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農吳震泳(1868-1944, 字: 而見, 號: 石農)은 조선의 국운이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에 접어든 그 시절, 조선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고종 5년 2월에 忠北鎭川栢谷面葛月里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부의 훈육을 받고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18세에 조부의 명으로 艮齋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30세에 정식으로 글을 올려 師生의 의리를 맺는다. 10여 년의 숙고와 연마를 거친 후에 맺은 사생의 의리는 석농의 일생을 두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며 결국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은 수제자가 된다. 이후 석농은 스승이 세상을 등지자 艮齋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며 강학했던 繼華島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忠北陰城에 지은 望華齋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한해 남긴 1944년 8월에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석농이 살았던 시대는 외세의 침입과 국내의 모순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혼란하기 그지없던 시대이요 우리민족에게는 다시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이 시기 조선유자들의 대표적인 논쟁은 心論이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卽理,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영남지역의 定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合理氣,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主理, 존화양이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之明德, 그리고 독선수훈과 순정의리에 기반하여 후진양성에 매진한 호남과 충청지역의 艮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是氣. 이들은 모두 비록 심설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강조점이 달랐지만 절대가치로서의 理를 최고이념으로 삼는 主理論에 기반한 성리설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理가 곧 華요 正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理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서로 다른 심설로 전개되었듯이 尊華攘夷와 衛正斥邪에 대한 구체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다소 상이한 모습을 갖는다. 특히 일본이 조선왕조를 좌지우지한 이후에, 어떤 식으로 衛正하여 尊華하고 攘夷하여 斥邪할 것인가에 대해서 艮齋學派는 한주학파나 화서학파와는 비교적 다른 입장을 보인다. 한주학파와 화서학파가 參與鬪爭에 적극적이었다면 艮齋學派는 獨善垂訓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일반적으로 艮齋學派의 의리론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대목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艮齋學派의 의리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艮齋學派를 繼承한 석농의 의리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석농이 주장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요체는 “출처의리의 엄정함.”과 “성리학의 분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아니면 물러나와 獨善其身하는 守身이 바로 출처의리의 엄정함이요. 主理論을 주장하면서도 太極無動靜을 주장하고 心是氣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주자 성리학의 분명함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