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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시기 한인의 만주이주와 정착(1)
清朝时期韩人的满洲移住史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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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바로가기
  • 간행물
    한중미래연구 바로가기
  • 통권
    제2호 (2014.02)바로가기
  • 페이지
    pp.21-54
  • 저자
    김춘선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239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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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고대로부터 중국 요동지역에서 흥기한 여러 부족(민족)들은 중국대륙을 지배 하고자 끝임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정복하고 강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란 속에서 수많은 백성 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쟁‘포로’로 취급되어 무참히 학살되거나 강제로 정복자들에게 끌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 그 대 표적인 사례이다. 중국의 요․금․원 시기에도 한반도내의 적지 않은 고려인들이 요동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시기의 이주형태도 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부 분이 전쟁에 의한 강제적 이주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이나 요서일대에는 새롭 게 고려인 부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말명초 시기에도 수많은 고려인(조선 인)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조선인들이 요동으로의 대량 이 주는 전쟁 외에도 명나라의 세금 및 병역에 대한 우대정책과, 요동 東八站일대의 비옥한 토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요동일대로 이주하였던 고려인이나 조선인들은 혹자는 한반도로 돌아가고 혹자는 당지에 남아 여진과 한 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들과 잡거하면서 점차 기타 민족에게 동화되어 자취를 감 추었다. 1616년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赫圖阿拉에 후금을 세운 후 팔기제도를 바탕으 로 신속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 요동지역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 서는 “인조반정”에 의해 대권을 잡은 서인 “척화파”들이 공개적으로 “親明排金”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결과 1627년과 1936년 후금은 두 차례에 걸쳐 “친명배금” 을 고집하는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군인은 물론이고 수십만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인 백성들까지도 이른 바 전쟁“포로”로 취급하면서 강제적으로 만주로 끌 고 갔다. 1645년 10년간에 걸쳐 진행된 조선인 포로속환은 조선세자와 봉림대 군의 환국으로 종결되었으나 청조의 소극적인 송환정책으로 말미암아 송환된 인 원수는 전체 “포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후금군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들 중 일부는 팔기군에 편입되었으나 대부분은 “전리품”으로 취급 되어 청조의 왕공귀족과 팔기군 관병의 家奴나 농장 농노(포이)로 전락되었다. 1644년 청조는 북경으로 천도한 후 팔기병은 물론이고 만주지역의 모든 백성들 까지도 전부 관내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만주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이나 각 농 장에 팔려가 포이로 전락한 조선인들 모두가 팔기병과 주인을 따라 관내로 들어 갔다. 그후 청조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후 일부 조선인 포이들은 청조의 왕공귀족 을 따라 재차 만주로 이주하여 대대손손 농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82년 중국에서 실행된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河北省 靑龍縣의 八家 子鄕 塔溝村과 大杖子鄕 孟家窩鋪, 平泉縣의 七溝鎭 朴杖子村, 그리고 遼寧省 蓋 縣의 陳屯鄕 朴家溝와 本溪縣 山城子鄕 朴堡, 久才, 化皮 등 村의 천여 명의 “漢 族”들이 자신들은 원래 고려의 후손들이었으므로 본 민족의 족적을 한족에서 조 선족으로 회복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당지 정부에서는 충분한 역사고찰 과 사회조사를 거친 후 상술한 박씨촌 “한족”주민들을 조선족으로 족적을 회복해 주었다. 상술한 박씨들은 이주초기 신분이 비록 비천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들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지켜나갈 수 있 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신분이 낮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생활하는 가운데서 본 민족의 문화를 제대로 전승할 수 없었 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박씨 후예들은 360여년이 지 난 오늘까지도 화석처럼 남아서 중국지역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점을 증언해주고 있다.
중국어
自古以来,中国辽东地区兴起了诸多部族(民族),他们为了统治中国大陆,在不 断增强自身军事实力的同时,彼此间为扩大疆域而征伐不断。然而,在频发的战乱 中,无辜的诸多百姓沦为“俘虏”,他们或被惨杀,或被强制掳往他乡,高句丽、渤 海的遗民即是其中的代表性事例。辽、金、元时期,朝鲜半岛内的诸多高丽人先后 迁至辽东地区。这一时期,高丽人的移住形态与之前一样,大多是因战争而引发的 强制性移居,辽东、辽西一带由此开始出现了许多新的高丽人村落。元末明初,高 丽人(朝鲜人)继续大量移居辽东一带,其原因除战争因素外,还包括明朝实行的积 极的税收、兵役等政策,以及辽东东八站一带肥沃的土地等因素。但是,这一时期 移居辽东地区的高丽人(朝鲜人),后来或陆续返回朝鲜半岛,或继续留在当地,与 女真族、汉族等杂居,逐渐被其它民族所同化。 1616年,女真族首领努尔哈赤在赫图阿拉建立后金。以八旗制度为基础,女真 势力迅速扩张,最终掌控了整个辽东地区。这一时期,朝鲜“仁祖反正”政变后,西 人“斥和派”掌握大权,公开推行“亲明排金”的外交政策。结果,1627年和1636年, 后金先后两次入侵朝鲜,数十万朝鲜军民以“俘虏”之名被强行掳至满洲。截至1645 年,在持续10年之久的刷还朝鲜人“俘虏”一事中,由于清朝奉行消极的刷还政策, 仅包括朝鲜世子、凤林大君在内的少数人被刷还,其数目还不足全部“俘虏”的十分 之一,剩下的除少部分被编入八旗军外,大部分则以“战利品”的名义分发给王公贵 族和八旗军官兵,沦为家奴或农奴(包衣)。1644年清朝定都北京后,包括八旗军在 内的满洲地区的所有军民迁入关内,满洲八旗的朝鲜人官兵、各农场的朝鲜人包衣 也随之入关。清朝统一中国大陆后,部分朝鲜人包衣随王公贵族再次移居满洲,世世代代以农为生。 1982年,在中国政府开展的第三次全国人口普查活动中,河北省青龙县八家子 乡塔沟村和大杖子乡孟家窝铺、平泉县七沟镇朴杖子村,辽宁省盖县陈屯乡朴家沟 和本溪县山城子乡朴堡、久才、化皮等村的千余名村民认为他们是高丽人的后孙, 要求将他们的族籍由汉族恢复为朝鲜族。于是,当地政府在进行了充分的历史考察 和社会调查的基础上,将上述朴氏村民的族籍恢复为朝鲜族。上述朴氏的先祖在移 住初期虽然身份卑贱,但由于其生活空间相对比较稳定,这就在某种程度上为其民 族文化的保存和延续提供了有利条件。尽管他们曾被视为低微的朝鲜离散移民,在 与其他民族的共同生活中无法很好地传承其民族文化,但上述朴氏后裔们在历经 360余年的沧桑之后,其民族文化依然得以存续的事实,有力地证明了中国朝鲜族 的历史上限是17世纪20-30年代。

목차

1. 머리말
 2. 청조 건립 전 遼東(滿洲)지역의 전란과 조선유민
 3. 정묘·병자호란과 조선인 "포로"
 4. 조선인 “포로”들의 생활실태와 박씨 後裔들
 5. 맺음말
 <국문초록>
 <中文提要>

키워드

요동지역 조선유민 여진족 조선인“포로” 속환 박씨후예 辽东地区 朝鲜遗民 女真族 朝鲜人“俘虏” 刷还 朴氏后裔

저자

  • 김춘선 [ 金春善 | 연변대학 민족역사연구소 소장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Institute for the Future Korea-China Relations]
  • 설립연도
    2012
  • 분야
    사회과학>정치외교학
  • 소개
    본 연구소는 전문화되고 특화된 중국관련 연구소 구성의 필요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지역학으로서의 중국학과 한국학 제 분야의 학제 간 연구 수행을 통해 한국학과 중국학의 선도적 연구기관으로서 위상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에서 의미를 갖는 중국학과 중국에서 의미를 갖는 한국학으로 학문적 지평을 확장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간행물

  • 간행물명
    한중미래연구
  • 간기
    반년간
  • pISSN
    2288-565X
  • 수록기간
    2013~2020
  • 십진분류
    KDC 912 DDC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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