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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보 [書誌學報]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한국서지학회 [The Bibliography Society of Korea]
  • pISSN
    1225-7338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1990 ~ 2012
  • 주제분류
    복합학 > 문헌정보학
  • 십진분류
    KDC 010 DDC 010
많이 이용된 논문 (최근 1년 기준)
No
1

이용수:36회 755年 新羅 白紙墨書 『大方光佛華嚴經』의 形態

남유미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9호 2012.06 pp.131-14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현재 알려진 신라사경의 수는 적다. 그러나 新羅 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에는 造成記가 적혀 있어서 그 연대가 명확할 뿐 아니라 사경의 제작 과정이 기록되어 있어서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본고에서는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의 제작배경 및 전래를 살펴보고 사경의 세부형태를 관찰하여 신라사경의 형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신라 景德王(경덕왕) 13년(754)에 緣起法師가 간행한 것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중 하나로, 화엄종의 근본경전이다. 卷末에 적혀있는 조성기에는 사경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자세히 적혀 있고 제작방법과 그에 따른 의식 절차에 대해서 적혀 있다.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현재 총 8軸 중 2軸만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第1~10卷으로 구성된 軸은 습기와 충해 등으로 펼칠 수 없는 상태이며 第44~50卷이 쓰인 軸은 앞부분이 잘려져 있으나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그리고 이 2軸과 함께 발견된 자색종이 2片은 表紙로 추정되는데 金․銀泥로 겉표지에는 力士像圖, 속표지에는 佛菩薩圖가 그려져 있으며 도침이 잘 되어 있는 닥종이이다. 이 자색종이 2片는 第1~10卷이 쓰인 軸의 표지로 보이는데, 第1~10卷의 손상 형태와 자색종이 2片의 손상 형태가 일치하고 자색종이 2片에 卷緖의 흔적이 보이는 것과 卷紙와의 연결부로 추정되는 곳이 확인된다. 卷紙에 쓰인 종이는 닥종이로 보이며 아주 도침이 잘된 종이로 먹의 번짐이 적으나 시간의 경과와 습기로 인하여 도침이 풀린 곳도 보인다.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의 軸木과 軸首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축목과 축수가 연결되는 부분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에 속한다. 그리고 한 쪽 水晶軸首 안에는 사리가 한 알 들어 있어서 卷末의 조성기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2軸의 卷末에는 각각 조성기가 적혀있는데 그 내용은 동일하나 그 구성은 서로 다르다. 이는 卷紙의 여분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經文보다 작고 낮게 쓰인 것은 經文보다 조성기를 낮춰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軸木과 卷紙가 연결된 부분에서 접착제의 시료를 채취하여 분석한 결과 천연아교임을 알 수 있으며 이 접착제는 卷紙의 연결에도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위와 같이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만의 예를 살펴보긴 했으나 조성기라는 사경제작의 정보를 담은 글이 적혀 있어서 신라사경의 형태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앞으로 발견될 신라 사경의 연구뿐만 아니라, 사경형태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現在知られている新羅写経の数は少ないが、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には造成記が書かれてあってその年代を明確であることと写経の製作過程が記録されてあることからとても貴重な資料である。本原稿では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の製作背景および伝来を探って写経の細部形態を観察して新羅写経の形態について調べてみようとする。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は新羅景徳王13年(754年)に縁起法師が刊行したもので、法華経とともに韓国仏教思想確立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た仏教経典のひとつとして華厳宗の根本経典である。巻末に書かれてある造成記には写経製作に参加した人についた情報が細かく書かれてあり、制作方法とそれによる儀式手順について書いてある。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は現在総8軸の中2軸だけが伝来されており、第1~10巻に構成された軸は湿気と虫害などで広げられない状態であるし第44~50巻が書かれてある軸は前の部分が裁たれてあるが、比較的良好な状態である。それからこの2軸とともに発見された紫紙2片は表紙として推定されるが、金·銀泥でおもて表紙には力士像図、裏表紙には佛菩薩図が画かれてあってよく打ってある楮紙である。この紫紙2片は第1~10巻が書いてある軸の表紙に見える。その理由は第1~10巻の損傷形態と紫紙2片の損傷形態と一致すること、紫紙2片に巻緒の痕跡が見られること、それから巻紙との連結部と推定されるところが確認できるからだ。巻紙に使用された紙は楮紙で凄く良い打紙で墨の滲みは少ないが、時間経過及び湿気のため、打紙が元に戻っているところも見える。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の軸木と軸首はかなり特異な形態を持っていて軸木と軸首が連結している部分の形態が互いに異なってあって、これは時代を問わずにその例を探し難しい。それから水晶軸首の片方の中には舎利が一粒は入ってあって巻末の造成記の内容とも一致する。2軸の巻末にはそれぞれ 造成記が書いてあってその内容は同じだが、その構成は互いに異なる。これは巻紙の余分によるものと考えられて経文より小さくて低く書かれてあるのは経文より造成記を低く表現したものだと考えられる。軸木と巻紙が連結された部分で接着剤の試料を採取し分析した結果、天然膠であることが分かった。この接着剤は巻紙の連結にも使用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上記のように 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だけの例を調べてみたが、造成記という写経製作の情報を含んだ文章が残ってあって新羅写経の形態をある程度伺える。これは今後発見する新羅写経の研究だけではなく、写経形態研究にもためになると考えられる。

2

이용수:30회 古代韓國에 있어서 漢籍․佛典의 傳來와 受容에 대하여

南豊鉉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1호 2007.12 pp.5-3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典籍의 實物은 통일신라시대의 佛經 4種이 전해올 뿐 그 이전의 것은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史書에는 각 시대마다 典籍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올라 있다. 이 글은 그 기록들을 總括해 보고자 한 것이다. 우리 先人들이 중국과 접촉한 기록은 紀元前 12세기의 箕子東來說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衛滿朝鮮, 漢四郡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중국의 流亡人들이 중국의 동북방과 韓半島에 들어왔으니 그들의 문화와 함께 典籍들도 들어 왔을 것이다. 高句麗는 小獸林王2年(372)에 大學을 세웠고 또 佛敎가 들어왔다. 大學의 設立은 그 이전에 많은 典籍이 들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漢籍에는 五經, 三史, 三國志, 晉陽秋, 三國志, 孫盛晉春秋, 玉篇, 字統, 字林, 文選, 老子道德經이 있었고 書體에 관한 기록이 있다. ?堂을 세워 자제들에게 漢籍을 교육하였고 600년에는 歷史書 ‘留記’를 新集5卷으로 편수하였다. 佛敎는 三論宗이 盛했고 華嚴, 唯識思想, 小乘, 天台, 涅槃宗이 있었으며 日本에 三論을 傳하였으니 이 계통의 佛典이 전래되었다. 百濟는 375년에 高興이 書記를 편찬하였다. 中國史書에는 五經, 子, 史, 道家書와 易林, 式占, 墳史, 醫藥, 卜筮, 占相術, 天文地理, 遁甲術의 書冊이 있었고 百濟가 講禮博士, 毛詩博士를 求했다는 기록이 있다. 日本에 論語, 千字文을 전했고 五經, 曆, 醫의 博士와 採藥士 등을 보냈다. 佛典은 印度에서 梵本 阿毘曇藏과 五部律文을 들여다 번역하였고 天台宗, 華嚴學, 三論學, 唯識學이 있었다. 新羅는 545년에 居柒夫가 國史를 편찬하였다. 이 무렵에 詩, 書, 禮, 左傳, 老子가 있었고 隋書에는 文字와 甲兵이 중국과 같다고 하였다. 7세기에는 溫湯碑文, 晉祠碑文, 新撰 晉書, 孝經, 曲禮, 爾雅, 文選, 莊子, 老子등이 史書에 올라 있다. 眞德王5년(651)에는 國學의 실무자로 大舍를 두었다. 佛敎는 佛典과 함께 5세기에 이미 들어왔다. 565년에는 釋氏經論 1700여권이 들어왔고 慈藏이 唐에서 돌아올 때 藏經一部를 가지고 와 經卷이 모두 갖추어졌다. 小乘律과 大乘律이 함께 들어왔고 大乘經典, 三論宗, 涅槃宗, 天台宗, 攝論宗, 唯識學, 密敎의 經典이 들어왔다. 統一新羅 時代에 들어와 682년에 國學을 세워 周易, 尙書, 毛詩, 禮記, 春秋左氏傳, 文選, 論語, 孝經, 諸子百家書, 算學(綴經, 三開, 九章, 六章)을 가르쳤다. 686년에는 則天이 吉凶要禮, 文館詞林의 規戒가 되는 50권을 보냈다. 7세기 후반에는 本草甲乙經, 素問 針經, 脈經, 明堂經, 難經을 敎授하였다. 737년경에는 새로 편찬된 老子道德經이 들어왔고 景德王 때에는 天文博士, 漏刻博士, 律令博士를 두었다. 金生은 대표적인 書藝家였다. 이 시대에는 중국에서 번역된 佛經과 論疏가 거의 다 수입되어 중국에 가지 않고도 經學을 연구할 수가 있어 많은 論疏가 전한다. 元曉는 현재 90여종 180권 이상의 論疏를 저술한 기록이 있다. 義湘은 海東華嚴宗의 開祖로 十大弟子를 길러냈고 法藏이 보내온 著述을 검토하였다. 憬興은 法相宗의 學僧으로 그의 著述이 39部 259卷이 현재 조사되어 있다. 이밖에 順璟, 義寂, 道證, 太賢, 表員, 審祥 등이 저술을 남기어 日本의 正倉院의 고문서의 기록에 올라 있다. 儒學과 佛敎에 따른 典籍의 수입은 고대의 國家體制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이 수입되면서 그를 이해하기 위한 많은 論疏가 지어졌고 한편으로는 우리말로 해석하기 위한 釋讀口訣이 발달하였다. 한문의 釋讀法은 삼국시대에 이미 발달하여 삼국통일前後에는 그 口訣의 吐가 확립되었다.

Just only 4 Buddhist scriptures of unified Silla(統一新羅時代) were handed down, the former times Classical Books in Korea are not exist. But according to chinese history books and korean history books, records of classical books are occasionally found. This study is to integrate the records. Dae-hak(大學) was built and Buddhism was brought in Goguryeo(高句麗) Dynasty in 372. People of Goguryeo(高句麗) imported books from China. There were Five Classics(五經), 三史, 三國志, 晉陽秋, 孫盛晉春秋, 玉篇, 字統, 字林, 文選 and 老子道德經 among those. Rue-gi(留記) which was history book was made compilation in 600. Seo-gi(書記) was made compilation in Bakje(百濟) Dynasty in 375. There were Five Classics(五經), 子, 史, 道家書, 易林, 式占, 墳史, 醫藥, 卜筮, 占相術, 天文地理 and 遁甲術. There is a record that Bakje(百濟) have asked for 講禮博士, 毛詩博士. Bakje(百濟) sent the Analects of Confucius(論語), the Thousand-Character Text (千字文) to Japan. In 545, 居柒夫 made compilation Guk-sa(國史) in Silla(新羅) Dynasty. In those days, There were 詩, 書, 禮, 左傳, 老子. In 7C, 溫湯碑文, 晉祠碑文, 新撰晉書, 孝經, 曲禮, 爾雅, 文選, 莊子, 老子 were recorded in History Book(史書). Buddhism(佛敎) was already introduced with Buddhist Books in 5C. In 565, 1700 volumes of 釋氏經論 were imported. In unified Silla(統一新羅時代), Guk-hak(國學) was established in 682. 周易, 尙書, 毛詩, 禮記, 春秋左氏傳, 文選, 論語, 孝經, 諸子百家書, 算學 were taught in there. In King Gyungduk(景德王), there were 天文博士, 漏刻博士, 律令博士. As almost Buddhist Books translated in China were introduced and it was possible to study 經學 without going to China, there were many comment studies. 元曉 義湘 憬興 順璟, 義寂, 道證, 太賢, 表員, 審祥 were famous scholar who left many comment studies. Importation of Books accompany with the flourish of Confucianism(儒學) and Buddhism(佛敎) contribute to building of ancient nationality. Many comment studies were conducted to understand these imported books. On the other hand, 釋讀口訣 was developed to interpret the meaning.

3

이용수:29회 조선시대 原州 지역의 인쇄 문화 연구

최경훈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40호 2012.12 pp.197-24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는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소재지였던 원주에서 간행된 서적을 조사․분석하여 원주 지역의 고인쇄 문화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원주 간행 서적은 모두 57종이 조사되었다. 시기적으로 조선전기에는 29종, 조선 후기에는 28종으로 조사되었는데, 15세기 이전까지 원주는 경주, 전주, 평양, 진주와 함께 5대 판각처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16세기중반을 지나면서 출판 활동이 거의 중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18세기 영․정조 연간에 왕명에 의한 감영으로서의 출판 기능을 수행하였고, 관찰사 등 지방관에 의한 선조의 문집과 족보 간행이 일부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경우처럼 서원과 향교 등 재지 세력의 기반에 의한 출판 활동은 미약하였다.

This study was carried out to understand the old printing culture in WonJu, the site of the supreme local government office of the Kangwon province, during the Joseon dynasty. Through the investigating, 29 titles were found in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dynasty and 28 titles were found in the later half of Chosun dynasty. Won-Ju was big 5 publication site with Gyeongju, Jeonju, Pyongyang, and Jinju before mid-16th century. But after mid-16th century, the publication activities were nearly stopped. The publication activities was carried out again as the supreme local government office in the 18th century, especially under the Reign of King Youngjo and Jungjo. But the publication activities by native facility like Seowon(書院) and hyanggyo(鄕校) was weak in comparison with those of another province.

4

이용수:25회 중국본 『大學衍義』의 판본학적 연구

金昭姬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1호 2007.12 pp.245-282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연구는 眞德秀가 편찬한 􋺷大學衍義􋺸에 대하여 한국과 중국에서 활용․간행되었던 역사적 사실 및 諸版本을 조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간행된 판본의 계통을 세우고, 아울러 이들 중국본이 고려와 조선에 수용되어 정착되는 과정과 그 의의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南宋代에 揚子江이남을 중심으로 10行20字本과 9行17字本이 존재하고 있었고, 元代에서는 9行17字本, 11行21字本의 간본이 있었으며, 明代에서는 다양한 간행주체에 의해 官版本, 私刻本, 坊刻本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유입된 송본을 저본으로 계미자 및 초주갑인자를 비롯하여 乙亥字, 甲辰字, 戊申字와 이들 금속활자본을 復刻한 木版本이라는 다양한 판본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This study is an attempt to find out the historical records and facts related to printing of "Ta-shueh yen-i(大學衍義)" edited by Zhen De-xiu(眞德秀) and printed in China and Korea. Through this study I systematized Ta-shueh yen-i printed in China and examined Ta-shueh yen-i's introducing process and meaning. As a result of this survey there were '10 lines 20 characters type' and '9 lines 17 characters type' in Southern Sung period and '9 lines 17 characters type' and '11 lines 21 characters type' in Yu􌦗an period. In Ming period various types of books appeared - official publications, private publications, commercial publications. In Goryo period Ta-shueh yen-i was introduced from China and then in Joseon period it was printed by Gyemi type, First Gabin type, Ulhae type, Gabjin type, Musin type and woodblock.

5

이용수:24회 『濟衆新編』의 간행과 頒賜에 관한 연구

이정화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4호 2009.12 pp.131-15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제중신편』의 刊行과 頒賜에 대해서는 『제중신편』의 序․跋文, 『弘齋全書』, 『日省錄』, 『朝鮮王朝實錄』, 『鑄字所應行節目』, 『內閣日曆』 등 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분석하고 사실을 밝히었다. 『제중신편』은 1799(정조 23)년 완성되어 鑄字所에서 간행하여 典醫監에 내려졌으며 『제중신편』의 판목 조성에 동원된 刻手는 서울, 平壤, 全州 세 지역에서 46명이 참여하였다. 造成된 板木은 鑄字所에서 보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으며, 정조 임금의 『제중신편』 頒賜에 관하여도 살펴보았다. 이어 『제중신편』이 중국과 일본에 전해지는 과정을 확인하였으며 중국에서는 1800년 이후로 외교사절을 통해 수 십 년간 십 여회 이상 『제중신편』을 요구하고 있음도 밝히었다.

How Jejung Sinpyeon was published and distributed was disclosed on the basis of the preface of Jejung Sinpyeon, as well as of HongjeJeonseo(弘齋全書), Ilseongnok (日省錄), JoseonWangjoSillok(朝鮮王朝實錄), Jujaso Eunghaeng Jeolmok(鑄字所應行節目), and Naegak Illyeok(內閣日曆). Jejung Sinpyeon(濟衆新編) was completed in 1799(the 23rd year of King Jeongjo’s reign) and was printed at the Jujaso(鑄字所), and the copies were delivered to the Jeonuigam(典醫監). Engravers from Seoul, Pyeongyang(平壤) and Jeonju(全州) were mobilized to make the printing blocks for Jejung Sinpyeon. Once crafted, the printing wood blocks were kept at the Jujaso. Details on the king’s provision of the book and the distribution thereof were disclosed. Copies of Jejung Sinpyeon were also delivered to China and Japan. After 1800, China went on to request further supplies of Jejung Sinpyeon on more than ten occasions through diplomatic emissaries over a number of decades.

6

이용수:24회 朝鮮時代 『瀛奎聿髓』 간행과 『聿髓刊誤精選』

백승호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0호 2006.12 pp.89-12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7

이용수:23회 宛委閣의 전적수집과 문화적 의미에 대한 고찰

박용만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2호 2008.12 pp.57-7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척도는 서적이다. 서적의 저술과 간행, 장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한 관리와 열람 등 일련의 문화적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藏書樓의 성립과 전적수집 등에 대한 연구는 장서각의 개인적 기호와 능력을 넘어 시대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완위각은 李夏坤에 의해 진천 초평에 세워진 장서루이다. 이하곤의 전적수집은 書癖이라 지칭될 만큼 병적인 면모를 보인다.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강화도의 內閣 藏書를 열람하고, 좋은 작품을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구득하고 말았다. 이로써 완위각은 이하곤 당시 이미 조선의 대표적인 장서루로 알려졌으며, 특히 다양하고 풍부한 장서의 특징을 보인다.완위각은 몇 가지 점에서 여타 장서루와 구분된다. 첫째, 당시 명사들과의 교유 속에서 장서루로 인식되었고 꾸준히 활용되었다. 둘째, 經史와 문집은 물론 書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축적하였다. 셋째, 완위각에는 상당수의 중국서가 소장되어 있어 당시 藏書家 李夏坤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넷째, 한말 少論 지식인들의 문화적 공간이자 은신처였다.

Publishing and distributing of literary works and books is the cultural measure to understand the culture of the time. However, the cultural acts, which are as much important as publishing the literary works and books, is a series of management realm after publishing, such as keeping, managing and reading of books. These researches for collecting books has an important meaning as the cultural measure of the time beyond the study of the book collector himself. The appearance of Jangseo-ru, a library building in latter period of Joseon dynasty, has close connection with the time's, philosophical and historical situation such as the expansion of outlook on the world, discovery of identity, inflow of foreign civilization, accumulation and making use of wealth.Collection and keeping of books is not being satisfied with a simple preference, but has a special meaning in that it provides the base of developing scientific learning. In the space composed as such, learned men gathered, forming a group while exchanging their learning and poetries and proses, expanding it to the center of culture. Though it was a hiding place of Lee Ha-gon, Wanwui-gak became the place as splendid as can be, to a group of learned men and poets with its housed books and scenery surrounding it. Wanwui-gak was the center of local culture that housed great quantity of books and curios. Viewing the fact that it was a representing book collecting library then Joseon and kept great quantity of Chinese books which were hard to get, the meaning of Wanwui-gak is greater. Because of this, Wanwui-gak was the cultural space where a number of scholars and literary men gathered, not only in those days but also until the end of Josean, and at the end of Joseon it was the place of seclusion to intellectuals like Jeong In-bo, Hong Seung-heon, Jeong In-pyo and Lee Jong-hyeong. In this point, Wanwui-gak should be revaluated as the Jangseo-ru, which has meaning in historic and cultural way, beyond the function of library that simple housed a lot of books.

8

이용수:23회 1899년 全國邑誌上送令과 읍지편찬 연구

정대영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8호 2011.12 pp.77-11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연구는 1899년에 제작된 현존하는 일련의 邑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朝鮮에서 大韓帝國으로 변경된 시점에서 제작된 이 읍지들은 완전하게 수압되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소장처에 산재되어 보관되고 있다. 이 전국적인 읍지의 제작은 高宗시대에 있었던 기존의 1871년, 1895년의 읍지제작과 외면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있어서는 일견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조사해보면 몇몇의 의문점들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이 읍지가 제작되었는가라는 배경적인 의문과 둘째, 어떠한 주체에 의해서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 졌는가라는 것, 셋째로는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 제작되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제작에 대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몇 가지 가설을 통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또한 각기 다른 소장처에 보관되어 있는 동종의 읍지를 대상으로 하여 분석을 시도함으로서 제작시기와 내용적 특성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제시한 모든 읍지를 대상으로 분석을 완료하지는 못하였으나 일군의 자료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유의미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① 기존의 상송령에 대한 연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련의 읍지가 존재한다. ② 內務衙門을 비롯하여 또 하나의 다른 기관(필자는 皇室이라 추정)이 다른 방식에서 동시기에 읍지제작을 한 정황이 발견된다. ③ 1899년의 지리지제작은 내무아문의 주도로 양지아문의 전국측량작업에 대한 긴장관계 속에서의 조속한 읍지제작이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양지아문 측량에 보조역할을 위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후의 정황상 양지아문이 이 읍지의 제작에 관여되어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분석은 이전에 있었던 1871, 1895년의 두 차례에 걸친 읍지상송령을 좀 더 면밀히 분석한 이후 비교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며, 거시적인 틀에서 현존하는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향후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This study examined a surviving town chronicles produced in 1899. These were produced at a time when Joseon became the Daehan emperor, and stored in scattered places without being finished properly. These nationwide town chronicles seem to have the same meaning to those produced in 1871 and 1895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But, when specific cases were examined, some questions remained unsolved. First is the question of background of what the situation of the time was, second is who was in charge of such works, and third is a fundamental question of why it was produced. The study attempted to approach the core of problems with some hypothesis, and also to figure out publishing period and characteristics of contents by analyzing same town chronicles that are stored in different places. Though this study did not complete an analysis of whole chronicles, the following significant characteristics could be found. ① There are many town chronicles that cannot be properly explained by existing studies on Sangsongryeong. ② It seems there were coincident town chronicle publishing at the same time by Naemuamun and another institution (the author assumes it as imperial family) with different methods. ③ The map production in 1899 might be rapidly carried out by nationwide measurement by Yangjiamun which was supervised by Naemuamun in a tension relation or vice versa. Considering the prior and post conditions, it is highly plausible Yangjiamun to have been involved in the publication of chronicles. The analysis of such result might be possible after more detailed analysis on the town chronicle Sangsongryeong in 18971 and 1895, and if the existing resources are analyzed in a macroscopic frame, it may introduce more significant results in the future.

9

이용수:22회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구성과 편찬 과정

김혁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25호 2001.12 pp.10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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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용수:22회 조선후기 불갑사 불교조각의 一考察

崔聖銀

한국서지학회 서지학보 제35호 2010.06 pp.119-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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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불갑사는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법성포에 인접하여 불교초전의 현장에 세워진 호남불교 제1의 사찰일 뿐 아니라, 고려후기에 修禪社 13조였던 覺眞국사 復丘(1270-1355)의 하산소로 대단한 寺勢를 누렸던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 불갑사 대웅전에는 조선후기 1635년 당시 대표적인 조각승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無染이 제작한 목조삼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명부전에는 1654년에 무염과 제자 海心에 의해 제작된 지장보살과 그 권속의 여러 존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현재 불갑사 성보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석가삼존불상과 십육나한상(8구 잔존) 및 제 존상은 1706년에 색난파 화승이었던 楚卞이 제작한 상들이다. 17세기의 대표적 조각승이었던 무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는데, 불갑사의 제 존상들을 중심으로 무염의 조각승으로의 성장배경과 주변 인물, 師承관계 등에 대해 살펴보면, 무염이 碧巖覺性을 비롯한 浮休善修 門徒와 유대를 맺고 조각승으로의 역량을 쌓았던 곳은 순천 松廣寺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광사에서는 다년간 대규모 重建佛事가 이루어졌고, 여기에 覺敏, 幸思, 應元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이 제작한 여러 불상들은 조각승을 꿈구는 무염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무염은 그들 가운데 특히 행사에 師事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무염계의 사승관계는 幸思에서 無染을 거쳐 海心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조각승 유파에 비해 사승관계에 대한 명시가 특별히 강조된 점이 눈에 띤다. 이는 당시 전라도 일대에서 영향력이 컸던 무염계 조각승들에게 이 유파의 적법 제자가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편, 불갑사 석가삼존상과 십육나한상은 楚卞이 수화승을 맡았던 현존 유일의 작품으로 그 양식은 보조화승으로 일했던 色難과 忠玉의 작품들과 상통하고 있어 초변이 색난 작풍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동시에 초변 특유의 상호표현과 조형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불갑사의 불교조각은 정유재란 이후 사찰들이 대대적으로 중건되던 17세기 전반에 불갑사가 무염파 조각승들의 주요 활동무대였고, 18세기 초에는 색난파 화승들이 활약했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한 곳임을 알려준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Buddhist images of Bulgap-sa temple at Yeoung- gwang, South Jeolla Province. As is conveyed by the name Bulgap-sa itself, which means ‘the first in Buddhism’, Bulgap-sa is located near the port where Buddhism was first transmitted to Baekje in 384 A.D., and is believed to have long flourished until it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1592-98 A.D.). In the early 17th century, Bulgap-sa was reconstructed, and the Sakyamuni Buddha triad made by famous monk-sculptor Muyeom and his crew in 1635 AD was enshrined in the main hall. Some two decades later, in 1654 AD, Muyeom again made Kṣitigarba and its attendant images of Myeongbu-jeon at Bulgap-sa with his disciple Haesim and others. Documents found in the cavity of the images indicates that among Muyeom's disciples Haesim was the legal successor, and that the sculptural style of Muyeom was well carried on by his disciples. It is worth noting that inscriptions corresponding to Muyeom which emphasize the teacher-disciple relationship and imply the status of Muyeom as a high-ranking sculptor as well as the fact that being his heir meant practical advantage. Bulgap-sa has another triad set of Sakyamuni Buddha, eight Arhat images, and other attendant images enshrined there, which were made for the building of Arhats by Chobyeon, most likely one of the followers of Seknan, the famous monk-sculptor of the early 18th century. These images at Bulgap-sa museum are the only surviving works done by Chobyeon as a leading sculptor. Their style, in spite of a close relationship with Seknan's style, demonstrate Chobyeon's own characteristics. Buddhist sculptures of Bulgap-sa are of great importance in understanding later Joseon Dynasty Buddhist sculpture, as a major stage for the monk-sculptors of the 17th and early 18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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