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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연구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간행물 정보
  • 자료유형
    학술지
  • 발행기관
    만주학회 [The Manchurian Studies Association]
  • pISSN
    1738-3668
  • 간기
    반년간
  • 수록기간
    2004 ~ 2011
  • 주제분류
    인문학 > 역사학
  • 십진분류
    KDC 912 DDC 951
제11집 (12건)
No

특집 : 역사와 문학 속의 만보산 사건 - 80주년에 즈음하여

1

만보산 사건과 『리턴 보고서』 -재만 조선인에 관한 조사결과를 중심으로-

고바야시 레이코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7-3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931년 7월 1일 장춘 근교 만보산에서 이주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이 충 돌하여,일본 영사관 경찰이 발포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였다.본고에서는 제3기관인 국제연맹에서 파견된 리튼 위원회가 만보산 사건을 조사하면서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리튼 위원회는 만보산 사건에서 드러난 만주문제 중 재만 조선인의 지위 문제를 주의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 시하였다. 재만 조선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리튼 위원회는 재만 조선인의 중국 귀화 문제도 유의하였다.일본에게 재만 조선인은 단속 대상이었으며,중국에 귀화한 조선인의 경우 중국이 일본 관할권을 부인할 우려가 있었으나,구입한 토지를 일본에게 양도하게 하였다.한편 중국인에 게 조선인은 수전경작(水田耕作)의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의 만 주침탈을 돕는 첨병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리튼 위원회는 스스로 조사하고 파악한 후에 재만 조선인 은 중일 대립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배려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이해하 였다.리튼 위원회는 재만 조선인의 거주권을 보호하는 최종적인 수단은 중 일간의 분쟁조정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통해서 양당사국의 합의에 따라 선발된 재판관으로 구성된 중재재판소를 성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견해를 보였다. 본고는 제3기관인 리튼 위원회가 재만 조선인의 지위는 배려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밝힌 점에 의의가 있다.

2

장학량정권의 對韓人政策 -‘만보산 사건’의 遠因을 찾아서-

송한용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35-70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931년 7월 초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지역에서 중국농민과 한인 사 이에 수로개착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이 갈등에 일본이 개입하게 되 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가 국내에 과장되게 보도함으로써 화교배척사건 이 일어나 국제적 문제가 되었다.본 논문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遠 因을 찾아서 장학량정권의 대한인정책을 분석하였다. 이 사건은 수전개발 그리고 중국관헌들의 한인에 대한 억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장학량정권의 수전장려정책은 한인들이 만주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하지만 한인에 대한 일관되지 못한 정책은 한인들 의 불신을 초래하였다.그리고 관헌들의 부패와 폭력적 억압으로 인하여 한 인들은 일본영사관에 의탁하는 일이 일어났다.결국 장학량정권의 한인에 대한 일관되지 못한 정책과 지방관헌들의 부패 및 지나친 단속이 ‘만보산 사건’의 遠因으로 작용하였다 하겠다.

3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변형, 리후이잉의『萬寶山』읽기

김창호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71-8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중국 작가 리후이잉의 ≪만보산≫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과 문학 적 진실의 관계를 조명하는데 목적이 있다.소설 ≪만보산≫은 1931년 여름 한중농민이 장춘 근교의 만보산 일대에서 수전개발과 관련하여 충돌한 사 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실제 사건과 달리 일제와 기층 권력에 맞서는 한중농민의 연대라는 문학적 변형 을 가지고 있다.이러한 변형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등단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길림 출신인 작가는 중학교 졸업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 지만 상하이사변 발생으로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자 문학을 도 구로 한 항일운동에 참여한다.그는 첫 번째 항일 단편소설인 ≪마지막 수 업≫을 발표하고 이어 장편소설 ≪만보산≫을 발표한다.일본에 의해 고향 이 함락된 동북출신의 작가들은 항일과 더불어 실향의 고충과 귀향의식 등 을 묘사하고 있지만,리후이잉의 경우 등단과정에서 좌련의 기관지 ≪북 두≫의 편집인이자 공산당 계열의 중진작가인 딩링의 지지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초기 작품인 ≪만보산≫의 경우 작가 본인의 고유한 성향과 더불 어 딩링의 문학관이 함께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本文通过李辉英的长篇小说≪万宝山≫力图证明历史的事实和文学的真实关 系。出生在吉林的李辉英,‘九․一八’之前,已在上海公学读书,而由1932年‘上 海事变’爆发,不得不辍学,从而以笔武器开始揭露日帝在东北的野蛮侵略和故乡 同胞的苦难遭遇。1932年1月,李辉英第一篇抗日题材短篇小说≪最后一课≫, 在丁玲主编的左联杂志≪北斗≫上发表。≪最后一课≫发表后,丁玲又约李辉 英写一部以东北抗日斗争为背景的长篇小说。他便以“万宝山事件”为素材,创 作了长篇小说≪万宝山≫。万宝山事件是于1931年7月在吉林省长春市郊区发生 的一次重大国际冲突事件。长农稻田公司经理郝永德未经当地中国政府批准, 将万宝山一带土地转租给朝鲜农民,从而造成中国农民同朝鲜农民之间争水夺 地的纠纷。这次纠纷既是日本帝国主义移民政策的直接后果,又是他们寻机制 造侵华口实的重要步骤。长篇小说≪万宝山≫描写了日本驻长春领事田代、警 部中川收买汉奸郝永德,成立“长农稻田公司”,勾结长春县地方官吏,借开水 田之名,侵占万宝山官荒田,引起农民的坚决反抗。日本警察以此为借口,制 造了“万宝山事件”。作品较为成功地塑造了汉奸郝永德及为抗日而团结的韩中农 民形象。真实地反映了万宝山这一历史事件的真实,揭露了日本帝国主义的暴 行和侵略野心。

4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이상경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85-11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연구는 1931년 중국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 개간을 둘러싸고 중국인과 조선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이 빌미가 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발생한 중 국인 배척 폭동인 ‘배화 사건’의 의미를 당시의 민족주의 담론의 전개 과정 과 관련지어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이를 위해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가 벌인 민족주의 담론 경쟁이 만보산 지역 사건 보도에 미친 영향과 당시 평양에서 ‘배화 사건’ 을 경험한 오기영과 김동인의 수기에서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을 분석하였다. 먼저 만보산 지역에서의 수전 개간을 둘러싸고 중국인 농민과 조선인 농 민이 갈등한 ‘만보산 지역 사건’과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중국인 배척 폭 동인 ‘배화 사건’은 따로 떼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둘째 ‘배화 사건’의 빌 미를 제공한 조선일보 의 오보는 그전부터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가 벌 여온 민족주의 담론 경쟁에서 야기된 것이다.셋째 사회주의에 대한 대타의 식으로 더 강화된 담론 경쟁에서 가지게 된 조선일보 의 조급성이 오보를 낳은 결정적인 원인이다.넷째 ‘배화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은 매우 소 략하고 그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사건 직후 씌어진 오 기영의 수기는 반성적인 민족주의자의 입장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늦게 나 온 김동인의 수기는 오히려 사건 당시의 민족의식의 ‘오용’을 그대로 노출 하고 있다.그 결과 ‘배화 사건’은 민족의식의 오용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 었고 식민주의자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보도 통제와 의식적 외면 속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5

「万宝山」, 농민문학과 개척문학

유수정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117-146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논문에서는 만보산 사건 관련 언설 중 일본문단에서 생산된 소설을 고찰 대상으로 한다.그 대표적인 문학작품에는 이토 에이노스케(伊藤永之 介)의 단편소설「만보산(万宝山)」(1931.10)과 장혁주(張赫宙)의 장편소설 개간 (開墾) (1943.4)이 있다.만보산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일본어소설 「만보산」과 개 간 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하나는 농민문학,또 다른 하나 는 개척문학으로 분류된다.작가가 어떠한 동기로,무엇을 목표로 하여 ‘사 건’(사실)을 재해석하고 서사하였는지,그리고 무엇보다 그 근저에 깔린 이 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만보산 사건을 형상화하는 문학적 담론들을 이해하고 ‘사건’과 표상을 읽어내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만보산 사건이 일본 문학에서 어떻게 서사되는지를 고찰 하기 위해 먼저 만보산 사건이 일본에 보도된 몇 가지 예를 신문잡지 기사 를 통해 살펴보고,「만보산」과 개간 의 작가들이 어떠한 행보를 거쳐 어떠 한 문단적 상황 하에서 각각의 작품을 창작하였고 어떻게 서사하였는지를 확인하여 작가가 어떠한 동기로,무엇을 목표로 하여 ‘사건’을 재해석하고 서술하였는지,그리고 근저에 깔린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하 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 단체들의 전성기에 단체 중앙위원회의 지도에 따라 식 민지문제를 다루면서 일본과 조선 농민들의 연대를 지향하면서도 후쿠모토 식의 계몽적 계급의식이 아니라 농민들에 의한 농민들의 문학을 이상으로 했던 이토 에이노스케는 이중으로 고통 받는 만주의 조선인들을 일본제국 주의 고발을 통해 그려냈다. 식민지 출신으로 일본 중앙문단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주목 받던 장혁주는 조선인으로서 자신이,그리고 자신의 민족이 제국 안에서 자리매 김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였고,이를 만주를 통해 그리려 하였다. 그러한 모색을 통해 획득된 장혁주의 시선이 이토 에이노스케가 ‘만보산 사 건’을 바라 보는 그것보다 더 제국적인 것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굴절된 것이지만,이 역시도 역사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本論は、万宝山事件に関連した言説の中でも、日本文壇で生産された小説、伊藤永之介「万宝山 」(1931.10)と張赫宙 開墾 (1943.4)を研究対象とす る。「万宝山」と 開墾 は同じ題材を扱ったテクストでありながらも、一方 は農民文学、もう一方は開拓文学として分類されている。それぞれの作家 はどのようなきっかけで、何を目的として「事件」を再解釈し、叙事したの か、そして、その根底にあるイデオロギーは何かを明らかにすること が、万宝山事件を形象化する文学的言説を理解し、「事件」と表象を読み取 る重要な基準になるであろう。 本論では、万宝山事件が日本文学でどのように語られたかを考察するに 当たって、まず、万宝山事件が日本に報道された例をいくつかの新聞記事 を通じて確認し、それから、「万宝山」と 開墾 の作家は、それぞれどのよ うな道を歩んで、またどのような文壇的な状況の下でそれぞれの作品を創 作し、どのように語ったかを確認することで、これらの作品がもつ日本文学史における位置と 意味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目的とした。  プロレタリア文学団体の全盛期に中央委員会の指導の下、植民地問題に 着目し、日本農民と朝鮮農民の連帯を目指しながらも、福本式の啓蒙的階級 意識ではなく、農民の農民による文学を理想としていた伊藤永之介は、二 重三重の圧迫に苦しむ在満朝鮮人たちを日本の帝国主義を暴くことで描き 出した。 一方、植民地出身として日本の中央文壇で「朝鮮人」という理由から注目 されていた張赫宙は、朝鮮人としての自分自身が、また自分の民族が、帝国の中で処すべき位 置を探し求めた結果、それを「満洲」を通じて描こうと したのである。そのような努力によって獲得された張赫宙の「万宝山事件」を見つめる視線が、 伊藤永之介のそれより「帝国的」であったということ は、屈折されたアイロニーでもあり、歴史の産物でもあるだろう。

연구논문

6

풍류황제 송 휘종은 어디에 묻혀있는가?

김관웅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149-177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송사』ㆍ『금사』 등 중국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정강지변’이후 북송의 휘종과 흠종 이 두 부자 황제는 금나라에 의해 중국 동북지역의 오국성에 포로로 끌려와서 감금되었다고 한다.1135년 휘종은 54세를 일기로 오국성 에서 죽은 뒤 금나라 희종은 송 휘종을 지금의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부근에 매장했다고 한다.1142년,송과 금의 협의에 좇아 휘종의 유골은 임안으로 반환되었고 송 고종은 그 유골을 소흥근교의 영우릉에 매장했다고 한다.흠 종은 1156년 연경에서 57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는데,금나라에서는 그의 시 신을 지금의 하남성 공현에 매장했다고 한다.그러나 천년 가까운 세월 속 에서 오국성과 휘종․흠종의 매장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여 통일되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여 이는 천고의 미스터리로 되었다. 본 논문은 문헌고증학의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주로 조선 및 중국의 역사 문헌들을 통하여 오국성의 지리적 위치와 휘종ㆎ흠종의 매장지에 대해 비 교적 상세한 고증을 진행함으로써 초보적으로 오국성은 지금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운두산성이 고, 휘종ㆍ흠종의 매장지는 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회 녕이라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据≪宋史≫、≪金史≫等中国正史的记载,“靖康之变”后, 北宋徽宗、钦宗这两位父子皇帝被捕,作 为俘虏押解到位于中国东北方的五国城。1135年,徽宗 死于五国城,享年54岁。金熙宗将他葬于今河南省洛阳市附近。1142年,宋金根 据协议,将宋徽宗遗骸运回临安,由宋高宗葬之于永佑陵。1156年,钦宗在燕京 病死,终年57岁,金朝将其葬于今河南省巩县。然而,近千年以来,围绕着五国城 的地理位置以及徽宗、钦宗的葬地,众说纷纭,莫衷一是,成为千古疑案。 本论文采用文献考证学的研究方法,主要援用朝鲜朝时期的历史文献以及中国 宋金元时期的历史文献,对五国城的地理位置以及徽宗、钦宗的葬地进行了较为 详尽的考证, 初步提出了“五国城为今朝鲜咸镜北道会宁云头山城”、“徽宗、钦 宗的葬地为今朝鲜咸镜北道会宁”的假说。

7

鄕通事 河世國과 조선의 선택 -16~17세기 한 女眞語 통역관의 삶과 죽음-

계승범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17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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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建州女眞을 통합하여 만주 일대에 서 독자적 세력을 굳힌 누르하치는 전쟁이 끝나자 본격적인 정복사업을 전 개하여 만주 전역을 평정하고,1616년 정초에 마침내 후금을 건국함으로써 소위 ‘명질서’에서 완전히 이탈했다.뿐만 아니라,1618년의 요동 침공을 시 작으로 중원 정복의 첫걸음을 디뎠다.이에,조선의 코앞에서 벌어진 명과 후금의 무력 충돌은 4반세기 넘게 지속되었고,지정학적으로 명과 후금 사 이에 놓인 조선은 외교 문제로 고심하였다.그런데 이렇게 중차대한 시점에 서 조선의 대후금 외교를 사실상 전담한 핵심 인물은 조정의 고위 관리가아 니라 灣浦출신의 하층민으로 鄕通事란 직책을 맡고 있던 河世國(1575 ~1622)이라는 자였다.그는 거의 25년 동안 만포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교섭의 한복판에 있었으며,특별한 외교 임무를 띠고 누루하치를 여러 차례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이렇듯 조선을 대표해 누르하치와의 외교 실무를 전담하다시피 한 하세국 은 1622년에 후금에 머물던 중 후금 지도부에 의해 그만 처형됨으로써,이국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이 논문에서는 향통 사 하세국을 중심인물로 삼아 미시사的접근을 시도하되,그를 통해 17세기 전반 동아시아 질서의 격변 과정에서 조선이 처해 있던 위상과 조선의 선택 이 갖는 ‘東亞史’的의미를 거시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8

17세기 초 만주 일대에서 후금과 명,그리고 조선이 군사적으로 충돌했 다.이때 강홍립의 군대가 명나라 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후금에 투항한 소위 ‘심하(沈河)의 원정’이 일어났다.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속 에서 백성들은 전란의 고통과 이산의 슬픔을 처절히 맛보았고,그러한 체험 담이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났다.그 대표적인 작품이 「최척전(崔陟傳)」․「강로전(姜虜傳)」․「김영철전(金英哲傳)」 등이다.본고에서는 이 세 작품에 담긴 전란 서사 속 고통과 분노의 시선을 의도성 문제로 접근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17세기 전쟁 소재 역사소설에 나타난 기억과 망각의 존재양상 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살펴보았다.즉,(가)서사에서 의도적으로 기억해낸 역사(체험담/이념적 변형),(나)서사에서 의도적으로 망각시킨 역사(시 대․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다)서사에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억된 역 사(리얼리티 획득을 통한 자료의 간접적 복원),(라)서사에서 의도하지 않았 지만 망각된 역사(상상․서사적 독법이 요구되는 사건․사실)등으로 대별 해 작품에 투영한 서사의 진실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이 중 의도하지 않았 지만 기억되거나(다)망각된(라)역사와 리얼리티는 작품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 창출이 가능한 것으로 새로운 독법을 요한다고 보았다.그리고 서사 속 의도된 기억과 망각의 주체는 개인적,또는 집단적일 수 있지만,비의도 적 요소는 작가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독자의 소관이라 보았다.이는 분 명 역사가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고 재구성하는 시각과는 다른 접근 방식 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후대에 특정 사회가,작가와 독자가,그 전란을 기억해 내고 싶어하거나 망각하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의 의미와 이미지를 결정 짓고 그것에 따라 서사라는 겉모습을 만들어 내면,그것이 결국 하나의 실 체요 진실인 양 바뀌기 쉽다.이러한 사고(의식)의 균열 지점이 이전과 현저 히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7세기였고,특별히 명․청 교체기에 만주를 중심으로 한 ‘심하의 원정’과 포로 생활기를 다룬 전쟁 소재 역사소 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보았다.

9

만주 주재 선교사 존 로스(JohnRoss)의 의화단운동 이해

박형신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24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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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UnitedPresbyterianChurch)해외선교 부로부터 파송되어 만주주재 개신교 선교사로 활동해온 존 로스 (JohnRoss, 1842~1915)는 의화단운동을 경험한 후 수 차례의 발표와 저술을 통하여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1899년에 산동과 직예에 서 시작된 의화단운동은 다음 해에 만주지역에까지 전파되었으며 청나라에 대한 지지와 외세의 배격을 의미하는 ‘보국멸양(保國滅洋)’등의 구호를 내 걸었다.의화단은 동삼성(東三省)이라 불리는 봉천성(奉天省),길림성(吉林 省),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무술훈련의 예비단계를 거쳐 6월과 7월에는 집 중적으로 기독교 관련 건물들을 방화하고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교인을 살해하였으며,외세와 제국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철로 등을 공격하였다. 로스는,절제운동을 표방하던 재리교(在理敎)가 의화단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규모의 단원들에 의한 열광적이고 파괴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음을 강조하였다.또한, 만주지역의 성경부도통(盛京副都統)진창(晋昌)을 비롯 한 만주족 고위관료들과 군대는 북경의 중앙정부와의 연계 아래 의화단의 활동들에 직접적으로 협력하였음을 말하였다.중국에서 약 28년간 선교활동 을 해온 로스는 19세기 말엽에 활발하게 분출되는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공감하면서,의화단운동의 본질을 반외세 및 반제국주의적운동이라 고 파악하였다.1897년에 일어난 조주교안(曹州敎案)을 구실로 교주만(膠州 灣)을 장악한 후 산동에 진출하여 영토의 조차를 강행한 독일의 제국주의야 말로 의화단운동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보았다.또한,의화단운동이 보여 준 외국물품과 외국인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징벌은 이 운동의 반외세적, 반제국주의적 본질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보았다.마지막으로,로스는 의 화단운동이 반기독교(反基督敎)운동이었는지의 여부를 논하였다.그는 가톨 릭교회의,교회와 정치를 연계하는 정책에서 비롯된 사제들의 관리행세와 재판에의 불법적 관여가 기독교 측의 의화단운동에 대한 중요한 책임소재 라고 보았고,일부 개신교 선교사들의 거만한 태도 역시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결론적으로,로스는 의화단운동이 ‘기독교선교와의 전쟁’(a missionarywar)이 아니라,제국주의자들과의 일종의 ‘문화적 전쟁’(acultural war)이었으며,따라서 그 본질은 반기독교운동이 아니라 반외세 및 반제국 주의운동이라고 보았다.종합적으로 평가해볼 때,존 로스의 만주 의화단운 동에 대한 연구는 재리교와 만주족 관료층의 의화단운동에서의 역할에 대 한 관심을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다.또한 중국에서의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대한 선교사들의 입장을 엿보게 한다.무엇보다도,의화단운동과 관 련한 전통적,사회주의적 역사서술인 기독교의 제국주의 첨병론에 대하여 진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비평논문

10

<황해>, 혹은 만주 이미지의 역전

한석정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281-289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자료소개

11

三田渡 大淸皇帝功德碑의 硏究 -滿漢文 對譯을 中心으로-

宋康鎬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1집 2011.06 pp.293-35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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