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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어는 중국 주체 민족의 언어인 한어의 영향, 조선어와 한국어의 영향, 그리고 자체로 제정한 언어규범의 영향을 받아 뿌리를 같이 하고 있는 조선어나 한국어와 차이를 보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중국조선어의 어휘적 특성의 형성배경을 고찰함에 있어서 중국조선어에 대한 한어의 영향, 한 국어의 영향, 조선어의 영향, 자체 언어규범의 영향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중 국조선어의 어휘적 특성의 형성배경을 연구하는 것은 중국조선어의 특성을 연구 하는 데 자료를 제공하고 중국조선어의 발전 전망을 알아보는 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국조선어 규범화작업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中国朝鲜语不仅受到中国主体民族的语言-汉语的影响,还分别受到朝鲜语和韩 国语的影响,并且又因自身所制定的语言规范的影响,使其与同源的朝鲜语和韩国 语,表现出不同的特征。本文因此考察中国朝鲜语词汇特征的形成背景时,分别从 汉语的影响、韩国语的影响、朝鲜语的影响、自身语言规范的影响等四个方面进行 了分析研究。有关中国朝鲜语词汇特征形成背景的考察,不仅可以为中国朝鲜语的 特征研究提供材料,还可以帮助我们了解中国朝鲜语的发展前景,更为中国朝鲜语 的规范化提供理论上的依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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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중국 요동지역에서 흥기한 여러 부족(민족)들은 중국대륙을 지배 하고자 끝임 없이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방을 정복하고 강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란 속에서 수많은 백성 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전쟁‘포로’로 취급되어 무참히 학살되거나 강제로 정복자들에게 끌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 그 대 표적인 사례이다. 중국의 요․금․원 시기에도 한반도내의 적지 않은 고려인들이 요동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시기의 이주형태도 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부 분이 전쟁에 의한 강제적 이주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이나 요서일대에는 새롭 게 고려인 부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말명초 시기에도 수많은 고려인(조선 인)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조선인들이 요동으로의 대량 이 주는 전쟁 외에도 명나라의 세금 및 병역에 대한 우대정책과, 요동 東八站일대의 비옥한 토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요동일대로 이주하였던 고려인이나 조선인들은 혹자는 한반도로 돌아가고 혹자는 당지에 남아 여진과 한 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들과 잡거하면서 점차 기타 민족에게 동화되어 자취를 감 추었다. 1616년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赫圖阿拉에 후금을 세운 후 팔기제도를 바탕으 로 신속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 요동지역을 장악하였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 서는 “인조반정”에 의해 대권을 잡은 서인 “척화파”들이 공개적으로 “親明排金”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결과 1627년과 1936년 후금은 두 차례에 걸쳐 “친명배금” 을 고집하는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군인은 물론이고 수십만에 달하는 무고한 조선인 백성들까지도 이른 바 전쟁“포로”로 취급하면서 강제적으로 만주로 끌 고 갔다. 1645년 10년간에 걸쳐 진행된 조선인 포로속환은 조선세자와 봉림대 군의 환국으로 종결되었으나 청조의 소극적인 송환정책으로 말미암아 송환된 인 원수는 전체 “포로”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후금군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들 중 일부는 팔기군에 편입되었으나 대부분은 “전리품”으로 취급 되어 청조의 왕공귀족과 팔기군 관병의 家奴나 농장 농노(포이)로 전락되었다. 1644년 청조는 북경으로 천도한 후 팔기병은 물론이고 만주지역의 모든 백성들 까지도 전부 관내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만주팔기에 편입된 조선인이나 각 농 장에 팔려가 포이로 전락한 조선인들 모두가 팔기병과 주인을 따라 관내로 들어 갔다. 그후 청조가 중국대륙을 통일한 후 일부 조선인 포이들은 청조의 왕공귀족 을 따라 재차 만주로 이주하여 대대손손 농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82년 중국에서 실행된 제3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서 河北省 靑龍縣의 八家 子鄕 塔溝村과 大杖子鄕 孟家窩鋪, 平泉縣의 七溝鎭 朴杖子村, 그리고 遼寧省 蓋 縣의 陳屯鄕 朴家溝와 本溪縣 山城子鄕 朴堡, 久才, 化皮 등 村의 천여 명의 “漢 族”들이 자신들은 원래 고려의 후손들이었으므로 본 민족의 족적을 한족에서 조 선족으로 회복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당지 정부에서는 충분한 역사고찰 과 사회조사를 거친 후 상술한 박씨촌 “한족”주민들을 조선족으로 족적을 회복해 주었다. 상술한 박씨들은 이주초기 신분이 비록 비천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들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지켜나갈 수 있 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은 신분이 낮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생활하는 가운데서 본 민족의 문화를 제대로 전승할 수 없었 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박씨 후예들은 360여년이 지 난 오늘까지도 화석처럼 남아서 중국지역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시점을 증언해주고 있다.
自古以来,中国辽东地区兴起了诸多部族(民族),他们为了统治中国大陆,在不 断增强自身军事实力的同时,彼此间为扩大疆域而征伐不断。然而,在频发的战乱 中,无辜的诸多百姓沦为“俘虏”,他们或被惨杀,或被强制掳往他乡,高句丽、渤 海的遗民即是其中的代表性事例。辽、金、元时期,朝鲜半岛内的诸多高丽人先后 迁至辽东地区。这一时期,高丽人的移住形态与之前一样,大多是因战争而引发的 强制性移居,辽东、辽西一带由此开始出现了许多新的高丽人村落。元末明初,高 丽人(朝鲜人)继续大量移居辽东一带,其原因除战争因素外,还包括明朝实行的积 极的税收、兵役等政策,以及辽东东八站一带肥沃的土地等因素。但是,这一时期 移居辽东地区的高丽人(朝鲜人),后来或陆续返回朝鲜半岛,或继续留在当地,与 女真族、汉族等杂居,逐渐被其它民族所同化。 1616年,女真族首领努尔哈赤在赫图阿拉建立后金。以八旗制度为基础,女真 势力迅速扩张,最终掌控了整个辽东地区。这一时期,朝鲜“仁祖反正”政变后,西 人“斥和派”掌握大权,公开推行“亲明排金”的外交政策。结果,1627年和1636年, 后金先后两次入侵朝鲜,数十万朝鲜军民以“俘虏”之名被强行掳至满洲。截至1645 年,在持续10年之久的刷还朝鲜人“俘虏”一事中,由于清朝奉行消极的刷还政策, 仅包括朝鲜世子、凤林大君在内的少数人被刷还,其数目还不足全部“俘虏”的十分 之一,剩下的除少部分被编入八旗军外,大部分则以“战利品”的名义分发给王公贵 族和八旗军官兵,沦为家奴或农奴(包衣)。1644年清朝定都北京后,包括八旗军在 内的满洲地区的所有军民迁入关内,满洲八旗的朝鲜人官兵、各农场的朝鲜人包衣 也随之入关。清朝统一中国大陆后,部分朝鲜人包衣随王公贵族再次移居满洲,世世代代以农为生。 1982年,在中国政府开展的第三次全国人口普查活动中,河北省青龙县八家子 乡塔沟村和大杖子乡孟家窝铺、平泉县七沟镇朴杖子村,辽宁省盖县陈屯乡朴家沟 和本溪县山城子乡朴堡、久才、化皮等村的千余名村民认为他们是高丽人的后孙, 要求将他们的族籍由汉族恢复为朝鲜族。于是,当地政府在进行了充分的历史考察 和社会调查的基础上,将上述朴氏村民的族籍恢复为朝鲜族。上述朴氏的先祖在移 住初期虽然身份卑贱,但由于其生活空间相对比较稳定,这就在某种程度上为其民 族文化的保存和延续提供了有利条件。尽管他们曾被视为低微的朝鲜离散移民,在 与其他民族的共同生活中无法很好地传承其民族文化,但上述朴氏后裔们在历经 360余年的沧桑之后,其民族文化依然得以存续的事实,有力地证明了中国朝鲜族 的历史上限是17世纪20-30年代。
국가, 민족, 시장, 계층의 교차적 시각에서 본 조선족 도시공동체 - 서울과 청도의 조선족 도시공동체 비교연구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한중미래연구 제2호 2014.02 pp.5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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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은 국가, 민족, 시장, 계층 등 요인이 이민집단의 사회적 적응에 어떤 영 향을 미치는 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서울에 형성된 조선족 이민집단과 중국 청도에 형성된 조선족 이민집단에 대한 비교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결과 국가정책, 민족적 요인, 노동시장에서의 위치 등 요인이 이민집단의 사회적 적응 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청도의 조선족집단의 경우 조선족을 당지 경제발전에 활용하려는 정부의 정책과 민족과 노동구조에서의 “중간적 위치”를 활용하여 “종 족경제”를 구성함으로써 빠른 계층적 상승이동을 이루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 면 서울에서는 제한적으로 조선족을 활용하려는 정부의 정책과 노동시장구조에 서의 불리한 위치, “타자화된 어두운 서사”로 인하여 하위계층으로 고착화되는 양 상이 나타났다.
本文以国家政策、民族因素、劳动力市场结构对移民群体的社会适应与阶层地位 产生何种影响为出发点,比较分析了韩国首尔市的朝鲜族移民群体和中国青岛市的 朝鲜族移民群体。经研究发现,政策、民族因素、劳动力市场结构对移民群体的社 会适应和阶层地位产生了重要影响。在中国青岛,朝鲜族利用当地政府引进韩资的 政策及民族、市场结构上的“中间人位置”,积极发展“移民族群经济”,经济上成功地 融入了城市,阶层地位得到了提高;相比,在首尔,朝鲜族因限制性的移民政策及 当地封闭的劳动力市场结构,再加上当地对移民群体的一些偏见,没能成功地融入 到城市,沦为“被区隔的移民群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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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현지조사의 방법으로 길림성 연길시 소영진 오봉촌을 한 개 단 위로 그 촌의 역사, 촌 주민의 삶의 과정, 이주 상황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 하였다. 결과, 조선족의 초국적 이동이 지속 심화되고 있는 현재 오봉촌 조선족 의 이주 또한 다양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이주는 그들이 몸담고 살 아왔던 마을의 지리적, 경제적 환경과 크게 맞물리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오봉촌 촌민들의 삶의 환경은 그들의 도시 혹은 해외 이주를 추동시킨 요인 으로 작용하며, 매개 가정의 경제적 조건 또한 그들의 이주를 다양화시킨 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 개 마을의 한 가정, 나아가 한 가정 구성원의 이주의 양상을 전반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이주를 산생시킨 다양한 환경적 요 소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本稿旨在通过实地调查方法, 考察吉林省延吉市小营镇五凤村的 的沿革, 朝鲜族村民的生活状况及人口移动状况。随着时代的变化, 五凤村朝鲜族的人口移动呈现出多样化的特征, 其多样性与他们所 处的自然地理, 经济生活环境紧密联系在一起。即五凤村朝鲜族所 处的生活环境是促使人口移动的要素之一, 再之, 每个家庭的经济 条件是形成人口移动多样化特征的要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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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르시아권은 지금의 이란에서부터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한다. 고대 동·서 아시아에서 대문명을 형성했던 중국과 페르시아 간에는 물질문명뿐만 아니라, 학문을 포함해 다양한 분 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교류에서 고대 페르시아 문명은 중국에 커다란 영향 을 끼쳤는데, 국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그리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중세 들 어서도 교류는 지속되었는데, 시안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 걸쳐 페르시아어로 된 비 문과 석판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실 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체적 입장에서 시도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글은 동양 내에서 고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중국․한국과의 오랜 역사 속에서 맺은 종교와 문화 등의 교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각 문명 간에는 상보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며,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페르시아학(Persian Studies) 과 문명이 중국과 한국에 끼친 영향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 문명이 실크로드를 통해 거대한 페르시아학과 그 문명 속에서, 수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서양의 학문과 문명을 담아내는 용기로서 이제 실크로드 학은 교류차원의 연구를 한 단계 높여, 세계 인문학의 왜곡과 오류를 바로 잡아 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Although the term of Silkroad has been used for the first time by the geographer Richthofen in 1877, Silkroad has been existed as the way of exchange between the ancient Persia and China from the ancient times. In the East & West Asia, ancient China and Persia had formed two great civilizations. The ancient Persian civilization had affected greatly that of China, even though we have known its fact and knowledge on the contrary. For instance, it is revealed in the process of formation of term 'China'. The realm of ancient Persia had been extended from the mainland Iran, Central Asia, Afghanistan and Pakistan to the Xinjiang province in Western China. This paper is consisted of the four chapters. Except for the prologue and conclusion, it is dealt with Silkroad between the ancient Central Asia and Korea, and religious & cultural exchange between Persia and China. Through the Silkroad, ancient Persian studies had had a great impact on that of China and Korea. In the ancient era China and Korea had been laid under the influence of Great Persian World in the name of Zoroastrianism.
글로벌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한인사회 : ‘이주’와 ‘정착’의 역사 및 전망
동덕여자대학교 한중미래연구소 한중미래연구 제2호 2014.02 pp.13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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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한인 이주 역사 50주년을 맞이하여, 본 논문은 싱가포르 한인 사회 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한인 사회의 현황 및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싱가포르 한인 사회의 괄목할만한 수적 증가와 비자 종류 및 기타 통계자료를 토 대로 한인 사회를 고찰해보고자 하는 시론적 연구이다.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2011년 12월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가 총 518만 명으로, 싱가포르 국민이 327만 명, 영주권 소지자가 54 만 명, 나머지 인구인 외국인이 146만 명을 차지한다.1965년 싱가포르 한인회 가 발족한 이래, 싱가포르의 한인사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싱가포르에 거 주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현재 25,000 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싱가포르의 한국 인은 회사원, 자영업자, 유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비자형태로 분화 되어있으며, 회사원의 비율이 40-45%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정부의 고용비자 정책은, 급여에 따라 발급받을 수 있는 비자의 종류가 결정되며, 이는 한국인의 비자 형태를 결정짓는 주요원인 중 하나이다. 싱가포르의 국가적·지리적 특성상 외국인이나 이주민에게 있어서 싱가포르는 ‘정착 하는’ 국가가 아닌 ‘잠시 머물러가는’ 장소로 한인동포들에게 인식이 되어왔으며, 영주 권 획득 증가 추세와 함께, 젊은 세대들이 싱가포르에 머물 것인지, 싱가포르와 현지에 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더욱더 모바일한 개체가 될 것인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In accordance with the 50th anniversary of Koreans migration to Singapore, this paper traces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South Koreans in Singapore and examines the situation of South Koreans living in Singapore. Singapore is a city-state located in Southeast Asia. According to the recent statistics, the Singapore’s population is 518 million. This includes 327 million Singapore citizens, 54 million Permanent Residents, and 146 million foreign nationals. Since the Korean Association in Singapore was found in 1965, the Korean society in the city-state is rapidly growing. It is estimated that now around 25,000 Koreans live in the country. While office workers take up about 40-45 percent of the whole Korean population, students, self-employed and other type of residents exist. The Singaporean government’s employment visa policy is on a salary basis; hence, visa types that foreigners can obtain are accordingly decided. The sharp increase in the number of Koreans in Singapore, visa types and other reliable sources, this paper explores the Korean society in Singapore. By its geographical and national characteristic, Koreans regard Singapore as a place for a “permanent settlement” but a “temporal” place. With the increase of obtaining the Permanent Residentship, this paper offers insights of whether younger Korean generations choose to live in Singapore or become a more “mobile” entity on the basis of experiences in Singap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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