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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학논총 [艮齋學論叢]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간재학회 [艮齋學會]
  • pISSN
    1975-6828
  • 간기
    연간
  • 수록기간
    1994 ~ 2014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많이 이용된 논문 (최근 1년 기준)
No
1

이용수:14회 有菴 李厚林의 學問과 思想 -艮齋學의 連續과 不連續의 觀點에서-

張炳漢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4집 2012.08 pp.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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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有菴 李厚林(字 敬信, 1893~1972)은 경남 泗川에서 20세기 초반 國亡의 일제 강점기와 광복 및 6.25 동란, 1960년도에서 1970년도 이어지는 5.16 군사혁명 및 유신정권 체제 등을 거치면서 살았던, 즉 조선 유학의 종착점에 서 있었던 在野學者라고 할 수 있다. 유암은 艮齋 문하에 2년, 노사학파의 松山 權載奎(1870~1952)의 문하에 30여년을 드나들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두 문하의 문인들과 광범위한 인적․학적 교유를 가지면서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학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유암의 시대진단과 이에 대응하는 삶의 자세는 대체적으로 간재학의 守義自竫의 정신체계를 계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의 公義, 公利, 公心의 경세사상은 율곡의 公道論的 정신세계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문장론에서는 주자와 간재의 도본문말론에 기초하면서도 문장의 근본을 四書가 아닌 六經에 기초하는 것과 明心과 養氣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점 등은 나름의 독자적인 체계를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心性論에 있어서는 처음 간재가 일러준 ‘미발의 靜體위주의 工夫論’에 근거한 율곡의 ‘靜坐收斂’을 통한 ‘存心’ 공부에 회의하고, 율곡의 正心을 비롯한 顔子의 四勿箴, 曾子의 三省論, 仲弓의 主敬行恕, 程朱의 主敬論 등의 공부론으로 전환을 기획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이는 또한 간재학의 불연속의 지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심성론의 전변문제와 관련해서는, 선사 간재의 性師心弟說의 계승을 위해 노력한 측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心과 性의 尊卑, 師弟의 비교 논의가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불연속의 지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암은 심과 성의 비교논의에 있어, 현실적인 心의 神靈性과 功能을 찬미하고 心學 工夫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心이 一身의 主宰者임을 강조하고 있는 점 등은 오히려 性에 비하여 心의 우위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그의 공부론에서 본질적인 存心에서 현실적인 正心으로의 전환, 문장론에서의 明心, 심성론에서의 用心․良心․公心 등과 같은 心學의 강조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유암의 이와 같은 심학에의 강조는 당시 한주학파, 노사학파, 화서학파를 비롯한 전반적인 사상의 중심이 心學의 강조로 흐르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서, 간재의 ‘心本性’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한계와 위기인식을 감지하고, 심학에로의 선회를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유암은 다시 孔子의 ‘人能弘道’와 張載의 ‘心能盡性’에 근거하여, 사람과 心의 현실적 功能 가치를 우뚝하게 상정하고 있다. 유암은 당시 간재학과 노사학의 두 문하를 드나들었다는 비판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광범위한 師友 및 師弟 관계의 인적・학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학적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서학이 깊이 침염하여 우리의 민족 정신을 빼앗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담장 내의 師友들 간에 理氣心性論관 관련한 異見으로 인하여 분열과 분파를 조장하는 상황을 개탄하고, 이에 대한 극복의 일환으로 모든 학파는 理의 一統 정신에 귀결할 것을 선창한다. 이에 더 나아가 유학의 분파주의 조장의 중심에 있었던 주자의 성리학적 窮理 공부에 대한 어떤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유학계뿐만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사상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한국 사상의 일통주의 즉 ‘心·性·神·理는 모두 같은 하나이다.’를 선양하였다.

Yuam Yi Hu-rim (affectionate name is Gyeongsin) lived in Sacheon, Gyeongsangnam-do in the early and middle period of the 20th century (1893~1972). He is a non-governmental scholar of the last Confucian generation of Korea, and experienced the perio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Korean War and the Yusin regime of the country. He learned under the schools of Ganjaehak study founder Yangjae Jeon U (1841~1922) and of Yeongnam Nosahak study's successor Songsan Gwon Jae-gyu (1870~1952), as he engaged in wider ranges of human and academic exchanges, thus developing his own creative study system. His diagnosis of times and his response to such are based on the Ganjaehak philosophy of "keeping righteousness and cleaning oneself", and his world view of public righteousness, public interest and public mindset are linked with Yulkgok's public moral and ethic philosophy. He endeavored to inherit his teacher Ganjae's Seongsasimjeseol (性師心弟說, a theory of putting Reason as the teacher and mind as the student). However, rather, he praised realistic mind's divinity and ability and realized the importance of mind study. He also emphasized that mind should govern body. This is understood to mean that he prioritized mind over human nature. At that time, Yuam emphasized mind study and probably aimed to shift to mind study because he sensed the limitations and possible crisis of Ganjae's Simbonseong (心本性) theory, amid various schools of thoughts (Hanjugak, Nosahak, and Hwaseohak) emphasizing mind study. Amid western studies deeply invading Korean nationals and disarraying them, he indicated the limitations of Juja's Neo-Confucianism, which triggered Confucian factionalism, and led the promotion of Korean thoughts' unification that could involve not only Confucian circles but also Buddhist and Taoist circles, namely, the thought that mind, human nature, divinity and reasoning are all one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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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0원

조선시대(1392~1910) 성리학은 500 여년에 걸쳐 발전을 거듭하면서 성리학자들은 주자학을 주축으로 대규모 논쟁을 거치며 발전해 왔다. 朱子(이름 熹, 호 悔菴, 1130~1200) 사상의 분석은 매우 치밀하였고, 의리의 풍부함은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주자학자들을 뛰어 넘어 토착화된 한국 유학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성리학은 한국 유학의 핵심이며 동아시아 주자학의 한 떨기 꽃이었다. 조선 전기 성리학자들의 주자학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태극’논쟁,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으로 표출되었다. 그중에서 16세기 李退溪(이름 滉, 1501~1571)와 李栗谷(이름 珥, 1536~1584)은 조선 성리학의 쌍벽으로, 그들이 사칠논변에서 제시한 관점과 입장은 조선 성리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 성리학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는 작용을 하였다. 이로부터 퇴계 사상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퇴계학파)와 율곡의 관점을 고수하는 기호학파(율곡학파)는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을 반복하며 조선 말기까지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 논쟁에서는 ‘인물성동이’논쟁(호락논쟁)과 ‘심설’논쟁이 가장 눈길을 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郭俛宇(이름은 鍾錫, 1846~1919)와 田艮齋(이름은 愚, 1841 ~1922)는 각각 영남 퇴계학파와 기호 율곡학파를 대표하여 ‘심설’논쟁으로 조선시대 주자학의 의리 발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李丙燾는 韓國儒學史略 마지막 장에서 면우의 관점을 ‘본심’의 학으로 개괄하고 간재 입장을 ‘본성’의 학으로 대표하며 이렇게 논평하였다. 이병도의 설명에 따르면, 면우의 ‘본심’의 학은 ‘주리’에서 말한 것이고 간재의 ‘본성’의 학 역시 성을 리로 여긴 것이므로 심과 성 모두 ‘리’에서입론한 것이며, 따라서 양자의 길은 다르지만 귀착점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리의 논쟁이 아니라 쌍방 간의 언어 문자와 표현의 차이로 인한 유희이며, 두 학파간의 우열을 다투는 논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병도의 평가가 쌍방 간의 변론의 번쇄함과 공격의 격렬함 때문에 표피적인 관찰로 흐른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사실 철학적 문제에 착안하면, 면우와 간재의 논쟁은 엄격한 의리 논쟁으로, 주자학의 해석과 발전에서뿐만 아니라 쌍방 간의 사상의 차이점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더욱이 한말 성리학이 직면했던 시대 변화 속에 숨어 있는 사상의 장력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본문은 분량의 제한과 필자의 학문적 역량의 부족으로 간재학파와 면우학파의 여러 인물과 사상을 모두 이해하고 정리할 수는 없기에 단지 간재와 면우의 ‘심설’ 논쟁에 착안하여 그들의 의리 논쟁점을 따라 그들 사상의 차이와 특징을 제시하는데 그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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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3회 栗谷 李珥와 重峯 趙憲의 改革論 比較 - 『萬言封事』와 『東還封事』를 중심으로-

朱容成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249-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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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李珥(1536~1584와 重峯趙憲(1544~1592)은 16세기 조선의 道學者이다. 道學의 실현방향은 行道와 垂敎라고 할 수 있다. 行道論은 經世論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학파의 경세론은 本末論과 體用論 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경세의 體가 되면서 本이 되는 것은 ‘修己’이며, ‘用’이자 ‘末’인 부분은 ‘安民’이다. 수신은 특히 당시 정치의 중심이던 임금에 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으며 안민은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는 구 체적인 개혁방안 속에 나타난다. 율곡과 중봉은 도학파 경세론의 본말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를 전형 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글이 율곡의『萬言封事』이며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글 이 중봉의『東還封事』이다. 『萬言封事』는 먼저 정치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일곱 가지 폐단을 제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대책을 ‘수기’와 ‘안민’으로 나누어서 개진한다. 수기적 대책을 4가지로, 안민적 대책을 5가지로 제시한 다. 『東還封事』는 擬上十六條疏, 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로 구성되어 있 다. 十六條疏는 근본에 관한 것에 대해 올린 것이며, 팔조소 는 사무에 간 절할 것에 대해 올린 글이다. 십육조소 는 ‘格君論’에 기반하여 임금의 ‘수기’로부터 ‘안민’에 이르는 대책을 말하는 것이며, 팔조소 는 ‘사습(士習)’과 ‘(民風)’에 관계된 개선책을 올린 것이다. 중봉은 이 두 상소문을 통해 사회개 혁론을 ‘근본’과 ‘실효’의 방향으로 펴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봉의 개혁론은 율곡의 개혁론과 비슷하거나 율곡의 주장을 부연하거나 구체화 시킨 것이라고 본다. 율곡은 ‘실(實)’과 ‘시의(時宜)’에 중 점을 두면서 개혁론을 개진한 반면 중봉은 중국을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하면 서 개혁론을 제시한다. 여기에서는 율곡과 중봉이 1574년 같은 해에 썼던 『萬言封事』와 「東還封事」를 통해 두 개혁론을 구체적으로 비교해보고자 하였다.

栗谷李珥(1536~1584)和重峰赵宪(1544~1592)是在朝鲜活动 的16世纪的道学学者. 道学的实现方式可分为行道和垂教. 行道论可看成经世论,而道学派的经世论应从本末论和体用论的观点接 近. 构成经世论的体, 本的是‘修己’,而且构成经世论的用、末的是‘安民’. 修身是当时的国王应所具备的当头条件,而且安民出现在消灭百姓弊端的 具体改革方案内. 栗谷和重峰原封地遵从着道学派经世论的本末论。典型地反映此点的文 章就是栗谷的‘万言封事’, 同出一辙的另一篇文章是重峰的‘东还封事’. 首先 万言封事提出了国家的政治不能取得实效的七种弊端,而且为了克服此弊 端,分为‘修己’和‘安民’改进了办法。所提出的修己办法为4种,安民办法为5 种. 东还封事由拟上十六条疏, 质正官回还后先上八条疏构成. 十 六条疏是关于根本的内容, 八条疏是关于当时非常急切的一些实务的内 容. 十六条疏基于‘格君论’谈着能使国王从‘修己’做到‘安民’的对策, 八条 疏谈着能改善‘士习’和‘民风’的方案. 重峰通过此奏章,以‘根本’和‘实效’的角 度论着社会改革论. 一般说重峰的改革论类似于栗谷的改革论,或进一步阐述或具体化着栗 谷的主张. 但栗谷以‘实’和‘时宜’为重点改进了改革论,而重峰举中国为模 范事例改进着改革论。在这里具体比较栗谷和重峰在同一年(1574年)所 写的「万言封事」和「东还封事」,而研究两个人的改革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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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3회 顧齋 李炳殷의 성리사상 - 心性의 主宰와 人物性偏全을 중심으로 -

李宗雨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22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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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齋는 艮齋의 성리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성이 심을 主宰하는 것은 無爲, 심이 몸을 주재하는 것은 有爲라고 하였다. 심과 성이 주재한다는 것이 그 용어가 같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재는 敬으로써 한다는 것이다. 性尊心卑이기 때문에 심은 경으로서 성을 높여야 선이 발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간재의 성사심제를 계승한 것이다. 敬의 실 천으로서 독서를 하고 그로 인하여 리를 연구하여 正邪를 판단하고 부모봉양 과 처자봉양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정을 잘 이끌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것이 필요하고 이 때문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존심비의 성은 천으로부터 理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같다 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오상을 모두 갖추었지만 동물은 인 또는 의 하나만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이다. 이것은 南塘보다 巍巖 과 상통하며 간재를 계승한 설이다. 또한 동물과 堯舜湯武등의 聖人의 仁義 는 大小의 차이가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반면에 인의가 있게 된 원인은 같다는 것이 고재의 주장이다.

Gojae had acceded Neo-Confucianism of Ganjae. He speaked that nature to preside mind meaned inaction and mind to preside body meaned action. Nature and mind same to preside object but it meaning differ. To preside is respect because mind should respect nature. Because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It had acceded that Ganjae to assert nature is teacher and mind is student. He should asserted reading because should study li(理) and right or wrong. And should support one's elderly parents. It is need to have money. Therefore he asserted farming. He asserted that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to same human and animal. But he asserted that human have five moral and animal have one moral. It is differ between human and animal. It is more liked Namdang’s theory than Oiam’s theory. It is to accede Ganjae’s theory. It is differ moral that ideal human is big and animal is small. He asserted that cause of moral sames ideal between human and animal. nature is high and mind is low, to preside, inaction, action, human nature and animal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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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3회 艮齋學의 現實的 具現方法

朴洪植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7집 2014.02 pp.28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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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3회 石農 吳震泳의 衛正斥邪 義理精神

宣炳三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2집 2011.08 pp.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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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農吳震泳(1868-1944, 字: 而見, 號: 石農)은 조선의 국운이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에 접어든 그 시절, 조선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고종 5년 2월에 忠北鎭川栢谷面葛月里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부의 훈육을 받고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18세에 조부의 명으로 艮齋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30세에 정식으로 글을 올려 師生의 의리를 맺는다. 10여 년의 숙고와 연마를 거친 후에 맺은 사생의 의리는 석농의 일생을 두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며 결국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은 수제자가 된다. 이후 석농은 스승이 세상을 등지자 艮齋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며 강학했던 繼華島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忠北陰城에 지은 望華齋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한해 남긴 1944년 8월에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석농이 살았던 시대는 외세의 침입과 국내의 모순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혼란하기 그지없던 시대이요 우리민족에게는 다시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이 시기 조선유자들의 대표적인 논쟁은 心論이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卽理,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영남지역의 定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合理氣,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主理, 존화양이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之明德, 그리고 독선수훈과 순정의리에 기반하여 후진양성에 매진한 호남과 충청지역의 艮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是氣. 이들은 모두 비록 심설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강조점이 달랐지만 절대가치로서의 理를 최고이념으로 삼는 主理論에 기반한 성리설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理가 곧 華요 正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理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서로 다른 심설로 전개되었듯이 尊華攘夷와 衛正斥邪에 대한 구체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다소 상이한 모습을 갖는다. 특히 일본이 조선왕조를 좌지우지한 이후에, 어떤 식으로 衛正하여 尊華하고 攘夷하여 斥邪할 것인가에 대해서 艮齋學派는 한주학파나 화서학파와는 비교적 다른 입장을 보인다. 한주학파와 화서학파가 參與鬪爭에 적극적이었다면 艮齋學派는 獨善垂訓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일반적으로 艮齋學派의 의리론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대목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艮齋學派의 의리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艮齋學派를 繼承한 석농의 의리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석농이 주장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요체는 “출처의리의 엄정함.”과 “성리학의 분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아니면 물러나와 獨善其身하는 守身이 바로 출처의리의 엄정함이요. 主理論을 주장하면서도 太極無動靜을 주장하고 心是氣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주자 성리학의 분명함이라고 할 수 있다.

朝鲜的儒者认为他们是时代的良心、祖国的未来、以卫国保民为自己的 使命。 此表现为在朝鲜儒学史上极为强调义理忠节的传统,标志着韩国儒 学的重要特征之一。这种精神总是发挥在朝鲜的存亡之机,特别是在十八 世纪末以来,朝鲜王朝的命运已经越来越衰落的时期,朝鲜的儒者主张卫 正斥邪、尊华攘夷,要维持朝鲜王朝的命运。不管如何评价这种卫正斥 邪、尊华攘夷的成败,作为韩国人的精神遗产的卫正斥邪、尊华攘夷的思 想和实践,永远铭刻在韩国人的心灵里。 在高宗五年,朝鲜王朝的命运已经明显地向于下降的时期,吴震泳 (1968~1944,字:而见,号:石农)生于忠北镇川葛月里。他的早年工 夫受到祖父渔隐公(1801~1886,名:吴致性,字:性述,号:渔隐)的 熏陶。渔隐公曾经从游在吴氏家门中以文学和节行有声望的族叔吴煕常 (1763~1833,字:士敬,号:老洲),后来当过官职了。他早就看透孙 子的资质,极为期待,全心教育石农,如阳城剡溪的家遇火灾,烧毁了藏 书,渔隐公为了石农的学习,卖掉田地一半以上,再买收了书籍。 又如在 石农十九岁,渔隐公怕机灵的孙子只是止于浮薄的文士,使他去竹山七丈 寺,见田愚(1841~1922,字:子明,号:秋潭、艮斋),受道学之教 诲。艮斋初见,视为大成之器,勉励工夫。后来,石农三十岁,上书结师 弟之义,成了继承衣钵的首弟子。石农一生毫不违犯尊师之教,艮斋弃世 在继华岛以后,在忠北阴城的望华斋,培养后学,光复前一年,一九九四 年八月,七十七岁去世了。 石农生活的时期是朝鲜王朝的后期和日本殖民统治时代。祖国的命运如 线,像风前之灯火似的。当时的知识人为了保存祖国的命运,献出极大的 心血。他们大致选了两个途径之一:一则,放弃传统学问,追求新学问。 一则,发扬传统学问的精髓,才能克服如此困难。特别是,后者的立场涉 及尊华攘夷 、卫正斥邪的思想。 当时,主张尊华攘夷、卫正斥邪的朝鲜儒者所争论的问题就是心论:以 星州为中心的岭南地域之寒洲学派所主张的心即理;以自己为退溪嫡传的 岭南地域之定斋学派所主张的心合理气;多以实践卫正斥邪的猛将为名的 畿湖地域之华西学派所主张的心主理;强调尊华攘夷论的湖南和江右地域 之卢沙学派所主张的心之明德;以独善垂训和纯净义理为基,全心于培养 后学的湖南和忠南地域之艮斋学派。他们虽然在他们心论之中侧重点个个 不同,但是以理为绝对价值根源的“主理论”之立场不谋而同,因为对他们 来说,理就是华,就是正。 然而,他们对如何把理实现在实际世界,提出各自的侧重点,而主张各 自的心论,同样,他们对如何实践尊华让夷、卫正斥邪,应有各自的侧重 点,不能一致。特别是,日本实际上统治朝鲜王朝以后,对如何实践尊华 让夷、卫正斥邪,艮斋学派采取与寒洲学派和华西学派不同的途径:寒洲 学派和华西学派侧重于参与斗争,而艮斋学派侧重于独善垂训。 继承艮斋学派的石农所主张的尊华让夷、卫正斥邪的核心是“出处义理之 严正”和“性理义理之分明”。即当不是可为之时,勇退而独善其身之守身就 是“出处义理之严正”;主张主理论,而坚持太极无动静和心是气就是朱子 “性理义理之分明”。这就是石农之卫正斥邪论的重要特点,也是艮斋学派 之卫正斥邪的义理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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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3회 朝鮮 前期 政治文化에 나타난 公論의 의미 고찰

金熙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3집 2012.02 pp.27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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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 전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公論政治의 확립과정을 王權과 臣權의 정치권력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정치이념으로 수용된 주자학적 성리학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 성을 확보하고 사회의 질서를 안정화하는 것에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더욱이 유가의 현실정치 속에서 士를 중심으로 발현되는 공론정치는 조선왕조의 정 치구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공론 정치에 담겨져 있는 君臣간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왕실의 전통성 확립은 주자학적 성리학의 토대 위에서 확립되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형성 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정치이념은 유학자(士林)들의 정치참여를 독려하는 계 기가 된다. 더욱이 주자학적 성리학의 정치이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공론정 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 사림의 중앙정계진출을 독려하는 공론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고는 조선의 탄생과 더불어 왕실의 정통성과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수용된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 고 주자학적 성리학의 정치이념 속에서 발현되는 조선 성리학의 특징을 공론 의 형성과정 속에서 살펴본다. 이 과정은 조선의 정치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사림의 정치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comprehend the establishment process of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ppeared characteristically in the early Joseon period , through the political power relationships between royal authority and courtier authority.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Neo-Confucianism which was embraced as a political ideology worked with features of securing the traditionalism of the Dynasty and stabilizing social order. In addition, the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re manifested through history in the middle of Confucianism politics serve as an important cause for changing the political structure of the Joseon Dynasty; such factors of change come from the political relationships between the King and Courtiers, which is contained in public opinion politics. In other words, the establishment of royal family traditionalism, a very urgent issue to be resolved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was secured based on the ideologies of Neo-Confucianism. However, the political ideology of Neo-Confucianism which emphasizes rational formation of principal agents serves as an opportunity and source of encouragement for Confucian scholars to participate in politics. Moreover, the public opinion politics which are based on the political ideologies of Neo-Confucianism function as a place of public opinion and a new political power which encourages the central government entrance of the ‘Sarim(士林)’. Based on such perspectives, this paper will aim to study the political ideology of Neo-Confucianism in terms of royal authority reinforcement, an ideology that has been embraced for the establishment of social order and royal family traditionalism along with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This process will serve as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the political meaning of ‘Sarim(士林)’, a political power that appears in the political society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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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2회 艮齋의 朱子太極動靜說에 대한 해석

郭信煥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5집 2013.02 pp.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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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의 학문적 기조는 성학(性學), 그것도 존성(尊性)학이었다. 이는 심학 (心學) 또는 존심(尊心)에 대한 상대적 의미를 갖는다. 그의 태극론은 본원에 대한 탐구의 의미와 더불어 성(性)의 존귀함을 입증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 다. 즉 우주 만물의 조화의 본원(本源)으로서보다는 도덕, 인륜, 문화의 바탕 으로서의 성선(性善)과 지선(至善)으로 이해되었다. 그는 태극론에 있어서 성 이 태극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심을 태극으로 보는 관점과 상대적이다. 간재는 태극과 운동/정지의 관계를 두고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와 현상을 두 고 말하기, 작동에 주목하기와 그 기틀의 작동 원인에 주의하기 등 이해의 다 양성을 열어놓고 있다. 한말 상당수 유학자들이 “나라는 망할 지라도 도가 망 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간재는 태극이 음양 동정을 일으키듯, 성이 사단 칠정으로 발동하듯 망국(亡國)의 상황에서 본원에 해당하는 성과 태극을 지켜냄으로써 언젠가 다시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을 염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심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시대정신을 창출하고 스 스로 시국을 감당하려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Ganjae's basic attitude is oriented by the school line of Yulgok, Uam. He studied human nature as the ultimate reality and venerated human nature as a basis of all good things. His meaning of studies of human nature were comparative to the studies of mind, and the venerate mind. His concept of Taichi was to use to support not only roots and springs of myriad things and the ultimate reality but also the sublimate of human nature. He understood the human nature as the ultimate reality, so that he didn't agree that human mind could be the ultimate reality. Ganjae opened the various roads to interpretation of the relations between the Taichi and the yin/yang's movement/pausement, for examples, speaking to focus on the origin of the things, writing to focus on the side bank of flowing river, etc. Ganjae as a scholar in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was seemed to have a vigorous vision of recovery of the nation which could be dominated by the Tao, Taichi, The original human nature. His attitude was contrast to those of mind schools who actively create new methods and systems of governance and to participate to battles of independence from Imperial Japanese inv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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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2회 艮齋의 「和陶詩」에 관한 연구

劉永奉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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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한 간재에게 왕성한 시 창작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思無邪라고 하여 性情陶冶의 한 방편으로 중요시되었으니, 간재 역시 시를 전연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물이 문집에 남은 소량의 시다. 「화도」는 그 중의 하나다. 물론 간재는 李白을 필두로, 華西 李恒老, 牛山 安邦俊, 勉菴 崔益鉉, 尤庵 宋時烈, 金永植, 慕齋 金安國, 栗谷 李珥, 農巖 金昌協, 晦翁 朱熹, 遂翁 權尙夏, 河西 金麟厚와 같은 분들의 시를 이따금 한 편씩 차운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화도」는 양적으로 무려 6수나 된다. 마음먹고 붓을 잡은 연작임이 분명하다. 39살이 되던 1879년의 일이니, 고결한 삶을 노래한 陶潛에 대한 존경의 발로이다. Ⅲ장과 Ⅳ장에서 검토하였듯이, 첫 수를 제외한 다섯 수는 歸田園과 별반 관련 없는 도학자의 氣習이 노래되고 있다. 둘째 수를 보면, 우암이 가려 뽑은 朱子의 疏箚가 주된 소재로, 이를 顯宗에게 읽어보도록 청한 朴世彩까지 거론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四端을 밝게 알아 實踐躬行하라는 유교적인 가르침을 담았다. 넷째 수에서는 아예 송나라의 학자 蔡元定과 그의 아들 蔡沈을 백세의 스승으로 기리고 있다. 다섯째 수에서는 孔子를 필두로 朱子, 顔子, 曾子, 黃幹, 채원정 등을 두루 언급하면서 이들과 종유해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꾸렸다. 여섯째 수는 시절을 한탄하는 작품으로, 王道政治를 구현할 수 있는 현인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깃든 대표적인 연작시로 지목해볼 수 있다. 기존 시인들의 和陶詩와는 전혀 다른, 간재만의 「화도」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간재는 실제 여러 海島를 물색하기도 하고, 미리 군산도와 왕등도 등지에서 거처한 적이 있다. 그 후 1912년 9월, 간재는 72세의 나이로 繼華島에 이주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는 도잠이 실현했던 귀전원의 계승이었으니, 간재가 일찍이 「화도」를 지었던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계화도 은거의 단초를 미리 내보인 작품으로 지목된다.

Active poetry writing might be too much to expect of Ganjae who adhered to moral ways of life. However, poetry which was also referred to as samusa (literally meaning “nothing vicious thought”) was emphasized as a means of seongjeongdoya (性情陶冶), and therefore Ganjae could not avoid paying attention to poetry. Some of his poems are found in an anthology: Hwado is one of them. Sometimes, Ganjae wrote poetry imitating rhymes from one of the poems by Yi Baek and many other neo-Confucian scholars. In particular, Hwado was written into as many as six different pieces of such poetry. It was in 1879 when he was 39 years old. They are evidence of his respect for Dojam(陶潛) who wrote about how to live a virtuous life. All the pieces of poetry, except the first one, relate to gwijeonwon (literally meaning “returning to a rural idyll”) and express a neo-Confucian view of the world. These are the characteristics of Gangje’s Hwado that distinguish him clearly from other poets. In reality, Ganjae explored many islands in the sea and even stayed on a few islands including Gunsando and Wangdeungdo. He moved to Gyehwado in September 1912 at the age of 72 and spent the rest of his life on the island. This was the realization of gwijeonwon like Dojam. It was not a matter of chance that Ganjae wrote Hwado earlier. In conclusion, Hwado is a work typical of the world of Ganjae’s poetry and is thought to have foretold his retirement to Gyehw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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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2회 陽明學 이해를 위한 토대적 연구 : 『王陽明全集』의 편찬 과정 및 비평적 문헌 이해

宣炳三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6집 2013.08 pp.109-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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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논의 구조를 두 영역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구체적 설명을 토대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왕양명전집』의 편찬 과정에 대한 종합적 고찰과 『왕양명전집』의 비평적 문헌 이해 예시이다. 먼저 2장에서는 양명 본인이 자신의 문집 편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 후에 『왕양명전집』의 편찬 과정을 중요 판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추수익 간행의 『문록』, 전덕홍이 편정한 『양명선생문록』, 최초의 전서본인 『왕문성공전서』(38권)을 검토하고 현대에 와서 1992년에 吳光 등이 編訂한 『왕양명전집』, 이를 새롭게 증보 편정하여 2010년 12월에 출판한 신편본 『왕양명전집』을 검토하였다. 이를 토대로 3장에서는 비평적 문헌 이해와 관련하여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첫째, “50세에 비로소 치양지설을 제창했다”는 사례는 기록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부각하였다. 2. “천천문답은 기록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사례는 유사한 기록 간의 비교를 통하여 확실한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3. “21세에 양명이 格竹을 하다”는 사례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하여 기존 내용을 새롭게 읽어가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本论文的结构可以分成为两个部分,即先调查《王阳明全集》版本成立过程,次谈关于《王阳明全集》的文献理解。可以说本论文的叙述策略是,先论具体对象,后谈理论模式。在第二章,先讨论王阳明本人对自己《文集》编撰的基本立场,然后从主要《全集》版本,调查《王阳明全集》整个编撰过程:第一,邹守益刊行的《文录》;第二,钱德洪编订的《王阳明先生文录》;第三,最初全书本《王文成公全书》(38卷);第四,吴光等编订的《王阳明全集》(1992年);第五,新编本《王阳明全集》(2010年 12月)。在第三章,根据版本研究的结果,进行文献理解的基本态度,主要是以三个主题为主:第一,关于“五十岁提倡良知”说的检讨,从此要突出研究者坚持怀疑记录的心态;第二,关于“天泉问答”记录的相同相异性的调查,从此要强调研究者须用对照文献记录的方法;第三,关于“阳明二十一岁格竹故事”的真实性,从此要主张研究者活用新的资料,扩大理解的视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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