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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구한말 지식인의 열정과 좌절을 대표하는 한 유학자로서 간재 전우의 사상을 조선조 기호학계의 흐름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특히 농암 김 창협 이래 낙학계열이라는 공통분모와 그러한 전통을 이어가던 간재였지만, 그 출발점인 농암의 견해에 대해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보여주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동조이곡(同調異曲)’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 속 의향[意]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성의에 대한 해석에서 농암은 도덕적 본심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우리 마음이 조금의 속 임도 없이 성실해진다면 악도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선악의 분기 점으로 간주된 기의 선천적 제약마저도 어느 정도 넘어설 여지를 남기고 있 는 것이다. 반면에 간재는 상황에 따른 끊임없는 인간의 수양노력 그 자체에 의미를 둔 것으로 인간의 마음 자체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토로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본성을 염두에 둔 마음의 도덕화를 기획하려는 간재의 지속적 노력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조선성리학계의 화두였던 사단칠정설을 농암은 퇴계와 율곡의 ‘절충’ 적 입장에서 기호계열의 새로운 방향성을 선도했다. 농암은 칠정과 구분되는 사단의 순선한 도덕적 심리상태를 확보하기 칠정과 사단의 동질화에 회의적 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간재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본성이 외물에 감응함 으로써 말미암기 때문에 기의 발현이나 理의 발현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하여 주장한다. 도덕적 마음의 역할과 확충을 강조한 농암의 견해에 대해 본성을 강조해야 된다는 간재의 비평은 간재 당시에 마음[心]을 강조하던 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근거로 자리잡는다. 낙학계열의 흐름을 선도했던 농암은 노론계의 분화와 갈등양상을 개방적 시선에서 포용하여 보다 나은 새로운 조선사회를 구현하려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에 국가의 존립기반마저 해체된 간재의 시대는 달랐다. 당 시 지식인들은 일제의 무력침탈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었고,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서구식 문명이 새롭게 이식되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급변하는 절명적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본성을 염두에 두고 끊임 없이 도덕적 심성의 수양을 강조하며 희망의 싹을 놓지 않으려는 간재의 간 절함이 담겨있다.
Gan-je is a representative philosophical thinker of the late Joseon period. Various studies have been conducted regarding Gan-je in the past, however in the present this investigation has broadened to cover the figures that were influential in the making of Gan-je. Such studies have largely been stimulated by an interest in the scholarly figures that preceded Gan-je and the pattern of Korean philosophy that can thus be traced. Gan-je’s writings represented a shift from the Nak-hak[洛學] that dominated past scholarly publications as he also adopted Nong-am[農巖]’s philosophy although analysing it critically. Firstly, regarding integrity to oneself and the meaning of sincerity[誠意] in one’s actions, Nong-am asserted that one’s evil desires could be overcome by one’s sincerity. On the other hand, Gan-je believed that such evil could not be totally overcome by a sincere heart. This stemmed from Gan-je’s belief in the universal idea that man quintessentially requires faith in the ability to do what is right, although Gan-je did not deny the importance of one’s desire to abide by moral guidelines. In this way, Gan-je placed great emphasis on the necessity of a belief in an absolute goodness. Secondly, Nong-am’s philosophy is characterised by an assertion in the need for man to consciously abide by moral guidelines and so, achieve a state of righteousness. Contrary to Nong-am’s belief, Gan-je’s philosophy focused on man’s instinctive knowledge of good and bad that unconsciously influences his actions. This paper does not focus on Gan-je’s philosoph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Nak-hak school of thought. This can be attributed to the differences in the contextual influences that Nong-am and Gan-je were exposed to respectively. Whereas Nong-am believed that it was possible to maintain a conscious effort towards upholding one’s morality throughout the trials and conflict that were present in his era, Gan-je believed that only an absolute righteousness defined man’s purpose for existence in the desperate and uncertain atmosphere that faced the aftermath of the fall of Joseon. Gan-je’s entire philosophy centred upon the importance of what could also be seen as a lonely and difficult struggle within one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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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艮齋는 權遂菴이 주장한 人性物性相異論과 未發時心體有善有惡論에 대하여 모두 크게 반대를 가하였다. 본문에서는 양인의 견해 차이와 그 차이 근거 의도에 대하여 약간의 설명을 시도하여 보려고 한다. 본문에서는 牟宗三의 天道의 ‘超越的인 本體로 삼고,內在的인 本性을 삼는다’는 견해를 인용하여,遂菴과 南塘이 주장한 人性物性相異論이 성립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자한다. 人性物性의 相異는 결코 단지 表現上의 차이뿐만 아니라, 本體上의 차이로서 여기에서 遂菴과 南塘이 견지한 人禽간에 價值上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를 증명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또한 艮齋가 未發時心體純善을 강력히 주장한 근거는 인간에게 善을 행할 수 있는 超越的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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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艮齋對權遂菴所主張的人性物性相異論及未發時心體有善有惡論,都大加反對。本文試圖對二人說法的不同及其所以不同的用心給出一些說明。本文引入了牟宗三先生以天道的超越而為其體,內在而為其性的說法,說明遂菴與南塘所主張的人性物性相異論是可以成立的。人性物性之異並非只是表現上的不同,而也是本體上的不同,由此也可以證成遂菴與南塘所要保住的人禽有價值上的不同之義。本文又認為,艮齋所以極力主張未發時心體純善,是為了給出人人可以為善的超越根據。
艮齋와 巍巖 李柬의 思想同異와 特徵 -人性物性同異와 未發心體善惡을 중심으로-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8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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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먼저 湖洛論爭중의 人性物性同異의 문제에 대하여 해설을 가한 후, 田艮齋의 견해를 참조하여 그 사상과 李柬과의 異同을 살펴보고, 2인의 未發心體善惡의 문제를 논 하여 보고자 한다. 艮齋와 巍巖은 朱子學의 理一 分殊표준에 의하여 人性物性의 상호 同一함을 보고, 人性物性은 모두 天命 之性에 근원하였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 天命之性의 근원으로부터 말하면, 人性ㆍ物性은 서로 동일하며, 犬性ㆍ人性의 다름은 그 氣稟의 제한으로 인하 여 표현함은 다르지만, 天命之性의 근원에 다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未發心體중에는,李柬은 心氣는 血氣와 다르기 때문에 純善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이점은 艮齋도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에서 李柬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와 田艮齋의 견해를 토론하여 2인의 견해의 同異를 비교하여 보니, 큰 방향은 서로 동일하지만, 관심 포인트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결 론에서는 韓國儒家가 이렇게 논변을 전개한 이유는 그 중 朱子學이 핵심이 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朱子의 人性物性의 관점은 孟子와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朱子는 각종 經書를 통일하기 위하여 “性”에 대해서는 一以 貫之하함으로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또한 先秦의 여러 經書중에 다른 맥락 의 典籍때문에 性의 견해도 달랐고, 韓國儒家의 쟁론이 발생하게 된 것이 다. 본문은 그 중의 주제를 구분하여 토론함에 있어서 주로 巍巖과 艮齋를 중 심으로 토론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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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文先對於湖洛論爭中的人性物性同異之問題,做一解說,然後參之以田艮 齋的見解,看其思想與李柬之間的異同. 之後談二人對於未發心體善惡的問題. 蓋田艮齋與李柬依於朱子學的理一分殊之標準,視人物性相同,認為人性物性都 根源於天命之性,故就此天命之性根源而言,人性․物性是相同的; 至於犬性, 人性之不同,是因其氣稟之所限,而表現處不同,然不可謂天命之性的根源處有 不同. 又於未發心體中,李柬認為心氣不同於血氣,而有純善之可能,而艮齋亦 相似. 故吾人此文討論李柬對此問題的見解,及田艮齋的見解,以比較二人的見 解之同異,大方向是相同,然關懷點亦有小異. 而於結論處認為,韓儒之所以有 如此的論辯,其中朱子學是關鍵,因為朱子的人物性見解不全同於孟子,故一方 面朱子為了統一各種經書,而對性一以貫之,而產生了問題;也因為在先秦各 經書中,不同的脈絡之書,對於性的見解亦不同,故造成韓儒的爭辯. 本文即就 其中的論題一一討論之,主要以李柬與艮齋為中心而做的討論.
艮齋와 南塘 韓元震의 思想同異와 特徵 - 「天命之謂性」장과 「生之謂性」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14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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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과 전우는 각각 외적의 침략에 의해 조선이 유린당하거나 멸망하는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둘 모두 지식인이면 마땅히 표출하여야만 하는 우환의식을 충분히 표현하였다. 인성과 물성에 대 한 논쟁도 어떻게 하면 인간과 국가의 존엄성을 되살릴 수 있는가라는 실천 적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는데 한원진과 전우는 왜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까? 한원진은 동물과는 구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임으로써 위기를 타개 하려고 하였다. 그는 평생 유가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과 금수의 구 분, 유교와 불교의 구분 및 중화와 이적의 분별에 주력하였는데 핵심은 역시 인간과 금수의 판별에 있었다. 나아가 명을 물리치고 중국을 지배하는 청나 라 또한 금수이며 이적으로 보았고, 이제 조선에서 의리의 꽃을 피워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물리치고 성리학적 인간의 삶의 터전을 되살려야 한 다는 강렬한 사명감을 표출하였다. 한원진은 조선의 두 이적 가운데 왜를 징벌하는 것은 한 나라 의 사적 원수를 갚는 것에 비해 청을 정벌하는 것은 천하 의 대의라고 주창하며 송시열의 뜻을 이어 북벌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강렬 한 대의명분을 지닌 한원진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주장은 결굴 중화와 이적이 같다는 말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띠기 때문에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전우가 인·물성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동론 을 주장할 당시 호학파의 가장 강력한 무기 또한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주장 은 인간과 금수 및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귀결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믿고 주장한다면 결국은 망국의 길 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전우는 역사적 전거를 들며 인간의 삶을 사느냐 금수의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는 본성의 문제가 아 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한원진 시대에 사적 원수였던 왜는 전우 시 대에 와서 복수의 대의명분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 존화양이도 명·청과 조선 과의 관계가 아닌 조선과 왜구와의 관계로 정립되었다. 청과 조선의 관계는 문화의 문제로 귀결되었지만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전우에게 실존적 문제로 다가왔다. 따라서 더욱 확고한 주체성의 정립이 절실하였는데, 전우 는 본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주체성을 정립하고 실천적 동력 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성의 존귀성을 내세웠고, 인·물성 동이 논변을 통하여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려 하였던 것이다.
韓元震與田愚, 兩人都外賊蹂躪朝鮮朝活動的學者. 面對國家存亡的危 機情況, 兩人都充分表出身爲知識分子應要表現的憂患意識. 因此討論人 物性同異問題也朝着如何回復個人及國家的尊嚴性這方向來進行的. 兩人 都同一個問題意識爲底出發, 可是爲何一個主張人性與物性是同一的, 另 一個却主張人性物性異論呢? 韓元震卽由高揚區別於禽獸的人的尊嚴性來 解決問題. 他爲了持守儒家正宗, 一生努力人獸之辨·儒彿之辨以及華夷之 辨, 其核心就在人獸之辨. 他表出强烈的使命感, 卽把滅明建淸的滿族視之 爲禽獸夷狄, 儒家正宗移到朝鮮努力開義理之華, 然後敗退淸國回復性理 學的根地爲任. 他說“南夷北虜, 皆國家讎也. 孝廟復讎之計, 乃在北而不在 南. 盖以征南一國之私讎, 而征北天下之大義也.” 而接着宋時烈主張北伐. 韓元震固守這樣大義名分爲基, 把主張人性與物性是同一的, 就意味着視 中華與夷狄爲同一的, 所以不得不反對. 當田愚主張人物性同論時, 湖學派 批判田愚的最强烈的論點也若不分人性與物性, 就意指中華與夷狄是同一 個, 結果可能走亡國之路. 針對這個批評, 田愚依歷史上典據, 主張營爲人 性生活抑營爲禽獸性生活與否, 卽不能放在本性的問題, 而放在實踐問題 看才對. 在韓元震當時私讎的倭寇, 至田愚活動的時代變成要復讎的大義 的對象, 尊華攘夷在朝鮮與明淸的關係, 而定爲朝鮮與倭寇的關係. 事實上 朝鮮與淸的關係可歸結爲文化問題, 可是大韓帝國與日本的關係對田愚而 言, 却是實存問題. 所以更要固確樹立主體性, 田愚卽相信預設本性爲至高 無上才可以挺立主體性, 確保實踐的原動力. 他站在這觀念挺立性的尊貴 性, 由人物性同異論辯確保其理論根據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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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齋崔秉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근현대까지 활약하였다. 그가 활동 하였던 시기에 큰 시련은 바로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그 시기에 특히 조선 의 국혼을 말살시켜 종국에는 內鮮一體정책을 획책하였다. 당시 뜻있는 유 학자들은 유학의 이념을 지키며 救國운동을 전개하였다. 최병심은 守道的측면에서 유학의 이념을 지키며 구국의 의지를 드러냈고, 은밀히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전달하면서 항일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전주 향교 근처 念修堂에서 후학 양성을 통해 미래를 도모하면서 학문 을 전개하였다. 본 논문은 최병심의 性理思想을 다룬 것이다. 최병심은 理氣와 心性의 개 념을 밝히면서 그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는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토대로 리기론에서는 리기의 原頭處와 發用處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아우르고자 하였다. 특히 栗谷李 珥의 氣發理乘一途說과 理通氣局說을 원용하면서 理氣能所관계를 주장하여 자신의 리기론을 확 고히 하였다. 심성론에서는 주자학의 心統性情論에 대해 ‘심’은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겸한하다[兼]’는 논지를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지를 토대로 ‘성사심제설’은 스승 田愚의 학설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당시 학자들이 성사심제를 비판하거나, 불교의 尊心경향 그리고 심과 리를 일치시켜 一理로 여기는 학계의 경향을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성리사상 속에는 국가와 사회의 올바른 규범이 상하 조화되면서 실현 되도록 하는 면이 있었다 하겠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Neo-Confucianism of Choi Byeong Sim, who actively participated in movements to improve the country’s situation from the end of the 19th to the early 20th century. On one hand, he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secretly supplying the sinews of war to the army fighting for national independence from Japanese occupation and on the other hand, he made an effort to build the country’s future by teaching younger students Confucianism. He explained the nature of LiGi(理氣) and SimSeong(心性), accounting for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as ‘those that exist as one and two at the same time’. Such explanation was based on the principle to include both at the same time without being partial. In particular, he accepted the Confucian theories of Lee I, Song Si-yeol(宋時烈) and Jeon Woo(田愚) in order to strengthen his theory of LiGi. As for the Theory of SimSeong, he consistently argued that ‘Sim(mind)’ did not superintend but ‘consolidate [兼]’ in the theory of mind’s consolidating nature and the emotions(心統性情論) in Zhuxi learning. While ‘The theory of soengsasimje’ based on such argument is considered to have succeeded the theory of Jeonwoo, who had been his teacher, he also supported ‘the theory of soengsasimje((性師心弟說)’ criticized by other scholars at that time and intended to overcome the Confucian tendency to reconcile Sim with Li. His Confucianism theory considered it as important that the right rules of the nature and community applied to the social hierarchy were harmonized and rea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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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사상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간재 사 상 자체에 대한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간재 이전의 유학사상이 간재에게 어 떻게 계승되고 해석되는지 그리고 간재의 사상이 그의 후학들에게 또 어떻게 전승되고 이해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전자는 간재의 유학 사상에 대한 철 학적․구조적 그리고 분석적 연구라면, 후자는 간재사상의 성립 배경과 후학 들에 의한 계승의 양상을 사상사적이고 지성사적인 시각에서 연구하는 일이 다. 특히 후자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개항과 국권침 탈, 일제의 식민통치, 민족분단과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엄중한 역사 현실 에서 유학 특히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전통과 사상이 어떻게 그 명맥을 유지 하며 끈끈하고 내밀하게 전승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연구이기도 하 다. 유재 송기면의 성리사상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갖 는다. 간재 이후 조선의 유학은 더 이상 생산적이고 새로운 담론체계와 이론 을 구축하지 못한 채 극복과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그렇다고 그 명맥마저 끊긴 것은 아니 었다. 간재 문인과 후학들은 한반도는 물론이거니와 멀 리 만주와 간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흩어져 간재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전파하며 살았다. 유재 역시 그런 역할을 자임했고 훌륭하게 수행했던 인물 이다. 유재는 40세 전후를 기점으로 석정 이정직 문하에서 간재 전우의 문하로 학문적 방향을 전환한 인물이다. 석정 문하에서 그는 주로 세상을 경영해 보 겠다는 적극적인 경세의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시문과 서화에 관심을 쏟았 다. 특히 석정을 종학하면서 훈도된 실학적 경향이 그의 학문과 사상에도 비 교적 강하게 드러났던 시기였다. 그에 비해 후반기의 유재는 간재를 종학하 면서 성리학으로의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裕齋 集卷2 雜著에 수록되어 있는 病中散筆이다. 病中散筆은 성리학적 문 제를 다루고 있는 유재의 유일한 저작이다. 이 글은 病中散筆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유재 성리사상의 내용과 특징 을 밝혀보려는 시론적 작업이다. 病中散筆은 그 내용이 소략하고 유재의 성리학적 관점이 상세히 제시되지 않아 그의 성리사상을 새롭게 구조화하기 는 어렵지만, 그 특징은 비교적 선명하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유재는 “性”을 핵심 개념으로 하여 간재의 性師心弟說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綜觀裕齋宋基冕的生平和學術, 可分爲兩個不同的階段: 其一, 是四十 歲以前從石亭李定稷學的時期; 其二, 是四十歲以後從艮齋田愚學的時期. 這兩個時期的區別在裕齋學術和思想的硏究和理解上不可忽略的重要因素. 在前半期, 裕齋在石亭李定稷的薰陶下對於詩文, 書畵, 醫藥, 曆算, 名物, 經世等諸多方面表示濃厚的興趣; 而在後半期, 他在艮齋田愚的勸勉和影 響下對於性理學深感興趣. 這種演變可以說是從實學到性理學的轉變. 裕齋在性理學上的成果幷不多: 今傳裕齋集卷二雜著裏蒐錄的病中 散筆是他唯一的性理學論文. 該篇論文是對裕齋性理思想的試探而已. 因此, 該文的分析和敍述圍繞 病中散筆而展開的. 病中散筆所涉及的範圍較爲廣範而深刻, 例如太 極․陰陽․理氣, 人心道心․四端七情, 未發已發, 浩然之氣等該有都有. 相比之下, 它的內容有所疏略, 觀點則不太新鮮. 由此, 將他的性理思想再 做體系化是較爲困難的. 儘管如此, 我們可以如下說: 裕齋性理思想的特點 是以“性”爲核心槪念的, 且以繼承艮齋“性師心弟說”爲目的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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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齋는 艮齋의 성리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성이 심을 主宰하는 것은 無爲, 심이 몸을 주재하는 것은 有爲라고 하였다. 심과 성이 주재한다는 것이 그 용어가 같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재는 敬으로써 한다는 것이다. 性尊心卑이기 때문에 심은 경으로서 성을 높여야 선이 발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간재의 성사심제를 계승한 것이다. 敬의 실 천으로서 독서를 하고 그로 인하여 리를 연구하여 正邪를 판단하고 부모봉양 과 처자봉양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정을 잘 이끌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존심비의 성은 천으로부터 理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같다 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오상을 모두 갖추었지만 동물은 인 또는 의 하나만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이다. 이것은 南塘보다 巍巖 과 상통하며 간재를 계승한 설이다. 또한 동물과 堯舜湯武등의 聖人의 仁義 는 大小의 차이가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반면에 인의가 있게 된 원인은 같다는 것이 고재의 주장이다.
Gojae had acceded Neo-Confucianism of Ganjae. He speaked that nature to preside mind meaned inaction and mind to preside body meaned action. Nature and mind same to preside object but it meaning differ. To preside is respect because mind should respect nature. Because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It had acceded that Ganjae to assert nature is teacher and mind is student. He should asserted reading because should study li(理) and right or wrong. And should support one's elderly parents. It is need to have money. Therefore he asserted farming. He asserted that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to same human and animal. But he asserted that human have five moral and animal have one moral. It is differ between human and animal. It is more liked Namdang’s theory than Oiam’s theory. It is to accede Ganjae’s theory. It is differ moral that ideal human is big and animal is small. He asserted that cause of moral sames ideal between human and animal.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to preside, inaction, action, human nature and animal nature
栗谷 李珥와 重峯 趙憲의 改革論 比較 - 『萬言封事』와 『東還封事』를 중심으로-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249-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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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李珥(1536~1584와 重峯趙憲(1544~1592)은 16세기 조선의 道學者이다. 道學의 실현방향은 行道와 垂敎라고 할 수 있다. 行道論은 經世論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학파의 경세론은 本末論과 體用論 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경세의 體가 되면서 本이 되는 것은 ‘修己’이며, ‘用’이자 ‘末’인 부분은 ‘安民’이다. 수신은 특히 당시 정치의 중심이던 임금에 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으며 안민은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는 구 체적인 개혁방안 속에 나타난다. 율곡과 중봉은 도학파 경세론의 본말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를 전형 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글이 율곡의『萬言封事』이며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글 이 중봉의『東還封事』이다. 『萬言封事』는 먼저 정치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일곱 가지 폐단을 제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대책을 ‘수기’와 ‘안민’으로 나누어서 개진한다. 수기적 대책을 4가지로, 안민적 대책을 5가지로 제시한 다. 『東還封事』는 擬上十六條疏,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로 구성되어 있 다. 十六條疏는 근본에 관한 것에 대해 올린 것이며, 팔조소 는 사무에 간 절할 것에 대해 올린 글이다. 십육조소 는 ‘格君論’에 기반하여 임금의 ‘수기’로부터 ‘안민’에 이르는 대책을 말하는 것이며, 팔조소 는 ‘사습(士習)’과 ‘(民風)’에 관계된 개선책을 올린 것이다. 중봉은 이 두 상소문을 통해 사회개 혁론을 ‘근본’과 ‘실효’의 방향으로 펴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봉의 개혁론은 율곡의 개혁론과 비슷하거나 율곡의 주장을 부연하거나 구체화 시킨 것이라고 본다. 율곡은 ‘실(實)’과 ‘시의(時宜)’에 중 점을 두면서 개혁론을 개진한 반면 중봉은 중국을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하면 서 개혁론을 제시한다. 여기에서는 율곡과 중봉이 1574년 같은 해에 썼던 『萬言封事』와 「東還封事」를 통해 두 개혁론을 구체적으로 비교해보고자 하였다.
栗谷李珥(1536~1584)和重峰赵宪(1544~1592)是在朝鲜活动 的16世纪的道学学者. 道学的实现方式可分为行道和垂教. 行道论可看成经世论,而道学派的经世论应从本末论和体用论的观点接 近. 构成经世论的体, 本的是‘修己’,而且构成经世论的用、末的是‘安民’. 修身是当时的国王应所具备的当头条件,而且安民出现在消灭百姓弊端的 具体改革方案内. 栗谷和重峰原封地遵从着道学派经世论的本末论。典型地反映此点的文 章就是栗谷的‘万言封事’, 同出一辙的另一篇文章是重峰的‘东还封事’. 首先 万言封事提出了国家的政治不能取得实效的七种弊端,而且为了克服此弊 端,分为‘修己’和‘安民’改进了办法。所提出的修己办法为4种,安民办法为5 种. 东还封事由拟上十六条疏, 质正官回还后先上八条疏构成. 十 六条疏是关于根本的内容, 八条疏是关于当时非常急切的一些实务的内 容. 十六条疏基于‘格君论’谈着能使国王从‘修己’做到‘安民’的对策, 八条 疏谈着能改善‘士习’和‘民风’的方案. 重峰通过此奏章,以‘根本’和‘实效’的角 度论着社会改革论. 一般说重峰的改革论类似于栗谷的改革论,或进一步阐述或具体化着栗 谷的主张. 但栗谷以‘实’和‘时宜’为重点改进了改革论,而重峰举中国为模 范事例改进着改革论。在这里具体比较栗谷和重峰在同一年(1574年)所 写的「万言封事」和「东还封事」,而研究两个人的改革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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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전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公論政治의 확립과정을 王權과 臣權의 정치권력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정치이념으로 수용된 주자학적 성리학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 성을 확보하고 사회의 질서를 안정화하는 것에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더욱이 유가의 현실정치 속에서 士를 중심으로 발현되는 공론정치는 조선왕조의 정 치구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공론 정치에 담겨져 있는 君臣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왕실의 전통성 확립은 주자학적 성리학의 토대 위에서 확립되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형성 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정치이념은 유학자(士林)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계 기가 된다. 더욱이 주자학적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공론정 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사림의 중앙정계진출을 독려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고는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왕실의 정통성과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수용된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 고 주자학적 성리학의 정치이념 속에서 발현되는 조선 성리학의 특징을 공론 의 형성과정 속에서 살펴본다. 이 과정은 조선의 정치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사림의 정치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comprehend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ppeared characteristically in the early Joseon period , through the political power relationships between royal authority and courtier authority.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ism which was embraced as a political ideology worked with features of securing the traditionalism of the Dynasty and stabilizing social order. In addition, the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re manifested through history in the middle of Confucianism politics serve as an important cause for changing the political structure of the Joseon Dynasty; such factors of change come from the political relationships between the King and Courtiers, which is contained in public opinion politics. In other words, the establishment of royal family traditionalism, a very urgent issue to be resolved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ecured based on the ideologies of Neo-Confucianism. However, the political ideology of Neo-Confucianism which emphasizes rational formation of principal agents serves as an opportunity and source of encouragement for Confucian scholars to participate in politics. Moreover, the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re based on the political ideologies of Neo-Confucianism function as a place of public opinion and a new political power which encourages the central government entrance of the ‘Sarim(士林)’. Based on such perspectives, this paper will aim to study the political ideology of Neo-Confucianism in terms of royal authority reinforcement, an ideology that has been embraced for the establishment of social order and royal family traditionalism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his process will serve as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the political meaning of ‘Sarim(士林)’, a political power that appears in the political society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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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유학사상은 ‘仁義禮智’라는 4덕목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외형적인 모습은 ‘禮’라는 차별적 질서(不同)를 기반으로 하는 경직된 관계를 형성하는 사상이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그러나 선진시대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유학사상의 내적인 모습에 調和和親의 기능을 한 ‘樂’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자를 통해서 중국역사상 예와 악이 개별적인 예와 악이 아닌 예악이라는 하나의 체계적인 개념으로 양자의 본질과 기능이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악의 기능이 부각되거나 최소한 예와 동일한 선상에서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쇠락하게 되었다. 예와 악의 기원과 개념을 통해 상관관계를 살펴보고, 이 두 개념에 대한 역사적 추정과 분석을 통해 상관관계를 통해 악의 기능이 쇠퇴 해지고 있는 원인을 추정, 분석하고자 한다. 악의 쇠락 원인을 통해, 오늘날 악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Confucian thought, which served as the pillar of Korean tradition and still has strong influence on modern society, is based on four cardinal virtues of In (Benevolence), Eui (Righteousness), Ye (Ritual), and Ji (Wisdom). However, it is not easy to dispel the prejudice that the external look of these virtues is in fact what forms the rigid relationship that is based on differentiating order (budong) called Ye. And yet, when looking back through Pre-Chin historial records, the inner look of Confucian thought has emphasized Ak (Music) that had the function of harmony and amicability. Also, throughout Chinese history, Ye and Ak were not individual Ye and Ak but existed as a systematic concept called Ye-Ak with an emphasis on their joint nature and function by way of Confucius. However, in modern society, this kind of function of Ak failed to stand out or could not maintain its position on the same level as that of Ye as it declined beyond any possibility of repair. Hence, an attempt is made in this study to look into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Ye and Ak through their respective origins and concepts, and infer and analyze the reason why the function of Ak declined through historical inferrence and analysis of these two concepts. And through the reason for the decline of Ak, we will discuss what should be the role of Ak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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