeYi advocates for politics based on virtue and righteousness. It emphasizes that for this, the ruler’s moral heart and exemplary virtuous conduct must come first. This is a virtue that is even more urgently required in contemporary political leaders who advocate for the rule of law. This study compared and analyzed the text of ZundeYi with classical Confucian scriptures such as the Analects, Mencius, and Book of Rites. Through this comparison, several passages were found to be either similar or closely related in meaning to those in the existing Confucian texts. This suggests that ZundeYi is indeed a work from a Confucian school that inherits the thoughts of Confucius, and it highlights ZundeYi as an important text that continues the lineage of Confucian the governance by virtue thought. On the other hand, in addition to the ideas of Confucius and Mencius, it contains content that can be inferr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Xunzi or Han Fei Tzu, so it can be estimated that the writing period is at the end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연암 박지원의 세계관에 나타난 역사관 - 『열하일기』를 중심으로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38호 2020.06 pp.51-83
...사상에 영향을 받아 지구설과 지전설을 옹호했으며, 역사의 식에 있어 홍대용의 화이론을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켜 북학을 주장하였다. 즉, 홍대용이 북학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면, 박지원은 이를 바탕으로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을 제기하였으며, 박 제가는 박지원의 북학론을 보다 구체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박지원은 북학의 당위성뿐만 아니라, 이에 더 나아가 청 왕조 정통론 을 주장하였다. 비록 이민족이 중화를 지배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淸)의 문화 는 명(明)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박지원의 문화에 대한 입 장은 “은의 관과 주의 면류관이 각각 때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하필 청나라 사람의 홍모만 의심하겠는가?”라고 한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한 문화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견지한 것이라 하겠다.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500원
이 논문은 ‘연암 박지원의 세계관에 나타난 역사의식’을 『열하일기』를 중심 으로 분석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박지원은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그는 홍대용의 자연과학사상에 영향을 받아 지구설과 지전설을 옹호했으며, 역사의 식에 있어 홍대용의 화이론을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켜 북학을 주장하였다. 즉, 홍대용이 북학의 당위성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면, 박지원은 이를 바탕으로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을 제기하였으며, 박 제가는 박지원의 북학론을 보다 구체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박지원은 북학의 당위성뿐만 아니라, 이에 더 나아가 청 왕조 정통론 을 주장하였다. 비록 이민족이 중화를 지배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淸)의 문화 는 명(明)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박지원의 문화에 대한 입 장은 “은의 관과 주의 면류관이 각각 때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하필 청나라 사람의 홍모만 의심하겠는가?”라고 한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한 문화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견지한 것이라 하겠다.
This article is to analyze ‘historical consciousness shown from the world view of Yeonam Park Jiwon,’ focusing on Yeolhailgi. As is generally known, Park Jiwon was one of Bukhak School; Hong Daeyong’s idea of natural science influenced him that he supported earth theory and heliocentric theory and; he both accepted and developed Hong Daeyong’s Sino-Barbarian theory in terms of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en argued Bukhak. In other words, Hong Daeyong established theoretical grounds for imperativeness of Bukhak; Park Jiwon, based on those grounds, suggested Bukhak that ‘advanced culture of Qing should be embraced’ and; Park Jega developed Park Jiwon’s Bukhak more specifically and systematically. Park Jiwon particularly argued not only the imperativeness of Bukhak but further, legitimism of Qing Dynasty. He viewed that, though the China region was ruled by barbarian, culture of Qing still inherited that of Ming. However, Park Jiwon’s stance toward culture can be assumed with his saying “Royal crowns of Yin and Zhou followed their systems of the time respectively but why should we only doubt Qing people’s wild-goose feather?”, which implies he had a point of autonomy and independence of culture based on cultural relativism.
『중용』의 귀신론에 대한 한⋅중⋅일 비교 연구 : 주희, 왕부지, 이토 진사이, 정약용을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3호 2022.12 pp.87-112
...영향을 주었다. 주희의 귀신론(鬼神論)은 ‘이기지양능(二氣之良能)’⋅‘조화지적(造化之迹)’과 제사(祭祀)라는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개념을 그의 리기론(理氣論)과 ‘도덕성 불균형의 해소’라는 측면으로 해소하고 있다. 주희에 의해 적립된 귀신(鬼神)의 개념은 후대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부지(王夫之)는 기철학(氣哲學)의 입장에서 주희의 귀신론을 비판하고 있다. 왕부지의 입장은 기(氣)의 측면에서 귀신(鬼神)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주희와 같이 죽은 후에 기(氣)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또 진사이(伊藤仁齋)는 귀신(鬼神)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귀신(鬼神)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귀신(鬼神)을 상제(上帝)와 연결시키며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400원
『중용(中庸)』의 16장은 일명 「귀신장(鬼神章)」이라고 불린다. 유학에서 오랫동안 애매한 영역으로 방치되었던 ‘귀신(鬼神)’이라는 개념은 송나라에 들어와 리(理)와 기(氣)라는 범주로 수렴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며 그 의미에 대한 깊은 탐구가 시작된다. 특히, 주희(朱熹)의 귀신(鬼神)에 대한 논의는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희의 귀신론(鬼神論)은 ‘이기지양능(二氣之良能)’⋅‘조화지적(造化之迹)’과 제사(祭祀)라는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개념을 그의 리기론(理氣論)과 ‘도덕성 불균형의 해소’라는 측면으로 해소하고 있다. 주희에 의해 적립된 귀신(鬼神)의 개념은 후대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왕부지(王夫之)는 기철학(氣哲學)의 입장에서 주희의 귀신론을 비판하고 있다. 왕부지의 입장은 기(氣)의 측면에서 귀신(鬼神)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주희와 같이 죽은 후에 기(氣)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또 진사이(伊藤仁齋)는 귀신(鬼神)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일 뿐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귀신(鬼神)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귀신(鬼神)을 상제(上帝)와 연결시키며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The chapter 16 of Jungyong called “Guisin-jang”. The meaning of ‘guisin’, which was leaved alone so long time, was studied so deep in period of Song and it could contain in a section of Li(理) and Gi(氣). Especially, a discussion on the guisin of Zhu-xi influences to the future generation scholars. The Guisin-non(鬼神論) of Zhu-xi break off the contradictory concept 'IgiJiYangNeong(二氣之良能) ․Johwajijug(造化之跡)' and Jesa(祭祀) by his LiGinon(理氣論) and 'clearing up the morality unbalace'. The meaning of Guisin saved up by Zhu-xi effect the future generation scholars. Wang Fu-zhi criticize his Guisin-non in a point of view GichulHak(氣哲學). Wang Fu-zhi understand the Guisin in a position of Gi(氣), so he couldn't accept a Zhi-xi's contention that the extinction of Gi after die. Ito-Jinsai criticized that the Guisin just confused people and he denied the existence of the Guisin. Jeong Yak-yong accept the Guisin for the core of his thought connecting with Sangje(上帝).
16∼17세기 밀양⋅김해의 도학 전통과 남명 조식 KCI 등재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9호 2025.12 pp.87-117
...영향을 받은 밀양과 김해의 학자들은 정구의 관점에서 두 선생을 이해했다. 정인홍이 자행했다는 전횡의 원인을 조식의 학풍에까지 소급 문책하던 시절에, 이들은 이황의 철학과 학문 방법을 기본 사상으로 수용하면서, 조식의 탁월한 정신에도 애착을 가졌다. 그 결과 온건한 일상적 실천을 도모하면서도 굳센 소신을 버리지 않으려 애썼으며, 내면의 빛을 감추고 점진적으로 생활을 개선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200원
본고는 조식의 학문이 처음 형성되고 후인들의 평가와 필요에 의해 변용되는 과정을 살핀다. 조식이 학문적 지향을 바꾼 뒤 畏友로 존중한 신계성이 도학의 학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추측된다. 이들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으며, 단호하게 사욕을 척결하려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조식의 문인 김태을이 이황에게도 배우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황과 조식의 학문과 교육 방법에는 상대적인 장단점이 있다는 인식이 벌써 형성됐던 것인데, 후일 밀양의 학자들이 정구의 문인이 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보인다. 이황과 조식의 사후, 학계가 재편되었다. 이황을 이론의 강론에 주력한 文學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완전한 도학자는 조식이라는 견해를 가졌던 정인홍과, 이황을 道學의 正脈으로 여기고 조식을 탁월한 통찰력과 압도하는 용기를 지닌 高風으로 평가한 정구가 대립했다. 정구의 영향을 받은 밀양과 김해의 학자들은 정구의 관점에서 두 선생을 이해했다. 정인홍이 자행했다는 전횡의 원인을 조식의 학풍에까지 소급 문책하던 시절에, 이들은 이황의 철학과 학문 방법을 기본 사상으로 수용하면서, 조식의 탁월한 정신에도 애착을 가졌다. 그 결과 온건한 일상적 실천을 도모하면서도 굳센 소신을 버리지 않으려 애썼으며, 내면의 빛을 감추고 점진적으로 생활을 개선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This paper examines how the philosophy of Cho Sik was formed and transformed according to the evaluation and needs of later generations. It is presumed that after he changed his academic orientation, Shin Gyeseong, whom he highly regarded as a respected friend, helped him greatly in his study of Confucian Taoism. The two men had something in common: they stayed up all night, focused on maintaining a clear mind, and bravely tried to overcome their selfish desires. However, Kim Taeeul, a disciple who had accepted Cho Sik’s teachings, also had hope of learning from Yi Hwang. The perception that the two teachers’ learning and teaching methods had relative strengths and weaknesses had already been formed. This would have created an environment which later scholars of this region would become Jeong Gu’s disciples. After Yi Hwang and Cho Sik’s death, the academic world was reorganized. This local scholars who became Jeong Gu’s disciples understood the two teachers’ academic styles from their teacher’s perspective. At a time when discontent with Jeong Inhong’s tyranny was traced back to Cho Sik’s academic style and teaching methods, they accepted Yi Hwang’s thought and method as the basic philosophy, but also showed a strong attachment Cho Sik’s outstanding spirit. As a result, they tried to maintain their strong convictions while pursuing moderate daily practices. They hid the spiritual light they had accumulated within themselves and attempted to improve lifestyle in a moderate and gradual way.
16세기 성리학자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과 「천명도설(天命圖說)」 연구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39호 2020.12 pp.71-101
...사상을 이황과 비교해 보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지운이 그의 동생 정지림( )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던 「천명도설( )」은 퇴계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7,200원
본 논문은 추만( ) 정지운( )의 「천명도설( )」이 어떠한 내력 을 지녔으며, 「천명도설」에는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황과 비교해 볼 때, 성리학적인 내용이 좀 덜하다는 느낌이 든다. 정지운은 선조들이 고양( ,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으로 이주해 오면서 그곳에 살았고, 죽기 전에 고향인 고양의 강위에서 밭을 갈기를 희망했던 53 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정지운은 사화기( )를 거쳤다. 정 지운이 조용했던 삶이 그의 「천명도설」이 후에 다른 사람의 저술로까지 여겨 지는 부침을 겪기도 하였다. 정지운의 「천명도설」의 ‘천명( )’이라는 말은 『중용( )』 1장에서 따온 것으로 천명( )과 인성( )이 같아짐을 나타낸 것이다. 즉, 하늘의 이치가 인간의 이치임을 말한 것이다. 하늘의 운행은 원( )⋅형( )⋅이( )⋅정( )이 라고 하는 4가지의 덕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덕( )을 바탕으로 하여 리기( )가 나뉘고 음양( )과 오행( )이 나뉘게 된다. 정지운은 사람과 사물이 다르게 되는 것은 기( )의 정( )⋅통( )⋅명( )⋅편 ( )⋅색( )⋅암( )의 다양한 차이점으로 보고 있다. 성( )과 정( )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단( )과 칠정( )의 문제를 끌어들여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 나 이러한 인간의 사단( )⋅칠정( )은 하늘의 사덕( )⋅오행( )과 합치된다고 한다. 정지운은 심( )이 발( )하기 전에는 선( )⋅악( )의 나뉨이 없다가 발( ) 한 이후에 선( )⋅악( )으로 나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심( )이 발( )하게 되는 ‘의지 ’가 중요하게 된다. 인간은 바름 을 받아 태어났지만 기( ) 에는 청( )⋅탁( )⋅수( )⋅박( )의 차이에 따라 상지( )⋅중인( )⋅하 우( )로 나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 )에 빠지게 되어 수양( )할 필요가 없어진다. 정지운은 모든 것은 자질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한다. 또, 수양의 방법으로 존 양공부( ), 성찰공부( ), 경공부( )를 말한다. 그러나 이 부 분 역시 초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정지운의 사상을 이황과 비교해 보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지운이 그의 동생 정지림( )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던 「천명도설( )」은 퇴계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This paper examined the history of “Explanation of the Diagram of Heavenly Mandate(「」)” what it contained. However, compared to the basic level of Yi Hwang( ), it did not surpass the basic level of Yi Hwang( ). He died at the age of 53, when his ancestors moved to Goyang( ), where they lived and hoped to plow the fields on the river of his hometown, Goyang ( ) before he died. These quacks have gone through. A quiet life suffered from the ups and downs of his life, which were later regarded as the writings of others. Jeong Ji-Woon( )'s ‘Tianming( )’ is derived from “Explanation of the Diagram of Heavenly Mandate(「」)” The Mean( ) chapter 1, which indicates that ‘Tianming( )’ is similar to ‘Renxing( )’. There are four different types of operation: Yian( )⋅Heng( )⋅Li( )⋅zhen( ). Based on this example, the pub is divided into two parts, and the pub is divided into two parts. Jeong Ji-Woon( ) said, “Before the dawn of Xiuyang( ), there was no Goyang( ), but after the fall of Xiuyang( ), it was divided into Shan ( ) and E( ).” Then, ‘Yi( )’ becomes important. Human beings were born by the name of the deceased, but in the name of the deceased, they were divided into two parts according to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However, this logic eliminates the need to be disconcerted by the determinism that all human beings are set. But it's not all because it's feng. In addition, it refers to Cunyanggongfa( ), Shengchagongfa( ), and Jinggongfa( ). However, this part has not exceeded the elementary level either. Jeong Ji-Woon ( )'s ideas remained rudimentary compared to Yi Hwang( ).
牛溪 思想의 影響 - 門人 重峰, 殷峰의 義理精神을 中心으로
우계문화재단 우계문화재단 단행본 성우계사상연구논총(증보판) 1991.05 pp.308-330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6,000원
魯西 尹宣擧의 삶과 학문 - ‘悔過自新’과 ‘喚醒實心’을 중심으로 노서 윤선거의 삶과 학문 - ‘회과자신’과 ‘환성실심’을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1-33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노서 윤선거의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 연원, 학문 경향, 학문과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is aimed to comprehensively analyze the origin, tendency, features, influence to the next generation and etc of Noh-Seo Yoon Seon Geo’s learning and idea through his life, who was a scholar late in Joseon era. He was a grandson of U-Gye Seong Hon in his maternal root, so that he succeeded the learning tradition of Seong Hon’s family and Yul-Gok Lee Yee and then collected such learning tradition into himself from them. He tended to value practice more than theory. He showed the attitude that there had not been a theoretical investigation in Sung Confucianism and only action had remained since Jeong Ju (程朱: a scholar in Song Dynasty, China). On the other hand, he succeeded the governing style learning character focused on ‘ByeonTong (變通: working with adaptability)’ from Yul Gok’s school. It is one of the features of his learning that he searched out the principle of change being infatuated with “the Book of Change”. He put the words ‘SilSim (實心: sincerity)’ in his mind as the base of his idea to criticize the learning tendency and scholars’ styles of his times and show his sharp criticism to the Confucian scholars who were full of falsehood and affectation. His idea of ‘SilSim’ linked to the scholars rooted to Yangming Confucianism and the scholars who advocated independent translation of Confucian classics as well both personally and academically. He should be given his own position as it was in the history of idea late in Joseon era.
명재 윤증의 교육사상 고찰 - 도설(圖說)과 독서법 분석을 중심으로 -
[NRF 연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Vol.61 2022.11 pp.27-52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명재는 <초학획일지도>와 <위학지방도>의 두 도표를 통해 초학자들을 위한 교육기조와 교육 과정을 제시하였다. 명재는 이 두 도표에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지신(持身), 독서, 응사(應事), 접물(接物)의 네 가지를 참되게 실천하여 초학자들이 참된선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명재는 초학자에게 입지(立志)로 시작하여무실(務實)로 성취하는 공부의 과정을 지경(持敬)을 중심으로 제시하면서, 존덕성(尊德性)을 중심으로 한 도문학(道問學)의 동시에 추구하도록 교육하였다. 명재의교육 사상은 우계의 영향을 받은 가학의 교육 전통과 기호학파로서 전수받은 율곡의 사상, 그리고 퇴계 수양론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교육 과정에 있어서는 소학, 사서(四書), 오경, 근사록, 주자가례, 심경, 이정전서, 주자어류, 사서(史書)의 순서로 정밀하게 읽고 반드시 이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명재가 제시한 초학자를 위한 독서의 순서는 율곡과 우계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며, 서원에서의 독서 순서는 퇴계가 제시한 것을 차용하였다. 그리고 명재는 사계, 우암처럼 가례를 별도로 강조하지 않는다. 명재는 논리적 측면에서는 기호학파로서 율곡의 학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수양에 있어서는 퇴계 심학을 수용하여 통섭적으로 성리학을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퇴계의 심학을 수용한 명재는 교육에 있어 경(敬)을 강조하면서, 동시(動時)와 정시(靜時)를 경으로 관통하여 심신을 엄숙히 하고 독서를 정밀히 하여 공부 내용을 체인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율곡 성리설과 퇴계 수양론의 융합적 수용으로 명재는 성리학을 인간학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교육하였다.
Myungjae presented educational methods and educational directions for students at the first stage through two diagrams. In these two charts, Myungjae faithfully practiced four things from dawn to dusk: "Rightening Body," "Reading," "Handling Work," and "Meeting People", so that young students can become true intellectuals. In addition, Myungjae presented young students with a process of study that started with "setting goals" and achieved with "struggling with reality." And Myungjae asked young students to pursue morality and conduct academic research at the same time. Myungjae's educational ideas were formed under the influence of Ugye, Yulgok, and Toegeye. The curriculum presented by Myungjae was presented in the order of Sohak, Four Confucian Classics, Five Classes of Confucianism, Record for Reflection, Master Chu's Family Rituals, and Classic of the Mind-and-Heart. Myungjae stressed the need to read these books deeply and practice the contents of the books. The order of reading for young students presented by Myungjae also reflects the opinions of Yulgok, Ugye, and Togeye. Myungjae accepts Yulgok's theory in terms of logic. However, when it comes to cultivation, he accepts Togeye's theory. So Myungjae understood and practiced Neo-Confucianism in fusion. Myungjae, who accepted Togeye's psychology, emphasizes Gyeong(respect) in education and say that they should maintain a respectful attitude both when they are active and when they are not. Myungjae requests that the body and mind should be reverent and read deeply to experience the contents he studied on his own.
17-18세기 기호학파의 사상적 특징과 학문 영역 확대 양상
[NRF 연계]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논집 Vol.84 2025.02 pp.9-39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기호학파는 17세기 이후 율곡, 우계, 구봉의 학문을 연원으로 하는 경기⋅호서 지역 유학자들을 지칭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기호학파를 주로 율곡을 연원으로 하는 학문적⋅정치적 집단으로 지칭하였으나 기호학파의 연원은 율곡뿐만 아니라 우계와 구봉 등을 함께 설정해야 한다. 기호학파는 17세기 말 사계, 우암을 중심으로 하는 율곡 직계 학맥, 곧 우암 계열과 명재를 기점으로 분화된 우계 계열의 명재 학맥으로 분화되었다. 우암은 주자와 율곡을 따르고 사계를 이어 예치(禮治)로 정치적 이상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직(直)의 심법을 수양과 행도(行道)의 요결로 삼아 조선 중후기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진력하였다. 기호학파 내에서 17세기 말 분화된 명재 계열의 학파는 우계를 연원으로 하고 명재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다양성, 포용성, 실용성을 중시하는 명재의 학풍은 그의 문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기호학파 내에서 새로운 학문적 시도들이 싹트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시비(是非), 정사(正邪), 곡직(曲直)을 분별하고 춘추대의를 중시하는 우암 계열과 달리 명재 계열의 학문은 실심(實心), 무실(務實)을 중시하여 조선 중후기 율곡학파 내에서 새로운 학문 경향이 태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기호학파 내 명재 계열의 문인들은 주자학의 새로운 해석, 양명학의 수용, 실학의 모색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조선 후기 다양한 학문 발달을 추동하였다. 그러나 도덕성 제고에 노력하였던 우암 계열의 학문에 대하여 도덕 지상주의라는 비판이 있으나 넓게 보면 이 또한 조선 중후기 대두된 다양한 학문 경향 중 하나이고,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라는 명재 계열의 학문도 결과적으로는 어느 한 분야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사상사의 흐름에서 보면 각기 역할과 장단점이 있을 뿐 어느 한 쪽에 가치를 두어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The Giho School refers to scholars in the Gyeonggi and Hoseo regions who trace their origins to the studies of Yulgok Yi I, Ugye Seong Hon, and Gubong Song Ik-pil since the 17th century. Previous studies have mainly referred to the Giho School as an academic and political group originating from Yulgok, but the origin of the Giho School should be established not only with Yulgok but also with Ugye and Gubong. The Giho School was first established in the late 17th century with the direct lineage of Yulgok centered around Sagye Kim Jang-saeng and Uam Song Si-yeol, namely the Uam lineage. Subsequently, the Myeongjae lineage of the Ugye Seong Hon lineage, which branched off from the Giho School starting with Myeongjae Yun Jeung, restrained the Uam lineage. Uam followed the Neo-Confucianism of Zhu Xi and Yulgok and sought to achieve political ideals by continuing the studies of Sagye. He also made ‘honesty’ the core of his cultivation and practice, and endeavored to restore the morality of individuals and society in the mid-to-late Joseon Dynasty. However, after Uam, Yulgok’s direct lineage of learning revealed some limitations in implementing Yulgok’s open and realistic political thought. In the late 17th century, scholars who responded to Yulgok’s direct lineage of learning emerged within the Giho School. These scholars are the Myeongjae School, which originated from Ugye Seonghon and was established by his son Myeongjae Yun Jeung. Myeongjae inherited the family’s teachings and accepted the learnings of Yulgok, Ugye, and Toegye, while opposing the Uam School’s academic style. Myeongjae’s academic style, which emphasized diversity, inclusiveness, and practicality, influenced his students and became the driving force for new academic attempts to sprout within the Giho School. Unlike the Uam School, which distinguished right from wrong and valued justification, the Myeongjae School’s academic style emphasized learning for oneself and practice in reality, providing an opportunity for a new academic trend to emerge within the Yulgok School in the mid-to-late Joseon Dynasty. Within the Giho School, scholars of the Myeongjae lineage played a role in increasing the diversity of scholarship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rough various attempts such as new interpretations of Confucianism, acceptance of Yangmingism, and introduction of Silhak. However, there is criticism that the scholarship of the Uam lineage focused on morality, but in a broad sense, this is also one of the various academic trends that emerged in the mid-to-late Joseon Dynasty, and the scholarship of the Myeongjae lineage, which was said to be inclusive and open, ultimately failed to produce visible results in any one field, so when looking at the flow of the history of thought, each has its own role and strengths and weaknesses, and it is impossible to evaluate one side by placing value on it.
[NRF 연계] 한국유교학회 유교사상문화연구 Vol.79 2020.03 pp.31-49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특히 서인(西人) 경세가(經世家)들에게 큰 영향을 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권도론(權道論)을 검토하였다. 권도는 보편적 가치규범인 경도(經道)가 현실 상황에 맞게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임시변통의 방법이다. 공자가 처음 언급하고 맹자가 구체화하였으며 주희(朱熹)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권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권도는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자칫 경도에서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 주희가 권도란 성인(聖人)만이 실천할 수 있다고 제한을 둔 것은 그래서이며, 주희의 학문을 계승하는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대부분 권도의 행사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예외적인 것이 17세기 초반이다. 대내외적으로 다양하고 강력한 도전을 맞고 있던 그때, 이정귀․이귀․장유․최명길 등의 경세가들은 권도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국정을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본 논문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성혼이었음에 주목하고, 성혼의 권도론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성혼은 임진왜란 당시 왜와 화친하라는 명나라의 요구를 부득이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정치가의 책임윤리’라는 차원에서 권도를 따른 판단이었다. 또한, 권도의 관점에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제안하였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성혼의 권도론과 권도에 입각한 정책, 그리고 성혼의 권도론이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NRF 연계]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Vol.37 No.37 2011.06 pp.63-84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17세기의 성리학자로, 우계 성혼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가학을 통하여 우계의 학문계열에 속했고,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율곡-사계-우암계열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우계는 퇴계의 사단칠정론의 경향을 계승하였기에 윤증은 퇴계-우계-노서 계열의 학문적 역향 속에 있었다. 윤증이 퇴계의 설을 수용하지만, 율곡의 기발일도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호발설을 계승하는 퇴계학파들의 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윤증이 理의 주재성을 강조하여 도심은 리가 주도[理爲用事] 한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율곡학파의 기발일도론은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퇴계학파는 감정의 발출을 리를 중심으로 설명하여 나가고, 율곡-우계 계열은 기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사상의 전개과정에서 우계-율곡 계열의 바탕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리의 주재성을 중심으로 학자들을 배열해보면 호발설을 주장하는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가장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윤증(소론)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김창협(낙론)이 자리를 차지하고, 한원진(호론)이 자리한다 하겠다. 곧 윤증은 율곡의 이기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우계를 통하여 퇴계의 사상을 계승한 서인계 성리학자로 위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명재 윤증은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17세기의 성리학자로, 우계 성혼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가학을 통하여 우계의 학문계열에 속했고, 우암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여 율곡-사계-우암계열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우계는 퇴계의 사단칠정론의 경향을 계승하였기에 윤증은 퇴계-우계-노서 계열의 학문적 역향 속에 있었다. 윤증이 퇴계의 설을 수용하지만, 율곡의 기발일도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호발설을 계승하는 퇴계학파들의 학자들과는 차이가 있다. 윤증이 理의 주재성을 강조하여 도심은 리가 주도[理爲用事] 한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율곡학파의 기발일도론은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퇴계학파는 감정의 발출을 리를 중심으로 설명하여 나가고, 율곡-우계 계열은 기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사상의 전개과정에서 우계-율곡 계열의 바탕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리의 주재성을 중심으로 학자들을 배열해보면 호발설을 주장하는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가장 리의 주재성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윤증(소론)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김창협(낙론)이 자리를 차지하고, 한원진(호론)이 자리한다 하겠다. 곧 윤증은 율곡의 이기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우계를 통하여 퇴계의 사상을 계승한 서인계 성리학자로 위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魯西 尹宣擧의 삶과 학문 -‘悔過自新’과 ‘喚醒實心’을 중심으로-
[NRF 연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Vol.18 2008.12 pp.1-33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노서 윤선거의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 연원, 학문 경향, 학문과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NRF 연계]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 Vol.26 2002.12 pp.321-332
...영향을 미친 신유학, 특히 그 중에서 중핵을 이루는 주자학의 ‘수양론’은 개인 내면에서의 규율화, 개인적인 신체 행동의 규율화, 집단적인 혹은 사회적인 행위의 규율화와 같은 다양한 디스프린(discipline)을 하나의 체계 속에 결부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래의 수양론으로는 신유학의 수양이 갖는 복합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난제를 가능한 회피하기 위하여 필자는 프랙티스(practice)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하나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고자 한다. 사실상 프랙티스의 문제는 주자의 후계자들에 의해 ‘예’에 관한 언설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자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명재의 유학사상을 살펴보면, 명재의 사상에서 수양론의 위치는 결론적으로 디스플린의 프랙티스화를 모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로는 명재유고에 수록된 초학획일지도(初學劃一之圖)와 수정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이다. 명재는 여기에서 비록 주자학적 궤도를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 ‘숙흥(夙興)’ ‘일용(日用)’ ‘응사(應事)’ ‘접물(接物)’ 등의 항목과 ‘지경(持敬)’ ‘강학(講學)’ ‘성찰(省察)’ 등을 근거로 자신의 수양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재의 수양론에서 돋보이는 것은 퇴계나 고봉 내지는 율곡과 우계가 동시에 공유하고 있던 디스플린을 자신의 방식대로 프랙티스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조 유학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고, 디스플린의 프랙티스화에 관심이 고조되게 되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재가 보기에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의 문제 역시 정합적인 이론에 따라 작위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일상적 실천에 따라 자연스러운 연속으로 융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재의 프랙티스화로의 접근이 ‘수양’이라는 문제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학’이라고 불리는 그의 학문 또한 프랙티스를 추구한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예학’의 범주는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차후의 연구대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신유학, 특히 그 중에서 중핵을 이루는 주자학의 ‘수양론’은 개인 내면에서의 규율화, 개인적인 신체 행동의 규율화, 집단적인 혹은 사회적인 행위의 규율화와 같은 다양한 디스프린(discipline)을 하나의 체계 속에 결부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종래의 수양론으로는 신유학의 수양이 갖는 복합적인 특징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난제를 가능한 회피하기 위하여 필자는 프랙티스(practice)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하나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고자 한다. 사실상 프랙티스의 문제는 주자의 후계자들에 의해 ‘예’에 관한 언설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자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명재의 유학사상을 살펴보면, 명재의 사상에서 수양론의 위치는 결론적으로 디스플린의 프랙티스화를 모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로는 명재유고에 수록된 초학획일지도(初學劃一之圖)와 수정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이다. 명재는 여기에서 비록 주자학적 궤도를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 ‘숙흥(夙興)’ ‘일용(日用)’ ‘응사(應事)’ ‘접물(接物)’ 등의 항목과 ‘지경(持敬)’ ‘강학(講學)’ ‘성찰(省察)’ 등을 근거로 자신의 수양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재의 수양론에서 돋보이는 것은 퇴계나 고봉 내지는 율곡과 우계가 동시에 공유하고 있던 디스플린을 자신의 방식대로 프랙티스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조 유학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고, 디스플린의 프랙티스화에 관심이 고조되게 되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명재가 보기에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의 문제 역시 정합적인 이론에 따라 작위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일상적 실천에 따라 자연스러운 연속으로 융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재의 프랙티스화로의 접근이 ‘수양’이라는 문제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학’이라고 불리는 그의 학문 또한 프랙티스를 추구한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예학’의 범주는 본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차후의 연구대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선택하신 파일을 압축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