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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學에는 心學과 理學이 뒤섞여 있다. 陸王은 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理의 形而上學的특성을 제거하여 心學본체론으로 理學본체론을 대체했다. 心學본체론은 공허한 경향 때문에 淸代朱子學者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艮齋는 心性論에서 心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통해 心學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했다. 간재의 이러한 관점은 馮友蘭의 新理學과 통한다.
在朱子學中,心學與理學處在糾結狀態。陸王派片面地突顯心的地位,消解理的形上性,以心學本體論取代理學本體論。心學本體論流於空疏,被清初朱子學者所詬病。艮齋重新思考心與性的關系問題,對心學做出新的詮釋,賦予其現代意涵,並且同馮友蘭新理學有相通之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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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의 학문적 기조는 성학(性學), 그것도 존성(尊性)학이었다. 이는 심학 (心學) 또는 존심(尊心)에 대한 상대적 의미를 갖는다. 그의 태극론은 본원에 대한 탐구의 의미와 더불어 성(性)의 존귀함을 입증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 다. 즉 우주 만물의 조화의 본원(本源)으로서보다는 도덕, 인륜, 문화의 바탕 으로서의 성선(性善)과 지선(至善)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태극론에 있어서 성 이 태극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심을 태극으로 보는 관점과 상대적이다. 간재는 태극과 운동/정지의 관계를 두고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와 현상을 두 고 말하기, 작동에 주목하기와 그 기틀의 작동 원인에 주의하기 등 이해의 다 양성을 열어놓고 있다. 한말 상당수 유학자들이 “나라는 망할 지라도 도가 망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간재는 태극이 음양 동정을 일으키듯, 성이 사단 칠정으로 발동하듯 망국(亡國)의 상황에서 본원에 해당하는 성과 태극을 지켜냄으로써 언젠가 다시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을 염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심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시대정신을 창출하고 스 스로 시국을 감당하려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Ganjae's basic attitude is oriented by the school line of Yulgok, Uam. He studied human nature as the ultimate reality and venerated human nature as a basis of all good things. His meaning of studies of human nature were comparative to the studies of mind, and the venerate mind. His concept of Taichi was to use to support not only roots and springs of myriad things and the ultimate reality but also the sublimate of human nature. He understood the human nature as the ultimate reality, so that he didn't agree that human mind could be the ultimate reality. Ganjae opened the various roads to interpretation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Taichi and the yin/yang's movement/pausement, for examples, speaking to focus on the origin of the things, writing to focus on the side bank of flowing river, etc. Ganjae as a scholar in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was seemed to have a vigorous vision of recovery of the nation which could be dominated by the Tao, Taichi, The original human nature. His attitude was contrast to those of mind schools who actively create new methods and systems of governance and to participate to battles of independence from Imperial Japanese inv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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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학은 주자의 사상을 정통 성리학으로 尊崇하면서 학술 의 주류로 삼았다. 약 500년 기간 동안에 많은 名儒들을 배출하였고, 다 양한 형태로 성리학을 표현하였다. 그 중에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16세기에 퇴계와 율곡이 쌍벽을 이루었다. 그들의 성리학적 논점은 이 후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성립하 게 하였다. 이어 조선 후기 한말시기에 郭俛宇와 田艮齋사상에도 師承 의 영향을 주었는데, 곽면우는 퇴계학술 계승자이고, 전간재는 율곡학술 계승자이다. 곽면우와 전간재는 방대한 저술과 정묘한 논변을 통하여 조선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대립의 종지부를 찍었다.1) 사실 조선 성리 학의 발전은 전후의 맥락을 서로 관통하면서 논점을 계승하고 있기 때 문에 어떤 것 하나만을 독립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는 기호학파에 속한 간재가 율곡과 우계의 성리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탐구하고, 아울아울러 간재학술 사상의 주축과 핵심적인 의제를 밝혀 드러내고자 한다.
朝鮮時代(1392~1910)的儒學,以尊崇朱子思想為正統的性理學為主幹,前後發展五百餘年,名儒輩出,大放異彩。其中,朝鮮前期的性理學者,以十六世記的李退溪(名滉,1501~1571)與李栗谷(名珥, 1536~1584)為雙璧。他們的性理學論點,影響往後的性理學發展,而有嶺南學派(退溪學派)與畿湖學派(栗谷學派)的流衍。降至朝鮮後期的韓末時期(十九世紀末二十世紀初),郭俛宇(名鍾錫,1846~1919)與田艮齋(名愚,1841~1922),亦學有師承,前者宗主退溪之學,後者祖述栗谷之學,他們以龐大的著述與精微的論辯,為朝鮮的嶺南學派與畿湖學派,劃下終結的句點1))。實則,朝鮮性理學的發展,前後相貫,論點相承,不能孤立地看待。因此,本文之作,主要探究畿湖學派田艮齋如何詮釋栗谷與牛溪的性理說,並由此彰顯艮齋思想的主軸,及其關切的議題。
艮齋의 朱子ᆞ退溪ᆞ栗谷의 性理說에 대한 해석 - <雜著> 「晦ᆞ退ᆞ栗 3선생의 설에 대한 질의」를 중심으로-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5집 2013.02 pp.10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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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艮齋田愚(1841~1922)의 논문 晦ㆍ退ㆍ栗세 선생의 설에 대한 질의 에 대한 비평적 분석이다. 전우는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살았던 조선조 마지막 유학자였다. 그는 정치적 활동 보다 계화도에 은거하여 전통학 문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이 논문에서 회암 주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 사람의 학설에 대해 같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때까지 영남학파, 기호학파간의 성리설을 둘러싼 논쟁을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반면에 퇴계와 율곡의 다른 점과 특색―理氣互發說ㆍ氣發理乘一途說ㆍ心合理氣ㆍ心是氣―에 대한 분석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의 성리학설에 대한 것은 필자의 다른 논문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조하기 바란다(간재학논총 제8집, 간재학회, 2008).
This paper is the analysis on the thesis, "A Query on the theories of Zhu xi, Lee Hwang, and Lee Yi" written by Ganjae Jeon woo. Jeon woo is the last Neo-Confucian Scholar who lived from the end of Joseon dynasty to the Japanese colonial rule. He exerted oneself to the lectures on Neo-Confucianism in the Gaehwa-island of Jeonbuk-Do rather than political movements. In this paper he tried to adjust the arguments between Yeongnam school and Giho school by stressing the same points of Neo-Confucian theories of the three scholars. On the other hand, it is not thoroghly that he analized the different points and characteristics between Lee Hwang and Lee Yi, for example Li-Qi Co-issues, Qi-Fa Li-Sung is only true, Mind include Li-Qi, Mind is Qi-Essence. If readers want to get more interpretations about Jeon woo's Neo-Confucian theories, please refer my another article (Ganjaehak Nonchong vol.8, The Ganjae Study of Korea,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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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田艮齋의 理學사상을 소개한 글이다. 간재는 조선조 말엽의 대유학 자였는데, 조선시대 중요 사상은 주자학의 발양을 위주로 하였으며, 간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자학의 발전을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主理와 主氣 의 논쟁이 전개되고, 여기에서 退溪중심과 栗谷중심의 주자학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있게 된다. 본고에서 필자는 간재사상의 방향에 대한 판단을 하였는 데, 간재사상이 주자학과 율곡학에 대해 어떤 계승과 발양이 있었는가를 살펴 보았다. 즉 만일 율곡학을 발양했다면, 퇴계학과는 또 어떤 차이가 있어 이를 반대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필자는 본고에서 간재사상이 앞에서 논의 한 여러 학자들에 대한 학파의 계승여부를 분석하였고, 학파간의 찬성하지 않 은 점을 비평하였다. 본고의 주요 내용은 간재의 몇 편의 문장을 중심으로, 그 중에서 간재가 성리학에 대해 누구의 사상을 正宗으로 여겼고, 또한 어떤 사상을 주자학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보았는지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본고 에서 한편으로는 艮齋의 理學思想을 상세히 분석하고, 한편으로는 주로 간재 의 앞에서 논의한 학자들에 대한 계승과 발전 여부를 분석하였다.
本文對於田艮齋的理學思想做一介紹,田艮齋乃朝鮮朝之末的大儒,朝鮮朝主要思想以發揚朱子學為主,艮齋亦不例外。然於朱子學的發展中,於韓國有主理、主氣之爭,於是有以退溪為主、有以栗谷為主的不同朱子學詮釋。吾人此文,便是對於田艮齋思想之方向,做一判定,看他對於晦翁之學及栗谷之學,哪些是做出承繼與發揚,若發揚了栗谷學,則與退溪學又有不同而反對之。吾人本文便是分析艮齋思想中對於上述各家,是否有派系的繼承,或者也有派系上的不同意而做出批評。主要的內容以艮齋的幾篇文章為中心,於其中看出田艮齋對於性理學以何人的思想為正宗,又以哪些思想視之為錯解朱子學。吾人此文,主要對此做一闡析,一方面是闡釋艮齋之理學思想,另一方面,則主要分析艮齋對於上述各家的繼承與發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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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의뢰를 받았던 지난 5월, 필자는 저서를 집필하고 있었던 중이 라서, 곧바로 이 발표를 위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 발 표를 의뢰받기 이전에 사칠논쟁에 관하여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 은 아니다. 2008년에 李子粋語와 李星湖의 四七新編1)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李子粋語를 약 6년간에 걸쳐서 마지막 근무처인 二松学舎大学대학원 세미나 수업에서 정독한 결과의 보고이었다. 또 金農巌의 四端七情説도 읽을 기회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 발표의뢰는 갑자기 받은 것이었지만, 필자의 만년을 총괄하는 작업의 하나로서, 거 듭 공부하여 정리하라는 의미로 梁承武교수께서 필자에게 주신 啓示로 받아들였다.
去る五月に畏友梁承武教授から突然今回の学会での発表依頼が舞い込んだ。艮斎の四七論弁詮釈という題目と共に。私は大変な戸惑いを覚えた。田愚という学者の名は知っていたが、何一つ勉強していなかった。また四七論弁も大変厄介な論争というイメージが強かった。梁教授の手紙には今まで退渓学会や栗谷学会で発表されているので、四七論弁はお分かりの筈だからこの題目に決めさせていただいたという趣旨の説明があった。この認定は正確ではなかった。即座にお断りすればよかったが、一ヵ月後に大部な艮斎先生全集二冊と艮斎学論叢バックナンバー、四七論弁に関する代表的な論文数篇が送られてきた。もはやお引き受けするしか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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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1874~1957)의 한시(漢詩) 작품에 깔려 있는 ‘성찰(省察)의 삶’을 규명한 것이다. 금재 최병심의 이름은 ‘병심(秉心)’ 이고, 자(字)는 ‘경존(敬存)’이고, 호(號)는 ‘금재[欽齋]’이다. 세 이름 모두 일맥 상통하여 ‘성찰의 삶’을 표명하고 있다. 금재가 호를 하사받은 뒤 지은 간옹이 내려주신 ‘금재’명에 감사드리며[奉謝艮翁所贈欽齋銘] 라는 작품, 경박함에 대하여 투철한 반성을 가한 경박함 을 경계함[躁箴] 이라는 작품 두 편을 분석하여, 금재가 ‘거경(居敬)’과 ‘거조 (去躁)’에 치력하였음을 규명하였다. 금재의 삶을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성찰 의 삶’이었다. 금재의 한시 작품 나진선의 ‘物․勿’ 운에 차운하여[次羅鎭璇物勿韻] , 우암 옹의 ‘自警’ 시에 차운하여[次尤翁自警詩] 등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스 스로를 탄식함[自歎] , 칠월 기망에 부질없이 읊음[七月旣望謾吟] 등을 분석 하였다. 금재의 윤리적 삶은 평생을 일관한 것이었음을 규명하였고, 그는 자 신의 존재가치를 강학을 통해 구현하였음을 규명하였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병리 현상은 흔히 성찰의 부재에서 유래한 다. 금재를 귀감으로 삼아, 경건한 자세를 견지하여 욕망에 의해 경박함이 발 동하는 그 순간마다 성찰을 가함으로써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어 몸에 배이도록 함으로써 최후에는 성찰이 없어도 과오를 범 하지 않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목표로 설정한다.
本論文考察了欽齋崔秉心(1874~1957)的漢詩作品中所體現的其“省察的一生”。崔秉心名“秉心”,字“敬存”,號“欽齋”,三者都一脈相通的表明了其“省察的一生”。欽齋在得其號後寫了《奉謝艮翁所贈欽齋銘》,爲了戒驕戒躁又有《躁箴》,分析此兩文不難得知欽齋致力於“居敬”和“去躁”,而其一生亦可總結爲是“省察的一生”。本文對欽齋的漢詩作品《次羅鎭璿物勿韻》,《次尤翁自警詩》,《自歎》,《七月旣望謾吟》等進行了分析,並得出欽齋倫理性貫穿了其一生,他通過講學體現出了自身的存在價值。現實社會中存在的很多病理現象都是因爲沒有省察。欽齋以此爲鑒,用敬虔的姿態,反省輕舉妄動的每個瞬間,從而使自己不犯錯誤。通過反複此省察的過程,最終達到無需省察也不會犯錯,即“從心所欲不逾矩”的境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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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호남지역에서 활동했던 裕齋 宋基冕의 시세계를 고찰한 것이다. 세계의 고찰에 앞서, 먼저 유재의 글에 나타나는 문학에 대한 정의, 그리고 詩, 詩語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핌으로서 시 창작상의 기본 관점을 점검하였다. 유재는 표현 형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미 내용을 중요시했다. 이는 내용상 詩想의 전개가 자연스러우며, 창작의 면에 있어서는 지나친 典故의 사용, 難澁한 시어 구사 등의 폐단을 보이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문장학습에 있어 가까운 시대의 것을 학습하고 점차 윗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當代的 문화 풍토의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고는 유재의 시를 ‘强暴한 世界의 陰影과 高潔한 自我’라는 주제 아래,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유재의 시를 관통하는 기본 정신은 ‘憂時憂道’, 즉 국권을 상실한 시대의 아픔과 쇠락해 가는 斯道에 대한 우려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의 주제와 분위기가 時運과 상응한다는 전통적인 논의를 유재의 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유재의 작품에 이 같은 아픔이나 안타까움이 스며있음에도 불구하고, 표현상 그것이 과도한 정서의 노출이나 감정 과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유재의 작품에는 공허한 독백이나 자조적인 탄식으로 흐르는 작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유재의 의식에 强暴한 세계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압도되지 않는 高潔한 自我가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름에 매몰되지 않고 자아의 결연함을 보여주거나 내면의 슬픔을 정제하여 품격있는 정서로 드러내는 것은 유재 시의 장점이다. 세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고결한 자아의 영역에 한발짝 더 드리운 지점에서의 세계와 자아 간의 미묘한 긴장 관계, 여기에 평야지대의 자연지리적 특성과 관련한 이미지의 결합에서 유재시의 예술성, 서정성을 조심스레 전망할 수 있을 듯하다.
本文对19世纪末20世纪中半,生活在湖南地区的裕齋宋基冕的诗文进行了考察。在对其诗文进行考察之前,首先对裕齋文中所体现出的对于文学的定义,及对诗和诗语的见解进行了考察,验证了其诗在创作上的基本立场。比起表现的形式,裕齋更加重视诗的内容和形式。这是为了在内容上使诗想的展开更加自然,在创作的层面上避免了过多使用典故和难以理解的诗语构思。他还主张在学习文章时,应该先从近代着手,然后逐步的向古代推进。从这里我们可以看出裕齋十分强调对当代文化风俗的理解。本文将裕齋诗中“强权世界的阴影和高洁的自我”这一主题分了三个层面进行考察。由始至终贯穿在裕齋诗的根本精神是“忧时忧道”,即对丧失国权时代的痛心和对逐渐衰落的斯道的忧虑。文学作品的主题和氛围反映了该时代的状况,这一传统的论点也适用于裕齋的诗作中。值得注意的是,虽然裕齋的作品中无不渗透出如此的痛心和惋惜,但在表现形式上,他并没有过度的将这种情绪表露出来。换句话说,裕齋的作品中很少有空虚的独白和自嘲的叹息。在裕齋的意识当中,尽管是生活在强权世界的阴影之下,却更需要坚持高洁的自我,不被压倒。不沉溺于忧思,表现出自我的决然,或者整理好伤痛只表现出其高风亮节,这就是裕齋诗的优点。在黑暗世界的阴影和高洁的自我的领域中,及二者再向前一步就会面临的支点上,世界与自我间微妙的紧张关系,裕齋将此与平野地带这一特有意象结合,我们可以小心推测出这其中所表现出的裕齋诗的艺术性,抒情性。
顧齋 李炳殷의 漢詩 文學論 - 20세기 西學(新學)에 대한 儒學(舊學)의 對應과 恢復의 관점에서 -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5집 2013.02 pp.26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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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齋李炳殷(1877~1960)은 우리나라 구한말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대변혁의 전환기적 시대에 살면서, 당시의 상황을 桑田碧海와 같은 급변의 시대로 진단 하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서양문화의 신학과 자유주의에 침염되 어 가는 수렁에 빠져있었다. 서양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및 營利一邊倒의 사 상 체계는 開明, 新文明, 또 新學이란 허울 좋은 미명아래, 이전 유학의 전통 과 문화를 舊學으로 罵倒또는 破棄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 재는 미래의 언젠가는 다시 우리나라가 小中華의 나라로서 세상 만방에 명성 을 떨치게 될 것임을 예단하였다. 고재는 위와 같은 시대 인식과 진단에 근거하여, 당시 20세기 西學(新學)에 대한 儒學(舊學)의 對應과 恢復의 관점에서, 선사 간재의 심본성설에 근거한 道本文末論을 일생의 指南으로 삼아, ‘道는 根이고 源이며, 文은 그 枝流이 다.’고 주장하였다. 西學에 대한 儒學의 對應과 恢復의 詩的展開에 있어, 그는 당시 참담한 농 민의 삶을 그려낸 다수의 農民詩를 남기고 있는데, 이들 漢詩작품들은 자신의 耕讀兼行의 실천적 전개과정에서 産生된 것으로, 여타 기존의 타자화된 士大夫들의 農民詩와는 달리, 過重한 勞動과 租稅, 그리고 飢餓에 시달리고 있 는 농민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西洋新學의 沈惑性에 대한 悲歎과 자기 省察의 情緖를 深度있게 그려낸 많은 漢詩도 남기고 있다. <舊鐵鼎>에서는, 유교적 전통에서의 모든 질서와 학문체계 인 舊鐵鼎(舊學의 상징)이 그 간의 큰 공헌은 아랑곳없이 賤視되고, 그 대신 서양의 실용적이고 가벼운 솥(新學)이 貴重視되는 현실을 아이러니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으며, <탕자가>에서는 ‘이제 自由의 權柄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詩人의 외침은 당시의 西洋新學問의 沈惑性이 얼마나 酷毒했는 지를 잘 말 해 주는 동시에, 자기 성찰의 기회 또한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明道와 警戒 의 詩學을 통한 유학의 恢復이란 정서를 표출하는 다량의 한시 작품을 남기 고 있는데, <贈諸生>에서, 당시 서양의 自由字와 私心및 私利의 유입으로 인 하여 전통 유가의 孝정신이 抹殺되는 것을 목도하고, 그 聖賢의 책을 읽어 보기를 간곡하게 요청함을 통해, 유교의 복원을 기획했다. <新學>에서는, 서 양의 邪敎(新學)를 물리치는 데는 우리 유학의 도를 밝히는 것이 최선책임을 제안함을 통해, 西學(新學)에 대한 儒學의 恢復의지를 드러내었다. 위와 같은 고재의 한시 문학론은 기본적으로 주자와 간재의 도본문말론의 시학론 체계에 근간을 두는 가운데서도, 그의 시적 형상화의 전개에 있어서는 그 문학성과 사실성 및 사회성이 투철하게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농민 삶의 사실적 묘사의 시 정신, 서학 즉 신학의 침혹성에 대한 작가 의 비탄정서와 고발정신, 구학 즉 유학의 恢復을 위한 傳道와 明道의 적극적 인 시학 전개는 전통 유학의 끝 지점에 서있는 儒者로서, 또 士로서의 투철한 책임의식과 국가와 국민에 대한 救濟的召命意識과 자기 성찰의 투영적 산물 임을 명시하기에 충분하다.
Gojae Lee Byeong~eun (1877~960) who was a disciple of Ganjae Jeon Woo (1841~922)in the Jeonju region and one of the three Jaes diagnosed the revolutionary epoch~making age from the late period of Joseon to modern times as rapidly changing critical circumstances like ‘mulberry plantations changed into a sea.’ Korean society at that time was generally buried in new sciences and liberalism of Western culture and the enlightenment and thoughts of previous traditional Confucianism was converted into Western consciousness system and the words of Confucian sages were regarded as being not worth the emulation, and their manners were also regarded as not being worth the practice. But Gojae firmly believed that before the sky disappears, the enlightenment of Confucianism and scriptures of the sages would not disappear and predicted that someday in the future our country would become the little ‘Flowery Kingdom’ and achieve worldwide fame. In an effort to cope with new sciences of the West and to overcome it, he developed the literary theory of Chinese poetry. In connection with enlightenment and science theory, he set enlightenment~ first~ and~science~last theory based on his teacher Ganjae’s mind essentiality theory as his lifetime guidance and asserted that ‘enlightenment is the root and source and science is its tributary,’and left many peasant poems that described the miserable life of farmers at that time and many Chinese poems that described profoundly the emotions of lamentation about declining Confucianism. Particularly, in his Gucheoljeong he ironically described the reality at that time in which Gucheoljeong(symbol of the old learning) which was all the order and literary system in Confucian tradition was disparaged without recognizing its past contribution and instead practical and frivolous caldron (new science) was highly regarded. And in Jeungjaesaeng, he witnessed that the traditional Confucian spirit of filial duty was annihilated due to the inflow of free letters, selfish motives and selfishness of the West and attempted to restore Confucianism through sincerely requesting to read the books of Confucian sages, and in Shinhak, he suggested that it was the wisest policy to enunciate our Confucian enlightenment, i.e. the old learning, to repel the false religion (new science) of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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