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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영어학습동아리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의미 : 한인 이민 여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5호 2015.02 pp.291-331
...한인 이민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된 온라인 영어 학습동아리인 ‘워너비영어’를 대상으로 동아리의 생성및 발달과정, 그리고 학습활동이 그들의 삶에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2년간의 참여관찰과 심층면담을 통해 학습동아리가 어떤 계기로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고찰해보고 그들의 학습활동이 갖는 다면적인 의미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워너비영어’ 참여자들은 우연을 계기로 온라인동아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멤버들의 열정과 절실함을 바탕으로 서로 합심하여 동아리의 정착 및 발전에 노력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학습동아리 활동은 첫째, 미국에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수단인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꼭 필요한 학습수단으로 인지된다. 둘째, 타향살이를 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열혈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동지애를 느낀다. 셋째, 동아리 초기 정착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학습의 장(field)에서의 사심 없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아비투스(habitus)를 경험한다. 넷째, 그들의 언어 자산인 ‘고급영어’를 소속기호(signs ofbelong)로 사용하여 신입 멤버 선출과정에서 일종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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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과 배움의 경계가 불분명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여성학습자는 교육의 기회에 있어 출산, 육아, 가사 등의 다양한 이유로 소외되어온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는 그간 평생학습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해외거주 한인 이민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된 온라인 영어 학습동아리인 ‘워너비영어’를 대상으로 동아리의 생성및 발달과정, 그리고 학습활동이 그들의 삶에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2년간의 참여관찰과 심층면담을 통해 학습동아리가 어떤 계기로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고찰해보고 그들의 학습활동이 갖는 다면적인 의미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워너비영어’ 참여자들은 우연을 계기로 온라인동아리에 합류하게 되었고 멤버들의 열정과 절실함을 바탕으로 서로 합심하여 동아리의 정착 및 발전에 노력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학습동아리 활동은 첫째, 미국에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수단인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꼭 필요한 학습수단으로 인지된다. 둘째, 타향살이를 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열혈여성과의 만남을 통해 동지애를 느낀다. 셋째, 동아리 초기 정착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학습의 장(field)에서의 사심 없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아비투스(habitus)를 경험한다. 넷째, 그들의 언어 자산인 ‘고급영어’를 소속기호(signs ofbelong)로 사용하여 신입 멤버 선출과정에서 일종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를 시도한다.
We live without any clear boundary between learning and living. Yet, for centuries, women have been denied long-term educational opportunities due to gender norms that promoted their domesticity and management of childcare and housework. This study aimed to examine the emergence, development, and learning activity of anonline English study circle named Wanna-Be English comprised of Korean immigrant women living in the United States. Through participation in the study circle since its launch and in-depth interviews with its six members, this study closely observed trends in the group during its first two years of activity. Along with these trends, the study also identifies what learning meant to group members and how it impacted their lives. Results suggest that thewomen’s learning activity in the online study circle was (1) a tool for learning English necessary for survival in the United States, (2) a source of camaraderie and friendship by way of interactions with other active members, (3) a method of study encouraging a habitus of selflessness, and (4) an instrument by which members distinguished themselves from other novice English learners due to their high-proficiency language capital.
일본 역신 설화 속의 도래인 : 재일한인의 원류를 찾아서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5호 2015.02 pp.39-68
...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이 단순한 의학사나 질병사를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 고대 국가의 형성기에 도래인들은앞선 농업기술을 비롯한 여러 첨단 산업 기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 종교와 건축등 다방면의 선진 문물을 전파해 환대받고 존중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래의 것들에 배타적이었던 토착민들에게 도래인은 역병과 재난을 몰고 온 불청객에 불과한존재이기도 했다. 본고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내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신을 단순한 역병을 초래하는 신이 아닌, 병과 재난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주는 민중의 수호신으로 위상을 높여간 도래인들의 모습을 설화를 통해 고찰해보았다. 재일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당시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 치열하게 삶을 영위해간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한일관계의 심층적 연원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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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에는 역병이란 신이 일으키는 재앙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 신화와설화들이 다수 전해져온다. 그런데 일본의 역신(疫神)관련 전승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한반도, 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재일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이 단순한 의학사나 질병사를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입체적이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본 고대 국가의 형성기에 도래인들은앞선 농업기술을 비롯한 여러 첨단 산업 기술뿐만 아니라 학문과 사상, 종교와 건축등 다방면의 선진 문물을 전파해 환대받고 존중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외래의 것들에 배타적이었던 토착민들에게 도래인은 역병과 재난을 몰고 온 불청객에 불과한존재이기도 했다. 본고는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내고 결국에는 자신들의 신을 단순한 역병을 초래하는 신이 아닌, 병과 재난을 없애고 복을 가져다주는 민중의 수호신으로 위상을 높여간 도래인들의 모습을 설화를 통해 고찰해보았다. 재일한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당시 일본의 토착사회에 뿌리내리며 치열하게 삶을 영위해간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한일관계의 심층적 연원을 되짚어 보고자 했다.
Japan has many myths and legends which tell us that plagues are believed to a disaster caused by God’s wrath. Surprisingly, when looking at Japanese myths and folklore related with the God of Epidemics, we find that many traditions have a deep relation to those of settlers who came from Korea. This mythology captures both the lives of the settlers from Korea and broader cultural aspects of the era. The myths also describe them more vividly than most historical medical literature. During the early years of ancient Japan, settlers from overseas spread advanced science and technology such as agriculture, metalworking, and porcelain, as well as abstract cultural advances such as deeper knowledge, thought, religion and architectural design. As a result, they were naturally welcomed and respected. However, settlers from overseas were also seen uninvited guests bringing plagues and disasters to the natives who were wary of exotic things. Nevertheless, through myths and folklore we can find that settlers from Korea, embedded in Japanese society, kept their traditional faith and were able to enhance the status of gods to that of guardians of the people, protecting against diseases and disasters as well as bringing blessings. This paper tries to trace the vestiges of ancient settlers from Korea through Japanese myths which originate from Korean residents in Japan. Studying Japanese myths reveals fierce lives of ancient settlers from Korea, which were deeply rooted in the native communities of Japan. Hopefully, this will help develop a more positiv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residents in Japan and native Japanes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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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디아스포라의 초민족문화적 비지니스와 정체성의 정치학 : 한인이민들의 스시 비지니스와 “아시아인” 정체성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4호 2014.10 pp.397-428
...한인들이 일본 음식인 스시(초밥)를 만들어 파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문화적, 인구사회학적, 그리고 상업적 이유들이 있다. 한인들은 일본식으로 가게를 꾸미고, 일본식복식을 하며, ‘일본식’ 음식을 만들어 주류사회의 성원들에게 파는데, 지난 20여년 사이에 세계의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는 일본음식의 세계화 뒤에는 바로 세계 각국에흩어져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비지니스를 통해 한인이민들이세계 여러 곳에서 일본의 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질문은 이렇게 세계화된 문화적 상업적 환경에서 일본의 문화를 ‘연출’하는 이들 한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글은 일식당을 운영하는 일이 이민사회에서 한인 이민자들로 하여금 한인만의 공동체를 떠나 일식을 선호하는 주류사회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이들의 정체성을 보다 큰 ‘아시아인’ 정체성으로 바꾸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세계화된’ 일본 문화를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좁은 ‘한민족’ 정체성 대신에 보다 큰 ‘아시아인’ 정체성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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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구주, 그리고 대양주 등의 이민사회에서 많은 수의 한인들이 일본 음식인 스시(초밥)를 만들어 파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문화적, 인구사회학적, 그리고 상업적 이유들이 있다. 한인들은 일본식으로 가게를 꾸미고, 일본식복식을 하며, ‘일본식’ 음식을 만들어 주류사회의 성원들에게 파는데, 지난 20여년 사이에 세계의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는 일본음식의 세계화 뒤에는 바로 세계 각국에흩어져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비지니스를 통해 한인이민들이세계 여러 곳에서 일본의 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질문은 이렇게 세계화된 문화적 상업적 환경에서 일본의 문화를 ‘연출’하는 이들 한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글은 일식당을 운영하는 일이 이민사회에서 한인 이민자들로 하여금 한인만의 공동체를 떠나 일식을 선호하는 주류사회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이들의 정체성을 보다 큰 ‘아시아인’ 정체성으로 바꾸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세계화된’ 일본 문화를 ‘연출’함으로써 자신의 좁은 ‘한민족’ 정체성 대신에 보다 큰 ‘아시아인’ 정체성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Japanese restaurants and sushi bars are easily found in NorthAmerica, Western Europe and Oceania. Interestingly, the majority arerun by Korean migrants. There are socio-demographic (an increase inthe number of Korean immigrants but a decrease in that of Japaneseimmigrants), commercial (greater popularity and demand in Japanesefood), cultural and historical (colonial history that amalgamated theculinary traditions of Korea and Japan) reasons for this globalphenomenon. As a matter of fact, it is the Korean, but not theJapanese, migrants who globalised Japanese sushi. Wearing traditionalJapanese costumes, decorating their restaurants like those ofJapanese, and making and serving Japanese food, these Koreans donot simply “perform” but they “represent” Japanese culture to theworld. This paper explores how the Korean migrants who runJapanese restaurants perceive themselves and their businesses interms of their ethnic identity(ies). Based on interviews and participantobservations, this paper suggests that some of these Koreans tend to perceive themselves as “Asians” rather than “Koreans”. In so doing,they liberate themselves from the narrow ethnic and cultural boundaryof “Korean” identity and embrace a broader “Asian”identity. Here, wesee a case of an emergent “Asian” identity in Korean diaspora.
1920-3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공연예술활동 현황연구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4호 2014.10 pp.297-322
...한인들의 공연예술활동에 대한 연구이다. 이는 연해주 한인들의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밑거 름이 될 것이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자 소비에트 정권은 소수민족들을 사회주의 체제로영입하기 위해 소수민족문 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융화와 양보의 민족정책과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선전활동으로 예술을 이용한다. 이러한 당시 소련의 정치적인 상황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공식적으로 민족예술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 을 제공한다. 1920-3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공연예술활동은 소비에트연방의 민족정책과 예술정책의 특징들을 반영한다.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당시 소련의 예술경향을 반영한다. 즉, 비전문가들이 예술을 창작하고 공연하는 소인예술단(素人藝術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노동자청년극단(ТРАМ), 춤, 노래, 서커스, 재담,연극 등 여러 장르의 짧은 소품들을 한 공연에서 보여주는 에스트라다(Эстрада)형식의 공연, 민속춤과 음악의 공연무대화이다. 특히 이 당시 한인들의 공연작품에는 러시아의 클래식, 러시아 민속춤과 음악, 한인 들의 전통춤과 음악, 전통춤과 음악형식에 사회주의 이념의 내용을 담은 소비에트 한인들의 문화에서만 나타 나는 독특한 창작 작품들이 출현한다. 사회주의 이전 러시아 제정시기의 한인들에게 민족예술활동은 모국을 떠나온 이들의 그리움이 투영된 이주민 들의 활동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초기 소련시기의 한인들의 민족예술활동은 소수민족이지만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1928년 한인 라 디오방송, 1932년 고려극장의 설립, 1930년대에 활발히 개최된 소인예술단 민족예술경연대회에서 그 예술성 을 인정받게 된다. 소련사회에서 보편적인 예술의 환경에서 한인문화의 특수성을 녹여 독특한 민족예술세계 를 구축한 연해주 한인들의 공연예술문화는 1937년 강제이주 직전 꽃을 피우고 있었으나,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강행된 강제이주로 큰 손실을 입는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 러시아 현지 문헌과 사료 수집을 위한 현장조사, 연해주 한인신문『선봉』과 블라디보 스톡 고리끼 국립공공도서관(ПКПБ им А.М. Горького)에보관하는 연해주 공산당기관지 『Красное знам я(끄라스노예 즈나먀)』의 기사분석, 연해주국립문서보관소(ГАПК) 사료분석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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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23년~1937년(소련 탄생~강제이주전)까지 초기 소비에트 건설기의사회ㆍ문화적 환경 안에서 연 해주 한인들의 공연예술활동에 대한 연구이다. 이는 연해주 한인들의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밑거 름이 될 것이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자 소비에트 정권은 소수민족들을 사회주의 체제로영입하기 위해 소수민족문 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융화와 양보의 민족정책과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선전활동으로 예술을 이용한다. 이러한 당시 소련의 정치적인 상황은 연해주의 한인들이 공식적으로 민족예술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 을 제공한다. 1920-3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공연예술활동은 소비에트연방의 민족정책과 예술정책의 특징들을 반영한다.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당시 소련의 예술경향을 반영한다. 즉, 비전문가들이 예술을 창작하고 공연하는 소인예술단(素人藝術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노동자청년극단(ТРАМ), 춤, 노래, 서커스, 재담,연극 등 여러 장르의 짧은 소품들을 한 공연에서 보여주는 에스트라다(Эстрада)형식의 공연, 민속춤과 음악의 공연무대화이다. 특히 이 당시 한인들의 공연작품에는 러시아의 클래식, 러시아 민속춤과 음악, 한인 들의 전통춤과 음악, 전통춤과 음악형식에 사회주의 이념의 내용을 담은 소비에트 한인들의 문화에서만 나타 나는 독특한 창작 작품들이 출현한다. 사회주의 이전 러시아 제정시기의 한인들에게 민족예술활동은 모국을 떠나온 이들의 그리움이 투영된 이주민 들의 활동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초기 소련시기의 한인들의 민족예술활동은 소수민족이지만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1928년 한인 라 디오방송, 1932년 고려극장의 설립, 1930년대에 활발히 개최된 소인예술단 민족예술경연대회에서 그 예술성 을 인정받게 된다. 소련사회에서 보편적인 예술의 환경에서 한인문화의 특수성을 녹여 독특한 민족예술세계 를 구축한 연해주 한인들의 공연예술문화는 1937년 강제이주 직전 꽃을 피우고 있었으나,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강행된 강제이주로 큰 손실을 입는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 러시아 현지 문헌과 사료 수집을 위한 현장조사, 연해주 한인신문『선봉』과 블라디보 스톡 고리끼 국립공공도서관(ПКПБ им А.М. Горького)에보관하는 연해주 공산당기관지 『Красное знам я(끄라스노예 즈나먀)』의 기사분석, 연해주국립문서보관소(ГАПК) 사료분석을 사용하였다.
This research is about Koreans’ performing arts activities in aMaritime province under the socio-cultural conditions of theconstruction period of USSR from 1923 to 1937(from the foundation ofUSSR to Korean- Russian’s deportation). The regime of communism executes a tolerant national policy forincorporating minority to their system. and They take advantage ofperforming arts as a tool for propaganda of socialism until 1937. Within those term, Koreans, who live in Maritime province at thattime, can be very active in Korean folk performing arts activities andbuild their own unique artistic character and form. Research methods include literature and library research, fieldsurveys, including existing literature in the National Russian Libraryof East Asian Literature. Sunbong, the Korean newspaper & Krasnoeznamya, the Soviet newspaper kept in State Public Library namedafter Gorky in Vladivostok, published in the maritime province ofRussia.
재미한인 시민단체의 다문화주의적 변신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4호 2014.10 pp.165-296
...한인 비영리단체 가운데 하나인 코리아타운청소년 커뮤니티 센터(한인 청소년회관, KYCC)는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 폭동을 계기로 다른 민족집단 및 그러한 단체와의 협력과 상호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문화적 변신을 위한 노력을 추진해 왔다. 커뮤니티를 강조하기 위 해 1993년 명칭을 Korean Youth Center에서 Korean Youth and CommunityCenter로 바꾸었으며 주로 한인을 대상으로 제공하던 서비스를 다른 민족구성원들에게도 확대하는 한편 청소년 비행 방지라는 전통적인 영역을 넘어 한인 커뮤니티 전체를 대상으로 활동의 다변화를 추구해 왔다. KYC는 3세의 마약 복용 등 청소년 문제로 고통을 받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주도한AADAP에 의해 한인 커뮤니 티가가 직면하게 될 청소년 비행에 대응하기 위해AADAP의 일부로 설립되었다가 자생력을 갖추어 독립한 단 체이다. 폭동 이후 한인커뮤니티에 대한 미국 정부와 주류사회의 관심을 받으면서 다문화적 노력을 추진하는 가운데 KYC는 양적으로 급격히 성장하였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상당한 ‘성장통’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관장이 갑자기 조직을 떠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이후 새로운 관장의 지도 하에 KYC는 조직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다문화적 변신을 더 욱 진지하게 추구하여 이사진과 스태프의 구성도 바꾸었으며 활동의 내용도 크게 확대하였다. 2005년에는 코 리아타운의 인적 구성의 변화를반영하는 동시에 ‘한인’이라는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에 기반을 가진 비 영리단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명칭을 다시 Koreatown Youth and CommunityCenter로 바꾸었다. 아직도 여러 가지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KYCC는 재미한인 비영리단체의 다문화적 변신의 노력을 잘 보여주는 흥미 있는 사례이다. 본 연구보고서는 이러한 KYCC의 탄생에서부터 조직으로서의 독립, 급격한 성장과그에 따른 아픔, 그리고 지 속적 발전과 다문화적 변신 노력을 잘 이해하고 보여주기위해 각 시기의 핵심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개인적인 삶과 조직에서의 활동을 청취하고 이를 생애사적인 방식으로 정리하는 시도를 하였다. 여기에 또한 KYCC에 서 일하고 있는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간부 2명을 인터뷰하여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려 시도하였다. 한편 KYCC와는 조금 다르게 한인 커뮤니티 내의 불평등과 계급 문제에 주목하면서 코리아타운 내에서 저임금 등 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인 및 타민족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코리아타운노동상담소(KIWA)의 핵심 구 성원과 한미박물관의 전 관장, 교포 언론인, 정계 진출을 희망하고 있고 남가주한인학생회장과주 상원 보좌관 으로 활동한 바 있는 2세 등을 인터뷰하여 KYCC의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재미한인의 다문화적 노력에 대한 연구는 호스트 사회에서 바라본다면 이민들의적응 노력이며 여기에서 다문 화주의 연구와 재외한인 연구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정주화 및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한국은 민족적 구성의변화에 직면하고 있으며 다문화주의 붐이라 할 정도로 각종 정책이 추진되고 있으나불행히도 재외한인들의 경험은 이러한 노력에 거 의 참고가 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연구는 한국의 다문화 상황에 대한 대응, 국제이해교육, 그리고 이민국가로 서의 체계적인 정책 수립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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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지역의 가장 규모가 큰 재미한인 비영리단체 가운데 하나인 코리아타운청소년 커뮤니티 센터(한인 청소년회관, KYCC)는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 폭동을 계기로 다른 민족집단 및 그러한 단체와의 협력과 상호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문화적 변신을 위한 노력을 추진해 왔다. 커뮤니티를 강조하기 위 해 1993년 명칭을 Korean Youth Center에서 Korean Youth and CommunityCenter로 바꾸었으며 주로 한인을 대상으로 제공하던 서비스를 다른 민족구성원들에게도 확대하는 한편 청소년 비행 방지라는 전통적인 영역을 넘어 한인 커뮤니티 전체를 대상으로 활동의 다변화를 추구해 왔다. KYC는 3세의 마약 복용 등 청소년 문제로 고통을 받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주도한AADAP에 의해 한인 커뮤니 티가가 직면하게 될 청소년 비행에 대응하기 위해AADAP의 일부로 설립되었다가 자생력을 갖추어 독립한 단 체이다. 폭동 이후 한인커뮤니티에 대한 미국 정부와 주류사회의 관심을 받으면서 다문화적 노력을 추진하는 가운데 KYC는 양적으로 급격히 성장하였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상당한 ‘성장통’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관장이 갑자기 조직을 떠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이후 새로운 관장의 지도 하에 KYC는 조직의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다문화적 변신을 더 욱 진지하게 추구하여 이사진과 스태프의 구성도 바꾸었으며 활동의 내용도 크게 확대하였다. 2005년에는 코 리아타운의 인적 구성의 변화를반영하는 동시에 ‘한인’이라는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에 기반을 가진 비 영리단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명칭을 다시 Koreatown Youth and CommunityCenter로 바꾸었다. 아직도 여러 가지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KYCC는 재미한인 비영리단체의 다문화적 변신의 노력을 잘 보여주는 흥미 있는 사례이다. 본 연구보고서는 이러한 KYCC의 탄생에서부터 조직으로서의 독립, 급격한 성장과그에 따른 아픔, 그리고 지 속적 발전과 다문화적 변신 노력을 잘 이해하고 보여주기위해 각 시기의 핵심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개인적인 삶과 조직에서의 활동을 청취하고 이를 생애사적인 방식으로 정리하는 시도를 하였다. 여기에 또한 KYCC에 서 일하고 있는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간부 2명을 인터뷰하여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려 시도하였다. 한편 KYCC와는 조금 다르게 한인 커뮤니티 내의 불평등과 계급 문제에 주목하면서 코리아타운 내에서 저임금 등 으로 고통받고 있는 한인 및 타민족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코리아타운노동상담소(KIWA)의 핵심 구 성원과 한미박물관의 전 관장, 교포 언론인, 정계 진출을 희망하고 있고 남가주한인학생회장과주 상원 보좌관 으로 활동한 바 있는 2세 등을 인터뷰하여 KYCC의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하였다. 재미한인의 다문화적 노력에 대한 연구는 호스트 사회에서 바라본다면 이민들의적응 노력이며 여기에서 다문 화주의 연구와 재외한인 연구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정주화 및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한국은 민족적 구성의변화에 직면하고 있으며 다문화주의 붐이라 할 정도로 각종 정책이 추진되고 있으나불행히도 재외한인들의 경험은 이러한 노력에 거 의 참고가 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연구는 한국의 다문화 상황에 대한 대응, 국제이해교육, 그리고 이민국가로 서의 체계적인 정책 수립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Koreatown Youth and Community Center(KYCC) is one of thelargest non-profit organizations of Korean Americans in L.A. areawhich has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living together with otherethnic groups” and made serious efforts to transform itself into amulticultural organization after the tragic riot which broke out onApril 29, 1992. It changed its name from Korean Youth Center intoKorean Youth and Community Center in 1993 in order to emphasizeits concern and efforts at community service and community building. From an organization devoted to the prevention of youth delinquenciesKYC tried to grow into a multipurpose non-profit organizationoffering social service to the Korean community. Originally found as a unit of AADAP which was established byJapanese Americans deeply concerned with drug problems of theirthird generation, KYC grew rapidly to become an independentorganization. The L.A. riot of 1992 was a tragic event but it providedan opportunity for KYC to expand dramatically in terms of size andbudget. Such rapid expansion was accompanied by “growth pain” and the director who led the expansion and transformation of KYC into acommunity service organization had to leave KYC abruptly. The next director has been successful in sustaining the developmentof the organization and in transforming KYC into a truly multiculturalorganization. It changed its name again in 2005 into Koreatown Youthand Community Center to confirm the success of its multiculturalefforts. KYCC has yet to cope with may problems but it provides aninteresting window to understand multicultural efforts of KoreanAmericans. This study examines the evolution of multicultural efforts of aKorean-American NPO after the L.A. Riot, focusing on its leadership. Instead of concentrating all the resources on helpingKorean-Americans, KYCC has tried to reach out and serve the Blacksand Hispanics within and near he Koreatown in L.A. Its efforts are based on the fact that Korean-Americans have tolive together and cooperate with other ethnic groups. Several otherKorean-American NPO's are also making efforts to serve not onlyKorean- Americans, but also other ethnic groups. Many Korean-American leaders feel it important to make suchmulticultural efforts. However, KYCC and others also face criticismsand discontent from many Korean-Americans who feel that thelimited human and financial resources of the community should befocused on helping those Korean-Americans who are in need. Through a short term fieldwork in L.A., this study tried to find outwhat are important experiences and qualities for growing up ascompetent leaders in multicultural society by offering a life history ofKYC from its birth and independence from AADAP, its growth, and to its successful transformation into a multicultural non-profitorganization serving the people living in and out of Koreatown. Thisstudy experimented with a new method of presentation by showingthe life course of KYCC through the life histories of each key memberof each life stage. It also tried to provide richness by offering the lifehistories of other key peoples.
재외한인 네트워크의 새로운 방향과 과제 - 미래를 위한‘재외한인 비전 하우스’를 세우자 -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34호 2014.10 pp.429-457
...한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정책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외교전략차원에서 이들의 잠재력과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체계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재외한인과의 접촉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재외한인을 통일과 번영의 유력한동반자로 자리매김하고, 민족의 대통합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네트워크 방법론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개별적이고 분절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재외한인들의 네트워크를공공외교(public diplomacy) 차원으로 수렴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한반도 주변국에 주로 분포해 있는 재외한인의 역사적 경험과 조건은 이들이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국력의 보이지 않는 팔로서 재외한인의 위상과 역할을 정립하고, 이들을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성을극복하는 이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재외한인 네트워크의 기반과 강점,가치와 미션, 비전을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과 정책결정자들이 이런 가능성에 공감하며, 미래를 설계해 나가기 위한 공간으로 재외한인 비전 하우스의 설립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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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정책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통일과 외교전략차원에서 이들의 잠재력과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체계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재외한인과의 접촉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재외한인을 통일과 번영의 유력한동반자로 자리매김하고, 민족의 대통합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네트워크 방법론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개별적이고 분절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재외한인들의 네트워크를공공외교(public diplomacy) 차원으로 수렴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한반도 주변국에 주로 분포해 있는 재외한인의 역사적 경험과 조건은 이들이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국력의 보이지 않는 팔로서 재외한인의 위상과 역할을 정립하고, 이들을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성을극복하는 이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재외한인 네트워크의 기반과 강점,가치와 미션, 비전을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과 정책결정자들이 이런 가능성에 공감하며, 미래를 설계해 나가기 위한 공간으로 재외한인 비전 하우스의 설립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Contact with overseas Koreans have become commonplace in reality,thus introducing a dire need to locate methodologies that can developthe network of overseas Koreans into an influential partner forreunification and prosperity. Their experience throughout history andgeographic distribution particularly holds the potential for them tocontribute toward peace and reunific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Inorder to maximize such a potential, the foundation, strengths, values,mission and vision of the network of overseas Koreans are in want ofa strategic reconfiguration. Accordingly, it is necessary to activelyconsider the establishment of a 'Vision House of Overseas Korea’ tobe used as a space for mapping out the future.
1920년대 러시아한인예술단 내한공연의 무용사적 의미 : 디아스포라 문화연구의 관점으로 KCI 등재
무용역사기록학회(구 한국무용사학회) 무용역사기록학 제34호 2014.09 pp.35-59
...한인예술단의 내한공연에 관한 연구이다. 1921년~1922년 3차례에 걸쳐 내한한 러시아한인예술단의 표면적인 방문 목적은 계속되는 가뭄과 사회주의 혁명이후 전쟁으로 어려워진 연해주 한인들의 구제와 교당 건축기금의 모금이었다. 이들의 내한공연은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며 우리사회에 서양민속춤과 음악의 유입, 무도열풍으로 인한 춤의 대중화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당시 신무용 3인방으로 꼽히는 조택원이 춤에 입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한국 근대무용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한인예술단처럼 디아스포라의 문화가 모국의 문화에 영향을 끼 친 경우는 디아스포라의 문화연구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그것이 공연예술 활동이었기에 그 파급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디아스포라 문화연구 관점에서 1917년 사회주의혁명이후~1922년까지 내전 중이 던 러시아와 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였던 우리사회의 사회․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해삼위 러시아한인예 술단의 활동과 단원구성 및 주요 인물분석, 공연형식, 공연레퍼토리 분석을 통해서 그 성격과 특징 무 용사적 의미를 규명해 보려고 한다. 이는 동시에 1920년대 러시아 연해주 한인 디아스포라를 다각적으 로 조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러시아한인예술단의 단장인 이강, 한용헌, 곽병규는 당대 연해주 사회의 종교계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로 이들의 내한공연이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추측을 배재하기 어렵다. 단원 대부분이 비전문 인으로 소인예술단 형태이다. 공연형식은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민중공연예술형식인 에스트라다 순회공연형식을 취하고 있다. 1920년대 러시아한인예술단의 내한공연은 다음과 같은 무용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최초의 재외 한인예술단으로서 초국가적인 민족정체성 형성의 기폭제역할을 했다. 둘째,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로 문화를 전달하는 문화적 중개인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내․외 비밀 독립운동의 조력자 역 할을 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으로 이들의 내한공연은 계속될 수 없었다. 연구방법으로는 문헌연구, 현지조사, 러시아 극동국립문서보관소(РГИА ДВ),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본 외무성 사료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그리고 연해주에서 발행된 한인 신문 <선봉>의 기사를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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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920년대 초 러시아 연해주 한인예술단의 내한공연에 관한 연구이다. 1921년~1922년 3차례에 걸쳐 내한한 러시아한인예술단의 표면적인 방문 목적은 계속되는 가뭄과 사회주의 혁명이후 전쟁으로 어려워진 연해주 한인들의 구제와 교당 건축기금의 모금이었다. 이들의 내한공연은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며 우리사회에 서양민속춤과 음악의 유입, 무도열풍으로 인한 춤의 대중화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당시 신무용 3인방으로 꼽히는 조택원이 춤에 입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한국 근대무용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한인예술단처럼 디아스포라의 문화가 모국의 문화에 영향을 끼 친 경우는 디아스포라의 문화연구에서 매우 이례적이며, 그것이 공연예술 활동이었기에 그 파급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디아스포라 문화연구 관점에서 1917년 사회주의혁명이후~1922년까지 내전 중이 던 러시아와 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였던 우리사회의 사회․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해삼위 러시아한인예 술단의 활동과 단원구성 및 주요 인물분석, 공연형식, 공연레퍼토리 분석을 통해서 그 성격과 특징 무 용사적 의미를 규명해 보려고 한다. 이는 동시에 1920년대 러시아 연해주 한인 디아스포라를 다각적으 로 조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러시아한인예술단의 단장인 이강, 한용헌, 곽병규는 당대 연해주 사회의 종교계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로 이들의 내한공연이 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추측을 배재하기 어렵다. 단원 대부분이 비전문 인으로 소인예술단 형태이다. 공연형식은 당시 러시아에서 유행하던 민중공연예술형식인 에스트라다 순회공연형식을 취하고 있다. 1920년대 러시아한인예술단의 내한공연은 다음과 같은 무용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최초의 재외 한인예술단으로서 초국가적인 민족정체성 형성의 기폭제역할을 했다. 둘째,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로 문화를 전달하는 문화적 중개인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내․외 비밀 독립운동의 조력자 역 할을 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으로 이들의 내한공연은 계속될 수 없었다. 연구방법으로는 문헌연구, 현지조사, 러시아 극동국립문서보관소(РГИА ДВ),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본 외무성 사료와 <동아일보>, <매일신보> 그리고 연해주에서 발행된 한인 신문 <선봉>의 기사를 분석하였다.
This research is about the performances of Korean immigrant art troupe, from Russia’s Vladivostok maritime province (Yonhaeju : Prismorsky Krai), that visited Korea in the early 1920s. Initially the performances aimed to raise funds to build churches and help Koreans in Russia suffering from economic difficulties due to prolonged droughts and the civil war in the aftermath of the Russian Revolution. However, the performances gained nationwide popularity, introducing Western folk music and dancing to Korea, which became the driving force in spreading a dance craze throughout the country. These performances significantly influenced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dance, best exemplified by Cho Taek-Won who was first introduced to modern dance by the troupe’s performances and who became one of three new dance (Shinmuyong) pioneers. It is rare in the field of Diaspora Studies that cultural influences come from the outside the mother country, as in the case of the Korean-Russian art troupe. This research, from the perspective of the Diaspora (in the socio-cultural context of the troupe as they were caught between Russia’s civil war, in the period after the 1917 Revolution through 1922, and Korea under occupation by imperial Japan) shows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the performances on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dance, through analysis of performance activities and structures, member composition, the role of major leaders, and the troupe’s repertory of performances. At the same time, this study provides a foundation to understand the Korean Diaspora in Russia Like Lee Kang, Han Yong-Hun and Kwak Byuing-Gyu, the leaders of the Korean art troupe in Russia were leaders of the religious community who had participated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maritime province of Russia. Most of them were non-professionals and each group had a small number of members. Their art form followed “Estrada,” a typical people’s performing art which were popular folk dance touring performances in Russia at the time. In the history of modern dance in Korea, the significance of the performances of the Korean immigrant art troupe from Russia is as follows. First, as the initial overseas Korean performing arts group, they inspired Koreans to pay attention to the problems of overseas Koreans through the promotion of their visit to Korea; they helped build a national identity across borders. Secondly, this art troupe, as part of the Korean Diaspora, became a cultural bridge between people in Korea and Koreans in Russia. Lastly, the art troupe support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owever, the performances were forced to stop, for political reasons, by the birth of the Soviet Union on December 30, 1922. Research methods include literature and library research, field surveys, including existing literature in the National Russian Library of East Asian Literature, materials made from the Japanes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kept in the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Dong-A Ilbo, Mae-il Shinnbo, and Sunbong, the Korean newspaper published in the maritime province of Russia.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한중미래연구 제3호 2014.08 pp.3-40
...한인이 자치운동 을 전개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로 인해 연변지역에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가 출현했다. 그러나 간민회가 주장했던 민주공화정치와 신문화교육은 중 화사상을 신봉하는 유림파의 강한 반대를 불러오게 된다. 따라서 유림은 간민회 에 대항하는 단체인 농무회와 공교회의 연길지회를 결성한다. 그 결과 간민회와 농무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급속히 재만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으로 비화되어 한인사회의 진일보 발전에 막대한 장애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간민회 와 농무회는 지방 당국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원래 격렬히 대립하던 신구세력 중의 일부 인사들이 공동으로 장업회를 결성하여 한인사회의 분열 위기를 극복하 고자 했다. 그 후 장업회의 설립이 난관에 부딪히자 한인사회의 진일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그들은 활동공간을 연변에서 동북3성으로 확대하였고, 교섭 대상 도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로 연결시켰으며, 한국인 자치를 상징하는 ‘동성한인생 계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이와 같은 노력이 다시 한 번 실패에 그쳤 지만 그들이 신수세력간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기울인 거대한 노력은 향후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통합을 실현하는데 굳건한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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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해혁명은 아시아지역에서 자본주의 민주공화정을 수립하는 첫 시도 였지만 철저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다. 중화민국 초기 원세개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소위 ‘연성자치’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재만 한인이 자치운동 을 전개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로 인해 연변지역에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가 출현했다. 그러나 간민회가 주장했던 민주공화정치와 신문화교육은 중 화사상을 신봉하는 유림파의 강한 반대를 불러오게 된다. 따라서 유림은 간민회 에 대항하는 단체인 농무회와 공교회의 연길지회를 결성한다. 그 결과 간민회와 농무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급속히 재만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으로 비화되어 한인사회의 진일보 발전에 막대한 장애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간민회 와 농무회는 지방 당국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원래 격렬히 대립하던 신구세력 중의 일부 인사들이 공동으로 장업회를 결성하여 한인사회의 분열 위기를 극복하 고자 했다. 그 후 장업회의 설립이 난관에 부딪히자 한인사회의 진일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그들은 활동공간을 연변에서 동북3성으로 확대하였고, 교섭 대상 도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로 연결시켰으며, 한국인 자치를 상징하는 ‘동성한인생 계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이와 같은 노력이 다시 한 번 실패에 그쳤 지만 그들이 신수세력간의 갈등을 극복하고자 기울인 거대한 노력은 향후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통합을 실현하는데 굳건한 기초를 닦았다.
中国的辛亥革命是亚洲地区建立资本主义民主共和政体的首次尝试,但是未能获 得彻底的成功。中华民国初期,袁世凯为保护自身的权益,实施所谓的“联省自治” 政策,而这为在满韩人开展自治运动提供了绝佳的机会。于是,在延边地区出现了 韩人自治团体——“垦民会”。然而,垦民会所主张的民主共和政治和新文化教育却 招致了奉行“中华”思想的儒林派的强烈反对。于是,儒林们建立了与垦民会针锋相 对的团体——农务契和孔教会延吉支会。结果,垦民会和农务契之间的矛盾和对 立,迅速演变为围绕着在满韩人社会主导权的争斗,成为韩人社会进一步发展的莫 大阻碍。不久,垦民会和农务契被地方当局强制解散,原先激烈对峙的新旧势力中 的部分人士共同设立了奖业会,试图克服韩人社会的分裂危机。之后,当奖业会的 设立遭遇瓶颈时,为了摸索韩人社会的进一步发展,他们将活动空间从延边扩大到 东三省的韩人社会,其交涉对象也由地方政府上延到中央政府,并努力设立象征韩 人自治的“东省韩族生计会”。尽管这些努力以再次失败而告终,但他们为了克服新 旧势力之间的矛盾的巨大努力,则为日后以上海临时政府为中心实现新的大统合奠 定了坚实的基础。
한인교회를 위한 모델로서의 다문화교회 : 미국내 타민족 전도를 위한 전환방안 KCI 등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선교와 신학 제34집 2014.08 pp.175-206
...한인교회들이 타문화(타민족/타인종)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미국은 다문화사회로 탈바꿈하였으며 기독교가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한인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선교적 부르심에 응답해야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미국내 한인교회가 어떻게 다문화교회로 전환할 것인가와 다문화교회와 타민족 전도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필자는 문헌연구와 더불어 질적 연구방법을 활용하여 세 개의 “한인 주도(Korean-initiated) 다문화교회들”‒Covenant Fellowship Church in Urbana-Champain, IL, Lakeview Church in Chicago, IL,Renewal Presbyterian Church in Philadelphia, PA‒과 한 개의 화란인 주도(Dutch-initiated) 다문화교회‒Madison Square Church in Grand Rapids,MI‒를 2012년 탐방하고 직접 및 참여적 관찰, 인터뷰, 문서 및 인터넷 자료 등을 토대로 연구하였다. 이 연구는 다문화교회로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1세대 한인 담임목사의 차세대를 위한 비전과 지원이 다문화교회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둘째, 다문화목회에 유리한 담임목사의 특징으로는 주일설교를 타문화 목사와 공유하는 것과 담임목사 자신이 다문화 가족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다문화교회의 성도들의 연령적 및 정서적으로 젊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젊음은 다문화교회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수용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문화교회와 전도와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타문화 사람들의 다문화교회 방문 및 정착 이유는 다문화적 요인보다는 설교와 소그룹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단 혼합결혼(mixed-marriage)의 경우는 다문화교회를 선호했다. 전도와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의도적, 략적으로 전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다문화교회가 되는 것만으로는 타문화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 부족하고, 지속적으로 전도를 강조하고 다수의 전도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타문화 전도대상자들이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문화교회로의 전환방법에 있어서는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풍차전환 모델”(Windmill T-process)을 제안한다. 풍차전환 모델은 총 10개의 전환과정을 포함하며, 크게 기초적 전환과정과 지속적 전환과정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기초적 전환과정은 다섯 가지로 1) 전환가능성 확인, 2) 비전수립, 3) 독립(1세 교회로부터), 4) 중립적 교회이름 갖기, 5) 교회 장소이전을 포함하여 전환초기에 필요하고 단회적으로 끝나는 과정들이다. 이는 풍차의 몸체에 비유할 수 있다. 지속적 전환과정도 다섯 가지로 1) 이웃 섬기기, 2) 비전 상기시키기, 3) 리더 구성의 다문화화, 4) 문화지수 훈련, 5)다문화 찬양팀 갖추기를 포함한다. 이들은 다문화를 심화, 유지시키기 위해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들로 풍차의 중심축과 날개에 비유할 수 있다. 풍차전환 모델은 미국의 한인교회뿐 아니라 타민족을 품기 위해 다문화교회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다른 교회들과 다문화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는 한국의 교회들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적용에 있어서 미국과의 차이를 고려한 신중한 적용이 필요할 것이다.
이 연구는 어떻게 미국내 한인교회들이 타문화(타민족/타인종) 사람들을 전도하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미국은 다문화사회로 탈바꿈하였으며 기독교가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한인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선교적 부르심에 응답해야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미국내 한인교회가 어떻게 다문화교회로 전환할 것인가와 다문화교회와 타민족 전도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필자는 문헌연구와 더불어 질적 연구방법을 활용하여 세 개의 “한인 주도(Korean-initiated) 다문화교회들”‒Covenant Fellowship Church in Urbana-Champain, IL, Lakeview Church in Chicago, IL,Renewal Presbyterian Church in Philadelphia, PA‒과 한 개의 화란인 주도(Dutch-initiated) 다문화교회‒Madison Square Church in Grand Rapids,MI‒를 2012년 탐방하고 직접 및 참여적 관찰, 인터뷰, 문서 및 인터넷 자료 등을 토대로 연구하였다. 이 연구는 다문화교회로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1세대 한인 담임목사의 차세대를 위한 비전과 지원이 다문화교회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둘째, 다문화목회에 유리한 담임목사의 특징으로는 주일설교를 타문화 목사와 공유하는 것과 담임목사 자신이 다문화 가족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 다문화교회의 성도들의 연령적 및 정서적으로 젊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젊음은 다문화교회로의 지속적인 변화를 수용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문화교회와 전도와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타문화 사람들의 다문화교회 방문 및 정착 이유는 다문화적 요인보다는 설교와 소그룹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단 혼합결혼(mixed-marriage)의 경우는 다문화교회를 선호했다. 전도와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의도적, 략적으로 전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다문화교회가 되는 것만으로는 타문화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 부족하고, 지속적으로 전도를 강조하고 다수의 전도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타문화 전도대상자들이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문화교회로의 전환방법에 있어서는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풍차전환 모델”(Windmill T-process)을 제안한다. 풍차전환 모델은 총 10개의 전환과정을 포함하며, 크게 기초적 전환과정과 지속적 전환과정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기초적 전환과정은 다섯 가지로 1) 전환가능성 확인, 2) 비전수립, 3) 독립(1세 교회로부터), 4) 중립적 교회이름 갖기, 5) 교회 장소이전을 포함하여 전환초기에 필요하고 단회적으로 끝나는 과정들이다. 이는 풍차의 몸체에 비유할 수 있다. 지속적 전환과정도 다섯 가지로 1) 이웃 섬기기, 2) 비전 상기시키기, 3) 리더 구성의 다문화화, 4) 문화지수 훈련, 5)다문화 찬양팀 갖추기를 포함한다. 이들은 다문화를 심화, 유지시키기 위해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들로 풍차의 중심축과 날개에 비유할 수 있다. 풍차전환 모델은 미국의 한인교회뿐 아니라 타민족을 품기 위해 다문화교회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다른 교회들과 다문화사회로 급속히 이행하는 한국의 교회들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적용에 있어서 미국과의 차이를 고려한 신중한 적용이 필요할 것이다.
This study seeks to discover how mono-ethnic/monocultural minority churches can maximize their capacity to reach out and integrate different ethnic/racial people in the United States. To this end, it studied three Korean-initiated multicultural churches, in addition to one Dutch-initiated multicultural church, because of the potential that Korean Americans pose for the future of American Christianity. The study employs field-based case studies as well as scholarly research. As emerging leaders Korean-American Christians are participating in the multicultural church movement with a greater concernfor the Great Commission than for racial reconciliation, which tends to be a dominant focus in historically white or black multicultural American churches. In its findings, this study discovered that first-generation Korean senior pastors' vision and support for the second-generation Korean-Americans were crucial in the transition. In addition, members' youthfulness in age and in spirit enabled them to adjust more easily and make many changes. Also, the senior/lead pastors' sharing the pulpit with pastors of different races and their own multicultural family backgrounds were also advantageous in the transition. With the exception of ethnically/racially mixed couples, the study found that evangelism in these churches took place when multicultural churches made intentional efforts to provide many evangelistic programs, events, and small groups for outsiders. As its application, this study proposes a model transition process, named the Windmill T-process, to help monocultural churches that want to become multicultural in order to reach out to all nations within a multicultural local context. The Windmill T-process model is divided into fixed and moving parts. The five fixed parts make up the windmill's base, and are necessary for monocultural churches in the beginning of the transition: checking for feasibility, casting a vision, becoming independent, adopting a non-ethnic church name, and relocating. The remaining five moving parts are constantly in motion: serving the neighbor, refreshing the vision, diversifying leadership, providing cultural intelligence training, and having multicultural worship teams. The Windmill T-process is not a static linear process but an ongoing one. It implies that the church can develop and maintain the characteristics of a multicultural church only when the five moving steps are working continually.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학술대회 재중한인의 갈등과 통합에 대한 종합적 검토 2014.07 pp.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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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거주 외국인의 다양화와 재일 한인의 향방 ― 소수자 중의 소수화의 과제 ― KCI 등재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학 제38집 2014.05 pp.9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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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論文では在日外国人の法的地位の変化の背景になった国籍別の分布の変化を全体的に検討した上、在日コリアンを取り巻く環境の変化は如何なる意味かを考察するとともに、今後在日コリアンが目指すべき方向を提示してみた。先ずは日本の敗戦直後から「特別永住」制度が実施されて旧植民地出身者の法的地位が確定する1990年代初めまでを対象に永住外国人の法的地位がどのような変化を見せていたのかを検討した。あと、1990年代以降の在日外国人の国籍別の分布がどのような変化を見せていたのかについて検討した。在日コリアンが日本社会で安定的な法的地位を獲得したのは1965年に韓日間における国交正常化の時に締結された「法的地位協定」ではなく、1991年に日本国会で成立された「特別永住」制度によるものであったが、そもそも後者は日本政府や韓国政府によって進められたのではなく、在日コリアン特に民団系の同胞たちの特別な努力によってもたされた結果であることを確認した。しかし今日の在日コリアンの置かれた状況は国籍別の分布という側面では少数者の中でも少数化に直面しているとともに、他方では日本のウルトラ․ナショナリズムの攻撃の的になっていると言える。国籍別の分布における変化について詳しく検討してみると次のようなことが確認できた。1965年までに在日外国人の全体の8割以上を占めていた在日コリアンが1990年には56.8%、2000年には33.95%、2010年には21.24%にと人口の縮小を見せていた。その反面、その他の国籍者の人口は増えていた。特に中国人は2007年から在日コリアンの人口を上回って在日外国人の最多グループになっていた。在日コリアンを集中的にみると、植民地期から日本に居住した当事者とその子孫、すなわち特別永住者がめっきり減少した。反面、一般永住者とその他居住者は徐々に増えた。後者は韓国の海外旅行が自由化された1989年以来日本に渡り結果的に移住した韓国人たち(ニューカマー)が増え続いたからである。そのうえ在日コリアンの中から日本国籍取得者も毎年増減を繰り返しながら一定の数が存在していた。その結果、在日コリアンは1990年代半ばから在日外国人の中でも少数の存在になった。2012年以降、日本政府は国内の労働力不足を補うために、新しい外国人管理体制を稼働している。しかしより深刻な右傾化が進んでいる今の日本社会で在日コリアンの未来は決して薔薇色とは言えない状況である。そういう意味で彼ら彼女らは過去の1980年代から90年代にかけて外国人指紋押捺制度反対のために進歩的な日本市民グループおよびその他外国人とともに連帯運動を展開した貴重な経験を思いおこす必要がある。その指紋捺印制度反対運動は当時日本社会で「人権応護」という掛声とともに大きな反響を呼び起こし、実際に関連法律の改正まで至った社会運動としてごく稀な成功事例である。在日コリアンはこのような過去にあった連帯運動の事例を教訓にして、今後も日本の良心的な市民と協力態勢を強化し、押し寄せる排外主義の荒波を乗り越える方法論を組み立てる必要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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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중국 요동지역에서 흥기한 여러 부족(민족)들은 중국대륙을 지배 하고자 끝임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정복하고 강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란 속에서 수많은 백성 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쟁‘포로’로 취급되어 무참히 학살되거나 강제로 정복자들에게 끌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 그 대 표적인 사례이다. 중국의 요․금․원 시기에도 한반도내의 적지 않은 고려인들이 요동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시기의 이주형태도 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부 분이 전쟁에 의한 강제적 이주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이나 요서일대에는 새롭 게 고려인 부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말명초 시기에도 수많은 고려인(조선 인)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조선인들이 요동으로의 대량 이 주는 전쟁 외에도 명나라의 세금 및 병역에 대한 우대정책과, 요동 東八站일대의 비옥한 토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요동일대로 이주하였던 고려인이나 조선인들은 혹자는 한반도로 돌아가고 혹자는 당지에 남아 여진과 한 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들과 잡거하면서 점차 기타 민족에게 동화되어 자취를 감 추었다. 1616년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赫圖阿拉에 후금을 세운 후 팔기제도를 바탕으 로 신속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 요동지역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 서는 “인조반정”에 의해 대권을 잡은 서인 “척화파”들이 공개적으로 “親明排金”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결과 1627년과 1936년 후금은 두 차례에 걸쳐 “친명배금” 을 고집하는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군인은 물론이고 수십만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인 백성들까지도 이른 바 전쟁“포로”로 취급하면서 강제적으로 만주로 끌 고 갔다. 1645년 10년간에 걸쳐 진행된 조선인 포로속환은 조선세자와 봉림대 군의 환국으로 종결되었으나 청조의 소극적인 송환정책으로 말미암아 송환된 인 원수는 전체 “포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후금군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들 중 일부는 팔기군에 편입되었으나 대부분은 “전리품”으로 취급 되어 청조의 왕공귀족과 팔기군 관병의 家奴나 농장 농노(포이)로 전락되었다. 1644년 청조는 북경으로 천도한 후 팔기병은 물론이고 만주지역의 모든 백성들 까지도 전부 관내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만주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이나 각 농 장에 팔려가 포이로 전락한 조선인들 모두가 팔기병과 주인을 따라 관내로 들어 갔다. 그후 청조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후 일부 조선인 포이들은 청조의 왕공귀족 을 따라 재차 만주로 이주하여 대대손손 농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82년 중국에서 실행된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河北省 靑龍縣의 八家 子鄕 塔溝村과 大杖子鄕 孟家窩鋪, 平泉縣의 七溝鎭 朴杖子村, 그리고 遼寧省 蓋 縣의 陳屯鄕 朴家溝와 本溪縣 山城子鄕 朴堡, 久才, 化皮 등 村의 천여 명의 “漢 族”들이 자신들은 원래 고려의 후손들이었으므로 본 민족의 족적을 한족에서 조 선족으로 회복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당지 정부에서는 충분한 역사고찰 과 사회조사를 거친 후 상술한 박씨촌 “한족”주민들을 조선족으로 족적을 회복해 주었다. 상술한 박씨들은 이주초기 신분이 비록 비천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들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지켜나갈 수 있 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신분이 낮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생활하는 가운데서 본 민족의 문화를 제대로 전승할 수 없었 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박씨 후예들은 360여년이 지 난 오늘까지도 화석처럼 남아서 중국지역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점을 증언해주고 있다.
自古以来,中国辽东地区兴起了诸多部族(民族),他们为了统治中国大陆,在不 断增强自身军事实力的同时,彼此间为扩大疆域而征伐不断。然而,在频发的战乱 中,无辜的诸多百姓沦为“俘虏”,他们或被惨杀,或被强制掳往他乡,高句丽、渤 海的遗民即是其中的代表性事例。辽、金、元时期,朝鲜半岛内的诸多高丽人先后 迁至辽东地区。这一时期,高丽人的移住形态与之前一样,大多是因战争而引发的 强制性移居,辽东、辽西一带由此开始出现了许多新的高丽人村落。元末明初,高 丽人(朝鲜人)继续大量移居辽东一带,其原因除战争因素外,还包括明朝实行的积 极的税收、兵役等政策,以及辽东东八站一带肥沃的土地等因素。但是,这一时期 移居辽东地区的高丽人(朝鲜人),后来或陆续返回朝鲜半岛,或继续留在当地,与 女真族、汉族等杂居,逐渐被其它民族所同化。 1616年,女真族首领努尔哈赤在赫图阿拉建立后金。以八旗制度为基础,女真 势力迅速扩张,最终掌控了整个辽东地区。这一时期,朝鲜“仁祖反正”政变后,西 人“斥和派”掌握大权,公开推行“亲明排金”的外交政策。结果,1627年和1636年, 后金先后两次入侵朝鲜,数十万朝鲜军民以“俘虏”之名被强行掳至满洲。截至1645 年,在持续10年之久的刷还朝鲜人“俘虏”一事中,由于清朝奉行消极的刷还政策, 仅包括朝鲜世子、凤林大君在内的少数人被刷还,其数目还不足全部“俘虏”的十分 之一,剩下的除少部分被编入八旗军外,大部分则以“战利品”的名义分发给王公贵 族和八旗军官兵,沦为家奴或农奴(包衣)。1644年清朝定都北京后,包括八旗军在 内的满洲地区的所有军民迁入关内,满洲八旗的朝鲜人官兵、各农场的朝鲜人包衣 也随之入关。清朝统一中国大陆后,部分朝鲜人包衣随王公贵族再次移居满洲,世世代代以农为生。 1982年,在中国政府开展的第三次全国人口普查活动中,河北省青龙县八家子 乡塔沟村和大杖子乡孟家窝铺、平泉县七沟镇朴杖子村,辽宁省盖县陈屯乡朴家沟 和本溪县山城子乡朴堡、久才、化皮等村的千余名村民认为他们是高丽人的后孙, 要求将他们的族籍由汉族恢复为朝鲜族。于是,当地政府在进行了充分的历史考察 和社会调查的基础上,将上述朴氏村民的族籍恢复为朝鲜族。上述朴氏的先祖在移 住初期虽然身份卑贱,但由于其生活空间相对比较稳定,这就在某种程度上为其民 族文化的保存和延续提供了有利条件。尽管他们曾被视为低微的朝鲜离散移民,在 与其他民族的共同生活中无法很好地传承其民族文化,但上述朴氏后裔们在历经 360余年的沧桑之后,其民族文化依然得以存续的事实,有力地证明了中国朝鲜族 的历史上限是17世纪20-30年代。
글로벌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한인사회 : ‘이주’와 ‘정착’의 역사 및 전망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한중미래연구 제2호 2014.02 pp.135-165
...한인 이주 역사 50주년을 맞이하여, 본 논문은 싱가포르 한인 사회 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한인 사회의 현황 및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싱가포르 한인 사회의 괄목할만한 수적 증가와 비자 종류 및 기타 통계자료를 토 대로 한인 사회를 고찰해보고자 하는 시론적 연구이다.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2011년 12월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가 총 518만 명으로, 싱가포르 국민이 327만 명, 영주권 소지자가 54 만 명, 나머지 인구인 외국인이 146만 명을 차지한다.1965년 싱가포르 한인회 가 발족한 이래, 싱가포르의 한인사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싱가포르에 거 주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현재 25,000 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싱가포르의 한국 인은 회사원, 자영업자, 유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비자형태로 분화 되어있으며, 회사원의 비율이 40-45%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정부의 고용비자 정책은, 급여에 따라 발급받을 수 있는 비자의 종류가 결정되며, 이는 한국인의 비자 형태를 결정짓는 주요원인 중 하나이다. 싱가포르의 국가적·지리적 특성상 외국인이나 이주민에게 있어서 싱가포르는 ‘정착 하는’ 국가가 아닌 ‘잠시 머물러가는’ 장소로 한인동포들에게 인식이 되어왔으며, 영주 권 획득 증가 추세와 함께, 젊은 세대들이 싱가포르에 머물 것인지, 싱가포르와 현지에 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더욱더 모바일한 개체가 될 것인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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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한인 이주 역사 50주년을 맞이하여, 본 논문은 싱가포르 한인 사회 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한인 사회의 현황 및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싱가포르 한인 사회의 괄목할만한 수적 증가와 비자 종류 및 기타 통계자료를 토 대로 한인 사회를 고찰해보고자 하는 시론적 연구이다.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2011년 12월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가 총 518만 명으로, 싱가포르 국민이 327만 명, 영주권 소지자가 54 만 명, 나머지 인구인 외국인이 146만 명을 차지한다.1965년 싱가포르 한인회 가 발족한 이래, 싱가포르의 한인사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싱가포르에 거 주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현재 25,000 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싱가포르의 한국 인은 회사원, 자영업자, 유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비자형태로 분화 되어있으며, 회사원의 비율이 40-45%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정부의 고용비자 정책은, 급여에 따라 발급받을 수 있는 비자의 종류가 결정되며, 이는 한국인의 비자 형태를 결정짓는 주요원인 중 하나이다. 싱가포르의 국가적·지리적 특성상 외국인이나 이주민에게 있어서 싱가포르는 ‘정착 하는’ 국가가 아닌 ‘잠시 머물러가는’ 장소로 한인동포들에게 인식이 되어왔으며, 영주 권 획득 증가 추세와 함께, 젊은 세대들이 싱가포르에 머물 것인지, 싱가포르와 현지에 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더욱더 모바일한 개체가 될 것인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In accordance with the 50th anniversary of Koreans migration to Singapore, this paper traces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South Koreans in Singapore and examines the situation of South Koreans living in Singapore. Singapore is a city-state located in Southeast Asia. According to the recent statistics, the Singapore’s population is 518 million. This includes 327 million Singapore citizens, 54 million Permanent Residents, and 146 million foreign nationals. Since the Korean Association in Singapore was found in 1965, the Korean society in the city-state is rapidly growing. It is estimated that now around 25,000 Koreans live in the country. While office workers take up about 40-45 percent of the whole Korean population, students, self-employed and other type of residents exist. The Singaporean government’s employment visa policy is on a salary basis; hence, visa types that foreigners can obtain are accordingly decided. The sharp increase in the number of Koreans in Singapore, visa types and other reliable sources, this paper explores the Korean society in Singapore. By its geographical and national characteristic, Koreans regard Singapore as a place for a “permanent settlement” but a “temporal” place. With the increase of obtaining the Permanent Residentship, this paper offers insights of whether younger Korean generations choose to live in Singapore or become a more “mobile” entity on the basis of experiences in Singapore.
독일, 독일교회 그리고 재독한인교회 : 유럽재복음화 관점에서 바라본 독일개신교회와 재독한인교회의 현재와 미래 KCI 등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선교와 신학 제33집 2014.02 pp.183-208
...한인교회들은 독일 전 인구의 0.001%도 되지 않는 작은 소수이지만, 독일교회에게새로운 호기심과 도전을 주고 있다. 50년 전 독일교회는 독일에 취업차 온한인들을 위해 한국목사들을 청빙하여 그들에게 생활비를 주며 영적인 돌봄을 해 주었다. 이제 작지만 재독한인교회들은 독일교회를 위해 그들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복음을 전하며, 기 독교국가 아닌 진정한복음의 국가로 거듭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재복음화의 관점에서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 500년이 되는 2017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독일교회에게 주는 간절한 한국교회의 신학적 조언이 될 것이다.
유럽재복음화 관점에서 유럽과 유럽교회를 바라본다는 것은 새로운 선교적 교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급하고 옳다. 유럽과 유럽교회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급격한 세속화와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부터 시작된 아랍인들의 유럽이주로 인한 이슬람 종교의 도전 앞에 놓여 있다. 독일과 독일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놓여있는 재독한 인교회들은 항상 독일교회에 대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담을 나고 있다. 이미독일은 오래전에 기독교화 되었기 때문이 다. 1950년대에는 전 인구의 개신교인이 50%, 가톨릭교인이 45%가 되었다. 가이 외국인을 제외하면 전국민이 기독교 인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76%가 기독교인이다.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독일교회의 비관적인 미래에 대해 대안을 줄 수 있는 것은 독일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독 일국민들의 영적인 새로운 부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루터의 정신이며 신앙이다. 교회가 할일을 세상이 다 하고 있어 교회가 할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다. 교회가할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독일에 사는 한인교회들은 독일 전 인구의 0.001%도 되지 않는 작은 소수이지만, 독일교회에게새로운 호기심과 도전을 주고 있다. 50년 전 독일교회는 독일에 취업차 온한인들을 위해 한국목사들을 청빙하여 그들에게 생활비를 주며 영적인 돌봄을 해 주었다. 이제 작지만 재독한인교회들은 독일교회를 위해 그들과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복음을 전하며, 기 독교국가 아닌 진정한복음의 국가로 거듭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재복음화의 관점에서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 500년이 되는 2017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독일교회에게 주는 간절한 한국교회의 신학적 조언이 될 것이다.
With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Re-evangelization of Europe is just a look at Europe and european churches. This is because they must be oriented the missional church. Europe and european churches have today two challenges-Secularisation and Islam. From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were secularized they rapidly and after the fall of communism came many Arabs to Europe. They did not want to be integrated in the european society and they had religious exclusivity. Germany was no exception. Korean people and Korean churches live and lie in this situation. And Germany had long ago been christianized. In 1950, 50 percent of the population was Protestant and 45 percent Catholics, butSeung-Woo Huh graduated from Asian Center for Theological and Mission (B.Th.),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M.Div.), Graduated School of ACTS(Th.M. in Systematic Theology). He is an ordained pastor and serves as Missionary of PCK from 2005 in German. 208 선교와 신학 33집currently, only 76% Christians. In this pessimistic prospect inthe future of the German church, Gospel can only alternativesto the new spiritual renewal. Also it is Luther's theologyand faith. So what can do for that the Korean churches inGerman? Korean Christians in German are only 0.001%of German Christians. But they can and must work withGerman churches and evanglize for new future of the Germanchurches. Christians in name only, not real! Now 2017 comeafter 3 years. This year is called by German churches “Luther2017, 500 Jahre Reformation”. I hope that German churchescan prepare for the new renewal and find the Gospel for theGerman Christians. That is suggestion for them that Koreanchurches can give.
호주 원주민선교의 이해와 한인교회의 역할 KCI 등재
한국실천신학회 신학과 실천 제38호 2014.02 pp.595-623
...한인교회가 선교현장에서 실제 적용 가능한 실천적 선교 방안을 모색하는데 있다. 구체적으로 호주원주민의 역사와 원주민선교 현황을 고찰하고 호주원주민선교에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현장 전문가의 심층면접조사를 통해 원주민선교에 대한 한인교회의 전망과 역할을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경을 넓히는 원주민선교는 ‘환난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처’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한인교회의 실천방안으로는 ① 원주민교회를 전초 기지로 삼아 미 개화지역 원주민 종족 마을에 임시 선교 기지를 세우는 사역, ② 버려진 원주민 땅을 경작하고 재배하여 얻은 결실을 원주민사회와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돕는 사역, ③ 자연 생태계에서 얻은 원주민 치료제에 대한 연구과 보급 등이 있다. 이러한 한인교회의 실천을 이루기 위해 ① 회개, ② 섬김, ③ 중보의 기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본고는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와 연구 범위의 지역적 제한성에 의해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는데 연구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보다 폭넓고 심도 깊은 호주 원주민선교 관련 후속연구의 기반을 제공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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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백인의 신대륙 정복 당시 호주에 약 75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이 있었지만, 영국 식민지시대 원주민 대량학살로 인해 1911년 인구통계조사에서 보고된 원주민의 수는 31,000명에 불과하다. 호주 원주민의 땅은 유럽백인들에 강제로 수탈당했고, 원주민 여성은 성적노예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강제로 격리되어 보호수용소에서 자라게 되면서 잃어버린 정체성 회복에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체계적인 문헌고찰과 실증적 성공 사례 발굴은 선교와 신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호주 원주민사회 역사와 원주민선교의 이론적 실천적 이해를 높이고 한인교회가 선교현장에서 실제 적용 가능한 실천적 선교 방안을 모색하는데 있다. 구체적으로 호주원주민의 역사와 원주민선교 현황을 고찰하고 호주원주민선교에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현장 전문가의 심층면접조사를 통해 원주민선교에 대한 한인교회의 전망과 역할을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경을 넓히는 원주민선교는 ‘환난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처’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한인교회의 실천방안으로는 ① 원주민교회를 전초 기지로 삼아 미 개화지역 원주민 종족 마을에 임시 선교 기지를 세우는 사역, ② 버려진 원주민 땅을 경작하고 재배하여 얻은 결실을 원주민사회와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돕는 사역, ③ 자연 생태계에서 얻은 원주민 치료제에 대한 연구과 보급 등이 있다. 이러한 한인교회의 실천을 이루기 위해 ① 회개, ② 섬김, ③ 중보의 기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본고는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와 연구 범위의 지역적 제한성에 의해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는데 연구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보다 폭넓고 심도 깊은 호주 원주민선교 관련 후속연구의 기반을 제공하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Some recent media coverage of the tragic history of Aboriginal people to Korean ethnic churches have attracted attention of scholars both from a cross-cultural studies and a Christian perspective. In the first stage of the study, a systematic review of the literature aimed to understand Christian missions to Aboriginal peoples and imply Aboriginal missions and evangelism of the Church in Australia. The finding of this study suggests that the Aboriginal mission territory of Churches would be a refuge for the oppressed in times of trouble within God. Korean ethnic Churches have come up with three practical ways to support ① building Aboriginal based Churches and mission filed training camps for unassimilated native Australian Aboriginals; ② cultivating the useless, abandoned, empty land of Aboriginal people and harvesting/sharing the farm products with neighborhoods; and ③ preserving and promoting Aboriginal knowledge of natural herbal medicine. In terms of the most practical aspects of missionary work among Aboriginal people of Australia while identifying the role of the Korean ethnic Churches such as: ① true repentance and repenting on behalf of Australian Churches in the love of Jesus Christ for their forgiveness, restoration and the spiritual revival; ② serving(Diakonia) in Korean and Aboriginal churches working together as the body of Jesus Christ for the glory of God; and ③ a commitment to intercessory prayer with Jesus Christ for the Aboriginal mission field and the spiritual worker. However, the results of this study remain a controversial approach to limited generalization.
여성 동성애자의 성정체성 발달 과정과 결혼 인식에 대한 내러티브-사례 연구 - 미국 거주 한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
한국국제문화교류학회 문화교류와 다문화교육(구 문화교류연구) 제2권 제3호 2013.12 pp.8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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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여성 동성애자의 성정체성 발달 과정과 결혼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맥칸과 패씽거(McCarn & Fassinger, 1996)의 성정체성 발달 모델을 통해 연구 참여자들의 성정체성 발달 과정과 발달 과정 중 확인되는 결혼에 대한 인식 체계를 알아보았다. 연구결과, 여성 동성애자들은 인식-탐색-수용-내면화 단계에 따라 성정체성을 확립 해 나가고 있었다. 먼저 연구참여자들 모두 초·중학교의 어린 시절 가운데 이성애자들 과는 다른 ‘낯선 경험’을 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시간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인식하고 인정하였다. 하지만 수용 이후,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다양한 문제들과 부딪히면서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감추려는 태도를 보였다. 미래의 사 랑하는 상대가 남성이었음을 바라는 진술들을 통해 여성 동성애자들의 애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혼에 대한 인식 역시 수용단계에서 파악이 가능하였다. 본 연구의 연구참여자들은 모두 이성과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때의 결혼은 성(남-녀)의 만남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성 립되는 관계에서 발생되는 행위로 보고 있었다. 이성 간의 결혼이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사회에서 보호받듯이, 동성 간의 결혼 역시 인정받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상의 연구결과들을 통해 여성 동성애자들의 성정체성을 이해하고,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이 희석되기를 기대한다.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plore the formation process of lesbians’ sexual identity and their stance on marriage. By adopting McCarn & Fassinger(1996)’s lesbian identity development model, the research participants’ sexual identity formation process and arising thoughts about marriage throughout this time were evaluated. The result showed that lesbians’ sexual identity develops through four stages: awareness - exploration - deepening/commitment - internalization/synthesis, as suggested by McCarn and Fassinger. First of all, every research participant was found to have experienced an unusual feeling of attachment toward a female friend during their youth (elementary or middle school years). As time passed by, they naturally became aware of and accepting towards their homosexual identity. However, they tended to keep hiding their homosexuality even after this deepening/commitment stage, because of the various personal and social barriers at hand. Some of them even hoped that they could fall in love with a male partner in some distant future. Their stance on marriage was also discovered at this deepening/commitment stage. In general, all of the participants revealed positive thoughts about both heterosexual and homosexual marriage. They perceived marriage as a bonding ceremony between two individuals, rather than two genders. Therefore, they were hoping that homosexual marriage could also be legally accepted and protected like heterosexual marriage. It is hoped that the results gained from this study could provide an opportunity to understand lesbians’ sexual identity development process and alleviate negative social viewpoints on lesb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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