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0원
호남의 대유(大儒) 간재 전우(1841~1922)는 영남 출신 면우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함께 조선 유학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다.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그의 문하에서 2천 명이 넘는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간재는 실로 거대한 학파의 학문적 조상(學祖)이다. 간재의 문인들은 어려웠던 시절 에도 남다른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스승의 유지에 따라 일제에 저항하면서 학파를 지속시켜 왔고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또『관선록』ㆍ『연원록』등을 만들어 학파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데 힘썼다.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은 문하 제자들을 규범주의, 원칙주의(원리주의)로 나가게 하여, 의리 실천과 전통 수호의 측면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과정에서 전북 출신 문인, 후학들은 선도적이고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본고에서 논의를 ‘전북지역’에 국한시킨 것은 단순하게 범위를 줄인 것이 아니다. 간재학의 본거지인 전북 지역을 타지역과 구별하여 그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찾기 위함이다.
Jeon Woo (pen name Ganjae, 1841-1922) in Southern Jeonra Province has been widely known as a great scholar of Confucianism alongside Gwak Jong-seok (pen name Myeonwoo, 1846-1919) in Southern Gyeongsang Province for his adherence to orthodox Confucianism during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Jeon Woo tried to recover the sovereignty of the nation through education and about 2,000 followers learned from him. He is surely regarded as an academic ancestor92). The followers of him showed their unique solidarity even during hard times and they continued their teacher's will and made a strong stand against the Japanese Empire while keeping their school and defending traditional culture. In addition, they made efforts to maintain their homogeneity by writing the books of Gwanseonrok․Yeonwonrok. Seongsasimjeseol (性師心弟說), prescribed by Ganjae, led his students to the compliance with prescriptivism and fundamentalism, making it possible for them to leave clear traces in terms of the practice of integrity and tradition preservation in history. In that process, writers and younger students who are from Northern Jeonra Province took a leading role. And in that sense, discussions mainly based on 'Northern Jeonra Province' in this study have a good reason for it because such approach helps find characteristics of his thought by distinguishing the region from other provinces.
6,600원
石農吳震泳(1868-1944, 字: 而見, 號: 石農)은 조선의 국운이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에 접어든 그 시절, 조선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고종 5년 2월에 忠北鎭川栢谷面葛月里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부의 훈육을 받고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18세에 조부의 명으로 艮齋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30세에 정식으로 글을 올려 師生의 의리를 맺는다. 10여 년의 숙고와 연마를 거친 후에 맺은 사생의 의리는 석농의 일생을 두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며 결국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은 수제자가 된다. 이후 석농은 스승이 세상을 등지자 艮齋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며 강학했던 繼華島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忠北陰城에 지은 望華齋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한해 남긴 1944년 8월에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석농이 살았던 시대는 외세의 침입과 국내의 모순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혼란하기 그지없던 시대이요 우리민족에게는 다시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이 시기 조선유자들의 대표적인 논쟁은 心論이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卽理,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영남지역의 定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合理氣,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主理, 존화양이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之明德, 그리고 독선수훈과 순정의리에 기반하여 후진양성에 매진한 호남과 충청지역의 艮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是氣. 이들은 모두 비록 심설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강조점이 달랐지만 절대가치로서의 理를 최고이념으로 삼는 主理論에 기반한 성리설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理가 곧 華요 正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理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서로 다른 심설로 전개되었듯이 尊華攘夷와 衛正斥邪에 대한 구체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다소 상이한 모습을 갖는다. 특히 일본이 조선왕조를 좌지우지한 이후에, 어떤 식으로 衛正하여 尊華하고 攘夷하여 斥邪할 것인가에 대해서 艮齋學派는 한주학파나 화서학파와는 비교적 다른 입장을 보인다. 한주학파와 화서학파가 參與鬪爭에 적극적이었다면 艮齋學派는 獨善垂訓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일반적으로 艮齋學派의 의리론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대목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艮齋學派의 의리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艮齋學派를 繼承한 석농의 의리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석농이 주장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요체는 “출처의리의 엄정함.”과 “성리학의 분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아니면 물러나와 獨善其身하는 守身이 바로 출처의리의 엄정함이요. 主理論을 주장하면서도 太極無動靜을 주장하고 心是氣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주자 성리학의 분명함이라고 할 수 있다.
朝鲜的儒者认为他们是时代的良心、祖国的未来、以卫国保民为自己的 使命。 此表现为在朝鲜儒学史上极为强调义理忠节的传统,标志着韩国儒 学的重要特征之一。这种精神总是发挥在朝鲜的存亡之机,特别是在十八 世纪末以来,朝鲜王朝的命运已经越来越衰落的时期,朝鲜的儒者主张卫 正斥邪、尊华攘夷,要维持朝鲜王朝的命运。不管如何评价这种卫正斥 邪、尊华攘夷的成败,作为韩国人的精神遗产的卫正斥邪、尊华攘夷的思 想和实践,永远铭刻在韩国人的心灵里。 在高宗五年,朝鲜王朝的命运已经明显地向于下降的时期,吴震泳 (1968~1944,字:而见,号:石农)生于忠北镇川葛月里。他的早年工 夫受到祖父渔隐公(1801~1886,名:吴致性,字:性述,号:渔隐)的 熏陶。渔隐公曾经从游在吴氏家门中以文学和节行有声望的族叔吴煕常 (1763~1833,字:士敬,号:老洲),后来当过官职了。他早就看透孙 子的资质,极为期待,全心教育石农,如阳城剡溪的家遇火灾,烧毁了藏 书,渔隐公为了石农的学习,卖掉田地一半以上,再买收了书籍。 又如在 石农十九岁,渔隐公怕机灵的孙子只是止于浮薄的文士,使他去竹山七丈 寺,见田愚(1841~1922,字:子明,号:秋潭、艮斋),受道学之教 诲。艮斋初见,视为大成之器,勉励工夫。后来,石农三十岁,上书结师 弟之义,成了继承衣钵的首弟子。石农一生毫不违犯尊师之教,艮斋弃世 在继华岛以后,在忠北阴城的望华斋,培养后学,光复前一年,一九九四 年八月,七十七岁去世了。 石农生活的时期是朝鲜王朝的后期和日本殖民统治时代。祖国的命运如 线,像风前之灯火似的。当时的知识人为了保存祖国的命运,献出极大的 心血。他们大致选了两个途径之一:一则,放弃传统学问,追求新学问。 一则,发扬传统学问的精髓,才能克服如此困难。特别是,后者的立场涉 及尊华攘夷 、卫正斥邪的思想。 当时,主张尊华攘夷、卫正斥邪的朝鲜儒者所争论的问题就是心论:以 星州为中心的岭南地域之寒洲学派所主张的心即理;以自己为退溪嫡传的 岭南地域之定斋学派所主张的心合理气;多以实践卫正斥邪的猛将为名的 畿湖地域之华西学派所主张的心主理;强调尊华攘夷论的湖南和江右地域 之卢沙学派所主张的心之明德;以独善垂训和纯净义理为基,全心于培养 后学的湖南和忠南地域之艮斋学派。他们虽然在他们心论之中侧重点个个 不同,但是以理为绝对价值根源的“主理论”之立场不谋而同,因为对他们 来说,理就是华,就是正。 然而,他们对如何把理实现在实际世界,提出各自的侧重点,而主张各 自的心论,同样,他们对如何实践尊华让夷、卫正斥邪,应有各自的侧重 点,不能一致。特别是,日本实际上统治朝鲜王朝以后,对如何实践尊华 让夷、卫正斥邪,艮斋学派采取与寒洲学派和华西学派不同的途径:寒洲 学派和华西学派侧重于参与斗争,而艮斋学派侧重于独善垂训。 继承艮斋学派的石农所主张的尊华让夷、卫正斥邪的核心是“出处义理之 严正”和“性理义理之分明”。即当不是可为之时,勇退而独善其身之守身就 是“出处义理之严正”;主张主理论,而坚持太极无动静和心是气就是朱子 “性理义理之分明”。这就是石农之卫正斥邪论的重要特点,也是艮斋学派 之卫正斥邪的义理观。
6,300원
悳泉은 艮齋의 성리사상을 繼承하여 心卽理설을 주장하는 학파를 비판하면서 心卽氣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淵齋의 문인 琢窩와 논쟁을 벌인다. 탁와가 艮齋의 性尊心卑說을 비판하자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탁와는 尊卑란 천지에 해당되는 것일 뿐, 理氣心性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는『周易』의 天尊地卑에 근거하여 그렇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한 心과 性은 하나이면서 둘이기 때문에 上下尊卑로서 구분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悳泉은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은 없었지만, 心과 性을 合說과 分說로 구분하는데 分說로 본다면 尊卑로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悳泉은 茶山의 嗜好의 性을 비판한다. 天命之性을 嗜好之性이라고 할 수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전자는 純善하지만 후자는 칠정의 하나로서 兼善惡하다는 것이다. 전자는 스승의 설로서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산을 비판하였다. 반면에 茶山의 經世論의 영향을 받는데 丁田制가 바로 그러하다.
Dukchun succeeded Ganjae neo-confucianism. He criticized that mind is principle theory. He asserted that mind is energy theory. He disputed Takwa. Takwa criticized Ganjae of nature high and mind low. Dukchun defensed Ganjae of nature high and mind low. Takwa criticized that high and low apply heaven and earth. He was based Jooyuk. He not divide that nature and mind is high and low. Dukchun asserted to divide. Dukchun criticized a taste nature of Dasan. He not thought that originally nature is a taste nature. He thought originally nature good and a taste nature no good. He should thought originally nature teacher. He influenced Dasan of economics.
7,200원
유가가 지향하는 인간 중 하나는 군자다. 君子不器로 일컬어지는 군자는 禮樂射御書數라는 六藝를 습득해야 한다. 이러한 군자를 다른 식으로 말하면 지덕체를 겸비한 인간, 혹은 이성과 감성을 아울러 겸비한 인간을 의미한다. 유가는 이성을 중시했지만, 그것 못지않게 감성을 아울러 강조했다. ‘서예란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에는 서예가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단순한 실용적 차원을 넘어선 예술적 측면과 아울러 형이상학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서예에 대한 규정 중 주목할 것은 서예에는 心身一元적 차원에서의 心相, 혹은 心象예 술이란 점과 아울러 書如其人의 사유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동양에는 書如其人의 인품론적 사유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裕齋宋基冕의 서예사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재는 서예의 실기에만 재능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짧은 글이지만 「筆賦」를 써서 筆法과 筆意가 무엇인가를 밝히 며, 더 나아가 서예란 무엇인지를 말한다. 유재는 王羲之를 추존하면서 中和美를 서예에 담고자 한다. 그렇다면 유재는 왜 이렇게 서예에 매진했던 것일까? 유재가 서예에 매진한 것은 바로 서예를 통해 正心과 去欲을 하기 위함이었다. 유재의 삶은 敬을 실천하고자 한다. 항상 敬의 자세로서 “存天理, 去人 欲”의 대명제를 유재는 서예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유재가 서예를 통하여 담아내고자 한 美意識은 기본적으로는 中和美였다. 放肆함을 배척하고 단정하면서도 遒勁한 그러면서도 飄逸함과 생기발랄함을 하나의 점과 획을 동시에 담아내고자 했다. 유재를 통해 書如其人의 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 다. 유재는 비록 이성적인 敬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지만 서예를 통해 감성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담아냄으로써 이성과 감성이 한데 어우러진 균형감 있는 선비로서 살고자 했다.
书法是中国传统艺术的精华。书法是什麽? 传统的书法理论包括叁箇理 论. 唐代张怀瓘议论说文字用来宣扬记载事情在于它的功能. 卦则浑同天地 之深远渺茫,隐藏精气的聚散变化;文字能发挥道理,使隐微难见的明显 起来. 如此知道卦象是文字的开始,万物的根源. 這種看法就是觀物取象基 礎的法象書法. 明代项穆认为书法是人格的表现,”心之所发”,”运之为字 迹”,”人品既殊,性情各异,笔势所运,邪正自形”. 关于书法学习,项穆 犟调内心修养,强调一开始便应注意精神与形式的互相渗透. 這種看法就 是心畵基礎的心學書法. 宋代苏东坡本人曾经说过, “古人论书,兼论其人 生平;苟非其人,虽工不贵.” 这是很有名的书法评价标准,他提出了“工” 和“贵”两个审美范畴. “工”就是要承认你的书法技术,不是说你这个人品德 不好字就写得不好. 淸代刘熙载在书概中说:“书,如也. 如其学,如其 才,如其志,总之曰如其人而已.” 学问、才能、志趣、构筑了人的精神风 貌,也确立了一个书法家的创作风范. 這樣的看法就是“書如其人” 或者“作 品即人”心象書法. 这是很早就深入人心的一个艺术理论范畴. 这種书法理 论中书法是人格的表现就是宋基勉书法理论的核心. 宋基勉的「笔赋」是对 于传统书法理论表达自己的见解. 笔赋的内容包括书法实技基础理论和传 统书法认识. 他通过书法的熟练到达存天理去人欲, 正人心去人欲. 他不但 書法理論家亦書法實技兼備的儒者, 兼備理性和感性的君子.
9,900원
개혁개방과 동시, 1978년 10월, 山東大에서 개최한〈文科理論研討會>를 출발로 중국학계는 孔孟荀의 先秦과 漢唐ㆍ宋明ㆍ淸代의 儒學, 나아가 근대ㆍ當代新儒學, 그리고 유가경전ㆍ儒學과 민족문화ㆍ현대사회ㆍ경제건설ㆍ덕치사상ㆍ화해사회ㆍ가정윤리ㆍ효문화ㆍ법률문화ㆍ동아문명ㆍMarx주의, 儒商ㆍ 儒敎ㆍ유학보급ㆍ유교세계화ㆍ해협양안 교류 등 제반 문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된다. 1978년부터 2009년까지 모두 297차 학술회의가 개최되어 역대유학과 유가문화에 대한 심층 토론과 평가를 통하여 괄목할 학문성과를 성취하고, 수많은 유학관련 학술단체가 창립되었다. 이처럼 1980년대를 시점으로 1990년대를 경과, 2000년대까지 중국 학술문화계에 성행한 ‘文化熱’과 ‘儒學熱’, ‘國學熱’은 전통문화와 유학사상에 대한 광범하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여 유학부흥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중국의 “以德治国” 책략과 ‘21세기 中華民族의 復興實現’과 ‘和諧社會’ 건설은 1994년 30개국 참가의〈國際儒學聯合會> 창립되고, 2003년〈孔子學院>설립, 2010년 말 96개국 322개 <孔子學院>이 설립되어 각종 학술활동과 문화교류가 추진되고 있다. 國際儒學聯合會의 中國政法大ㆍ上海師大ㆍ四川大와의〈國際儒學院>설립; 北京大등의<儒藏>편찬사업, 청화대 등의<國學院>ㆍ人民大의 < 孔子 硏究院>ㆍ山東大등의<儒學硏究中心>ㆍ北京大등의<高等人文學院>설립, 北京大등의〈國學百家講壇〉과정을 통하여 유가의 학술ㆍ사회ㆍ문화ㆍ경제영역과의 교류를 통한 전통문화와 국학문화의 이해와 수용을 모색하고, 유가문화를 주류문화로 회복하며, 유학인재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금년 1 월, 文革시기 타도의 대상이었던 孔子를 전통문화의 중심으로 회복 과정을 거쳐 孔子銅像을 天安門광장 우측의 國家博物館북향 정문에 설치하고 추존을 하였다. 그러나 여론의 압력으로 설치 100일 만에 박물관 내부로 이전하여 들 끓는 불만을 평정시켰다. 물론 유학의 부흥운동이 일조일석에 중국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指導理念이나 社會綱領으로 채택되어 全般儒家化로 변화하는 기적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 날수 없다는 현실을 공감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중국 유학부흥운동의 성공적인 전개를 위한 체계화ㆍ현대화ㆍ대중화ㆍ정보화ㆍ제도화의 추진과제를 제시함으로서 미래를 전망하여 유학이 중국 전통 문화의 주류로의 복귀를 기대한다. 다만 중국 주류문화의 조정과정에서 Marx주의를 배제ㆍ수용하지 않는 유학의 5개 부흥운동과제 추진을 외부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문제는 더욱 해결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중국학술계는 Marx주의 이론에 근거, 연구 활동하는 학술기관의 학자들이 대부분이며, Marx주의가 지배하는 기본구조와 현실여건에서 유학연구와 추진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 학문연구의 실정을 좀 더 냉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중국의 유학부흥운동의 진전을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는 변화하므로 중국에서의 유학부흥운동은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확신한다. 중국의 유학부흥운동의 성공은 갈수록 침체되고 후퇴하고 있는 한국유학의 부흥에 활력소로 작용할 날이 머지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與改革開放同時,以1978年10月由山東大學主辦的<文科理論硏討 會>爲起點,中國學術界對孔孟荀的先秦和漢唐、宋明、淸代的儒學,近 代、當代新儒學,以及儒家經典、儒學和民族文化、現代社會、經濟建 設、德治思想、和諧社會、家庭倫理、孝文化、法律文化、東亞文明、 馬克思主義,儒商、儒敎、儒學普及、儒敎世界化、海峽兩岸交流等諸 多問題進行了活躍的討論。自1978年至2009年,共計召開297次的學術 會議,通過對歷代儒學和儒家文化的深入討論和評價, 取得了令人刮目 相看的學術成果,成立了許多有關儒學的學術團體。以1980年代爲起 點,經由1990年代至於2000年代,在中國學術文化界盛行的“文化熱”和 “儒學熱”、“國學熱”, 對傳統文化和儒學思想形成了廣範而開放的趨勢, 爲儒學復興活動的活躍展開奠定了基礎。中國的“以德治国”方略和“21世 紀中華民族的復興實現”和“和諧社會”建設, 有1994年成立由30個國家 組成的<國際儒學聯合會>,2003年設立<孔子學院>,而2010年末在 96個國家設立322所<孔子學院>,推動着漢語敎學和文化交流。通過 國際儒學聯合會與中國政法大學、上海師範大學、四川大學<國際儒學 院>的設立; 北京大學等的<儒藏>編纂工程; 淸華大學等的<國學院>、 人民大學的<孔子硏究院>、山東大學的<儒學硏究中心>、北京大學等的 <高等人文學院>的設立; 北京大學等的<國學百家講壇〉課程,摸索出通 過儒家學術、社會、文化、經濟等領域的交流而理解和接受傳統文化及 國學文化的道路,使儒家文化恢復其主流文化的地位,爲培養儒學人才 作出努力。2011年1月,經過恢復文革時期的打倒對象孔子爲傳統文化 中心的過程,孔子銅像在位於天安門廣場右側的國家博物館北門落成。 然而由於輿論壓力落成百日被移到博物館內部,平息了沸沸揚揚的不滿 情緖。當然儒學復興運動在一朝一夕之間被採納爲支配中國現代社會的指導理念或社 會綱領,變成全般儒家化的奇績旣不發生也不可能發生。 所以本文爲中國儒學復興運動的成功開展提示了體系化、現代化、大衆 化、信息化、制度化的推展課題,展望未來期待儒學恢復中國傳統文化 的主流地位。不過也確認到,如果在中國主流文化的調整過程中,從外 部的觀點去接近排擠和不接受馬克思主義的儒學五大復興運動課題的推 展,那麽問題將更加難以解決。中國學術界大部分是根據馬克思主義理 論進行硏究活動的學術單位專家學者,他們不得不在馬克思主義支配的 基本結構和現實環境下進行儒學硏究和推進活動,有必要對這一學問硏 究的環境進行更加冷靜的理解。但是也沒有必要對中國儒學復興運動的 進展採取悲觀而失望的態度。因爲隨着時間的流逝歷史將變化,所以確 信儒學復興運動在中國必定會成功。期待中國儒學復興運動的成功在不 遠的將來成爲越來越停滯後退的韓國儒學復興的活力素。
改革開放이래 中國大陸에서 개최된 儒學學術會議상황 - 2000년에서 2010년까지-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2집 2011.08 pp.189-293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18,300원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1978년 10월부터 山東大가 주최한〈文科理論硏討會〉를 시작으로 중국학계는 先秦의 孔孟荀思想 및 漢唐儒學ㆍ宋明理學ㆍ淸代哲學ㆍ近代哲學ㆍ當代新儒學, 그리고 儒學復興ㆍ儒家文化ㆍ儒家倫理ㆍ當代儒商....등의 발전방향을 토론하여 왔다. 四川師範大蔡方鹿교수팀이 수집한 자료(1978~2006)와 편집번역자(梁承武)가 2001~2011년간《中國儒學年鑒》제1~11집의 수집정리 자료에 의하면1978~2010년간에 걸쳐 모두 336회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중국역대 유학사상과 유가문화를 토론하고, 공자와 유학을 새롭게 평가하여 유학사상의 학문성과를 축적하고,무수한 공자와 유학관련 학술단체가 창립되었다. 1980~1990년대를 경유, 2000년대에 이르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국학술문화와 사회전반에 성행한 이른바 ‘文化熱’, ‘儒學熱’, ‘國學熱’은 중국의 전통문화와 유학사상의 집중조명과 토론을 통하여 괄목할 학술성과를 올리고 있다. 중국은 지난 30년간의 개혁개방을 통하여 바야흐로 유학 부흥운동을 대내외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외부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유학부흥운동에는 부족한 점도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쉬지않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 기대와 믿음을 갖는다.
艮齋學會彙報/艮齋學會 任員名單/艮齋學會 會則/艮齋學會 編輯委員會 運營規定/『艮齋學論叢』審査結果 報告書/심사 의견서/艮齋學會 倫理委員會 運營規程/『艮齋學論叢』原稿募集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2집 2011.08 pp.195-322
※ 기관로그인 시 무료 이용이 가능합니다.
20,000원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선택하신 파일을 압축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