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15회 陽明學 이해를 위한 토대적 연구 : 『王陽明全集』의 편찬 과정 및 비평적 문헌 이해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109-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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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논의 구조를 두 영역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구체적 설명을 토대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양명전집』의 편찬 과정에 대한 종합적 고찰과 『왕양명전집』의 비평적 문헌 이해 예시이다. 먼저 2장에서는 양명 본인이 자신의 문집 편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 후에 『왕양명전집』의 편찬 과정을 중요 판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추수익 간행의 『문록』, 전덕홍이 편정한 『양명선생문록』, 최초의 전서본인 『왕문성공전서』(38권)을 검토하고 현대에 와서 1992년에 吳光 등이 編訂한 『왕양명전집』, 이를 새롭게 증보 편정하여 2010년 12월에 출판한 신편본 『왕양명전집』을 검토하였다. 이를 토대로 3장에서는 비평적 문헌 이해와 관련하여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첫째, “50세에 비로소 치양지설을 제창했다”는 사례는 기록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부각하였다. 2. “천천문답은 기록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사례는 유사한 기록 간의 비교를 통하여 확실한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3. “21세에 양명이 格竹을 하다”는 사례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하여 기존 내용을 새롭게 읽어가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本论文的结构可以分成为两个部分,即先调查《王阳明全集》版本成立过程,次谈关于《王阳明全集》的文献理解。可以说本论文的叙述策略是,先论具体对象,后谈理论模式。在第二章,先讨论王阳明本人对自己《文集》编撰的基本立场,然后从主要《全集》版本,调查《王阳明全集》整个编撰过程:第一,邹守益刊行的《文录》;第二,钱德洪编订的《王阳明先生文录》;第三,最初全书本《王文成公全书》(38卷);第四,吴光等编订的《王阳明全集》(1992年);第五,新编本《王阳明全集》(2010年 12月)。在第三章,根据版本研究的结果,进行文献理解的基本态度,主要是以三个主题为主:第一,关于“五十岁提倡良知”说的检讨,从此要突出研究者坚持怀疑记录的心态;第二,关于“天泉问答”记录的相同相异性的调查,从此要强调研究者须用对照文献记录的方法;第三,关于“阳明二十一岁格竹故事”的真实性,从此要主张研究者活用新的资料,扩大理解的视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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悳泉은 艮齋의 성리사상을 繼承하여 心卽理설을 주장하는 학파를 비판하면서 心卽氣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淵齋의 문인 琢窩와 논쟁을 벌인다. 탁와가 艮齋의 性尊心卑說을 비판하자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탁와는 尊卑란 천지에 해당되는 것일 뿐, 理氣心性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는『周易』의 天尊地卑에 근거하여 그렇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한 心과 性은 하나이면서 둘이기 때문에 上下尊卑로서 구분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悳泉은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은 없었지만, 心과 性을 合說과 分說로 구분하는데 分說로 본다면 尊卑로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悳泉은 茶山의 嗜好의 性을 비판한다. 天命之性을 嗜好之性이라고 할 수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전자는 純善하지만 후자는 칠정의 하나로서 兼善惡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스승의 설로서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산을 비판하였다. 반면에 茶山의 經世論의 영향을 받는데 丁田制가 바로 그러하다.
Dukchun succeeded Ganjae neo-confucianism. He criticized that mind is principle theory. He asserted that mind is energy theory. He disputed Takwa. Takwa criticized Ganjae of nature high and mind low. Dukchun defensed Ganjae of nature high and mind low. Takwa criticized that high and low apply heaven and earth. He was based Jooyuk. He not divide that nature and mind is high and low. Dukchun asserted to divide. Dukchun criticized a taste nature of Dasan. He not thought that originally nature is a taste nature. He thought originally nature good and a taste nature no good. He should thought originally nature teacher. He influenced Dasan of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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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의 학문적 기조는 성학(性學), 그것도 존성(尊性)학이었다. 이는 심학 (心學) 또는 존심(尊心)에 대한 상대적 의미를 갖는다. 그의 태극론은 본원에 대한 탐구의 의미와 더불어 성(性)의 존귀함을 입증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 다. 즉 우주 만물의 조화의 본원(本源)으로서보다는 도덕, 인륜, 문화의 바탕 으로서의 성선(性善)과 지선(至善)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태극론에 있어서 성 이 태극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심을 태극으로 보는 관점과 상대적이다. 간재는 태극과 운동/정지의 관계를 두고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와 현상을 두 고 말하기, 작동에 주목하기와 그 기틀의 작동 원인에 주의하기 등 이해의 다 양성을 열어놓고 있다. 한말 상당수 유학자들이 “나라는 망할 지라도 도가 망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간재는 태극이 음양 동정을 일으키듯, 성이 사단 칠정으로 발동하듯 망국(亡國)의 상황에서 본원에 해당하는 성과 태극을 지켜냄으로써 언젠가 다시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을 염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심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시대정신을 창출하고 스 스로 시국을 감당하려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Ganjae's basic attitude is oriented by the school line of Yulgok, Uam. He studied human nature as the ultimate reality and venerated human nature as a basis of all good things. His meaning of studies of human nature were comparative to the studies of mind, and the venerate mind. His concept of Taichi was to use to support not only roots and springs of myriad things and the ultimate reality but also the sublimate of human nature. He understood the human nature as the ultimate reality, so that he didn't agree that human mind could be the ultimate reality. Ganjae opened the various roads to interpretation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Taichi and the yin/yang's movement/pausement, for examples, speaking to focus on the origin of the things, writing to focus on the side bank of flowing river, etc. Ganjae as a scholar in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was seemed to have a vigorous vision of recovery of the nation which could be dominated by the Tao, Taichi, The original human nature. His attitude was contrast to those of mind schools who actively create new methods and systems of governance and to participate to battles of independence from Imperial Japanese inv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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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農吳震泳(1868-1944, 字: 而見, 號: 石農)은 조선의 국운이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에 접어든 그 시절, 조선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고종 5년 2월에 忠北鎭川栢谷面葛月里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부의 훈육을 받고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18세에 조부의 명으로 艮齋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30세에 정식으로 글을 올려 師生의 의리를 맺는다. 10여 년의 숙고와 연마를 거친 후에 맺은 사생의 의리는 석농의 일생을 두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며 결국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은 수제자가 된다. 이후 석농은 스승이 세상을 등지자 艮齋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며 강학했던 繼華島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忠北陰城에 지은 望華齋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한해 남긴 1944년 8월에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석농이 살았던 시대는 외세의 침입과 국내의 모순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혼란하기 그지없던 시대이요 우리민족에게는 다시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이 시기 조선유자들의 대표적인 논쟁은 心論이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卽理,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영남지역의 定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合理氣,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主理, 존화양이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之明德, 그리고 독선수훈과 순정의리에 기반하여 후진양성에 매진한 호남과 충청지역의 艮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是氣. 이들은 모두 비록 심설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강조점이 달랐지만 절대가치로서의 理를 최고이념으로 삼는 主理論에 기반한 성리설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理가 곧 華요 正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理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서로 다른 심설로 전개되었듯이 尊華攘夷와 衛正斥邪에 대한 구체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다소 상이한 모습을 갖는다. 특히 일본이 조선왕조를 좌지우지한 이후에, 어떤 식으로 衛正하여 尊華하고 攘夷하여 斥邪할 것인가에 대해서 艮齋學派는 한주학파나 화서학파와는 비교적 다른 입장을 보인다. 한주학파와 화서학파가 參與鬪爭에 적극적이었다면 艮齋學派는 獨善垂訓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일반적으로 艮齋學派의 의리론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대목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艮齋學派의 의리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艮齋學派를 繼承한 석농의 의리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석농이 주장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요체는 “출처의리의 엄정함.”과 “성리학의 분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아니면 물러나와 獨善其身하는 守身이 바로 출처의리의 엄정함이요. 主理論을 주장하면서도 太極無動靜을 주장하고 心是氣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주자 성리학의 분명함이라고 할 수 있다.
朝鲜的儒者认为他们是时代的良心、祖国的未来、以卫国保民为自己的 使命。 此表现为在朝鲜儒学史上极为强调义理忠节的传统,标志着韩国儒 学的重要特征之一。这种精神总是发挥在朝鲜的存亡之机,特别是在十八 世纪末以来,朝鲜王朝的命运已经越来越衰落的时期,朝鲜的儒者主张卫 正斥邪、尊华攘夷,要维持朝鲜王朝的命运。不管如何评价这种卫正斥 邪、尊华攘夷的成败,作为韩国人的精神遗产的卫正斥邪、尊华攘夷的思 想和实践,永远铭刻在韩国人的心灵里。 在高宗五年,朝鲜王朝的命运已经明显地向于下降的时期,吴震泳 (1968~1944,字:而见,号:石农)生于忠北镇川葛月里。他的早年工 夫受到祖父渔隐公(1801~1886,名:吴致性,字:性述,号:渔隐)的 熏陶。渔隐公曾经从游在吴氏家门中以文学和节行有声望的族叔吴煕常 (1763~1833,字:士敬,号:老洲),后来当过官职了。他早就看透孙 子的资质,极为期待,全心教育石农,如阳城剡溪的家遇火灾,烧毁了藏 书,渔隐公为了石农的学习,卖掉田地一半以上,再买收了书籍。 又如在 石农十九岁,渔隐公怕机灵的孙子只是止于浮薄的文士,使他去竹山七丈 寺,见田愚(1841~1922,字:子明,号:秋潭、艮斋),受道学之教 诲。艮斋初见,视为大成之器,勉励工夫。后来,石农三十岁,上书结师 弟之义,成了继承衣钵的首弟子。石农一生毫不违犯尊师之教,艮斋弃世 在继华岛以后,在忠北阴城的望华斋,培养后学,光复前一年,一九九四 年八月,七十七岁去世了。 石农生活的时期是朝鲜王朝的后期和日本殖民统治时代。祖国的命运如 线,像风前之灯火似的。当时的知识人为了保存祖国的命运,献出极大的 心血。他们大致选了两个途径之一:一则,放弃传统学问,追求新学问。 一则,发扬传统学问的精髓,才能克服如此困难。特别是,后者的立场涉 及尊华攘夷 、卫正斥邪的思想。 当时,主张尊华攘夷、卫正斥邪的朝鲜儒者所争论的问题就是心论:以 星州为中心的岭南地域之寒洲学派所主张的心即理;以自己为退溪嫡传的 岭南地域之定斋学派所主张的心合理气;多以实践卫正斥邪的猛将为名的 畿湖地域之华西学派所主张的心主理;强调尊华攘夷论的湖南和江右地域 之卢沙学派所主张的心之明德;以独善垂训和纯净义理为基,全心于培养 后学的湖南和忠南地域之艮斋学派。他们虽然在他们心论之中侧重点个个 不同,但是以理为绝对价值根源的“主理论”之立场不谋而同,因为对他们 来说,理就是华,就是正。 然而,他们对如何把理实现在实际世界,提出各自的侧重点,而主张各 自的心论,同样,他们对如何实践尊华让夷、卫正斥邪,应有各自的侧重 点,不能一致。特别是,日本实际上统治朝鲜王朝以后,对如何实践尊华 让夷、卫正斥邪,艮斋学派采取与寒洲学派和华西学派不同的途径:寒洲 学派和华西学派侧重于参与斗争,而艮斋学派侧重于独善垂训。 继承艮斋学派的石农所主张的尊华让夷、卫正斥邪的核心是“出处义理之 严正”和“性理义理之分明”。即当不是可为之时,勇退而独善其身之守身就 是“出处义理之严正”;主张主理论,而坚持太极无动静和心是气就是朱子 “性理义理之分明”。这就是石农之卫正斥邪论的重要特点,也是艮斋学派 之卫正斥邪的义理观。
이용수:13회 顧齋 李炳殷의 성리사상 - 心性의 主宰와 人物性偏全을 중심으로 -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22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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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齋는 艮齋의 성리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성이 심을 主宰하는 것은 無爲, 심이 몸을 주재하는 것은 有爲라고 하였다. 심과 성이 주재한다는 것이 그 용어가 같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재는 敬으로써 한다는 것이다. 性尊心卑이기 때문에 심은 경으로서 성을 높여야 선이 발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간재의 성사심제를 계승한 것이다. 敬의 실 천으로서 독서를 하고 그로 인하여 리를 연구하여 正邪를 판단하고 부모봉양 과 처자봉양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정을 잘 이끌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존심비의 성은 천으로부터 理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같다 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오상을 모두 갖추었지만 동물은 인 또는 의 하나만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이다. 이것은 南塘보다 巍巖 과 상통하며 간재를 계승한 설이다. 또한 동물과 堯舜湯武등의 聖人의 仁義 는 大小의 차이가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반면에 인의가 있게 된 원인은 같다는 것이 고재의 주장이다.
Gojae had acceded Neo-Confucianism of Ganjae. He speaked that nature to preside mind meaned inaction and mind to preside body meaned action. Nature and mind same to preside object but it meaning differ. To preside is respect because mind should respect nature. Because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It had acceded that Ganjae to assert nature is teacher and mind is student. He should asserted reading because should study li(理) and right or wrong. And should support one's elderly parents. It is need to have money. Therefore he asserted farming. He asserted that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to same human and animal. But he asserted that human have five moral and animal have one moral. It is differ between human and animal. It is more liked Namdang’s theory than Oiam’s theory. It is to accede Ganjae’s theory. It is differ moral that ideal human is big and animal is small. He asserted that cause of moral sames ideal between human and animal.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to preside, inaction, action, human nature and animal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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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전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公論政治의 확립과정을 王權과 臣權의 정치권력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정치이념으로 수용된 주자학적 성리학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 성을 확보하고 사회의 질서를 안정화하는 것에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더욱이 유가의 현실정치 속에서 士를 중심으로 발현되는 공론정치는 조선왕조의 정 치구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공론 정치에 담겨져 있는 君臣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왕실의 전통성 확립은 주자학적 성리학의 토대 위에서 확립되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형성 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정치이념은 유학자(士林)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계 기가 된다. 더욱이 주자학적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공론정 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사림의 중앙정계진출을 독려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고는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왕실의 정통성과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수용된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 고 주자학적 성리학의 정치이념 속에서 발현되는 조선 성리학의 특징을 공론 의 형성과정 속에서 살펴본다. 이 과정은 조선의 정치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사림의 정치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comprehend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ppeared characteristically in the early Joseon period , through the political power relationships between royal authority and courtier authority.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ism which was embraced as a political ideology worked with features of securing the traditionalism of the Dynasty and stabilizing social order. In addition, the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re manifested through history in the middle of Confucianism politics serve as an important cause for changing the political structure of the Joseon Dynasty; such factors of change come from the political relationships between the King and Courtiers, which is contained in public opinion politics. In other words, the establishment of royal family traditionalism, a very urgent issue to be resolved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ecured based on the ideologies of Neo-Confucianism. However, the political ideology of Neo-Confucianism which emphasizes rational formation of principal agents serves as an opportunity and source of encouragement for Confucian scholars to participate in politics. Moreover, the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re based on the political ideologies of Neo-Confucianism function as a place of public opinion and a new political power which encourages the central government entrance of the ‘Sarim(士林)’. Based on such perspectives, this paper will aim to study the political ideology of Neo-Confucianism in terms of royal authority reinforcement, an ideology that has been embraced for the establishment of social order and royal family traditionalism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his process will serve as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the political meaning of ‘Sarim(士林)’, a political power that appears in the political society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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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대유(大儒) 간재 전우(1841~1922)는 영남 출신 면우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함께 조선 유학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다.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그의 문하에서 2천 명이 넘는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간재는 실로 거대한 학파의 학문적 조상(學祖)이다. 간재의 문인들은 어려웠던 시절 에도 남다른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스승의 유지에 따라 일제에 저항하면서 학파를 지속시켜 왔고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또『관선록』ㆍ『연원록』등을 만들어 학파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데 힘썼다.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은 문하 제자들을 규범주의, 원칙주의(원리주의)로 나가게 하여, 의리 실천과 전통 수호의 측면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전북 출신 문인, 후학들은 선도적이고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본고에서 논의를 ‘전북지역’에 국한시킨 것은 단순하게 범위를 줄인 것이 아니다. 간재학의 본거지인 전북 지역을 타지역과 구별하여 그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찾기 위함이다.
Jeon Woo (pen name Ganjae, 1841-1922) in Southern Jeonra Province has been widely known as a great scholar of Confucianism alongside Gwak Jong-seok (pen name Myeonwoo, 1846-1919) in Southern Gyeongsang Province for his adherence to orthodox Confucianism during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Jeon Woo tried to recover the sovereignty of the nation through education and about 2,000 followers learned from him. He is surely regarded as an academic ancestor92). The followers of him showed their unique solidarity even during hard times and they continued their teacher's will and made a strong stand against the Japanese Empire while keeping their school and defending traditional culture. In addition, they made efforts to maintain their homogeneity by writing the books of Gwanseonrok․Yeonwonrok. Seongsasimjeseol (性師心弟說), prescribed by Ganjae, led his students to the compliance with prescriptivism and fundamentalism, making it possible for them to leave clear traces in terms of the practice of integrity and tradition preservation in history. In that process, writers and younger students who are from Northern Jeonra Province took a leading role. And in that sense, discussions mainly based on 'Northern Jeonra Province' in this study have a good reason for it because such approach helps find characteristics of his thought by distinguishing the region from other provinces.
이용수:11회 艮齋와 巍巖 李柬의 思想同異와 特徵 -人性物性同異와 未發心體善惡을 중심으로-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8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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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먼저 湖洛論爭중의 人性物性同異의 문제에 대하여 해설을 가한 후, 田艮齋의 견해를 참조하여 그 사상과 李柬과의 異同을 살펴보고, 2인의 未發心體善惡의 문제를 논 하여 보고자 한다. 艮齋와 巍巖은 朱子學의 理一 分殊표준에 의하여 人性物性의 상호 同一함을 보고, 人性物性은 모두 天命 之性에 근원하였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 天命之性의 근원으로부터 말하면, 人性ㆍ物性은 서로 동일하며, 犬性ㆍ人性의 다름은 그 氣稟의 제한으로 인하 여 표현함은 다르지만, 天命之性의 근원에 다름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또 未發心體중에는,李柬은 心氣는 血氣와 다르기 때문에 純善이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이점은 艮齋도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에서 李柬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와 田艮齋의 견해를 토론하여 2인의 견해의 同異를 비교하여 보니, 큰 방향은 서로 동일하지만, 관심 포인트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결 론에서는 韓國儒家가 이렇게 논변을 전개한 이유는 그 중 朱子學이 핵심이 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朱子의 人性物性의 관점은 孟子와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朱子는 각종 經書를 통일하기 위하여 “性”에 대해서는 一以 貫之하함으로서 문제를 일으켰으며, 또한 先秦의 여러 經書중에 다른 맥락 의 典籍때문에 性의 견해도 달랐고, 韓國儒家의 쟁론이 발생하게 된 것이 다. 본문은 그 중의 주제를 구분하여 토론함에 있어서 주로 巍巖과 艮齋를 중 심으로 토론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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