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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학논총 [艮齋學論叢]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간재학회 [艮齋學會]
  • pISSN
    1975-6828
  • 간기
    연간
  • 수록기간
    1994 ~ 2014
  • 주제분류
    인문학 > 철학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제14집 (5건)
No
1

艮齋 田愚와 醒菴 李喆榮의 性理思想의 同異와 特徵

林玉均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4집 2012.08 pp.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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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0원

이 글에서는 간재 전우와 성암 이철영(1867~1919)의 성리사상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간재학회의 활동을 통해 간재는 많이 알려졌으나, 이철영은 많이 알려진 학자는 아니다.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최효식의 「성암 이철영의 생애와 사상」이 있고, 금장태·고광직이 『유학근백년』에 그 대강을 설명하였다. 성암의 성리사상을 단독으로 다룬 논문은 아직 없으며, 이상익의 석사논문이 호락논쟁과 그의 성리사상을 연결하여 연구한 유일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 백원철은 성암의 항일 행동을 다루었고, 박우훈은 성암이 부녀자 교육을 위해 쓴 저술인 『內範要覽』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는 간재와 성암의 성리사상의 동이와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두 사람이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했던 명덕설에 관한 논변을 먼저 검토하고, 기호학파라는 공통의 입장에서 같이 비판했던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검토한 다음,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의 심성론을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했던 간재의 성사심제설과 성암의 성삼양설을 검토하는 순서로 논문을 진행하고자 한다.

這論文考察艮齋田愚與醒菴李喆榮的性理思想的同異和特徵. 艮齋 與醒菴對明德的問題直接展開討論. 艮齋主張明德是心, 醒菴主張明 德是心性之合. 他們有三個方面的異見. 第一, 艮齋主張心爲主性爲 貧, 醒菴主張使之能者爲主能之者爲貧. 第二, 艮齋看做對明德的定義 與對心的定義同一, 醒菴看做對明德的定義與對心的定義不同. 第三, 艮齋以爲栗谷的語錄不足爲證據, 醒菴以爲栗谷的語錄充分地爲證據. 艮齋與醒菴兩個人都是畿湖學派的學人. 他們根據栗谷的理無爲氣 有爲學說而排斥華西與蘆沙的對理之能動性的主張. 華西以爲太極有 動靜, 所以氣機有動靜, 蘆沙以爲如果認同氣自爾的話, 氣奪理的地位. 艮齋與醒菴擁護栗谷的學說. 他們主張如果對理附與能動性, 不能說明 天地間惡的存在. 而且艮齋與醒菴試圖綜合朝鮮後期的心性論. 艮齋主 張性師心弟說·性尊心卑說, 醒菴主張性三樣說. 醒菴把未發分爲中底 未發·不中底未發, 把性分爲本然之性·氣之本然之性·氣之氣質之性. 根據以上討論, 醒菴根據栗谷說而展開自己的論旨, 艮齋有意栗谷 以後畿湖學派思想流派而展開自己的論旨. 艮齋與醒菴兩個人的主張 有點不同, 可是他們作爲在朝鮮後期生存的學者, 有同一的問題意識.

2

說齋 蘇學奎의 생애와 학문

崔英成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4집 2012.08 pp.3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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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원

이 글은 근세 유학자 소학규(蘇學奎: 1859∼1948)의 생애와 학문을 고찰한 것이다. 소학규는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젊어서 문장을 연마하다가 마흔이 넘어서 간재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강조한 학인이었다. 그의 학풍은 ‘참으로 알고 실제로 행한다’는 진지실천(眞知實踐) 넉 자로 요약된다.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학문 본령이 아니었다. 소학규의 학문은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스승의 학문적 권위를 옹위(擁衛)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생토록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러나 간재의 학통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학파의 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정되지만 그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 보이거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는 학설은 찾기 어렵다. 이것이 소학규의 학문이 지닌 한계성이다. 그의 생애와 학문은 공자가 이른바 “돈독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기로써 지키고 도를 잘 구현해야 한다”(篤信好學, 守死善道)고 한 성훈(聖訓)의 실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This article examines life and studies of Yeoljae So Hak-kyu (1859∼1948), a modern Confucianist. He was born in Iksan, Jeollabuk-do and a student of Ganjae Jeonwu. He brushed up his study for himself in his youth and became a pupil of Ganjae over at the age of forty. He stressed practice more than theory. His studies can be summarized as 'Truly know and do in practice (眞知實踐).' Theoretical research on Neo-Confucianism was not his primary issue. His studies were mainly about following teacher's theories and respecting authority of the theories, which were strictly kept for Yeoljae's entire life. Although his contributions in thoroughly following the scholarly mantle of Ganjae and developing the school are recognized, it is challenging to find theories with his own characteristics or uniqueness, which makes his studies' limitations. Significance of his life and studies could be found in practice of the teachings of Confucius saying 'Firmly believe, love learning, guard by the death and realize righteousness (篤信好學, 守死善道).'

3

有菴 李厚林의 學問과 思想 -艮齋學의 連續과 不連續의 觀點에서-

張炳漢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4집 2012.08 pp.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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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有菴 李厚林(字 敬信, 1893~1972)은 경남 泗川에서 20세기 초반 國亡의 일제 강점기와 광복 및 6.25 동란, 1960년도에서 1970년도 이어지는 5.16 군사혁명 및 유신정권 체제 등을 거치면서 살았던, 즉 조선 유학의 종착점에 서 있었던 在野學者라고 할 수 있다. 유암은 艮齋 문하에 2년, 노사학파의 松山 權載奎(1870~1952)의 문하에 30여년을 드나들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두 문하의 문인들과 광범위한 인적․학적 교유를 가지면서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학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유암의 시대진단과 이에 대응하는 삶의 자세는 대체적으로 간재학의 守義自竫의 정신체계를 계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의 公義, 公利, 公心의 경세사상은 율곡의 公道論的 정신세계에 맞닿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문장론에서는 주자와 간재의 도본문말론에 기초하면서도 문장의 근본을 四書가 아닌 六經에 기초하는 것과 明心과 養氣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점 등은 나름의 독자적인 체계를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心性論에 있어서는 처음 간재가 일러준 ‘미발의 靜體위주의 工夫論’에 근거한 율곡의 ‘靜坐收斂’을 통한 ‘存心’ 공부에 회의하고, 율곡의 正心을 비롯한 顔子의 四勿箴, 曾子의 三省論, 仲弓의 主敬行恕, 程朱의 主敬論 등의 공부론으로 전환을 기획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이는 또한 간재학의 불연속의 지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심성론의 전변문제와 관련해서는, 선사 간재의 性師心弟說의 계승을 위해 노력한 측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心과 性의 尊卑, 師弟의 비교 논의가 거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불연속의 지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암은 심과 성의 비교논의에 있어, 현실적인 心의 神靈性과 功能을 찬미하고 心學 工夫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心이 一身의 主宰者임을 강조하고 있는 점 등은 오히려 性에 비하여 心의 우위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그의 공부론에서 본질적인 存心에서 현실적인 正心으로의 전환, 문장론에서의 明心, 심성론에서의 用心․良心․公心 등과 같은 心學의 강조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유암의 이와 같은 심학에의 강조는 당시 한주학파, 노사학파, 화서학파를 비롯한 전반적인 사상의 중심이 心學의 강조로 흐르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서, 간재의 ‘心本性’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한계와 위기인식을 감지하고, 심학에로의 선회를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유암은 다시 孔子의 ‘人能弘道’와 張載의 ‘心能盡性’에 근거하여, 사람과 心의 현실적 功能 가치를 우뚝하게 상정하고 있다. 유암은 당시 간재학과 노사학의 두 문하를 드나들었다는 비판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광범위한 師友 및 師弟 관계의 인적・학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학적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서학이 깊이 침염하여 우리의 민족 정신을 빼앗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담장 내의 師友들 간에 理氣心性論관 관련한 異見으로 인하여 분열과 분파를 조장하는 상황을 개탄하고, 이에 대한 극복의 일환으로 모든 학파는 理의 一統 정신에 귀결할 것을 선창한다. 이에 더 나아가 유학의 분파주의 조장의 중심에 있었던 주자의 성리학적 窮理 공부에 대한 어떤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유학계뿐만 아니라 불가와 도가의 사상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한국 사상의 일통주의 즉 ‘心·性·神·理는 모두 같은 하나이다.’를 선양하였다.

Yuam Yi Hu-rim (affectionate name is Gyeongsin) lived in Sacheon, Gyeongsangnam-do in the early and middle period of the 20th century (1893~1972). He is a non-governmental scholar of the last Confucian generation of Korea, and experienced the period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Korean War and the Yusin regime of the country. He learned under the schools of Ganjaehak study founder Yangjae Jeon U (1841~1922) and of Yeongnam Nosahak study's successor Songsan Gwon Jae-gyu (1870~1952), as he engaged in wider ranges of human and academic exchanges, thus developing his own creative study system. His diagnosis of times and his response to such are based on the Ganjaehak philosophy of "keeping righteousness and cleaning oneself", and his world view of public righteousness, public interest and public mindset are linked with Yulkgok's public moral and ethic philosophy. He endeavored to inherit his teacher Ganjae's Seongsasimjeseol (性師心弟說, a theory of putting Reason as the teacher and mind as the student). However, rather, he praised realistic mind's divinity and ability and realized the importance of mind study. He also emphasized that mind should govern body. This is understood to mean that he prioritized mind over human nature. At that time, Yuam emphasized mind study and probably aimed to shift to mind study because he sensed the limitations and possible crisis of Ganjae's Simbonseong (心本性) theory, amid various schools of thoughts (Hanjugak, Nosahak, and Hwaseohak) emphasizing mind study. Amid western studies deeply invading Korean nationals and disarraying them, he indicated the limitations of Juja's Neo-Confucianism, which triggered Confucian factionalism, and led the promotion of Korean thoughts' unification that could involve not only Confucian circles but also Buddhist and Taoist circles, namely, the thought that mind, human nature, divinity and reasoning are all one thing.

4

瑞巖 金熙鎭의 학문과 사상

魯平奎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4집 2012.08 pp.1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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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0원

본고는 간재학이 근현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의 일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간재의 재전 제자 중 瑞巖을 택하여 그가 무슨 공부를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를 밝혀보려고 한 것인데 다만 선행 연구가 없으므로 극히 초보적인 연구만을 진행하였다. 서암은 西坪 金基尙을 통해 율곡을 유학의 정맥으로 알게 되었고 悳泉 成璣運과 陽齋 權純命의 인도로 간재학으로 들어갔다. 다만 덕천, 양재에게 배웠기에 간재학파의 2파중 敎學을 더욱 중시하는 학맥을 이었다. 서암은 간재 이래의 명덕심설을 견지하고 松潭 李柏淳의 명덕성론을 비판하였다. 서암은 夷狄禽獸인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性을 실현하는 정치라고 한다. 그는 서양의 유물론이나 유심론으로 나라나 세계를 바로 다스릴 수 없고 오직 유학의 惟性論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서암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서당교육은 다분히 종교적, 유교적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서암은 본래 종교성이 강한 간재학이 현대에 서당교육을 통해 현실에 적응해간 좋은 실례이다. 현대 유교의 중흥책이 넓게는 간재학 안에서, 좁게는 간재의 재전세대인 서암 등의 세대 안에서 찾아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In this paper, the elemental study on SeoAm(瑞巖) is carried out, for nobody studied on him before. The main source of this paper is the collection of his works, SeoAmYuGo(瑞巖遺稿). SeoAm knew that YulGok(栗谷) was the greatest successor in confucianism by the instruction of his teacher, SeoPyung(西坪) KimKiSang(金基尙). After that, he studied Ganjae(艮齋)'s thought by virtue of two teachers, DeokCheon(悳泉) SeongGiUn(成璣運)and YangJae(陽齋) GuenSunMyung(權純命). For he learned from them, he emphasized teaching and learning confucian study. He protected Ganjae's MyungDeokSimSeol(明德心說), and criticized SonDam(松潭) LeeBaekSoon(李柏淳)’s MyungDeokSeongSeol(明德性說). He insisted What can change the world of corruption and brute is the politics of original good nature of man, and not by materialism and spiritualism but by YuSeongLon(惟性論) nations and the world can be governed justly. Many factors of religion were in it that he teached his disciples in his own SeoDang(서당). It became a good sample that GanJaeHak(艮齋學)-it was much religious originally-was well adapted to modern society. But It must go over some limits of its age. It is not impossible that we find out the plot for the revival of confucianism in GanJaeHak and SeoAm's thought.

5

剛菴 風竹 文人畵에 대한 艮齋 性理學의 ‘理’的 照明

權允熙

간재학회 간재학논총 제14집 2012.08 pp.12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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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0원

艮齋 田愚(1841∼1922)의 성리학은 性尊心卑說, 性師心弟說로 요약되고 있다. 주로 인간의 心性, 심성의 修養, 人性·物性의 同異 문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이들 여러 문제들은 존성의 근거로 전개되고 있다. 또한 존성의 근거는 氣에 대한 理의 主宰性에 있다. 性을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至善의 理로 인식하는 간재의 성리학은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자존의 입장에서 排日·斥日등의 義理思想으로 발현되었다. 艮門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講學과 守義를 통한 抗日 抵抗運動을 벌이게 된다. 剛菴 宋成鏞(1913∼1999)은 艮門이었던 裕齋 宋基冕(1882∼1956)의 三男으로 서예가이자 문인화가였으며, 특히 풍죽 문인화(이하 ‘풍죽‘으로 칭함)의 최고 名人이었다. 흔히 문인화는 보이는 사물의 物狀的 형식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物象이 그대로 形似되지 않아야만 문인화로서의 審美品格과 價値를 가지게 되고 있다. 따라서 문인화는 신사와 형사를 함께 아우르는 예술이다. 강암의 풍죽은 重神似와 陽剛 위주의 독특한 심미 품격을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문인화이다. 이는 강암의 天賦的인 性靈을 바탕으로 하여 선고인 유재의 철학과 사상이 반영된 결과이며 이는 곧 간재의 성리학에서 유래되었음을 여러 방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 특히, 筒竹을 중심으로 한 강암 풍죽에는 形態的 範疇로 陽剛, 以疏襯密, 諧謔, 奇怪의 미감이 표현되어 있고, 心態的 範疇에서는 高古, 淡泊, 堅貞, 狂逸의 미감이 내재되어 있다 볼 있다. 특히 양강의 미감은 강암 풍죽의 대표적인 특징을 이룬다. 강암 풍죽의 특징은 풍죽이 통상 상징하는 일종의 청풍고절의 의미체이며 시련을 극복하는 불굴의 표상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곧 간재의 성리학의 중심을 이루는 존성의 리 개념의 심미적 표현으로, 형이상학의 형이하적 가시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강암의 풍죽은 간재 성리학의 理 槪念의 예술적 발화라고 말하겠다. 따라서 강암 풍죽에는 간재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尊性의 理 槪念과 의리사상이 심미적 체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The Sung Confucianism of Ganjae Jeon-Woo(1841~1922) can be abstracted as the theory that the nature is high leveled and the mind is low leveled or that the nature is a teacher and the mind is a student. Mainly, man's mentality, character-building, the different and the same thing of human nature and physical properties are very important for him. Characteristic of his Sung Confucianism is respecting mentality, and it based on the theory that the nature. He knew that mentality is the nicest nature originally. His thought was revealed as loyalty such as rejecting Japanese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So his students conducted a resistance movement against Japan through lecture and loyalty according to his teaching. And Gang'am Sung-Yong Song(1913~1999) who is the third son of Yuje Gi-Myeon Song(one of the Ganjae's students)is a calligrapher and literary painter, specialized in windy bamboo painting. Literary painting should represent an object but not too much picturesquely. It must show painter's thought. If so, it becomes refined and valuable. So, literary painting should show both of them. Gang-am's windy bamboos paintings that focus on painter's thoughts and man's strongness show an unique grace. It resulted from his father's philosophy and thought based on his natural spirit. This came from Ganjae's Sung Confucianism. His windy bamboos paintings, especially his whole windy bamboos paintings, have man's strongness, amplifying density by thinness, humor, being extraordinary under a formal category. And refinement, disinterestedness, justice, no restraint from expression under spiritual 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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