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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학논총 [艮齋學論叢]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간재학회 [艮齋學會]
  • pISSN
    1975-6828
  • 간기
    연간
  • 수록기간
    1994 ~ 2014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제16집 (6건)
No
1

艮齋 田愚의 『孟子』해석의 특징 -『讀孟子』를 중심으로-

金庾坤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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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간재 성리 사상의 핵심은 유학의 본령이란 性을 근본으로 삼는데 있다는 점이다. 즉 유학은 性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으로 心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은 이단이며, 반드시 心은 性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성리 사상의 핵심 내용이다. 그는 유학에서 性을 근본으로 삼는 이유는 性은 純善한 형이상자로 無形無爲하여 가변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有形有爲한 형이하자로 有善有惡하여 惡으로 흐를 가변성이 내재되어 있는 心은 근본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有爲한 존재는 자신만을 믿고 자기 마음대로 운용하여 惡으로 빠질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근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心을 理로 여기거나 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러 성리학자들과의 心說 논변에서, 그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바로 理로서의 性의 무위성과 氣로서의 心의 유위성에 있었던 것이다. 간재의 󰡔맹자󰡕 해석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러한 자신의 성리 사상이 자신의 私見이 아니라, 이미 맹자나 주자가 말한 유학의 본령임을 입증하는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四書를 중심으로 한 경전 이해는 “유학의 본령이란 다름 아닌 性을 근본으로 삼는다.”라는 점을 확인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말 격동기에 이러한 유학의 본령을 지켜서 후세에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의 경학은 이러한 傳道者로서의 소명을 다하고자한 결과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The Key point of Gan-Jae’s thought is that the root idea of Confucianism is to lay stress on the nature. In other words, Gan-Jae maintains that the root idea of Confucianism is to lay stress on the nature, a heresy regards the mind as the most important thing, and it must follow the nature as its fundamental principle. He thinks the reason why Confucianism put emphasis on the nature is that it is perfect good, intangible and inactive thing, so there is no chance it changes into evil. He, therefore, strenuously insists that we must not regard the mind as the most important thing because it is tangible and active thing, and it also has the possibility to be evil. The logical basis of his opinion is that the nature is intangible and inactive thing, and the mind is tangible and active thing, while he was debating with people who maintained that the mind is principle or the root idea of Confucianism is to lay stress on the mind. The most important characteristic on his interpreting the Works of Mencius is that he tries to show that his main thought, that is, the mind must follow the nature as its fundamental principle, is not his personal opinion but the foundation of Confucianism that Mencius or Chu-Hsi already said. Gan-Jae’s hermeneutics of Confucian scripture is the result understanding that the root idea of Confucianism is to lay stress on the nature. He thought that he was called to pass down the path of Confucianism to future generations.

2

艮齋의 「和陶詩」에 관한 연구

劉永奉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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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0원

도학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한 간재에게 왕성한 시 창작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思無邪라고 하여 性情陶冶의 한 방편으로 중요시되었으니, 간재 역시 시를 전연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물이 문집에 남은 소량의 시다. 「화도」는 그 중의 하나다. 물론 간재는 李白을 필두로, 華西 李恒老, 牛山 安邦俊, 勉菴 崔益鉉, 尤庵 宋時烈, 金永植, 慕齋 金安國, 栗谷 李珥, 農巖 金昌協, 晦翁 朱熹, 遂翁 權尙夏, 河西 金麟厚와 같은 분들의 시를 이따금 한 편씩 차운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화도」는 양적으로 무려 6수나 된다. 마음먹고 붓을 잡은 연작임이 분명하다. 39살이 되던 1879년의 일이니, 고결한 삶을 노래한 陶潛에 대한 존경의 발로이다. Ⅲ장과 Ⅳ장에서 검토하였듯이, 첫 수를 제외한 다섯 수는 歸田園과 별반 관련 없는 도학자의 氣習이 노래되고 있다. 둘째 수를 보면, 우암이 가려 뽑은 朱子의 疏箚가 주된 소재로, 이를 顯宗에게 읽어보도록 청한 朴世彩까지 거론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四端을 밝게 알아 實踐躬行하라는 유교적인 가르침을 담았다. 넷째 수에서는 아예 송나라의 학자 蔡元定과 그의 아들 蔡沈을 백세의 스승으로 기리고 있다. 다섯째 수에서는 孔子를 필두로 朱子, 顔子, 曾子, 黃幹, 채원정 등을 두루 언급하면서 이들과 종유해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꾸렸다. 여섯째 수는 시절을 한탄하는 작품으로, 王道政治를 구현할 수 있는 현인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깃든 대표적인 연작시로 지목해볼 수 있다. 기존 시인들의 和陶詩와는 전혀 다른, 간재만의 「화도」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간재는 실제 여러 海島를 물색하기도 하고, 미리 군산도와 왕등도 등지에서 거처한 적이 있다. 그 후 1912년 9월, 간재는 72세의 나이로 繼華島에 이주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는 도잠이 실현했던 귀전원의 계승이었으니, 간재가 일찍이 「화도」를 지었던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계화도 은거의 단초를 미리 내보인 작품으로 지목된다.

Active poetry writing might be too much to expect of Ganjae who adhered to moral ways of life. However, poetry which was also referred to as samusa (literally meaning “nothing vicious thought”) was emphasized as a means of seongjeongdoya (性情陶冶), and therefore Ganjae could not avoid paying attention to poetry. Some of his poems are found in an anthology: Hwado is one of them. Sometimes, Ganjae wrote poetry imitating rhymes from one of the poems by Yi Baek and many other neo-Confucian scholars. In particular, Hwado was written into as many as six different pieces of such poetry. It was in 1879 when he was 39 years old. They are evidence of his respect for Dojam(陶潛) who wrote about how to live a virtuous life. All the pieces of poetry, except the first one, relate to gwijeonwon (literally meaning “returning to a rural idyll”) and express a neo-Confucian view of the world. These are the characteristics of Gangje’s Hwado that distinguish him clearly from other poets. In reality, Ganjae explored many islands in the sea and even stayed on a few islands including Gunsando and Wangdeungdo. He moved to Gyehwado in September 1912 at the age of 72 and spent the rest of his life on the island. This was the realization of gwijeonwon like Dojam. It was not a matter of chance that Ganjae wrote Hwado earlier. In conclusion, Hwado is a work typical of the world of Ganjae’s poetry and is thought to have foretold his retirement to Gyehwado.

3

新菴 田溶珪의 學問과 思想

金載京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4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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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이 논문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인 신암(新菴) 전용규(田溶珪)의 학문과 사상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전용규가 살던 시대는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망한 암울한 식민지 시대였다. 당시 유교 지식인들의 처세는 네 가지로 나뉜다. 무장 투쟁 등으로 일제에 저항한 경우, 일제에 적극 협력한 경우, 종교 등 제3의 길을 걸어간 경우, 마지막으로 아예 은둔하여 소극적으로 저항한 경우가 있다. 전용규는 은둔하면서 유교의 진리[道]를 지키고 강학 활동을 통해 제자들을 양성하는 길을 택했다. 이 논문의 내용은 지금 남아 있는 전용규의 문집인 신암집(新菴集上·下)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의 문집은 6·25 한국전쟁 때 다 타버리고 겨우 10분의 1정도만 남아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이나 사상 전모를 파악하기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신암집에 남아 있는 그의 생각의 흔적을 찾아 망국과 그의 은둔, 그의 학문관과 성리(性理) 사상 등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가 생각한 유교의 도(道)는 주자학(朱子學)이며, 그 주자학 가운데에서도 스승 전우(田愚)의 사상을 의미한다. 성리학자인 간재(艮齋)는 본성[性]과 마음[心]의 관계에 대해 본성이 스승이고 마음은 제자이며[性師心弟], 본성은 존귀하고 마음은 비천하다[性尊心卑]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그 당시 영남학파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는 학설과 배치된다. 그런데 전용규는 경남 의령 사람으로서 영남학파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인 간재의 학설을 고수한다. 그러면서 전용규는 식민지라는 무도(無道)한 시기가 끝이 나고 유학의 도가 다시 부흥할 날을 간절히 고대하면서 은둔의 삶을 이어간다.

This paper intends to discuss the learning and thought of Sinam Jeon Yong-kyu, a disciple of Ganjae Jeon Woo. The Joseon (now Korea) of Sinam’s day was in a state of gloom and distres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Confucian intellectuals of that time may be characterized by one of four different ways of life: armed resistance against Japan, voluntary cooperation for Japanese imperialism, pursuit of a third way (e.g., religion), and passive resistance in seclusion. Jeon Yong-kyu chose to sequester himself but took the path of defending the truth (or way) of Confucianism and nurturing disciples through teaching. This paper is based on Sinam-jip (of two volumes), a collection of Jeon’s works which survives today. Much of the collection was destroyed by fire during the Korean War, and there is now only about one-tenth of it left. Hence this paper has limits in getting the whole picture of his learning or thought. Nevertheless, the author attempts to reinterpret his life in seclusion, view of learning and ideas of human nature, in search for the traces of his thought left in Sinam-jip. The Learning of Chu Hsi is what he thought of as the way (“dao”) of Confucianism, which implies the thought of his mentor Jeon Woo. In the relationship of nature [性] and mind [心], Neo-Confucian scholar Ganjae adhered to the ideas that nature is a master and mind is a disciple [性師心弟] and that nature is noble and mind is humble[性尊心卑]. This runs counter to the argument of Yi Jin-sang, an adherent of the Yeongnam school at that time, that mind constitutes reason. It is noteworthy that Jeong Yong-kyu adhered to his mentor Gangjae’s argument, though he was within the Yeongnam school’s sphere of influence because he was born in Uiryeong, Gyeongnam. Jeon Yong-kyu spent the rest of his life in seclusion, anticipating the days that the “wayless (無道)” colonial era would come to an end and the way of Confucianism would rev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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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岡 曺塽의 學問과 思想

都民宰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7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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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0원

본 논문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危急存亡의 시대를 살았던 艮齋學派의 한 사람인 鳳岡 曺塽(1876~1945)의 학문과 사상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간재의 문인인 봉강 조상은 고향인 慶北 高靈郡의 松谷村에 隱居하면서 학문연마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봉강은 臨齋 徐贊圭와 艮齋 田愚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여, 畿湖 洛論계열의 학맥을 이어받았다. 그는 仁義禮智信의 ‘五常’과 부모와 임금과 스승을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生三事一’을 평생 강조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당시와 같은 無道한 세상에서는 아무 힘없이 세상에 나가는 것보다는 숨어서 義理를 지키고 道를 傳授하며 올바른 道를 구현할 토대를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숨어서 유학의 도를 지키고자 하는 ‘去之守舊’의 出處義理를 실천하였다. 봉강의 학문은 자기 수양을 통한 참된 인간의 완성에 그 목적을 둔 ‘爲己之學’의 실천과 ‘變化氣質’에 중심이 있었다. 이와 같이 봉강의 삶과 학문은, 亂世에 儒學의 道를 守護하고 後世에 傳授해 주려는 守道와 傳道에 그 중심이 있었다고 하겠다.

本文考察在大韓帝國末期和日本帝國主義强占的危急存亡時期的艮齋學派文人鳳岡曺塽(1876~1945)的學術思想. 鳳岡隱居在慶北高靈郡松谷村的家鄕, 爲硏究學術和培養後學獻出全部的努力. 鳳岡在臨齋徐贊圭和艮齋田愚的兩位先生門下深造, 並傳承了畿湖學派洛論系統的學脈. 他一生强調踐履仁義禮智信的‘五常’和一心一德侍奉君師父的‘生三事一’. 並且在當時無法實現正道的亂世中, 與其尙未具備打天下的力量, 不如隱遁保持道義, 傳授儒敎義理, 打下實現正道的基礎, 實踐‘去之守舊’的出處義理. 鳳岡學問的重點, 是經過自己修養, 完成‘爲己之學’和‘變化氣質’實踐之道. 因此鳳岡的生平和學問的中心, 是在亂世中維護與傳受後世儒學之道.

5

6,100원

본 논문은 논의 구조를 두 영역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구체적 설명을 토대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양명전집』의 편찬 과정에 대한 종합적 고찰과 『왕양명전집』의 비평적 문헌 이해 예시이다. 먼저 2장에서는 양명 본인이 자신의 문집 편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 후에 『왕양명전집』의 편찬 과정을 중요 판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추수익 간행의 『문록』, 전덕홍이 편정한 『양명선생문록』, 최초의 전서본인 『왕문성공전서』(38권)을 검토하고 현대에 와서 1992년에 吳光 등이 編訂한 『왕양명전집』, 이를 새롭게 증보 편정하여 2010년 12월에 출판한 신편본 『왕양명전집』을 검토하였다. 이를 토대로 3장에서는 비평적 문헌 이해와 관련하여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첫째, “50세에 비로소 치양지설을 제창했다”는 사례는 기록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부각하였다. 2. “천천문답은 기록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사례는 유사한 기록 간의 비교를 통하여 확실한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3. “21세에 양명이 格竹을 하다”는 사례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하여 기존 내용을 새롭게 읽어가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本论文的结构可以分成为两个部分,即先调查《王阳明全集》版本成立过程,次谈关于《王阳明全集》的文献理解。可以说本论文的叙述策略是,先论具体对象,后谈理论模式。在第二章,先讨论王阳明本人对自己《文集》编撰的基本立场,然后从主要《全集》版本,调查《王阳明全集》整个编撰过程:第一,邹守益刊行的《文录》;第二,钱德洪编订的《王阳明先生文录》;第三,最初全书本《王文成公全书》(38卷);第四,吴光等编订的《王阳明全集》(1992年);第五,新编本《王阳明全集》(2010年 12月)。在第三章,根据版本研究的结果,进行文献理解的基本态度,主要是以三个主题为主:第一,关于“五十岁提倡良知”说的检讨,从此要突出研究者坚持怀疑记录的心态;第二,关于“天泉问答”记录的相同相异性的调查,从此要强调研究者须用对照文献记录的方法;第三,关于“阳明二十一岁格竹故事”的真实性,从此要主张研究者活用新的资料,扩大理解的视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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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阜 國際孔子文化節과 濟南 儒學學術機構의 유학부흥운동과 미래전망

梁承武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13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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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0원

개혁개방과 동시, 1978년 10월, 山東大에서 개최한〈文科理論研討會>이후, 2011년까지 중국 학계는 모두 464차 학술회의 개최와 21,892편의 논문 발표를 통하여 孔子를 비롯한 역대유학으로부터 당대유학과 현실사회 등의 제반 문제에 대한 심층 토론과 평가를 통하여 탁월한 학문성과를 이룩하고, 수많은 유학 연구기구와 학술단체가 설립되었다. 1980년대를 시점으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경과하면서 중국 학술문화계에 성행한 이른바 ‘文化熱’과 ‘儒學熱’, ‘國學熱’은 개방적인 상황에서 유학부흥운동은 활발히 전개되는 전기를 마련한다. 이후 중국의 유학연구기구와 학술단체들은 전통문화와 유가문화의 수용을 모색하고, 유가문화를 주류문화로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2012년 1월, 孔子銅像을 天安門 광장 우측의 國家博物館 북향 정문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인 조처는 각종 여론의 압력으로 설치 100일 만에 박물관 내부로 이전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중국유가들도 유학부흥운동이 일조일석에 중국 현실사회를 지도하는 이념이 되어 유가사회로 변화하는 기적이 일어 날수 없다는 현실을 공감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랜 시간과 거대한 노력을 투입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종종의 한계와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 30여 년간 유학부흥의 기점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부단한 학술문화교류를 전개하여 괄목할 성과를 이룩한 산동지역 유학부흥운동의 빛나는 성취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필자는 2010년과 20111년간 두 차례〈世界儒學大會〉에서 曲阜의 國際孔子文化節과 濟南의 儒學學術機構의 유학부흥운동과 미래전망이란 주제발표를 하였다. 이제 두 편의 발표를 한편으로 정리 보완하여 산동지역의 유학부흥운동의 규모와 내용을 살펴보고, 그 미래를 전망하여 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먼저 曲阜지역에서 전개된 유학부흥운동의 상징적 활동인 國際孔子文化節과 世界儒學大會, 그리고 曲阜師範大學ㆍ孔子硏究院ㆍ尼山聖源書院 등의 국내외 유학사상 학술활동과 유가문화 교류활동을 통하여 曲阜의 유학부흥운동의 규모와 내용을 논의하여 보고자 한다. 이어서 濟南지역의 유학부흥운동에 대해서는 中國孔子基金會ㆍ山東大學ㆍ山東師範大學ㆍ山東省社會科學院ㆍ尼山世界文明論壇 등의 국내외 유학사상 연구활동과 유가문화 전파활동의 규모와 내용을 논의하여 보도록 한다. 끝으로 주최기관과 학술기구의 유학부흥활동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되, 다만 향후과제와 미래전망에 대한 필자 개인 견해를 제시함으로서 관련 학술기관에 참고 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산동지역의 그간 이러한 유학사상과 유가문화를 연구하고 선양하는 유학부흥운동의 노력은 중국 각 지역으로 확산되고,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어 21세기에 서로 다른 문명 간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서 인류평화와 세계문명의 발전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중국 유학부흥운동의 토론 기회를 통하여 한국유학의 미래발전 방향을 추구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改革開放以來,1978年10月,在山東大學召開<文科理論硏討會>以後,從1970年代到2011年中國學術界, 共主辦464次學術硏討會和發表21,892篇論文, 對孔子和歷代儒學以及當代儒學ㆍ現實社會等的諸般問題開展了深入討論和評價,取得了卓越的成就,並成立了不少的儒學硏究機構和學術團體.從20世紀1978年開始到21世紀2000年間, 在中國學術界盛行的所謂文化熱ㆍ儒學熱ㆍ國學熱,對傳統文化和儒家思想形成了廣泛又開放的潮流中,造成了開展儒學復興運動的轉機.之後中國儒學硏究機構和學術團體,追求傳統文化和儒家文化的包容,爲恢復以儒家文化成爲主流文化的努力,到2012年,孔子靑銅塑像在北京天安門廣場東側中國國家博物館北門廣場落成.不過這種象徵性的擧措,由於各種輿論的壓力,終於在剛落成100天後遷入國家博物館雕塑園中.當代中國的儒家也没有人會認爲所謂儒學復興的歷史性ㆍ時代性的大課題,決不可能在一朝一夕之内成爲中國社會的指導理念而變成儒家文化社會的奇蹟.这是需要投入长久的时间和巨大的努力才有可能完成的. 但是過去30多年間, 在各種限制和艱難的條件中, 堅持儒學復興起點的使命, 山東地區儒學復興運動持續不斷地開展, 取得了卓越的成就, 表示熱烈的支持. 筆者在2010年和2011年間〈第3~4屆世界儒學大會〉上, 兩次發表了以曲阜國際孔子文化節和濟南儒學學術機構團體的儒學復興活動與未來展望爲主題報告. 本文現將兩篇報告補充整理出一篇文章, 重新探討山東地區的儒學復興活動的規模和內容, 並展望與日俱增轉型的儒學復興活動的未來方向. 本文首先經過曲阜地區開展出儒學的象徵性活動, 卽國際孔子文化節和世界儒學大會ㆍ孔子硏究院以及曲阜師範大學ㆍ尼山聖源書院主辦的國內外儒學學術活動以及儒家文化交流活動,來探討曲阜地區儒學復興活動的規模和內容. 接着通過濟南地區的中國孔子基金會ㆍ山東大學ㆍ山東師範大學ㆍ山東省社會科學院ㆍ尼山世界文明論壇國內外儒學學術活動以及儒家文化推廣活動,來探討濟南地區儒學復興活動的規模和內容. 最後進行分析曲阜和濟南地區的儒學學術機構和硏究團體的儒學復興活動, 但筆者提出往後課題和未來展望的個人見解, 給予有關學術機構和硏究團體提供做爲參考資料. 希望山東地區的這種硏究儒學思想和發揚儒家文化的儒學復興活動, 將擴散到中國各地, 又傳播到世界各國, 經過21世紀不同文明之間的對話和疏通, 期待達成人類和平和世界文明的發展. 並藉著探討中國儒學復興運動的機會, 期盼尋求韓國儒學未來發展方向的機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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